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는 언제나 그래프의 오른쪽 위를 향해 일직선으로 진보하지 않는다”
⊙ “한국인, 너무 민족만 찾아… 민족이 아니라 국가를 봐야”
⊙ “反日감정은 군부독재와 朴正熙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
⊙ “누군가는 서울시민을 위한 벽제화장장을 받는 경기도민의 입장 같은 것을 기록해야”
⊙ “조선과 일본 비교는 무의미… 조선은 큰 틀에서 중화권 일부가 되기를 바라”
⊙ “한국인, 너무 민족만 찾아… 민족이 아니라 국가를 봐야”
⊙ “反日감정은 군부독재와 朴正熙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
⊙ “누군가는 서울시민을 위한 벽제화장장을 받는 경기도민의 입장 같은 것을 기록해야”
⊙ “조선과 일본 비교는 무의미… 조선은 큰 틀에서 중화권 일부가 되기를 바라”
- 사진=조선DB
김시덕(金時德·46) 교수는 오래전부터 꼭 한 번 인터뷰를 하고 싶던 인물이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들이 본 임진왜란》(2012년)을 통해서였다. 에도(江戶)시대 야사(野史)나 군담(軍談) 등의 기록에 나타난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인들의 기억을 다룬 책인데, 재미있었다. 3년 후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를 읽으면서는 무릎을 쳤다. 16세기 대항해시대부터 동아시아 500년의 역사를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길항(拮抗) 관계라는 관점에서 본 책인데, 일본사·한국사·중국사·서양사를 넘나드는 폭과 깊이가 인상적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2019년에 나온 《일본인 이야기 1: 전쟁과 바다》, 2020년에 나온 《일본인 이야기 2: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일본인 이야기 1》이 나올 무렵, 김시덕 교수의 이름으로 된 다른 책을 접했다. 《갈등도시: 서울에서 경기도까지, 시민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전쟁들》이었다. 아직도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지나간 시대의 흔적과 서울시민들의 삶의 자취들을 추적하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김시덕 교수가 진작부터 그러한 작업을 해왔고 이미 2018년에 《서울 선언: 문헌학자 김시덕의 서울 걷기, 2002~2018》이라는 책을 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김 교수는 그러한 작업을 ‘도시문헌학’이라고 칭했다. 최근 김 교수는 《대서울의 길: 확장하는 도시의 현재사(서울 선언 세 번째 이야기)》라는 책을 펴냈다.
김시덕 교수의 저술 작업은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일본에서 출간한 저서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異國征伐戰記の世界)》(笠間書院, 2010)로 30년 넘는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일본 고전 문학 학술상’을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받았다.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일본의 대외전쟁》은 2017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다. 이 책의 후속 연구서인 《전쟁의 문헌학》은 2017년 세종도서 학술 부문에 선정됐다.
결국 김시덕 교수의 관심사는 동아시아 역학(力學) 관계. 전쟁, 현대 도시 서울의 삶의 자취와 갈등이라는 세 가지 분야로 압축할 수 있겠다. 고문헌의 세계와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인문학자 김시덕 교수를 만났다.
聖書考古學에 관심
― 젊은 분이 문헌학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은 종교가 없지만, 어렸을 때는 나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때도 책을 좋아해서 《성경》을 다 꼼꼼히 읽자고 결심했습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일본 NHK에서 만든 〈실크로드〉를 보면서 페르시아고원으로 금(金)을 캐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잉카제국이 있던 안데스산맥에 가볼까 생각하기도 하고…. 이런 생각들이 종교적 문제와 결합되면서 신학대에 진학해서 성서고고학(聖書考古學)을 공부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때 서지학(書誌學), 문헌학이라는 개념을 처음 만났어요. 유럽에서는 휴머니즘, 인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문헌학이잖아요.”
― 그렇죠.
“요즘 인문학이라는 말을 아무 데나 붙여서 문헌학자로서는 속이 많이 상합니다. 마치 인문학을 통해 힐링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인문학이란 계속 파헤치고 맞춰가면서 진위(眞僞)를 밝혀내고, 그걸 비평하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이라는 무엇인가에 대해 답답함이 많습니다.”
― 교회에서는 자꾸 따지지 말고 그냥 믿으라고 하지요.
“그게 고2 때 제가 충돌했던 부분입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19세기에 성서고등비평이 나오면서 모세가 영감(靈感)을 받아 오경(五經, 《구약성경》의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을 쓴 게 아니고, 오랫동안 축적되어 오다가 열왕기(列王記)를 정리할 무렵에 전승(傳承)이 정리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앙상담을 했더니, ‘악마가 시험에 들게 했으니 기도하라’고 하더군요. 그때 신앙과는 안녕을 고했지요.”
‘애국적’ 문헌학
― 대학에서 일어일문학은 어떻게 하게 된 겁니까.
“원래 한일(韓日) 관계, 특히 고대사에 관심이 있었는데, 문자 몇 개 가지고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싸우는 걸 보니까 고대사는 답이 없더라고요. 일단 일본을 연구하고 난 후에 한일관계사를 해야겠다고 우회(迂廻) 전략을 취했지요. 서울대 동양사학과가 대안(代案)이기는 했는데 보니까 중국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민족(多民族)국가 중국에는 관심이 있지만, 한족(漢族) 중심의 중국, 중화주의(中華主義)에는 거부감이 있어서, 일문과가 있는 고려대를 택했습니다.”
고려대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한 김시덕 교수는 일본의 국립 문헌학 연구소인 국문학연구자료관(총합연구대학원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 교수는 국문학연구자료관을 한국학중앙연구원 비슷한 기관이라고 설명했다.
―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문헌학’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서지학이라고 하는데, 인상비평적으로 얘기한다면 도서 분류나 책의 물질적 성격 등에 대한 연구에 머무르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걸 넘어서 그 문헌의 사회적 맥락까지 연구하는 것, 즉 그 문헌을 누가 왜 만들었고, 그것이 어떻게 수용되었는지까지를 보는 것이 문헌학이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나라의 문헌학 실태는 어떻습니까.
“어느 나라든지 문헌학이라고 하면 ‘애국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고려 시대의 팔만대장경과 금속활자, 《조선왕조실록》 등을 강조하는 식이죠.
고문서학회 참석차 한국에 온 일본인 학자가 제게 ‘한국에는 고문서가 《조선왕조실록》밖에 없느냐? 왜 만날 때마다 한국 학자들은 실록만 얘기하느냐’고 한 적이 있어요. 그것 말고도 많은 문서와 문학 자료가 있지만, ‘한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만 찾다 보니 그런 겁니다.”
“책을 너무 무게 있게 생각”
도쿠가와막부 말기에서 메이지유신 시기를 다룬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 《료마가 간다》든지 《타올라라 검》 등을 보면, 실존했던 주인공들이 가족이나 당대 주요 인사들과 주고받은 서신을 비롯해 다양한 문헌이 다수 인용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이 소설을 탄탄하게 받쳐준다. 반면에 우리는 1950년대 이정재·유지광·임화수 같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도 찾아보기 어렵다.
― 우리가 기록문화의 전통이 약한 것일까요, 아니면 자료를 발굴해서 공유(共有)하고 콘텐츠화하는 능력이 약한 것일까요.
