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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U-20 월드컵대회 4강 김은중 감독

“우리의 신세대는 좋은 의미에서 자신감이 충만한 세대”

글 : 장원재  ㈜戰後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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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다는 말에 ‘아니 왜 내가 축구를 못 하지?’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오기 생겨”
⊙ 초등학교·중학교 때 공에 맞아 눈 다쳐… 왼쪽 눈, 사람 형체만 겨우 보일 정도
⊙ “유소년팀에선 선수를 기르고, 대표팀과 프로팀에선 성적을 내는 감독이 좋은 감독”
⊙ 2015~2017년 벨기에 AFC 튀비즈 코치·감독 대행… 한국인으로 유럽에서 유일하게 감독 역할 수행
⊙ “요즘 선수들은 왜 이 연습이 필요한지 이해시키고 설명해줘야 따라와”

張源宰
1967년생. 고려대 국문과 학사, 런던대 로열헐러웨이 컬리지 박사(비교연극사) / 前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경기영어마을 사무총장,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 MBC 라디오 앵커, 現 배나TV·(주)戰後70년 ‘생생현대사TV’ 대표 / 저서 《북한요지경;배나TV 장원재입니다》 《끝나지 않는 축구 이야기》 《논어를 축구로 풀다》 《장원재의 배우열전》
  밀림(密林)과 광야(曠野), 인적(人跡)이 끊어진 막막한 곳에서 혼자 힘으로 길을 내며 전진하는 사람들이 있다. 개척자(開拓者) 또는 파이오니어(pioneer)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그들로 인해 인류 능력치(能力値)의 총량이 늘어난다. 미지(未知)의 세계, 불가능(不可能)의 영역에 환하게 불이 들어온다. 그래서 그들이 서 있는 곳이 바로 인류문명(人類文明)의 최전선(最前線)이다.
 
  우리 사회에선 김은중(金誾仲·44)이 그런 인물 가운데 하나다. 현직은 축구 감독. 지난 6월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20세 이하 월드컵에서 한국을 세계 4강으로 이끌었다. 어려서부터 최전방 공격수로 이름을 날렸고, 2002년 아시안게임, 2004년 아시안컵 등 국가대표로 15경기에 나서 5골을 넣었다. 프로 선수로는 한국과 일본, 중국 등 3개국을 누비며 18시즌 동안 왕성하게 활동했다.
 
  이 정도라면 뛰어나기는 하지만, 인간 승리의 표본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한쪽 눈으로 이 모든 업적을 이뤘다. 문학적 수사가 아니다. 실제로, 그의 왼쪽 눈은 사물을 판별하지 못한다. 중3 때 연습 도중 부상으로 비롯한 결과다. 군(軍) 면제 사유도 좌안실명(左眼失明)이다. 그래서 특별하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개선장군(凱旋將軍)을 맞이하는 심정으로 인터뷰를 청한 이유다.
 
 
  “매 경기 영웅 나와”
 
지난 6월 14일 국제축구연맹(FIFA) 아르헨티나 U-20 월드컵에서 4강 진출을 이룬 한국 축구대표팀 김은중 감독과 선수단은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에서 열린 귀국 환영식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사진=뉴시스
  ― 축하합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4강 진출이었습니다. 주변에서 많이들 알아보시죠?
 
  “네. 출국 때하고 귀국 때 공항 분위기가 확 달라졌습니다. 아무래도 대회 전에는 관심도가 크지 않았죠. 관계자와 가족 이외 환송객이 거의 없었어요, 우리 선수들이 ‘그래도 월드컵에 나가는 건데 이 정도로 환송을 못 받나’ 이런 생각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아무래도 저녁이다 보니까, 23시 비행기였으니까 예상보다 더 조용했죠. 그런데 귀국할 때는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6월 14일 귀국 때는 글자 그대로 공항이 미어터졌다. 소녀팬들의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고, 선물 공세가 빗발쳤다. 몰려든 취재진이 연신 터뜨리는 플래시에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였다. 선수들이 좀 많이 알려졌다는 것을 스스로 실감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감독으로서도 가장 보람차고 고마웠던 순간이다.
 
