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프 선수와 경기하면서 그 시간과 노력이 어땠을지가 보여… 저보다 더 열심히 했으니까 제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축하한 것”
⊙ 씨름 선수 출신 아버지, 업어치기 훈련 삼아 엘리베이터 없는 상가나 오래 걸어야 하는 건물에 LPG 배달 시켜
⊙ “武道를 통해 배운 힘을 사회나 타인에게 올바르게 사용한다”
⊙ “올림픽 메달은 최선을 다하면 하늘이 감동해서 내려주는 은총”
⊙ 폰세카 선수와의 준결승전, “손을 공격했다면 쉽게 이겼겠지만, 그 상황을 이용하고도 금메달을 못 따면 그것만큼 최악의 상황도 없어”
⊙ 벌레를 무서워하고, 취미가 요리인 ‘유도계의 마라도나’
⊙ 씨름 선수 출신 아버지, 업어치기 훈련 삼아 엘리베이터 없는 상가나 오래 걸어야 하는 건물에 LPG 배달 시켜
⊙ “武道를 통해 배운 힘을 사회나 타인에게 올바르게 사용한다”
⊙ “올림픽 메달은 최선을 다하면 하늘이 감동해서 내려주는 은총”
⊙ 폰세카 선수와의 준결승전, “손을 공격했다면 쉽게 이겼겠지만, 그 상황을 이용하고도 금메달을 못 따면 그것만큼 최악의 상황도 없어”
⊙ 벌레를 무서워하고, 취미가 요리인 ‘유도계의 마라도나’
- 사진=조준우
사람들은 왜 스포츠에 열광하는가. 많은 이가 소망하지만,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때때로 눈앞에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2020 도쿄올림픽 남자 유도 100kg 이하급 결승. 전 세계에서 운집한 절정(絶頂) 무림고수(武林高手)들을 모두 물리치고, 최후까지 두 전사(戰士)가 살아남았다. 세계 최고를 가리는 결승 비무(比武)는 쉽게 결판나지 않았다. 연장전까지 9분35초 동안 이어진 사투 끝에, 대한건아 조구함(29)은 졌다. 평생의 꿈을 눈 바로 앞에서 놓친 청년은, 잠시 매트에 누운 채로 천장을 응시했다. 그러고 벌떡 일어나 오른손으로 승자인 미·일 혼혈 선수 에런 울프(25)의 손을 들어 올렸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왼손 검지로는 승자를 가리키며 환호를 유도했다. 진정한 무도인(武道人)만이 보일 수 있는 축하 인사였다.
세계가 열광했다. 위대한 인간애(人間愛)를 보았기 때문이다. 신문은 ‘이것이 올림픽이다’라고 제목을 뽑았다. 일본 네티즌은 “아쉬웠을 텐데도 울프의 손을 들어준 한국 조 선수의 태도에 감동했다. 이것이 스포츠맨십” “이것이야말로 무도가라고 생각한다. 울프 선수, 조 선수 고마워요” “울프 선수가 강한 것도 감동적이지만, 시합 후 한국 선수가 손을 들어준 것을 보고 ‘고맙습니다!’ 하고 눈물 흘릴 뻔했다. 당신도 강했습니다”라고 댓글을 달았다. 그래서 만나고 싶었다, 이 품격(品格) 넘치는 훌륭한 젊은 무도가(武道家)를. 셔츠 위로 보이는 단단한 근육은 올림픽 때와 같았고, 경기 때와는 달리 안경을 쓰고 나온 점이 특이했다.
“강한 선수와 경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 ‘조구함’의 한자는 어떻게 씁니까.
“나라 조(趙)에 ‘나라를 구하라’는 뜻의 한글 이름 ‘구함’입니다. 어렸을 때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지어주셨어요.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여동생의 이름도 한글 이름입니다.”
― 승자의 손을 들어준 건 미리 생각하고 한 행동인가요.
“아뇨. 순간적으로 한 행동입니다. 경기 끝나고, 울프 선수가 부러웠어요.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건 제 평생의 목표이기도 하니까요. 안다리후리기로 한판패를 당하고 누워 있다가 일어났을 때, 울프 선수가 정말 기뻐하는 걸 봤습니다. 제가 금메달을 땄으면 울프 선수보다 더 좋아했겠죠. 꿈에 그리던 자리에 주인공만 바뀌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축하해주고 싶었어요. 울프 선수는 다른 선수들의 축하를 받을 자격이 있는 선수입니다. 제가 이겼다면, 울프 선수도 제가 했던 행동 못지않게 저를 축하해줬을 겁니다.”
― 왜 그렇게, 갑자기 축하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겁니까.
“결승전 하는 내내 상대에 대한 존경심이 들었어요. 울프 선수가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는 것을 느꼈거든요. 제가 상대를 넘길 수 있는 찬스가 여러 번 있었고, 초중반 흐름도 저한테 유리했는데 울프 선수가 잘 견디고 제 기술을 다 피했습니다. 저를 참 많이 연구했구나, 그 시간과 노력이 어땠을지가 보였습니다. 저보다 더 열심히 했으니까 제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축하한 겁니다. 선수로서, 강한 선수와 경기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울프 선수는 지금까지 만나본 선수 중에 제일 강했습니다.”
“경쟁자이지만 동업자이기도”
올림픽 출전 선수의 수준이면 감(感)이 빠르다. 상대를 한 번 잡으면, 상대에게 한 번 잡히면 오늘 경기는 쉽겠다, 어렵겠다 바로 계산이 끝난다. 상대의 힘, 컨디션, 부상 유무 등을 온몸으로 스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얼마만큼 늘었는지, 얼마나 열심히 훈련했는지 바로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울프 선수와 저는 경쟁자이지만 동업자이기도 하잖아요. 경기가 끝나고도 표정을 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가 많이 기쁨을 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팔을 들어주자 그때야 눈물을 보이더군요. 악수할 때는 더 많이 울고.”
조구함은 울프보다 네 살이 많다.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았지만, 시상식 대기실에서도 울프 선수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조구함은 승자(勝者)의 등을 계속 두드려주며 ‘울지 말라’고 달랬다고 한다.
― 울프 선수는 뭐라고 하던가요.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선수라서…. 국내에서 활동하는 재일교포(在日僑胞) 선수 중에 울프와 동문인 선수가 있거든요. 그 선수를 통해 ‘강했다. 다음 올림픽에서 또 만나자’라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결승전 다음 날부터 세상이 바뀌었다. 선수촌 자원봉사자나 편의점 직원들이 수줍게 다가와 “사진 좀 찍을 수 있느냐, 꼭 찍고 싶다”고 했다. 공항에서 만난 스튜어디스도 같은 부탁을 했다.
급상승한 인기는 일본에서만 벌어진 현상이 아니었다. 귀국 후 들른 식당에서 옆자리 나이 지긋한 손님들이 “눈물 나더라”며 나누는 얘기가 들려왔다. ‘조구함 스토리’였다. 택시기사가 “손님, 몸 좋으시네. 혹시 운동하는 분이신가? 올림픽 보셨어요? 그 손 들어준 선수 있잖아요”라고 하기에 “제가 그 선수입니다”라고 답했더니 바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길을 걸으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분도 생겼다.
