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 일찍 돌아가신 뒤 트로트에 심취해 눈물짓기도… 중3 때 500곡 외워
⊙ 시인 김지하와 노래 대결… 새벽 5시 반쯤 김지하 벌러덩 쓰러져
⊙ 식민지 시대 가수들은 20세기 격변을 몸으로 직접 겪었던 세대
⊙ 식민지 조선에서 시작된 노래 ‘방랑가’는 당시 일본과 중국에서도 편곡되고 번안돼
⊙ 이애리수의 ‘황성(荒城)의 적(跡)’은 발매 1개월 만에 5만 장 팔려
⊙ 천재 음악가 집안 김용환·김정구 가족
李東洵
1950년생.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박사 /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마왕의 잠, 문학평론 당선 / 안동간호대 교수, 충북대 교수, 영남대 교수 역임
⊙ 시인 김지하와 노래 대결… 새벽 5시 반쯤 김지하 벌러덩 쓰러져
⊙ 식민지 시대 가수들은 20세기 격변을 몸으로 직접 겪었던 세대
⊙ 식민지 조선에서 시작된 노래 ‘방랑가’는 당시 일본과 중국에서도 편곡되고 번안돼
⊙ 이애리수의 ‘황성(荒城)의 적(跡)’은 발매 1개월 만에 5만 장 팔려
⊙ 천재 음악가 집안 김용환·김정구 가족
李東洵
1950년생. 경북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박사 /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마왕의 잠, 문학평론 당선 / 안동간호대 교수, 충북대 교수, 영남대 교수 역임
-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사진=조선DB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가요연구가인 이동순(李東洵·1950~) 영남대 명예교수는 오랫동안 ‘번지 없는 주막’을 찾아왔다. 한국 가요사의 ‘잃어버린’ 번지를 찾기 위해 자료 수집과 정리 및 연구에 몰두해왔다. 이런 노력을 통해 우리 가요는 ‘번듯한’ 번지를 갖게 되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트로트 광풍에 휩싸여 있다. 이 광풍의 한 자락에 이 교수의 땀방울도 있으리라.
이 교수가 최근 벽돌 한 장(700쪽) 두께의 책 《한국 근대가수 열전》(소명출판)을 펴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한 손으로 책을 들기 어려울 정도다.
지난 9월 초 이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공교롭게도 서울에 약속이 있다고 했다. 어느 80대 할머니 팬이 귀한 근대 자료를 보여주겠다고 해서 약속을 해뒀다는 것이다. 며칠 뒤 지하철 4호선 숙대역 앞에서 만난 박남수 할머니(가명·84)는 곱고 가냘파 보였다. 박 할머니는 지금까지 변사(辯士) 김덕경(金德經·?~1934)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털어놨다.
김덕경. 그는 일제 시대 단성사(團成社·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극장) 전속 변사로 활동한 유명한 인물이다. 유창한 어조로 연약한 아녀자의 음성은 물론 웅장한 대장부의 호통에도 능했다. 간혹 대포 소리까지 들려주며 관객의 영화 이해와 감상을 도왔다. ‘활동사진 해설가’ ‘화면 해설가’ ‘달변가’ ‘변인(辯人)’ 등으로 불렸다. 박 할머니의 말이다.
“제가 딸도 아닌데, 어쩌다 이분 제사를 지금껏 지내고 있어요. 이분이 자손이 없으셨어요. 40대에 가셨는데 어쩌다가 평생을 모시는데….”
이동순: “어디다 모셨습니까.”
박 할머니: “묘는 없어요. 돌아가실 때 이분이 《현대공론사》 지부장(?)으로 계셨고, 그때 신문사를 운영하시려고 재산을 다 탕진해가며 (조선)총독부에 드나드셨는데 그게 잘 안 되어….”
박 할머니는 낡은 스마트폰에 담긴 서화 몇 점을 보여주었다. 실물은 가지고 오지 않았다.
이: “전화로는 한 90점 된다고 하시더니….”
박: “사실은 그렇게 많이 없어요.”
변사 김덕경의 조카 할머니
이동순 교수 얼굴에 일순 당황한 빛이 감돌았다. 박 할머니의 말이다.
“김덕경 선생이 냉면을 드시다가 그게 잘못되어서 한 3년을 고생 고생하시다가 신문사 한답시고 재산 다 집어넣고 불쌍하게 집도 없이 셋방에서 돌아가셨어요.
이분이 잘나갈 때 여러 가수를 먹이고 재우고 입혔는데 의리가 없더군요. 제 생각에 이분이 무슨 실수를 많이 하셨는지….”
이: “당시 변사는 장안의 명사였어요. 김영환이란 변사가 있었는데 서울 장안에 승용차가 몇 대 안 되던 시절에 캐딜락을 타고 다녔대요. 금으로 된 장신구도 많고, 기생 인력거에 노상 납치도 되고…. 그러나 토키(Talkie·유성영화) 시대가 도래(到來)하면서 설 자리를 잃었죠.”
이: “김덕경 선생은 어떻게 돌아가셨나요?”
박: “말년에 왕십리 오간수다리 근처에서 사셨는데 처참하게 가셨어요. 그분 아내도 함께 모시고 있어요. 아들을 못 낳아서 굉장히 죄스럽게 생각하셨죠. 실은… 김덕경 선생의 아내가 제 고모입니다.”
그러니까 박 할머니는 고모부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셈이었다. 이 교수가 “기일(忌日)이 언제냐”고 묻자 박 할머니는 뜻밖의 고백을 했다.
“음력으로 8월 27일. 그날 제가 태어났대요. 저는 생일이 없어요. 생일날, 두 분 제사를 모셔야 해요.”
박 할머니는 KBS 라디오 〈세월 따라 노래 따라〉를 가끔 들었는데 이 프로그램의 DJ가 이 교수여서 “염치 불구하고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고 했다.
그녀가 집에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뒷모습을 보니 마치 흘러간 옛 노래처럼 슬프고 아련한 무엇이 느껴졌다.
박 할머니를 바래다 드리고 돌아온 이 교수는 “폐허에 방치된 낡은 편린들을 하나둘씩 찾아내어 깁고 짜 맞추어 옛 가수의 생애사를 회복시켰다”면서 저서 《한국 근대가수 열전》을 탁자 위에 내놓았다. 기자는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과거 식민지 시절의 가수들이 낡은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 전국을 방랑하던 악극단 추억을 전설로 복원한 것이다. 이동순 교수의 말이다.
“식민지 시대 가수들은 20세기 격변을 몸으로 직접 겪었던 세대들입니다. 그들이 발표했던 가요 작품들과 가수로서 딛고 간 생애의 발자취를 추적 정리하는 일은 자못 의미 있었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와 관련된 문제의 구체성이 가수들의 행적에 반영되어 있으니까요.”
이 교수에 따르면 ‘가요황제’ 남인수(南仁樹·1918~1962년)의 생애는 제국주의 식민통치와 더불어 펼쳐지고 마감되었다. 백년설(白年雪·1914~1980년)도 희곡을 습작하던 문학청년으로 대중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지만 일제 말 가혹한 환경의 굴레에 압도당하고 만다. 가수 이난영(李蘭暎·1916~1965년) 역시 식민지 침탈 초기의 빈곤과 고난, 그로 인한 가족의 이산과 붕괴, 6·25전쟁을 겪으며 마침내 생의 파멸에 이르는 참혹한 과정을 겪는다. 이 교수는 “식민지 시대, 어떤 가수를 막론하고 그를 둘러싼 시대와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김덕경, 복혜숙, 그리고 ‘째즈쏭’
― 최초의 재즈가수였던 배우 복혜숙(卜惠淑·1904~1982년)은 어떤 분인가요.
“강원도 산골에서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복혜숙은 그 생활이 너무도 싫었던 나머지 어느 날 아버지 몰래 짐을 챙겨 서울로 무작정 올라오게 됩니다. 두 번째 가출인데 아버지가 강원도 김화교회의 목사가 되어 임지로 떠났기 때문이었어요.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극장이었던 단성사를 찾아가 인기 변사 김덕경을 만나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속 포부를 밝힙니다.
김덕경은 복혜숙에게 신극좌(新劇座)의 김도산(金陶山·1891~1921년)을 소개해줍니다.”
복혜숙은 1926년 영화 〈농중조(籠中鳥)〉, 1927년 〈낙화유수〉, 1928년 〈세 동무〉 〈지나가(街)의 비밀〉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입지를 단단하게 다졌다.
