⊙ “이승만을 비난하고 왜곡하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이 영화의 주 타깃”
⊙ 박스오피스 3위… 네이버·다음에서는 이승만 얼굴 담긴 영화 포스터 한동안 게시 안 해
⊙ “이승만의 뉴욕 퍼레이드 동영상 발견했을 땐 스태프들과 펑펑 울어”
⊙ 박근혜 탄핵 보면서 親北 세력의 선동 느끼고 〈김일성의 아이들〉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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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조선DB
지난 2월 1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개봉했다. 〈건국전쟁〉이다. 좌파가 장악한 영화판에서, 이런 작품을 만든다는 건 그 자체로 온갖 불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생계가 끊어질 수도 있다. 그런데 김덕영(金德榮·58) 감독은 왜 이 일에 발 벗고 나선 것일까? 이 영화를 만들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
“2020년에 16년 걸려 만든 〈김일성의 아이들〉이란 작품을 개봉했죠. 그런데 후시 작업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한 가지 잔상처럼 남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 뭡니까.
“그 작품은 말 그대로 북한에 관한 역사와 기록 필름을 발굴하고 사건들을 추적하면서 만든 영화 아닙니까? 그런데 북한 내부를 촬영한 영상 중에 ‘이승만 괴뢰도당을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자주 보였습니다.”
― 어디에서 나온 구호입니까?
“북한 전역의 거리에 걸려 있는 겁니다. 문제는 6·25 당시만이 아니고 그 이후로도 쭉 걸려 있었다는 거죠. 〈건국전쟁〉에 출연한 한 목사님께서 1995년에 북한을 방문하셨는데 그때까지도 내걸린 걸 직접 목격하셨다고 그러더군요.”
1995년이라면 휴전협정 이후 42년이 지난 시점이다. 이 시대착오적이며 끈질기고 집요한 공세의 비밀은 뭘까?
“모두 다 아시는 것처럼, 이승만 정권은 1960년도에 막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북한은 거의 뭐 40년이 지나도록 ‘이승만 괴뢰도당’이라는 구호를 중요한 대남(對南) 선전전략으로 쓰고 있다는 뜻이죠. 그들이 이승만의 역사적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한 비난과 온갖 중상모략을 끊임없이 자행해왔다는 증거입니다.”
‘이승만의 삶을 기록한 항해일지’
북한은 지금도 대한민국을 ‘괴뢰’라고 부른다. 2023년 9월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축구 8강전, 《로동신문》은 “괴뢰팀에게 4대1로 승리했다”라고 썼다. 조선중앙TV 화면에도 대한민국을 ‘괴뢰’라고 표기했다.
“북한이 상투적으로 쓰는 말이 ‘괴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이승만을 그렇게 비하하는 거죠. 근데 ‘괴뢰’라는 말이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꼭두각시’ 아닙니까? 그러니까 정체성도 없고 주체성도 없고 말 그대로 그냥 미국에 빌붙어서 사는, 그냥 제국주의자들 손아귀에 놀아나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것이 북한의 시각이거든요. 〈김일성의 아이들〉을 작업하면서 이와 유사한 자료들, 말하자면 이승만 정권을 비난하고 왜곡하는 자료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런 현상이 왜 아직까지도 계속되는가?’가 고민의 출발점이었다. 그래서 2021년도에 〈김일성의 아이들〉 다음 작품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던 중 화두(話頭)가 떠올랐다. ‘북한이 왜 이렇게 장구한 세월 동안 이승만을 물고 늘어지나?’ 그래서 그때부터 저널리스트로서 흥미를 갖고 이승만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 어떻게 취재했습니까.
“일단 ‘이승만’이 들어가는 책은 거의 다 봤고, 당대의 신문 기사도 읽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본질을 깨닫게 된 거죠.”
― 직접 수많은 책을 보고 나서 평가하기에 이승만은 어떤 인물입니까.
“애국자(愛國者). 평생을 대한독립(大韓獨立)을 위해서 살았고 또 대한민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애국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이후는 익숙했다. 직접 겪었으니까. 그래서 그 시절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데,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는 그 전까지 별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왜 북이 이승만을 이토록 증오하는가, 역으로 이승만이라는 존재야말로 북한의 약점을 드러내는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승만의 삶을 기록한 항해일지(航海日誌)를 영상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이승만의 3대 업적
― 이승만 생애에서 이 점만큼은 특별히 기록해 남기고 싶었던 부분이 있다면요?
“삶 자체가 방대하고 거대한 생애니까 딱 한 가지만 얘기할 수는 없죠. 제가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다뤘던 부분은 세 가지입니다. 물론 다른 것도 다 중요하지만요.”
― 어떤 부분입니까.
“가장 역점을 뒀던 부분은 토지개혁, 그리고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겁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도 중요하죠. 대한민국의 안정과 번영의 토대가 되었으니까요.”
― 이번 영화에는 건국 이전의 청년 이승만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나요.
“위대한 정치가나 위인을 다룰 때는 보통 연대기(年代記)적인 기법을 씁니다. 언제 태어났고 청년기를 어떻게 보냈고 30·40대엔 어디 가서 무엇을 했고,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거죠.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이런 구조를 탈피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고민한 대목이죠. 제목도 한 10번 이상 바꿨습니다. 시나리오도 탈고한 원고를 세 번이나 완전히 갈아엎었습니다.”
― 왜 연대기적 서술로 가지 않은 겁니까.
“연대기적으로 가면 이분의 삶을 디테일하게 정리할 수 있지만, 몇 가지 단점도 있습니다. 그게 뭐냐? 첫 번째는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분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 두 번째는요.
“다큐멘터리는 액션이 가미된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100분을 넘어가면 지루합니다. 관객이 힘들어요. 그런 점을 감안했을 때 과연 연대기적인 구성이 적당할까 이런 고민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 이렇게 갔다가는 관객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겠다고 생각해 전략을 바꿨죠.”
‘이거 하면 너 생매장당한다’
근본적인 고민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승만에게 덧씌워진 거짓 정보와 대중의 그릇된 인식이 영화의 제작을 가로막는 거대한 적(敵)이었다.
“지금은 이승만에 대한 개념과 인식이 많이 바뀌어 있는 상태지만, 제가 2021년도에 처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다들 말렸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거 하면 너 생매장당한다. 어떻게 감당할래? 제작비는 뭐 집 팔아서 댈 거야?’라고 했죠. 온갖 부정적인 인식들이 가득했습니다.”
―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졌습니까.
“제가 느끼기에는 불과 지난 3년 사이에 이승만이라는 존재에 대해 대한민국 사회에서 굉장히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흐름에 힘을 보태고 싶었습니다. 제 작품이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는 극장에 걸려서 대중과 만나야 생명력을 얻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재미가 있어야죠. 재미가 있으려면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의 틀을 다 벗어버리고, 이승만을 비하하고 비난하고 왜곡하는 사례를 중심으로 시나리오를 재구성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시간이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왔다가 하는 이유입니다.”
말하자면, 이슈를 중심으로 논쟁을 펼친 것이다. 이런 기법에 관객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사실 조금 걱정은 했죠. 개봉 전에 14번 시사회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회당 200명에서 300명 정도로 계산하면 대략 3000명 정도 보신 셈인데, ‘영화가 어렵다’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어요. ‘스토리텔링으로 이승만을 풀어간 것이 제 영화의 차별화된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대중에게 먹히고 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박근혜 탄핵이 준 충격
― 영화를 만들면서 개인적으로 협박이나 위해를 당한 적은 없습니까.
“이번엔 없었지만 〈김일성의 아이들〉 때는 해킹이라든가, 작업을 방해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죠.”
