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의 대한민국을 일으킨 위인은 박정희, 이건희는 그 다음 그룹에 랭크....산업강국을 만들고(박정희),2단계 ICT산업의발전주역(이건희)
⊙ 이건희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憂國衷情, 늘 나라 걱정에 잠 못 이뤘다
⊙ 이건희의 입버릇 “자유시장경제 못 지키면 나라 망해… 나라가 잘살고 국민이 잘살아야”
⊙ “기업은 국민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홍보팀에 늘 강조, 이학수 비서실장이 그룹경영에 충실히 반영
⊙ “삼성을 필요로 하는 곳은 다 지원하라” 홍보팀에 직접 지시한 이건희
⊙ 월급쟁이가 잘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이건희…우수인력이 모여야 세계 최고의 월드클라스와 경쟁
⊙ “이재용 부회장, 수난 겪으며 아버지의 책임감과 국가관 이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명예를 가장 중시했던 이건희… 쓰러진 후 각종 루머에 시달리고 死後 재조명 미흡해 가슴 아파
⊙ 이건희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憂國衷情, 늘 나라 걱정에 잠 못 이뤘다
⊙ 이건희의 입버릇 “자유시장경제 못 지키면 나라 망해… 나라가 잘살고 국민이 잘살아야”
⊙ “기업은 국민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홍보팀에 늘 강조, 이학수 비서실장이 그룹경영에 충실히 반영
⊙ “삼성을 필요로 하는 곳은 다 지원하라” 홍보팀에 직접 지시한 이건희
⊙ 월급쟁이가 잘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이건희…우수인력이 모여야 세계 최고의 월드클라스와 경쟁
⊙ “이재용 부회장, 수난 겪으며 아버지의 책임감과 국가관 이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명예를 가장 중시했던 이건희… 쓰러진 후 각종 루머에 시달리고 死後 재조명 미흡해 가슴 아파
- 2020년 10월 25일 타계한 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사진=조선DB
10월 25일은 이건희(李健熙·1942~ 2020) 전 삼성 회장의 2주기다. 삼성은 지난 8월 이재용 부회장이 광복절 특별사면과 복권으로 본격적인 경영 활동에 나서면서 대규모 투자와 반도체 주도권 확보 등 적극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다만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내고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기반을 닦은 이건희 전 회장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재조명 작업이 이뤄지지 못한 상태다. 사후(死後) 2년간 코로나19 창궐 및 계속되는 국정농단 재판 등이 겹친 탓이다. 그룹이 해체되면서 전반적인 자료와 증언을 모으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월간조선》은 이건희 전 회장 사망 직후 그의 신경영 추진(1993~1996년) 당시 업무 지시가 담긴 육성 녹음테이프 40여 개를 단독 입수해 보도했고 이후 삼성의 전·현직 관계자 등을 만나며 후속 취재를 계속해왔다.
이 과정에서 이 전 회장이 국내의 역대 어느 기업인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업적을 남겼고 우리 사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조명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그들에게서 확인했다. 2007년 ‘김용철 사태’ 이후 그룹 해체, 2014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생성된 각종 루머, 2017년 국정농단 사태 후 삼성 오너 일가에 닥친 어려움 등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연으로 삼성은 이건희 전 회장이 사망한 지 2년 가까이 지났지만 위인(偉人)의 사후 일반적으로 이뤄지는 공식 추모행사나 기념장소 건립, 다큐멘터리 제작, 평전 출간 등은 엄두도 내지 못한 상태다. 이 전 회장에 대한 향수를 일반인이 직접 느낄 수 있는 수단은 이건희 소장 미술작품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정도다.
‘이건희 업무 지시 육성 테이프’를 제공했던 현명관 전 삼성그룹 비서실장에 이어 《월간조선》에 이건희 회장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 ‘이핵관(이건희 핵심 관계자)’은 32년간 삼성의 홍보 책임자였던 이순동(李淳東·75) 전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사장(현 국제광고협회 한국지부 회장)이다.
이순동 회장은 “국내 대기업 중 삼성이 최초로 본격적인 기업 홍보를 시작했고 ‘삼성 홍보’는 국내 기업 홍보의 매뉴얼이 됐는데, 이건 내 업적이 아니라 이건희 회장의 업적”이라고 했다. 서울 역삼동 국제광고협회(IAA)사무실에서 이순동 회장을 만났다. ‘홍보맨은 자신이 인터뷰를 하거나 밖으로 드러나면 안 된다’는 게 수십 년간 홍보를 해온 그의 생각이었지만, 이건희 전 회장의 생애를 재조명하고 싶다는 기자의 취지에 동의하며 만남에 응했다.
‘국내 홍보맨 1호’ 이순동 회장은 누구?
삼성전자 최초의 홍보팀장이며 국내 대기업에서 홍보 담당으로는 처음으로 사장을 지낸 이순동 회장은 1980년부터 2011년까지 삼성 홍보를 책임지고 이끌어온 인물이다. 현재 국제광고협회 한국지부 회장을 맡고 있는 이 회장은 ‘국내 홍보맨 1호’ ‘기업 홍보 1세대’ ‘홍보의 전설’ 등 수많은 별칭을 갖고 있다.
이 회장은 배재고-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1972년 《중앙일보》에 기자로 입사했고 언론통폐합 후인 1980년 삼성전자 홍보팀장(과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후 홍보실 부장과 실장을 거쳐 1991년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홍보이사가 됐고, 비서실 홍보팀에서 상무-전무로 승진했으며, 1998년 삼성 구조조정본부가 생기면서 구조본 홍보팀장 전무가 됐고, 이후 삼성이 구조본-전략기획실 체제를 거치며 그룹 홍보 담당 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 밖에 삼성전자 부사장, 제일기획 사장, 삼성 브랜드관리위원장, 삼성사회봉사단장, 삼성미소금융재단 이사장 등 삼성의 대외 업무와 관련한 최고위 직책을 두루 거쳤다.
이 회장은 국내에 ‘기업 홍보’를 처음으로 선보였고 홍보팀을 기업의 주요 부서로 자리매김한, 홍보업계의 전설적인 존재다. 한국PR협회 회장, 한국광고주협회 회장, 한국광고인총연합회 회장, 한국광고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회장은 LG 정상국 전 홍보부사장 등과 함께 국내 기업 홍보 1세대로도 불린다.
그가 홍보의 전설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1위 기업인 삼성의 홍보 담당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홍보라는 개념이 국내에 정착되지 않았던 1980년부터 ‘기업을 살리는 것은 홍보’라는 신념하에 캠페인, 언론, 광고, 사내 커뮤니케이션 등 홍보의 전 분야를 국내 기업에 개척하고 정착시켰다. 그 배경에는 이건희 회장이 있었다.
이건희 육성 테이프, 김용철 사태 이후 폐기
먼저 《월간조선》이 2020년 11월호에 보도했던 ‘이건희 육성 테이프’를 언급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월간조선》은 삼성 신경영 당시(1993~ 1996년) 이건희 회장이 업무 지시를 녹음하도록 한 40여 개의 육성 테이프를 입수해 이 전 회장이 신경영을 어떻게 직접 추진했는지 보도했습니다.
“솔직히 그 테이프가 남아 있는 줄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이건희 회장의 진면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됐지요.”
― 당시 이건희 회장은 임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모두 녹음하라고 했다는데 왜 삼성에는 테이프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2007년 김용철 사태(삼성 법무실장 출신 변호사 김용철이 삼성의 내부 사정을 언론과 저서를 통해 폭로한 사건) 이후 여러 이슈로 검찰 조사가 있었죠. 압수당하거나 하면 무슨 얘기가 나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육성 테이프는 대부분 1990년대 초중반의 것이어서 갖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는데 갖고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그때 없앴습니다.”
― 알려지면 안 되는 내용이 있었나요.
“불법적인 내용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기업 내부 기밀과 오너 일가 사적인 이야기 등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일을 겪지 않으려 한 것이죠. (테이프를 보유한) 현명관 전 비서실장은 당시 삼성을 떠나 정치권에 있었고 귀중한 자료를 굳이 없앨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 중요한 사료(史料)가 완전히 사라질 뻔했습니다. 삼성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 전반에 대한 얘기도 많이 있었습니다.
