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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마지막 1세대 CEO’ 조중건 대한항공 전 부회장

“나이 90… KAL이 뭐야. 죽을 때 가져가? 대한민국 재산 아니야?”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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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보면 그저 運이 좋았을 뿐. 내가 잘난 것 아무것도 없고, 國運하고 맞아서”
⊙ 美 포병학교에서 박정희 준장과 만나… “성격이 1+1이 2가 돼야 해. 그렇게 성실할 수가 없어”
⊙ 베트남 特需 때 퀴논港 물류계약 성사시켜…
⊙ “대한항공 초기에 도움 준 日 JAL하곤 경쟁 안 해”
⊙ “지고 이겨라… 인생이 다 王이 될 수는 없고, 신하가 될 수도 있는 것이고”

趙重建
1932년생. 서울중앙고, 미국 UC버클리 졸업, 서강대 명예경영학 박사 / 한진상사 상무, 대한항공 부사장·부회장 역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대한테니스협회장, 탁구협회장, 아시아테니스연맹 회장, 세계테니스연맹 부회장, 한국오스트리아경협위원장 역임
사진=조준우
  “대군교? 대구(大邱)라예?”
 
  기자를 보자마자 대한항공 조중건(趙重建·90) 전 부회장의 일성이 이랬다.
 
  그러더니 조준우 사진기자를 향해 말했다.
 
  “카메라맨, 렌즈 조심하셔. 타깃이 신통치 않으면 렌즈가 깨져요. 하하하.”
 
  작고한 창업주 조중훈(趙重勳· 1920~2002) 한진그룹 회장의 동생인 그는 형과 함께 한진그룹, 대한항공을 위해 청춘을 불살랐다. 어쩌면 국내 기업 1세대 CEO 중에서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의 유일무이한 인물이 아닐까. 대형 향유고래 같은 일생이 궁금했다. 지난 10월 7일 오전 9시 서울 소공동 한진빌딩에서 그와 마주했다.
 
  “김 선생을 내가 아침부터 실망을 시킬 것 같아. 원래가 어리바리한데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 더 어리바리할 것 같아서. 워쩔, 워쩔 것이다냐. 하하하.”
 
  조금 정색을 하고서 “왜 내가 김 선생에게 ‘대군교’ 했는지 알아요?” 하고 물었다.
 
  ― 네, 제 고향을 어떻게 아시고…. 깜짝 놀랐습니다.
 
  “6·25전쟁 때 한국 포병의 주축이 대구에 있었어요. 포병사령부도 대구에 있었고. 또 박(朴正熙) 대통령 비서실장 하던 저 누구야? 어리바리하니 이름도 다 잊어버리고…. 김계원(金桂元)도 그쪽이고. 포병으로 가니까 다들 대구 출신이 돼서 할 수가 없이 나도 대구 사투리를 좀 배워야지. 밥 먹었는교? 하하하.”
 
  조 사진 기자가 먼저 연출사진부터 찍겠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자연스럽게 서셔서… 이렇게… 조금 떨어지셔서… 주머니에 손 넣으셔도 좋고요. 네, (몸을) 진짜 약간 비트셔가지고, 약간 더 트셔서…. 예, 예 좋습니다.”
 
  사진을 찍고 소파에 앉더니 신문사 이야기를 했다.
 
  “옛날에 ‘방 회장’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그 양반 참 걸작이고…. 술을 한 번 같이 먹었는데 그냥 끝도 없어. 할 수 없이 ‘형님, 나 먼저 가우’ 그랬지.
 
  선우휘(鮮于煇)씨라고 있었죠? 그분을 난 군(軍)에서 봤어요. 광주 포병학교에 있을 때 정훈장교로 있었나? 그래서 그 양반을 그때 알고 대단한 분이라고 느꼈어요.”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평탄치가 않아”
 
1987년 1월 무렵, KAL 항공기 조종석에 앉은 조중건 전 부회장.
  조중건 전 부회장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저께 KAL(Korean Air)에 가서 이런저런 얘길 했는데 옛날 얘기밖에 할 게 없잖아? 무슨 얘기를 했냐면 경복중 입학시험을 치러 갔는데 앞에 앉은 친구 놈이 ‘야, 중건아! 지우개가 필요한데 빌려달라’는 거야.”
 
  ― 시험 도중에?
 
  “도중에. 반장·부반장 사이고 친구인데, 어떻게 거절해. 줬지 않소? 감독관이 와서 ‘너 몇 번이야’… 부정행위를 했다는 거야. 그놈은 붙고 나는 떨어졌어.
 
  내 인생의 고난을 처음 연 게 중학교 1학년이니까, 열몇 살이야? 열한 살. 그때 첫 쓰라림을 경험했어. 아무 죄도 없이 뭣도 모르고 지우개 준 죄밖에 없는데….”
 
  ― 친구 부탁인데 안 줄 수도 없고….
 
  “인생이라는 게 그렇게 평탄치가 않아. 그러니 너무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살면 된다는 얘기를 KAL 직원들에게 했어요. 사람이 살다 보면 별일이 많으니까.”
 
  ― 하와이에 정착하신 지는 얼마나 되십니까.
 
  조 전 부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 미국 하와이에 정착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다.
 
  “‘돌아간 회장’(조중훈)은 대(代)를 잇고 싶어 하고… 내가 한국에 있으면 걔(조카)들도 불안하고… 돌아가신 형님도 불안하고… 다들 불안해할 필요가 없잖아요.
 
  1995년도부터 준비를 해서 이듬해 ‘나의 길을 간다! 형님 잘하시오’ 하면서 하와이엘 갔어요. 깨끗이….”
 
  ― 하와이 가서도 대한항공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가졌죠?
 
  “관심은 있죠. 지금도 ‘대한항공 고문’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어요. KAL이 잘돼야겠고, 대한민국도 잘돼야겠고.
 