“배우 복혜숙이 1929년 첫 음반을 냈는데 영화극이란 장르를 단 《장한몽》이었습니다. 이후 많은 영화극 음반을 발표했고 배우로서 대중적 명성이 제법 알려지기 시작하던 1930년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가요음반이 발매되었습니다. 《그대 그립다》 《종로행진곡》 《목장의 노래》 《애(愛)의 광(光)》 등을 발매할 때 ‘시대요구의 째즈’라는 이채로운 문구를 사용합니다.”
― 미국 흑인음악 재즈를 말하는 것인가요.
“째즈라는 표현을 쓰고는 있지만 미국식 정통 재즈라기보다 그저 새로운 특성의 가요를 뜻하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복혜숙 노래의 반주를 맡았던 악단도 ‘콜럼비아째즈밴드’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이 음반에 ‘째즈쏭’이란 꼬리표가 붙은 것이 이채로운데 어쨌든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재즈가수였습니다.”
강석연의 ‘방랑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마음속 풍경은 강석연(姜石燕·1914~2001년)의 노래 ‘방랑가’를 통해 알 수 있다. 어쩌면 한잔 술에 취하여 이 노래를 부르면 답답하던 숨통이 트이는 듯했을지 모른다. 이 교수의 말이다.
“흔히들 ‘방랑가’를 평가하면서 이 노래가 식민지 시대에 많이도 발표되었던 유성기 음반 중 이른바 ‘방랑물(放浪物)’ 가요의 기점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애리수, 고운봉, 명국화 등 많은 가수가 다시 불렀지요. 그 가운데서도 유독 강석연이 부른 이 노래는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우뚝한 창법으로 시대적 분위기와 색깔을 잘 담아서 들려줍니다.”
피 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낙망과 설음에 병든 몸으로/ 북국한설 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달픈 이내 가슴 누가 알거나
-가수 강석연의 노래 ‘방랑가’ 1절
이 교수는 “강석연의 ‘방랑가’를 귀 기울여 들어보면 넋을 놓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아득한 눈보라 벌판을 걸어가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시작된 노래 ‘방랑가’는 당시 일본과 중국에서도 편곡되고 번안되어 불렸다고 한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방랑가’를 검색하면 뜻밖에도 일본과 타이완에서 여전히 활발하게 연주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동북아시아 일대의 음악적 영향 관계는 이처럼 결코 간단하게 규정할 수 없는 긴밀한 상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교수는 강석연과 관련한 놀라운 에피소드 한 편을 들려주었다.
“언젠가 국가대표 농구감독을 지낸 방열 감독(현 가천대 명예교수)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여러 해 전 어느 신문에 기고했던 강석연 여사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며 그분이 자기 어머니라는 겁니다. 그때까지 어머니가 가수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해 깜짝 놀랐어요. 일제 말 언론인이었던 부친 방태영(方台榮·1885~?) 선생이 북으로 납치되어 끌려가고 그 험난했던 시기를 거치는 동안 강석연은 오로지 가족 부양과 자녀 양육에만 전심전력을 쏟은 것이죠.
방열씨의 회고에 따르면 소년 시절 다락방에서 물건을 뒤지다가 붉은 보자기에 싸인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풀어보려 하자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그 물건을 아주 깊은 곳에 감추어버렸다고 해요. 아들은 끝내 그 내용물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가수였던 사실 감춘 강석연·이애리수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은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버레 소래에 말없이 눈물져요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 1절
우리 대중음악사에 ‘황성(荒城)의 적(跡)’ 한 곡으로 기억되는 ‘살뜰한 이름’의 가수 이애리수(1910~2009년)가 있다. 이 교수는 “한 사람의 가수로서 많은 곡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족의 심금을 울리는 절창(絶唱)이라면 단 한 곡만이라도 그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연극 공연의 막간(幕間)에 이애리수가 이 곡을 불렀고 1932년 봄 빅타레코드사에서 정식으로 음반을 취입하는데 전국의 가요팬들이 ‘황성의 적’이 담긴 음반을 구입하기 위해 레코드판매점 앞에 길게 줄을 섰고 축음기 판매량도 늘었다고 합니다.
주로 악극단 공연이나 무대를 통해서만 보급되던 유행 창가나 영화 주제가들이 드디어 음반을 통해 정식으로 보급되는 계기를 맞이한 겁니다.”
이 음반이 나오자마자 불과 1개월 만에 5만 장이나 팔려나갔다고 하니 그 인기의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애리수는 2009년 3월 31일 9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동순 교수는 ‘1세대 인권변호사’ 홍성우(洪性宇·1938~2022년)의 안내로 이애리수의 장남 배두영씨를 만난 일을 떠올렸다.
“배두영 선생에 따르면, 자신의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어머니가 가수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하니 참 놀라운 일입니다. 예전 가수 출신 어머니들은 자신의 과거 경력을 일절 비밀에 부쳤는데 그 까닭은 자녀 교육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판단 때문으로 보입니다.”
천재 음악가 집안
한국 대중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작사와 작곡과 노래를 겸했던 만능 대중음악인은 그리 흔하지 않다. 당장 손꼽을 수 있는 인물로는 천재 음악가 김해송(金海松·1910~1950년) 정도다. 여기에다 한 사람을 더 들라면 이동순 교수는 주저하지 않고 김용환(金龍煥·1909~1949년)을 꼽는다. 두 사람의 공통적인 면은 하나같이 작곡과 가창을 겸하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뛰어난 독보성을 지녔다는 점이다. 이 교수의 말이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매우 희귀한 천재 음악가였던 김용환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습니다. 원래 기독교 집안으로 예수의 제자인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따서 용환이 되었습니다. 그의 다른 형제들로는 가수로 출세했던 아우 김정구(金貞九·1916~1998년), 피아니스트였던 아우 김정현(金貞賢·1920~1987년), 소프라노 가수였던 누이동생 김안라(金安羅·1914~1974년) 등이 있는데, 자체로 출중한 음악가 집안이었습니다. 여기에다 김용환의 아내 정재덕(鄭載德·?~1950년) 또한 가수가 되었으므로 가히 명문 음악가 집안이라 할 만하지요.”
― 유명한 음악 가족이군요.
“4남매와 형수가 원산에서 주거할 시절, 가족연주단을 조직해 동해안 길을 따라 남쪽으로 금강산 온정리 마을까지 두루 다녀가며 공연을 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그들 형제는 교회 음악을 통해 음악적 재능을 키워간 것으로 보입니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러 마을과 교회에서 칭찬이 자자했다고 하죠. 작곡과 가창은 물론이요, 연극배우로서의 재능을 뽐내기도 했고, 온갖 악기 연주에 능통했다고 해요. 그야말로 무불통지(無不通知). 노래는 언제나 탁 트인 목소리로 걸쭉하고도 능청스러우며 시원한 서민적 창법으로 불렀습니다.”
이 교수는 김용환을 ‘서민적 창법의 원조가수’라 불렀다.
“김용환 노래를 귀 기울여 가만히 듣노라면 마치 판소리를 부르는 소리꾼의 소탈하고도 호방한 창법에 서민적 삶의 정겹고 구수한 향취마저 느껴집니다. 뭐랄까, 민중적 넉살이랄까요?”
‘눈물 젖은 두만강’의 사연은…
김용환의 동생 김정구도 한국 가요사에 있어 ‘눈물 젖은 두만강’ 하면 떠오르는 가수다.
‘두만강’은 예부터 삶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듯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의 피눈물이 흐르는 강이라 하여 일명 ‘도망강’이라 불렸다.
“‘눈물 젖은 두만강’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작곡가 이시우(李時雨·1913~ 1975년)가 신파극단 ‘예원좌(藝苑座)’ 소속으로 만주의 투먼에서 공연을 마치고 두만강 부근 어느 여관에 머물고 있던 밤, 여인의 처절한 통곡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시우는 이튿날 그 통곡의 사연을 물었고, 여관집 주인으로부터 독립군으로 떠난 여인의 남편이 불과 1년 전 일본군 수비대의 총탄에 맞고 세상을 떠난 내력을 전해 들었다고 해요. 이 사연을 조선족 시인 한명천(韓鳴川)에게 들려주었더니 즉석에서 가사 1절이 나왔고 여기에 이시우가 두만강 물소리를 들으면서 작곡한 곡이 바로 ‘눈물 젖은 두만강’입니다.”
