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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인간탐험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사나이’ 이만수

“야구 50년, 나는 행복했다. 이젠 다 내려놨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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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한국 프로야구 최고 강타자… 프로야구 1호 안타·타점·홈런 주인공
⊙ “앞으로 20년 동안 인도차이나반도 5개국에 야구를 전파하는 게 마지막 꿈”
⊙ 전설이던 故 장효조·최동원 10주기… 화려했지만 스트레스로 고통받아
⊙ “한국 야구 발전하려면 나무 배트 사용과 고교 지명타자 제도 없애야”

이만수
1958년생. 대구상고, 한양대 졸업 / 1982년 삼성라이온즈 창단 멤버로 입단, 美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 포수코치, SK 1군 수석코치, SK 2군 감독, SK 1군 감독 역임 / 現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 16년 현역 통산 1449경기 출장. 평균 타율 0.296, 득점 624점, 안타 1276개, 2루타 193개, 3루타 7개, 홈런 252개, 타점 860점
사진=조준우
  전 삼성라이온즈 선수이자 전 SK와이번스(現 SSG랜더스) 감독인 이만수(李萬洙·63)는 대구상고(現 대구상원고)와 한양대(78학번)를 졸업하고 1982년 삼성에 입단했다.
 
  프로야구 개막전(1982년 3월 27일)에서 MBC청룡 이길환 투수를 상대로 제1호 안타, 제1호 타점, 제1호 홈런을 기록해 ‘최초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또한 최초 100호 홈런, 최초 200호 홈런, 최초 250호 홈런을 기록했다. 통산 홈런은 252개.
 
  타격왕 한 번(1984년), 홈런왕 세 번(1983년, 1984년, 1985년), 타점왕 4번(1983년, 1984년, 1985년, 1987년)을 했다. 특히 1984년 최초로 홈런(23개), 타점(80점), 타율(0.340) 타이틀을 한 손에 쥔 1980년대 최고의 타자였다.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5회(1983~87년) 수상한 이력도 빼놓을 수 없다.
 

  1997년 은퇴하기까지 16시즌 동안 통산 타율은 0.296이었다. 6시즌에서 3할 이상을 기록했다.
 
  1997년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너리그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으며 2000년 1월부터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불펜 포수코치로 활약했다. 2005년 화이트삭스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후 국내로 돌아왔다.
 
  2006년 SK 수석코치를 거쳐, 2010년 SK 2군 감독, 2012년 SK 1군 감독으로 취임했다. 2014년 이후 국내 야구 현장을 떠났으나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한국야구위원회 부위원장, 라오J브라더스 구단주로 동분서주하고 있다.
 
 
  팬클럽 ‘포에버 22’ 회장과의 추억
 
자신의 팬클럽인 ‘포에버 22’의 회장 故 김애란씨와 이만수 전 감독. 사진=이만수 제공
  지난 8월 29일 일요일 이만수 전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안한데 사정이 있어 지금은 만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고 며칠 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 기자! 제 팬클럽인 ‘포에버 22’의 회장님이 돌아가셔서 그때는 만날 수 없었다”며 고(故) 김애란(향년 57세)씨와의 인연을 털어놨다. ‘22’는 그의 삼성 현역 시절 등 번호를 뜻한다. 이 번호는 현재 영구결번이다.
 
  “전남 목포의 한 여학생으로 경상도 대구의 삼성 선수를 한결같이 응원한 분이었어요. 지역감정이 극심했던 그 시절, 야유와 눈총을 받으며 광주 무등구장에서 큰 소리로 ‘이만수’를 외치던 여학생이었죠.
 
  섬에서 근무(보건 공무원)했기에 야구장에 오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테지만, 배 타고 육지에 와서 기차로 갈아타고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인천 문학구장까지 달려왔어요.”
 
  이 전 감독은 “비 오던 목포의 장례식장을 찾은 팬클럽 회원들의 큰 울음이 그녀가 얼마나 좋은 누나, 언니인지 알 수 있게 했다”며 슬퍼했다.
 
  ― 한결같이 평생을 응원하였군요.
 
  “돌아보면 추억이 너무 많아요. 제가 라오스의 어린 선수들을 한국으로 데려왔을 때 그 먼 길을 달려와 아이들에게 무엇이라도 해주려 애쓰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전화와 문자, SNS로 계속 소통하다가 10월 6일 인천 송도에서 만났다. SK 감독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는 여전히 팀의 연고지인 인천에서 살고 있었다.
 
  “다음 달, 이사 갑니다. 인천을 영영 뜨는 것은 아니고요.(웃음)
 
  집을 정리하면서 보니 방 한 칸이 전부 야구와 관련된 물건입디다. 공, 글러브, 유니폼, 기사 스크랩…. 선수 시절부터 ‘이만수 야구 박물관’ 건립이 꿈이었어요. 이 많은 물건을 짊어지고 다녔어요.
 
  김 기자! 제가 야구를 중1 때부터 50년을 했습니다. 기념될 만한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걸 안 버리고 챙겼잖아. 먼지와 곰팡이, 세월에 삭아버린 상패와 기념품, 신문 스크랩을 다 정리했어요.”
 
  ― 설마 버리진 않았죠?
 