“제 입장에서도 그렇게 좋은 자료를 없애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의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테이프를 전부 들어보면 알 수 있죠. 이건희라는 인물은 단순한 기업인이 아닙니다. 전설적인 혁신가였고,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애국자였으며, 자유시장경제의 수호자였습니다.”
― 이건희 회장은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이 드물었고 대면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아서 그런 면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심층 인터뷰는 《월간조선》의 ‘오효진의 인간탐험’ 인터뷰가 유일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 회장은 기자 만나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데 홍보팀에서는 인터뷰를 웬만하면 하지 않았으면 했죠. 이 회장이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이어나가는 성격이다 보니 어떤 얘기가 나올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공개된 인터뷰나 말씀자료가 많지 않아서 그의 진면목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긴 합니다.”
그는 3시간여에 걸쳐 이건희 전 회장과 삼성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가전시장 3위 삼성전자가 홍보팀을 만든 이유
이순동 회장은 1980년 언론통폐합 당시 《중앙일보》를 떠나 삼성전자에 입사, 새로 생긴 홍보팀의 팀장(과장)이 됐다. 당시 삼성그룹 회장은 이병철, 이병철 회장의 3남 이건희는 《중앙일보》 이사이면서 삼성그룹 부회장이었다. 1970년대 동양방송(구 TBC)과 《중앙일보》의 이사를 맡으면서 미디어 분야에 집중했던 이건희에게 1980년 전두환 정부의 언론통폐합과 TBC 폐국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 1980년 이전엔 삼성전자 홍보팀이 없었습니까. 왜 그때 생긴 건가요.
“그때 삼성에 홍보팀이라곤 그룹 홍보팀, 제일 큰 회사인 제일제당 홍보팀 정도만 있었고 인원도 소수였어요. 국내에 홍보라는 개념 자체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언론통폐합이라는 사건을 겪은 후 이건희 부회장이 대책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한 겁니다. 1967년 한국비료를 정부에 뺏긴 것도 삼성가(家)에는 엄청난 사건이었거든요. 정부에 기업을 뺏기지 않으려면 강력한 홍보 기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직접 삼성전자에 홍보팀을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또 언론통폐합으로 갈 곳을 잃은 기자들이 삼성으로 상당수 들어왔는데 그 아까운 인력을 다른 데 쓰지 말고 각 사에 홍보팀을 만들라고 이건희 회장이 직접 지시를 했습니다. 그때 각 계열사에 홍보팀이 만들어졌습니다.”
1980년대 초반 당시 가전 생산을 주력으로 하던 삼성전자는 국내 가전시장에서 금성사(현 LG전자), 대우전자에 이은 3위였다. 삼성전자가 후발주자이기도 했고, 산업 관련 규제도 많았다.
― 이건희 부회장이 홍보팀을 만들면서 1위가 되길 바랐겠군요.
“그럼요. 그때 ‘가전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제조와 판매 실적으로 따라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효과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선 홍보가 중요하다는 게 이건희 부회장의 생각이었죠.”
― 당시 금성사와 삼성전자는 위상과 실적에서 차이가 꽤 있었는데요.
“그래서 홍보가 중요했던 겁니다. 홍보팀이 그때 만들어낸 카피가 ‘숙명의 라이벌, 금성과 삼성’이었습니다. 둘 다 별 성(星)이 들어가니까 ‘스타(star)워즈’라는 이름도 붙였습니다. 사실 금성사는 삼성전자를 라이벌로 생각을 안 했어요. 근데 기자들 입장에선 금성과 삼성이 라이벌전을 벌인다, 스타워즈를 벌인다라는 좋은 기삿거리가 생긴 겁니다. 우리가 숙명의 라이벌이니 스타워즈니 하는 보도자료를 쏟아냈고 계속 기사화가 되니 금성사도 홍보팀을 만들었죠. 기업 담당 기자들의 기삿거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신문사 편집국에 경제부와 별도로 기업을 담당하는 산업부가 생겼습니다. 연일 신문에 라이벌전 기사가 나오니 직원들의 사기도 높아졌습니다. 결국 삼성전자가 금성사 매출을 추월했고 홍보팀은 언론사들을 돌아다니며 ‘이제 매출을 기준으로 금성-삼성이 아닌 삼성-금성으로 써달라’고 설득했습니다. 이후 가전시장의 확실한 1인자는 업계에서도 소비자 사이에서도 삼성전자로 굳어졌죠. 이런 과정을 이건희 회장은 일일이 체크했어요. 언론과 홍보가 기업 경영에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 회장은 신문기사 한 줄만 부정적으로 나와도 홍보팀에 바로 전화를 했습니다.”
기업 ‘이미지 홍보’의 등장
이건희 회장은 1987년 그룹 회장직에 오르지만 3년여간 대외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은둔의 시간’을 갖는다. 이 기간의 행보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지만 그를 쭉 지켜봤던 이순동 회장은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다 보니 선대(先代) 시절의 임원들과 서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교통사고 후유증도 있었다”고 했다. 이 회장이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선 시기는 1991년이다. 이때 이순동 회장은 삼성전자 홍보실장에서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홍보팀 이사로 자리를 옮긴다. 그룹과 회장을 홍보하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 기업 홍보와 그룹 홍보의 다른 점이 뭡니까.
“국내에 기업 이미지 홍보라는 게 생긴 시점이 그때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기업 이미지 관리에 굉장히 신경을 썼어요. 회사 이미지가 나쁘면 망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기업 이미지 광고, 기업이 주도하는 캠페인 이런 것들이 1990년대 초반 삼성에서 시작됐습니다.”
― 광고 시장이 커졌죠.
“광고 시장이 커지면 혜택을 누가 봅니까. 언론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언론이 자유시장경제를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하고, 언론이 제대로 생존하면서 제 역할을 하려면 기업들의 광고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언론에 광고를 주는 게 기업의 사회적 비용이라고 본 겁니다. 보수 언론이고 진보 언론이고 가리지 않고 모든 언론에 광고를 줬죠. 구독률 낮은 진보 언론에도 광고를 주니 일부 보수 언론이 불만을 품는 일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 회장은 ‘보수 언론도 진보 언론도 살아야 언론이 산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건희 “홍보가 기업의 生死與奪을 쥐고 있다”
그는 이건희 회장이 1981년 6월 에버랜드에서 각 사 홍보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수에서 강의에 나서 이런 얘기를 했다고 말했다.
“세간에서 삼성 이병철을 돈병철이라고 부르더라. 다들 미워한다는 얘기다. 사람들이 기업을 밉게 보니 기업인들은 정권이나 정치인들에게 이용을 당하고 기업도 하루아침에 뺏기는 상황이 벌어진다. 기업은 국민의 사랑을 받아야 하고 사랑을 받지 못하면 기업이 없어진다. 사랑받기 위해선 국민들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국민에게 우리가 하는 일을 잘 설명해야 한다. 그게 홍보의 역할이고, 즉 홍보인은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기업 이미지 광고와 캠페인을 시작한 것도 이건희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삼성 하면 기억나는 카피 많죠? 또 하나의 가족, 국민 대표 브랜드 삼성, 디지털프론티어, 삼성이 만들면 다릅니다, 이런 문구 다들 한 번씩은 들어봤잖아요. 기업 이미지 광고를 만들라고 했어요.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으로 만들라는 겁니다. 그 전엔 재벌그룹은 많았지만 ‘그룹 홍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거든요. 신문 1면과 맨 뒷면에 이런 그룹 광고를 실으니 독자들에게 ‘아 삼성은 단순히 제품을 만들고 파는 기업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일을 하는 기업이구나’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겁니다. ‘감사합니다 캠페인’도 이 회장의 아이디어였어요. 국민에게 감사한 마음을 항상 가지라는 거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시대를 한참 앞서 나갔습니다.”
― 홍보를 무척 강하게 강조했네요.
“한국비료나 TBC를 뺏긴 경험이 뼈아프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선대 회장(이병철)은 그런 이유로 정치를 할 생각을 했었는데 이건희 회장은 선대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기업이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응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뺏길 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국민-대언론 홍보를 통해 여론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우국충정의 자유시장경제 수호자”
― 이병철 회장도 정치를 하려는 뜻이 있었다고 하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직접 정치에 나섰는데요, 이건희 회장이 스스로 정치를 하고 싶어 하진 않았습니까.