며칠 후 예원좌 무대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불렀더니 관중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순회공연 후 이시우는 뉴코리아레코드사 소속의 가수 김정구를 찾아가 이 노래의 취입을 제의했고 김정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시 한명천이 쓴 가사는 1절뿐이었는데 작사가 김용호(金用浩·1908~1967년)가 여기에 2절과 3절 가사를 새로 붙이고 전체의 균형을 조화롭게 다듬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노래 1절의 작사가는 한명천이고, 이를 완성시킨 작사가는 김용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1절
이동순 교수의 말이다.
“이런 와중 6·25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김정구는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 내려와 떠돌이 빵장수, 지게꾼, 무대 출연 등으로 몹시 고달픈 실향민의 생존을 이어갔습니다. 그가 취입한 대부분의 노래가 조명암(趙鳴岩·1913~1993년), 박영호(朴英鎬·1911~1953년) 등 월북 작사가의 작품이었기에 부를 노래가 없었지만 오로지 ‘눈물 젖은 두만강’만큼은 어떤 금지에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1980년에는 정부가 수여하는 보관문화훈장도 가수로서 맨 처음 김정구가 받았지요. 가는 곳마다 ‘눈물 젖은 두만강’만을 불러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이 노래는 김정구 고유의 상징이자 단골 레퍼토리가 됐습니다.”
전쟁 중에 세상 떠난 어머니
이동순 교수가 이처럼 우리 가요에 깊이 천착한 데는 아픈 이유가 있다. 어쩌면 ‘잃어버린 번지’를 찾기 위한 노력은 그야말로 운명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6·25 발발 무렵 그는 어머니 배 속 불과 8개월의 태아였다. 경북 김천 구성면 상좌원 마을에 북한군이 들어온 때는 그해 8월 초순.
어머니는 마을에서 약 8km가량 떨어진 나실(羅室)이라는 문중(門中) 종산(宗山)을 향해 걷고 또 걸어서 당도했다. 그가 태어나는 그 순간에도 국군과 북한군이 서로 맹렬히 쏘아대는 대포, 기관포 소리가 종일 하늘을 찢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출산 직후부터 몸이 회복되지 않은 채 시름시름 자꾸 나빠져만 갔다. 아기는 배고픔으로 줄곧 악을 쓰며 울어대기만 했다.
“어머니는 병석에 누워서도 자나 깨나 어린 막내 생각으로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저 윗목의 어린것은 금방 저를 따라올 것이니 걱정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계모 설움 안 받도록 제발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남기시고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1953년 봄, 아버지는 어미 잃은 4남매를 데리고 대구로 나왔다. 어떠한 삶의 방책이 있을 리 없는 고달픈 이농민(離農民) 가족의 초라한 행색이었다. 대구 시민운동장 부근 자동차정비공장 내부 허름한 방 한 칸이 새 보금자리였다. 백방의 노력 끝에 아버지는 전매청 창고지기로, 형은 행정서기 보조로, 큰누나는 권련을 생산하는 현장 노동자로 일자리를 얻어 이름 그대로 전매가족이 되었다. 이 덕분에 그의 가족은 대구의 수창초등학교 뒤편 전매청 관사에 입주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없는 소년 시절의 애달픔은 이루 필설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형, 큰누나가 출근하고 없는 집에서 나는 작은누나랑 함께 지냈습니다. 그저 적막한 시간을 보낸 듯합니다.”
황금심·이난영에게서 어머니를 찾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간혹 진공관 라디오에서 〈정오의 음악〉 프로가 흘러나왔는데 유심히 귀 기울여 듣곤 했다. 여성 가수의 노래가 나올 때면 그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로 이러할 것으로 생각해 더욱 라디오에 매달렸다. 황금심, 신카나리아, 이난영, 장세정, 백난아, 이화자, 백설희, 송민도, 금사향 등의 노래가 나올 때면 가슴이 마구 달아올라 황급히 공책을 들고 와서 가사를 옮겨 적었다. 한창 총기가 있을 때여서 받아 적으며 바로 외웠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 대구 인교동 부근에 친구 집이 있었는데 철공소를 하며 잘살았습니다. 친구 엄마가 사내들을 잘 다루더군요. 덩치가 산만 한데도 삿대질하고 때리고…. 하지만 그렇게 강하던 친구 엄마도 안방 전축을 틀어놓고 때로 울더라고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서인지, ‘목포의 눈물’ ‘황성옛터’를 틀어놓고….
친구 엄마가 안 계실 때 그 전축은 내 것이었죠. 레코드 재킷에 있던 가사를 노트에 적기 시작했어요. 두 권에 걸쳐 빽빽하게 다 적고 다 외웠어요. 그것 가지고 있다면 보물인데….”
그렇게 3절 가사까지 익힌 노래가 중학교 3학년 때는 무려 500곡가량이나 되었다고 한다.
“참 맹랑한 소년이었겠지요. 어머니 때문에 이런 집착이 생겨난 것입니다. 나에게 늘 부족한 어머니를 채우느라고 형성된 버릇이지요.”
― 트로트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군요.
“노래에 심취해서 눈물짓기도 하고…. 다른 친구 엄마들도 날 불러가지고 ‘라면 끓여줄게. 몇 곡만 불러다오.’ 그래서 부르고…. 고교 때는 반 대항 노래자랑 대표로 나가 노래하고, 군 시절에도 노래 사역(事役)을 얼마나 했는지…. 나중엔 ‘나도 가수가 되어볼까’ 이런 생각도 했다니까요. 하하하.”
청주大戰·김지하와의 노래 대결
대화가 어느새 김지하(金芝河· 1941~2022년) 시인과 가졌던 ‘세기(世紀)’의 노래 대결로 이어졌다. 그가 충북대 교수로 있을 때니까, 1985년 무렵이다.
종강을 앞두고 기분이 느슨하던 어느 날, 철학과 윤구병(尹九炳) 교수가 찾아와 서울의 유명한 선배 한 분이 청주로 내려오니 같이 보자고 했다. 장소는 불문과 전채린[田彩麟·수필가 전혜린(田惠麟)의 아우] 교수네 주공아파트 거실.
약속한 날, 청주로 내려온 이는 다름 아닌 김지하였다. 최근 작고한 소설가 김성동(金聖東), 채희완(蔡熙完) 교수(당시 청주사대 교수), 윤 교수 등이 좌우시종으로 배석했다.
― 어떻게 해서 노래 대결이 이뤄진 겁니까.
“김지하 시인이 긴급조치 4호로 투옥됐다가 풀려나 전국을 떠돌며 낭인 생활을 할 때였어요. 숱한 유린과 상처, 피멍으로 얼룩진 심신을 술과 노래로 달랬지요. 시인을 거두고 시중한 후배들은 이런 술 상무를 하느라 고초가 많았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 하나가 김 시인의 속을 뒤집어놓았죠.
‘형님! 형님보다 노래 잘하는 후배 시인이 있다고 합니다. 청주에 있는데 이 아무개라고.’
‘뭐? 그놈을 꺾으러 가자!’ 이렇게 된 겁니다.”
명색이 시합이니 규정이 없을 수 없어서 머리를 짜내어 마련한 규정은 실로 엄격하기 짝이 없는 규칙이었다고 한다. 이 교수가 설명한 당시 규칙은 이렇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① 모든 노래는 2절까지 불러야 기본이다. ② 3절 가사까지 완창 하면 플러스 1점. ③ 만약 가사를 잊어서 1절만 부른다면 감점 1점. ④ 이미 부른 노래를 다시 부르면 실격. ⑤ 동요, 가곡, 팝송, 찬송가류는 절대 안 됨. ⑥ 상대방의 가창 후 3분 이내에 즉시 이어받을 것.〉
김지하, “징그럽다 징그러워~”
대결에 앞서 이 교수는 나름의 대비책을 만들었는데, 명함 크기의 백지 앞뒷면에 그가 알고 있는 노래의 제목을 줄여 깨알같이 적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비 내리는 고모령’이라면 ‘고모령’ ‘홍도야 우지 마라’는 당연히 ‘홍도’로.
이 방법은 그날 시합 중 크게 도움이 되었다. 초저녁 8시경부터 시작한 노래 시합이 이튿날 새벽 5시 반까지 무려 10시간 동안 그야말로 장엄하게 펼쳐졌다. 한 곡 끝나면 바로 이어받아 또 한 곡, 아마도 추정컨대 200곡은 충분히 불렀을 것이라는 게 이 교수의 주장.
“오랜 시간 줄기차게 이어가니 멀쩡히 알던 노래가 첫대목조차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었어요.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메모를 슬쩍 꺼내 보며 다음 부를 곡을 찾았죠.