  “4분의 3을, 절반 이상을 버렸어요. 야구 박물관… 다 부질없다는 걸 느꼈어요. 버리자. 내가 죽으면 아무 소용 없다. 아내마저 ‘보물단지처럼 여기더니 왜 버리냐’고 깜짝 놀라더군요. 분신과 같은데, 야구에 피눈물을 흘렸는데…. 하지만 이제는 버릴 나이도 됐잖아요. 다 버리고 나니 방 한 칸이 새로 생긴 것 같아요. 속 시원합니다. 하하하.”
 
 
  ‘감독님! 속이 상해 술 한잔합니다’
 
  그는 언제나 성공한 선수였고, 성공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승패의 중심에서 늘 결과론에 휘둘리는 표적이 되었다. SK 수석코치 시절, 김성근 감독과 함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반면 SK 감독 시절, 두 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전 소속팀인 삼성에 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삼성 현역 시절, 전후기 통합 우승(1985년)을 빼고 죄다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다.
 
  ― SK 감독 시절, 제일 아쉬운 게 뭔가요.
 
  “지나고 보니 아쉬운 게 없어요.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니까. 현장에 있을 땐 앞만 보니까, 넓게 보지 못했어요.
 
  그때는 팀 성적이 안 좋고, 연패에 빠지면 너무 괴로웠어요. 감독실에 앉아 있다가 자정이 넘어 집으로 향했어요. 제가 안 가면 매니저가 퇴근을 못 하니까…. 곧장 집에 들어가기 싫을 때는 근처 공원으로 갔습니다.
 
  한번은 말없이 공원을 걷는데 한 남자가 벤치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더군요. 모르는 척하고 지나는데 제 뒤통수에 대고 이렇게 말해요. ‘감독님! 오늘 문학구장에 갔었어요. 속이 상해 술 한잔합니다.’ 제 마음이 어떻겠어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도망쳤지요. 그런 일이 많았어요. 지나고 나면 다 부질없는데 당시만 해도 전부였어….”
 
  기자는 명장(名將)으로 꼽히는 김인식 전 국가대표 감독을 만난 일이 있다. 그도 쌍방울 감독(1990~1992년) 시절, 밥 먹듯이 ‘연패(連敗)’를 들이켠 적이 있다. “‘왜 졌지? 왜 이리 안 풀리지…’ 하다가 시계를 보면 새벽 4시였다”고 고백했었다.
 
  이 전 감독의 말이다.
 
  “신앙인이니까…, 신앙이 없었다면 저 같은 성격은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 승부욕이 지나치게 강하고….
 
  “신앙으로 다 내려놓으려 애를 썼지요.”
 
  감독은 외로운 존재다. 감독은 팀 내에서 가장 머리가 좋을 필요도 가장 경험이 많을 필요도 없다. 그러나 감독은 반드시 보스여야 한다. 누구를 주전으로, 누구를 선발로 세우고, 타순을 어떻게 짜며, 번트 사인을 내고, 대타로 누굴 기용할지를 오직 감독만이 결정한다.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오직 감독만이 진다.
 
 
  “우승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다 져. 희한하게도…”
 
《조선일보》 1982년 3월 28일 자 9면에 이만수 선수의 한국 프로야구 제1호 홈런 사진이 실렸다. 1991년 9월 17일 이만수는 해태와의 대구경기에서 7회 좌월 솔로홈런을 터뜨려 개인 통산 200호 홈런을 달성했다. 199호 홈런을 친 뒤 거의 30경기 만에 친 홈런이었다.
  ― 신(神)께 열심히 기도하면 우승할 수 있습니까.
 
  그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유명하다. 질문이 어처구니없으나, 그 역시 승부의 간절함을 빌었을 게 분명했다.
 
  “그건 아니에요. 많은 사람이 착각하는데 하나님은 기도한다고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승부는 모두 제 문제지요. 저 역시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를 많이 했어요. 선수 시절, 삼성이 한국시리즈에서 번번이 좌절했잖아요. 그때 선배들이 찾아와 ‘이번에 한국시리즈 우승하면 교회에 나가겠다’고 했지만 끝내 패하고 말았어요.
 
  저도 우승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다 져. 희한하게도…. 이건 아니라는 거지.”
 
  이만수 감독은 “야구를 전파하러 라오스에 가고…, 야구 박물관을 짓겠다고 모아둔 기념품들을 절반 이상 버릴 수 있었던 것도 신앙 덕분”이라고 했다.
 
  “현역 시절, 어디 가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고 (경기에서 패하면) 내 인생은 이게 전부라는 생각에 가족에게 화도 많이 냈어요. 남들이 잘나가면 ‘쟤는 나보다 못했는데’ 비교하고…. 이제는 그런 생각들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게 됐어요.”
 
  ― 신이 야구 승패에 관여하지 않나 봅니다.
 
  “아이고…. 그렇게 되면 점쟁이가 되는 거야.”
 
  2014년 SK 사령탑에서 물러난 이만수는 야구 불모지였던 라오스와 인연을 맺었다. 현역 감독 시절, 사재(私財)를 털어 야구용품을 보낸 후, 마음에 항상 품고 지냈던 라오J브라더스 야구단을 찾아간 것이다.
 
  “김 기자! 참으로 신기한 것은 사복 입었을 때보다 야구복 입을 때가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요. 야구 한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그러더니 이런 말도 보탰다.
 