여러 방송국에서도 연락이 왔다. 한 달 남짓한 기간에 〈맛있는 녀석들〉 〈언니가 쏜다〉 〈뽕숭아학당〉 〈노는 브로〉 〈유키즈온더블록〉 등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연달아 출연했다. 자신의 방송 출연으로 유도 인구가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흔쾌히 섭외에 응했다. 훈련에 소홀한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9월 7일 무릎 수술 전까지만 한시적으로 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씨름 선수 출신 아버지
유도를 시작한 건 반은 우연이고 반은 필연이다. 4학년 때 전학 간 춘천 우석초등학교에 유도부가 있었다. 복도에서 뛰어다니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는지, 담임 선생님이 유도장으로 조구함을 데리고 갔다. 유도부 감독은 조구함의 다부진 체격과 호기심 가득한 눈빛에 반했고, 조구함은 매트 위에서 서로 뒤엉키고 뒹굴고 뛰어다니는 유도가 좋았다. 뭔지는 모르지만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바로 유도에 입문한 건 아니다. 아버지의 반대 때문이다. 조구함의 부친 조병화(趙炳和·51)는 고등학교 때까지 씨름 선수였다. 강원도 대표로 전국체전에 출전한 적도 있다. 어머니 이남경(李南京·48)도 강원도 시도대항 경기에 중장거리 선수로 활약한 육상 선수였다. 운동선수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잘 알기에 아버지는 아들의 유도 입문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축구, 야구, 씨름 등 여러 종목의 스카우트 제의를 이미 여러 번 뿌리친 뒤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도부 안효광 교사의 집념은 강도(强度)가 달랐다. 한 달 이상을 매일 찾아오는 끈질긴 구애에 ‘아들의 미래를 맡기자’는 믿음이 생겼다. 시기도 절묘했다. 설득 방문이 이어지는 한 달 동안 조구함은 갈등하지 않았다. 2002년 월드컵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석초등학교 4학년 2학기가 그래서 유도 선수 조구함의 출발점이다. 올림픽 결승전 다음 날 우석초 정문에 ‘자랑스러운 우석인 조구함’ 플래카드가 걸린 이유다.
아버지는 ‘유도 선수 조구함’에게 본인의 비법(秘法)을 전수했다. 씨름을 같이하며 중심이동, 넘기고 넘어갈 때의 느낌을 체득(體得)게 했고, 아침에 깨워 공동묘지 데려가기, 춘천역 광장 등교하는 여학생들 앞에서 소리 지르기 등의 담력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하이라이트는 ‘일과 훈련의 절묘한 병행’이다. LPG 가스통 배달 일을 도우러 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일부러 엘리베이터 없는 상가나 오래 걸어야 하는 건물을 배정했다. 체력을 기르기도 좋고, 가스통을 운반하는 동작 자체가 유도의 업어치기 동작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당한다는 조구함의 특기 업어치기는 어쩌면 이때 가스통 배달에서 잉태된 것인지도 모른다.
손흥민과 후평中 동기
중학교는 후평중학교로 진학했다. 춘천에서 유일하게 유도부가 있는 학교다. 2006년 중학교 2학년 2학기에 청주 대성중학교로 전학을 했다. 스승 안효광 교사가 그곳으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유도 선수로서는 후회가 없지만, 교우관계로는 아쉬움이 남아 있다. ‘마음속 영웅’과 친구가 될 수 있었는데, 그 기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후평중에는 축구부도 있었다. 같은 학교 같은 학년에 생일도 엇비슷했던 에이스 선수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춘천의 아들 손흥민(孫興民)이다.
“손흥민 선수는 그때부터 공을 참 잘 찼습니다. SNS에 손흥민 선수가 휴가 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 있어요. 사진 속에는 저랑 겹쳐 있는 친구도 많습니다. 그 친구들이 ‘그때 걔가 흥민이야’라고 알려줘서 저는 진작부터 손흥민 선수를 알고 있었죠.”
조구함은 손흥민을 알지만, 손흥민은 아직 조구함을 모른다. 친구들을 통해 연락할 수도 있지만, 꾹 참는 중이다. 사실은 손흥민 선수 바로 옆까지 다가선 적도 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마치고 귀국하는 인천공항, 수하물 찾는 곳에서다. 은메달리스트 조구함은 말을 붙이려다가 막판에 돌아섰다. ‘월드 스타에게 감히’라는 생각도 들었고, 올림픽 금메달을 딴 후 친구들을 통해 좀 더 멋지게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인터뷰 기사를 보고 손흥민 선수가 먼저 연락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신나는 두 스타의 만남이다.
고등학교는 대성중고와 같은 재단인 청주 청석고로 진학했다. 1981년 한국 최초로 유도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박종학(朴鍾學·63·현 청주대 교수), 1996 애틀랜타올림픽 금 전기영(全己盈·48·현 용인대 교수), 2000 시드니올림픽 은 조인철(趙麟徹·45·현 용인대 교수) 등이 청석고 선배다. 안효광 교사는 고등학교에서도 조구함을 지도했다.
대학 시절 100kg 이하급으로 체급 내려
대학은 ‘한국 유도의 심장’ 용인대(전 유도대)로 진학했다. 헤비급은 선수층이 두껍지 않은데, 용인대에는 같은 체급에 선수가 여럿이라 마음껏 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4 LA올림픽 은 조용철(趙容澈·60)에게 지도받고 싶은 마음도 컸다. 체급도 같았고, 신체 구조, 경기 스타일이 흡사했던 롤 모델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 대학 1학년 때인 2011 도쿄 그랜드슬램 은메달, 2012 뒤셀도르프 그랑프리 동메달, 2013 파리 그랜드슬램 동메달 이후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 100kg 이상급에선 세계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최고 수준의 선수들은 150kg 전후 체중으로 경기에 나서는데 조구함은 123kg 이상으로는 증량(增量)이 불가능했다. 그 이상이면 운동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탓이었다.
“제가 헤비급 선수치고는 단신이고, 신체적 한계를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013 제27회 카잔 하계유니버시아드 금메달을 마지막으로 체급을 100kg 이상급에서 100kg 이하급으로 내렸죠.”
투기(鬪技) 종목에서 체급을 바꾼다는 건 이민(移民) 가는 것만큼 힘든 결정이다. 더구나 위 체급이 아니라 아래 체급으로 내려가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반대했고, 딱 한 사람 조인철 교수만 그의 결정을 지지했다. 영양사에게 식단관리 조언을 구하고, 체육과학연구원에서 심리상담을 받는 등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운 뒤 9월부터 5주 동안 23kg을 감량해 11월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갔다.