“둘 다 있다고 봅니다. 백선엽 장군은 본인이 기록을 많이 남겼지만, 제 주변에 있는 군(軍) 출신 지인(知人)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미국이나 유럽의 전쟁기록을 보면 소대 단위까지 다 고증(考證)이 되는데, 우리는 소대·중대급의 자료가 없다고 합니다. 장군들의 회고록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담론(談論)과 얻어들은 걸 섞어서 얘기하고, 디테일이 부족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책을 너무 무게 있게 생각해요. 책을 쓰면 대단한 걸 써야 하는 걸로 생각합니다. 이념적인 문제가 팩트를 찬찬히 기록하게 하는 걸 소홀하게 합니다. 그런 것조차 발굴을 안 하는 문제도 있고…. 기본적으로 아카이브화(化)부터 하고, 여기서부터 담론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담론은 많지만 아카이브화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사상누각(沙上樓閣)인 거죠. 그런 의미에서 최근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김명섭 교수가 프란체스카 여사의 사진집을 낸 것은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을 남기면 당한다”
일본에 가면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과 관련 있는 장소에는 화강암 표석이나 나무 푯말이 서 있다. 교토(京都)에 가면 신센구미(新選組)의 주둔지였음을 알리거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하숙했던 곳이거나 암살당한 곳임을 알리는 푯말들이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5·16 때 공수부대와 해병대가 돌파했던 염창교 같은 곳에 그런 사실을 알리는 표식이 하나 없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김시덕 교수의 말이다.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데, 료마 같은 경우는 워낙 인기인이어서 그런 점이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도쿄(東京) 쪽이 좀 더 꼼꼼하게 그런 표지들을 많이 세우는 것 같습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 역사의 현장을 부수고 푯말만 남겨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 어떤 곳이 그런가요.
“극동전범(戰犯) 재판이 열렸던 건물은 원래 있던 지역에서 철거됐고, 일부만이 이치가야(도쿄 시내에 있는 지역으로 방위성 등 군사시설이 밀집)로 이전・복원됐습니다. 사실 남기려면 남길 수도 있었는데, 표석만 남기고 없애버린 것이지요.
저는 미국이나 한국에서 말하는 ‘캔슬 컬처(cancel culture)’, 없애버리는 문화에는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일단 남겨놔야 비판을 하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정권 초기에 박근혜 청와대 캐비닛에서 나왔다는 문서들을 가지고 ‘적폐수사’ 하면서 재미 보았던 문재인 정부는 후환을 우려해서인지, 주요 정책에 대해 문서로 지시하는 대신 전화를 걸어서 알아서 하라고 압박을 가하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정권만 그런 것은 아닌 걸로 압니다. 대한민국이 정치보복이 많다 보니, 기록으로 남기면 남긴 사람이 책임을 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요. ‘기록을 남기는 놈이 바보다. 기록을 남기면 당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유구한 전통인데, 이를 유일하게 거역한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카이브학을 하는 입장에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도 기록을 남겼다가 결국 NLL 문제 같은 데서 빌미를 잡혔잖아요. 저는 그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잘했다, 기록은 가급적 많이 남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反日감정 해결, 50년은 걸릴 것”
― 그동안 낸 책들을 보면 ‘탈(脫)민족주의적’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그런 시각은 어떻게 형성되었습니까.
“대략 한일고대사를 공부하고 싶어하다가 그걸 우회하기로 결심했던 고3이나 대학 1학년 때쯤 민족주의에서 벗어나면서 국제주의로 간 것 같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민족보다는 국가, 국가보다는 계급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 국가보다 계급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국가 안에서 계급 간의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최대한 공평하게 기회균등을 보장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판에 언제까지 ‘민족’을 가지고 싸울 것인지 답답합니다.”
김시덕 교수는 2018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일본학 연구는 북한학보다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친일파’로 낙인찍힌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에게 경멸의 대상이 북한이라면 증오의 대상은 일본, ‘Japs(왜놈)’라 할 수 있다. 국내 정치 및 경제의 침체와 관련 있는 현상이다. 내적 스트레스를 발산할 외부 창구가 필요한데, 그것이 일본인 것이다”는 말도 했다. 이런 발언을 상기시키자 김 교수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식민지 시대를 겪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렇지 않아요. 오늘날 한국의 반일(反日) 문제는 기본적으로 한국 내부의 문제, 내부의 계급 갈등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특히 군부독재와 박정희(朴正熙)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반일감정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2019년 ‘죽창가(竹槍歌) 사태’도 결국 국내 정치를 국제 정치에 투영한 것에 불과해요.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해놓고, 그로 인한 외교적 책임은 안 지려고 하는….”
― 반일정서 극복은 언제쯤에나 가능할 것으로 봅니까.
“저는 낙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50년은 간다고 봅니다. 미국 출신으로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와 있던 로버트 파우저는 ‘아일랜드도 잉글랜드 때문에 식민지를 오래 겪고 분단까지 되었다가, 1990년대 이후 잉글랜드보다 잘살게 되면서 반영(反英)감정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한국이 일본보다 잘살게 되면 해결될 문제인데, 저는 한국 경제가 일본 경제를 넘어서기 어렵다고 봅니다. 설사 그게 되더라도 50년에서 100년은 걸릴 것입니다.”
“너무 韓民族만 보고 있다”
― 김 교수님의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나 《일본인 이야기》 등을 보면, 조선과 일본의 종합국력은 이미 오래전부터 격차가 났고, 그런 축적의 결과가 메이지유신이고 조선의 망국(亡國)이었다 싶습니다.
“두 나라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에요. 한반도는 큰 틀에서 중화권(中華圈) 화북(華北) 지역의 일부가 되기를 바랐고, 일본은 다른 방향을 봤습니다. 두 나라가 중화권을 바라보다가 갈라지기 시작한 게 대항해시대라고 봅니다. 그래서 《일본인 이야기》를 대항해시대에서 시작하는 거죠.”
김시덕 교수는 “또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비교하려면, 어느 시대에 어디까지를 한국과 일본의 영역으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게 간단치 않다”고 말했다.
“저는 민족이 아니라 국가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적 영역을 본다면 대항해시대 이전에 위로는 홋카이도의 아이누족이 활동했던 캄차카반도와 연해주, 남쪽으로는 류큐(오키나와)인들이 활동했던 동남아시아까지가 일본이라는 국가의 역사적 범위였다고 봅니다.”
― 그건 오늘날의 영토국가 일본을 전제로 해서 역사적 범위를 현대 국민국가의 시각으로 소급(遡及)하는 것 아닌가요.
“그 작업이 모든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고, 그게 지금 중화인민공화국이 하고 있는 각종 역사공정(歷史工程)입니다.”
― 그렇죠.
“저는 현대 한국의 시민들이 이 훈련이 너무 안 되어 있다고 봅니다. 너무 ‘민족’ ‘민족’ 하고 있어요. 영토적으로 봤을 때, 영토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역사가 어디까지 소급되는지를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 그건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는 너무 한민족(韓民族)만 보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함경도에서 발견된 거란문자 유적 같은 것은 한국의 역사해석에서는 튕겨 나가는 것이죠. 또 한국사는 구한말(舊韓末)은 물론 식민지 시대까지 존재했던 한반도 내의 여진족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고 있어요. 영산강 유역에서 보이는 왜계(倭系) 무덤들도 설명할 수 없어요. 왜구(倭寇)에게서 다민족 집단의 성격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제주도는 왜구의 거점 중 하나였는데, 이런 얘기를 하면 제주도 분들이 싫어하죠. 이런 것들은 사실 한반도는 다민족 상태였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蘭學의 한계
〈한국 내에는 에도 시대 일본을 조선과 비교하면서 일본이 난학을 통해 조선보다 빠르게 근대화되었다며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 안에도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처럼 유럽의 식민지가 되거나 조선과 대청제국처럼 유럽발의 정보에 둔감하지 않았고, 난학을 통해 유럽과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에도 시대 일본은 이미 그때부터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우월했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우월함이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이어져서 일본은 비유럽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제국이 되었다는 주장이 이에 뒤따릅니다.