  “2014년 11월 12일, 처음 라오스 들어갈 때만 해도 뜻을 이루고 한국으로 컴백한다는 생각을 많이 갖고 있었어요. 재능 기부한다고 갔지만, 부끄러운 얘기로 한번 멋있게 보이고 돌아오겠다는 마음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바이디’, 라오스말로 인사말을 건네자 선수들은 한국어로 ‘안녕하세요’라고 했습니다.”
 
  이내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본 이만수 감독은 암담해졌다고 한다. 20대 초반의 청년들은 우리나라 중고생들보다도 덩치가 작았고, 10대 후반의 청소년들은 마치 초등학생 같아 보였다고 한다.
 
 
  라오스에 야구를 전파하다
 
2018년 8월 21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겔로라 붕 카르노 야구장에서 열린 라오스와 태국의 경기에서 이만수 감독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조선일보DB
  미리 짜놓은 훈련 스케줄에 따라 캐치볼과 펑고를 시작했다. 그런데 선수들이 공을 너무 잘 잡아서 도리어 놀랐다. 체격이 왜소한 만큼 몸놀림이 빨랐던 것이다.
 
  “선수를 선발했을 초창기엔 정말 아무런 야구 인프라가 없었고, 제가 보내준 유니폼, 글러브, 공, 그리고 방망이 몇 개가 전부였습니다. 야구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뙤약볕을 피할 곳조차 없이 힘든 상황이다 보니 점점 선수들이 떠났죠.”
 
  처음 선발했던 45명 중 13명이 남았고 그 후에 다시 15명 정도 더 선발해서 현재 라오J브라더스 선수들은 총 28명이다.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내일은 라오J브라더스의 해가 뜬다”는 믿음으로 달렸다고 한다.
 
  “처음 만났던 선수들의 꿈은 하루 밥 세끼 먹는 것이었어요. 그런 친구들에게 야구는 그저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겠죠. 저는 야구를 통해 꿈과 희망, 미래를 주고 싶었습니다.
 
  ‘열심히 하면 한국에 데려가겠다’고 하니 안 믿었어요. 한국국제교류재단의 도움으로 서울 잠실구장, 부산 사직구장, 인천 문학구장, 수원 KT위즈파크를 둘러보게 하고 인천서 홈스테이를 했어요. 라오스는 가난하니까 편부모 가정이 많고 조부모 손에 자란 아이도 많아요. 한국의 가족문화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대단한 일을 하셨습니다.
 
  “돌아갈 때가 됐는데 안 가려는 겁니다. 제가 달랬어요. ‘너희가 돌아가야 다음에 또 올 수 있다’고. 그랬던 선수들이 한국에 3번이나 더 왔어요. 그리고 ‘밥 세끼’가 꿈이라던 생각도 달라졌죠.”
 
  ― 어떻게 달라졌나요.
 
  “한 학생은 정치인이 되겠다고 했어요. 라오스는 군부가 장악한 나라입니다. 정치를 잘 해서 한국처럼 잘살고 싶다는 거예요. 다른 학생은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어요. 그곳 사람들은 병원이 없어 자연 치료밖에 못 받아요. 그냥 누워 있는 것이죠. 잘사는 사람만이 옆 나라 태국으로 가서 치료를 받아요. 기특하지요?
 
  어떤 학생은 교사, 어떤 학생은 사업가… 가만히 듣다 보니 좀 괘씸해요. 야구 하고 싶다는 학생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따져 물었죠. ‘야구 선수의 꿈은 없느냐’고. 다행히 2명이 손을 들더라고요. 한국 가서 야구 하고 싶다고 했어요. 하하하.”
 
 
  베트남에 다시 희망을 심다
 
  최근 SK텔레콤은 SSG랜더스의 전신(前身)인 SK의 유니폼, 훈련 의류 등 약 3억원에 이르는 물품을 라오스 국가대표 야구팀에 후원했다. SK가 매각되면서 구단 전용 물품들을 후원하게 된 것이다.
 
  또 대한체육회의 후원으로 민상기, 조민규 두 지도자를 각각 라오스 남녀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했다. 민 감독은 충암고, 야탑고, 설악고 등지에서 지도자 생활을 했고 조 감독은 자양중, 성남중, 중국 상하이 유소년 야구단을 지도한 경험이 있다.
 
  “가만히 보니 라오스는 모계(母系)사회입니다. 남자보다 여자가 나아요. 여자팀부터 야구단을 만들었으면 더 빨리 성장했을 텐데….”
 
  이만수 감독은 요즘 베트남에 야구를 보급하고 있다.
 
  “2019년 12월 26일 베트남 하노이에 처음 들어갔어요. 라오스와 베트남 간 국가대항전을 하자고 해서 간 겁니다. 사실 아버지가 월남전 참전용사입니다.
 

  며칠 후 한국으로 돌아가려는데 베트남 야구를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베트남에 야구협회, 대표팀조차 없어요. 고민, 고민하다가 ‘야구와 관련한 일체 경비는 베트남이 대라’고 했어요. 사실 라오스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으로 사재를 넣었거든요.”
 
  라오스의 세계 GDP 순위는 118위(204억4000만 달러), 베트남은 42위(3548억6000만 달러) 수준이다(2021년 IMF 추정치). 베트남이 17배 가까이 경제 규모가 크다.
 