이듬해인 2014년 12월 도쿄 그랜드슬램 금메달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이 대회는 한 체급에 일본 선수가 네명이나 출전한다. 모두 실력 차이가 거의 없는 고수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다른 국제 대회보다 경쟁 강도가 세다. 도쿄 대회 우승은 조구함의 유도가 세계 정상급으로 올라섰다는 신호였다. 체급 적응을 무사히 마쳤다는 확신이 생기자 2016년 리우올림픽이 시야에 들어왔다.
“금메달을 꼭 딴다, 금메달이 내 인생의 전부다, 금메달 못 따면 인생 망한다는 심정으로 무섭게 훈련했습니다. 대회 3개월 전 십자인대가 파열되었는데, 수술도 대회 뒤로 미루고 미련할 정도로 운동만 했죠.”
결과는 16강 탈락.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동메달 때는 ‘실력과 경험이 부족했다. 다음엔 잘하자’라며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올림픽 실패는 어떤 말로도 위로가 불가능했다.
“말할 수 없이 허탈했어요. 심란했고, 주변에서 다들 손가락질하는 것 같고, 중압감 때문에 매일 무서워하고 힘들어하던 저 자신에게 화도 많이 났습니다.”
재활치료를 하면서 인생 목표 바뀌어
그해 8월 15일 귀국 후 집에도 가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서울 모 호텔에 짐을 풀고 바깥출입도 삼간 보름 동안의 하안거(夏安居)였다. 결론은 빨리 수술부터 하고 다음 올림픽에 새롭게 도전하자는 것. 그래야 시련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9월 1일 수술을 받았습니다. 리우에 갔을 때 경기 중 통증은 없었지만, 심리적으로 불안했거든요. 올림픽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야 하니까 보이는 문제부터 해결하고 얼른 새출발을 하고 싶었습니다.”
1년간의 재활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저강도 동작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야 했다. 운동선수로서 이런 동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 수치스러웠고, 동료들이 국제 대회에 나가는 것도 초조하게 만들었다. 마음을 다스려야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
“재활 기간은 제가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귀한 시간입니다. 그 전까지는 올림픽 금메달이 생의 목표였는데, ‘존경받는 유도인으로 행복한 삶을 살자’는 생각을 처음 했습니다. 선수로서의 삶만 생각하다가 인생의 궁극적 목표를 세운 거죠. 무도인의 자세를 확립한 겁니다. ‘무도를 통해 배운 힘을 사회나 타인에게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이죠.”
폰세카 선수와의 준결승
서두에 올림픽 결승전 얘기를 했지만, 세계가 조구함에게 감동한 건 그 전 경기부터다. 감동의 울림이 유난히 컸던 배경이다. 세계 랭킹 2위인 포르투갈의 호르헤 폰세카와 맞선 준결승전. 경기 시작 후 1분이 지날 무렵, 폰세카가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물러났다. 왼손에 쥐가 났기 때문이다. 폰세카는 이리저리 손을 움직이며 허리를 숙이고 고통을 참았다. 조구함은 경기 도중임에도 상대에게 충분한 회복 시간을 주며 기다렸다. 기다리지 않고 경기를 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경기 재개 후, 폰세카는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지르고 손을 마구 때려보기도 했다. 그래도 손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조구함은 폰세카의 왼손을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옷깃을 잡는 공격만으로 경기를 이어갔다. 당시의 상황을 8월1일자 《국민일보》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분 남짓 남았는데 경기는 여전히 팽팽하게 진행됐다. 이에 해설위원은 ‘자기 싸움을 더… 손에 공방을 좀 더 치열하게 해줬으면 좋겠다’며 ‘물론 (폰세카 선수의 상태도) 안타깝지만, 조구함 선수 어쨌든 이겨야 하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은 두고 집중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구함은 경기 종료 16초를 남기고 업어치기 절반을 따낸 뒤 남은 시간을 버텨 승부를 결정지었다. 경기가 종료되자 두 선수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폰세카는 자신의 품에서 눈물을 터뜨린 조구함을 토닥토닥하며 다독여줬다. 각자 최선을 다해 경기를 펼친 후 격려를 담아 따뜻한 포옹을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폰세카도 같은 선수로서 배려하는 조구함의 마음을 느꼈을 것’이라며 ‘진정한 스포츠맨십이다’라고 감동을 표했다.〉
5년 전 ‘수단·방법을 안 가리고 오로지 금메달을 따야 한다’고 생각하던 선수는 어느새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무도인으로 진화해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가 보여준 품격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국격(國格)이 상승하는 기분이었다.
“유도는 내적 부드러움도 추구”
― 폰세카 선수 손에 쥐가 나는 걸 알았죠.
“그럼요. 쥐가 나는 걸 봤고 저를 잡았을 때 다시 한 번 확실하게 확인했습니다. 평소 악력의 절반도 되지 않았으니까요.”
― 그런데 왜 손을 공격하지 않았나요.
“손을 공격했다면 쉽게 이겼겠죠. 하지만 그렇게 이기면 떳떳한 승리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 상황을 이용하고도 금메달을 못 따면 그것만큼 최악의 상황도 없습니다. 저는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준다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하면 하늘이 감동해서 내려주는 은총(恩寵)이죠. 이번엔 하늘이 저를 택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2017년 도쿄 그랜드슬램 우승으로 리우의 아픔도 씻고 자신감을 회복했고, 이번 대회 준비도 완벽하게 했어요. 전날까지 무릎이 쑤셨는데, 경기 당일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지고 몸이 가벼웠습니다. 대진운도 좋았죠. 1회전이 부전승이었고, 첫 경기도 세계선수권 은메달 선수와 붙었는데 계획보다 잘 풀렸습니다.”
― 만약에 폰세카 선수에게 그렇게 페어플레이를 하다 졌다면요? 한(恨)이 남지는 않았을까요.
“존경받고 행복한 유도인이 되려면 떳떳하지 못한 행동은 없어야죠. 제 손에 쥐가 났더라도 다른 선수들이 기다려줬을 겁니다. 유도는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무도인데, 신체적 부드러움뿐 아니라 내적인 부드러움도 추구합니다. 상대를 너그럽게 대하고 배려하며 존중하는 것이죠. 그래서 졌더라도 후회는 없었을 겁니다. 마음은 이렇게 먹었지만, 그래도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긍정적인 생각을 계속했어요.”
‘조구함 생선회 징크스’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있다. 불안감에 휘둘리지 않은 일이다. 거의 모든 유도인이 아는 ‘조구함 생선회 징크스’가 있다.
“중3 때부터 전국대회를 우승하기 시작했는데, 대회 장소가 속초였어요. 경기 전날 부모님이 회를 사주셨죠. 다음 해 대회 장소가 제주도였는데 그때도 회를 먹고 우승했습니다. 고2 때 대회 장소는 익산이었는데, 그때부터는 경기 전날 일부러 횟집을 찾아갔습니다.”
징크스는 힘이 셌다. 파리에선 구글링으로 횟집을 검색하고, 몽골에선 시내 중심부의 한국 사장님이 운영하는 단 한 군데의 횟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불안했기 때문이다.