〈김일성의 아이들〉은 김덕영 감독의 첫 영화다. 김 감독은 서강대 철학과를 나와 KBS 객원 PD로 일했다. 〈일요 스페셜〉 등 다큐멘터리를 주로 만들었다. 히딩크 감독을 입국 때부터 밀착 취재한 히딩크 특집,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정리해고 합법화 사례를 다룬 〈현대 자동차 사태〉 등이 그의 작품이다. 울산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며 8개월 동안 찍었다. 〈제일은행 매각〉 편도 그의 손을 거쳤다. 객원 PD였지만, 그에게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주는 일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조직의 안정성’을 박차고 나와 〈김일성의 아이들〉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걸까?
“2016년에서 2017년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정말 비극적이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사건이 있었죠. 박근혜(朴槿惠) 대통령 탄핵 사건입니다. 제가 그때 광화문 근처에서 살아서 촛불 시위를 현장에서 매일같이 봤어요. 정신이 번쩍 들었죠. 대한민국의 원칙과 상식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대통령을 탄핵할 만큼 솔직히 큰 범죄나 잘못이 있었나요? 그런데 저는 이미 2016년 초부터 이상징후(異狀徵候)를 느꼈습니다. 현장에서 보니까 ‘야, 이거는 어떤 친북(親北) 세력들이 북한과 결탁을 해서 뭔가 이런 사건들을 만들어내고 있구나,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 그렇게 느낀 결정적인 계기가 있습니까.
“박근혜 대통령 인형을 만들어 그 목을 잘라서 효시(梟示)하고, 죽창에 꽂아서…. 뭐 어떻게 표현도 못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불태우기도 했죠. 시위 방식이 너무 잔인했습니다. 이전에 대한민국에서 그런 시위가 있었나요? 없었어요. 그래서 ‘이건 아주 극단적인 반(反)국가 세력이 대한민국 국민을 선동하고 있구나’라고 봤습니다. 또 하나, 그때 나왔던 구호들도 원색적이었어요. 민주화 세력이라면 비(非)윤리적이어서 외칠 수 없는 내용이었죠. 제가 외부의 개입이 있다고 느낀 이유입니다.”
〈김일성의 아이들〉
시위의 배후를 취재할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이를 통해 각성을 하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그동안 개인의 일상적 안락함만을 추구하면서 살았는데, ‘나라가 이렇게 망가져 버리면,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 나라는 도대체 뭐가 되는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의 아이들〉을 만들었습니다. 제 자식들에게 이렇게 잘못된 나라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전달하고 싶었어요.”
〈김일성의 아이들〉은 6·25 후 북한에 의해 동구권(東歐圈)으로 보내진 후 몇 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던 전쟁고아들의 이야기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2004년 〈수요 기획〉이라는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을 당시 제보를 받았다. 북한 국적 남편을 기다리는 한 루마니아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할머니는 1958년 남편과 함께 북한에 들어가 평양에서 살았고, 1년여 후 ‘외국인과의 결혼 금지’ 정책에 따라 강제 이혼당한 후 루마니아로 돌아왔다.
“처음엔 국경을 초월한 러브스토리로 접근했죠. 그런데 그분이 이런 말씀을 했어요. ‘전쟁 끝나고 북한 애들이 여기 왔다. 그리고 길게는 7년에서 8년까지도 여기서 살다 갔다. 갈 때는 강제적으로 송환이 됐다. 북한 국적 남자는 인솔 교사였다.’”
9박 10일 일정으로 〈수요 기획〉 촬영을 마치고 루마니아를 떠나던 날, 할머니가 갑자기 말했다.
“그런데 애들은 루마니아에만 살았던 것이 아니야. 아이들은 루마니아,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몽골로도 갔어.”
김 감독은 “순간 좀 멍해졌다”고 말했다.
“단순히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1950년대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배경이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국해 방송 끝난 다음부터 바로 취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1956년부터 김일성의 명령으로 송환되기 시작한다. 총인원은 5000~1만 명 정도였다.
집 팔아서 만든 영화
앞에서 〈건국전쟁〉 제작비를 ‘집 팔아서 댈래?’라며 말린 사람이 있었다고 썼다. 정확한 문장이 아니다. “‘또’ 집 팔아서 댈래?”가 정확한 문장이다. 〈김일성의 아이들〉을 만드느라 김덕영 감독은 실제로 집을 팔았다.
“사명감은 차오르는데 아무도 돈 대겠다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이 작품이 왜 제작 기간이 길어졌느냐. 일단 첫 번째는 로케이션이 전부 동유럽입니다. ‘북한 전쟁고아’에 대한 정보도 없어서 일일이 자료를 찾아야 했습니다. 어디를 가서 누구를 인터뷰하고 어디 가면 뭐가 있다는 정보 자체가 없었어요. 2019년에 크랭크인할 때 딱 5개의 전화번호가 있었습니다.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에서 한국말하는 통역사.”
집을 팔자고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아내가 고맙게도 선뜻 동의해줬다. 아내는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될 수도 있다”며 격려도 했다.
“확신은 제 아내가 저보다 더 강했어요. 저는 가장이라, 정말 영화를 완성할 수 있을지 아니면 돈만 날리고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걱정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아내는 한번 꼭 해보자고 그러더군요.”
영화는 예상대로 난항을 거듭했다. 체력, 정신력, 경제력 등이 한계에 부딪혀 포기하려 할 즈음 기적이 찾아왔다.
“2019년 겨울이었어요. 촬영팀을 꾸려가면 경비가 상승하니까, 제가 메인 PD, 제 집사람이 보조 촬영으로 둘이서 동유럽을 다녔죠. 돈은 떨어져 가고 완성에 대한 기약도 없고, 완성한다 해도 이 작품을 과연 공개할 수 있을까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한데 부쿠레슈티 오페라하우스 근처에 2만원짜리 방을 잡고 저녁 먹으러 나왔는데, 갑자기 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말을 거는 겁니다. 그러고는 영어로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나한테 뭐라고 얘기할까요?’라는 거예요.
황당했죠. 제가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하니까 갑자기 이 사람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라고요. 그러고는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기적 같은 만남
한 여성이 어떤 조그마한 아이를 돌봐주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진 속의 주인공이 나다. 그리고 옆에 계신 여성이 내 어머니다. 어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 살아생전 소원이 ‘죽기 전에 친구 한 번 꼭 만났으면 좋겠다’였다. 그 친구는 북한 사람이다.”
김덕영 감독은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정말 멍한 상태에서 얘기 듣다가 그 남자한테 말했습니다. ‘당신이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렇게 찾고 있었던 북한 전쟁고아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지금 동유럽에 와 있다.’”
― 뭐라던가요.
“깜짝 놀라더군요. ‘야,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나.’
길거리에서는 많은 대화를 못 나누고 서로 이메일과 페이스북 정도만 교환하고 헤어졌죠. 밥을 먹는데 밥이 제대로 들어가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고…. 식사를 마치고 들어왔더니, 그 루마니아 남자도 저하고 똑같은 심정이었던지 메일을 보냈더군요.”
―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원래 그 횡단보도는 내가 다니던 길도 아니다. 오늘은 이상하게 한 정거장을 더 걸어서 버스를 타고 싶었다. 그런데 당신을 만났다.’
그러면서 밑에 이렇게 써놨더라고요. ‘당신의 여정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당신과의 만남은 신(神)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에게 깨닫게 해줬다.’
다 읽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돈은 떨어지지, 육체적으로는 피곤하지, 심리적으로 붕괴돼 ‘이 프로젝트를 접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자료도, 영상도 안 나오는데’ 이렇게 좌절 직전까지 갔던 상황인데 그 남자가 보낸 메시지를 딱 보는 순간….”
한국전 참전용사와 만나다
― 하늘이 그분을 통해 음성을 직접 배달해준 듯한 그런 느낌이었겠네요.