  이번 대회 직후, 김지수(EPL 브렌트포드), 배준호[영국 챔피언십(2부) 스토크시티] 등이 곧바로 유럽행 비행기를 탄 것도 또 다른 성취다. 축구의 본고장에서 우리 어린 선수들의 가능성과 상품성을 널리 인정했다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첫 경기에서 ‘세계 축구계의 예상을 뒤엎고’ 절대강자 프랑스를 2대1로 물리쳤고, 온두라스와는 0대2로 끌려가던 경기를 기어이 2대2로 따라잡았으며 조별리그 최종전 감비아와의 경기도 0대0으로 마감하고 무패(無敗)로 16강에 올랐다. 16강전에선 남미의 에콰도르를 맞아 3대2로 고비를 넘었고, 8강전 나이지리아전은 시종일관 밀리는 가운데 연장전 들어 결정적 헤딩슛 한 방으로 4강에 올랐다. 준결승 이탈리아전은 1대2 패, 3/4위전에서도 이스라엘에 1대3으로 승리를 내주며 최종 성적은 4위.
 
  ― 이번 대회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경기마다 영웅이 달랐다는 점입니다.
 
  “사실은 저희 팀이 꾸려지고 나서 제가 선수들에게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 팀은 베스트가 없다. 운동장에 나가는 선수 모두가 베스트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훈련 때 소홀히 하지 말라’고요. 제 말을 선수들이 잘 따라준 결과, 말씀하신 것처럼 경기마다 영웅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골짜기 세대’
 
  ― 가장 인상에 남는 경기는 어떤 경기입니까.
 
  “가장 짜릿했던 경기는, 모든 경기가 다 그랬지만, 프랑스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어떤 대회든 첫 경기가 가장 중요하고 그래서 어렵고 또 국내외 전문가도 저희가 일방적으로 밀릴 것이라고 했으니까요.”
 
  감독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태극전사들은 당돌할 만큼 넘치는 자신감으로 세계와 맞섰다.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두 골을 먼저 넣으며 거함(巨艦)을 격침했다. 필자가 평가하는 이번 대회의 가장 예술적인 골은 에콰도르전 11분 이영준의 골과 18분 배준호의 득점이다. 이영준은 왼편에서 길게 날아온 볼을 가슴으로 트래핑한 뒤 공이 바닥에 닿기 전 강력한 발리슛으로 빨랫줄 같은 대각선 강타를 욱여넣었다. 배준호는 페널티 에어리어 언저리에서 패스를 받고, 놀랄 만큼 침착한 모습으로 골키퍼와 수비수 3명을 벗겨내며 골문 구석으로 정확한 한 방을 굴려 넣었다.
 
  “우리의 신세대는 좋은 의미에서 자신감이 충만한 세대입니다. 제가 팀을 꾸리고 나서 가장 공들였던 포지션이 스트라이커거든요. 어쨌든 축구는 득점을 해야 이기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쉽게 득점할 수 있는 경우를 놓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에콰도르전에서 나온 골들은 사실 득점하기 어려운 골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우리 선수가 저렇게 넣을 수도 있구나, 우리 선수들이 정말 특별한 능력이 있구나라는 점을 발견해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예전에 축구 원로들이 농반진반으로 하던 축구 표현이 있다. ‘축구화 끈에만 맞아도 들어가는 골을 놓쳤다’는 표현이다.
 
  “저 역시도 선수 때, 특히 어릴 때는 ‘너무 쉬워서 100% 골이다’ 하고 발을 갖다 댔는데도 못 넣는 경우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선수들에게 항상 얘기했습니다. ‘아무리 쉽게 패스가 와도 당연하게 골로 이어지지 않는다. 끝까지 집중하지 않으면 득점하지 못한다’라고요.”
 
  2019 폴란드 대회 때 정정용 감독이 이끈 우리나라는 이강인·엄원상 등을 앞세워 준우승했다. 역대 최고의 성적이다. 그런데 김은중 감독은 이 위대한 유산의 연속성(連屬性)을 누리지 못했다. 코로나19 여파로 2021년 대회는 취소. 20세 이하 대회뿐 아니라, 18세, 16세 연령별 국제대회가 모두 멈춰 선 탓에 이 연령대 선수들은 대표팀 소집 경험이 아예 없었다. 자신을 증명할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기도 좋지 않았다. 2021년 12월 김은중 감독이 부임한 직후엔 대다수의 선수가 고3 졸업반이었다. 대입과 프로팀 입단의 갈림길에서 소속팀도 훈련도 없이 3개월가량 쉬고 있는 상태였다. 언론이 이들을 ‘골짜기 세대’라고 명명했던 배경이다. 김 감독은 2022년 1월 1·2학년 전국 춘계대회(통영)부터 현장을 누볐고, 프로팀 연습경기 등을 모두 다니며 원석을 캐듯 한 명 한 명 선수들을 모았다.
 