“그런 건 생각할 시간도 없었던 것 같아요. 삼성이 하고 있던 것 외에 자동차, 의료, 레저, 복지, 부동산, 스포츠, 교육, 서비스업, 언론, 동물, 패션까지 관심이 없는 분야가 없었습니다. 정치 말고도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 30년 이상 함께해 온 이건희 회장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우국충정입니다. 요즘 시대에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념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나라를 걱정하고 잘되길 바랐어요.”
― 의외입니다.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이뤄냈다거나 훌륭한 기업인 또는 경영인 같은 단어를 예상했는데요.
“이건희 회장은 기업인이나 경제인이라고 말하기엔 아까운 존재입니다. 늘 나라 걱정을 하고 있었어요. 업무를 마치고 쉬려고 해도 나라 걱정에 잠이 안 온다고 했습니다. 사실 처음엔 ‘이분이 대통령을 하고 싶은 건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 늘 나라 걱정을 한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삼성은 6·25전쟁과 군사쿠데타 등 현대사의 굴곡을 겪으며 자란 기업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혹시라도 자유시장경제체제가 무너질까 봐 걱정을 한 겁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안팎으로 어려움이 많았잖아요. 1970년대에 경제발전을 이루긴 했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요. 해외출장을 가면 가난한 나라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이 바란 건 우리나라가 강한 나라가 되고 국민이 잘사는 것이었는데 그러려면 자유시장경제가 튼튼하게 자리 잡아야 하고, 그게 자신, 즉 기업인의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1987년 회장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돼서 한 일이 달동네를 돌아다닌 거였어요. 동행했던 임직원들은 의아해하기도 했죠. 삼성 회장의 초기 행보가 달동네라니. 다시 생각해보면 임직원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결심을 심어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돌아다니면서 달동네 사람들이 이곳을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빈곤층이 희망을 갖지 못하면 자유시장경제는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우리 사회를 침범하고 국민은 더 비참한 형편이 되고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동네 사람들이 번듯한 집을 갖고 중산층으로 살 수 있도록 삼성이 앞장서겠다고 했지요.”
“봉급쟁이가 부자 되는 세상 돼야”
―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입니까.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것이 없어도 기업에 들어가 열심히 일하면 중산층이 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1960~1970년대만 해도 학벌 좋고 집안 좋고 ‘배운 사람’들은 공직이나 은행, 언론사 등에 들어갔지 일반 기업에 취업하는 건 후(後)순위였어요. 기업은 월급도 많지 않고 사회적 지위도 높지 않고 정년 보장도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컸으니까요. 그런데 이건희 회장이 취임하고 나서 삼성 임직원의 월급과 복지 수준을 크게 올렸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취임 후 당시 소병해 비서실장에게 지시한 첫 번째 중요사항에는 ‘직원봉급을 두배로 올려라’가 맨 앞줄에 오를만큼 시행의지가 강했습니다.” 물론 이 지시는 소 실장 이후 최장수 비서실장인 이학수 실장에 의해 꾸준히 추진되면서 현실화됐다.
― 두 배는 지나치게 파격적인 것 아닙니까.
“이유가 있었어요.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전자산업을 넘어 IT, 무선, 모바일 시대로 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거든요. 해외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스카우트하는 시점이었는데 해외 고급 인력의 연봉이 국내 기업 직원에 비해 너무 높은 겁니다. 그 연봉을 주고 데려오는 건 문제가 없는데, 삼성에 왔을 때 기존 직원들과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조직 관리에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한 거죠.”
― 대기업 연봉이 높은 이유가 있었군요.
“그 전까지는 회사원의 월급이 많지 않았어요. 이건희 회장은 ‘삼성 다니면 최소한 집 한 채는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도 했지요. ‘봉급쟁이 회사원’이 중산층이 되기 시작한 겁니다. 성과급도 올리면서 ‘봉급쟁이 부자’도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삼성이 연봉을 크게 올린 후 다른 회사들도 연봉 수준을 맞춰가기 시작했죠. 회사원이, 월급쟁이가 상속세와 증여세, 보유세를 걱정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는 그때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 직원의 처우를 개선한 건 삼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라고 늘 얘기했습니다. 삼성이 달동네에 세운 탁아소는 삼성 직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빈곤층이 맘 편히 맞벌이에 나설 수 있게 해 빨리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 생각이 남달랐군요. 사실 기업인은 정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게 곧 애국 아닙니까.
“자신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100억 가져가나 200억 가져가나 무슨 의미가 있나, 내 재산 늘어나고 줄어드는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나라가 잘살고 국민이 잘살아야 우리 후손들이 제대로 된 세상에서 살 수 있다고 했지요.”
― 들어보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삼성이 상당 부분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세금이 사용돼야 하는 각계 분야에 지원한 것은 물론이고, 천재지변이나 사고 발생 시에도 삼성이 나섰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도 삼성봉사단이 출범했잖아요. 삼성 임직원들도 국가의 일에 삼성이 나서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삼성의 손이 닿지 않은 곳 없어”
이순동 회장은 1990년대부터 삼성그룹 비서실과 구조조정본부에서 홍보, 광고, 사회봉사, 문화사업 지원 등 대외업무를 총괄했다. 모두 이건희 회장의 직접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 삼성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적극 지원하기도 했죠.
“세계적인 한국인 아티스트 중 삼성이 지원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백남준, 백건우 등 유명 아티스트들의 국내외 작품 활동을 지원한 건 물론이고, 박세리 등 스포츠인들도 지원했고요. 언론사에서 실시하는 대회들도 거의 다 지원했어요. 삼성이 안 하면 누가 하겠어요? 삼성 비서실에는 각종 협회와 단체들의 지원 요청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필요로 하는 데는 다 지원해라’라고 했습니다. 어느 단체에서는 30억원을 요청했는데 이건희 회장이 내용을 듣더니 ‘100억원 지원해라’라고 한 적도 있었어요. 빈곤층을 위한 일이거나 국가 이미지와 직결되는 일이면 더 규모가 커지곤 했습니다. 비서실과 홍보실이 난감해할 때도 많았는데 이 회장은 뜻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 회사에 부담이 되지 않았나요. 사원과 주주들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삼성이 잘나갈 때니까 직원과 주주들은 이미 충분히 보상을 받고 있었고요, 이건희 회장은 번 만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또 기업이 사회복지사업과 문화예술에 큰돈을 지원하기 시작한 건 삼성이 처음이었거든요.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해야 다른 기업들도 따라오고, 삼성이 기준이 된다’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에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했습니다. 재벌은 기업이 아니라 공익법인이라는 게 이 회장의 생각이었습니다. ‘기업은 국민에게 사랑받아야 한다’는 대명제가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 국내외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삼성이 지원하지 않은 사업이 없다는데요.
“물론이죠 국내에만 국한된 게 아닙니다. 이건희 회장은 한미 관계가 악화됐을 때도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1990년대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미국 국민이 한국에 대해 실망하고 있다는 보도가 계속 나올 때 이 회장은 한미 관계가 우리 기업과 정부에 큰 부담을 주지 않을까 걱정이 컸거든요. 지금도 미국이 한국산 전기자동차 규제에 나서니까 국내 기업들이 크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 국방부의 한 장성이 우리(삼성) 비서실에 미국 한 군사학교에 있는 한국전쟁기념관이 오래되고 낡아서 보수해야 하는데 예산이 없다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이건희 회장이 ‘무조건 지원하라’고 지시했어요. 그 후 미 군부와 보수 세력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졌다는 얘기가 전해졌고, 이건희 회장은 한미우호 관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과 미국에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안보 분야에도 말할 순 없지만 지원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각종 국제대회에 한국인이나 한국 단체가 나가면서 지원을 요청하면 무조건 했습니다. 출판, 애견, 레저 등등 국제적인 무대에 삼성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88올림픽 전에 유럽 일부에서 한국인이 개를 먹는다며 보이콧한 적이 있었잖아요? 그때 국제애견대회를 삼성이 후원하면서 한국의 애견문화에 대해 홍보를 했고 보이콧 사태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 회장이 애견, 클래식, 미술, 승마 등을 지원한 건 이런 문화가 서구 상류층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화산업의 적극 참여를 통해 국가의 격을 높이겠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한국이 완전히 선진국 대열에 들지 못해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많았거든요. 그런 현실을 개선하고 싶었던 겁니다.”