처음엔 장난기를 머금고 시작한 시합이 자정을 지나 새벽 두세 시가 넘었을 땐 방 안이 팽팽한 초긴장으로 가득했어요.”
그런데 이 교수는 내심 이기겠구나는 자신감이 들었다고 한다. 앉음새 하나 고치지 않고 낭창하게 소리의 결도 시종일관 잔잔하고 차분히 펼쳐가니 김지하의 얼굴에 점점 피로의 기색이 역력해지더라는 것이다.
“기어이 동창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잔인한 시합이 계속되었는데, 새벽 5시 반쯤 됐을 무렵 김지하 시인이 뒤에 쌓아놓은 이불에 등을 기대고 뒤로 벌러덩 쓰러지면서 ‘에잇, 누가 이따위 시합을 하자고 했나. 징그럽다 징그러워~’ 하더군요.”
이렇게 옛 가요 청주대전(大戰)은 장엄한 막을 내렸다.
― 김지하 시인이 그 ‘청주대전’에 대해 말을 했을까요?
“시인 이재무가 인터뷰한 글 하나가 유일한데요, 가요대전 패배에 관한 소감을 묻자 ‘그는 노래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라 당할 도리가 없었지’라며 웃어넘긴 것이 다였습니다. 하하하.”
莫上莫下 김장실과 이동순
그때 김장실(金長實) 전 문화부 차관이 동석(同席)했다. 우연히 이 교수와 통화하게 되면서 그야말로 ‘즉석 만남’이 성사됐다.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재미있게 쏟아냈다. 대화 중 김 전 차관은 트로트를 부르기도 했다.
김 전 차관은 문화부 차관(재임 2008년 3월~2009년 4월)과 예술의전당 사장, 국회의원(19대 새누리당 비례대표)을 지냈고 윤석열 정부 인수위에서 국민통합초청위원장을 맡았다. 최근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됐다.
그는 조갑제닷컴에 연재하던 ‘김장실의 노래 이야기’를 책으로 묶은 《트롯의 부활: 가요로 쓴 한국 현대사》(380쪽)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인생이라는 ‘고난의 바다’를 건너려면 어른도 장난감이 필요하다. 저에겐 ‘트로트’가 장난감이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트로트를 사랑한다.
김장실: “제가 제일 하고 싶은 게 이동순 교수님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노래 한 곡 부르고, 또 이야기하다가 노래 부르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동순: “하하하. 좋죠.”
김: “이걸 전에 한 번 했었는데 언제 했느냐 하면, 2001년 문화부 예술국장 시절이었어요. 그때 연예인협회장이 남진이었는데 둘이 점심을 먹었어요. 종로구청 앞 복집에서 ‘우째(어떻게) 가수가 됐습니꺼’로 시작해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제가 남진 노래를 한 곡 불렀죠. 가수 남진씨도 자기 노랠 부르고,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2시간 반 동안 불렀지 뭡니까. 종업원들이 우리 방 밖에서 빼곡히 모여 노랠 듣고 있더라고요. 하하하.”
이: “얼마나 아시는 게 많으시고 경험이 많으시면 이야기가 책 읽듯이 술술술~.”
김: “하하하. 제가 정치학을 전공했기에 대중가요를 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책을 내고 싶어요. 그래야 인문학을 하시는 분과 차별이 있지. 인문학 하신 분들은 감수성 잘 드러내는 데는 천재시거든요.”
악마가 된 가수 이야기
이: “나도 꿈을 꾸고 있던 건데 우리 김장실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그냥 너무너무 성원하고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 확 드네요. 최고의 전문가니까. 이번에 제가 쓴 《한국 근대가수 열전》 중에 탁성록(卓星祿·1916~?) 작곡가 이야기가 있는데 거기 유심히 한번 봐주이소.”
김: “어떤 내용인지 조금만 맛 좀 보여줄래요?”
이: “(탁성록이) 경남 진주 사람인데 상경해 콜럼비아레코드사의 전속작가가 됐어요. 하지만 더 실력 있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밀려나 탄식에 빠져 아편쟁이가 됐어요.”
김: “아이고 저런. 어쩌나….”
이: “점점 몰락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아편쟁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써주질 않았어요. 그 시절, 음반을 낸 게 있는데 원곡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를 번안한 ‘어두운 세상’이란 곡입니다. 원곡은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레조 세레즈(Rezso Seress)가 1933년 발표한 노랩니다. 그 원곡을 형편없는 창법으로 어둡고 우울한 기분만 꽉 차 있는 노래로 만들었어요.”
김: “저런….”
이: “해방이 되고 국방경비대가 창설될 때 고향 선배가 탁성록을 발탁, 군악대장이 됩니다. 이후 국방경비대 제9연대 정보참모가 되었고 제주 4·3사태가 일어나자 제주로 파견되었죠. 그곳에서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는데 당시 탁성록 손에 죽은 자가 15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너무 악랄하게 구니까 진주로 쫓아 보냈을 정도예요. 한데 그곳에서도 보도연맹원들을 800명가량 죽여버렸네…. 완전히 살인마가 되어버렸어요.”
김: “내면을 양극단으로 달리게 만든 것이 마약일 겁니다. 사람의 인성이 이렇게까지 파괴가 안 되는데 마약을 했을 때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고 그것이 떨어지면 극단적으로 우울해하고….”
조지훈의 탄식
이: “트로트를 좋아하시게 된 사연이 있습니까.”
김: “제가 어렸을 때, 마을 라디오를 가진 집에서 유선으로 각 집마다 스피커를 연결했어요. 사용료로 1년에 쌀이나 보리 몇 말씩을 냈는데 주로 음악 프로를 틀었어요.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유행가를 알았어요. 그 시절, 배고픔의 한도 있고, 주변 불행한 것도 많이 봐서 그런지 그 노래들을 부르면서 속으로 많이 울고 그랬어요. 트로트 노랫말을 보면 대중이 누구나 소화할 수 있을 만큼 가사 전달력이 세계 최고입니다.
제 지인이 한양대 대학원 시절에 목월(朴木月·1915~1978년) 선생에게 배웠다고 해요. 목월을 따라 청록파 시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자주 참석했는데 한번은 조지훈(趙芝薰·1920~1968년) 선생이 탄식을 하더랍니다.”
이: “왜요?”
김: “‘평생 시를 썼지만, 대중의 마음을 울리는 데는 대중가요의 작사가보다 훨씬 못하다’고. 그 말을 듣고 지인이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하니까, 지훈 선생은 ‘아니네, 이 사람아. 아무리 해도 그 사람들을 못 따라간다’고 했답니다. 그 시절 가요엔 구구절절 대중의 마음을 살피는 노랫말이 담겨 있었어요.”
이: “말씀하시는 게 녹음해서 트는 것처럼 술술 나오네요. 하하하.”
김: “하하하.”
트로트와 BTS, 韓流
김장실 전 차관이 떠나고 기자는 이 교수와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의 말이다.
“트로트 공부를 쭉 해보니까, 우리 가요의 뿌리라는 게 단순하게 일본 색조의 흐름에 압도되어 이뤄진 산물이 아니더군요. 일본적인 것들이 우리 문화에 충격을 주고 세례를 주려 애썼지만, 일본이 결국 압도하지 못했어요. 일본이 조선어 사용을 막았지만 결국 실패했듯이 말이죠. 강점기 36년으론 어림도 없었던 것입니다.”
― 트로트 속에 우리 전통이 담겨 있다고 했는데 예를 든다면….
“판소리 사설과 잡가, 민요, 그리고 시조, 가사와 같은 전통과 흐름, 골격들이 식민지 시대가 펼쳐진 뒤에도 우리 가요 속에서 이어져 왔어요. 물론 일본 가요와 서양 가요의 영향, 기독교 영향도 있었고 그런 세례에 아부하는 노래도 꽤 많았거든요. 완전히 일본식 노래도 있었고요. 그러나 보다 더 굵은 줄기는 손상되지 않은 채 이어져 왔어요.”
― 신(新)민요는 어떻게 보십니까.
근대에 등장한 새로운 민요를 의미하는 신민요는 1930년대에 트로트와 함께 전성기를 구가한 민요풍의 대중가요를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요와 유행가의 비빔밥’으로 인식될 만큼 혼종적 요소가 강했다.
“가요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신민요를 일본에 동화된 기형적인 것의 하나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나는 아니라고 봅니다. 신민요 안에 든 어떤 본연의 것을 지키려는 용트림이나 어떤 보수(保守), 즉 보전하여 지키려는 힘이 굉장했거든요.