“2020년까지 횟집 루틴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다 ‘이게 뭐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꼭 경기 전날이어야 하고, 외국에선 횟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회를 먹는 건 연습의 일부가 아니잖아요? 준비를 철저히 하면, 징크스에 휘둘릴 일도 없는 겁니다. 왜 내가 스스로 괴롭히고 있는지 의문이 생겼어요. 회를 먹고 불안감을 진정시키기보다는 수면, 음식, 휴식, 마음가짐, 훈련 태도 등 준비를 더 열심히 해서 자신감을 키우자고 생각했습니다. 운동이 잘 안 되는 날 화가 나는 것도 제가 만들어내는 감정이니까, 그것도 제가 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잖아요. 화를 내지 말고 준비를 철저히 하자, 그러면 화낼 일도 없다,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는 그래서 경기 전날 회를 먹지 않았다. 대신 소리를 지르며 긴장을 풀었다.
“저는 활어회를 좋아하는데, 일본에는 숙성 회가 대세고…. 회를 먹었다면 메달을 못 땄을 겁니다. 또 불안감에 흔들렸다는 뜻이니까요.”
근육질 거구(巨軀) 청년의 말투는 시종일관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이 남자에게도 무서운 것이 있을까?
“징그러운 걸 못 봐요. 벌레가 무섭습니다. 미끼 꿰기가 무서워서 낚시도 루어낚시를 했으니까요.”
벌레만 아니라 벌레 비슷한 물건도 기피 대상이다. 양쪽 시력이 0.1인데도, 소프트렌즈의 이물감이 싫어 쓰지 않는다.
“렌즈는 2018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안경점에 간 날, 렌즈를 못 만져서 착용하는 데 두 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저한테는 꼭 벌레를 만지는 느낌이었죠. 안경사분들이 다 웃으시고 저는 무서워하면서 낑낑대고…. 경기력 향상에 확실한 도움이 되니까 꾹 참고 성공할 때까지 했어요. 렌즈를 끼고 나선 첫 경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신세계였어요. 상대의 도복과 표정이 다 잘 보였으니까요.”
대회 때마다 여러 벌의 렌즈를 준비한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경기 중 렌즈가 찢어지거나 빠지면 나머지 한쪽도 빼야 한다.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다. 딱 한 번 그런 사고가 있었는데 경기에서 패했다. 이겼다면 다음 경기는 새 렌즈를 착용하고 나섰을 터이다.
유도 외에 취미가 필요해서 시작한 루어낚시는 무릎 수술 후 그만두었다. 가파른 지형에서 낚싯대를 던져야 하는데, 선수 생활에 지장이 있을까 봐 내린 결정이다.
낚시 이전의 취미는 축구였다. 정기적으로 공을 찼고, 별명이 ‘유도계의 마라도나’였다. 유도 선수 친선 축구경기에서 하프라인부터 단독 드리블로 득점한 뒤 송대남 코치가 붙여준 별명이다. ‘친구 손흥민’의 푸스카스상 수상 골과 비슷한 궤적이었다.
취미는 요리
요즘 취미는 요리다. “요리 잘한다”는 어머니의 칭찬이 요리 입문의 동기다. 알리오 올리오 스파게티가 자신 있고, 한식도 잘 만든다. 살아있는 생물(生物) 재료만 쓰지 않으면 된다. 최근에는 유명 셰프들의 유튜브를 보며 연구한다. 특히 중화요리의 대가 이연복 셰프의 유튜브에 감명을 받아 조만간 최고급 도마와 칼을 구입할 예정이다. 장비 구입 후 처음 만들 요리도 정해놨다. ‘제육볶음’이다.
“창의적이면서 정밀해야 하고, 결과물이 확실하다는 것이 요리의 매력이죠. 요리할 때는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것도 좋습니다. 정말 재미있는데, 요리할 때도 운동선수 특유의 승부욕이 발동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조구함은 요리할 때 계량컵을 쓰지 않는다. 정확한 양이 어느 정도인지 손과 몸으로 익히기 위해서다. ‘손을 사용하는 유도 선수’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적정량 넣기에 실패해 예상한 맛이 나오지 않으면 같은 요리를 바로 다시 만든다. 완성 후에는 맛있는 쪽부터 시작해서 두 접시를 다 비운다. ‘이것도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일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는 한다. 후배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는 것도 큰 기쁨이다. 다들 ‘대단하다’며 좋아하는데, 칭찬보다는 냉정한 평가를 기대한다.
“꿈에서도 울프 선수가 보였다”
― 다시 올림픽 이야기로 돌아가죠. 이번 대회를 마치고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네. 우리 선수들은 모두 메달권 실력을 지닌 선수들입니다. 그래서 실력 외적인 불운이 안타까웠어요. 모든 격투기 종목은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유럽 선수들은 여러 나라 선수들이 모여 대회도 하고 합동 훈련도 했더라고요. 우리 선수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자유롭게 운동하던 시절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습니다. 올림픽이 연기되고 비인기 종목 선수들은 특히 불안했죠. 청춘을 다 바쳐서 노력하고 있는데, 목표인 올림픽이 취소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대회에 나가 경기를 해야 존재감이 생기고 자존감도 올라가는데, 국내 대회도 아예 없어지다시피 했으니 사기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흔들릴 때 그를 잡아준 은인이 있다. 필룩스그룹 배상윤 회장이다. ‘선수 조구함’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수원시청 소속이던 그를 필룩스 유도단으로 스카우트한 주인공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다는 건 힘든 시간을 견디는 데 커다란 동기부여가 된다.
― 결승전에 나서는 각오는 어땠습니까.
“정말 이기고 싶었습니다. 유도 경기가 열린 닛폰부도칸(日本武道館)은 세계 유도의 총본산이고, 유도가 처음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 1964년 도쿄올림픽 때 경기 장소였잖아요? 유도 선수로서 의미가 남다른 장소입니다. 그래서 울프 선수가 꼭 올라와주기를 원했습니다. 정통성 있는 장소에서 유도 종주국인 일본 선수를 이겨야 진정한 승자(勝者)가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울프 선수와는 같은 장소에서 열린 2019 세계 유도선수권대회 8강전에서 만나 제가 절반으로 이긴 적이 있습니다. 금메달 목에 걸고, 태극기 올리고 애국가 부르고, 국민 여러분께 큰 힘을 드리고 싶었죠. 매일 수도 없이 상상하니까 꿈에서도 울프 선수가 나오더군요. 시상대 제일 높은 곳에 오르는 상상을 할 때마다 소름이 돋고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꿈에서도 유도를 하는 건 단순한 감정이입(感情移入)이 아니다. 강자(强者)들의 경기를 반복 시청하며 그들이 보이는 특유의 동작을 눈에 익힌 결과다. 우승 후보들이 특정 기술을 쓸 때의 표정과 예비 동작을 연구한 것이다. 고강도 이미지 트레이닝이다. 상대가 어떻게 공격할지 미리 알면 그만큼 수비하기도 쉽다. 되치기를 노리기도 유리하다.