  여보 김형! 내가 잘난 것 아무것도 없어.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조그마한 일분자(一分子) 중 하나로 우리 회장도 그렇고, 나도 최선을 다해 살아왔지만 돌아보면 그저 운(運)이 좋았을 뿐이야.
 
  내가 고3 때 6·25전쟁이 났어요. 이후 모든 과정이 내가 한 게 아니고 환경의 지배를 받았을 뿐이야.”
 
 
  항해사 하면서 세상을 본 형 조중훈
 
  조중건은 서울 중앙고 3학년 시절 6·25전쟁을 체험했다.
 
  “고등학교 졸업도 못 하고 전쟁이 났는데 그러니까 미스터 김! 빨갱이 밑에서 3개월 동안 지하실이든 지하실이 아니든 산다는 게 그게 참, 공포의 생활이에요.
 
  힘들어! 보통 힘든 게 아니라고. 내 바로 밑 동생이 고1, 두 살 위 경기고녀 나왔다가 여의대(女醫大)가 생겨서 간 누님, 그 바로 위가 숙대 3학년이던 누님하고 그렇게 넷이, 지하실에서 생활을 한다는 게 그게 보통 일이 아닙디다.
 
  그때 집에 쌀 두 가마가 있었는데 그럭저럭 먹다가 한 달 지나면 전쟁이 끝나겠지 (싶었어요). 그런데 어라? 한 달 반, 두 달이 다 됐는데 올라올 줄 알았던 국군이 계속 더 내려가지 않수? 밥 대신 죽을, 세 끼도 아니고 두 끼만 먹었어요. 그런데 밥이 문제가 아냐. 정신적인 고통…. 참 힘듭디다. 왜? 수시로 문을 두들겨가지고….”
 

  ― 문을 왜 두드립니까.
 
  “근로 봉사하러 나오라는 거지. 그러니까 내 모친이, 키가 작은 할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잘못하면 지하실에 숨은 자식이 걸리게 되니까 열심히 봉사하러 다녔던 거지. 숨어 지낸 3개월 동안 인생이 뭐라는 걸 느꼈는데 그게 내 인생 항로를 바꾸는 데 영향이 컸다고 봐요.”
 
  ― 당시 창업주이신 조중훈 회장은 피란을 떠났나요?
 
  “이미 분가(分家)해 인천서 살았어요. 결혼하고 인천서 사업하다가 전쟁이 났소. 이미 한진상사를 1945년인가부터 시작했어요.
 
  운송 사업하며 트럭을 몰고 다니니까 ‘여보! 우리도 태워줘’ 하는 친구들 여럿 데리고 피란을 갔어요.
 
  둘째 형님 조중훈과 내가 띠동갑, 12살 차이예요. 형님이 휘문중에 다니다가 월사금 낼 형편이 안 돼 경남 진해의 해원(海員)양성소(국립 한국해양대 전신)에 갔어요. 공짜로 밥 먹고 기술 배우고 봉급으로 7원인가 8원인가를 받았다고. 2등 기관사가 되면서 생각이 달라진 거예요. ‘야! 세상이 이게 아니구나.’”
 
  ― 원양선을 타면서 천지개벽한 세상과 마주쳤나 보네요.
 
  “넓은 세상을 보게 된 거지. 도쿄·오사카·상하이·홍콩을 보면서 사람이 완전히 달라진 거야. ‘세상이 이게 아니구나.’ 형님이 머리가 좋은데 바깥세상을 보고 깨달은 거지. ‘정신 바짝 차려야겠구나’ 하고….”
 
 
  ‘이러다가 빨갱이 세상이 되는 걸까?’ 생각
 
  ― 6·25 당시 3개월 동안 지하실에 숨어 있을 때 답답하셨을 텐데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라디오가 있었는데 일본 NHK 방송이 잡혔어요. 빌어먹을…. 국군이 올라온다는 얘기는 없고 맨날 내려간다고….”
 
  ― 아군이 밀리고 있다는 얘기군요.
 
  “그럼. 밥을 먹다가 양식을 애껴(아껴) 죽을 먹는데, 계속 내려간다는 얘기만 나오니까…. 좋은 얘기가 아니잖소. 큰일 났구나.”
 
  ― 초조했겠습니다.
 
  “이러다가 빨갱이 세상이 되는 걸까? 쌀도 곧 떨어지고, 언제 인민군이 문 두들겨서 끌고 갈지 모르고, 라디오에선 아군이 밀린다는 얘기뿐이고… 참, 참 어려웠어요.”
 
  ― 그때 조중훈 회장 소식은 들을 수 없었나요.
 
  “집에 왔다 갔다는 했어요. 트럭이 있으니까 가족들 보러 들렀다고 하더라고요. 그 양반이 재주가 있었어요. 그냥 샌님으론 못 사니까 ‘이거 왜 이래! 이거!’라는 식으로 큰소리를 쳐야지 ‘저 사람한텐 안 되겠구나’ 해서 오케이 오케이….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왕래를 했어요.”
 
  ― 인민군 상대로 큰소릴 쳤다는 말이죠?
 
  “인민군은 아니고 빨갱이들…. 트럭이 있으니까 물건을 싣고 왔다 갔다 하지 않소. 그럴 때 잠시 집에 들렀던 거지요.
 
  근데 9·28 서울 수복이 되기 닷새 전에, 친한 친구 중에 누군가가 나를 밀고했어요. 문을 두드리며 나오라는 겁니다. 어머니가 ‘걔 없다’고 해도 ‘어머님 그러지 마세요. 거기 있는 것 다 압니다’… 4시간을 버티다가 결국….”
 
  ― 결국 발각이 되었습니까.
 
  “나왔죠. 도망가려고 해도 대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어떻게 해. 그래서 학교로 끌려갔잖소.”
 
 
 
“끌려가면 넌 죽을 거야. 빨리 꺼져!”

 
  ― 끌고 간 이가 친구였겠네요.
 
