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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인물

독립운동가 유일한 박사와 대한민국 헌법

그가 기초한 ‘한국 국민의 열망을 표명하는 결의문’, 대한민국 헌법의 大綱이 되다

글 : 김광주  월간조선 기자  kj961009@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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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주 항일조직 ‘해외 한족대회’ 주도
⊙ 민족경제 살리며 1926년 유한양행 설립
⊙ 1941년부터 OSS 특수공작대서 활약
유일한 박사
  유한양행의 창업주이자 기업인 유일한(柳一韓·1895~1971) 박사는 교육자와 사회사업가를 넘어 독립운동가이다.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기자는 유한양행 측을 통해 독립운동가 유일한 박사의 면모와 관련된 자료를 입수하였다.
 
  1894년 12월 13일 태어난 유일한 박사는 11세 때인 1905년 미국으로 유학,네브래스카주 커니에 정착했다. 그는 1909년 박용만이 미주 지역에서 최초로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입교,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학과 공부와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 학교에서의 3년간 생활에서 형성된 민족의식과 자주독립 사상은 유일한 박사가 전개한 독립운동의 원천이었고 기업경영의 지표로 작용했다.
 
 
  “우리 민족 스스로 역량을 결집해야”
 
  유일한 박사의 민족의식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날은 1918년 11월 11일, 아미스티스 데이(Armistice day)였다. 이날을 기념하여 미시간주립대가 있는 앤 아버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기뻐하며 춤을 추었다. 자동차를 가진 사람들은 차들을 몰고 나와 경적을 울리고 거리를 가로지르는 전차도 종을 울려댔다. 드디어 세계대전이 끝난 것이었다.
 
  유일한과 호미리(胡美利)도 거리로 나가 인파에 휩싸여 떡갈나무, 참나무들이 가로수를 이루고 있는 거리를 한없이 걸으며 함께 기쁨을 나눴다. 호미리가 일한의 팔을 끼어 안으며 그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했다.
 
  “윌슨 대통령이 지난 1월에 민족자결주의 14개항을 발표했잖아요. 한국도 이번 기회에 일본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일본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속했으니 미국이 일본을 견제하기는 힘들 거예요. 미국이 필리핀을 독립시키고 국제사회에서 떳떳해지지 않는 이상, 일본에 한국 문제와 관련하여 압력을 넣기는 힘들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 호소할 뿐 아니라 우리 민족 스스로 역량을 결집하여 국제 여론을 움직여야 조금씩 독립의 길이 열릴 거예요.”
 
  유일한이 사뭇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또 재미 한국인들 모임이 많아지겠군요.”
 
  그런 모임에 유일한이 주요 직책을 맡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앞으로 데이트할 시간이 줄어들겠다는 뜻도 포함된 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재미 한국인들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같은 해 12월 1일 안창호를 비롯한 한국인 대표들은 재미한인 전체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1919년 1월 18일부터 열리는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대표로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들을 선정하고 군자금 30만원 모금운동도 벌였다.
 
  헤스팅스고교를 거쳐 미시간주립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유일한은 ‘한인자유대회’에 대의원 자격으로 서재필,이승만,조병옥,임병직 등과 함께 참가했다.
 
  3·1운동 한 달 뒤인 4월 10일, 중국 상하이 현순 목사의 중국식 35평 가옥에서 이동녕, 여운형, 조동호 등 29명의 임시 의정원 의원들이 제1회 의정원 회의를 열고 임시정부를 구성한 후 4월 13일, 임시정부가 한국의 정통 정부임을 내외에 공식적으로 선포하였다.
 
  바로 그 다음 날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서재필을 중심으로 한 한인 대표 150여 명은 다수의 미국인과 함께 필라델피아시 17가(街)와 델란시가의 교차점에 위치한 리틀 극장에서 제1차 한인 총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하였다. 유일한 관련 전기나 독립운동 논문들에서 이 대회를 ‘한인자유대회’라고 하고 있으나, 1942년 2월 말에서 3월 초까지 워싱턴에서 이승만이 주관한 대회가 ‘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인 것이다.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유일한 박사가 1919년 4월 미국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를 마치고 행진하는 모습이다.
  한인 총대표회의는 시종 거의 영어로 진행되었다. 매일 미국 성직자들의 성경 봉독과 기도, 축사로 시작하여 미국 대학교수들의 강연, 한국에서 얼마 전에 돌아온 선교사들의 증언, 독창과 기악 독주 등의 순서들이 이어졌다. 첫날 오하이오주 오벌린대 여학생인 노디 김(Nodie Dora Kim·한국명 김혜숙)이 한국 여성을 대표해서 연설했다. 노디 김이 단상에 올라가 3·1운동을 탄압한 일제의 잔인성을 열변으로 규탄했다.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던 어린 여학생 두 사람이 일본 경찰의 칼에 맞아 팔목이 잘렸습니다.”
 
  청중은 노디의 연설을 듣고 모두 큰소리로 통곡하였다. 노디는 이제 한국의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하며 보통선거권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메시지’ ‘한국 국민이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일본 국민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표명하는 결의문’ 등이 작성되었다.
 
 
  24세의 ‘결의안’ 기초위원장
 
1945년 1월 미국 버지니아주 핫 스프링스에서 열린 IPR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유일한 박사(중앙).
  이때 미시간대 졸업반인 유일한도 당당히 재미한인 대표로 참여하여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표명하는 결의문’ 기초작성 위원회 대의원으로 수고하였다. 그런데 그 결의문 작성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다.
 