하지만 동시대 유럽의 정치·군사·경제·의학·과학·문화적 성취 정도와 비교했을 때 일본은 절대적으로 뒤처져 있었습니다. 이 동시대적 발전이 중단된 이유는 유럽에 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쇄국정책이었습니다. 에도 시대에 일본 난학이 이루어낸 성취는 동시대 유럽과 비교할 때 결코 높게 평가받을 수 없습니다. 난학의 이러한 빈약한 성취는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된 퇴보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20세기 중기에는 유럽·미국·일본 등과 대등하게 발전했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이 이슬람혁명과 탈레반 집권 이후 급속히 퇴보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는 언제나 그래프의 오른쪽 위를 향해 일직선으로 진보하지 않습니다.〉
김시덕 교수의 《일본인 이야기 2》에 나오는 말이다. 이러한 인식은 에도 시대 일본이 보여준 근대성, 난학에 기반을 둔 일본의 근대화에 관심이 있던 기자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 《일본인 이야기 2》에서 난학이 일반 백성들의 실제적 삶에 미친 영향이 작았다고 주장했는데….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고, 특히 아편전쟁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비해 좀 더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죠. 저는 그걸 깨고 싶었던 것입니다. 난학이 큰일을 했다고 보는 것이 정(正), 하지만 제한적이었다고 하는 게 반(反),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난학은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게 합(合)이라고 한다면, 저는 반(反)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국인의 난학 의식은 그 ‘반’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우리는 다른 아시아에 비해 먼저 나갔으니까 위대하다’는 체제 우위적 주장을 하는 데에 난학 담론이 역할을 해왔습니다. 저는 이걸 깨고 싶었습니다.”
“역사과잉이 문제”
김시덕 교수는 여기서 난학을 가지고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 성패(成敗)를 이야기하는 데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조선과 비교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일본은 대항해시대까지 있었던 가능성과 비교해야 하고, 똑같이 유럽에 대해 문을 열었던 오스만튀르크나 페르시아, 청(淸)나라와 비교해야 합니다. 조선은 청제국 내에서의 다른 성(省)들과 비교해야죠.”
― 조선을 청제국 내의 다른 성들과 비교해야 한다는 건 한국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겠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사실을 한국인들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지향점은 자주적인 국가라기보다는 화북의 완벽한 일부가 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갑오농민전쟁을 일으키니 당장 청에 군대를 보내 진압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주국가라면 그럴 수 없지요.”
김시덕 교수는 “《일본인 이야기》는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려고 쓴 책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저는 세계사 속에서의 일본이라는 지역이 어떻게 보편성을 갖고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을 해왔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인 독자들이 여기서 교훈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저는 역사를 교훈을 배우기 위해 연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은 흔히 ‘역사가 중요한데, 역사를 모르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데, 저는 오히려 한국은 역사과잉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정교과서를 추진했던 박근혜 정권이나, 너무 ‘역사’ ‘역사’ 하는 문재인 정권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아프간 젊은 여성들 사진
최근 탈레반의 카불 장악에 즈음해 화제가 된 사진이 하나 있다. 197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의 젊은 여성들이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카불 거리를 활보하는 사진이다. 김시덕 교수에게 이 사진을 이야기했더니 뜻밖의, 그러나 문헌학자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1970년대에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을 추적해봤어요. 사실 그 사진은 소련이 지원하던 사회주의 아프가니스탄 정권 시절의 프로파간다 사진이라는 성격이 강합니다. 그때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1990년대에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2001년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후 귀국해서 대통령자문위원인가를 지냈다고 하더군요. 또 망명길에 오르겠지요.
그 사진을 볼 때에는 아프가니스탄은 다민족 국가이고, 수도 카불과 농촌 지역은 다르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카불이 그랬다고 해서 아프가니스탄이 모두 그랬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도 탈레반의 집권에 카불은 공포에 질렸지만, 파슈툰족의 농촌 지역은 그러려니 하고 있다고 하잖아요. 이 나라는 어떻고, 이 민족은 어떻고 하는 식으로 하나로 묶으면 안 된다는 게 저의 기본전제입니다. 가급적 쪼개서 보는 것이 저 같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할머니의 걸음걸이’
― 서울과 그 주변 지역을 답사하는 《서울선언》 시리즈를 내면서 ‘도시문헌학자’를 자처했는데, 외국에도 그런 용어가 있나요.
“제가 붙인 거죠, 하하. 예전에 ‘고현학(考現學)’이라는 용어가 있었습니다. 현대를 고고학적 방식으로 보자는 것이죠. 1934년에 나온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같은 것이 그 예입니다. 고현학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있었던 학문인데, 그걸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받아들인 거죠. 일부 젊은 친구들이 요즘 맨홀 뚜껑에 관심을 갖고 그러는 것이 다 1920년대에 이미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서울선언》 시리즈는 배 기자도 재미있게 읽어준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의 현대판이기도 합니다.”
― 아, 그렇습니까.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는 1945년에 끝납니다. 현대를 말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죠. 너무 첨예하기 때문에….
몇몇 한국의 뜻있는 분조차도 한일 관계에 너무 성급하거나 나이브하게 접근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일 관계는 대단히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에 아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러시아 외교정책을 말할 때 ‘할머니의 걸음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 그게 뭡니까.
“한 발짝 내딛고 영국 반응을 보고, 한 발짝 가보고 청나라 반응을 보고 하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한일 관계는 물론 현대사와 관련해서도 그런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1945년 이후의 현대사는 《서울선언》 시리즈를 통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김시덕 교수의 말을 듣는 순간, 《서울선언》 시리즈 중간중간에 조심스럽게 역사와 현실에 대해 한마디씩 던져놓은 것들이 이해됐다. 몇몇 대목을 인용해본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부끄럽다며 감추려 하고, 그런 말 하는 사람의 입을 폭력적으로 다물게 하고,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과거를 기억에서 지우고는 자신들 보기에 바람직한 과거를 창조하려는 것을 역사 왜곡이라고 합니다. 동북공정이니 식민사관이니 하면서 이웃 나라들을 비난하기 전에, 한국 시민은 스스로가 떳떳한지 돌아봐야 합니다.〉 -《서울선언》 중에서
〈이미 망한 지 100년이 지난 나라의 왕족 사당에 대해,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시민이 왜 신성함과 존엄성을 지켜주어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조선왕조가 망한 뒤에도 조선의 왕족들은 새로 마련된 이왕직관제(李王職官制)에 따라 비교적 우대받았으니,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은 민중들과는 그 처지가 분명히 달랐습니다. 그랬기에 1919년 3월 1일의 독립선언을 거쳐 4월 11일에 수립된 조선인들의 임시정부는 그 이름을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고 한 것입니다.〉 -《갈등도시》 중에서
〈오늘날 서울 시내 각지의 역사적 인물을 발굴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는 와중에도, 을축년 대홍수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땅을 주고 집과 학교를 지어준 김주용 선생과 그를 추모하는 비석은 여전히 잊혀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일부 세력은 ‘친일파’라는 칼을 너무나도 쉽게 휘둘러 역사를 왜곡하고 망각시키고,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낙인찍습니다.〉 -《서울선언》 중에서
面과 線
― 이번에 나온 《대서울의 길: 확장하는 도시의 현재사》는 앞에 나온 《서울선언》 시리즈와 비교하면 어떤 점이 다른가요.
“기본적으로 범위를 넓혀서, 지금 서울로 출퇴근하거나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 또는 반대로 서울에 살면서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지를 다루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책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길’입니다.