“‘여전히 힘들겠지만, 몇 걸음만 더 나가보자. 그래, 포기하지 말고 더 가보자. 분명히 이 길이 옳은 길이니까 좋은 일이 있을 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힘을 내고 계속 취재를 했죠. 그랬더니, 결국에는 곳곳에서 자료들이 나오고 증언자들이 나오고 결국은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 이번 이승만 대통령 다큐멘터리와 관련해서는 그런 극적인 순간이 없었습니까.
“여러 번 있었어요. 2023년 1월이었는데, 이때도 영화를 완성할 수 있을지 100% 확신이 있는 상태는 아니었죠. 정말 추운 날이었는데, 워싱턴 D.C.에서 한국전쟁 기념비를 취재하고 있었어요. 카메라로 전경을 촬영하고 있는데 나이 든 구부정한 할아버지 한 분이 오시는 겁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셨어요, 86세. 증언을 들었죠. 사실 그런 분은 제가 섭외를 해서 모셔오기도 쉽지 않아요. 다들 고령(高齡)이시기도 하고. 그런데 그날 그 자리에 나타나신 겁니다. 신기한 체험이었어요. 이번 영화에 그분 인터뷰도 들어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휴전 후 미국을 찾은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이 그려진다.
“1954년 8월 2일 이승만 대통령이 뉴욕에서 퍼레이드를 합니다. 외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이에요.”
― 위에서 꽃가루 쏟아지고 하는 영상이 국내에는 없었나요.
“사진은 있어요. 그래서 사진을 들고 이승만 전문가라고 하는 분들을 다 찾아다녔죠. 이분들이 말씀하시는 게 사진은 본 적이 있는데, 영상은 본 적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찾아봤더니, 이게 없더라고요.
관련 영상은 2012년도인가 KBS에서 이승만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하나 있었어요. 거기에 살짝 나옵니다. 네 커트 영상이 나오는데 앵글이 달라요. 사진을 보면 알지만, 그때 카메라가 수십 대가 돌아갔습니다. 엄청난 행사였으니까요. 그러니까 기록 필름이 하나만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근데 KBS에서도 2012년도에 방송한 거는 아주 드라이합니다.”
“스태프들이 펑펑 울었다”
― 무슨 말인가요.
“차에 탄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 그다음에 풀샷 이 정도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이번에 저희가 찾은 앵글은 뭐가 다르냐? 언급하셨던 것처럼 하늘에서 꽃가루가 쏟아지고 그다음에 이승만 대통령이 모자를 썼다 벗으며 시민들한테 화답하고, 우리 대통령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죠. 이런 장면은 옛날 필름에 없는 겁니다. 이 장면의 상당 부분이 70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 영화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미(美) 상하 양원 합동 연설 영상도 나옵니다.
“그것도 깨끗한 원본을 이번에 찾았습니다, 오디오까지.”
― 그런 자료들을 찾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6개월 정도 걸렸어요. 미국 국립문서보관청만 다섯 번을 방문했어요. 갈 때마다 정보를 입수해 범위를 점점 좁혀나가다 마침내 녹슨 릴테이프를 발견했습니다. 6·25 때 헤어진 가족을 상봉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다 울었죠.”
― 그게 그렇게 중요했나요.
“저희 영화에서 이 영상이 없으면 하이라이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찾아야 하는 자료였어요. 저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기자와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차이가 있어요. 가장 큰 차이는 시각적인 정보를 찾지 못하면 우리는 완성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영상이었습니다.”
― 처음 퍼레이드 영상을 봤을 때 느낌은 어땠습니까.
“가슴 벅찼죠. 그 안에 영사실이 따로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볼 수 있는 좀 작은 방. 제가 직접 필름을 감아서 영사기 돌리고, 삭~삭~ 옛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데, 저희 스태프들이 다 같이 울었습니다. 영상 찾고 울고, 보면서 또 울고…. 우리 대통령이 수많은 인파, 미국 사람의 환영을 받으면서 꽃가루 속을 행진하는 영상을 보면서 우리 스태프들이 다들 펑펑 울었어요.”
― 그걸 찍어놨으면 그것도 다큐멘터리가 됐겠네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죠. 워낙 정신도 없고, 그다음에 정해진 시간 안에 빨리 복사를 해서 나와야 하니까.”
이승만-트루먼의 만남 담은 동영상도 발굴
희귀한 영상은 이것 말고도 많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주리주 트루먼 대통령 자택으로 찾아가 만나는 장면. 두 거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다. 두 분은 2023년 7월 다부동 전적지에 동상이 들어섬으로써 69년 만에 동상(銅像)으로 재회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 덜레스 국무부 장관을 만나는 영상도 이번에 발굴해 영화에 넣었다. 귀로(歸路)에 하와이에 들러 교민들에게 환영받는 장면, 펜실베이니아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모여 자국 대통령에게 하듯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깍듯하게 열병식을 하는 장면도 감동적이다.
“열병식 후 이 대통령은 큰 강당 같은 곳에 들어가서 연설합니다. 유창한 영어로, ‘한국전쟁 때 도와줘서 고맙다. 자유우방인 미국에 큰 신세를 졌다. 우리가 이 신세를 갚는 길은 자유의 깃발을 높이 드는 것이다.’ 이 말을 하니까 미국 사람들이 일어서서 환호하고 박수 치고 난리가 납니다.”
― 의회 연설도 33번인가 기립박수를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걸 다 쓸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일 인상적인 장면 한 구절만 딱 땄습니다.
‘나는 이 기회에 미국 군인의 어머니들에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깊은 감사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미국 육·해·공군 및 해병대에서 복무하는 자식을, 남편을, 그리고 형제를 우리가 가장 암담한 처지에 놓여 있던 시기에 한국으로 보내준 데 대하여 감사하는 바입니다. 한미 양국 군인들의 영혼이 우리나라의 계곡이나 산중에서 하나님 앞으로 함께 올라갔다 함을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가 그들의 유로(遺勞)를 애중(愛重)히 여기듯이 전능의 신이 그들을 애중하여주시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자유의 투사’ 이승만
그때는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이던 시절이다. 그리고 나라 예산의 절반 이상을 미국 원조로 꾸려가던 때다. 그런 처지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이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는 거꾸로 미국 사람들이 오히려 놀랐을 것 같아요. 당시 아이젠하워의 선거 공약이 조속한 시일 내에 미군 철수였잖습니까? ‘미국 입장에서는 그냥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어정쩡한 대립 상태로 휴전하는 것이 전략적인 목표가 아니었나’, 저는 그런 생각도 좀 들더라고요.
그런 상황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自由)와 반공(反共), 이 두 가치를 명확히 한 인물 아닙니까? 어느 기록에 보니까 미국 사람들이 이승만을 ‘자유의 투사(freedom fighter)’라고 불렀더라고요. 그러니까 자유와 반공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이승만이 아이젠하워보다도 더 중요한 인물로 부각이 된 겁니다. 수많은 환영 인파가 퍼레이드에 나온 이유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꽃이요 최고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의 뉴욕 중심가에서 행진한 이 1954년 8월 2일의 동영상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승만이 불편했던 거죠. 그걸 누구라고 말할 순 없지만, 어쨌든 이승만은 대한민국에서 굉장히 뜨거운 감자였고 정권이 탄생할 때마다 이승만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논란이 되었습니다. 국민적인 지지를 얻는 데는 방해 요소라고 생각한 세력도 있었을 겁니다. 어쨌든 대한민국이 소중한 자료를 제대로 보관하지 않고 방치한 것은 사실입니다.”
사라져 버린 포스터
2월 11일 현재 〈건국전쟁〉은 박스 오피스 3위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한 후에도 한동안 영화관에서는 〈건국전쟁〉 포스터가 보이지 않았다. 네이버, 다음 등 포털 사이트의 영화 코너에서도 포스터가 올라오지 않았다.