  2020년 2월쯤 베트남에 들어가 야구협회도 만들고 대표팀도 뽑을 계획을 세웠지만 그만 코로나19가 터져 버렸다. 넋 놓고 무료하게 있지 않았다. “2019년 12월 30일부터 2021년 3월 말까지 베트남과 주고받은 이메일이 무려 1400쪽이 넘는다”고 한다.
 
  그 결과, 지난 4월 10일 베트남 야구협회가 꾸려지고 야구협회장이 선임됐다. ‘2020 도쿄올림픽’에서 베트남 선수단장을 맡았던 체육계 고위 인사라고 한다.
 
  “많은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라오스에서도 해낸걸요. 베트남은 자기네가 큰집이라 생각하고 인접 라오스를 작은집으로 여깁니다. 두 나라 사이에 유대가 깊은가 봐요. 라오스 야구를 보고 저를 부른 겁니다.”
 
  현재 그는 베트남야구협회 고문으로 있다.
 
 
  이만수의 20년 프로젝트
 
  ― 지금 실력으로 라오스와 베트남이 대결하면 누가 이깁니까.
 
  “지금 라오스 대표팀은 한국의 중3, 고1 야구 수준까지 올라갔어요. 베트남이 좀 처져요. 다가올 2022년 중국 항저우아시안게임 본선 진출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대구 팬들은 아직도 이만수 감독이 삼성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 현역 시절, 대구에서 살 때 아파트(수성구 범어동 경남타운)가 요즘 20억 한다더군요.
 
  “(한숨을 쉰 뒤) 1997년 은퇴할 때 IMF가 터졌어요. 아파트 가격이 똥값이 되어 제대로 값을 못 받았어요. 당시 환율이 1달러에 2000원 할 때였어요. 집 팔고, 건물 두 채 팔아 미국에 갔죠. 미국에서 다시 야구 공부하는 데 다 썼어요. 후회는 안 해요. 야구 하면서 번 것으로 야구 할 수 있었다는 걸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 삼성 올드팬들은 다시 대구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어요.
 
  “그런 희망이 잘 없어…. 국가대표 감독이나 삼성 감독 얘기를 들으면 옛날 같아선 마음이 흔들리고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겠지만, 지금은 그런 마음이 없고… 마음을 내려놓으니 확실히 편안합니다.
 
  남들이 그래요. ‘환갑이 넘어도 편안해 보이고,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다’고.”
 
  ― 인생이 마음대로 되나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조금 전에 이야기했지만, 라오스와 베트남 야구 일을 대신 받아줄 이가 아직 없어요.”
 
  그러더니 ‘20년 프로젝트’를 꺼냈다.
 
  “앞으로 20년간 인도차이나반도 5개국에 야구를 전파하는 게 마지막 꿈입니다. 태국, 미얀마, 캄보디아는 아직 시작조차 안 했죠. 라오스는 7년 동안 어느 정도 닦았지만, 베트남은 5~6년은 더 봐줘야 합니다. 다 이루지 못하는 것을 아니까, 하늘나라에 가면, 사람은 누구나 다 가야 하기에, 뒤에 따라오는 후배가 그 꿈을 반드시 이어주리라 믿고 있어요.”
 
 
  정동진 감독과의 만남
 
‘프로야구 30년 레전드 올스타 베스트 10’ 멤버들이 2011년 7월 1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티아스튜디오에서 단체 화보를 찍었다. 선동열 전 삼성 감독(맨 왼쪽)은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해 미리 찍은 단독 사진을 합성했다. 선 감독 옆에서 시계 방향으로 박정태 롯데 2군 감독, 이순철 MBC스포츠+ 해설위원, 한대화 한화 감독, 김기태 LG 2군 감독, 양준혁 SBS ESPN 해설위원, 장종훈 한화 2군 코치, 이만수 SK 감독, 김재박 KBO 운영위원, 장효조 삼성 2군 감독. 사진=조선일보DB
  이만수는 대구중 1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야구를 너무 못해 한 해 유급까지 했다.
 
  “중1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하루 평균 4시간밖에 안 잤어요. 진짜 독하게 야구 했습니다. 별명이 독종이야. 선배가 물어요. ‘만수야. 이렇게 연습하는데 권태기가 안 오냐?’고. 지금까지 권태기를 안 느껴봤어요. 천직인 것 같아. 진짜 야구가 좋고, 야구장에 나가면 신나고, 유니폼 입으면 어디서 힘이 나는지 힘이 솟고 그래요.”
 
  ―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아버지는 함경도, 어머니는 평양 출신이세요. 아버지는 소위 ‘말뚝 상사’로 직업군인이셨죠. 군인 정신이 투철해서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신조셨어요. 야구를 하다 보면 때로 삼진 먹을 때도 있는데 아버지에겐 용납이 안 됐어요.”
 
  ― 심하네요.
 
  “안타를 못 친 날이면 도끼로 야구 글러브와 배트를 찍어버립니다. 무서워 반항을 못 했어요.”
 
  이만수가 대구상고 1학년 시절, 2학년에 김시진, 3학년에 장효조 선배가 있었다. 2학년 올라갈 때 정동진(丁東鎭·75) 감독이 부임했다. 훗날 삼성 코치(재임 1984~88년)와 삼성 감독(1989~90년)으로 다시 만났는데 대구상고 감독 시절, 포수로 눈을 뜨게 한 이가 정 감독이다.
 