  “그렇지. 선배도 후배도 있고 동기 세 놈 해서 5명이었어요. 모교인 중앙고 본관은 북로당이 차지해 있었고. 강당엘 갔는데 아이고, 친구들이 다 있잖아.
 
  그 순간에 이춘우라는 친구가, 내 목덜밀 잡고 밖으로 끌고 가는 거야. ‘나와! 이 새끼’ 하면서.
 
  걔하고 나하고 가까운 친군데 공부도 같이 하고. 그놈이 강당 밖으로 날 데려가더니 ‘끌려가면 넌 죽을 거야. 빨리 가봐, 빨리 꺼져!’….
 
  내가 지금 김 선생하고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게 그 사람 이춘우 덕분이라고. 봄 춘(春), 비 우(雨)자 쓰는….
 
  아마 그 친구는 이북으로 갔을 거예요. 아직 갚지 못했어요, 은혜를…. 그때 겪은 시련이 현대사의 한 페이지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러다가 수복이 된 거예요.”
 
  조중건은 미 8군 사령부에서 통역관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때 시내에 가면 막 잡았지 않소. 근데 사병으로 가기는 싫고 장교로 입대해야겠는데, 내가 고3 때 전쟁이 났으니 고졸도 아니고, 그래서 보니까 미 25사단이 통역관을 뽑더라고. 그 25사단이 하와이 예비대잖아요. 내 운명이 그렇게 하와이하고 연결이 됐던 겁니다.”
 
  미 육군 제25보병사단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군사작전 수행을 위해 1941년 10월 1일 창설되었다. 사단 주둔지는 하와이다. 조중건은 지하실에서 숨어 지내는 동안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한 덕에 통역관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통역관으로) 사리원, 개성, 평양, 순안, 영변까지 25사단 덕분에 이북 곳곳을 다 가봤어요.”
 
  ― 인민군과 전투도 하고….
 
  “통역관은 전투는 안 해요. 평양다리 건너 대동강도 가고 순안 영변까지 갔다가 중공군을 만나가지고…. 압록강까지는 못 갔죠. 미군은 못 갔고 한국군 수도사단이 압록강까지 가서 수통에다 강물을 담아 이승만 박사한테 전했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1·4 후퇴 때 25사단 통역관을 그만두고 부산까지 내려갔어요. 역시 사병으로 군에 가긴 싫은데 마침 ‘제5기 육군 통역장교 간부 후보생 모집’ 방이 붙었어요. 영어는 곧잘 했기에 시험을 봐서 통역장교가 됐어요.”
 
 
  18세짜리 통역장교
 
  ― 영어 실력이 뛰어났나 봅니다.
 
  “뭐, 학교 댕길 때 영어를 열심히 했죠. 내 운명이 그때부터 다시 바뀌는데 대구에서 3개월간 기초군사훈련을 받았어요. 통역장교 후보생으로. 그래서 1951년 6월 1일 육군 통역장교가 됐어요. 소위를 안 달고 중위로….
 
  육군 통역장교로 임관해 진해 육군포병학교엘 갔어요. 김계원(육군참모총장·중앙정보부장·대통령 비서실장 역임) 준장, 심흥선(총무처 장관·합참의장 역임) 대령, 송찬호(국가재건최고위원 역임) 중령 같은 고급 장교들이 볼 때 나는 아들뻘은 아니고… 아우 정도로 취급해주었어요. 내가 참 운이 좋잖아. 그때 내 나이가 만으로 열여덟밖에 안 됐어요. ‘학교 댕길 놈이 전쟁 때문에 고생을 하는구나’ 동정하면서….”
 
  1952년 2월경 부산 동래에 있던 보병학교와 기갑학교, 진해에 있던 포병학교, 대전에 있던 통신학교가 광주(光州)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역시 광주로 가게 되었다.
 
  “도시 전체가 군인 판이지, 뭐. 점심을 먹으려고 갔더니 밥을 안 줘. 지리산으로 장작 하러 갔다가 습격당했대. 공비한테 당했다는 겁니다. 그만큼 치안이 엉망이었어요.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때 한국군은 군대도 아니야. 보통 미군은 1개 사단에 4개 연대가 있고, 그 4개 연대를 1개 포병대대가 지원을 해줘요. 18문의 포를 가진 포병대대가 1개 연대를 지원한다니까.
 
  그래서 보병이 진격을 하면 포병이 24시간 내지 어떤 때는 48시간 전방을 때린 다음에, 탱크를 앞에 놓고 보병이 옆에서 따라가는 게 미국의 작전이에요.
 
  우리도 연대는 4개 연대인데 엉터리 연대지. 사람도 화력도 형편이 없어서 미군이 볼 때 ‘오 마이 갓’이었어요. 반면에 북한 인민군은 구(舊)소련의 체계를 그냥 갖고 오니 38선이 유지될 수가 없지. 그러니 이틀 만에 수도 서울이 무너질 수밖에. 이승만 박사도 너무 적을 몰랐고, 전쟁이 뭔지 그 양반이 알 도리가 없지. 그래서 한국군을 무력화(武力化)시킨 거지!”
 
  당시 미군은 한국군 포병 전략을 향상시키기 위해 야포와 장비, 탄약 등을 제공하고 장교들을 훈련시켰다. 1952년 6~7월경에 포병부대가 창설되었고 조중건 중위는 제5 한미연합 155mm 곡사포군단에 배치되었다.
 
조중훈 회장의 美軍 군수물자 수송 스토리
 
  조중건 전 부회장은 선대 회장 조중훈의 ‘기막힌 한 수(手)’인 미군 물자 대리수송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형님이 머리가 좋아요. 그냥 지나치지 않고 우리보다 두 단계를 더 보더라고. 그 양반이 중소기업을 할 시절에 우리 경제가 엉망이었어.
 
  당시 미군 군수물자를 인천에서 하역해 미군 보급창(경기 부평)으로 옮깁니다. 보급품 싣고 의정부까지 가야 할 것 아닙니까. 미군 1군단이 거기에 있으니까. 또 동두천에 미 7사단이 있었어요.
 