― 우여곡절 끝에 이재용 부회장 입장에서는 부친의 전방위적 사회공헌에 대해 마냥 긍정적일 수만은 없겠군요.
“그렇겠죠. 자신은 재벌 아들이라고 늘 남들의 시선 속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국가를 위해 평생을 바쳐온 부친이 국가 권력에 흔들리고, 부친이 사회에 공헌하겠다는 뜻으로 했던 일들로 인해 곤욕을 치르게 되지 않았습니까. 삼성의 사회공헌 전통이 약해지는 듯해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 삼성이 지금도 사회공헌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건희 회장 시대에 비해 전방위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 회장 시절에도 그분이 계획했던 여러 사회공헌활동 중 일부는 ‘삼성이 다 해먹는다’는 프레임에 갇혀 진행되지 못했어요. 예를 들어 빈곤층을 위해 탁아소를 만들고 또 전국으로 확대시키려 했는데 전국의 보육시설과 유아원 관계자들이 ‘삼성이 탁아소까지 독점하려 한다’며 반대에 나서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예는 묘지인데요, 이건희 회장은 출생부터 사후까지 책임지는 서비스를 제공하려 했고 삼성생명을 통해 일류 화장장과 공원묘지를 만들려 계획했었습니다. 외국 공원묘지처럼 예쁘게 만들고 주변 상권도 활성화시키고요. 그런데 또 해당 부지의 인근 지역 주민들을 부추겨 땅값을 더 받아내려는 일부 세력이 나서면서 실패했고요.
또 지금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 부지에는 원래 반도체 등 중요 연구인력을 배치하고 글로벌 거점화하면서 주거시설, 학교, 양로원, 상업시설 등을 완비한 타운을 만들려 했는데 주변 반대로 주상복합을 짓게 된 겁니다. 이건희 회장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업들이 수익사업은커녕 손해를 보면서 국가를 위해 하는 일이라는 걸 다 압니다. 그런 홍보를 잘 못 한 것 같아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재용, 많은 수난 겪으며 국가관과 책임감 확고해져”
―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복권으로 이재용 시대가 막을 열었는데요, 많은 변화가 있을까요.
“그 DNA가 어디 가겠습니까. 우리 세대는 이재용 부회장을 어릴 때부터 봐 경영 능력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죠. 본인도 힘들었을 겁니다. 엄격하고 꼼꼼하고 가족보다 나라 먼저 생각하는 아버지 아래에서 하고 싶은 일이라곤 할 수 없는 성장환경이었잖아요. 늘 지켜보는 눈이 있으니 놀 수가 있나 맘껏 술 마시러 다닐 수가 있나, 허튼 행동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나서 좌파들로부터 숱한 공격을 받고 거기다 감옥까지 갔다 왔으니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나라를 걱정하던 아버지가 나라에 당한 셈이잖아요.
하지만 요즘 행보를 보면 아주 믿음직하고 단단해졌습니다. 이건희 회장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이재용 부회장에게서 많은 수난을 겪으면서 아버지와 유사한 국가관과 책임의식이 정립됐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돈에 연연하지도 않고요. 보통 아들은 아버지와 대립하다가도 나이 먹어 가면서 아버지와 비슷해지잖아요. 개인적으로 그가 수난을 겪은 것은 아버지를 이어 대한민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경제 강국으로 만들라는 운명의 장난이었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 사면복권 후 이재용 부회장의 적극적인 행보에 여론은 대체로 긍정적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완연한 선진국이고 세계 최고 수준의 IT강국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면 뒤처지게 되고 여기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해야 대한민국이 앞으로도 지금의 위상을 이어갈 수 있고, 그 과정은 삼성이 주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사실 이건희 회장이 계셨으면 요 몇 년간 획기적인 일을 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어요. 이재용 부회장이 잘 해 나가길 바랄 뿐입니다.”
― 몇 달 전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삼성전자 평택공장을 찾아 이재용 부회장, 윤석열 대통령과 만났습니다.
“이병철-이건희 선대 회장 두 분이 하늘에서 무척 기뻐했을 겁니다. 특히 이건희 회장은 선진국에 무시당했던 경험도 있고 우리 정부로부터 어려움을 겪기도 해서 한이 많았을 텐데 이제야 안도를 했을 것 같습니다. 이재용 부회장이 우리나라 대통령과 함께 직접 미국 대통령을 안내하는 모습이라니….”
‘견제와 협력’
한편 이재용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 2주기인 10월 25일 또는 이병철 회장 35주기인 11월 19일 전후로 회장으로 승진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상태다. 이 부회장이 회장직에 오르면 그동안 그가 추진해왔던 ‘뉴 삼성’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이 부회장의 사면복권 전후로 대규모 투자 및 채용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순동 회장은 이재용 시대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삼성이 선대들의 경우와 달리 ‘그룹’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더 새롭고 혁신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했다.
― 이제 삼성은 그룹이 아니죠.
“그룹 해체는 여러 면에서 아쉬운 사건입니다. 세계 일류 삼성그룹을 만들었던 방식, 삼성 웨이(Samsung Way)라는 용어를 아십니까. 다수의 경영학자가 연구하기도 했는데, 삼성이라는 그룹이 어떻게 경쟁력을 빠르고 확실하게 강화해서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 됐는지를 설명하는 삼성의 경영방식입니다. 학자들이 패러독스 경영 등 많은 분석을 내놓았고 경영의 한 모델로 자리 잡기도 했는데요, 제가 현장에서 분석한 삼성 웨이의 특장점은 ‘견제와 협력’이었습니다.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회장, 그룹, 즉 비서실 또는 구조본, 각 사(社)의 사장들 이렇게 삼각 편대가 견제를 하기도 하고 서로 협력하면서 혁신적인 결과를 가져왔던 겁니다. 그런데 그중 한 축인 그룹이 사라졌어요. 다른 기업들과 다를 게 없는 거죠. 거기다 준법감시단까지 생겼고, 경영 활동이 크게 제한돼 있습니다.”
― 이런 구조에서는 이건희 스타일의 혁신을 하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오너의 적극적인 사회공헌 의지가 있어도 지출 등 실천이 어렵다는 점이 아쉽고, 그런 구조는 곧 국민에게도 손해라는 생각을 합니다.”
― 그룹 해체가 아쉬운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요.
“수십 년간 그룹의 홍보 책임자였던 저로서는 아쉬움이 큽니다. 이건희 회장의 마지막 직책은 삼성그룹 회장이 아닌 삼성전자 회장이었죠. 그러니 이 회장의 걸어온 길과 업적을 정리하고 유지를 이어가는 등 이 회장 관련 업무를 삼성전자에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삼성전자에서 반도체와 휴대폰, 전자산업 등에 이 회장이 남긴 업적도 크지만, 이 회장을 삼성전자 회장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말 아까운 일입니다.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온 인물입니다. 국가의 기반과 경제를 튼튼히 하기 위해, 자유시장경제 수호를 위해 본인의 인생을 다 바친 분 아닙니까. 훌륭한 기업인이다 경제인이다라고 평가하기엔 부족합니다. 솔직히 이건희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미국의 애플과 첨단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하는 국내 기업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문화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고 IT 수준은 세계 최고 아닙니까.”
“강아지 좋아하고, 라면 좋아하고…”
― 그런데 이건희 회장은 마지막 10여 년은 이전만큼 국민의 사랑을 받지 못했죠. 수사기관에 불려 다니고, 일부 시민단체와 노동 세력으로부터 비판받고,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삼성은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리고….