  “고교 시절, 그분에게 많이 맞았어요. ‘사랑의 매’로….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포수셨어요. 늘 소문으로 듣던 분이 감독으로 오시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게다가 제가 포수인데….”
 
  ― 어떻게 포수를 하게 됐나요.
 
  “중학교 시절에는 투수와 포수를 번갈아 했어요. 중3 때까지 매일 피칭을 150~200개씩 했어요. 나중에 팔이 펴지지 않더라고요. 남들은 투수 안 시켜준다고 우는데 저는 반대로 투수 안 하고 싶어 울었어요. 그래서 포수로 대구상고에 진학하게 됐죠.”
 
  이만수와 정 감독 사이에 ‘큰 사건’은 정 감독이 부임한 첫날 일어났다.
 
  “정 감독님이 학교에서 앞산 충혼탑까지 뛰어갔다가 오라고 하셨어요. 아무리 늦어도 1시간20분이면 돌아올 수 있는데 중간에 옆길로 새버렸어. 처음 오셨으니 왕복 시간을 모르실 것으로 생각한 거지.”
 
 
  ‘어떤 선수가 투지가 있는지 보고 싶었는데, 그게 바로 만수였다’
 
  야구 선수 수십 명이 동네 주택가 골목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지나가던 택시 기사가 보고서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도대체 감독이 누구냐. 애들 운동은 안 시키고 놀게 하느냐”고 항의를 한 것이었다.
 
  “3시간 넘게 놀다가 1km 앞두고 열심히 뛰어갔어요. 감독님이 아무 말씀 안 하시고 ‘한 번 더 갔다 와라’ 그러셔요. 그때 들통이 난 것을 알았어요.
 
  1시간 만에 다시 뛰어갔다 왔더니 감독님이 펑고 배트를 놓더니만 ‘엎드려뻗쳐’를 하시며 선수 한 명씩 당신을 때리라는 겁니다. 어떻게 스승을 때릴 수 있어요. 전부 다 용서해달라고 빌었지요. 감독님은 모든 선수가 한 대씩 때릴 때까지 안 일어서겠다고 하셨어요. 독한 거야. 해병대 출신이거든.”
 
  당시 대구상고 야구부원은 모두 34명이었다. 정 감독은 34대를 맞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 어떻게 됐어요.
 
  “와…, 말도 마이소. 이분이 안 때리면 안 일어날 것 같아서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나섰습니다. 3학년 선배가 욕을 하면서 ‘어디 건방지게! 당장 배트 내려놔’라고 했어요. 그러자 감독님이 ‘그래, 만수야. 너가 나를 때리고 일으켜달라’셨어요.”
 
  ― 악역을 맡으셨네요.
 
  “근데 사람이 그렇잖아요. 슬슬 때려야 하잖아요. 내가 무식해. 그대로 때려버렸는데 감독님이 팬티만 입고 계셨던 거야.”
 
  이 감독에 따르면 당시 선수들은 팬티 10장을 기운 두꺼운 팬츠(일명 ‘슬라이딩 팬츠’)를 입고 있었다. 그 팬츠 안에 마른오징어를 넣기도 했단다.
 
  “10대를 때리고 나서 더는 못 하겠다고 했어요. 모든 선수가 무릎 꿇었어요. 감독님은 아직 24대 남았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다 때렸어요.”
 
  이튿날 스승을 배트로 때렸다는 소문이 돌면서 재경(在京) 동문회를 비롯한 선배들이 “이만수가 어떤 놈이냐”며 전화와 항의 방문이 이어졌다.
 
  “도저히 학교를 다닐 수 없어 서울 이모집으로 한 달간 도망쳤어요. 아버지가 학교에 찾아가 ‘우리 아들이 생매장당하게 됐다’고 호소하셨어요. 감독님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어떤 선수가 투지가 있는지 보고 싶었는데, 그게 바로 만수였다’는 겁니다.
 
  돌아와 감독님께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고 약속했어요. 저는 그 약속을 지켰어요.”
 
 
  “만수야” “만수 형님” “만수 바보”
 
이만수 전 감독은 지난 2005년 화이트삭스 불펜 포수코치로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당시 백악관에 초청받아 상원의원이던 오바마와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이만수 제공
  그는 대구상고 시절 5차례나 전국대회 정상에 올랐고 고3 때인 1977년 청룡기대회에서는 최우수선수, 타격·타점·최다안타상 등 개인상을 독점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최고의 타격상이던 ‘이영민 타격상’까지 거머쥐었다.
 
  프로에 들어가서는 더욱 빛을 발했다. 1983년부터 내리 3년간 홈런왕에 올랐고 83년부터 5년 연속 포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 기록과 11년 연속 올스타의 주인공이 되었다.
 
  1999년 한화 장종훈에 의해 통산 최다 홈런 기록(252개)이 깨지기는 했지만 1986년 첫 100호 홈런, 91년 첫 200호 홈런의 주인공이었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노력으로 신화를 썼다. 경기가 끝나면 새벽 2시까지 하루 1000번 이상 배트를 휘두르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1997년 39세 나이로 자의 반 타의 반 은퇴한 그는 미국에서 다시 지도자로서 꽃을 피웠다.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싱글 A팀인 킹스턴 인디언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고 이후 시카고 화이트삭스 트리플 A팀인 샬럿 나이츠를 거쳐 2000년 1월부터 MLB 시카고 화이트삭스 불펜 포수코치로 활약했다. 2005년에는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경험했다.
 