― 왜 안 나오는 겁니까? 혹시 안 보낸 건 아닙니까.
“진작에 보냈죠. 안 보냈겠습니까? 그건 상식인데, 영화를 마케팅하고 홍보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ABC 중 첫 번째예요. 네이버와 다음에서는 〈건국전쟁〉을 치면 포스터 자리에 빈칸만 나옵니다. 웃기는 거죠. 박스오피스 3위인 영화가 포스터도 없이 상영되고 있는 것은 초유의 사태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혹시 이승만이기 때문일까요? 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진 포스터라서 그런가요? 포스터 심의필증 전부 제출했고, 자원봉사자까지 나서서 자료를 제출했는데 왜 받지를 않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 네이버나 다음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배급사 대표가 제출해야 한다’ ‘감독이 제출해야 한다’. 아니 포스터의 제목과 영진위 심의필증의 제목이 일치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왜 제출하는 사람까지 일치해야 합니까? 네이버와 다음은 그렇게 비정하고 비합리적으로 일하는 곳인지, 다른 영화도 다 이런 기준을 적용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 문제가 논란이 되자 네이버 등에서는 뒤늦게 포스터를 게재했다.
김덕영 감독에 의하면 〈건국전쟁〉은 원래 3월 개봉 예정이었는데, 시기를 한 달 앞당겼다고 한다. “사실 영화는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개봉이 더 어려워요. 제작비보다도 홍보에 돈이 더 들어갑니다.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간판도 붙이고 광고판도 붙이고 그럴 수 있잖아요. 근데 한 달을 앞당긴 이유는 김대중 대통령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 김대중〉 때문입니다.”
― 정면 대결입니까.
“다 아시는 것처럼, 최근 들어 〈서울의 봄〉 〈길 위에 김대중〉 등의 영화들이 계속 나오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것이 4월 총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매번 선거 전에는 이런 영화들이 나왔었죠.
그렇다고 해서 원색적으로 누구를 비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선의(善意)의 경쟁을 해보자는 것이지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과연 어떠한 가치관이 우리에게 지금 올바른 가치관이냐? 역사 인식의 방법은 어떤 것이 중요하냐? 그동안 수많은 정치 지도자가 있었지만, 어떤 사람이 정말 대한민국을 위해 노력했고 애국을 한 사람인가?’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국가 발전의 기본적이고 올바른 전략을 짠 사람은 누구인가를 한번 겨뤄보자’는 뜻도 있습니다.”
― 그래서 백범 김구(金九)도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소위 남북협상, 유엔한국위원회 중화민국 대표 유어만(劉馭萬) 공사의 보고서가 이번 영화에 다 나오죠. 제가 객관적으로 자료를 확보해 대중에게 설명할 수 있는 ‘유어만 보고서’에 보면, 김구는 ‘어차피 군사력에서는 북한이 압도적이고 북한 위주로 통일이 될 텐데 총선은 해서 뭐 하냐’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젊은 관객들이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었다고 했습니다. 흔히 알고 있었던 김구와 완전히 동떨어진 내용이니까요.”
“내 아이들이 부끄럽지 않게…”
― 이렇게 확고한 우익으로 돌아선 계기가 있습니까.
“저는 제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84학번이거든요. 대학교 다닐 때 1987년 6월 항쟁이 있었어요. 그때 민주화운동에 나가서 데모도 하고 그랬죠. 그때 심정이나 지금 이 심정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대한민국이 잘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내 나라 내 아이들이 부끄럽지 않게, 이 나라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왜 평범하게 살다가 갑자기 싸우느냐? 아까 2016년 말씀드렸잖아요. 조용히 평범하게 그냥 글이나 쓰면서 살려고 했는데, 말 그대로 이건 뭐 주사파(主思派)들이 정권을 잡고 완전히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잖습니까? 그런 걸 보자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는 바뀐 게 없어요.”
― 이 영화를 어떤 사람들이 좀 봐줬으면 좋겠습니까.
“저는 이승만을 저주하고 비난하고 왜곡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승만을 모르는 사람들을 주 타깃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이 ‘이승만이 무엇을 잘했느냐’가 아닙니다. 업적이 빠졌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걸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거죠.
반면에 ‘왜 대한민국에서 지난 60~7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이승만 대통령이 이렇게 홀대받고 조리돌림당했나? 왜 이렇게 엄청난 비난과 왜곡과 거짓이 난무했는가?’를 주로 이야기했죠.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자는 것이 목표입니다.”
영화 보고 화해한 모녀
― 성과가 있습니까.
“네. 먹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한테 개인적으로 연락이 오잖아요. ‘고맙다, 잘 봤다’, 이런 식으로요. 특별히 기억하는 문자가 있습니다.”
― 어떤 건가요.
“시사회 때 보고 가신 분인데, 십여 년 넘게 자기 딸하고 가정 불화가 있었다는 거예요. 정치적인 입장이 달라서요. 딸은 좌파, 엄마는 우파. 그래서 매일 사사건건 부딪혔다는 겁니다.
그 어머니가 〈건국전쟁〉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딸한테 약간 거짓말을 한 겁니다. 이승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면 안 갈 테니까 전쟁영화 보러 가자고. 시사회장에서 딸이 생각이 완전히 바뀐 거예요. ‘내가 알고 있었던, 내가 그동안 배웠던 역사와 너무나 다른 역사다.’
그래서 ‘지금은 대화가 되고 새로운 역사 인식을 하는 딸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가정의 평화를 찾아줘서 고맙습니다’가 마무리 문장이었습니다.”
― 누가 역사를 왜곡했을까요.
“이승만을 죽이고 비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자들이 범인 아닐까요? 사실은 제가 어떤 언론 인터뷰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에게는 이 영화가 개인적인 참회록입니다. 586 세대로서 저는 운동을 치열하게 한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데모하고 스크럼 짜고 뭐 이런 것들이 당시 민주화의 열망을 표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때 제가 배웠던 이승만은 살인자·독재자였죠. 그렇게 생각하고 20~30대를 보냈고 50대까지 왔습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이승만이라는 존재를 알게 되고 공부하면서 3~4년을 보냈는데 그때 역사적 견해가 바뀌었습니다.”
“참회하는 심정으로 영화 만들어”
― 공부하는 과정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은 거로군요.
“말 그대로 정말 처참했습니다. ‘대학교까지 나왔는데 대한민국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모를 수 있나. 한 역사적 위인에 대해 이렇게 원색적 비난과 왜곡이 무차별적으로 난무하는데 어떻게 받아들이게 됐나.’
그런데 이런 사람이 저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측면에서, 처절하게 참회하는 심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역사에 대한 자기반성, 한 애국자를 기억하는 일에 대한 자기반성의 과정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방송일을 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저도 잘못된 뭔가를 퍼트리지 않았을까? 내가 잘못한 것을 더 늦기 전에 제대로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이 이 영화를 만든 제 내적인 동기입니다. 그래서 영화 만들면서 많이 울었어요. 너무 미안해서, 너무 죄송해서….”
필자도 이 영화를 봤다. 2월 3일 롯데시네마 도곡점 18시25분 상영분은 매진이어서 23시40분 코엑스 영화관에 걸음 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관객이 제법 있었다. 우연히 후배 변호사도 만났다. 영화가 끝나고 박수가 나왔다. 불이 켜지고 보니 그의 눈가에도 이슬이 촉촉이 맺혀 있었다.⊙
“2020년에 16년 걸려 만든 〈김일성의 아이들〉이란 작품을 개봉했죠. 그런데 후시 작업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한 가지 잔상처럼 남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 뭡니까.