  그런데 의정부나 동두천에 도착하기 전에 보급 물품이 사라져요. 물품을 실은 트럭 위에 속칭 ‘얌생이’라 불리는 아이들이 올라타서 물품을 밖으로 던져. 그게 다 어디로 가느냐. 남대문 시장으로 가요.
 
  목숨 건 절도행위가 기승을 부렸는데 어쩔 수 없어요. 트럭 운전수도 괜히 나섰다가는 봉변을 당하니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겁니다.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면 (보급품이) 거의 절반 가까이 사라지는 거야.
 
  그걸 형님이 보고 미 8군 사령관에게 편지를 썼어요. 인천 혹은 부평에서 동두천, 의정부로 군수물자를 옮길 때 한진상사가 수송하겠다고 말입니다.
 
  ‘여보슈 사령관 양반. 당신이 군수물자 수송할 때 문제가 많은 것 같은데 나한테 맡겨. 그러면 100% 보장해줄게. 만일 물건이 없어지면 보상해줄게. 100을 잃으면 100 다 변상해줄게. 돈으로, 물건으로 다. 물건은 남대문시장에 잔뜩 있으니까 사서라도 갚을게.’ 8군 사령관이 그 편지를 보고 ‘오케이!’ 그래서 한진이 미군 군수물자 수송을 맡게 됐어.
 
  워낙 물자가 많으니까, 운송업체들을 모두 모아놓고 ‘국가 체면이 걸린 문제다. 코리안 화물차 집합을 만들어 내가 리더가 될게. 따라와. 돈은 내가 벌어줄게’ 해서 시작된 겁니다. 이후 보급품 절도가 사라지게 됐어.
 
  나중에 내가 미국에서 돌아와서 보니까 1년에 그때 돈으로 140만 달러를 벌더라고. 당시로선 아주 컸다고.”
 
 
박정희 장군과의 만남

 
1954년 무렵, 오클라호마 미 육군 포병학교에서 고등군사반 교육을 마친 뒤 박정희 장군(가운데)과 조중건 중위(오른쪽).
  “《포술학(砲術學)》이란 책을 번역하느라 눈을 버렸어. 그리고 대포를 쏘느라 귀까지 나빠졌지 뭡니까. 그런데 통역장교를 하다 포병으로 전과(轉科)를 한 덕에 포병교관 및 통역관 자격으로 미국에 가게 됐어요.”
 
  미국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미 육군포병학교에서 한국군 포병장교들을 위해 교관 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그때가 1953년 6월이었다. 2년간 교관으로 지내며 다양한 군 인사들과 만났다.
 
  “미군도 죽을 지경이지. 훈련은 시켜야겠는데 돈이 한두 푼 드는 게 아니고, 편성만 해가지고는 안 되고 훈련을 시켜야겠는데 훈련장도 없고, 태평양 건너에 있는 대포를 가져올 수도 없고. 안 되겠다. 기간 장교를 뽑아 미국서 훈련시켜야겠다, 해서 내가 가게 된 겁니다.
 
  그때 미국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만나게 됩니다. 그전에도 뵌 적이 있는데 내가 광주 포병학교의 심흥선 교장(대령)의 보좌관 시절에 그분을 봤어요. 육사 2기생인 심 교장과 동기였거든. 그런데 미국에서 다시 볼 줄이야.
 
  그때 박정희 준장이 ‘왜 나만 따라댕겨’ 그래. 내가 ‘아니, 박 장군님! 장군님이 저를 따라댕기는 거 아닙니까. 확실히 말씀하세요’ 말하니 그제야 ‘내가 널 따라다니는 것 같다’며 웃으시더군요.”
 
  ― 박정희 장군에게서 받은 인상은 어떤가요.
 
  “그분이 고지식해요. 학구적이고. 매주 월·화요일에 10~15분짜리 시험이 있는데, 주말이면 만났어요. ‘조 중위, 주말에 약속 있어?’ ‘별것 없습니다’ ‘내가 점심 살 테니 나하고 문제 맞춰봐’…
 
  그렇게 날 아껴줬어요. 그 양반, 참 좋은 분입니다. 성격이 1+1이 2가 돼야 해. 그렇게 성실할 수가 없어. 다른 잡념이 없었다고.”
 
  이 대목에서 UC버클리로 유학을 떠나게 된 사연을 털어놨다.
 
  “이제 운이 열리게 되는데, 내가 제5 한미 곡사포 군단에 파견돼 있을 때 포병단 고문관이 짐 레이킨(James Lakin)이라는 중령인데 사람이 참 좋아. 같은 천막에 있는데 밤에 뭐 할 것 있어?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넌 어느 대학을 나왔냐’ ‘콜로라도대학. 너는?’ ‘고3 때 전쟁이 나서 입대했는데 언젠가 전쟁이 끝나면 공부 좀 하게 도와줘’ ‘그래. 내가 국방부에 있을 때 국회 연락 장교를 해서 리처드 닉슨(당시 캘리포니아주 상원의원·훗날 미 대통령)을 잘 알아. 내가 돌아가면 최선을 다해볼게’ 이런 대화를 나눴지.”
 
조중건은 1955년부터 59년까지 연간 1000달러의 장학금을 받고 미국 UC버클리대를 다녔다.
  미 포병학교 교관을 하던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레이킨 중령의 편지였다. 뜻밖에도 미국의 UC버클리 입학 허가서와 장학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장학금을 준 후원인 월터 하스(Walter Haas)는 리바이스 블루진 창시자의 아들이었어요. 또 유대계 미국인과 조지 스미스(George Smith)는 유명한 호텔 마크 홉킨스 호텔 체인의 소유주였어. 둘 다 캘리포니아대학 선배들인데 한 학기에 500달러씩 1년에 1000달러를 주었어. 대신 하루 2시간씩 접시닦이 하고 매년 여름방학마다 4년 동안 호텔에서 일하게 되었지.”
 