“유도는 인생의 동반자”
― 다음 목표는 무엇입니까.
“3년 뒤 파리올림픽에서 꼭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하지만 올림픽은 의지만으로 갈 수 있는 무대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 실력이 부족하다거나, 저보다 강한 후배가 나오면 출전할 수 없죠. 수술 마치고 재활 열심히 해서 바로 다음 대회를 좋은 컨디션으로 치를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정성을 다해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준비가 완벽하면 흔들리지 않아요. 준비가 부실하면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알죠. 아니까 불안해지고, 불안감이 커지면 바로 그 불안감이 저를 안에서부터 흔들고 무너뜨립니다. 불안하면 집니다. 상대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불안감 때문에 자기 스스로 지는 겁니다. 준비가 완벽하면 불안감은 사라지죠.”
― 조구함에게 유도란 무엇입니까.
“인생의 전부입니다. 인생의 동반자이기도 하죠. 유도를 통해 인생의 궁극적 목표를 이루고 싶으니까요. ‘존경받는 유도인, 행복한 인생’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 즐겁습니다.”
조구함이 유도를 잘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가족 문제다. 그가 4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춘천에서 청주로 갑자기 전학을 가야 했던 배경이다. 지금은 가족 모두가 따로따로 잘 살고 있지만, 조구함이 성적을 내면 가족 모두가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한 번이라도 더 모이려면, 국내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 부모님, 여동생과 함께 모여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들면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다.
조구함은 만날 수 없는 것들을 만나게 하는 신비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영예로운 패배, 수줍은 당당함, ‘벌레를 무서워하는 담대한 남자’처럼, 어색한 조합들이 그의 말과 행동 앞에선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청년이 건강한 나라는 미래가 건강한 나라’라고 했다. 대한민국은 ‘조구함 보유국’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미래는 건강하고 밝고 품격 있을 것이다.⊙
세계가 열광했다. 위대한 인간애(人間愛)를 보았기 때문이다. 신문은 ‘이것이 올림픽이다’라고 제목을 뽑았다. 일본 네티즌은 “아쉬웠을 텐데도 울프의 손을 들어준 한국 조 선수의 태도에 감동했다. 이것이 스포츠맨십” “이것이야말로 무도가라고 생각한다. 울프 선수, 조 선수 고마워요” “울프 선수가 강한 것도 감동적이지만, 시합 후 한국 선수가 손을 들어준 것을 보고 ‘고맙습니다!’ 하고 눈물 흘릴 뻔했다. 당신도 강했습니다”라고 댓글을 달았다. 그래서 만나고 싶었다, 이 품격(品格) 넘치는 훌륭한 젊은 무도가(武道家)를. 셔츠 위로 보이는 단단한 근육은 올림픽 때와 같았고, 경기 때와는 달리 안경을 쓰고 나온 점이 특이했다.
“강한 선수와 경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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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구함 선수는 지난 7월 29일 결승전에서 패한 뒤 승자인 에런 울프의 손을 들어 올리며 승리를 축하해줘 스포츠맨십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사진=도쿄올림픽공동취재단 |
“나라 조(趙)에 ‘나라를 구하라’는 뜻의 한글 이름 ‘구함’입니다. 어렸을 때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지어주셨어요.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여동생의 이름도 한글 이름입니다.”
― 승자의 손을 들어준 건 미리 생각하고 한 행동인가요.
“아뇨. 순간적으로 한 행동입니다. 경기 끝나고, 울프 선수가 부러웠어요.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건 제 평생의 목표이기도 하니까요. 안다리후리기로 한판패를 당하고 누워 있다가 일어났을 때, 울프 선수가 정말 기뻐하는 걸 봤습니다. 제가 금메달을 땄으면 울프 선수보다 더 좋아했겠죠. 꿈에 그리던 자리에 주인공만 바뀌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축하해주고 싶었어요. 울프 선수는 다른 선수들의 축하를 받을 자격이 있는 선수입니다. 제가 이겼다면, 울프 선수도 제가 했던 행동 못지않게 저를 축하해줬을 겁니다.”
― 왜 그렇게, 갑자기 축하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 겁니까.
“결승전 하는 내내 상대에 대한 존경심이 들었어요. 울프 선수가 정말 열심히 훈련했다는 것을 느꼈거든요. 제가 상대를 넘길 수 있는 찬스가 여러 번 있었고, 초중반 흐름도 저한테 유리했는데 울프 선수가 잘 견디고 제 기술을 다 피했습니다. 저를 참 많이 연구했구나, 그 시간과 노력이 어땠을지가 보였습니다. 저보다 더 열심히 했으니까 제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축하한 겁니다. 선수로서, 강한 선수와 경기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울프 선수는 지금까지 만나본 선수 중에 제일 강했습니다.”
“경쟁자이지만 동업자이기도”
올림픽 출전 선수의 수준이면 감(感)이 빠르다. 상대를 한 번 잡으면, 상대에게 한 번 잡히면 오늘 경기는 쉽겠다, 어렵겠다 바로 계산이 끝난다. 상대의 힘, 컨디션, 부상 유무 등을 온몸으로 스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가 얼마만큼 늘었는지, 얼마나 열심히 훈련했는지 바로 알 수 있다는 뜻이다.
“울프 선수와 저는 경쟁자이지만 동업자이기도 하잖아요. 경기가 끝나고도 표정을 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가 많이 기쁨을 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팔을 들어주자 그때야 눈물을 보이더군요. 악수할 때는 더 많이 울고.”
조구함은 울프보다 네 살이 많다. 카메라에는 잡히지 않았지만, 시상식 대기실에서도 울프 선수는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조구함은 승자(勝者)의 등을 계속 두드려주며 ‘울지 말라’고 달랬다고 한다.
― 울프 선수는 뭐라고 하던가요.
“내성적이고 말이 없는 선수라서…. 국내에서 활동하는 재일교포(在日僑胞) 선수 중에 울프와 동문인 선수가 있거든요. 그 선수를 통해 ‘강했다. 다음 올림픽에서 또 만나자’라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결승전 다음 날부터 세상이 바뀌었다. 선수촌 자원봉사자나 편의점 직원들이 수줍게 다가와 “사진 좀 찍을 수 있느냐, 꼭 찍고 싶다”고 했다. 공항에서 만난 스튜어디스도 같은 부탁을 했다.
급상승한 인기는 일본에서만 벌어진 현상이 아니었다. 귀국 후 들른 식당에서 옆자리 나이 지긋한 손님들이 “눈물 나더라”며 나누는 얘기가 들려왔다. ‘조구함 스토리’였다. 택시기사가 “손님, 몸 좋으시네. 혹시 운동하는 분이신가? 올림픽 보셨어요? 그 손 들어준 선수 있잖아요”라고 하기에 “제가 그 선수입니다”라고 답했더니 바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길을 걸으면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분도 생겼다.