  1980·90년대에 팬들은 그를 동네 친구처럼 “만수야” “만수 형님”이라 불렀다. 원정 경기에서 그가 타석에 들어서면 야유와 존경의 뜻으로 “만수 바보”를 외쳤다. 특히 라이벌 해태 타이거즈의 연고지인 광주 무등구장에서 유독 심했다. 그럴수록 그가 친 공은 곧잘 하늘을 갈랐다.
 
  “해태와의 경기는 그야말로 전쟁이야. 타석에 들어서면 ‘만수 바보, 만수 바보’라고 관중이 외쳤어요. 은퇴한 후에 10년간 미국에 있었잖아. 그게 그렇게 그립더라고요.
 
  SK 코치로 귀국해 광주구장에 처음 갔더니 다시 ‘만수 바보’를 외쳐요. 선수 때와 느낌이 달랐어요 아! 팬들이 나를 그리워했구나…. 나중에 제가 책을 쓰면 ‘만수 바보’라고 쓰려고 해요. 근데 ‘바보’가 들어간 서명(書名)이 제법 있더라고….”
 
  ― 대구 팬이라면 포수 마스크를 벗어 들고 ‘삼성 파이팅’을 외치던 모습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원래 목소리가 허스키하지 않았어요. 중학교에 들어와 야구를 시작할 때 소리 지르는 것부터 배웠어요. 벽 보고 종일 질렀어요. 소리를 많이 지르다 보니 목에서 피가 나더라고요. 국악 하는 사람들의 목에서 피를 몇 번 쏟아야 한다는 말이 새삼 이해가 되더라고요.
 
  중2가 되니까 볼 줍는 걸 시켜. 그땐 공 3~4개로 연습하던 시절이었어요. 야외로 공이 날아가면 그 공을 찾아야 연습할 수 있었죠. 볼을 잃어버린다? 집에 못 가죠.”
 
 
  삼성 원년 멤버들의 近況
 
1990년 2월 2일 삼성라이온즈의 극기훈련 모습이다. 이만수 선수 옆에 롯데에서 트레이드 되어온 최동원 선수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조선일보DB
  ― 프로 시절, 슬럼프를 겪었을 텐데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면 불면증에 시달렸어요. 때로 잠을 못 자 괴로웠죠. 정신과를 찾아갔어요. 그 시절만 돼도 정신과라고 하면 쌍안경으로 보던 시절이잖아요. 요즘은 스포츠 선수의 멘탈 관리를 중시하지만 그 시절엔 그런 개념조차 없었어요.
 
  MLB는 선수마다 멘탈 트레이너가 다 있어요. 그런데 비싸요, 비싸. 박찬호 선수도 현역 시절, 경기가 안 풀리면 멘탈 선생을 찾아가고 그랬잖아요.”
 
  ― 요즘 한국 구단은 어떤가요.
 
  “구단마다 멘탈 트레이너가 다 있어요. 야구는 점과 점을 맞추는 멘탈 게임이니까. 경기 전 집안에 무슨 일이 있으면 그날은 무조건 경기를 망칩니다.
 
  투수? 지는 날이야. 타자? 무안타야. 에러 하고…. 그만큼 예민한 스포츠입니다.”
 
  ― 야구팬들은 최동원·선동열 선수가 MLB에서도 통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만수 선수는 어땠을까요.
 
  “건방지다고 할지 몰라도, 솔직히 (MLB 가서도) 잘했을 것 같아요. 당시 뛰어난 투수는 많았지만 포수는 많지 않았어요. 요즘 시대라면 갔을 겁니다. 은퇴 후 미국에 가서 보니 더 그래요.”
 
  현재 그는 삼성 은퇴 선수 모임인 삼성 OB회 회장이다.
 
  ― 삼성 원년 멤버들 근황이 궁금합니다.
 
  “외야수 허규옥은 대구 경일대에서 야구 감독을 하다가 투수 권영호에게 지휘봉을 넘겨주었고, 내야수 김한근은 삼성·OB 타격코치와 모교인 대구상고와 한양대에서 오래 지도자 생활을 했지요.
 
  1루수 함학수는 프로(삼성·빙그레·태평양·현대·SK)와 고교(세광고·성남고·강릉고)에서 야구 감독으로 활약하다 최근 김포에서 실버야구단을 창단했고, 외야수 장태수는 삼성과 KIA의 1군 타격·수석코치, 2군 감독으로 오래 현장을 누볐어요.
 
  국가대표 2루수로 활약한 배대웅은 삼성·롯데·한화에서 1군 수석코치, 2군 감독을 하다 지금은 대구에서 사업을 하고 있어요. 유격수 천보성은 삼성에서 은퇴한 후 LG트윈스 감독과 한양대 감독을, 서정환 역시 해태 감독과 삼성 감독을 역임했어요. 3루수와 유격수로 활약하던 오대석은 포철고와 대구상원고 감독으로 있다가 지금은 경상중 타격코치로 있고, 외야수 정구왕은 인천에서 정치 쪽 일을 했는데 지금은 소식을 알 수 없어요. 외야수 박찬은 은퇴 후 미국 하와이 쪽에서 산다고 들었고, 역시 외야수 정현발은 태평양·해태·롯데의 타격코치로 있다가 인천 재능대 야구 감독으로 있었어요.
 