행정이나 정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면(面)을 중시하고, 그 지역에 토착(土着)해서 사는 사람들만 보입니다. 하지만 길, 즉 선(線)을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중요합니다. 서울만 해도 하나로 보면 안 됩니다. 쪼개서 봐야죠. 예컨대 서울 노원구나 송파구에 사는 사람들은 구로구로 가는 것보다 춘천이나 원주로 가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감각을 놓쳐서는 안 되죠.”
―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에게서 저녁때 사당역에 나와서 선거운동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런 것이군요.
“바로 그겁니다. 좋은 얘기인데 메모해두어야겠네요. 제가 집이 낙성대인데, 밤 11시쯤 이수에서 술 마시고 들어가려고 하면 사당에서 경기도행 빨간 버스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게 지금의 서울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사대문 안의 인구는 40만명 정도였고, 지금 종로·중구의 인구도 그 정도입니다. 그것만 보려고 해서는 지금 서울 사람들의 부대끼는 삶을 잡아낼 수 없어요. 제가 사대문 빼고는 다 살아봐서, 느끼는 소외감과 분노가 있죠.”
大서울과 수도권
― 혹시 어렸을 때 가정형편이 조금 어려웠습니까.
“늘 어려웠던 것은 아니고,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지요. 《서울선언》에 썼지만, 아버지가 연합철강 다니다가 독립해서 그린벨트 쪽에서 공장을 했어요. 그런 걸 보면서 공업한국, 산업한국이라는 것을 가깝게 느꼈습니다.”
― ‘대서울’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데, 그건 어떤 개념입니까.
“서울시와 대서울의 관계는, 좁은 의미의 런던[시티(city)라고 하는 런던의 중심부]과 그레이터 런던(Greater London)의 관계와 같습니다. 서울시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행정구역인 서울시만 봐서는 안 되고, 서울시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서울 근교 경기도나 충청도, 강원도 지역도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일본 도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근 사이타마현(縣)까지 합치면 5000만명 정도가 ‘대도쿄’에 살고 있죠.”
― ‘대서울’은 수도권과는 어떻게 다른 개념입니까.
“수도권이라고 하면 경기도까지 포함하지만, 저는 경기도가 모두 수도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천시에서도 농촌 지역 같은 곳은 사실 수도권이라고 하기 어렵고, 서울과의 관련성도 떨어지죠. 이렇게 조건이 다른 지역들을 괜히 면(面)으로 묶어버리는 바람에 쓸데없는 규제만 하게 되는 거죠. 요즘 코로나19 규제를 하면서 수도권이냐 비수도권이냐를 따지다 보니, 수도권 술꾼들이 천안에 가서 술 마시고 나이트클럽 간다는 얘기가 있었잖아요. 이게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서울은 거대한 도서관”
― 가장 인상적이었던 서울의 유적(?)은 어디입니까.
“가장 좋아하는 지역은 영등포에서 인천에 이르는 공업벨트입니다. 이것을 자꾸 밀어내려고 하는 정책에 대해 반감이 있습니다.”
―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밀려나는 공장이나 군부대를 받는 것은 경기도나 충청도지요. 나라에서는 그들을 없는 존재로 취급해버립니다. 표가 적으니까…. 하지만 누군가는 서울시민을 위한 벽제화장장을 받는 경기도민의 입장 같은 것을 기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고서적 탐구하는 것과 도시 탐구하는 것, 어느 쪽이 재미있습니까.
“둘 다 재미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세계는 거대한 도서관’이라고 했는데, 문헌학이라는 연구 방법을 가지고 대서울을 바라보면, 서울은 정말 거대한 도서관입니다. 제가 읽고 해석할 대상이 무궁무진합니다. 간판, 머릿돌, 마을 비석, 공덕비, 추모비, 벽보, 플래카드, 전단, 깃발 등…. 이런 것을 읽으면서 돌아다니면 참 재미있습니다. 왜 이걸 놓치는가 싶어서 안타까워요. 부동산 가격을 기준으로만 보니까 자기가 사는 아파트가 안전등급 D등급 나오면 축하한다고 플래카드를 거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민족주의는 수동적”
김시덕 교수는 ‘전쟁’에도 관심이 많다. 《그들이 본 임진왜란》 《그림이 된 임진왜란》 《전쟁의 문헌학》 《일본의 대외전쟁》 등 전쟁 관련 책도 여러 권 냈다. 이런 책에서 그는 전쟁이 ‘비정상적이고 발작적인 현상’이라는 명제(命題)를 거부하고, 오히려 “전쟁이 정상(正常)이며, ‘전쟁과 전쟁 사이에 휴지기(休止期)’로서 평화가 존재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렇다고 그가 전쟁옹호론자인 것은 아니다. 그는 “평화는 자연히 유지되지 않으며, 전쟁을 막기 위해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할 뿐이다.
― ‘전쟁이 정상’이라는 주장은 많은 한국인에게는 뜻밖으로 여겨질 것 같습니다.
“유럽의 경우를 보면, 전쟁은 정상, 아니 정상이라기보다는 일상(日常)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없다는 것뿐이지, 어디에선가 전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쟁의 주변화(周邊化)’라고 해야 할까요. 전쟁은 경계 지역에서 일어나는데, 이는 제가 (서울) 주변을 답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심각한 가치들의 충돌은 주변에서 일어나는데, 그것이 국가 간의 충돌이면 전쟁이 되는 것이고, 도시라면 혐오시설의 이전이 되는 것이겠죠.”
― 우리나라가 유사 이래 900여 회의 침략을 받았다고 하지만, 유럽의 30년전쟁처럼 그렇게 큰 전쟁은 많지 않았죠.
“우리가 외국의 침략만 받은 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북으로 밀고 올라가면서 여진을 많이 괴롭혔죠.
재미있는 것은 외국과의 전쟁을 다룬 에도 시대의 군담(軍談)들도 대개는 자기들이 외국을 지배해서 세계제국이 되자는 것이기보다는, ‘외국에서 수많은 것이 침략해온다. 우리 일본을 지켜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방어논리를 펴다가 어느 순간 일본이 상대를 공격하고 있는 논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는 공격적이지 않고 피해적이고 수동적’이라는 것이 제가 일본 군담에서 파악한 전쟁의 기초입니다.”