여러 방송국에서도 연락이 왔다. 한 달 남짓한 기간에 〈맛있는 녀석들〉 〈언니가 쏜다〉 〈뽕숭아학당〉 〈노는 브로〉 〈유키즈온더블록〉 등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연달아 출연했다. 자신의 방송 출연으로 유도 인구가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흔쾌히 섭외에 응했다. 훈련에 소홀한 것 아니냐는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9월 7일 무릎 수술 전까지만 한시적으로 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씨름 선수 출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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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석초등학교 5학년 시절의 조구함 선수. 사진=조구함 제공 |
그렇다고 바로 유도에 입문한 건 아니다. 아버지의 반대 때문이다. 조구함의 부친 조병화(趙炳和·51)는 고등학교 때까지 씨름 선수였다. 강원도 대표로 전국체전에 출전한 적도 있다. 어머니 이남경(李南京·48)도 강원도 시도대항 경기에 중장거리 선수로 활약한 육상 선수였다. 운동선수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잘 알기에 아버지는 아들의 유도 입문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축구, 야구, 씨름 등 여러 종목의 스카우트 제의를 이미 여러 번 뿌리친 뒤이기도 했다.
하지만 유도부 안효광 교사의 집념은 강도(强度)가 달랐다. 한 달 이상을 매일 찾아오는 끈질긴 구애에 ‘아들의 미래를 맡기자’는 믿음이 생겼다. 시기도 절묘했다. 설득 방문이 이어지는 한 달 동안 조구함은 갈등하지 않았다. 2002년 월드컵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석초등학교 4학년 2학기가 그래서 유도 선수 조구함의 출발점이다. 올림픽 결승전 다음 날 우석초 정문에 ‘자랑스러운 우석인 조구함’ 플래카드가 걸린 이유다.
아버지는 ‘유도 선수 조구함’에게 본인의 비법(秘法)을 전수했다. 씨름을 같이하며 중심이동, 넘기고 넘어갈 때의 느낌을 체득(體得)게 했고, 아침에 깨워 공동묘지 데려가기, 춘천역 광장 등교하는 여학생들 앞에서 소리 지르기 등의 담력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하이라이트는 ‘일과 훈련의 절묘한 병행’이다. LPG 가스통 배달 일을 도우러 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일부러 엘리베이터 없는 상가나 오래 걸어야 하는 건물을 배정했다. 체력을 기르기도 좋고, 가스통을 운반하는 동작 자체가 유도의 업어치기 동작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당한다는 조구함의 특기 업어치기는 어쩌면 이때 가스통 배달에서 잉태된 것인지도 모른다.
손흥민과 후평中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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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평중 시절의 조구함 선수. 축구선수 손흥민이 동기다. 사진=조구함 제공 |
“손흥민 선수는 그때부터 공을 참 잘 찼습니다. SNS에 손흥민 선수가 휴가 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 있어요. 사진 속에는 저랑 겹쳐 있는 친구도 많습니다. 그 친구들이 ‘그때 걔가 흥민이야’라고 알려줘서 저는 진작부터 손흥민 선수를 알고 있었죠.”
조구함은 손흥민을 알지만, 손흥민은 아직 조구함을 모른다. 친구들을 통해 연락할 수도 있지만, 꾹 참는 중이다. 사실은 손흥민 선수 바로 옆까지 다가선 적도 있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을 마치고 귀국하는 인천공항, 수하물 찾는 곳에서다. 은메달리스트 조구함은 말을 붙이려다가 막판에 돌아섰다. ‘월드 스타에게 감히’라는 생각도 들었고, 올림픽 금메달을 딴 후 친구들을 통해 좀 더 멋지게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인터뷰 기사를 보고 손흥민 선수가 먼저 연락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신나는 두 스타의 만남이다.
고등학교는 대성중고와 같은 재단인 청주 청석고로 진학했다. 1981년 한국 최초로 유도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박종학(朴鍾學·63·현 청주대 교수), 1996 애틀랜타올림픽 금 전기영(全己盈·48·현 용인대 교수), 2000 시드니올림픽 은 조인철(趙麟徹·45·현 용인대 교수) 등이 청석고 선배다. 안효광 교사는 고등학교에서도 조구함을 지도했다.
대학 시절 100kg 이하급으로 체급 내려
대학은 ‘한국 유도의 심장’ 용인대(전 유도대)로 진학했다. 헤비급은 선수층이 두껍지 않은데, 용인대에는 같은 체급에 선수가 여럿이라 마음껏 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4 LA올림픽 은 조용철(趙容澈·60)에게 지도받고 싶은 마음도 컸다. 체급도 같았고, 신체 구조, 경기 스타일이 흡사했던 롤 모델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 대학 1학년 때인 2011 도쿄 그랜드슬램 은메달, 2012 뒤셀도르프 그랑프리 동메달, 2013 파리 그랜드슬램 동메달 이후 심경에 변화가 생겼다. 100kg 이상급에선 세계 최고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최고 수준의 선수들은 150kg 전후 체중으로 경기에 나서는데 조구함은 123kg 이상으로는 증량(增量)이 불가능했다. 그 이상이면 운동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진 탓이었다.
“제가 헤비급 선수치고는 단신이고, 신체적 한계를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2013 제27회 카잔 하계유니버시아드 금메달을 마지막으로 체급을 100kg 이상급에서 100kg 이하급으로 내렸죠.”
투기(鬪技) 종목에서 체급을 바꾼다는 건 이민(移民) 가는 것만큼 힘든 결정이다. 더구나 위 체급이 아니라 아래 체급으로 내려가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모두가 반대했고, 딱 한 사람 조인철 교수만 그의 결정을 지지했다. 영양사에게 식단관리 조언을 구하고, 체육과학연구원에서 심리상담을 받는 등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세운 뒤 9월부터 5주 동안 23kg을 감량해 11월 국가대표 선발전에 나갔다.
이듬해인 2014년 12월 도쿄 그랜드슬램 금메달은 그래서 의미가 깊다. 이 대회는 한 체급에 일본 선수가 네명이나 출전한다. 모두 실력 차이가 거의 없는 고수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다른 국제 대회보다 경쟁 강도가 세다. 도쿄 대회 우승은 조구함의 유도가 세계 정상급으로 올라섰다는 신호였다. 체급 적응을 무사히 마쳤다는 확신이 생기자 2016년 리우올림픽이 시야에 들어왔다.
“금메달을 꼭 딴다, 금메달이 내 인생의 전부다, 금메달 못 따면 인생 망한다는 심정으로 무섭게 훈련했습니다. 대회 3개월 전 십자인대가 파열되었는데, 수술도 대회 뒤로 미루고 미련할 정도로 운동만 했죠.”
결과는 16강 탈락.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동메달 때는 ‘실력과 경험이 부족했다. 다음엔 잘하자’라며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올림픽 실패는 어떤 말로도 위로가 불가능했다.
“말할 수 없이 허탈했어요. 심란했고, 주변에서 다들 손가락질하는 것 같고, 중압감 때문에 매일 무서워하고 힘들어하던 저 자신에게 화도 많이 났습니다.”