“그렇죠. 사실 국내 의료 수준이 얼마나 발전했는데 이건희 한 사람 일으켜 세우지 못했는지 울분이 터질 때가 있습니다. 본인이 의료와 복지에 얼마나 돈과 정성을 쏟아부었습니까. 10년만 더 경영을 했으면 지금의 삼성과 대한민국은 더 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거기다 일부에선 루머를 퍼뜨리고 음해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통증치료와 민간치료 과정에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일들이 악의적으로 포장됐습니다. 삼성그룹이 있었더라면 명확하게 해결하고 해명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건희 회장을 30년 이상 봐 왔지만 술도 골프도 좋아하지 않고, 입는 것 먹는 것 사치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밤잠 설치며 나라 걱정하고, 강아지 좋아하고, 라면 좋아하고요. 무엇보다 명예를 중시했던 이 회장이 마지막에 그런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춰졌다는 점은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2014년 이후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삼성은 국정농단 연루, 오너 일가를 둘러싼 에버랜드와 삼성바이오로직스 사태 등 부정적인 보도 위주로 남아 있다. 이 회장의 부재와 문재인 정부로의 정권 교체 등 이유로 언론에 삼성의 부정적인 면이 두각됐기 때문이다. 이순동 회장은 “전설적인 혁신가이며 보국(保國)의 위인인 이 회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빠르게 잊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
다만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키워내고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기반을 닦은 이건희 전 회장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재조명 작업이 이뤄지지 못한 상태다. 사후(死後) 2년간 코로나19 창궐 및 계속되는 국정농단 재판 등이 겹친 탓이다. 그룹이 해체되면서 전반적인 자료와 증언을 모으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월간조선》은 이건희 전 회장 사망 직후 그의 신경영 추진(1993~1996년) 당시 업무 지시가 담긴 육성 녹음테이프 40여 개를 단독 입수해 보도했고 이후 삼성의 전·현직 관계자 등을 만나며 후속 취재를 계속해왔다.
이 과정에서 이 전 회장이 국내의 역대 어느 기업인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업적을 남겼고 우리 사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조명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그들에게서 확인했다. 2007년 ‘김용철 사태’ 이후 그룹 해체, 2014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생성된 각종 루머, 2017년 국정농단 사태 후 삼성 오너 일가에 닥친 어려움 등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연으로 삼성은 이건희 전 회장이 사망한 지 2년 가까이 지났지만 위인(偉人)의 사후 일반적으로 이뤄지는 공식 추모행사나 기념장소 건립, 다큐멘터리 제작, 평전 출간 등은 엄두도 내지 못한 상태다. 이 전 회장에 대한 향수를 일반인이 직접 느낄 수 있는 수단은 이건희 소장 미술작품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 정도다.
‘이건희 업무 지시 육성 테이프’를 제공했던 현명관 전 삼성그룹 비서실장에 이어 《월간조선》에 이건희 회장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준 ‘이핵관(이건희 핵심 관계자)’은 32년간 삼성의 홍보 책임자였던 이순동(李淳東·75) 전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사장(현 국제광고협회 한국지부 회장)이다.
이순동 회장은 “국내 대기업 중 삼성이 최초로 본격적인 기업 홍보를 시작했고 ‘삼성 홍보’는 국내 기업 홍보의 매뉴얼이 됐는데, 이건 내 업적이 아니라 이건희 회장의 업적”이라고 했다. 서울 역삼동 국제광고협회(IAA)사무실에서 이순동 회장을 만났다. ‘홍보맨은 자신이 인터뷰를 하거나 밖으로 드러나면 안 된다’는 게 수십 년간 홍보를 해온 그의 생각이었지만, 이건희 전 회장의 생애를 재조명하고 싶다는 기자의 취지에 동의하며 만남에 응했다.
‘국내 홍보맨 1호’ 이순동 회장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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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동 전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사장은 32년간 삼성 홍보를 총괄해온 인물이다. 사진=조선DB |
이 회장은 배재고-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1972년 《중앙일보》에 기자로 입사했고 언론통폐합 후인 1980년 삼성전자 홍보팀장(과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후 홍보실 부장과 실장을 거쳐 1991년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홍보이사가 됐고, 비서실 홍보팀에서 상무-전무로 승진했으며, 1998년 삼성 구조조정본부가 생기면서 구조본 홍보팀장 전무가 됐고, 이후 삼성이 구조본-전략기획실 체제를 거치며 그룹 홍보 담당 사장 자리에 올랐다. 이 밖에 삼성전자 부사장, 제일기획 사장, 삼성 브랜드관리위원장, 삼성사회봉사단장, 삼성미소금융재단 이사장 등 삼성의 대외 업무와 관련한 최고위 직책을 두루 거쳤다.
이 회장은 국내에 ‘기업 홍보’를 처음으로 선보였고 홍보팀을 기업의 주요 부서로 자리매김한, 홍보업계의 전설적인 존재다. 한국PR협회 회장, 한국광고주협회 회장, 한국광고인총연합회 회장, 한국광고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회장은 LG 정상국 전 홍보부사장 등과 함께 국내 기업 홍보 1세대로도 불린다.
그가 홍보의 전설로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1위 기업인 삼성의 홍보 담당자였기 때문이 아니다. 홍보라는 개념이 국내에 정착되지 않았던 1980년부터 ‘기업을 살리는 것은 홍보’라는 신념하에 캠페인, 언론, 광고, 사내 커뮤니케이션 등 홍보의 전 분야를 국내 기업에 개척하고 정착시켰다. 그 배경에는 이건희 회장이 있었다.
이건희 육성 테이프, 김용철 사태 이후 폐기
먼저 《월간조선》이 2020년 11월호에 보도했던 ‘이건희 육성 테이프’를 언급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 《월간조선》은 삼성 신경영 당시(1993~ 1996년) 이건희 회장이 업무 지시를 녹음하도록 한 40여 개의 육성 테이프를 입수해 이 전 회장이 신경영을 어떻게 직접 추진했는지 보도했습니다.
“솔직히 그 테이프가 남아 있는 줄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이건희 회장의 진면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됐지요.”
― 당시 이건희 회장은 임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모두 녹음하라고 했다는데 왜 삼성에는 테이프가 남아 있지 않습니까.
“2007년 김용철 사태(삼성 법무실장 출신 변호사 김용철이 삼성의 내부 사정을 언론과 저서를 통해 폭로한 사건) 이후 여러 이슈로 검찰 조사가 있었죠. 압수당하거나 하면 무슨 얘기가 나올지 모르지 않습니까. 육성 테이프는 대부분 1990년대 초중반의 것이어서 갖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었는데 갖고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그때 없앴습니다.”
― 알려지면 안 되는 내용이 있었나요.
“불법적인 내용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기업 내부 기밀과 오너 일가 사적인 이야기 등이 포함돼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일을 겪지 않으려 한 것이죠. (테이프를 보유한) 현명관 전 비서실장은 당시 삼성을 떠나 정치권에 있었고 귀중한 자료를 굳이 없앨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 중요한 사료(史料)가 완전히 사라질 뻔했습니다. 삼성뿐만 아니라 정치와 사회 전반에 대한 얘기도 많이 있었습니다.
“제 입장에서도 그렇게 좋은 자료를 없애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의 발전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테이프를 전부 들어보면 알 수 있죠. 이건희라는 인물은 단순한 기업인이 아닙니다. 전설적인 혁신가였고,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애국자였으며, 자유시장경제의 수호자였습니다.”
― 이건희 회장은 대중 앞에 나서는 일이 드물었고 대면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아서 그런 면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심층 인터뷰는 《월간조선》의 ‘오효진의 인간탐험’ 인터뷰가 유일하지 않습니까.
“사실 이 회장은 기자 만나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데 홍보팀에서는 인터뷰를 웬만하면 하지 않았으면 했죠. 이 회장이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몇 시간이고 이어나가는 성격이다 보니 어떤 얘기가 나올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공개된 인터뷰나 말씀자료가 많지 않아서 그의 진면목을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같긴 합니다.”
그는 3시간여에 걸쳐 이건희 전 회장과 삼성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가전시장 3위 삼성전자가 홍보팀을 만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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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초 국내 가전시장 순위는 금성사-대우전자-삼성전자 순이었다. 당시 삼성그룹 이건희 부회장은 삼성전자에 홍보팀을 신설하고 대언론-대국민 홍보전에 나섰다. 사진=조선DB |
― 1980년 이전엔 삼성전자 홍보팀이 없었습니까. 왜 그때 생긴 건가요.