그래서 신민요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사랑스럽고 애착이 가죠. 그런 굵은 뿌리가 상당히 손상됐지만 멸실(滅失)되지 않은 채 해방을 맞았고, 이후 미국적인 것이 혼합돼 흘러온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 가요는 나름의 고유성을 유치한 채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고 봅니다.”
― 한류(韓流)로서 트로트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BTS의 등장 이면에 옛 가요, 우리 가요가 발아(發芽)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지 돌연변이나 느닷없이 생겨난 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교수가 최근 벽돌 한 장(700쪽) 두께의 책 《한국 근대가수 열전》(소명출판)을 펴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한 손으로 책을 들기 어려울 정도다.
지난 9월 초 이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공교롭게도 서울에 약속이 있다고 했다. 어느 80대 할머니 팬이 귀한 근대 자료를 보여주겠다고 해서 약속을 해뒀다는 것이다. 며칠 뒤 지하철 4호선 숙대역 앞에서 만난 박남수 할머니(가명·84)는 곱고 가냘파 보였다. 박 할머니는 지금까지 변사(辯士) 김덕경(金德經·?~1934)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털어놨다.
김덕경. 그는 일제 시대 단성사(團成社·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극장) 전속 변사로 활동한 유명한 인물이다. 유창한 어조로 연약한 아녀자의 음성은 물론 웅장한 대장부의 호통에도 능했다. 간혹 대포 소리까지 들려주며 관객의 영화 이해와 감상을 도왔다. ‘활동사진 해설가’ ‘화면 해설가’ ‘달변가’ ‘변인(辯人)’ 등으로 불렸다. 박 할머니의 말이다.
“제가 딸도 아닌데, 어쩌다 이분 제사를 지금껏 지내고 있어요. 이분이 자손이 없으셨어요. 40대에 가셨는데 어쩌다가 평생을 모시는데….”
이동순: “어디다 모셨습니까.”
박 할머니: “묘는 없어요. 돌아가실 때 이분이 《현대공론사》 지부장(?)으로 계셨고, 그때 신문사를 운영하시려고 재산을 다 탕진해가며 (조선)총독부에 드나드셨는데 그게 잘 안 되어….”
박 할머니는 낡은 스마트폰에 담긴 서화 몇 점을 보여주었다. 실물은 가지고 오지 않았다.
이: “전화로는 한 90점 된다고 하시더니….”
박: “사실은 그렇게 많이 없어요.”
변사 김덕경의 조카 할머니
이동순 교수 얼굴에 일순 당황한 빛이 감돌았다. 박 할머니의 말이다.
“김덕경 선생이 냉면을 드시다가 그게 잘못되어서 한 3년을 고생 고생하시다가 신문사 한답시고 재산 다 집어넣고 불쌍하게 집도 없이 셋방에서 돌아가셨어요.
이분이 잘나갈 때 여러 가수를 먹이고 재우고 입혔는데 의리가 없더군요. 제 생각에 이분이 무슨 실수를 많이 하셨는지….”
이: “당시 변사는 장안의 명사였어요. 김영환이란 변사가 있었는데 서울 장안에 승용차가 몇 대 안 되던 시절에 캐딜락을 타고 다녔대요. 금으로 된 장신구도 많고, 기생 인력거에 노상 납치도 되고…. 그러나 토키(Talkie·유성영화) 시대가 도래(到來)하면서 설 자리를 잃었죠.”
이: “김덕경 선생은 어떻게 돌아가셨나요?”
박: “말년에 왕십리 오간수다리 근처에서 사셨는데 처참하게 가셨어요. 그분 아내도 함께 모시고 있어요. 아들을 못 낳아서 굉장히 죄스럽게 생각하셨죠. 실은… 김덕경 선생의 아내가 제 고모입니다.”
그러니까 박 할머니는 고모부의 제사를 지내고 있는 셈이었다. 이 교수가 “기일(忌日)이 언제냐”고 묻자 박 할머니는 뜻밖의 고백을 했다.
“음력으로 8월 27일. 그날 제가 태어났대요. 저는 생일이 없어요. 생일날, 두 분 제사를 모셔야 해요.”
박 할머니는 KBS 라디오 〈세월 따라 노래 따라〉를 가끔 들었는데 이 프로그램의 DJ가 이 교수여서 “염치 불구하고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고 했다.
그녀가 집에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뒷모습을 보니 마치 흘러간 옛 노래처럼 슬프고 아련한 무엇이 느껴졌다.
박 할머니를 바래다 드리고 돌아온 이 교수는 “폐허에 방치된 낡은 편린들을 하나둘씩 찾아내어 깁고 짜 맞추어 옛 가수의 생애사를 회복시켰다”면서 저서 《한국 근대가수 열전》을 탁자 위에 내놓았다. 기자는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과거 식민지 시절의 가수들이 낡은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 전국을 방랑하던 악극단 추억을 전설로 복원한 것이다. 이동순 교수의 말이다.
“식민지 시대 가수들은 20세기 격변을 몸으로 직접 겪었던 세대들입니다. 그들이 발표했던 가요 작품들과 가수로서 딛고 간 생애의 발자취를 추적 정리하는 일은 자못 의미 있었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와 관련된 문제의 구체성이 가수들의 행적에 반영되어 있으니까요.”
이 교수에 따르면 ‘가요황제’ 남인수(南仁樹·1918~1962년)의 생애는 제국주의 식민통치와 더불어 펼쳐지고 마감되었다. 백년설(白年雪·1914~1980년)도 희곡을 습작하던 문학청년으로 대중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지만 일제 말 가혹한 환경의 굴레에 압도당하고 만다. 가수 이난영(李蘭暎·1916~1965년) 역시 식민지 침탈 초기의 빈곤과 고난, 그로 인한 가족의 이산과 붕괴, 6·25전쟁을 겪으며 마침내 생의 파멸에 이르는 참혹한 과정을 겪는다. 이 교수는 “식민지 시대, 어떤 가수를 막론하고 그를 둘러싼 시대와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가요황제’로 불린 가수, 남인수
1936년 강문수는 18세 나이로 ‘눈물의 해협’을 취입한 후 남인수라는 예명을 썼다. 이듬해 ‘애수의 소야곡’이 엄청난 인기를 얻어 곧장 최고의 가수 지위에 올랐다. 이른바 공전의 대히트였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소리 -남인수의 노래 ‘애수의 소야곡’ 1절 당시 언론은 남인수에 대해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미성의 가수 탄생’이라 보도했다. 그러나 1943년은 ‘가요황제’ 남인수에게 최악의 한 해였다. ‘혈서지원’ ‘이천오백만 감격’따위와 같은 소름 끼치는 군국가요를 부르게 되는 일에 강제동원됐던 것이다.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돼 갑자기 입에서 피가 솟구쳐 나와 무대가 아수라장이 된 일도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해군 정훈국 제2소대 소속 문관으로 종군했고 위문 활동을 활발히 펼쳤다. 1953년 자신의 명성에 걸맞은 최대의 히트곡 하나를 발표하는데 그 곡이 ‘이별의 부산정거장’이었다. 이 교수의 말이다. “1950년대 말 남인수의 건강은 점점 나빠져 무대에 스스로 오르기조차 힘들어졌다. 결핵 환자 남인수에 대한 이난영의 헌신적 간호는 참으로 각별했다고 한다. 1961년 그의 몸은 이미 모든 기력이 소진되었는데 이런 와중에 마지막 숨을 헐떡이며 병실 침대 마이크 앞에 앉아 부른 노래가 ‘무너진 사랑탑’(반야월 작사 나화랑 작곡)이다.” 이 곡은 사실상 ‘가요황제’ 남인수의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다. 그야말로 남인수의 생명과 바꾼 노래였다. 반짝이는 별빛 아래 소근소근 소근대는 그날 밤/ 천년을 두고 변치 말자고 댕기 풀어 맹세한 님아/ 사나이 목숨 걸고 바친 순정 모질게도 밟아놓고/ 그대는 지금 어디 단꿈을 꾸고 있나/ 야속한 님아 무너진 사랑탑아 -남인수의 노래 ‘무너진 사랑탑’ 1절 |
김덕경, 복혜숙, 그리고 ‘째즈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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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82년 10월 30일 자에 실린 〈고 복혜숙 여사의 문화훈장 추서〉 기사다. |
“강원도 산골에서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복혜숙은 그 생활이 너무도 싫었던 나머지 어느 날 아버지 몰래 짐을 챙겨 서울로 무작정 올라오게 됩니다. 두 번째 가출인데 아버지가 강원도 김화교회의 목사가 되어 임지로 떠났기 때문이었어요.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극장이었던 단성사를 찾아가 인기 변사 김덕경을 만나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속 포부를 밝힙니다.