재활치료를 하면서 인생 목표 바뀌어
그해 8월 15일 귀국 후 집에도 가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서울 모 호텔에 짐을 풀고 바깥출입도 삼간 보름 동안의 하안거(夏安居)였다. 결론은 빨리 수술부터 하고 다음 올림픽에 새롭게 도전하자는 것. 그래야 시련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9월 1일 수술을 받았습니다. 리우에 갔을 때 경기 중 통증은 없었지만, 심리적으로 불안했거든요. 올림픽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야 하니까 보이는 문제부터 해결하고 얼른 새출발을 하고 싶었습니다.”
1년간의 재활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저강도 동작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야 했다. 운동선수로서 이런 동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 수치스러웠고, 동료들이 국제 대회에 나가는 것도 초조하게 만들었다. 마음을 다스려야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
“재활 기간은 제가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귀한 시간입니다. 그 전까지는 올림픽 금메달이 생의 목표였는데, ‘존경받는 유도인으로 행복한 삶을 살자’는 생각을 처음 했습니다. 선수로서의 삶만 생각하다가 인생의 궁극적 목표를 세운 거죠. 무도인의 자세를 확립한 겁니다. ‘무도를 통해 배운 힘을 사회나 타인에게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이죠.”
폰세카 선수와의 준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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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구함 선수는 지난 7월 29일 준결승에서 패자인 포르투갈 호르헤 폰세카 선수를 안아주며 위로했다. 사진=뉴시스 |
〈1분 남짓 남았는데 경기는 여전히 팽팽하게 진행됐다. 이에 해설위원은 ‘자기 싸움을 더… 손에 공방을 좀 더 치열하게 해줬으면 좋겠다’며 ‘물론 (폰세카 선수의 상태도) 안타깝지만, 조구함 선수 어쨌든 이겨야 하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은 두고 집중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구함은 경기 종료 16초를 남기고 업어치기 절반을 따낸 뒤 남은 시간을 버텨 승부를 결정지었다. 경기가 종료되자 두 선수는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폰세카는 자신의 품에서 눈물을 터뜨린 조구함을 토닥토닥하며 다독여줬다. 각자 최선을 다해 경기를 펼친 후 격려를 담아 따뜻한 포옹을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폰세카도 같은 선수로서 배려하는 조구함의 마음을 느꼈을 것’이라며 ‘진정한 스포츠맨십이다’라고 감동을 표했다.〉
5년 전 ‘수단·방법을 안 가리고 오로지 금메달을 따야 한다’고 생각하던 선수는 어느새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무도인으로 진화해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가 보여준 품격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국격(國格)이 상승하는 기분이었다.
“유도는 내적 부드러움도 추구”
― 폰세카 선수 손에 쥐가 나는 걸 알았죠.
“그럼요. 쥐가 나는 걸 봤고 저를 잡았을 때 다시 한 번 확실하게 확인했습니다. 평소 악력의 절반도 되지 않았으니까요.”
― 그런데 왜 손을 공격하지 않았나요.
“손을 공격했다면 쉽게 이겼겠죠. 하지만 그렇게 이기면 떳떳한 승리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 상황을 이용하고도 금메달을 못 따면 그것만큼 최악의 상황도 없습니다. 저는 올림픽 메달은 하늘이 준다고 생각합니다. 최선을 다하면 하늘이 감동해서 내려주는 은총(恩寵)이죠. 이번엔 하늘이 저를 택했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2017년 도쿄 그랜드슬램 우승으로 리우의 아픔도 씻고 자신감을 회복했고, 이번 대회 준비도 완벽하게 했어요. 전날까지 무릎이 쑤셨는데, 경기 당일 거짓말처럼 통증이 사라지고 몸이 가벼웠습니다. 대진운도 좋았죠. 1회전이 부전승이었고, 첫 경기도 세계선수권 은메달 선수와 붙었는데 계획보다 잘 풀렸습니다.”
― 만약에 폰세카 선수에게 그렇게 페어플레이를 하다 졌다면요? 한(恨)이 남지는 않았을까요.
“존경받고 행복한 유도인이 되려면 떳떳하지 못한 행동은 없어야죠. 제 손에 쥐가 났더라도 다른 선수들이 기다려줬을 겁니다. 유도는 유능제강(柔能制剛)의 무도인데, 신체적 부드러움뿐 아니라 내적인 부드러움도 추구합니다. 상대를 너그럽게 대하고 배려하며 존중하는 것이죠. 그래서 졌더라도 후회는 없었을 겁니다. 마음은 이렇게 먹었지만, 그래도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긍정적인 생각을 계속했어요.”
‘조구함 생선회 징크스’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있다. 불안감에 휘둘리지 않은 일이다. 거의 모든 유도인이 아는 ‘조구함 생선회 징크스’가 있다.
“중3 때부터 전국대회를 우승하기 시작했는데, 대회 장소가 속초였어요. 경기 전날 부모님이 회를 사주셨죠. 다음 해 대회 장소가 제주도였는데 그때도 회를 먹고 우승했습니다. 고2 때 대회 장소는 익산이었는데, 그때부터는 경기 전날 일부러 횟집을 찾아갔습니다.”
징크스는 힘이 셌다. 파리에선 구글링으로 횟집을 검색하고, 몽골에선 시내 중심부의 한국 사장님이 운영하는 단 한 군데의 횟집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불안했기 때문이다.
“2020년까지 횟집 루틴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다 ‘이게 뭐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꼭 경기 전날이어야 하고, 외국에선 횟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고….
무엇보다도, 회를 먹는 건 연습의 일부가 아니잖아요? 준비를 철저히 하면, 징크스에 휘둘릴 일도 없는 겁니다. 왜 내가 스스로 괴롭히고 있는지 의문이 생겼어요. 회를 먹고 불안감을 진정시키기보다는 수면, 음식, 휴식, 마음가짐, 훈련 태도 등 준비를 더 열심히 해서 자신감을 키우자고 생각했습니다. 운동이 잘 안 되는 날 화가 나는 것도 제가 만들어내는 감정이니까, 그것도 제가 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잖아요. 화를 내지 말고 준비를 철저히 하자, 그러면 화낼 일도 없다,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이번 대회에서는 그래서 경기 전날 회를 먹지 않았다. 대신 소리를 지르며 긴장을 풀었다.
“저는 활어회를 좋아하는데, 일본에는 숙성 회가 대세고…. 회를 먹었다면 메달을 못 땄을 겁니다. 또 불안감에 흔들렸다는 뜻이니까요.”
근육질 거구(巨軀) 청년의 말투는 시종일관 따뜻했고 부드러웠다. 이 남자에게도 무서운 것이 있을까?
“징그러운 걸 못 봐요. 벌레가 무섭습니다. 미끼 꿰기가 무서워서 낚시도 루어낚시를 했으니까요.”
벌레만 아니라 벌레 비슷한 물건도 기피 대상이다. 양쪽 시력이 0.1인데도, 소프트렌즈의 이물감이 싫어 쓰지 않는다.