“그때 삼성에 홍보팀이라곤 그룹 홍보팀, 제일 큰 회사인 제일제당 홍보팀 정도만 있었고 인원도 소수였어요. 국내에 홍보라는 개념 자체가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언론통폐합이라는 사건을 겪은 후 이건희 부회장이 대책을 마련해야겠다고 결심한 겁니다. 1967년 한국비료를 정부에 뺏긴 것도 삼성가(家)에는 엄청난 사건이었거든요. 정부에 기업을 뺏기지 않으려면 강력한 홍보 기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직접 삼성전자에 홍보팀을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또 언론통폐합으로 갈 곳을 잃은 기자들이 삼성으로 상당수 들어왔는데 그 아까운 인력을 다른 데 쓰지 말고 각 사에 홍보팀을 만들라고 이건희 회장이 직접 지시를 했습니다. 그때 각 계열사에 홍보팀이 만들어졌습니다.”
1980년대 초반 당시 가전 생산을 주력으로 하던 삼성전자는 국내 가전시장에서 금성사(현 LG전자), 대우전자에 이은 3위였다. 삼성전자가 후발주자이기도 했고, 산업 관련 규제도 많았다.
― 이건희 부회장이 홍보팀을 만들면서 1위가 되길 바랐겠군요.
“그럼요. 그때 ‘가전 전쟁’이 시작됐습니다. 제조와 판매 실적으로 따라잡는 것도 중요하지만 효과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선 홍보가 중요하다는 게 이건희 부회장의 생각이었죠.”
― 당시 금성사와 삼성전자는 위상과 실적에서 차이가 꽤 있었는데요.
“그래서 홍보가 중요했던 겁니다. 홍보팀이 그때 만들어낸 카피가 ‘숙명의 라이벌, 금성과 삼성’이었습니다. 둘 다 별 성(星)이 들어가니까 ‘스타(star)워즈’라는 이름도 붙였습니다. 사실 금성사는 삼성전자를 라이벌로 생각을 안 했어요. 근데 기자들 입장에선 금성과 삼성이 라이벌전을 벌인다, 스타워즈를 벌인다라는 좋은 기삿거리가 생긴 겁니다. 우리가 숙명의 라이벌이니 스타워즈니 하는 보도자료를 쏟아냈고 계속 기사화가 되니 금성사도 홍보팀을 만들었죠. 기업 담당 기자들의 기삿거리가 늘어나기 시작했고, 신문사 편집국에 경제부와 별도로 기업을 담당하는 산업부가 생겼습니다. 연일 신문에 라이벌전 기사가 나오니 직원들의 사기도 높아졌습니다. 결국 삼성전자가 금성사 매출을 추월했고 홍보팀은 언론사들을 돌아다니며 ‘이제 매출을 기준으로 금성-삼성이 아닌 삼성-금성으로 써달라’고 설득했습니다. 이후 가전시장의 확실한 1인자는 업계에서도 소비자 사이에서도 삼성전자로 굳어졌죠. 이런 과정을 이건희 회장은 일일이 체크했어요. 언론과 홍보가 기업 경영에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 회장은 신문기사 한 줄만 부정적으로 나와도 홍보팀에 바로 전화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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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에 설치된 삼성그룹 광고. 사진=조선DB |
― 기업 홍보와 그룹 홍보의 다른 점이 뭡니까.
“국내에 기업 이미지 홍보라는 게 생긴 시점이 그때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기업 이미지 관리에 굉장히 신경을 썼어요. 회사 이미지가 나쁘면 망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기업 이미지 광고, 기업이 주도하는 캠페인 이런 것들이 1990년대 초반 삼성에서 시작됐습니다.”
― 광고 시장이 커졌죠.
“광고 시장이 커지면 혜택을 누가 봅니까. 언론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언론이 자유시장경제를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하고, 언론이 제대로 생존하면서 제 역할을 하려면 기업들의 광고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언론에 광고를 주는 게 기업의 사회적 비용이라고 본 겁니다. 보수 언론이고 진보 언론이고 가리지 않고 모든 언론에 광고를 줬죠. 구독률 낮은 진보 언론에도 광고를 주니 일부 보수 언론이 불만을 품는 일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 회장은 ‘보수 언론도 진보 언론도 살아야 언론이 산다’고 강조했습니다.”
이건희 “홍보가 기업의 生死與奪을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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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 가전쇼(CES)에 참석해 3D 영상을 감상 중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왼쪽 세 번째). 사진=조선DB |
“세간에서 삼성 이병철을 돈병철이라고 부르더라. 다들 미워한다는 얘기다. 사람들이 기업을 밉게 보니 기업인들은 정권이나 정치인들에게 이용을 당하고 기업도 하루아침에 뺏기는 상황이 벌어진다. 기업은 국민의 사랑을 받아야 하고 사랑을 받지 못하면 기업이 없어진다. 사랑받기 위해선 국민들이 원하는 걸 들어주고, 국민에게 우리가 하는 일을 잘 설명해야 한다. 그게 홍보의 역할이고, 즉 홍보인은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기업 이미지 광고와 캠페인을 시작한 것도 이건희 회장의 아이디어였다.
“삼성 하면 기억나는 카피 많죠? 또 하나의 가족, 국민 대표 브랜드 삼성, 디지털프론티어, 삼성이 만들면 다릅니다, 이런 문구 다들 한 번씩은 들어봤잖아요. 기업 이미지 광고를 만들라고 했어요.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으로 만들라는 겁니다. 그 전엔 재벌그룹은 많았지만 ‘그룹 홍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거든요. 신문 1면과 맨 뒷면에 이런 그룹 광고를 실으니 독자들에게 ‘아 삼성은 단순히 제품을 만들고 파는 기업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일을 하는 기업이구나’라는 이미지가 형성된 겁니다. ‘감사합니다 캠페인’도 이 회장의 아이디어였어요. 국민에게 감사한 마음을 항상 가지라는 거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시대를 한참 앞서 나갔습니다.”
― 홍보를 무척 강하게 강조했네요.
“한국비료나 TBC를 뺏긴 경험이 뼈아프게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선대 회장(이병철)은 그런 이유로 정치를 할 생각을 했었는데 이건희 회장은 선대와 생각이 좀 달랐습니다. 기업이 국민들로부터 사랑과 응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뺏길 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국민-대언론 홍보를 통해 여론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 이병철 회장도 정치를 하려는 뜻이 있었다고 하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직접 정치에 나섰는데요, 이건희 회장이 스스로 정치를 하고 싶어 하진 않았습니까.
“그런 건 생각할 시간도 없었던 것 같아요. 삼성이 하고 있던 것 외에 자동차, 의료, 레저, 복지, 부동산, 스포츠, 교육, 서비스업, 언론, 동물, 패션까지 관심이 없는 분야가 없었습니다. 정치 말고도 할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 30년 이상 함께해 온 이건희 회장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우국충정입니다. 요즘 시대에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념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나라를 걱정하고 잘되길 바랐어요.”
― 의외입니다.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이뤄냈다거나 훌륭한 기업인 또는 경영인 같은 단어를 예상했는데요.
“이건희 회장은 기업인이나 경제인이라고 말하기엔 아까운 존재입니다. 늘 나라 걱정을 하고 있었어요. 업무를 마치고 쉬려고 해도 나라 걱정에 잠이 안 온다고 했습니다. 사실 처음엔 ‘이분이 대통령을 하고 싶은 건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 늘 나라 걱정을 한 이유가 뭐라고 보십니까.
“삼성은 6·25전쟁과 군사쿠데타 등 현대사의 굴곡을 겪으며 자란 기업입니다. 이건희 회장은 혹시라도 자유시장경제체제가 무너질까 봐 걱정을 한 겁니다.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안팎으로 어려움이 많았잖아요. 1970년대에 경제발전을 이루긴 했지만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고요. 해외출장을 가면 가난한 나라 취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이 바란 건 우리나라가 강한 나라가 되고 국민이 잘사는 것이었는데 그러려면 자유시장경제가 튼튼하게 자리 잡아야 하고, 그게 자신, 즉 기업인의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1987년 회장에 취임한 지 얼마 안 돼서 한 일이 달동네를 돌아다닌 거였어요. 동행했던 임직원들은 의아해하기도 했죠. 삼성 회장의 초기 행보가 달동네라니. 다시 생각해보면 임직원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결심을 심어주려 한 것이었습니다. 돌아다니면서 달동네 사람들이 이곳을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빈곤층이 희망을 갖지 못하면 자유시장경제는 무너지고 공산주의가 우리 사회를 침범하고 국민은 더 비참한 형편이 되고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동네 사람들이 번듯한 집을 갖고 중산층으로 살 수 있도록 삼성이 앞장서겠다고 했지요.”