  더구나 전공은 수송학(Transportation)이었다. 물류수송을 학문으로 배워 ‘한진’의 사업 초기 전문성을 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공부가 평생의 자산(資産)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훗날 졸업을 하고서 대학에 300만 달러를 기부했어. 은혜를 갚은 거지.
 
  그런데 미국 유학을 다 마치면 군으로 돌아가 포병학교 교관 2년의 3배인 6년을 더 근무해야 하는 조건에 사인을 했다 이거예요. 솔직히 난 기억이 없는데….
 
  1959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육군본부로 복귀 신고를 하러 갔더니 아, 글쎄, ‘지금 장교가 흘러넘쳐서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으니 집으로 가봐’라는 거야.”
 
 
  조중훈, “장사꾼은 바보가 되는 거야”
 
  ― 운이 정말 좋을 수밖에 없네요.
 
  “집으로 돌아오니까 형님의 얘기가 ‘장사꾼은 바보가 되는 거야’ 이래요. ‘이 양반이 돌았나? 지금 한창 피가 끓고 뵈는 게 없는 젊은이한테 뭐? 바보가 돼? 좋아하시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지, 차마 그 자리에서 반박은 못 하고….”
 
  그도 그럴 것이 20대 후반의 늠름한 청년이 되어 귀향했으니 잔뜩 꿈에 부풀어 있었다. 세상을 향해 뭔가를 소리치고 싶었으리라.
 
  “형이 그래요. ‘똑똑한 척하면 다 도망가. 생선이라는 게, 붕어라는 게 물이 걸쭉해야 모이지 청수(淸水)에서는 살 수가 없다. 너, 나 좀 도와줘야겠는데 너무 잘난 척하다가는 손님들이 다 도망가니까 바보인 척해라. 알아도 모르는 척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얘기가 일리가 있어. 아버지께서도 ‘야, 형님 도와줘. 무조건 도와드려’ 그러시고. 내가 초이스(선택)가 없잖소. ‘알았습니다. 형님 좀 가르쳐주시오’ 그랬지.”
 
 
  퀴논港의 하역 문제점 발견한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 회장(오른쪽)과 조중건 부회장.
  한진상사가 성공을 거두는 데 발판 역할을 했던 것은 베트남 전쟁 특수다. 창업주 조중훈 회장의 아이디어와 조중건 부회장의 협상이 빛을 발했다.
 
  1965년 12월 한국용역군납조합이사장 직함으로 조중훈 회장이 경제시찰단을 구성, 베트남의 퀴논(Quy Nhon) 항만 주변을 날고 있었다. 그때 조 회장에게 번쩍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화물이 꽉 차 있는 배 30여 척이 짐을 실은 채 마냥 바다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역할 사람과 장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형이 비행기 창밖으로 유심히 퀴논 항만을 보더니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겁니다. 젊은 시절 기관사를 했기에 해운(海運)을 딱 알아본 거지. 항만에 1척당 1만2000t 하는 배 30여 척이 대기하고 있으니 문제라고 간파한 거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나를 불러.
 
  ‘너 얼른 좀 가봐. 쟤네가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전쟁 중인데 거긴 내가 왜 가?’
 
  그래도 형님하고 싸움할 필요가 없어서 며칠 있다가 ‘갈게요’ 했지. 형님은 ‘팩트 파인딩(fact finding)’을 원했던 거지. 내일 노스웨스트 타고 홍콩 가서 다시 에어프랑스 타고 퀴논에 가려고 계획을 세웠어.”
 
  떠나는 전날 오후, 노스웨스트 항공사 지점장이 미 8군 수송부장(대령)을 하다가 준장으로 승진한 미 육군 수송감이 한국에 잠시 들렀는데 그를 찾는다고 전했다.
 
  “그 마이크 라이클이 날 찾는다고 해서 오후에 만났지. 술 먹으면서 ‘나, 내일 월남 가는데, 넌 어디서 왔냐’고 하니 ‘사이공에서 왔다’는 거야.
 
  ‘그래? 우리 형이 퀴논에 가보라는데, 항만에 웬 놈의 배가 그렇게 많냐?’고 했어. 그랬더니 하역에 문제가 많다는 거야. 베트남 사람에게 하역을 맡기려고 해도 베트콩인지 분간이 안 되고, 미군 병사에게 맡기자니 ‘나 지금 바빠!’ 그런다는 거지. 대마초를 피우면 최소한 10분 이상은 쉬어야 한대요. ‘나 지금 기분이 좋기 때문에 가만히 계셔’ 그러니 미군들이 보급품 하역을 못 해 아우성을 치고 있다는 거지.
 
  군인들이 하역하는 데 한 달이 걸린다는 거야. 근데 대한민국의 국운(國運)이 그럴 수가 없지. 그렇게 맞을 수가 없잖아, 타이밍이. 의정부 군단장이었다가 미 주월군 부사령관으로 베트남에 간 하인케스(Heintges) 중장이 있고, 미 육군 수송감인 라이클이 주월군 병참 담당 부사령관으로 보직을 새롭게 받은 앵글러(Angler) 중장과 방금 베트남에 함께 갔다가 잠시 한국에 들렀다는 겁니다. 참, 미치는 얘기지.
 
  그러더니 하역이 지연되는 이유를 이실직고 얘기하는 거야. 그 자리에서 라이클 장군에게 부탁을 했어. 웨스트모어랜드(Westmoreland) 주월미군사령관과 앵글러 병참 부사령관에게 소개장을 써달라고. 한진이 문제가 아냐. 대한민국 국운이 움직이는 거였어.”
 