“렌즈는 2018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안경점에 간 날, 렌즈를 못 만져서 착용하는 데 두 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저한테는 꼭 벌레를 만지는 느낌이었죠. 안경사분들이 다 웃으시고 저는 무서워하면서 낑낑대고…. 경기력 향상에 확실한 도움이 되니까 꾹 참고 성공할 때까지 했어요. 렌즈를 끼고 나선 첫 경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신세계였어요. 상대의 도복과 표정이 다 잘 보였으니까요.”
대회 때마다 여러 벌의 렌즈를 준비한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이다. 경기 중 렌즈가 찢어지거나 빠지면 나머지 한쪽도 빼야 한다.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다. 딱 한 번 그런 사고가 있었는데 경기에서 패했다. 이겼다면 다음 경기는 새 렌즈를 착용하고 나섰을 터이다.
유도 외에 취미가 필요해서 시작한 루어낚시는 무릎 수술 후 그만두었다. 가파른 지형에서 낚싯대를 던져야 하는데, 선수 생활에 지장이 있을까 봐 내린 결정이다.
낚시 이전의 취미는 축구였다. 정기적으로 공을 찼고, 별명이 ‘유도계의 마라도나’였다. 유도 선수 친선 축구경기에서 하프라인부터 단독 드리블로 득점한 뒤 송대남 코치가 붙여준 별명이다. ‘친구 손흥민’의 푸스카스상 수상 골과 비슷한 궤적이었다.
취미는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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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구함 선수의 요즘 취미는 요리다. 사진=조구함 제공 |
“창의적이면서 정밀해야 하고, 결과물이 확실하다는 것이 요리의 매력이죠. 요리할 때는 아무 생각이 안 나는 것도 좋습니다. 정말 재미있는데, 요리할 때도 운동선수 특유의 승부욕이 발동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조구함은 요리할 때 계량컵을 쓰지 않는다. 정확한 양이 어느 정도인지 손과 몸으로 익히기 위해서다. ‘손을 사용하는 유도 선수’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적정량 넣기에 실패해 예상한 맛이 나오지 않으면 같은 요리를 바로 다시 만든다. 완성 후에는 맛있는 쪽부터 시작해서 두 접시를 다 비운다. ‘이것도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일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는 한다. 후배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는 것도 큰 기쁨이다. 다들 ‘대단하다’며 좋아하는데, 칭찬보다는 냉정한 평가를 기대한다.
“꿈에서도 울프 선수가 보였다”
― 다시 올림픽 이야기로 돌아가죠. 이번 대회를 마치고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네. 우리 선수들은 모두 메달권 실력을 지닌 선수들입니다. 그래서 실력 외적인 불운이 안타까웠어요. 모든 격투기 종목은 코로나19로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유럽 선수들은 여러 나라 선수들이 모여 대회도 하고 합동 훈련도 했더라고요. 우리 선수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자유롭게 운동하던 시절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습니다. 올림픽이 연기되고 비인기 종목 선수들은 특히 불안했죠. 청춘을 다 바쳐서 노력하고 있는데, 목표인 올림픽이 취소될 수도 있었으니까요. 대회에 나가 경기를 해야 존재감이 생기고 자존감도 올라가는데, 국내 대회도 아예 없어지다시피 했으니 사기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흔들릴 때 그를 잡아준 은인이 있다. 필룩스그룹 배상윤 회장이다. ‘선수 조구함’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수원시청 소속이던 그를 필룩스 유도단으로 스카우트한 주인공이다. 누군가가 자신의 가치를 알아준다는 건 힘든 시간을 견디는 데 커다란 동기부여가 된다.
― 결승전에 나서는 각오는 어땠습니까.
“정말 이기고 싶었습니다. 유도 경기가 열린 닛폰부도칸(日本武道館)은 세계 유도의 총본산이고, 유도가 처음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 1964년 도쿄올림픽 때 경기 장소였잖아요? 유도 선수로서 의미가 남다른 장소입니다. 그래서 울프 선수가 꼭 올라와주기를 원했습니다. 정통성 있는 장소에서 유도 종주국인 일본 선수를 이겨야 진정한 승자(勝者)가 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울프 선수와는 같은 장소에서 열린 2019 세계 유도선수권대회 8강전에서 만나 제가 절반으로 이긴 적이 있습니다. 금메달 목에 걸고, 태극기 올리고 애국가 부르고, 국민 여러분께 큰 힘을 드리고 싶었죠. 매일 수도 없이 상상하니까 꿈에서도 울프 선수가 나오더군요. 시상대 제일 높은 곳에 오르는 상상을 할 때마다 소름이 돋고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꿈에서도 유도를 하는 건 단순한 감정이입(感情移入)이 아니다. 강자(强者)들의 경기를 반복 시청하며 그들이 보이는 특유의 동작을 눈에 익힌 결과다. 우승 후보들이 특정 기술을 쓸 때의 표정과 예비 동작을 연구한 것이다. 고강도 이미지 트레이닝이다. 상대가 어떻게 공격할지 미리 알면 그만큼 수비하기도 쉽다. 되치기를 노리기도 유리하다.
“유도는 인생의 동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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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아버지, 누이동생과 함께. 가족은 조구함이 운동을 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사진=조구함 제공 |
“3년 뒤 파리올림픽에서 꼭 금메달을 딸 수 있도록 다시 준비하겠습니다. 하지만 올림픽은 의지만으로 갈 수 있는 무대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제 실력이 부족하다거나, 저보다 강한 후배가 나오면 출전할 수 없죠. 수술 마치고 재활 열심히 해서 바로 다음 대회를 좋은 컨디션으로 치를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를 정성을 다해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준비가 완벽하면 흔들리지 않아요. 준비가 부실하면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알죠. 아니까 불안해지고, 불안감이 커지면 바로 그 불안감이 저를 안에서부터 흔들고 무너뜨립니다. 불안하면 집니다. 상대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불안감 때문에 자기 스스로 지는 겁니다. 준비가 완벽하면 불안감은 사라지죠.”
― 조구함에게 유도란 무엇입니까.
“인생의 전부입니다. 인생의 동반자이기도 하죠. 유도를 통해 인생의 궁극적 목표를 이루고 싶으니까요. ‘존경받는 유도인, 행복한 인생’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 즐겁습니다.”
조구함이 유도를 잘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가족 문제다. 그가 4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춘천에서 청주로 갑자기 전학을 가야 했던 배경이다. 지금은 가족 모두가 따로따로 잘 살고 있지만, 조구함이 성적을 내면 가족 모두가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한 번이라도 더 모이려면, 국내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 부모님, 여동생과 함께 모여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들면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다.
조구함은 만날 수 없는 것들을 만나게 하는 신비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영예로운 패배, 수줍은 당당함, ‘벌레를 무서워하는 담대한 남자’처럼, 어색한 조합들이 그의 말과 행동 앞에선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청년이 건강한 나라는 미래가 건강한 나라’라고 했다. 대한민국은 ‘조구함 보유국’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미래는 건강하고 밝고 품격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