“봉급쟁이가 부자 되는 세상 돼야”
―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입니까.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것이 없어도 기업에 들어가 열심히 일하면 중산층이 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1960~1970년대만 해도 학벌 좋고 집안 좋고 ‘배운 사람’들은 공직이나 은행, 언론사 등에 들어갔지 일반 기업에 취업하는 건 후(後)순위였어요. 기업은 월급도 많지 않고 사회적 지위도 높지 않고 정년 보장도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컸으니까요. 그런데 이건희 회장이 취임하고 나서 삼성 임직원의 월급과 복지 수준을 크게 올렸습니다. 이건희 회장이 취임 후 당시 소병해 비서실장에게 지시한 첫 번째 중요사항에는 ‘직원봉급을 두배로 올려라’가 맨 앞줄에 오를만큼 시행의지가 강했습니다.” 물론 이 지시는 소 실장 이후 최장수 비서실장인 이학수 실장에 의해 꾸준히 추진되면서 현실화됐다.
― 두 배는 지나치게 파격적인 것 아닙니까.
“이유가 있었어요.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전자산업을 넘어 IT, 무선, 모바일 시대로 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거든요. 해외에서 우수한 인재들을 스카우트하는 시점이었는데 해외 고급 인력의 연봉이 국내 기업 직원에 비해 너무 높은 겁니다. 그 연봉을 주고 데려오는 건 문제가 없는데, 삼성에 왔을 때 기존 직원들과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조직 관리에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한 거죠.”
― 대기업 연봉이 높은 이유가 있었군요.
“그 전까지는 회사원의 월급이 많지 않았어요. 이건희 회장은 ‘삼성 다니면 최소한 집 한 채는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도 했지요. ‘봉급쟁이 회사원’이 중산층이 되기 시작한 겁니다. 성과급도 올리면서 ‘봉급쟁이 부자’도 나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삼성이 연봉을 크게 올린 후 다른 회사들도 연봉 수준을 맞춰가기 시작했죠. 회사원이, 월급쟁이가 상속세와 증여세, 보유세를 걱정하는 나라가 될 것이라고는 그때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 직원의 처우를 개선한 건 삼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서라고 늘 얘기했습니다. 삼성이 달동네에 세운 탁아소는 삼성 직원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어요. 빈곤층이 맘 편히 맞벌이에 나설 수 있게 해 빨리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 생각이 남달랐군요. 사실 기업인은 정당한 방법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게 곧 애국 아닙니까.
“자신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100억 가져가나 200억 가져가나 무슨 의미가 있나, 내 재산 늘어나고 줄어드는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나라가 잘살고 국민이 잘살아야 우리 후손들이 제대로 된 세상에서 살 수 있다고 했지요.”
― 들어보면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삼성이 상당 부분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세금이 사용돼야 하는 각계 분야에 지원한 것은 물론이고, 천재지변이나 사고 발생 시에도 삼성이 나섰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때도 삼성봉사단이 출범했잖아요. 삼성 임직원들도 국가의 일에 삼성이 나서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삼성의 손이 닿지 않은 곳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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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1997년부터 올림픽 스폰서 중 가장 높은 등급인 ‘올림픽 글로벌 파트너’로 참여하고 있다. 삼성은 국내 기업 중 유일한 올림픽 글로벌 파트너다. 사진=조선DB |
― 삼성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적극 지원하기도 했죠.
“세계적인 한국인 아티스트 중 삼성이 지원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백남준, 백건우 등 유명 아티스트들의 국내외 작품 활동을 지원한 건 물론이고, 박세리 등 스포츠인들도 지원했고요. 언론사에서 실시하는 대회들도 거의 다 지원했어요. 삼성이 안 하면 누가 하겠어요? 삼성 비서실에는 각종 협회와 단체들의 지원 요청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건희 회장은 ‘삼성을 필요로 하는 데는 다 지원해라’라고 했습니다. 어느 단체에서는 30억원을 요청했는데 이건희 회장이 내용을 듣더니 ‘100억원 지원해라’라고 한 적도 있었어요. 빈곤층을 위한 일이거나 국가 이미지와 직결되는 일이면 더 규모가 커지곤 했습니다. 비서실과 홍보실이 난감해할 때도 많았는데 이 회장은 뜻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 회사에 부담이 되지 않았나요. 사원과 주주들 입장에서는 불만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삼성이 잘나갈 때니까 직원과 주주들은 이미 충분히 보상을 받고 있었고요, 이건희 회장은 번 만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또 기업이 사회복지사업과 문화예술에 큰돈을 지원하기 시작한 건 삼성이 처음이었거든요.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해야 다른 기업들도 따라오고, 삼성이 기준이 된다’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분야에 지원을 아끼지 말라고 했습니다. 재벌은 기업이 아니라 공익법인이라는 게 이 회장의 생각이었습니다. ‘기업은 국민에게 사랑받아야 한다’는 대명제가 분명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 국내외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삼성이 지원하지 않은 사업이 없다는데요.
“물론이죠 국내에만 국한된 게 아닙니다. 이건희 회장은 한미 관계가 악화됐을 때도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1990년대 반미감정이 고조되고 미국 국민이 한국에 대해 실망하고 있다는 보도가 계속 나올 때 이 회장은 한미 관계가 우리 기업과 정부에 큰 부담을 주지 않을까 걱정이 컸거든요. 지금도 미국이 한국산 전기자동차 규제에 나서니까 국내 기업들이 크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 국방부의 한 장성이 우리(삼성) 비서실에 미국 한 군사학교에 있는 한국전쟁기념관이 오래되고 낡아서 보수해야 하는데 예산이 없다는 얘기를 전했습니다.
이 얘기를 들은 이건희 회장이 ‘무조건 지원하라’고 지시했어요. 그 후 미 군부와 보수 세력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졌다는 얘기가 전해졌고, 이건희 회장은 한미우호 관계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과 미국에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안보 분야에도 말할 순 없지만 지원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이 밖에도 각종 국제대회에 한국인이나 한국 단체가 나가면서 지원을 요청하면 무조건 했습니다. 출판, 애견, 레저 등등 국제적인 무대에 삼성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88올림픽 전에 유럽 일부에서 한국인이 개를 먹는다며 보이콧한 적이 있었잖아요? 그때 국제애견대회를 삼성이 후원하면서 한국의 애견문화에 대해 홍보를 했고 보이콧 사태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 회장이 애견, 클래식, 미술, 승마 등을 지원한 건 이런 문화가 서구 상류층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화산업의 적극 참여를 통해 국가의 격을 높이겠다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한국이 완전히 선진국 대열에 들지 못해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많았거든요. 그런 현실을 개선하고 싶었던 겁니다.”
― 우여곡절 끝에 이재용 부회장 입장에서는 부친의 전방위적 사회공헌에 대해 마냥 긍정적일 수만은 없겠군요.
“그렇겠죠. 자신은 재벌 아들이라고 늘 남들의 시선 속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고 살았는데 국가를 위해 평생을 바쳐온 부친이 국가 권력에 흔들리고, 부친이 사회에 공헌하겠다는 뜻으로 했던 일들로 인해 곤욕을 치르게 되지 않았습니까. 삼성의 사회공헌 전통이 약해지는 듯해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 삼성이 지금도 사회공헌활동을 하고 있지만 이건희 회장 시대에 비해 전방위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 회장 시절에도 그분이 계획했던 여러 사회공헌활동 중 일부는 ‘삼성이 다 해먹는다’는 프레임에 갇혀 진행되지 못했어요. 예를 들어 빈곤층을 위해 탁아소를 만들고 또 전국으로 확대시키려 했는데 전국의 보육시설과 유아원 관계자들이 ‘삼성이 탁아소까지 독점하려 한다’며 반대에 나서 제대로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예는 묘지인데요, 이건희 회장은 출생부터 사후까지 책임지는 서비스를 제공하려 했고 삼성생명을 통해 일류 화장장과 공원묘지를 만들려 계획했었습니다. 외국 공원묘지처럼 예쁘게 만들고 주변 상권도 활성화시키고요. 그런데 또 해당 부지의 인근 지역 주민들을 부추겨 땅값을 더 받아내려는 일부 세력이 나서면서 실패했고요.