“그 작품은 말 그대로 북한에 관한 역사와 기록 필름을 발굴하고 사건들을 추적하면서 만든 영화 아닙니까? 그런데 북한 내부를 촬영한 영상 중에 ‘이승만 괴뢰도당을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자주 보였습니다.”
― 어디에서 나온 구호입니까?
“북한 전역의 거리에 걸려 있는 겁니다. 문제는 6·25 당시만이 아니고 그 이후로도 쭉 걸려 있었다는 거죠. 〈건국전쟁〉에 출연한 한 목사님께서 1995년에 북한을 방문하셨는데 그때까지도 내걸린 걸 직접 목격하셨다고 그러더군요.”
1995년이라면 휴전협정 이후 42년이 지난 시점이다. 이 시대착오적이며 끈질기고 집요한 공세의 비밀은 뭘까?
“모두 다 아시는 것처럼, 이승만 정권은 1960년도에 막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북한은 거의 뭐 40년이 지나도록 ‘이승만 괴뢰도당’이라는 구호를 중요한 대남(對南) 선전전략으로 쓰고 있다는 뜻이죠. 그들이 이승만의 역사적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한 비난과 온갖 중상모략을 끊임없이 자행해왔다는 증거입니다.”
‘이승만의 삶을 기록한 항해일지’
북한은 지금도 대한민국을 ‘괴뢰’라고 부른다. 2023년 9월 항저우 아시안게임 여자축구 8강전, 《로동신문》은 “괴뢰팀에게 4대1로 승리했다”라고 썼다. 조선중앙TV 화면에도 대한민국을 ‘괴뢰’라고 표기했다.
“북한이 상투적으로 쓰는 말이 ‘괴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서 이승만을 그렇게 비하하는 거죠. 근데 ‘괴뢰’라는 말이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꼭두각시’ 아닙니까? 그러니까 정체성도 없고 주체성도 없고 말 그대로 그냥 미국에 빌붙어서 사는, 그냥 제국주의자들 손아귀에 놀아나는 나라가 한국이다, 그것이 북한의 시각이거든요. 〈김일성의 아이들〉을 작업하면서 이와 유사한 자료들, 말하자면 이승만 정권을 비난하고 왜곡하는 자료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런 현상이 왜 아직까지도 계속되는가?’가 고민의 출발점이었다. 그래서 2021년도에 〈김일성의 아이들〉 다음 작품을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던 중 화두(話頭)가 떠올랐다. ‘북한이 왜 이렇게 장구한 세월 동안 이승만을 물고 늘어지나?’ 그래서 그때부터 저널리스트로서 흥미를 갖고 이승만을 취재하기 시작했다.
― 어떻게 취재했습니까.
“일단 ‘이승만’이 들어가는 책은 거의 다 봤고, 당대의 신문 기사도 읽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본질을 깨닫게 된 거죠.”
― 직접 수많은 책을 보고 나서 평가하기에 이승만은 어떤 인물입니까.
“애국자(愛國者). 평생을 대한독립(大韓獨立)을 위해서 살았고 또 대한민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애국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이후는 익숙했다. 직접 겪었으니까. 그래서 그 시절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는데, 이승만 정권에 대해서는 그 전까지 별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왜 북이 이승만을 이토록 증오하는가, 역으로 이승만이라는 존재야말로 북한의 약점을 드러내는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승만의 삶을 기록한 항해일지(航海日誌)를 영상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이승만의 3대 업적
― 이승만 생애에서 이 점만큼은 특별히 기록해 남기고 싶었던 부분이 있다면요?
“삶 자체가 방대하고 거대한 생애니까 딱 한 가지만 얘기할 수는 없죠. 제가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다뤘던 부분은 세 가지입니다. 물론 다른 것도 다 중요하지만요.”
― 어떤 부분입니까.
“가장 역점을 뒀던 부분은 토지개혁, 그리고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겁니다. 한미 상호방위조약도 중요하죠. 대한민국의 안정과 번영의 토대가 되었으니까요.”
― 이번 영화에는 건국 이전의 청년 이승만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이유가 있나요.
“위대한 정치가나 위인을 다룰 때는 보통 연대기(年代記)적인 기법을 씁니다. 언제 태어났고 청년기를 어떻게 보냈고 30·40대엔 어디 가서 무엇을 했고,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거죠.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이런 구조를 탈피했습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고민한 대목이죠. 제목도 한 10번 이상 바꿨습니다. 시나리오도 탈고한 원고를 세 번이나 완전히 갈아엎었습니다.”
― 왜 연대기적 서술로 가지 않은 겁니까.
“연대기적으로 가면 이분의 삶을 디테일하게 정리할 수 있지만, 몇 가지 단점도 있습니다. 그게 뭐냐? 첫 번째는 재미가 없다는 겁니다. 분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으니까요.”
― 두 번째는요.
“다큐멘터리는 액션이 가미된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100분을 넘어가면 지루합니다. 관객이 힘들어요. 그런 점을 감안했을 때 과연 연대기적인 구성이 적당할까 이런 고민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건 아니다, 이렇게 갔다가는 관객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겠다고 생각해 전략을 바꿨죠.”
‘이거 하면 너 생매장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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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영 감독은 KBS 객원 PD로 일하면서 〈일요스페셜〉 등 다큐를 주로 만들었다. |
“지금은 이승만에 대한 개념과 인식이 많이 바뀌어 있는 상태지만, 제가 2021년도에 처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 다들 말렸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이거 하면 너 생매장당한다. 어떻게 감당할래? 제작비는 뭐 집 팔아서 댈 거야?’라고 했죠. 온갖 부정적인 인식들이 가득했습니다.”
― 지금은 분위기가 달라졌습니까.
“제가 느끼기에는 불과 지난 3년 사이에 이승만이라는 존재에 대해 대한민국 사회에서 굉장히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흐름에 힘을 보태고 싶었습니다. 제 작품이 다큐멘터리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영화는 극장에 걸려서 대중과 만나야 생명력을 얻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재미가 있어야죠. 재미가 있으려면 스토리텔링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간의 틀을 다 벗어버리고, 이승만을 비하하고 비난하고 왜곡하는 사례를 중심으로 시나리오를 재구성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시간이 과거로 갔다가 현재로 왔다가 하는 이유입니다.”
말하자면, 이슈를 중심으로 논쟁을 펼친 것이다. 이런 기법에 관객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사실 조금 걱정은 했죠. 개봉 전에 14번 시사회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회당 200명에서 300명 정도로 계산하면 대략 3000명 정도 보신 셈인데, ‘영화가 어렵다’ ‘이해가 안 된다’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어요. ‘스토리텔링으로 이승만을 풀어간 것이 제 영화의 차별화된 부분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대중에게 먹히고 있다’, 저는 그렇게 봅니다.”
박근혜 탄핵이 준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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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영 감독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 시위대의 패륜적인 퍼포먼스들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사진=조선DB |
“이번엔 없었지만 〈김일성의 아이들〉 때는 해킹이라든가, 작업을 방해하려는 시도가 많이 있었죠.”
〈김일성의 아이들〉은 김덕영 감독의 첫 영화다. 김 감독은 서강대 철학과를 나와 KBS 객원 PD로 일했다. 〈일요 스페셜〉 등 다큐멘터리를 주로 만들었다. 히딩크 감독을 입국 때부터 밀착 취재한 히딩크 특집,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정리해고 합법화 사례를 다룬 〈현대 자동차 사태〉 등이 그의 작품이다. 울산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며 8개월 동안 찍었다. 〈제일은행 매각〉 편도 그의 손을 거쳤다. 객원 PD였지만, 그에게는 공중파 방송국에서 주는 일감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조직의 안정성’을 박차고 나와 〈김일성의 아이들〉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걸까?