‘규장각 내의 異物質’
김시덕 교수는 최근 서울대 규장각 HK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이유는 ‘연구 실적 기준 미달’. 재임용 심사를 통과하려면 6편의 연구논문 중 4편 이상이 ‘우’ 이상을 받아야 하는데, 3편이 ‘우’ 미만의 평가를 받았다. 이상한 것은 하나의 논문이 ‘수’에서 ‘가’까지 평가가 엇갈렸고, 심사위원 5명 중 2명이 특히 낮은 점수를 줘서 평균을 낮췄다는 점이다. 논문 실적은 정량평가가 아니라 정성평가로 한다. 심사위원 중 일부가 작심하고 나쁜 점수를 주면 특정인을 떨어뜨리는 게 가능하다는 얘기다. 4년 전에도 김 교수는 똑같은 방식으로 재임용에서 탈락할 뻔했는데, 여론이 비등하는 바람에 구제되었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자, 김 교수는 《중앙일보》 인터뷰(지난 8월 17일)에서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이렇게 평가가 극단적인 경우는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2013년 첫 임용 당시부터 규장각 및 서울대 안에서 말이 많았다고 전해 듣고 있다. 이른바 한국사학계의 ‘메카’ 아닌가. 제가 소위 애국적 국학자도 아니고, 국제주의적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학자인데다 ‘비(非)서울대’ 출신이다 보니 규장각에서는 내가 이물질(異物質)이자 눈엣가시였던 것 같다. 꼭 찍어내야겠다는 의도가 없는 이상 동료 교수가 ‘수’로 평가한 논문에 ‘가’를 줄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질문하려 하자, 김 교수가 먼저 “이건 넘어가시죠. 재미도 없는데…” 했다. 그는 “이건 너무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교육부가 공정하게 판단해주리라고 믿는다”며 말을 아꼈다. 김 교수는 “일면식도 없는 국사학계 교수들 중에 응원해주는 분도 있다”면서도 “1990년대에 한국 경제가 잘나갈 때에는 융합 학문이라든지 학제(學際) 간 연구 분위기가 있었고, 그 분위기에 따라 연구자도 많이 배출되었는데, 학계가 쪼그라들면서 다시 19세기적 분위기로 퇴행(退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우선 규장각 교수 임용 탈락에 대한 교육부의 판단을 기다리면서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를 완성해야죠. 《서울선언》 시리즈도 계속 갈 것 같고…, 그러다가 50대를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요. 극동유라시아에 대한 연구서를 준비하고 있는데, 단순하게 한·중·일이 아니라 러시아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를 포함한 큰 틀에서 구상하고 있습니다.”⊙
《일본인 이야기 1》이 나올 무렵, 김시덕 교수의 이름으로 된 다른 책을 접했다. 《갈등도시: 서울에서 경기도까지, 시민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전쟁들》이었다. 아직도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지나간 시대의 흔적과 서울시민들의 삶의 자취들을 추적하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김시덕 교수가 진작부터 그러한 작업을 해왔고 이미 2018년에 《서울 선언: 문헌학자 김시덕의 서울 걷기, 2002~2018》이라는 책을 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김 교수는 그러한 작업을 ‘도시문헌학’이라고 칭했다. 최근 김 교수는 《대서울의 길: 확장하는 도시의 현재사(서울 선언 세 번째 이야기)》라는 책을 펴냈다.
김시덕 교수의 저술 작업은 국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일본에서 출간한 저서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異國征伐戰記の世界)》(笠間書院, 2010)로 30년 넘는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일본 고전 문학 학술상’을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받았다.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일본의 대외전쟁》은 2017년 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됐다. 이 책의 후속 연구서인 《전쟁의 문헌학》은 2017년 세종도서 학술 부문에 선정됐다.
결국 김시덕 교수의 관심사는 동아시아 역학(力學) 관계. 전쟁, 현대 도시 서울의 삶의 자취와 갈등이라는 세 가지 분야로 압축할 수 있겠다. 고문헌의 세계와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인문학자 김시덕 교수를 만났다.
聖書考古學에 관심
 |
| 김시덕 교수는 2011년 9월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고전문학학술상을 받았다. 사진=김시덕 제공 |
“지금은 종교가 없지만, 어렸을 때는 나름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때도 책을 좋아해서 《성경》을 다 꼼꼼히 읽자고 결심했습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일본 NHK에서 만든 〈실크로드〉를 보면서 페르시아고원으로 금(金)을 캐러 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잉카제국이 있던 안데스산맥에 가볼까 생각하기도 하고…. 이런 생각들이 종교적 문제와 결합되면서 신학대에 진학해서 성서고고학(聖書考古學)을 공부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때 서지학(書誌學), 문헌학이라는 개념을 처음 만났어요. 유럽에서는 휴머니즘, 인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문헌학이잖아요.”
― 그렇죠.
“요즘 인문학이라는 말을 아무 데나 붙여서 문헌학자로서는 속이 많이 상합니다. 마치 인문학을 통해 힐링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인문학이란 계속 파헤치고 맞춰가면서 진위(眞僞)를 밝혀내고, 그걸 비평하는 학문입니다. 인문학이라는 무엇인가에 대해 답답함이 많습니다.”
― 교회에서는 자꾸 따지지 말고 그냥 믿으라고 하지요.
“그게 고2 때 제가 충돌했던 부분입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19세기에 성서고등비평이 나오면서 모세가 영감(靈感)을 받아 오경(五經, 《구약성경》의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을 쓴 게 아니고, 오랫동안 축적되어 오다가 열왕기(列王記)를 정리할 무렵에 전승(傳承)이 정리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신앙상담을 했더니, ‘악마가 시험에 들게 했으니 기도하라’고 하더군요. 그때 신앙과는 안녕을 고했지요.”
‘애국적’ 문헌학
 |
| 2016년 5월 서울대 규장각 연구실에서 러일전쟁 당시의 전황도 앞에 선 김시덕 교수. 사진=조선DB |
“원래 한일(韓日) 관계, 특히 고대사에 관심이 있었는데, 문자 몇 개 가지고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싸우는 걸 보니까 고대사는 답이 없더라고요. 일단 일본을 연구하고 난 후에 한일관계사를 해야겠다고 우회(迂廻) 전략을 취했지요. 서울대 동양사학과가 대안(代案)이기는 했는데 보니까 중국만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민족(多民族)국가 중국에는 관심이 있지만, 한족(漢族) 중심의 중국, 중화주의(中華主義)에는 거부감이 있어서, 일문과가 있는 고려대를 택했습니다.”
고려대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한 김시덕 교수는 일본의 국립 문헌학 연구소인 국문학연구자료관(총합연구대학원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 교수는 국문학연구자료관을 한국학중앙연구원 비슷한 기관이라고 설명했다.
―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문헌학’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서지학이라고 하는데, 인상비평적으로 얘기한다면 도서 분류나 책의 물질적 성격 등에 대한 연구에 머무르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걸 넘어서 그 문헌의 사회적 맥락까지 연구하는 것, 즉 그 문헌을 누가 왜 만들었고, 그것이 어떻게 수용되었는지까지를 보는 것이 문헌학이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나라의 문헌학 실태는 어떻습니까.
“어느 나라든지 문헌학이라고 하면 ‘애국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고려 시대의 팔만대장경과 금속활자, 《조선왕조실록》 등을 강조하는 식이죠.
고문서학회 참석차 한국에 온 일본인 학자가 제게 ‘한국에는 고문서가 《조선왕조실록》밖에 없느냐? 왜 만날 때마다 한국 학자들은 실록만 얘기하느냐’고 한 적이 있어요. 그것 말고도 많은 문서와 문학 자료가 있지만, ‘한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것만 찾다 보니 그런 겁니다.”
“책을 너무 무게 있게 생각”
도쿠가와막부 말기에서 메이지유신 시기를 다룬 일본 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의 소설 《료마가 간다》든지 《타올라라 검》 등을 보면, 실존했던 주인공들이 가족이나 당대 주요 인사들과 주고받은 서신을 비롯해 다양한 문헌이 다수 인용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이 소설을 탄탄하게 받쳐준다. 반면에 우리는 1950년대 이정재·유지광·임화수 같은 사람들에 대한 기록도 찾아보기 어렵다.
― 우리가 기록문화의 전통이 약한 것일까요, 아니면 자료를 발굴해서 공유(共有)하고 콘텐츠화하는 능력이 약한 것일까요.