김덕경은 복혜숙에게 신극좌(新劇座)의 김도산(金陶山·1891~1921년)을 소개해줍니다.”
복혜숙은 1926년 영화 〈농중조(籠中鳥)〉, 1927년 〈낙화유수〉, 1928년 〈세 동무〉 〈지나가(街)의 비밀〉 등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입지를 단단하게 다졌다.
“배우 복혜숙이 1929년 첫 음반을 냈는데 영화극이란 장르를 단 《장한몽》이었습니다. 이후 많은 영화극 음반을 발표했고 배우로서 대중적 명성이 제법 알려지기 시작하던 1930년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가요음반이 발매되었습니다. 《그대 그립다》 《종로행진곡》 《목장의 노래》 《애(愛)의 광(光)》 등을 발매할 때 ‘시대요구의 째즈’라는 이채로운 문구를 사용합니다.”
― 미국 흑인음악 재즈를 말하는 것인가요.
“째즈라는 표현을 쓰고는 있지만 미국식 정통 재즈라기보다 그저 새로운 특성의 가요를 뜻하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복혜숙 노래의 반주를 맡았던 악단도 ‘콜럼비아째즈밴드’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이 음반에 ‘째즈쏭’이란 꼬리표가 붙은 것이 이채로운데 어쨌든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재즈가수였습니다.”
강석연의 ‘방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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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강석연의 앨범. 옛 가요 사랑모임인 ‘유정천리’(회장 이동순)에서 발매했다. |
“흔히들 ‘방랑가’를 평가하면서 이 노래가 식민지 시대에 많이도 발표되었던 유성기 음반 중 이른바 ‘방랑물(放浪物)’ 가요의 기점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애리수, 고운봉, 명국화 등 많은 가수가 다시 불렀지요. 그 가운데서도 유독 강석연이 부른 이 노래는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우뚝한 창법으로 시대적 분위기와 색깔을 잘 담아서 들려줍니다.”
피 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낙망과 설음에 병든 몸으로/ 북국한설 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달픈 이내 가슴 누가 알거나
-가수 강석연의 노래 ‘방랑가’ 1절
이 교수는 “강석연의 ‘방랑가’를 귀 기울여 들어보면 넋을 놓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아득한 눈보라 벌판을 걸어가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시작된 노래 ‘방랑가’는 당시 일본과 중국에서도 편곡되고 번안되어 불렸다고 한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방랑가’를 검색하면 뜻밖에도 일본과 타이완에서 여전히 활발하게 연주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동북아시아 일대의 음악적 영향 관계는 이처럼 결코 간단하게 규정할 수 없는 긴밀한 상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교수는 강석연과 관련한 놀라운 에피소드 한 편을 들려주었다.
“언젠가 국가대표 농구감독을 지낸 방열 감독(현 가천대 명예교수)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여러 해 전 어느 신문에 기고했던 강석연 여사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며 그분이 자기 어머니라는 겁니다. 그때까지 어머니가 가수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해 깜짝 놀랐어요. 일제 말 언론인이었던 부친 방태영(方台榮·1885~?) 선생이 북으로 납치되어 끌려가고 그 험난했던 시기를 거치는 동안 강석연은 오로지 가족 부양과 자녀 양육에만 전심전력을 쏟은 것이죠.
방열씨의 회고에 따르면 소년 시절 다락방에서 물건을 뒤지다가 붉은 보자기에 싸인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풀어보려 하자 어머니가 깜짝 놀라며 그 물건을 아주 깊은 곳에 감추어버렸다고 해요. 아들은 끝내 그 내용물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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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인기 여가수들의 일본 활동 모습을 담은 사진. ‘근하신년(謹賀新年)’ 푯말을 한 글자씩 들고 새해 인사 포즈를 취한 강석연, 이애리수와 신원 미상의 가수, 김선초(왼쪽부터). 사진=이동순 제공 |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 1절
우리 대중음악사에 ‘황성(荒城)의 적(跡)’ 한 곡으로 기억되는 ‘살뜰한 이름’의 가수 이애리수(1910~2009년)가 있다. 이 교수는 “한 사람의 가수로서 많은 곡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민족의 심금을 울리는 절창(絶唱)이라면 단 한 곡만이라도 그 가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연극 공연의 막간(幕間)에 이애리수가 이 곡을 불렀고 1932년 봄 빅타레코드사에서 정식으로 음반을 취입하는데 전국의 가요팬들이 ‘황성의 적’이 담긴 음반을 구입하기 위해 레코드판매점 앞에 길게 줄을 섰고 축음기 판매량도 늘었다고 합니다.
주로 악극단 공연이나 무대를 통해서만 보급되던 유행 창가나 영화 주제가들이 드디어 음반을 통해 정식으로 보급되는 계기를 맞이한 겁니다.”
이 음반이 나오자마자 불과 1개월 만에 5만 장이나 팔려나갔다고 하니 그 인기의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애리수는 2009년 3월 31일 9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동순 교수는 ‘1세대 인권변호사’ 홍성우(洪性宇·1938~2022년)의 안내로 이애리수의 장남 배두영씨를 만난 일을 떠올렸다.
“배두영 선생에 따르면, 자신의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어머니가 가수였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하니 참 놀라운 일입니다. 예전 가수 출신 어머니들은 자신의 과거 경력을 일절 비밀에 부쳤는데 그 까닭은 자녀 교육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판단 때문으로 보입니다.”
천재 음악가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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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음악가 집안의 장남 김용환. |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매우 희귀한 천재 음악가였던 김용환은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습니다. 원래 기독교 집안으로 예수의 제자인 세례자 요한의 이름을 따서 용환이 되었습니다. 그의 다른 형제들로는 가수로 출세했던 아우 김정구(金貞九·1916~1998년), 피아니스트였던 아우 김정현(金貞賢·1920~1987년), 소프라노 가수였던 누이동생 김안라(金安羅·1914~1974년) 등이 있는데, 자체로 출중한 음악가 집안이었습니다. 여기에다 김용환의 아내 정재덕(鄭載德·?~1950년) 또한 가수가 되었으므로 가히 명문 음악가 집안이라 할 만하지요.”
― 유명한 음악 가족이군요.
“4남매와 형수가 원산에서 주거할 시절, 가족연주단을 조직해 동해안 길을 따라 남쪽으로 금강산 온정리 마을까지 두루 다녀가며 공연을 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그들 형제는 교회 음악을 통해 음악적 재능을 키워간 것으로 보입니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불러 마을과 교회에서 칭찬이 자자했다고 하죠. 작곡과 가창은 물론이요, 연극배우로서의 재능을 뽐내기도 했고, 온갖 악기 연주에 능통했다고 해요. 그야말로 무불통지(無不通知). 노래는 언제나 탁 트인 목소리로 걸쭉하고도 능청스러우며 시원한 서민적 창법으로 불렀습니다.”
이 교수는 김용환을 ‘서민적 창법의 원조가수’라 불렀다.
“김용환 노래를 귀 기울여 가만히 듣노라면 마치 판소리를 부르는 소리꾼의 소탈하고도 호방한 창법에 서민적 삶의 정겹고 구수한 향취마저 느껴집니다. 뭐랄까, 민중적 넉살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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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두만강’의 가수 김정구. |
‘두만강’은 예부터 삶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치듯 고국을 떠나는 사람들의 피눈물이 흐르는 강이라 하여 일명 ‘도망강’이라 불렸다.
“‘눈물 젖은 두만강’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작곡가 이시우(李時雨·1913~ 1975년)가 신파극단 ‘예원좌(藝苑座)’ 소속으로 만주의 투먼에서 공연을 마치고 두만강 부근 어느 여관에 머물고 있던 밤, 여인의 처절한 통곡을 들었다고 합니다. 이시우는 이튿날 그 통곡의 사연을 물었고, 여관집 주인으로부터 독립군으로 떠난 여인의 남편이 불과 1년 전 일본군 수비대의 총탄에 맞고 세상을 떠난 내력을 전해 들었다고 해요. 이 사연을 조선족 시인 한명천(韓鳴川)에게 들려주었더니 즉석에서 가사 1절이 나왔고 여기에 이시우가 두만강 물소리를 들으면서 작곡한 곡이 바로 ‘눈물 젖은 두만강’입니다.”