  “선수 풀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도 없었고, 실전 경험이 부족해서 선수들 몸 상태도 엉망이었습니다. 다들 70분 이상을 버틸 체력이 아니었죠.”
 
 
  대회 임박해서 대회 장소 변경
 
국가대표팀 코치 시절의 김은중 감독과 김학범 감독 (오른쪽). 사진=뉴시스
  파란곡절(波瀾曲折)은 또 있다. 대회 임박해서 갑자기 대회 장소가 바뀐 것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지난 3월 말, 5월 예정으로 대회를 준비하던 인도네시아의 개최권을 박탈했다. 문제의 원인은 인도네시아 내 반(反)이스라엘 정서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연일 반이스라엘 시위가 열리고, 강성 이슬람 단체들이 이스라엘 선수단 입국 시 테러를 예고하자 FIFA는 선수단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며 개최국을 변경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막상 개최국이 바뀌니 큰일 났다 싶었죠. 시차 적응, 현지 적응 문제 등을 처음부터 다시 연구해야 하는 거잖아요. 인도네시아 같은 경우는 같은 아시아권이고 저 역시도 좋은 기억이 있었습니다. 코치로 참가한 2018 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으니까요.”
 
  말이 난 김에 덧붙이자면, 손흥민, 황의조, 조현우, 김민재, 황희찬, 황인범, 김문환, 나상호, 이승우 등이 금메달을 목에 걸어 병역 면제를 받은 대회가 바로 이 2018 팔렘방 아시안게임이다. 김은중은 김학범 감독 휘하 코치로 참가했다.
 
  “그래서 자신감도 더 있었고 여러 가지 준비 과정도 거의 완벽할 정도로 하고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다 필요 없게 된 것이죠. 저는 남미는 가본 적이 없거든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전혀 판단이 서질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급박하게 돌아가니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된 일이 하나도 없었다. 연습경기도 잡지 못했고 아르헨티나 조기(早期) 입국도 실행하지 못했다. 다행히, 플랜B로 마련한 브라질 캠프의 환경이 좋았다. 4강 진출 확정 후 (여러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어) TV 인터뷰 때 울컥 눈물을 보인 이유다.
 
 
  “외삼촌 세 분 가운데 두 분이 축구 해”
 
  김은중 감독은 김용기(金容基·73) ·안향희(安向禧·64) 부부의 1남 1녀 중 장남이다. 아버지는 개인택시를 하며 아들의 경기를 전국 어디라도 찾아가 열성적으로 후원했다. 어머니의 뒷바라지와 여동생의 희생도 잊을 수 없다.
 
  ― 어린 시절에 축구를 꼭 해야 되겠다라고 마음먹은 결정적 계기가 있습니까.
 
  “초등학교 때 동네 축구와 반 대항 경기의 스타 플레이어였습니다. 학교에 축구부가 있어서 스카우트를 제의받았고, 그때부터 축구를 배우기 시작했죠.”
 
  ― 부모님은 처음부터 밀어주셨나요.
 
  “아뇨. 반대가 심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요. 외삼촌 세 분 가운데 두 분이 축구를 하셨거든요. 청주 운호고를 나와 대학을 거쳐 한 분은 할렐루야, 한 분은 현대 실업팀에서 뛰셨는데, 지금 기준으로는 프로 선수 하신 것이나 다름없죠. 삼촌들이 어릴 때부터 축구를 하다 보니까 어머니는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옆에서 지켜보셨고, 부상 위험이 크다는 것도 아셨던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 반대를 많이 하셨습니다.”
 
  좋아서 재미있어서 시작한 축구지만 중간에 싫증이 나 3개월 정도 축구를 쉰 적도 있다.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 올라갈 무렵이다.
 
  ― 그런데 왜 축구를 다시 하게 됐습니까.
 
  “다른 운동도 해봤는데, 축구만큼 재밌진 않더라고요.”
 