“둘 다 있다고 봅니다. 백선엽 장군은 본인이 기록을 많이 남겼지만, 제 주변에 있는 군(軍) 출신 지인(知人)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미국이나 유럽의 전쟁기록을 보면 소대 단위까지 다 고증(考證)이 되는데, 우리는 소대·중대급의 자료가 없다고 합니다. 장군들의 회고록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담론(談論)과 얻어들은 걸 섞어서 얘기하고, 디테일이 부족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책을 너무 무게 있게 생각해요. 책을 쓰면 대단한 걸 써야 하는 걸로 생각합니다. 이념적인 문제가 팩트를 찬찬히 기록하게 하는 걸 소홀하게 합니다. 그런 것조차 발굴을 안 하는 문제도 있고…. 기본적으로 아카이브화(化)부터 하고, 여기서부터 담론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담론은 많지만 아카이브화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사상누각(沙上樓閣)인 거죠. 그런 의미에서 최근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장 김명섭 교수가 프란체스카 여사의 사진집을 낸 것은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을 남기면 당한다”
일본에 가면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과 관련 있는 장소에는 화강암 표석이나 나무 푯말이 서 있다. 교토(京都)에 가면 신센구미(新選組)의 주둔지였음을 알리거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가 하숙했던 곳이거나 암살당한 곳임을 알리는 푯말들이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5·16 때 공수부대와 해병대가 돌파했던 염창교 같은 곳에 그런 사실을 알리는 표식이 하나 없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김시덕 교수의 말이다.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운데, 료마 같은 경우는 워낙 인기인이어서 그런 점이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도쿄(東京) 쪽이 좀 더 꼼꼼하게 그런 표지들을 많이 세우는 것 같습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 역사의 현장을 부수고 푯말만 남겨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 어떤 곳이 그런가요.
“극동전범(戰犯) 재판이 열렸던 건물은 원래 있던 지역에서 철거됐고, 일부만이 이치가야(도쿄 시내에 있는 지역으로 방위성 등 군사시설이 밀집)로 이전・복원됐습니다. 사실 남기려면 남길 수도 있었는데, 표석만 남기고 없애버린 것이지요.
저는 미국이나 한국에서 말하는 ‘캔슬 컬처(cancel culture)’, 없애버리는 문화에는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일단 남겨놔야 비판을 하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정권 초기에 박근혜 청와대 캐비닛에서 나왔다는 문서들을 가지고 ‘적폐수사’ 하면서 재미 보았던 문재인 정부는 후환을 우려해서인지, 주요 정책에 대해 문서로 지시하는 대신 전화를 걸어서 알아서 하라고 압박을 가하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정권만 그런 것은 아닌 걸로 압니다. 대한민국이 정치보복이 많다 보니, 기록으로 남기면 남긴 사람이 책임을 지기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요. ‘기록을 남기는 놈이 바보다. 기록을 남기면 당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유구한 전통인데, 이를 유일하게 거역한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카이브학을 하는 입장에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도 기록을 남겼다가 결국 NLL 문제 같은 데서 빌미를 잡혔잖아요. 저는 그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잘했다, 기록은 가급적 많이 남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反日감정 해결, 50년은 걸릴 것”
― 그동안 낸 책들을 보면 ‘탈(脫)민족주의적’이라는 느낌이 드는데, 그런 시각은 어떻게 형성되었습니까.
“대략 한일고대사를 공부하고 싶어하다가 그걸 우회하기로 결심했던 고3이나 대학 1학년 때쯤 민족주의에서 벗어나면서 국제주의로 간 것 같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민족보다는 국가, 국가보다는 계급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 국가보다 계급을 중요하게 봐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국가 안에서 계급 간의 갈등을 어떻게 처리하고, 어떻게 최대한 공평하게 기회균등을 보장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판에 언제까지 ‘민족’을 가지고 싸울 것인지 답답합니다.”
김시덕 교수는 2018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일본학 연구는 북한학보다 위험하다. 자칫 잘못하면 ‘친일파’로 낙인찍힌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에게 경멸의 대상이 북한이라면 증오의 대상은 일본, ‘Japs(왜놈)’라 할 수 있다. 국내 정치 및 경제의 침체와 관련 있는 현상이다. 내적 스트레스를 발산할 외부 창구가 필요한데, 그것이 일본인 것이다”는 말도 했다. 이런 발언을 상기시키자 김 교수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식민지 시대를 겪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렇지 않아요. 오늘날 한국의 반일(反日) 문제는 기본적으로 한국 내부의 문제, 내부의 계급 갈등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특히 군부독재와 박정희(朴正熙)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반일감정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2019년 ‘죽창가(竹槍歌) 사태’도 결국 국내 정치를 국제 정치에 투영한 것에 불과해요.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해놓고, 그로 인한 외교적 책임은 안 지려고 하는….”
― 반일정서 극복은 언제쯤에나 가능할 것으로 봅니까.
“저는 낙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50년은 간다고 봅니다. 미국 출신으로 서울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와 있던 로버트 파우저는 ‘아일랜드도 잉글랜드 때문에 식민지를 오래 겪고 분단까지 되었다가, 1990년대 이후 잉글랜드보다 잘살게 되면서 반영(反英)감정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한국이 일본보다 잘살게 되면 해결될 문제인데, 저는 한국 경제가 일본 경제를 넘어서기 어렵다고 봅니다. 설사 그게 되더라도 50년에서 100년은 걸릴 것입니다.”
“너무 韓民族만 보고 있다”
 |
| 대항해시대 이후 일본의 역사와 주변국 역사를 아우르는 김시덕 교수의 책들. |
“두 나라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에요. 한반도는 큰 틀에서 중화권(中華圈) 화북(華北) 지역의 일부가 되기를 바랐고, 일본은 다른 방향을 봤습니다. 두 나라가 중화권을 바라보다가 갈라지기 시작한 게 대항해시대라고 봅니다. 그래서 《일본인 이야기》를 대항해시대에서 시작하는 거죠.”
김시덕 교수는 “또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비교하려면, 어느 시대에 어디까지를 한국과 일본의 영역으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게 간단치 않다”고 말했다.
“저는 민족이 아니라 국가를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본의 역사적 영역을 본다면 대항해시대 이전에 위로는 홋카이도의 아이누족이 활동했던 캄차카반도와 연해주, 남쪽으로는 류큐(오키나와)인들이 활동했던 동남아시아까지가 일본이라는 국가의 역사적 범위였다고 봅니다.”
― 그건 오늘날의 영토국가 일본을 전제로 해서 역사적 범위를 현대 국민국가의 시각으로 소급(遡及)하는 것 아닌가요.
“그 작업이 모든 나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고, 그게 지금 중화인민공화국이 하고 있는 각종 역사공정(歷史工程)입니다.”
― 그렇죠.
“저는 현대 한국의 시민들이 이 훈련이 너무 안 되어 있다고 봅니다. 너무 ‘민족’ ‘민족’ 하고 있어요. 영토적으로 봤을 때, 영토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역사가 어디까지 소급되는지를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 그건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는 너무 한민족(韓民族)만 보고 있어요. 그렇게 되면 함경도에서 발견된 거란문자 유적 같은 것은 한국의 역사해석에서는 튕겨 나가는 것이죠. 또 한국사는 구한말(舊韓末)은 물론 식민지 시대까지 존재했던 한반도 내의 여진족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않고 있어요. 영산강 유역에서 보이는 왜계(倭系) 무덤들도 설명할 수 없어요. 왜구(倭寇)에게서 다민족 집단의 성격이 보이는 것이 사실이고, 제주도는 왜구의 거점 중 하나였는데, 이런 얘기를 하면 제주도 분들이 싫어하죠. 이런 것들은 사실 한반도는 다민족 상태였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蘭學의 한계
〈한국 내에는 에도 시대 일본을 조선과 비교하면서 일본이 난학을 통해 조선보다 빠르게 근대화되었다며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 안에도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처럼 유럽의 식민지가 되거나 조선과 대청제국처럼 유럽발의 정보에 둔감하지 않았고, 난학을 통해 유럽과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에도 시대 일본은 이미 그때부터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우월했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우월함이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이어져서 일본은 비유럽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제국이 되었다는 주장이 이에 뒤따릅니다.