“2016년에서 2017년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정말 비극적이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사건이 있었죠. 박근혜(朴槿惠) 대통령 탄핵 사건입니다. 제가 그때 광화문 근처에서 살아서 촛불 시위를 현장에서 매일같이 봤어요. 정신이 번쩍 들었죠. 대한민국의 원칙과 상식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대통령을 탄핵할 만큼 솔직히 큰 범죄나 잘못이 있었나요? 그런데 저는 이미 2016년 초부터 이상징후(異狀徵候)를 느꼈습니다. 현장에서 보니까 ‘야, 이거는 어떤 친북(親北) 세력들이 북한과 결탁을 해서 뭔가 이런 사건들을 만들어내고 있구나, 우리 사회를 흔들고 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 그렇게 느낀 결정적인 계기가 있습니까.
“박근혜 대통령 인형을 만들어 그 목을 잘라서 효시(梟示)하고, 죽창에 꽂아서…. 뭐 어떻게 표현도 못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불태우기도 했죠. 시위 방식이 너무 잔인했습니다. 이전에 대한민국에서 그런 시위가 있었나요? 없었어요. 그래서 ‘이건 아주 극단적인 반(反)국가 세력이 대한민국 국민을 선동하고 있구나’라고 봤습니다. 또 하나, 그때 나왔던 구호들도 원색적이었어요. 민주화 세력이라면 비(非)윤리적이어서 외칠 수 없는 내용이었죠. 제가 외부의 개입이 있다고 느낀 이유입니다.”
〈김일성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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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동구권으로 보내졌던 북한 전쟁고아들을 다룬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2020). |
“대한민국에서 살면서 그동안 개인의 일상적 안락함만을 추구하면서 살았는데, ‘나라가 이렇게 망가져 버리면, 내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이 나라는 도대체 뭐가 되는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의 아이들〉을 만들었습니다. 제 자식들에게 이렇게 잘못된 나라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전달하고 싶었어요.”
〈김일성의 아이들〉은 6·25 후 북한에 의해 동구권(東歐圈)으로 보내진 후 몇 년 동안 그곳에서 살았던 전쟁고아들의 이야기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2004년 〈수요 기획〉이라는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을 당시 제보를 받았다. 북한 국적 남편을 기다리는 한 루마니아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할머니는 1958년 남편과 함께 북한에 들어가 평양에서 살았고, 1년여 후 ‘외국인과의 결혼 금지’ 정책에 따라 강제 이혼당한 후 루마니아로 돌아왔다.
“처음엔 국경을 초월한 러브스토리로 접근했죠. 그런데 그분이 이런 말씀을 했어요. ‘전쟁 끝나고 북한 애들이 여기 왔다. 그리고 길게는 7년에서 8년까지도 여기서 살다 갔다. 갈 때는 강제적으로 송환이 됐다. 북한 국적 남자는 인솔 교사였다.’”
9박 10일 일정으로 〈수요 기획〉 촬영을 마치고 루마니아를 떠나던 날, 할머니가 갑자기 말했다.
“그런데 애들은 루마니아에만 살았던 것이 아니야. 아이들은 루마니아,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몽골로도 갔어.”
김 감독은 “순간 좀 멍해졌다”고 말했다.
“단순히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1950년대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배경이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귀국해 방송 끝난 다음부터 바로 취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1956년부터 김일성의 명령으로 송환되기 시작한다. 총인원은 5000~1만 명 정도였다.
집 팔아서 만든 영화
앞에서 〈건국전쟁〉 제작비를 ‘집 팔아서 댈래?’라며 말린 사람이 있었다고 썼다. 정확한 문장이 아니다. “‘또’ 집 팔아서 댈래?”가 정확한 문장이다. 〈김일성의 아이들〉을 만드느라 김덕영 감독은 실제로 집을 팔았다.
“사명감은 차오르는데 아무도 돈 대겠다는 사람은 없었거든요. 이 작품이 왜 제작 기간이 길어졌느냐. 일단 첫 번째는 로케이션이 전부 동유럽입니다. ‘북한 전쟁고아’에 대한 정보도 없어서 일일이 자료를 찾아야 했습니다. 어디를 가서 누구를 인터뷰하고 어디 가면 뭐가 있다는 정보 자체가 없었어요. 2019년에 크랭크인할 때 딱 5개의 전화번호가 있었습니다.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에서 한국말하는 통역사.”
집을 팔자고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아내가 고맙게도 선뜻 동의해줬다. 아내는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될 수도 있다”며 격려도 했다.
“확신은 제 아내가 저보다 더 강했어요. 저는 가장이라, 정말 영화를 완성할 수 있을지 아니면 돈만 날리고 돌아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걱정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아내는 한번 꼭 해보자고 그러더군요.”
영화는 예상대로 난항을 거듭했다. 체력, 정신력, 경제력 등이 한계에 부딪혀 포기하려 할 즈음 기적이 찾아왔다.
“2019년 겨울이었어요. 촬영팀을 꾸려가면 경비가 상승하니까, 제가 메인 PD, 제 집사람이 보조 촬영으로 둘이서 동유럽을 다녔죠. 돈은 떨어져 가고 완성에 대한 기약도 없고, 완성한다 해도 이 작품을 과연 공개할 수 있을까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한데 부쿠레슈티 오페라하우스 근처에 2만원짜리 방을 잡고 저녁 먹으러 나왔는데, 갑자기 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말을 거는 겁니다. 그러고는 영어로 ‘내가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나한테 뭐라고 얘기할까요?’라는 거예요.
황당했죠. 제가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하니까 갑자기 이 사람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라고요. 그러고는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기적 같은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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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영 감독은 〈건국전쟁〉을 찍기 위해 이승만이 세운 하와이한인교회도 찾아갔다. |
“이 사진 속의 주인공이 나다. 그리고 옆에 계신 여성이 내 어머니다. 어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 살아생전 소원이 ‘죽기 전에 친구 한 번 꼭 만났으면 좋겠다’였다. 그 친구는 북한 사람이다.”
김덕영 감독은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 “정말 멍한 상태에서 얘기 듣다가 그 남자한테 말했습니다. ‘당신이 믿을지 안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렇게 찾고 있었던 북한 전쟁고아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지금 동유럽에 와 있다.’”
― 뭐라던가요.
“깜짝 놀라더군요. ‘야,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나.’
길거리에서는 많은 대화를 못 나누고 서로 이메일과 페이스북 정도만 교환하고 헤어졌죠. 밥을 먹는데 밥이 제대로 들어가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고…. 식사를 마치고 들어왔더니, 그 루마니아 남자도 저하고 똑같은 심정이었던지 메일을 보냈더군요.”
―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는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원래 그 횡단보도는 내가 다니던 길도 아니다. 오늘은 이상하게 한 정거장을 더 걸어서 버스를 타고 싶었다. 그런데 당신을 만났다.’
그러면서 밑에 이렇게 써놨더라고요. ‘당신의 여정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기를. 당신과의 만남은 신(神)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나에게 깨닫게 해줬다.’
다 읽었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돈은 떨어지지, 육체적으로는 피곤하지, 심리적으로 붕괴돼 ‘이 프로젝트를 접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자료도, 영상도 안 나오는데’ 이렇게 좌절 직전까지 갔던 상황인데 그 남자가 보낸 메시지를 딱 보는 순간….”
한국전 참전용사와 만나다
― 하늘이 그분을 통해 음성을 직접 배달해준 듯한 그런 느낌이었겠네요.
“‘여전히 힘들겠지만, 몇 걸음만 더 나가보자. 그래, 포기하지 말고 더 가보자. 분명히 이 길이 옳은 길이니까 좋은 일이 있을 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시 힘을 내고 계속 취재를 했죠. 그랬더니, 결국에는 곳곳에서 자료들이 나오고 증언자들이 나오고 결국은 영화를 완성했습니다.”