  당시는 남학생 사이에서 NBA 농구가 인기 절정이던 시절이다. 김은중은 NBA뿐 아니라 농구대잔치 삼성, 현대, 기아, 고려대, 연세대, 중앙대 사이의 명승부도 기억한다. 장동건이 나온 MBC 농구 드라마 〈마지막 승부〉도 본방을 사수했다. 야구도 좋아한다. 좌우 모두 타격이 가능한 스위치 히터로, 혹시 받아준다면, 언젠가 사회인 야구 투수로 뛰고 싶다는 소망도 있다. 응원팀은 LG 트윈스. MBC 청룡 시절부터 일편단심인 LG 팬이다. 다시 축구로 돌아온 뒤엔 그야말로 축구에 흠뻑 더 빠졌다. 문제의 사건이 벌어진 때는 동북중에서 동북고로 올라갈 무렵이다.
 
 
  부모·감독에게도 숨겨
 
동북고 시절의 김은중 감독. 이때 이미 왼쪽눈 실명이 시작됐다. 사진=김은중
  “사실은 초등학교 때 한 번 공에 눈을 맞아서 살짝 다쳤어요. 그 당시에 시력이 한 번에 나빠졌다면 빨리 조치를 취했을 텐데 그런 게 전혀 없었거든요. 중학교 때 다시 한 번 공에 맞았는데, 역시 그 당시에도 특별한 증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선수 생활을 계속했는데, 고등학교 올라갈 무렵에 왼쪽 눈 시력이 현저히 떨어진 걸 느끼고 병원엘 갔습니다.”
 
  학교 앞 안과에 가니 당장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큰 병원 의사 선생님은 ‘왜 지금 왔냐!’라며 역정을 냈다. 급하게 수술했고, 병원에서는 향후 축구를 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헤딩이나 격한 몸싸움을 하게 되면 재발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했습니다.”
 
  수술 이후 지금까지, 왼쪽 눈은 사물의 형체만 겨우 보인다. 앞날이 창창한 중학생은 얼마나 좌절했을까? 아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때 의사 선생님 말씀이 저를 더 강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다는 말에 ‘아니 왜 내가 축구를 못 하지?’ 어렸지만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오기가 생겼어요.”
 
  축구를 못 하게 할까 봐 부모님에게도, 감독님에게도 사실을 숨겼다. 동료 선수들도 김은중이 수술을 한다는 건 알았지만, 정확하게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수술하는지는 몰랐다. 진실은 오로지 본인 혼자만 알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과의 수술 후 면담 때 본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입회를 철벽수비로 막아낸 결과다.
 
  ―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언제 널리 알려진 거죠?
 
  “고교 졸업 후 바로 신생팀 대전 시티즌(현 대전 하나FC)에 입단했습니다. 1997년이었죠. 2001년 FA컵 우승하고 그때 처음 알려졌습니다.”
 
 
  失明 감독과 제자
 
  ‘김은중은 공중볼 처리에 소극적일 때가 있다’라는 평가와 ‘낙하지점 파악을 잘 못 한다, 가끔 문전 쇄도와 패스 타이밍이 살짝 어긋난다’라는 현장의 의구심이 답을 얻은 순간이다.
 
  ‘한국의 게르트 뮐러’라고 불렸던 우승 감독 이태호(李泰昊·62)도 실명의 아픔을 겪었다. 1980년대 중반 상대의 오버헤드킥에 오른쪽 눈을 정통으로 맞은 뒤 오른쪽 눈의 시력을 잃은 것이다. 한 남미 축구 매체는 이태호를 월드컵 사상 유일한 실명 축구 선수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래서 장애를 넘어선 사제(師弟)의 우승 드라마는 감동을 넘어서는, 인간 정신이 세워낸 불멸의 기념비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저는 학교 다닐 때는, 특히 초등학교 때는 경기하면 이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데 프로에 와서는 승률이 나빴어요. 그래서 ‘야, 어릴 때는 나가면 매번 이겼는데 왜 여기서는 맨날 지나’ 속상했었죠. 저는 스트라이커인데 아무래도 계속 수비를 많이 하다 보니까 득점하는 게 몹시 힘들었어요. 2001년 정규 리그에서 저희 팀은 거의 꼴찌를 했거든요. 그런데 기적적으로 FA컵에서 우승하다 보니까 ‘꼴찌의 반란’이라는 스토리가 만들어졌고, 제 부상도 알려진 겁니다.”
 