하지만 동시대 유럽의 정치·군사·경제·의학·과학·문화적 성취 정도와 비교했을 때 일본은 절대적으로 뒤처져 있었습니다. 이 동시대적 발전이 중단된 이유는 유럽에 대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쇄국정책이었습니다. 에도 시대에 일본 난학이 이루어낸 성취는 동시대 유럽과 비교할 때 결코 높게 평가받을 수 없습니다. 난학의 이러한 빈약한 성취는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된 퇴보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20세기 중기에는 유럽·미국·일본 등과 대등하게 발전했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이 이슬람혁명과 탈레반 집권 이후 급속히 퇴보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는 언제나 그래프의 오른쪽 위를 향해 일직선으로 진보하지 않습니다.〉
김시덕 교수의 《일본인 이야기 2》에 나오는 말이다. 이러한 인식은 에도 시대 일본이 보여준 근대성, 난학에 기반을 둔 일본의 근대화에 관심이 있던 기자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 《일본인 이야기 2》에서 난학이 일반 백성들의 실제적 삶에 미친 영향이 작았다고 주장했는데….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고, 특히 아편전쟁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비해 좀 더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죠. 저는 그걸 깨고 싶었던 것입니다. 난학이 큰일을 했다고 보는 것이 정(正), 하지만 제한적이었다고 하는 게 반(反),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난학은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게 합(合)이라고 한다면, 저는 반(反)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국인의 난학 의식은 그 ‘반’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우리는 다른 아시아에 비해 먼저 나갔으니까 위대하다’는 체제 우위적 주장을 하는 데에 난학 담론이 역할을 해왔습니다. 저는 이걸 깨고 싶었습니다.”
“역사과잉이 문제”
김시덕 교수는 여기서 난학을 가지고 한국과 일본의 근대화 성패(成敗)를 이야기하는 데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조선과 비교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요. 일본은 대항해시대까지 있었던 가능성과 비교해야 하고, 똑같이 유럽에 대해 문을 열었던 오스만튀르크나 페르시아, 청(淸)나라와 비교해야 합니다. 조선은 청제국 내에서의 다른 성(省)들과 비교해야죠.”
― 조선을 청제국 내의 다른 성들과 비교해야 한다는 건 한국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겠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사실을 한국인들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지향점은 자주적인 국가라기보다는 화북의 완벽한 일부가 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갑오농민전쟁을 일으키니 당장 청에 군대를 보내 진압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주국가라면 그럴 수 없지요.”
김시덕 교수는 “《일본인 이야기》는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려고 쓴 책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저는 세계사 속에서의 일본이라는 지역이 어떻게 보편성을 갖고 도전(挑戰)과 응전(應戰)을 해왔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인 독자들이 여기서 교훈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저는 역사를 교훈을 배우기 위해 연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은 흔히 ‘역사가 중요한데, 역사를 모르는 것이 문제’라고 말하는데, 저는 오히려 한국은 역사과잉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정교과서를 추진했던 박근혜 정권이나, 너무 ‘역사’ ‘역사’ 하는 문재인 정권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아프간 젊은 여성들 사진
 |
| 아프간 여성들은 1970년대에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카불 시내를 활보했다. |
“1970년대에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을 추적해봤어요. 사실 그 사진은 소련이 지원하던 사회주의 아프가니스탄 정권 시절의 프로파간다 사진이라는 성격이 강합니다. 그때 그 사진을 찍은 사람은 1990년대에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자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2001년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후 귀국해서 대통령자문위원인가를 지냈다고 하더군요. 또 망명길에 오르겠지요.
그 사진을 볼 때에는 아프가니스탄은 다민족 국가이고, 수도 카불과 농촌 지역은 다르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카불이 그랬다고 해서 아프가니스탄이 모두 그랬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에도 탈레반의 집권에 카불은 공포에 질렸지만, 파슈툰족의 농촌 지역은 그러려니 하고 있다고 하잖아요. 이 나라는 어떻고, 이 민족은 어떻고 하는 식으로 하나로 묶으면 안 된다는 게 저의 기본전제입니다. 가급적 쪼개서 보는 것이 저 같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할머니의 걸음걸이’
 |
| 김시덕 교수의 《서울선언》 시리즈. ‘도시문헌학’의 시각으로 서울과 그 주변을 들여다보는 책들이다. |
“제가 붙인 거죠, 하하. 예전에 ‘고현학(考現學)’이라는 용어가 있었습니다. 현대를 고고학적 방식으로 보자는 것이죠. 1934년에 나온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같은 것이 그 예입니다. 고현학은 이미 20세기 초부터 있었던 학문인데, 그걸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받아들인 거죠. 일부 젊은 친구들이 요즘 맨홀 뚜껑에 관심을 갖고 그러는 것이 다 1920년대에 이미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서울선언》 시리즈는 배 기자도 재미있게 읽어준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의 현대판이기도 합니다.”
― 아, 그렇습니까.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는 1945년에 끝납니다. 현대를 말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이죠. 너무 첨예하기 때문에….
몇몇 한국의 뜻있는 분조차도 한일 관계에 너무 성급하거나 나이브하게 접근한다고 생각합니다. 한일 관계는 대단히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에 아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러시아 외교정책을 말할 때 ‘할머니의 걸음걸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 그게 뭡니까.
“한 발짝 내딛고 영국 반응을 보고, 한 발짝 가보고 청나라 반응을 보고 하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한일 관계는 물론 현대사와 관련해서도 그런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1945년 이후의 현대사는 《서울선언》 시리즈를 통해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김시덕 교수의 말을 듣는 순간, 《서울선언》 시리즈 중간중간에 조심스럽게 역사와 현실에 대해 한마디씩 던져놓은 것들이 이해됐다. 몇몇 대목을 인용해본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부끄럽다며 감추려 하고, 그런 말 하는 사람의 입을 폭력적으로 다물게 하고,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과거를 기억에서 지우고는 자신들 보기에 바람직한 과거를 창조하려는 것을 역사 왜곡이라고 합니다. 동북공정이니 식민사관이니 하면서 이웃 나라들을 비난하기 전에, 한국 시민은 스스로가 떳떳한지 돌아봐야 합니다.〉 -《서울선언》 중에서
〈이미 망한 지 100년이 지난 나라의 왕족 사당에 대해,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시민이 왜 신성함과 존엄성을 지켜주어야 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더욱이 조선왕조가 망한 뒤에도 조선의 왕족들은 새로 마련된 이왕직관제(李王職官制)에 따라 비교적 우대받았으니,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은 민중들과는 그 처지가 분명히 달랐습니다. 그랬기에 1919년 3월 1일의 독립선언을 거쳐 4월 11일에 수립된 조선인들의 임시정부는 그 이름을 ‘대한제국’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고 한 것입니다.〉 -《갈등도시》 중에서
〈오늘날 서울 시내 각지의 역사적 인물을 발굴하는 것이 유행하고 있는 와중에도, 을축년 대홍수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땅을 주고 집과 학교를 지어준 김주용 선생과 그를 추모하는 비석은 여전히 잊혀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일부 세력은 ‘친일파’라는 칼을 너무나도 쉽게 휘둘러 역사를 왜곡하고 망각시키고,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낙인찍습니다.〉 -《서울선언》 중에서
面과 線
― 이번에 나온 《대서울의 길: 확장하는 도시의 현재사》는 앞에 나온 《서울선언》 시리즈와 비교하면 어떤 점이 다른가요.
“기본적으로 범위를 넓혀서, 지금 서울로 출퇴근하거나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 또는 반대로 서울에 살면서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지를 다루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 책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길’입니다.