― 이번 이승만 대통령 다큐멘터리와 관련해서는 그런 극적인 순간이 없었습니까.
“여러 번 있었어요. 2023년 1월이었는데, 이때도 영화를 완성할 수 있을지 100% 확신이 있는 상태는 아니었죠. 정말 추운 날이었는데, 워싱턴 D.C.에서 한국전쟁 기념비를 취재하고 있었어요. 카메라로 전경을 촬영하고 있는데 나이 든 구부정한 할아버지 한 분이 오시는 겁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셨어요, 86세. 증언을 들었죠. 사실 그런 분은 제가 섭외를 해서 모셔오기도 쉽지 않아요. 다들 고령(高齡)이시기도 하고. 그런데 그날 그 자리에 나타나신 겁니다. 신기한 체험이었어요. 이번 영화에 그분 인터뷰도 들어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휴전 후 미국을 찾은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이 그려진다.
“1954년 8월 2일 이승만 대통령이 뉴욕에서 퍼레이드를 합니다. 외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이에요.”
― 위에서 꽃가루 쏟아지고 하는 영상이 국내에는 없었나요.
“사진은 있어요. 그래서 사진을 들고 이승만 전문가라고 하는 분들을 다 찾아다녔죠. 이분들이 말씀하시는 게 사진은 본 적이 있는데, 영상은 본 적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찾아봤더니, 이게 없더라고요.
관련 영상은 2012년도인가 KBS에서 이승만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하나 있었어요. 거기에 살짝 나옵니다. 네 커트 영상이 나오는데 앵글이 달라요. 사진을 보면 알지만, 그때 카메라가 수십 대가 돌아갔습니다. 엄청난 행사였으니까요. 그러니까 기록 필름이 하나만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근데 KBS에서도 2012년도에 방송한 거는 아주 드라이합니다.”
“스태프들이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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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영 감독은 미국 국립문서관리청에서 6개월 만에 이승만 대통령의 뉴욕 퍼레이드 장면이 담긴 릴테이프를 찾아냈다. |
“차에 탄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 그다음에 풀샷 이 정도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이번에 저희가 찾은 앵글은 뭐가 다르냐? 언급하셨던 것처럼 하늘에서 꽃가루가 쏟아지고 그다음에 이승만 대통령이 모자를 썼다 벗으며 시민들한테 화답하고, 우리 대통령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죠. 이런 장면은 옛날 필름에 없는 겁니다. 이 장면의 상당 부분이 70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 영화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미(美) 상하 양원 합동 연설 영상도 나옵니다.
“그것도 깨끗한 원본을 이번에 찾았습니다, 오디오까지.”
― 그런 자료들을 찾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6개월 정도 걸렸어요. 미국 국립문서보관청만 다섯 번을 방문했어요. 갈 때마다 정보를 입수해 범위를 점점 좁혀나가다 마침내 녹슨 릴테이프를 발견했습니다. 6·25 때 헤어진 가족을 상봉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다 울었죠.”
― 그게 그렇게 중요했나요.
“저희 영화에서 이 영상이 없으면 하이라이트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찾아야 하는 자료였어요. 저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기자와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차이가 있어요. 가장 큰 차이는 시각적인 정보를 찾지 못하면 우리는 완성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영상이었습니다.”
― 처음 퍼레이드 영상을 봤을 때 느낌은 어땠습니까.
“가슴 벅찼죠. 그 안에 영사실이 따로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볼 수 있는 좀 작은 방. 제가 직접 필름을 감아서 영사기 돌리고, 삭~삭~ 옛날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데, 저희 스태프들이 다 같이 울었습니다. 영상 찾고 울고, 보면서 또 울고…. 우리 대통령이 수많은 인파, 미국 사람의 환영을 받으면서 꽃가루 속을 행진하는 영상을 보면서 우리 스태프들이 다들 펑펑 울었어요.”
― 그걸 찍어놨으면 그것도 다큐멘터리가 됐겠네요.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죠. 워낙 정신도 없고, 그다음에 정해진 시간 안에 빨리 복사를 해서 나와야 하니까.”
이승만-트루먼의 만남 담은 동영상도 발굴
희귀한 영상은 이것 말고도 많다. 이승만 대통령이 미주리주 트루먼 대통령 자택으로 찾아가 만나는 장면. 두 거인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다. 두 분은 2023년 7월 다부동 전적지에 동상이 들어섬으로써 69년 만에 동상(銅像)으로 재회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아이젠하워 대통령, 덜레스 국무부 장관을 만나는 영상도 이번에 발굴해 영화에 넣었다. 귀로(歸路)에 하와이에 들러 교민들에게 환영받는 장면, 펜실베이니아에서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모여 자국 대통령에게 하듯 이승만 대통령을 향해 깍듯하게 열병식을 하는 장면도 감동적이다.
“열병식 후 이 대통령은 큰 강당 같은 곳에 들어가서 연설합니다. 유창한 영어로, ‘한국전쟁 때 도와줘서 고맙다. 자유우방인 미국에 큰 신세를 졌다. 우리가 이 신세를 갚는 길은 자유의 깃발을 높이 드는 것이다.’ 이 말을 하니까 미국 사람들이 일어서서 환호하고 박수 치고 난리가 납니다.”
― 의회 연설도 33번인가 기립박수를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걸 다 쓸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일 인상적인 장면 한 구절만 딱 땄습니다.
‘나는 이 기회에 미국 군인의 어머니들에게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깊은 감사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미국 육·해·공군 및 해병대에서 복무하는 자식을, 남편을, 그리고 형제를 우리가 가장 암담한 처지에 놓여 있던 시기에 한국으로 보내준 데 대하여 감사하는 바입니다. 한미 양국 군인들의 영혼이 우리나라의 계곡이나 산중에서 하나님 앞으로 함께 올라갔다 함을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가 그들의 유로(遺勞)를 애중(愛重)히 여기듯이 전능의 신이 그들을 애중하여주시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자유의 투사’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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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의 뉴욕 퍼레이드 장면. 이승만 대통령의 표정이 잘 나타나 있다. |
“저는 거꾸로 미국 사람들이 오히려 놀랐을 것 같아요. 당시 아이젠하워의 선거 공약이 조속한 시일 내에 미군 철수였잖습니까? ‘미국 입장에서는 그냥 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어정쩡한 대립 상태로 휴전하는 것이 전략적인 목표가 아니었나’, 저는 그런 생각도 좀 들더라고요.
그런 상황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自由)와 반공(反共), 이 두 가치를 명확히 한 인물 아닙니까? 어느 기록에 보니까 미국 사람들이 이승만을 ‘자유의 투사(freedom fighter)’라고 불렀더라고요. 그러니까 자유와 반공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이승만이 아이젠하워보다도 더 중요한 인물로 부각이 된 겁니다. 수많은 환영 인파가 퍼레이드에 나온 이유입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꽃이요 최고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의 뉴욕 중심가에서 행진한 이 1954년 8월 2일의 동영상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었다.
“이승만이 불편했던 거죠. 그걸 누구라고 말할 순 없지만, 어쨌든 이승만은 대한민국에서 굉장히 뜨거운 감자였고 정권이 탄생할 때마다 이승만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논란이 되었습니다. 국민적인 지지를 얻는 데는 방해 요소라고 생각한 세력도 있었을 겁니다. 어쨌든 대한민국이 소중한 자료를 제대로 보관하지 않고 방치한 것은 사실입니다.”
사라져 버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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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전쟁〉은 박스오피스 3위를 기록하고 있지만, 네이버 등 포털사이트에서는 포스터를 게시하지 않았었다. |
― 왜 안 나오는 겁니까? 혹시 안 보낸 건 아닙니까.