  2부 리그에서 두 번 우승한 적은 있지만, 2001년 FA컵은 아직까지는 대전이 차지한 전국적인 의미에서의 유일한 우승컵이다. 대전의 자랑이자 2002년 월드컵 대표로 뽑히는 골키퍼 최은성은 이 경기 도중 불의의 부상으로 실려 나갔다. 상대팀 포항의 골키퍼는 전설의 김병지. 대전의 넘버 2 골키퍼 이승준(현 청주FC GK 코치)이 급하게 들어와 신들린 선방쇼를 펼치며 김은중이 넣은 한 골로 만든 1대0 리드를 끝까지 지켰다. 그의 시즌 첫 출장 경기였다.
 
  “승준이 형이 교체로 들어왔는데 시즌 내내 경기에 나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선수들이 사실 좀 불안한 감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출전했는데도 너무 안정감 있게 잘해주셔서 선수들이 더 똘똘 뭉쳤습니다. 경기 도중에 선수들끼리 ‘은성이 형 병원에 우승컵 들고 가자!’라는 말도 했습니다.”
 
  김은중은 FA컵 최우수선수상과 득점상을 받았다. 생애 첫 성인무대 우승컵과 개인상 수상이었다.
 
  ― 우승하고 나니까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창단하고 나서 매번 지는 경기를 하다 보니까 자존심도 많이 상했는데, 모든 고생을 다 보상받는 느낌이었습니다.”
 
 
  벨기에 프로팀에서 감독 역할 수행
 
  ― 이태호 감독의 시력 약화는 사고 당시부터 많이 알려져 있었는데, 그러면 이태호 감독도 김은중 선수의 시력 문제는 전혀 몰랐습니까.
 
  “모르셨죠. 팀 내 동료들도 전혀 제 부상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 알려진 다음에 동료들이나 코칭스태프는 뭐라고 그러던가요.
 
  “모두 격려의 말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궁금하지만, 아무래도 저한테 정확한 증상을 물어보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런 부분에 있어서 다들 조심스럽게 배려해주셨죠.”
 
  ― 시력 때문에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뭡니까.
 
  “제 포지션이 스트라이커잖아요. 크로스가 오면 제자리에 서서 볼을 받는 것이 아니고, 수비진 사이로 순간적으로 뛰어 들어가는 상황이 많습니다. 그런데 볼이 어떤 속도로 얼마만큼 빨리 오는지를 알아차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티를 내기 싫어서 더 집중했습니다.”
 
  ― 대전에서 우승컵도 들었지만 히딩크 사단에는 뽑히지 못했습니다.
 
  “초창기에 한 번 뽑혔었죠. 히딩크 감독 선임 직후 2001년에 뽑혔었는데, 그 당시에는 제 포지션에 쟁쟁한 선배들이 정말 많았어요. 황선홍 감독, 김도훈 감독, 최용수 감독, 동년배로는 이동국. 월드컵에 나가지 못하는 아쉬움은 물론 있었지만 다들 워낙 뛰어난 선수들이니까 바깥에서 열심히 응원했습니다. 그래도 진짜 열성적인 응원을 받고 경기장에서 죽어라 뛰는 모습을 보니까 그런 부분은 좀 부럽더라고요.”
 
  대전 월드컵 경기장은 한국이 이탈리아를 연장전 끝에 2대1로 물리친 역사적 승전의 현장이다. 김은중은 이때 축구가, 월드컵이 스포츠를 넘어서는 축제가 될 수 있음을 실감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축구의 본고장인 유럽에 꼭 진출하겠다고 결심했다. 이 꿈은 2015~2017년 벨기에 AFC 튀비즈 코치로 부임하며 실현이 된다. 2017년 시즌 막판엔 감독 사퇴 후 감독 대행을 맡아 팀의 3부 리그 추락을 막기도 했다. 대한민국 지도자가 유럽 프로팀에서 감독 역할을 수행한 유일한 사례다.
 
 
  ‘獨眼龍’
 
  8년 동안 대전에서 주공격수로 활약하던 김은중은 2003년 전반기 22경기 출장, 11골 2도움을 올리며 리그 정상급 공격수로 활짝 만개한다. 대전 월드컵 경기장은 평균 관중 1만9092명을 기록하며 명경기에 화답했다. 선수도, 관중도, 2002년 리그에서 단 1승에 그치며 최하위를 차지한 설움을 행동으로 날려버린 것이다. 그런데 하반기, 에이스 김은중의 J리그 이적 소식이 들려왔다. 일본 북부의 베갈타 센다이였다.
 