며칠 후 예원좌 무대 공연에서 이 노래를 불렀더니 관중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순회공연 후 이시우는 뉴코리아레코드사 소속의 가수 김정구를 찾아가 이 노래의 취입을 제의했고 김정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시 한명천이 쓴 가사는 1절뿐이었는데 작사가 김용호(金用浩·1908~1967년)가 여기에 2절과 3절 가사를 새로 붙이고 전체의 균형을 조화롭게 다듬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노래 1절의 작사가는 한명천이고, 이를 완성시킨 작사가는 김용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 1절
이동순 교수의 말이다.
“이런 와중 6·25가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김정구는 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 내려와 떠돌이 빵장수, 지게꾼, 무대 출연 등으로 몹시 고달픈 실향민의 생존을 이어갔습니다. 그가 취입한 대부분의 노래가 조명암(趙鳴岩·1913~1993년), 박영호(朴英鎬·1911~1953년) 등 월북 작사가의 작품이었기에 부를 노래가 없었지만 오로지 ‘눈물 젖은 두만강’만큼은 어떤 금지에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1980년에는 정부가 수여하는 보관문화훈장도 가수로서 맨 처음 김정구가 받았지요. 가는 곳마다 ‘눈물 젖은 두만강’만을 불러달라는 요청이 쇄도했고, 이 노래는 김정구 고유의 상징이자 단골 레퍼토리가 됐습니다.”
전쟁 중에 세상 떠난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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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교수는 팔방미인이다. 어느 가을문학제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사진=이동순 |
어머니는 마을에서 약 8km가량 떨어진 나실(羅室)이라는 문중(門中) 종산(宗山)을 향해 걷고 또 걸어서 당도했다. 그가 태어나는 그 순간에도 국군과 북한군이 서로 맹렬히 쏘아대는 대포, 기관포 소리가 종일 하늘을 찢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출산 직후부터 몸이 회복되지 않은 채 시름시름 자꾸 나빠져만 갔다. 아기는 배고픔으로 줄곧 악을 쓰며 울어대기만 했다.
“어머니는 병석에 누워서도 자나 깨나 어린 막내 생각으로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저 윗목의 어린것은 금방 저를 따라올 것이니 걱정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계모 설움 안 받도록 제발 잘 부탁드린다’는 말씀을 남기시고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1953년 봄, 아버지는 어미 잃은 4남매를 데리고 대구로 나왔다. 어떠한 삶의 방책이 있을 리 없는 고달픈 이농민(離農民) 가족의 초라한 행색이었다. 대구 시민운동장 부근 자동차정비공장 내부 허름한 방 한 칸이 새 보금자리였다. 백방의 노력 끝에 아버지는 전매청 창고지기로, 형은 행정서기 보조로, 큰누나는 권련을 생산하는 현장 노동자로 일자리를 얻어 이름 그대로 전매가족이 되었다. 이 덕분에 그의 가족은 대구의 수창초등학교 뒤편 전매청 관사에 입주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없는 소년 시절의 애달픔은 이루 필설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형, 큰누나가 출근하고 없는 집에서 나는 작은누나랑 함께 지냈습니다. 그저 적막한 시간을 보낸 듯합니다.”
황금심·이난영에게서 어머니를 찾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간혹 진공관 라디오에서 〈정오의 음악〉 프로가 흘러나왔는데 유심히 귀 기울여 듣곤 했다. 여성 가수의 노래가 나올 때면 그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바로 이러할 것으로 생각해 더욱 라디오에 매달렸다. 황금심, 신카나리아, 이난영, 장세정, 백난아, 이화자, 백설희, 송민도, 금사향 등의 노래가 나올 때면 가슴이 마구 달아올라 황급히 공책을 들고 와서 가사를 옮겨 적었다. 한창 총기가 있을 때여서 받아 적으며 바로 외웠다.
“이런 일이 있었어요. 대구 인교동 부근에 친구 집이 있었는데 철공소를 하며 잘살았습니다. 친구 엄마가 사내들을 잘 다루더군요. 덩치가 산만 한데도 삿대질하고 때리고…. 하지만 그렇게 강하던 친구 엄마도 안방 전축을 틀어놓고 때로 울더라고요.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서인지, ‘목포의 눈물’ ‘황성옛터’를 틀어놓고….
친구 엄마가 안 계실 때 그 전축은 내 것이었죠. 레코드 재킷에 있던 가사를 노트에 적기 시작했어요. 두 권에 걸쳐 빽빽하게 다 적고 다 외웠어요. 그것 가지고 있다면 보물인데….”
그렇게 3절 가사까지 익힌 노래가 중학교 3학년 때는 무려 500곡가량이나 되었다고 한다.
“참 맹랑한 소년이었겠지요. 어머니 때문에 이런 집착이 생겨난 것입니다. 나에게 늘 부족한 어머니를 채우느라고 형성된 버릇이지요.”
― 트로트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군요.
“노래에 심취해서 눈물짓기도 하고…. 다른 친구 엄마들도 날 불러가지고 ‘라면 끓여줄게. 몇 곡만 불러다오.’ 그래서 부르고…. 고교 때는 반 대항 노래자랑 대표로 나가 노래하고, 군 시절에도 노래 사역(事役)을 얼마나 했는지…. 나중엔 ‘나도 가수가 되어볼까’ 이런 생각도 했다니까요. 하하하.”
청주大戰·김지하와의 노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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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교수가 색소폰을 연주하고 있다. 정년퇴임 후 가요연구가로 활동 중이다. |
종강을 앞두고 기분이 느슨하던 어느 날, 철학과 윤구병(尹九炳) 교수가 찾아와 서울의 유명한 선배 한 분이 청주로 내려오니 같이 보자고 했다. 장소는 불문과 전채린[田彩麟·수필가 전혜린(田惠麟)의 아우] 교수네 주공아파트 거실.
약속한 날, 청주로 내려온 이는 다름 아닌 김지하였다. 최근 작고한 소설가 김성동(金聖東), 채희완(蔡熙完) 교수(당시 청주사대 교수), 윤 교수 등이 좌우시종으로 배석했다.
― 어떻게 해서 노래 대결이 이뤄진 겁니까.
“김지하 시인이 긴급조치 4호로 투옥됐다가 풀려나 전국을 떠돌며 낭인 생활을 할 때였어요. 숱한 유린과 상처, 피멍으로 얼룩진 심신을 술과 노래로 달랬지요. 시인을 거두고 시중한 후배들은 이런 술 상무를 하느라 고초가 많았을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후배 하나가 김 시인의 속을 뒤집어놓았죠.
‘형님! 형님보다 노래 잘하는 후배 시인이 있다고 합니다. 청주에 있는데 이 아무개라고.’
‘뭐? 그놈을 꺾으러 가자!’ 이렇게 된 겁니다.”
명색이 시합이니 규정이 없을 수 없어서 머리를 짜내어 마련한 규정은 실로 엄격하기 짝이 없는 규칙이었다고 한다. 이 교수가 설명한 당시 규칙은 이렇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① 모든 노래는 2절까지 불러야 기본이다. ② 3절 가사까지 완창 하면 플러스 1점. ③ 만약 가사를 잊어서 1절만 부른다면 감점 1점. ④ 이미 부른 노래를 다시 부르면 실격. ⑤ 동요, 가곡, 팝송, 찬송가류는 절대 안 됨. ⑥ 상대방의 가창 후 3분 이내에 즉시 이어받을 것.〉
김지하, “징그럽다 징그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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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2009년 10월의 모습이다. |
이 방법은 그날 시합 중 크게 도움이 되었다. 초저녁 8시경부터 시작한 노래 시합이 이튿날 새벽 5시 반까지 무려 10시간 동안 그야말로 장엄하게 펼쳐졌다. 한 곡 끝나면 바로 이어받아 또 한 곡, 아마도 추정컨대 200곡은 충분히 불렀을 것이라는 게 이 교수의 주장.
“오랜 시간 줄기차게 이어가니 멀쩡히 알던 노래가 첫대목조차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었어요.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메모를 슬쩍 꺼내 보며 다음 부를 곡을 찾았죠.
처음엔 장난기를 머금고 시작한 시합이 자정을 지나 새벽 두세 시가 넘었을 땐 방 안이 팽팽한 초긴장으로 가득했어요.”
그런데 이 교수는 내심 이기겠구나는 자신감이 들었다고 한다. 앉음새 하나 고치지 않고 낭창하게 소리의 결도 시종일관 잔잔하고 차분히 펼쳐가니 김지하의 얼굴에 점점 피로의 기색이 역력해지더라는 것이다.