  1970년대 ‘명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황규봉은 안타깝게 사망했고 이선희는 이틀 전에 전화통화를 했는데 건강이 조금 안 좋으세요.”
 
 
  한국 프로야구 개막전의 추억
 
  이선희 하면 ‘불운의 상징’으로 떠오른다. 1982년 3월 27일, 삼성과 MBC청룡 간의 한국 프로야구 개막전을 잊을 수 없다. 삼성은 1회초에 한국 프로야구 통산 1호 안타와 1호 타점을 기록한 4번 타자 이만수가 5회초 역사적인 1호 홈런까지 터뜨려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승부는 6대2.
 
  그러나 다 이긴 경기를 7회말 MBC 유승안이 3점 홈런을 때려 기어코 7대7이 되어버렸다. 경기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 이선희 투수가 등판했다. 그는 실업 야구에서 노히트노런을 두 번이나 기록한 국가대표 투수였다. 한국 야구가 사상 최초로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1977년 니카라과 대륙간컵에서 다승왕, 구원왕, 대회 MVP를 차지했을 정도다.
 
  이선희는 8회와 9회를 무실점으로 막았지만 10회말 이종도 선수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말았다. 연장 끝내기 만루홈런은 프로야구 40년사에 아직도 회자되는 명장면이다. 이선희나 삼성 팬으로서는 떠올리기 싫지만. 이만수 감독의 말이다.
 
  “이종도 선배의 만루홈런으로 한국 프로야구가 활성화됐다고 봅니다. 누구도 삼성이 MBC에 진다곤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날 삼성이 이겼더라면 지금처럼 야구가 국민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을 겁니다.
 
  끝내기 역전 만루홈런 바람에 고교야구 인기가 고스란히 프로야구로 이어질 수 있었어요. 그 1등 공신이 이종도 선배고, 이선희 선배입니다.”
 
  ― 삼성 원년 멤버 중에 포수였던 박정환·손상대·손상득도 떠오르네요. 이만수에게 가려서….
 
  “미안하지요. 박정환은 삼성 2군과 잔류군에서 배터리 코치로 있었고 포철공고 야구 감독도 했어요. 손상대는 삼성·한화·OB·롯데에서 배터리 코치와 2군 감독을 역임했고, 손상득 역시 삼성·한화·LG·SK에서 1군과 2군을 오가며 지도자 생활을 하다 신일고 야구 감독을 지냈습니다. 지금은 다들 은퇴 후 재능 기부하고 있습니다.”
 
  ― 원년 감독이던 서영무 감독 하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손이 크셔서 귀때기(따귀)를 맞으면 나가떨어졌어. 하하하.”
 
  ― 프로선수를 왜 때립니까.
 
  “옛날에는 많이 맞았어요.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시절이었어요.
 
  하루에 빳다(방망이) 5방씩 안 맞으면 불안해. 다음 날 얼마나 더 맞을까 하고. 매일매일 맞았어요.”
 
  프로에서 맞았다는 말인지 학창 시절 맞았다는 말인지 헷갈렸지만 캐묻지 않았다.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정당화되던 시절의 안타까운 회고였다.
 
 
  故 장효조·최동원 10주기
 
타격의 달인이었던 삼성 장효조 선수. 오른쪽 사진은 이만수, 장효조, 김성래 선수. 사진=삼성라이온즈
  지난 9월 14일은 이만수 감독의 친구인 롯데자이언츠 투수 최동원이 세상을 떠난 지 10주기가 되는 날이었고, 9월 7일은 무척이나 가까웠던 ‘타격의 달인’ 삼성 장효조의 10주기였다. 공교롭게도 한국 프로야구를 빛냈던 두 전설은 일주일 간격으로 세상과 그라운드와 영영 이별하고 말았다.
 
  “효조 선배는 대구중, 대구상고, 한양대, 삼성에서 함께 뛰면서 친형제처럼 지낸 사이였어요. 대부분 타자가 도끼 내려찍듯 다운스윙을 할 때 그분은 기술적인 레벨 스윙을 보여줬어요. 타구도 부채꼴처럼 자유롭게 좌우로 보낼 정도로 타격이 뛰어났죠.
 
  친구 동원의 마구 때문에 손해를 많이 봤어요.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제 통산 타율이 3할(통산 0.296)은 훨씬 넘었을 겁니다. 선수 말년에 삼성에서 호흡을 맞추던 시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그러니까 1988년 11월 23일 삼성은 투수 김시진과 전용권, 내야수 오대석, 외야수 허규옥과 롯데 투수 최동원과 오명록, 포수 김성현을 서로 주고받는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그러고 그해 12월 20일 또다시 삼성의 간판타자 장효조와 원년 톱타자 장태수를, 롯데의 강타자 김용철과 불펜투수 이문한과 맞트레이드시켰다.
 
  팬들은 경악했고 최동원·장효조 역시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선수들 역시 경기력이 급격히 저하됐다. 1989년, 최동원은 단 1승 투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장효조 역시 생애 처음으로 2할 타자로 주저앉았다.
 
  ― 삼성에서 최동원의 공을 받아보니 어떻든가요.
 