  “저는 기회가 되면 어디가 되었든 해외 리그에 꼭 가보고 싶었어요. 그때 최윤겸 감독님이 팀을 이끌고 계셨는데 성적이 좋았죠. 결정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시즌 중간에 임대 제안이 오니까 제 미래를 위해 저를 흔쾌히 보내주셨습니다.”
 
  센다이에서는 6개월 동안 활약했다. 그의 활약을 보고 일본 팬들이 독안룡(獨眼龍)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라는 전설적인 무장(武將)의 별명인데, 그 인물에 빗대 제게 센다이를 구해달라는 얘기를 많이 했었죠.”
 
  다테 마사무네의 실명은 다섯 살 때 앓았던 천연두(天然痘) 때문이다. 본인의 장애에 따른 별명. 김은중은 괜찮았을까?
 
  “저는 좋았습니다. 그만큼 기대를 많이 한다는 뜻이고, 또 일본의 전설적인 무사에 빗댈 정도로 저를 인정해준다는 이야기였으니까요. 저는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창사의 왕’
 
  6개월 후 돌아온 팀은 FC 서울. 다섯 시즌 동안 중심 선수로 활약하던 김은중은 2009년 중국 리그 창사 진더로 팀을 옮긴다. 십자인대 부상으로 6개월 재활 후 돌아온 FC 서울엔 좋은 선수가 많아 뛸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프로 생활 13년 차. 선수로서는 내리막에 접어들 시간이지만 김은중은 중국에서 28경기 출전, 10득점 1도움으로 대활약하며 ‘창사의 왕’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 직접 겪어본 한·중·일 축구 문화의 차이가 있다면요?
 
  “선수단 내의 분위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중국은 선수들과 친해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대국(大國)의 자존심이 있었어요.”
 
  ― 어떤 점인가요.
 
  “한국에서는 선배가 후배들 편의점에 데려가서 음료수나 먹을 것을 사주는 일이 자연스럽죠? 중국 선수들은 저를 좋아하면서도, 내 돈 주고 내가 사 먹는다는 문화가 있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좀 친해진 후에는 달랐습니다. 처음엔 다가가기 힘들고 친해지기가 어려웠지만, 한번 친해지니까 중국 선수들은 진짜 모든 걸 다 주더군요. 예를 들어 원정 경기를 갔는데 자기 고향이다, 그러면 과분할 정도로 잘해주더군요. 지금도 연락하는 중국 동료들이 있습니다.”
 
  ― 일본에서는 어땠습니까.
 
  “선수들끼리 편의점 가면 뭘 서로 사주고 그러는 문화는 아니죠. 일본 사람은 예의가 바릅니다. 그래서 깊게 정(情)을 나누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제가 필요한 일이 있다면 자기 전문성을 동원해 성심성의껏 도와주더군요. 2018년부터 일본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 모리야스 하지메 감독이 제 센다이 시절 룸메이트입니다. 2018 팔렘방 아시안게임 때도 결승에서 만났고 2020 도쿄 올림픽 때도 같은 호텔에 묵었죠. 지도자 생활 하면서도 자주 만나고,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조만간 일본에 가서 만날 계획이 있습니다. 직접 보고, 지난 월드컵에서 16강에 오른 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싶습니다.”
 
  중국에서 한 시즌을 보내고 돌아온 김은중은 2010년 제주 유나이티드에 입단한다. 그러고 주장이라는 중책을 맡는다. 중국에서는 재계약을 원했지만, 한국에서 한 번 더 도전하고 싶어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시즌 종료 시점에서의 결과는 32세의 커리어 하이 시즌. 팀은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지만 그는 13골 10도움을 기록하며 MVP로 뽑힌다. ‘십자인대 부상으로 거의 끝났다’는 세평을 실력으로 잠재운 것이다. 이후 강원, 포항을 거쳐 2014년 플레잉코치로 친정팀 대전으로 복귀한다. 선수로서 그의 마지막 시즌이었다.
 