  이승만 연구의 권위자인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의 〈3·1운동 후 서재필의 신대한 건국 구상〉이라는 논문을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참고로, 이 결의안에 대해서 대회 참가자들이 얼마나 열띤 논의를 전개했는지를 짚고 넘어가자. 우선 이 결의안의 작성 책임을 맡았던 유일한의 경우 그가 이 결의안 기초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지명된 것은 일찍이 미시간대 입실란티 법과대학(The Ypsilanti School of Law)에서 법학을 공부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유일한이 대회 참가자들 가운데 법률 지식이 가장 풍부한 인재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약관 24세인 그에게 이 결의안 작성의 중책이 맡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일한은 이 결의안을 본회의에 상정했을 때 자기가 이끈 기초위원회의 임무가 얼마나 중요하며 또 그 책무가 얼마나 버거운 것이었는지를 아래와 같이 실토하였다.〉
 
  여기서 보면 유일한 박사가 미시간대 입실란티 법과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미시간대 상과를 전공하였지 법학을 공부했다는 기록은 다른 데서는 잘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1948년 무렵 50대 중반의 나이에 스탠퍼드대학에서 국제법을 전공한 것으로 볼 때, 미시간대를 다닐 적부터 부전공 형식으로 법학을 공부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유일한 박사는 결의문 작성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했다.
 
  “우리는 이 결의안을 기초하면서 그 작업이 우리의 실력으로는 만족스럽게 완수할 수 없는 힘겨운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손에 잡히는 것을 제출해야 했기 때문에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기본 원칙들(cardinal principles)을 처음으로 문장화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들이 안정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조국에서 대규모 의회(a great Congress)를 개최할 때 그 회의에 참석하게 될 많은 석학(eminent scholars)이 훌륭한 헌법을 제정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유능한 인재들을 한곳에 모으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실력으로는 우리의 ‘목표와 열망’을 완벽하게 표출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초안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것입니다.”
 
  유일한 박사를 위원장으로 한 위원회가 작성한 결의문은 장차 제정될 대한민국 헌법의 대강(大綱)인 셈이었다.
 
 
  아버지 유기연 선생은…
 
  3·1운동 직후 만주의 모습은 어땠을까. 만세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만주의 간도에서도 일어났다. 특히 유일한의 아버지 유기연(柳基淵·1861~1934년)이 살고 있는 북간도 연길현 용정시에서는 3월 13일 정오에 천주교 교회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1만여 명의 군중이 일본 영사관 바로 옆 넓은 평야로 모여들었다. 독립기념회라는 이름으로 독립선언이 발표되고 ‘대한 독립만세’가 외쳐졌다. 유예균을 비롯한 세 명의 연사가 열정적으로 연설을 하자 사람들은 한결같이 눈물을 흘렸다.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하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용정 시내 한국인 가옥 800호에는 집집마다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유기연 선생이 재정 담당으로 있던 명동학교 학생대는 선두에서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시위대를 격려하였다.
 
  그때 유기연의 집이 있던 국자가에는 중국 보병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보병단장 맹부덕에게 압력을 넣어 중국 군인 50명을 보내어 시위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중국 군인들은 처음에는 경계만 하려고 하였으나 시위대 선두에 있는 대한독립기를 빼앗음으로써 시위대의 격렬한 저항을 받자 그만 발포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순식간에 한국인들이 쓰러져 그날에 17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하였다.
 

  유기연은 그 북간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날 피를 흘리는 사상자들을 영국 선교사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으로 이송할 때도 유기연은 그 현장에 있었다.
 
  유일한 박사는 대학을 졸업한 뒤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여기서 마련된 자금으로 귀국해 1926년 유한양행을 설립했으며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그가 유한양행을 설립한 것은 민족의 실력 양성과 경제적 자립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유한양행의 해외지사는 전략적으로 주요한 도시에 세워졌으며 이들은 유사시에 항일운동의 지하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방침이었다.
 
  1930년대 들어 일제의 만주침략과 중일전쟁 등으로 국내외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유일한 박사는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 체류했다. 수출선의 다변화를 위해 유럽 및 중국 시장 개척에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 한족대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 임정의 후원 아래 항일독립전선에 모든 역량을 집결하여 광복대업을 촉성하기 위한 대일 민족통일전선의 일환으로 구상된 것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제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유일한 박사는 미군 전략정보처 OSS(현 CIA 전신)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했다. 조국 광복에 대한 유일한 박사의 투철한 의지는 1945년 ‘냅코(NAPKO) 작전계획’의 참여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OSS가 수립한 이 계획은 반일(反日)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한인을 선발,특수공작훈련을 시킨 뒤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적 후방을 교란하려는 작전이었다. 1945년 1월 이 작전계획의 핵심 요원으로 선발된 유일한 박사는 제1조 조장으로 임명돼 명령을 기다리던 중 일제의 항복으로 작전 실행을 하지 못했다.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 실천
 
  유일한 박사는 1946년 7월 미국에서 귀국한 뒤 유한양행을 재정비,사장과 회장,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다. 아울러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1964년 유한공고 등을 설립 운영했고 개인 소유 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는 등 자본의 사회환원에도 힘썼다. 특히 1969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혈연관계가 없는 전문 경영인에게 경영권을 인계,전문 경영인 시대의 서막을 열었으며 한국에서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천하는 등 기업경영사에 남을 선진적인 일들을 몸소 실천했다. 유일한 박사는 1971년 3월 11일 76세로 타계했으며,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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