또 지금 서울 도곡동 타워팰리스 부지에는 원래 반도체 등 중요 연구인력을 배치하고 글로벌 거점화하면서 주거시설, 학교, 양로원, 상업시설 등을 완비한 타운을 만들려 했는데 주변 반대로 주상복합을 짓게 된 겁니다. 이건희 회장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업들이 수익사업은커녕 손해를 보면서 국가를 위해 하는 일이라는 걸 다 압니다. 그런 홍보를 잘 못 한 것 같아 아쉬울 따름입니다.”
“이재용, 많은 수난 겪으며 국가관과 책임감 확고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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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0일 경기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이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안내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
“그 DNA가 어디 가겠습니까. 우리 세대는 이재용 부회장을 어릴 때부터 봐 경영 능력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죠. 본인도 힘들었을 겁니다. 엄격하고 꼼꼼하고 가족보다 나라 먼저 생각하는 아버지 아래에서 하고 싶은 일이라곤 할 수 없는 성장환경이었잖아요. 늘 지켜보는 눈이 있으니 놀 수가 있나 맘껏 술 마시러 다닐 수가 있나, 허튼 행동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지고 나서 좌파들로부터 숱한 공격을 받고 거기다 감옥까지 갔다 왔으니 자신의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나라를 걱정하던 아버지가 나라에 당한 셈이잖아요.
하지만 요즘 행보를 보면 아주 믿음직하고 단단해졌습니다. 이건희 회장과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이재용 부회장에게서 많은 수난을 겪으면서 아버지와 유사한 국가관과 책임의식이 정립됐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돈에 연연하지도 않고요. 보통 아들은 아버지와 대립하다가도 나이 먹어 가면서 아버지와 비슷해지잖아요. 개인적으로 그가 수난을 겪은 것은 아버지를 이어 대한민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경제 강국으로 만들라는 운명의 장난이었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 사면복권 후 이재용 부회장의 적극적인 행보에 여론은 대체로 긍정적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완연한 선진국이고 세계 최고 수준의 IT강국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면 뒤처지게 되고 여기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해야 대한민국이 앞으로도 지금의 위상을 이어갈 수 있고, 그 과정은 삼성이 주도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사실 이건희 회장이 계셨으면 요 몇 년간 획기적인 일을 했을 거라는 생각은 들어요. 이재용 부회장이 잘 해 나가길 바랄 뿐입니다.”
― 몇 달 전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삼성전자 평택공장을 찾아 이재용 부회장, 윤석열 대통령과 만났습니다.
“이병철-이건희 선대 회장 두 분이 하늘에서 무척 기뻐했을 겁니다. 특히 이건희 회장은 선진국에 무시당했던 경험도 있고 우리 정부로부터 어려움을 겪기도 해서 한이 많았을 텐데 이제야 안도를 했을 것 같습니다. 이재용 부회장이 우리나라 대통령과 함께 직접 미국 대통령을 안내하는 모습이라니….”
‘견제와 협력’
한편 이재용 부회장은 이건희 회장 2주기인 10월 25일 또는 이병철 회장 35주기인 11월 19일 전후로 회장으로 승진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상태다. 이 부회장이 회장직에 오르면 그동안 그가 추진해왔던 ‘뉴 삼성’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이 부회장의 사면복권 전후로 대규모 투자 및 채용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순동 회장은 이재용 시대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삼성이 선대들의 경우와 달리 ‘그룹’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더 새롭고 혁신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했다.
― 이제 삼성은 그룹이 아니죠.
“그룹 해체는 여러 면에서 아쉬운 사건입니다. 세계 일류 삼성그룹을 만들었던 방식, 삼성 웨이(Samsung Way)라는 용어를 아십니까. 다수의 경영학자가 연구하기도 했는데, 삼성이라는 그룹이 어떻게 경쟁력을 빠르고 확실하게 강화해서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 됐는지를 설명하는 삼성의 경영방식입니다. 학자들이 패러독스 경영 등 많은 분석을 내놓았고 경영의 한 모델로 자리 잡기도 했는데요, 제가 현장에서 분석한 삼성 웨이의 특장점은 ‘견제와 협력’이었습니다.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회장, 그룹, 즉 비서실 또는 구조본, 각 사(社)의 사장들 이렇게 삼각 편대가 견제를 하기도 하고 서로 협력하면서 혁신적인 결과를 가져왔던 겁니다. 그런데 그중 한 축인 그룹이 사라졌어요. 다른 기업들과 다를 게 없는 거죠. 거기다 준법감시단까지 생겼고, 경영 활동이 크게 제한돼 있습니다.”
― 이런 구조에서는 이건희 스타일의 혁신을 하기가 쉽지 않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업이나 오너의 적극적인 사회공헌 의지가 있어도 지출 등 실천이 어렵다는 점이 아쉽고, 그런 구조는 곧 국민에게도 손해라는 생각을 합니다.”
― 그룹 해체가 아쉬운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요.
“수십 년간 그룹의 홍보 책임자였던 저로서는 아쉬움이 큽니다. 이건희 회장의 마지막 직책은 삼성그룹 회장이 아닌 삼성전자 회장이었죠. 그러니 이 회장의 걸어온 길과 업적을 정리하고 유지를 이어가는 등 이 회장 관련 업무를 삼성전자에서 하고 있습니다. 물론 삼성전자에서 반도체와 휴대폰, 전자산업 등에 이 회장이 남긴 업적도 크지만, 이 회장을 삼성전자 회장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말 아까운 일입니다.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온 인물입니다. 국가의 기반과 경제를 튼튼히 하기 위해, 자유시장경제 수호를 위해 본인의 인생을 다 바친 분 아닙니까. 훌륭한 기업인이다 경제인이다라고 평가하기엔 부족합니다. 솔직히 이건희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미국의 애플과 첨단 스마트폰 시장을 양분하는 국내 기업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문화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고 IT 수준은 세계 최고 아닙니까.”
“강아지 좋아하고, 라면 좋아하고…”
― 그런데 이건희 회장은 마지막 10여 년은 이전만큼 국민의 사랑을 받지 못했죠. 수사기관에 불려 다니고, 일부 시민단체와 노동 세력으로부터 비판받고,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고, 삼성은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리고….
“그렇죠. 사실 국내 의료 수준이 얼마나 발전했는데 이건희 한 사람 일으켜 세우지 못했는지 울분이 터질 때가 있습니다. 본인이 의료와 복지에 얼마나 돈과 정성을 쏟아부었습니까. 10년만 더 경영을 했으면 지금의 삼성과 대한민국은 더 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거기다 일부에선 루머를 퍼뜨리고 음해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통증치료와 민간치료 과정에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일들이 악의적으로 포장됐습니다. 삼성그룹이 있었더라면 명확하게 해결하고 해명할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건희 회장을 30년 이상 봐 왔지만 술도 골프도 좋아하지 않고, 입는 것 먹는 것 사치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밤잠 설치며 나라 걱정하고, 강아지 좋아하고, 라면 좋아하고요. 무엇보다 명예를 중시했던 이 회장이 마지막에 그런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춰졌다는 점은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2014년 이후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삼성은 국정농단 연루, 오너 일가를 둘러싼 에버랜드와 삼성바이오로직스 사태 등 부정적인 보도 위주로 남아 있다. 이 회장의 부재와 문재인 정부로의 정권 교체 등 이유로 언론에 삼성의 부정적인 면이 두각됐기 때문이다. 이순동 회장은 “전설적인 혁신가이며 보국(保國)의 위인인 이 회장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빠르게 잊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