 
  “어린 선수들, 좀 더 노력했으면…”
 
김은중 감독은 지난 5월 23일 2023 FIFA U-20 월드컵 조별리그 1차전 대한민국과 프랑스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사진=뉴시스/대한축구협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2015년부터 3년간 벨기에 지도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자 대한축구협회가 도움을 청했다. 2017년부터 U23 대표팀 코치로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에 다녀왔고 2022년부터는 U20 대표팀 감독의 중책을 맡았다.
 
  ― 감독을 해보니까 코치 할 때와는 어떤 점이 제일 차이가 났습니까.
 
  “무엇보다도, 책임감의 무게가 다릅니다. 코치 때는 어느 한 부분만 신경 쓰면 되지만 감독은 선수단 전체를 이끌어야 하고, 코칭스태프와 지원 인력까지 하나로 묶어서 끌고 가야 하니까요.”
 
  ― 선수들과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다면요?
 
  “저희 때는 선생님들이 시키는 훈련은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한데 요즘 선수들은 왜 이 연습이 필요한지 이해시키고 설명해줘야 따라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시간을 많이 할애합니다.”
 
  선수들의 사생활에 대해 조언할 때도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이성 문제로 논란이 생기면 경기력에 바로 지장이 오기 때문이다.
 
  ― 어린 선수들에게 꼭 좀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저는 좀 더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우리 선수들에게 황희찬 선수 일상을 담은 영상을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 저 선수가 세계 최고의 리그라는 EPL에서 뛰고 있지만, 저 리그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베스트로 나가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지 봐라. 하루 일과를 보면 진짜 음식부터 훈련의 준비 과정, 모든 시간이 축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우리는 저 선수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
 
 
  ‘효율적인 축구’
 
  ― 영상을 보여주니 선수들이 어떻게 반응하던가요.
 
  “숙연해지더군요. 다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선수들이고 좋은 무대에서 뛰고 싶다는 꿈과 목표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 단계를 뛰어넘으려면 피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손흥민 선수 역시도 그랬죠.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 구체적인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가지 않으면 저 위로는 절대 가지 못합니다. 과정이 없는데 어떻게 갑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 좋은 감독은 어떤 감독입니까.
 
  “유소년팀에선 선수를 기르고, 대표팀과 프로팀에선 성적을 내는 감독이 좋은 감독입니다.”
 

  그는 최근의 세계 축구계의 흐름에 정통하다. 자기 축구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여건과 상황에 맞춰 전략·전술을 유연하게 마련한다. 그래서 명장(名將)이다. 어떤 팬들은 이번 청소년 월드컵에서 한국팀이 일곱 경기를 수비적으로 했다고 평가했다. 절대 훈련 시간이 부족했고, 또 부상 선수라든가 기타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작전 폭이 크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데이터를 보면 수비적으로 했다고 하기 어렵죠. 7경기에 9골을 넣었으니까요. 우리는 주 라인을 하프라인으로 잡았습니다. 정말 10명이 다 수비하거나 라인을 내리면 공격진까지의 거리가 너무 벌어지죠. 비기거나, 세트피스 득점으로 운 좋게 이기겠다면 몰라도, 그런 축구를 할 순 없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수비 축구를 하면 오히려 질 확률이 높습니다.”
 
  ― 왜 그렇습니까.
 
  “월드컵에서 우리가 상대를 압도하면서 주도권을 잡고 경기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경기 감각과 경기 체력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데, 이건 훈련으로 채울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선수들은 소속팀에서 거의 경기에 나가지 못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준비한 포메이션인 겁니다. 효율적인 축구죠. 또 골키퍼 셋 중 한 명을 제외하고 전 선수가 두 경기 이상씩은 다 뛰었습니다. 로테이션 폭을 넓힌 것도 상황에 맞는 대비였습니다.”
 
  꾸준한 준비는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노력만큼 심리적 안정도 중요하다. 김은중 감독이 은중(誾中)에서 은중(誾仲)으로 한자(漢字) 이름을 개명(改名)한 이유다.
 
  “선수 때 자꾸 다치고, 회복 이후에도 잔부상이 많아서 기분 전환 차원에서 한자를 바꿨습니다. 심리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안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명 이후에 부상도 없었고 지도자 생활도 좋은 방향으로 풀렸기 때문에 개명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첫사랑이자 끝사랑’인 대전
 
  스포츠가 아름다운 건 현실에선 좀처럼 벌어지기 어려운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기 때문이다. 2014년, 그는 또 하나의 낭만(浪漫) 스토리를 쓴다. 2014년, 11년 만의 대전으로의 귀환이다.
 