 
  ‘100일 안에 작업 개시를 못 할 때에는…’
 
1984년 대한항공 사장 시절, 기내 승무원들의 서비스 향상을 위해 조중건 사장이 직접 승객들을 만나 대화하고 음료를 제공했었다.
  한진상사 조중건 상무는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 퀴논 지역에 하역 인력(人力)이 없어 군수물자를 만재(滿載)한 화물선(貨物船)이 2~3개월씩이나 하역을 하지 못하고 있으며 작전에 막대(莫大)한 지장을 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월남에 오자마자 즉시 상황 파악을 위해 퀴논 항구에 가서 현장을 돌아보았고 현지 사령관과도 면담하여 사실인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한국을 구원하였듯이 월남전에서는 한국이 힘닿는 데까지 미국을 도와드리겠습니다.
 
  퀴논 운송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 원하신다면 한진에 수의계약(隨意契約)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계약일로부터 100일 안에 모든 작업을 시작할 것이며 만일 100일 안에 작업 개시를 못 할 때에는 지체 배상금으로 매일 1만 달러를 미 정부에 배상 지급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 사령관에게 직접 편지를 쓴 겁니까.
 
  “네,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전쟁 특수인데 제대로 돈을 받아야지. 우리 회장(조중훈)은 요코하마에 가서 하역요율을 알아보고, 도쿄, 홍콩, 샌프란시스코, 뉴욕의 하역요율을 받아가지고서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정확하게 t당 요율이 얼마인지, 탄약 하역은 얼마인지, 식료품은 얼마로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일본과 미국의 중간 정도의 가격으로 책정했어요. 미군이 계산서를 보더니 ‘산타 마리아! 뭐가 이렇게 비싸냐’ 이거야. 내가 차근차근 설명했어요. 미군 감사의 원가 분석을 뒷받침하기 위해 1만3000t급 화물선도 사고, 슈퍼 컨스틸레이션 비행기도 한 대 샀다고.
 
  ‘하역 담당할 한국인을 비행기에 싣고 와야지, 밥 세 끼 먹여야지, 보험 들어줘야지, 또 베트콩한테 습격이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100일 동안 준비하고, 101일부터 작업을 시작할게. 그리고 정해진 날짜에 하역을 마치려면 서포팅을 해줘야 할 것 아니오?’
 
  미군 측에서 ‘화물선이 왜 필요하냐’고 반문해요. ‘미군이 후퇴한다고 했을 때 우리 하역 요원들을 너네 비행기로 안전하게 실어 나를 수 있어? 그럼 배를 팔게. 베트콩이 우릴 습격하면 임시로 (보급품을) 배에다 실어 놔야 할 게 아니냐. 우리 근로자들 사고가 나면 몇만 달러씩 지급해야 하는데 그게 싸겠어, 배를 사는 게 싸겠어? 비행기도 있어야 급하면 환자도 나르고 할 것 아니겠어?’”
 
  마침내 1966년 3월 10일, 사이공의 주월미군사령부에서 앵글러 중장과 조중건 상무는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그렇게 월남에서 5년 동안 2억 달러 가까이 벌었어. 꽤 컸다고.”
 
  그러면서 한 가지 추억을 더 보탰다.
 
  “1970년 말부터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를 개시했는데 우리 한진숙소 옆에 미군의 자동차 야드가 있었어요. 전쟁 말기에는 거의 새 차들도 입고(入庫)가 됐어요. 미군이 철수하니 그 차들은 베트콩이 차지하게 생겼잖아. 그래서 사령관한테 한진이 가져갈 수 있는지를 물었어. 마음대로 가져가라는 거야.”
 
  ― 공짜로?
 
  “공짜지. ‘자유 진영으로 가져가니까 그런 줄 알아요.’ ‘오케이.’ 그때, (미군이) 뭐 후퇴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해. 그 자리에서 절단하고 압력해서 우리 배에다가 실어 인천제철에 갖다 줘서 인천 제2부두를 만들었어요. 한진이 10년간 쓰고 정부에다가 기부 채납한 거지.”
 
 
  日 JAL의 도움 끌어내
 
조중건 대한항공 사장이 1984년 기내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하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뒤에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이 보인다.
  1969년 적자에 허덕이던 국영기업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 대한항공이란 민간 항공사로 출범한 지 50여 년이 흘렀다.
 
  조중훈 창업회장이 항공 운송산업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서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면, 조양호 회장은 선친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 선진 경영 기법을 접목해 ‘수송보국(輸送報國)’의 길을 닦아 대한항공을 글로벌 항공사로 키워냈다.
 
  이 과정에서 조중건 부회장의 역할도 가볍지 않으리라. 아시아 12개국 항공사 중 11번째의 구제불능 적자 항공사는 어느덧 연 매출 12조2917억원(2019년)에 이르는 거대 항공사 대한항공으로 변신해 있다.
 
  “KAL 인수하고서 항공 기술도, 정비 기술도 없어, 돈도 없어. 나자빠질 수도 없고. 미국 가서 얘기하면 ‘웃기지 마’ 할 거니까 그럼 어떻게 할 거냐. (회장에게) ‘가까운 일본한테 가서 얘기 좀 하고 좀 지원을 받아야겠다’고 했어요.
 
  비행기 한 대 사면 정비사 훈련을 한 명에게만 시키우? 정비사도 40~50명이 필요해. 조종사도 비행기 한 대에 20~30명은 있어야 하고. 그때 노스웨스트 비행기 타고 미국 가는 편도 항공료만 650불 했어. 큰돈이라고. 한 명만 보낼 수 없잖소. 미국 보잉사에 몇십 명을 보내야겠는데…. 그래서 일본 JAL(Japan Airline) 도움을 받았어요.”
 
 
  같은 신라 혹은 백제 출신이라며 마음 움직여
 
  ― 어떻게 마음을 움직였어요.
 
  “JAL 회장을 만나 ‘당신 고향이 어디요?’ 도쿄 지방이거든. ‘내가 역사 공부를 못 했지만은 당신이나 나나 신라 계통 같소.’ 하하하.
 