“진작에 보냈죠. 안 보냈겠습니까? 그건 상식인데, 영화를 마케팅하고 홍보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ABC 중 첫 번째예요. 네이버와 다음에서는 〈건국전쟁〉을 치면 포스터 자리에 빈칸만 나옵니다. 웃기는 거죠. 박스오피스 3위인 영화가 포스터도 없이 상영되고 있는 것은 초유의 사태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혹시 이승만이기 때문일까요? 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진 포스터라서 그런가요? 포스터 심의필증 전부 제출했고, 자원봉사자까지 나서서 자료를 제출했는데 왜 받지를 않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 네이버나 다음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배급사 대표가 제출해야 한다’ ‘감독이 제출해야 한다’. 아니 포스터의 제목과 영진위 심의필증의 제목이 일치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왜 제출하는 사람까지 일치해야 합니까? 네이버와 다음은 그렇게 비정하고 비합리적으로 일하는 곳인지, 다른 영화도 다 이런 기준을 적용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 문제가 논란이 되자 네이버 등에서는 뒤늦게 포스터를 게재했다.
김덕영 감독에 의하면 〈건국전쟁〉은 원래 3월 개봉 예정이었는데, 시기를 한 달 앞당겼다고 한다. “사실 영화는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개봉이 더 어려워요. 제작비보다도 홍보에 돈이 더 들어갑니다. 어느 정도 돈이 있어야 간판도 붙이고 광고판도 붙이고 그럴 수 있잖아요. 근데 한 달을 앞당긴 이유는 김대중 대통령 다큐멘터리 영화 〈길 위에 김대중〉 때문입니다.”
― 정면 대결입니까.
“다 아시는 것처럼, 최근 들어 〈서울의 봄〉 〈길 위에 김대중〉 등의 영화들이 계속 나오지 않았습니까? 저는 이것이 4월 총선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매번 선거 전에는 이런 영화들이 나왔었죠.
그렇다고 해서 원색적으로 누구를 비난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선의(善意)의 경쟁을 해보자는 것이지요.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과연 어떠한 가치관이 우리에게 지금 올바른 가치관이냐? 역사 인식의 방법은 어떤 것이 중요하냐? 그동안 수많은 정치 지도자가 있었지만, 어떤 사람이 정말 대한민국을 위해 노력했고 애국을 한 사람인가?’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국가 발전의 기본적이고 올바른 전략을 짠 사람은 누구인가를 한번 겨뤄보자’는 뜻도 있습니다.”
― 그래서 백범 김구(金九)도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겁니까.
“맞습니다. 소위 남북협상, 유엔한국위원회 중화민국 대표 유어만(劉馭萬) 공사의 보고서가 이번 영화에 다 나오죠. 제가 객관적으로 자료를 확보해 대중에게 설명할 수 있는 ‘유어만 보고서’에 보면, 김구는 ‘어차피 군사력에서는 북한이 압도적이고 북한 위주로 통일이 될 텐데 총선은 해서 뭐 하냐’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젊은 관객들이 가장 충격적인 부분이었다고 했습니다. 흔히 알고 있었던 김구와 완전히 동떨어진 내용이니까요.”
“내 아이들이 부끄럽지 않게…”
― 이렇게 확고한 우익으로 돌아선 계기가 있습니까.
“저는 제가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84학번이거든요. 대학교 다닐 때 1987년 6월 항쟁이 있었어요. 그때 민주화운동에 나가서 데모도 하고 그랬죠. 그때 심정이나 지금 이 심정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대한민국이 잘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내 나라 내 아이들이 부끄럽지 않게, 이 나라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왜 평범하게 살다가 갑자기 싸우느냐? 아까 2016년 말씀드렸잖아요. 조용히 평범하게 그냥 글이나 쓰면서 살려고 했는데, 말 그대로 이건 뭐 주사파(主思派)들이 정권을 잡고 완전히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잖습니까? 그런 걸 보자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저는 바뀐 게 없어요.”
― 이 영화를 어떤 사람들이 좀 봐줬으면 좋겠습니까.
“저는 이승만을 저주하고 비난하고 왜곡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승만을 모르는 사람들을 주 타깃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이 ‘이승만이 무엇을 잘했느냐’가 아닙니다. 업적이 빠졌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걸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거죠.
반면에 ‘왜 대한민국에서 지난 60~7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이승만 대통령이 이렇게 홀대받고 조리돌림당했나? 왜 이렇게 엄청난 비난과 왜곡과 거짓이 난무했는가?’를 주로 이야기했죠.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 뭔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자는 것이 목표입니다.”
영화 보고 화해한 모녀
― 성과가 있습니까.
“네. 먹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한테 개인적으로 연락이 오잖아요. ‘고맙다, 잘 봤다’, 이런 식으로요. 특별히 기억하는 문자가 있습니다.”
― 어떤 건가요.
“시사회 때 보고 가신 분인데, 십여 년 넘게 자기 딸하고 가정 불화가 있었다는 거예요. 정치적인 입장이 달라서요. 딸은 좌파, 엄마는 우파. 그래서 매일 사사건건 부딪혔다는 겁니다.
그 어머니가 〈건국전쟁〉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딸한테 약간 거짓말을 한 겁니다. 이승만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면 안 갈 테니까 전쟁영화 보러 가자고. 시사회장에서 딸이 생각이 완전히 바뀐 거예요. ‘내가 알고 있었던, 내가 그동안 배웠던 역사와 너무나 다른 역사다.’
그래서 ‘지금은 대화가 되고 새로운 역사 인식을 하는 딸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가정의 평화를 찾아줘서 고맙습니다’가 마무리 문장이었습니다.”
― 누가 역사를 왜곡했을까요.
“이승만을 죽이고 비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자들이 범인 아닐까요? 사실은 제가 어떤 언론 인터뷰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에게는 이 영화가 개인적인 참회록입니다. 586 세대로서 저는 운동을 치열하게 한 사람은 아니지만, 어쨌든 데모하고 스크럼 짜고 뭐 이런 것들이 당시 민주화의 열망을 표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그때 제가 배웠던 이승만은 살인자·독재자였죠. 그렇게 생각하고 20~30대를 보냈고 50대까지 왔습니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이승만이라는 존재를 알게 되고 공부하면서 3~4년을 보냈는데 그때 역사적 견해가 바뀌었습니다.”
“참회하는 심정으로 영화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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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전쟁〉 시사회에서 인사말을 하는 김덕영 감독. 김 감독은 “참회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
“말 그대로 정말 처참했습니다. ‘대학교까지 나왔는데 대한민국 역사에 대해서 이렇게 모를 수 있나. 한 역사적 위인에 대해 이렇게 원색적 비난과 왜곡이 무차별적으로 난무하는데 어떻게 받아들이게 됐나.’
그런데 이런 사람이 저뿐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측면에서, 처절하게 참회하는 심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역사에 대한 자기반성, 한 애국자를 기억하는 일에 대한 자기반성의 과정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방송일을 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저도 잘못된 뭔가를 퍼트리지 않았을까? 내가 잘못한 것을 더 늦기 전에 제대로 바로잡아야 한다.’ 이것이 이 영화를 만든 제 내적인 동기입니다. 그래서 영화 만들면서 많이 울었어요. 너무 미안해서, 너무 죄송해서….”
필자도 이 영화를 봤다. 2월 3일 롯데시네마 도곡점 18시25분 상영분은 매진이어서 23시40분 코엑스 영화관에 걸음 했다. 늦은 시간인데도 관객이 제법 있었다. 우연히 후배 변호사도 만났다. 영화가 끝나고 박수가 나왔다. 불이 켜지고 보니 그의 눈가에도 이슬이 촉촉이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