  “제가 2013년에 포항과 계약이 끝나고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의 한 팀과 입단 교섭이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직접 가서 미팅도 했고 계약서에 사인할 일만 남았는데, 대전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그때 대전이 2부로 떨어져 있었는데 꼭 와줬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은퇴는 꼭 대전에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도자 생활을 위해 선수 생활의 마무리를 미국에서 장식하고, 은퇴 후 미국 스포츠 산업을 배우려던 장기 인생 계획을 접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연봉이나 지도자 연수 등 미국 쪽 제안도 거절하기 어려울 만큼 좋았다. 나이가 있어 해외로 나가려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래도 그는 ‘첫사랑이자 끝사랑’인 대전으로의 복귀를 결심했다. 그의 복귀 소식에 대전 팬들이 눈물을 흘리며 열광한 배경이다.
 
  “그런데 저는 부담감이 많았습니다. 왜냐면, 제가 대전을 떠날 때 그 시기가 관중도 많았고 팀 성적도 좋았고 저 역시도 컨디션이 진짜 좋았던 시기였거든요. 모든 사람 머릿속에 ‘전성기의 김은중’이 있는데, 은퇴 직전엔 그런 퍼포먼스가 당연히 안 나오잖아요. 그런 생각으로 제 경기를 보다 팬들이 실망하실까 봐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택한 해결책이 ‘플레잉코치’로의 복귀 선언이다. 하지만 팬들은 김은중이 다시 대전 유니폼을 입고 운동장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다. 그것은 팬들의 로망이었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좋다고 했다. 동계 훈련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지만, 김은중은 홈 개막전에서 교체로 나와 15분을 뛰었고 5월에는 마침내 정규 리그 복귀골도 넣었다. 후반기에는 거의 주전으로 활약하며 대전의 승격 확정 골을 어시스트했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선 두 골을 몰아치며 팀의 5대2 승리에 기여했다.
 
 
  기억하다, 기다리다, 돌아오다
 
  그렇다면 대전과 김은중은 늘 사이가 좋았나? 아니다. 그가 일본에서 돌아와 대전이 아니라 서울을 택했을 때, 대전 팬들은 ‘김은중 유니폼 화형식’을 가졌다. 그만큼 애정이 깊었다는 뜻이다. 애정이 깊었기에 분노도 컸다.
 
  “그 당시에, 저는 강팀에 가서 경쟁하고 또 선수로 성장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도전을 택한 거죠. 그리고 이적료도 적지 않았습니다. 팀에도 10억원이라는 금전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에 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죠.”
 
  팬들은 자세한 내막을 몰랐다. 이적 배경에 대한 스토리가 알려지자 팬들은 경기장에 걸개그림을 걸었다. 그림 속에는 그의 등번호 18번을 단 ‘김은중’이 팀 마스코트와 등을 보이고 어깨동무를 한 채 앉아 있었다. 하단에 쓰인 글씨는 ‘기억하다, 기다리다’였다.
 
  그의 복귀 후 ‘기다리다’에 줄을 긋고 팬들은 ‘돌아오다’라고 썼다. 김은중은 모든 선수에게 큰 형님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팀을 하나로 모았다. 그러고 1부 리그 승격을 이룩하고 축구화를 벗었다. 팬들은 김은중이 팀에 남아 1부 리그에도 출전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김은중은 이 몸 상태로 1부 리그에서 뛰는 것은 욕심이라며 잘랐다. 그러고 곧바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또 다른 인간 승리 분투기의 새 챕터를 써가는 중이다.
 
  그는 19세 때 만나 7년을 연애하고 결혼한 아내와 1남 1녀 자녀가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했다. 불운(不運)에 정면으로 맞서서, 선수로 또 감독으로 모두 성공한 김은중은 우리의 버팀목이다. 그가 여러 팀으로부터 끊임없이 제안을 받았던 까닭이 있다. 그는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존재였다. 늘 이타적(利他的)이었고 경기장 안팎에서의 모범적인 생활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리더십은 무언(無言)과 헌신(獻身)의 리더십이었다. 김은중에게 장애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숱한 난관을 이겨내고, 인류의 변경(邊境)에서 그가 피어 올린 횃불은 등대(燈臺)처럼 밝고 모닥불처럼 따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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