  또 어떤 회장은 고향이 오사카 주변이래. ‘당신하고 나하고 백제 계통 아니오?’ 그랬더니 대부분 다 그렇대.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얘기가 JAL 한국지점장을 하던 분이 있어요. 후쿠오카 출신이야. 대학은 도쿄대학을 나왔고. 후쿠오카에서 도쿄대학은 어려운 얘기잖아요.”
 
  ― 그렇습니까?
 
  “어렵지. 수재 아니면 여보 어떻게 거길 들어가. 특히 후쿠오카 출신이면 얘기가 안 되지.
 
  ‘당신 고향이 후쿠오카 같은데 후쿠오카에 몇 대가 살았냐? 5대가 살았대. 그래서 내가 ‘같은 백제끼리 경의를 표합니다’ 그랬지. 백제 틀림없지. 후쿠오카에서 5대가 살았으면 백제밖에 더 있어? 갑자기 내가 일어나서 절을 하니까 상대도 맞절을 한 거지. 자기도 그렇게(백제 출신이라) 생각한대.
 
  뭘… 한국하고 일본하고 차이가 나? 같은 백성인데 내가 그래서 이제 설명을 해준 거예요.
 
  한국인과 일본인의 DNA가 55%가량이 비슷하다고 합디다. 나머지는 남방계하고 일본 원주민 아이누계의 피가 섞여 있어요.
 
  어느 방송 프로를 보니 고려의 마지막 왕자가 988명의 신하를 데리고 도쿄만(彎)까지 왔다고 합디다. 실제로 도쿄에 가면 고려신사(高麗神社)가 그렇게 많다고. ‘그러니까 너네하고 우리하고 싸움할 여지가 돼? 같이 피가 섞였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3 되자마자 모든 게 이뤄져”
 
  일본 JAL의 도움을 많이 받았음은 물론이다. KAL이 불쌍해 보였는지는 몰라도 각종 여객 및 화물 매뉴얼, 시설, 기술, 조종사 교육 등을 공짜와 다름없는 비용으로 제공했다고 한다.
 
  “JAL하고는 되도록이면 경쟁하지 말자고 그래요. 요새도 JAL하고는 경쟁을 안 해요. 은혜를 입었는데 되도록이면 신세를 갚아야지. 요새도 JAL하고 관계가 괜찮아요.
 
  내가 지금 나이 90인데 이제 얼마 있다가 가고 결국 한진, KAL이 남는데 KAL이 뭐야? 죽을 때 가져가? 대한민국 재산 아니야?”
 
  ― 맞습니다.
 
  “대한민국 것인데 좀 더 잘 키워야겠다. 어저께 (KAL 직원들한테) 한 얘기도 딴 게 없어요. ‘사람 사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또 발전의 계기를 보고 하는 거다.’
 
  내년 내 건강이 어떻게 될지 자신이 없는 것이고….
 
  근데 김형, 그래 내가 보기에 글쎄, 작고한 우리 형님이 참 머리도 좋은데 그 양반 혼자 잘해서가 아니고, 내가 잘난 것 아무것도 없고, 국운하고 다 맞아서 미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해, 박 대통령이 파병해, 미군이 철수해….
 
  운명이지. 나이 먹고 생각해보니, 고3 되자마자 모든 게 이루어진 거 아니에요? 모든 게….
 
  3개월 지하실에 있다가 통역관으로 미 25사단을 따라, 이북도 가서 보고, 돌아와 통역 장교가 되고 포병학교 교관이 되어 미국에 가고….
 
  인민군 치하 때 지하실에 있으며 캐피털리즘 책을 읽었고 마르크스 책도 읽었어요. 내가 보는 게 절대는 아니지만 내 생각은 이거야, 미스터 김.
 
  내가 잘난 것 아무것도 없고, 그 시기에 태어나, 그 시기를 활용했다고 그럴까? 만일 북으로 끌려갔다면 죽었을 텐데 운명의 종이 한 장 차이로 살아나, 나름대로 많은 분을 만났던 거지.”
 

  ― 앞으로 항공산업의 미래를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그간 코로나19 때문에 여객은 피해를 많이 봤죠. 화물이 그래도 지난 이태 동안 커버를 조금 해줬는데 이제 화물도 끝이 났고. 환율이 지금 1400원대로 갔기에 회복하는 데 좀 시간이 걸릴 것 같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야 하는데….
 
  다른 게 없어요. 보다 좋은 서비스, 안전 운항을 더 연구하고 마케팅도 좀 더 잘해서 대비해야겠다… 열심히들 하고 있어요. 역시 KAL! 하여간 어떻게 됐든지 간에 최선을 다해 보는 거지 뭐.”
 
  ― ‘아시아나’ 인수는 불가피하고 또 가야만 할 길이지 않습니까.
 
  “글쎄, 이 조그마한 나라에서 두 개 항공사를 키운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는데, 지금 정리를 하자니까… 그러니까 위정자들이 정말 양심적으로 잘해줘야, 국가 생각을 해야 하는데….”
 
  ― 살아오면서 평범한 삶에 대한 갈구, 이런 건 없었나요.
 
  “여기 대한민국 자체가, 김형도 알다시피 편안한 날이 없지 않았소. 근데 KAL, 한진그룹이 대한민국 바깥에 있는 게 아니고 대한민국 안에 있기에 항상 국가와 더불어 그 고난을 다… 우리 팔자소관이다, 운명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지.”
 
  ― 신(神)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요새 나이가 먹다 보니까는, 신의 존재를… 예수 그리스도나 석가모니 한 사람에 대한 것보다도 많은 신이 계신 것 같아.”
 
 
  “형님 지원을 받고? No!”
 
  ― 지금 지방자치단체마다 공항 이전이나 신공항 건설을 내세우고 있어요. 국책사업으로 부산 가덕도신공항, 대구·경북신공항, 새만금신공항 등을 건설하려 하는데 충고의 말씀이 있을까요.
 