“기어이 동창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잔인한 시합이 계속되었는데, 새벽 5시 반쯤 됐을 무렵 김지하 시인이 뒤에 쌓아놓은 이불에 등을 기대고 뒤로 벌러덩 쓰러지면서 ‘에잇, 누가 이따위 시합을 하자고 했나. 징그럽다 징그러워~’ 하더군요.”
이렇게 옛 가요 청주대전(大戰)은 장엄한 막을 내렸다.
― 김지하 시인이 그 ‘청주대전’에 대해 말을 했을까요?
“시인 이재무가 인터뷰한 글 하나가 유일한데요, 가요대전 패배에 관한 소감을 묻자 ‘그는 노래를 밥 먹듯이 하는 사람이라 당할 도리가 없었지’라며 웃어넘긴 것이 다였습니다. 하하하.”
莫上莫下 김장실과 이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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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실 전 차관과 이동순 교수. |
김 전 차관은 문화부 차관(재임 2008년 3월~2009년 4월)과 예술의전당 사장, 국회의원(19대 새누리당 비례대표)을 지냈고 윤석열 정부 인수위에서 국민통합초청위원장을 맡았다. 최근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됐다.
그는 조갑제닷컴에 연재하던 ‘김장실의 노래 이야기’를 책으로 묶은 《트롯의 부활: 가요로 쓴 한국 현대사》(380쪽)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인생이라는 ‘고난의 바다’를 건너려면 어른도 장난감이 필요하다. 저에겐 ‘트로트’가 장난감이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트로트를 사랑한다.
김장실: “제가 제일 하고 싶은 게 이동순 교수님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노래 한 곡 부르고, 또 이야기하다가 노래 부르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동순: “하하하. 좋죠.”
김: “이걸 전에 한 번 했었는데 언제 했느냐 하면, 2001년 문화부 예술국장 시절이었어요. 그때 연예인협회장이 남진이었는데 둘이 점심을 먹었어요. 종로구청 앞 복집에서 ‘우째(어떻게) 가수가 됐습니꺼’로 시작해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제가 남진 노래를 한 곡 불렀죠. 가수 남진씨도 자기 노랠 부르고,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2시간 반 동안 불렀지 뭡니까. 종업원들이 우리 방 밖에서 빼곡히 모여 노랠 듣고 있더라고요. 하하하.”
이: “얼마나 아시는 게 많으시고 경험이 많으시면 이야기가 책 읽듯이 술술술~.”
김: “하하하. 제가 정치학을 전공했기에 대중가요를 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책을 내고 싶어요. 그래야 인문학을 하시는 분과 차별이 있지. 인문학 하신 분들은 감수성 잘 드러내는 데는 천재시거든요.”
악마가 된 가수 이야기
이: “나도 꿈을 꾸고 있던 건데 우리 김장실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그냥 너무너무 성원하고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 확 드네요. 최고의 전문가니까. 이번에 제가 쓴 《한국 근대가수 열전》 중에 탁성록(卓星祿·1916~?) 작곡가 이야기가 있는데 거기 유심히 한번 봐주이소.”
김: “어떤 내용인지 조금만 맛 좀 보여줄래요?”
이: “(탁성록이) 경남 진주 사람인데 상경해 콜럼비아레코드사의 전속작가가 됐어요. 하지만 더 실력 있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밀려나 탄식에 빠져 아편쟁이가 됐어요.”
김: “아이고 저런. 어쩌나….”
이: “점점 몰락하니까 주위 사람들이 아편쟁이라고 손가락질하며 써주질 않았어요. 그 시절, 음반을 낸 게 있는데 원곡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를 번안한 ‘어두운 세상’이란 곡입니다. 원곡은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레조 세레즈(Rezso Seress)가 1933년 발표한 노랩니다. 그 원곡을 형편없는 창법으로 어둡고 우울한 기분만 꽉 차 있는 노래로 만들었어요.”
김: “저런….”
이: “해방이 되고 국방경비대가 창설될 때 고향 선배가 탁성록을 발탁, 군악대장이 됩니다. 이후 국방경비대 제9연대 정보참모가 되었고 제주 4·3사태가 일어나자 제주로 파견되었죠. 그곳에서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는데 당시 탁성록 손에 죽은 자가 150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너무 악랄하게 구니까 진주로 쫓아 보냈을 정도예요. 한데 그곳에서도 보도연맹원들을 800명가량 죽여버렸네…. 완전히 살인마가 되어버렸어요.”
김: “내면을 양극단으로 달리게 만든 것이 마약일 겁니다. 사람의 인성이 이렇게까지 파괴가 안 되는데 마약을 했을 때 육체적 쾌락을 탐닉하고 그것이 떨어지면 극단적으로 우울해하고….”
조지훈의 탄식
이: “트로트를 좋아하시게 된 사연이 있습니까.”
김: “제가 어렸을 때, 마을 라디오를 가진 집에서 유선으로 각 집마다 스피커를 연결했어요. 사용료로 1년에 쌀이나 보리 몇 말씩을 냈는데 주로 음악 프로를 틀었어요.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유행가를 알았어요. 그 시절, 배고픔의 한도 있고, 주변 불행한 것도 많이 봐서 그런지 그 노래들을 부르면서 속으로 많이 울고 그랬어요. 트로트 노랫말을 보면 대중이 누구나 소화할 수 있을 만큼 가사 전달력이 세계 최고입니다.
제 지인이 한양대 대학원 시절에 목월(朴木月·1915~1978년) 선생에게 배웠다고 해요. 목월을 따라 청록파 시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자주 참석했는데 한번은 조지훈(趙芝薰·1920~1968년) 선생이 탄식을 하더랍니다.”
이: “왜요?”
김: “‘평생 시를 썼지만, 대중의 마음을 울리는 데는 대중가요의 작사가보다 훨씬 못하다’고. 그 말을 듣고 지인이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하니까, 지훈 선생은 ‘아니네, 이 사람아. 아무리 해도 그 사람들을 못 따라간다’고 했답니다. 그 시절 가요엔 구구절절 대중의 마음을 살피는 노랫말이 담겨 있었어요.”
이: “말씀하시는 게 녹음해서 트는 것처럼 술술 나오네요. 하하하.”
김: “하하하.”
트로트와 BTS, 韓流
김장실 전 차관이 떠나고 기자는 이 교수와 저녁을 먹으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의 말이다.
“트로트 공부를 쭉 해보니까, 우리 가요의 뿌리라는 게 단순하게 일본 색조의 흐름에 압도되어 이뤄진 산물이 아니더군요. 일본적인 것들이 우리 문화에 충격을 주고 세례를 주려 애썼지만, 일본이 결국 압도하지 못했어요. 일본이 조선어 사용을 막았지만 결국 실패했듯이 말이죠. 강점기 36년으론 어림도 없었던 것입니다.”
― 트로트 속에 우리 전통이 담겨 있다고 했는데 예를 든다면….
“판소리 사설과 잡가, 민요, 그리고 시조, 가사와 같은 전통과 흐름, 골격들이 식민지 시대가 펼쳐진 뒤에도 우리 가요 속에서 이어져 왔어요. 물론 일본 가요와 서양 가요의 영향, 기독교 영향도 있었고 그런 세례에 아부하는 노래도 꽤 많았거든요. 완전히 일본식 노래도 있었고요. 그러나 보다 더 굵은 줄기는 손상되지 않은 채 이어져 왔어요.”
― 신(新)민요는 어떻게 보십니까.
근대에 등장한 새로운 민요를 의미하는 신민요는 1930년대에 트로트와 함께 전성기를 구가한 민요풍의 대중가요를 의미한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요와 유행가의 비빔밥’으로 인식될 만큼 혼종적 요소가 강했다.
“가요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신민요를 일본에 동화된 기형적인 것의 하나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나는 아니라고 봅니다. 신민요 안에 든 어떤 본연의 것을 지키려는 용트림이나 어떤 보수(保守), 즉 보전하여 지키려는 힘이 굉장했거든요.
그래서 신민요를 들으면 들을수록 더 사랑스럽고 애착이 가죠. 그런 굵은 뿌리가 상당히 손상됐지만 멸실(滅失)되지 않은 채 해방을 맞았고, 이후 미국적인 것이 혼합돼 흘러온 겁니다. 다시 말해 우리 가요는 나름의 고유성을 유치한 채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고 봅니다.”
― 한류(韓流)로서 트로트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BTS의 등장 이면에 옛 가요, 우리 가요가 발아(發芽)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지 돌연변이나 느닷없이 생겨난 건 아니라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