행정이나 정치라는 관점에서 보면 면(面)을 중시하고, 그 지역에 토착(土着)해서 사는 사람들만 보입니다. 하지만 길, 즉 선(線)을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중요합니다. 서울만 해도 하나로 보면 안 됩니다. 쪼개서 봐야죠. 예컨대 서울 노원구나 송파구에 사는 사람들은 구로구로 가는 것보다 춘천이나 원주로 가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감각을 놓쳐서는 안 되죠.”
―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에게서 저녁때 사당역에 나와서 선거운동을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런 것이군요.
“바로 그겁니다. 좋은 얘기인데 메모해두어야겠네요. 제가 집이 낙성대인데, 밤 11시쯤 이수에서 술 마시고 들어가려고 하면 사당에서 경기도행 빨간 버스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게 지금의 서울입니다. 조선 시대에도 사대문 안의 인구는 40만명 정도였고, 지금 종로·중구의 인구도 그 정도입니다. 그것만 보려고 해서는 지금 서울 사람들의 부대끼는 삶을 잡아낼 수 없어요. 제가 사대문 빼고는 다 살아봐서, 느끼는 소외감과 분노가 있죠.”
大서울과 수도권
 |
| 건물 준공을 알리는 초석이나 표식이 김시덕 교수에게는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지난해 3월 인천의 한 전도관의 礎石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사진=김시덕 제공 |
“늘 어려웠던 것은 아니고, 어려웠던 시절도 있었지요. 《서울선언》에 썼지만, 아버지가 연합철강 다니다가 독립해서 그린벨트 쪽에서 공장을 했어요. 그런 걸 보면서 공업한국, 산업한국이라는 것을 가깝게 느꼈습니다.”
― ‘대서울’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데, 그건 어떤 개념입니까.
“서울시와 대서울의 관계는, 좁은 의미의 런던[시티(city)라고 하는 런던의 중심부]과 그레이터 런던(Greater London)의 관계와 같습니다. 서울시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행정구역인 서울시만 봐서는 안 되고, 서울시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서울 근교 경기도나 충청도, 강원도 지역도 함께 들여다봐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일본 도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근 사이타마현(縣)까지 합치면 5000만명 정도가 ‘대도쿄’에 살고 있죠.”
― ‘대서울’은 수도권과는 어떻게 다른 개념입니까.
“수도권이라고 하면 경기도까지 포함하지만, 저는 경기도가 모두 수도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천시에서도 농촌 지역 같은 곳은 사실 수도권이라고 하기 어렵고, 서울과의 관련성도 떨어지죠. 이렇게 조건이 다른 지역들을 괜히 면(面)으로 묶어버리는 바람에 쓸데없는 규제만 하게 되는 거죠. 요즘 코로나19 규제를 하면서 수도권이냐 비수도권이냐를 따지다 보니, 수도권 술꾼들이 천안에 가서 술 마시고 나이트클럽 간다는 얘기가 있었잖아요. 이게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서울은 거대한 도서관”
― 가장 인상적이었던 서울의 유적(?)은 어디입니까.
“가장 좋아하는 지역은 영등포에서 인천에 이르는 공업벨트입니다. 이것을 자꾸 밀어내려고 하는 정책에 대해 반감이 있습니다.”
―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밀려나는 공장이나 군부대를 받는 것은 경기도나 충청도지요. 나라에서는 그들을 없는 존재로 취급해버립니다. 표가 적으니까…. 하지만 누군가는 서울시민을 위한 벽제화장장을 받는 경기도민의 입장 같은 것을 기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고서적 탐구하는 것과 도시 탐구하는 것, 어느 쪽이 재미있습니까.
“둘 다 재미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세계는 거대한 도서관’이라고 했는데, 문헌학이라는 연구 방법을 가지고 대서울을 바라보면, 서울은 정말 거대한 도서관입니다. 제가 읽고 해석할 대상이 무궁무진합니다. 간판, 머릿돌, 마을 비석, 공덕비, 추모비, 벽보, 플래카드, 전단, 깃발 등…. 이런 것을 읽으면서 돌아다니면 참 재미있습니다. 왜 이걸 놓치는가 싶어서 안타까워요. 부동산 가격을 기준으로만 보니까 자기가 사는 아파트가 안전등급 D등급 나오면 축하한다고 플래카드를 거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민족주의는 수동적”
 |
| 김시덕 교수는 ‘일본의 대외전쟁’에 대한 고문헌들을 살펴보고 책으로 냈다. |
― ‘전쟁이 정상’이라는 주장은 많은 한국인에게는 뜻밖으로 여겨질 것 같습니다.
“유럽의 경우를 보면, 전쟁은 정상, 아니 정상이라기보다는 일상(日常)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없다는 것뿐이지, 어디에선가 전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전쟁의 주변화(周邊化)’라고 해야 할까요. 전쟁은 경계 지역에서 일어나는데, 이는 제가 (서울) 주변을 답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심각한 가치들의 충돌은 주변에서 일어나는데, 그것이 국가 간의 충돌이면 전쟁이 되는 것이고, 도시라면 혐오시설의 이전이 되는 것이겠죠.”
― 우리나라가 유사 이래 900여 회의 침략을 받았다고 하지만, 유럽의 30년전쟁처럼 그렇게 큰 전쟁은 많지 않았죠.
“우리가 외국의 침략만 받은 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북으로 밀고 올라가면서 여진을 많이 괴롭혔죠.
재미있는 것은 외국과의 전쟁을 다룬 에도 시대의 군담(軍談)들도 대개는 자기들이 외국을 지배해서 세계제국이 되자는 것이기보다는, ‘외국에서 수많은 것이 침략해온다. 우리 일본을 지켜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방어논리를 펴다가 어느 순간 일본이 상대를 공격하고 있는 논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애국주의나 민족주의는 공격적이지 않고 피해적이고 수동적’이라는 것이 제가 일본 군담에서 파악한 전쟁의 기초입니다.”
‘규장각 내의 異物質’
 |
| 지난해 12월 충북의 공장을 답사했다. 사진=김시덕 제공 |
이번에도 같은 일이 되풀이되자, 김 교수는 《중앙일보》 인터뷰(지난 8월 17일)에서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이렇게 평가가 극단적인 경우는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2013년 첫 임용 당시부터 규장각 및 서울대 안에서 말이 많았다고 전해 듣고 있다. 이른바 한국사학계의 ‘메카’ 아닌가. 제가 소위 애국적 국학자도 아니고, 국제주의적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학자인데다 ‘비(非)서울대’ 출신이다 보니 규장각에서는 내가 이물질(異物質)이자 눈엣가시였던 것 같다. 꼭 찍어내야겠다는 의도가 없는 이상 동료 교수가 ‘수’로 평가한 논문에 ‘가’를 줄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질문하려 하자, 김 교수가 먼저 “이건 넘어가시죠. 재미도 없는데…” 했다. 그는 “이건 너무 말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에 교육부가 공정하게 판단해주리라고 믿는다”며 말을 아꼈다. 김 교수는 “일면식도 없는 국사학계 교수들 중에 응원해주는 분도 있다”면서도 “1990년대에 한국 경제가 잘나갈 때에는 융합 학문이라든지 학제(學際) 간 연구 분위기가 있었고, 그 분위기에 따라 연구자도 많이 배출되었는데, 학계가 쪼그라들면서 다시 19세기적 분위기로 퇴행(退行)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앞으로의 계획은.
“우선 규장각 교수 임용 탈락에 대한 교육부의 판단을 기다리면서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를 완성해야죠. 《서울선언》 시리즈도 계속 갈 것 같고…, 그러다가 50대를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요. 극동유라시아에 대한 연구서를 준비하고 있는데, 단순하게 한·중·일이 아니라 러시아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를 포함한 큰 틀에서 구상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