  “국내 여객만으로 효율이 없잖소. 서울서 기차 타면 부산·광주 금방 가는데. 각 지역 공업지대를 서포트할 수 있는 세컨더리(secondary·제2의) 허브로서 자리 잡도록 하는 게 좋고, 규모는 미디엄(중간) 사이즈로. 한 가지 덧붙이면 ‘우리도 서울에 이겨야겠다’고 너무 과장하면 망하고…. 근데 한국 사람들은 ‘야야, 쩨쩨하게 좀 크게 해야지’ 하는 게 있는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젊은이에게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누가 도와주질 않았거든요. 이 조그만 나라에서, 처한 운명을 개척하는데 그럼 어떡할 거냐? 형님 지원을 받고? 노(No)! 천만의 말씀! 부모가 서포트해줄 여력도 없고.
 
  그럼 어떡할 거냐. 자기계발을 해야지. 계발을 하지 않고서는 맨날 남한테 치이고, 지배만 받을 수밖에 없어요. 자기 특기를 가져야 해요. 특정한 소수만 할 수 있다? 딴 사람은 할 수 없다? 노! 나도 전쟁통에서 이걸 했는데 젊은 사람들이 못 할 리가 없어. 왜 못 해.”
 
  ― 한진이, KAL이 국민에게 어떻게 기억되길 바랍니까.
 
  “한진이 수송을 전문으로 해서 시작했고, 지금도 수송을 중심으로 하는 회사 아닙니까?”
 
  ― 국민기업이죠.
 
  “국민기업인데 참 어렵죠. 결국 수송이 뭐야? 포인트 A에서 포인트 B까지 안전하고 쾌적하게 임무를 완수하는 거 아니오.
 
  근데 한국이 ‘서비스 마인디드’가 안 돼 있어요. 서비스가 뭐야? 대화 아니에요? 손님이 라스베이거스로 간다면 주변 후버댐도 그랜드 캐니언도 말할 수 있어야지. 뭘 알아야 손님하고 대화할 거 아니에요?
 
  ‘아유, 저는 그랜드 캐니언엘 못 가봤는데…’ 하면 서비스가 아니질 않나. 그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그럼 한국 가정도 그런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그렇지 않잖아요. ‘야! 너, 프라이드 잃지 말고 남한테 굽실대지 마’라고 가르치는데 이러면 남하고 대화하는 교육이 부족하잖아.”
 
  ― 3세대 경영진이 잘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1세대의 눈으로 볼 때 100% 만족을 하느냐? KAL이 어려워요, 이 항공사업이…. 안전을 유지해야겠고, 손님 서비스가 좀 다양하우? 음식 관계, 서비스 관계… 끝도 없는 사업 아닙니까? 월말까지 스튜어디스팀 만나고, 정비팀도, 화물팀도 만나서 내가 아웃사이드로 보는 것, 좀 더 개선할 점을 말하려고 해요.”
 
 
  “지고 이겨라”
 

  ― 《월간조선》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을까요.
 
  “나 특별한 거 아무것도 없어. 고생해서 자랐고, 전쟁 겪었고, 인생 밑바닥이 뭔지 알고, 답이 뭔지 아는데….
 
  주어진 여건에서 적을 되도록이면 만들지 마. 한국 사람들은 이기고 지는데, 지고 이겨. 지는 척하는 거지. 남 의견도 들어 반영하고 타협도 하고. ‘나만 맞고 너는 틀려?’ 그럼, 원수지간이 되는데?”
 
  ― 지고 이겨라… 창업회장의 말씀이지요?
 
  “지고 이겨라… 그게 내 인생이고 그렇게 끝을 내려고 하는데, 내가 절대가 아닌 건 너도 알고 나 자신도 안다. 왜? 내가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럼 어떡할 거냐?”
 
  잠시 숨을 몰아쉬더니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다른 게 없어. 로 프로파일(low profile)! 기타 치는데 하이톤만 치지 말고, 로 키(low key)로 남 얘기도 듣고, 주파수를 그쪽에다가 맞추면 말썽 생길 게 없잖아. 한국 정치를 가만히 보면, 항상 나만 맞고 당신은 틀렸다고 생각을 하니까 대화가 안 되죠.”
 
 
  “한국에서 2인자가 어디 있어? 다 1인자지”
 
2016년 무렵의 조중건 대한항공 고문. 그는 “대한민국 경제 발전을 위해서 3인자면 어떻고 10인자면 어떠냐”고 말했다.
  ― 생전에 박태준(朴泰俊) 전 총리가 조 부회장을 칭찬하며 ‘2인자론’을 설파한 일이 있었죠.
 
  “아니, 1인자밖에 없어. 나는 아우로서 형님 위해 서포트했고, 또 회사를 위해 서포트를 했지. 한국에서 2인자가 어디 있어? 다 1인자지. 2인자가 필요 없잖아.
 
  2인자, 그건 과찬이고, 난 형님 위해서도 그렇고, 그룹 위해서도 그렇고, 크게 보면 대한민국 경제 발전을 위해 2인자가 아니라 3인자면 어떻고, 10인자면 어떻고, 내가 할 수 있는 범주를 넘지 않았어요. 내가 범주를 넘으면 ‘형님! 나도 회장 좀 해야겠소’ 그래야 하는데, 하하하. 안 그러우?
 
  ‘형님만 할 거요? 나도 회장 좀 합시다’ 해야 하는데 뭘 해, 하기는…. 참모로서 끝을 내는 거지. 그래서 내가 하와이를 간 거지.
 
  후회가 없어. 전혀 없고. 인생이 다 왕이 될 수는 없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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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necowboy    (2022-11-12) 찬성 : 2   반대 : 0
정말이지 간만에 접하는 대단한 인터뷰네요. 험난한 시절을 개척해온 인생역정도 존경스럽고 아직도 회사발전을 위해 애쓰시는 모습도 존경스럽고 무엇보다 욕심을 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해 헌신하신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장차 100세를 넘겨서도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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