  “그땐 이미 어깨가 다 나간 상태였어요. 볼다운 볼이 안 와. 삼성에서 잘할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면 최전성기는 고교와 대학, 프로 1~2년 차 때였어요. 이후 쭉 내리막길이었죠.”
 
  ― 장효조 선수와 추억이 많지요.
 
  “제 롤모델이었어요. 중학교 때 새벽에 일어나 효조 선배의 집을 무작정 찾아가 야구 좀 가르쳐달라고 떼를 썼어요. 겉보기엔 강해 보이지만 마음은 아주 여리고, 누구보다 따뜻하고 정이 많았죠.”
 
  문득 이 감독은 기자에게 “두 사람의 공통점이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 ‘악바리’가 아닐까요.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너무 화려하게 살았는데 (말년에) 이게(야구가) 안 되니까…. 저도 (현역 때) 스트레스가 엄청 많았는데 지금은 다 내려놨어요.”
 
 
  한국 야구가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SK와이번스 감독 시절의 이만수. 경기가 잘 풀리면 리액션이 큰 ‘헐크 세리머니’를 보여주었다. 사진=조선일보DB
  지난 2020 도쿄올림픽 때 야구 국가대표팀은 노메달에 그쳤다. 야구 팬들은 물론이고 국민은 큰 실망에 빠졌다. 한국 야구의 침체기가 도래한 것일까. 왜 일본의 오타니 쇼헤이(美 LA에인절스)처럼 160km/h를 던지는 투수는 없을까. 이만수·이승엽 같은 대형 타자는 왜 드물까.
 
  “(지난 7년간) 라오스에만 머물렀던 게 아니라 전국 일선 학교를 찾아가 재능 기부를 하며 느낀 점이 있어요. 이러다간 프로야구 발전이 더디겠구나 하는 것이었어요. 과도한 학부모의 기대, 성적 제일주의 지도자, 나무 배트 사용, 고교 지명타자 제도 등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죠.
 
  나무 배트 이야기를 하자면, 아마추어 야구를 살리려면 알루미늄 배트를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힘이 없는 학생들이 나무 배트로 스윙하니까, 투수 볼이 안 빨라도 되는 거야. 변화구만 던져도 되고. 그러니 강속구 투수가 안 나오는 겁니다.”
 
  ― 과거엔 고교야구도 알루미늄 배트를 썼어요.
 
  “지금 일본이나 미국의 고교야구는 알루미늄 배트를 씁니다. 엘리트 학교는 다 알루미늄을 써요. 나무 배트는 주로 야구클럽에서 쓰는데, 클럽은 프로 진출을 위해 돈을 받고 레슨하는 곳입니다. 대부분의 야구 국제대회도 알루미늄 배트를 쓰죠.”
 
  ― 지명타자 제도가 왜 야구 발전을 막습니까.
 
  “지명타자 제도는 학생들을 대학에 진학시키려 만든 제도입니다. 한 명이라도 더 타석에 세워야 그 기록으로 진학할 수 있거든. 지명타자를 쓰니까 투수들이 투수 아니면 할 게 없는 거야.”
 
  그는 “한국 야구가 다시 도약하려면 ‘이기기 위한 야구’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변화 없이 160km/h 이상을 던지는 투수도, 대형 타자도 나오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공이 빠른 투수는 제구가 아무래도 불안해요. 그래서 이기기 위해 속도를 줄이고 제구 위주로 던지는 거야. 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힘 있게 치기보다 잘 맞추는 콘택트(contact) 위주로 칩니다. 그러니 배트에 힘을 싣지 못해 안타는 쳐도 홈런은 못 칩니다.
 
  선수들에게 개성을 강조해야 하는데 개성이 없다는 점도 야구 교육의 문제입니다. 한국 투수들은 폼이 다 똑같지만, 미국 투수들은 다릅니다. 특이한 폼이 많아요. 최동원 투수 공이 왜 남달랐을까? 꽈배기처럼 몸을 꼬아서 던졌거든. 아무도 못 쳤어요.
 
  현역 시절 저는 순종파니까 감독이나 코치가 타격 수정을 지시하면 지시한 대로 따랐어요. 실험대상자야. 이렇게 치라고 하면 이렇게 하고…. 1년에 10번은 수정하지만 막상 시즌에 들어가면 내 방식대로 돌아가요. 사서 고생했죠….”
 
  ― 국제대회에서 우리 타자들은 특정 투수에게 모조리 맥을 못추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똑같은 투구 폼에만 익숙한 교육을 받았거든요. 국제대회에서 이상한 폼으로 던지는 투수가 나오면 1번부터 9번까지 죽을 쑵니다. 미국은 개성을 강조하니까 특정 투수에게 타자 한두 명은 못 쳐도 다른 타자는 그 투수를 극복할 수 있거든요.”
 
 
  ‘Never ever give up’
 
  3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목이 조금 쉬었다. 2017년부터 이만수 포수상과 홈런상을 운영하고 있다. 사재를 털고, 협찬(엔젤 스포츠)을 받아 겨우 4차례 시상했을 뿐인데 최고 권위를 갖게 됐다. 명실공히 최고의 포수가 제정했기 때문이리라.
 
  헤어질 무렵, 화이트삭스 시절의 사진에다 자필 사인을 해주었는데 짧은 영문장이 적혀 있었다.
 
  ‘Never ever give up’
 
  국내 야구 현장을 떠난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절대 포기를 모르는 ‘전설’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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