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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발레와의 인생’ 박인자

“푸에테 24회 돌던 그녀, 지금은 은퇴 무용수 위해 再도약”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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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친 무용수 많아… 남자 무용수는 허리 부상, 여자는 발목 부상이 많아
⊙ 무용수 직업 전환 위해 무용 재활 전문 트레이너, 물리치료사, 공연기획자 과정 운영
⊙ 파킨슨병 환자, 치매 환자 위한 무용으로… 무용 대중화

朴仁子
1953년생. 세종대 무용과, 同 대학원 졸업, 한양대 이학 박사 / 前 세종대·숙명여대 교수. 국립발레단 단장 겸 예술감독, 한국발레협회장, 성남국제무용제·대한민국발레축제 예술감독, 외교통상부·예술의전당·유니버설발레단 자문위원 역임 / 現 재단법인 전문무용수지원센터 이사장
  박인자(朴仁子) (재)전문무용수지원센터 이사장을 지난 3월 3일 만났다. 서울 혜화동에 위치한 사무실이 무척 세련되게 느껴졌다.
 
  처음 만난 박 이사장 역시 전혀 나이를 느낄 수 없었다.
 
  “재미없는 이야기를 들으러 오셨어요?”
 
  이야기 실마리를 어떻게 풀어갈까 고민스러웠다.
 

  박인자.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력이 화려하다.
 
  발레리나, 대한민국발레축제 조직위원장, 안무가, 교수, 예술감독, 단장, 경영인으로 예술계 현장에서 치열하게 살았다. 지금은 봉사자라 해야 할까. 무용행정가? 전문무용수지원센터 이사장직을 처음 맡았을 때 한 해 예산이 2억원 정도였는데 지금은 17억6000만원으로 살림이 불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복이 많은가 봐요.”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무용하는 사람들이 우리 센터만 바라보고 있어요.”
 
  이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우리 무용수들이 많이 다쳐요”
 
전문무용수지원센터는 무용예술인들에게 상해 치료비를 지원하고 부상을 막기 위해 전문재활 트레이너를 파견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전문무용수지원센터는 2006년 설립 당시 설립추진위원장이 그였다. 당시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겸 단장 시절이었다. 젊은 나이에 은퇴해야 하는 전문무용수의 제2의 인생 설계를 돕기 위해 이 재단을 만든 것이다.
 
  “처음에는 은퇴하는 남자 무용수의 직업 전환을 위해 구상했어요. 마흔이 되면 무대에서 내려와요. 외국의 발레리노도 마찬가지죠.
 
  물론 특별한 경우는 좀 더 활동할 수 있지만 클래식 작품은 더 하기 힘들죠. 남자 무용수들은 부양가족이 있어서 은퇴 후 생계를 책임져야 하잖아요.”
 
  — 은퇴 후 무슨 일을 하나요.
 
  “다양하지만 연구소(무용학원)를 하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접시닦이도 하죠. 무용하는 분들이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잠시 침묵 후 이런 말도 보탰다.
 
  “우리 무용수들이 많이 다쳐요. 십자인대가 끊어지거나 디스크 치료를 받기도 해요. 다쳤을 때 치료비도 지원해요.”
 
무용수들은 허리나 무릎, 발가락 쪽에 무리가 가는 동작이나 움직임이 많아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부상 후 재활 치료가 중요하다. 사진제공=국립발레단
  춤추다 다친 무용수가 많은데 허리, 꼬리뼈, 무릎, 햄스트링 통증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남자 무용수는 허리 부상, 여자는 발목 부상이 많단다. 그러나 공연을 앞두고 있다면 다쳐도 무대에 설 수밖에 없다. 관객과의 약속이니까.
 
  “무용단의 단체 공연 때는 마사지사를 파견해 지원해주죠. 부상을 사전에 방지하는 게 제일 중요해요. 찾아가는 상해예방, 무용 재활 트레이닝실 운영, 전문무용수 부상 예방 검진도 지원합니다.”
 
  치료비는 의료보험액을 제외하고 한 해 30~40명에게 지급하는데, 재활비도 지원한단다. 박 이사장의 말이다.
 
  “무용수들은 재활을 잘해야 해요. 재활 기간이 길게는 1년씩 걸리죠. 재활비로 1억원가량을 지원하고 있어요.”
 
 
  전문무용수지원센터
 
전문무용수지원센터는 지난해 10월 21일 충무아트센터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무용음성해설’이라는 주제로 국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센터는 발레, 한국무용, 현대무용 분야의 예술인들이 예술에 전념할 수 있도록 상해 및 재활, 댄서스 잡마켓, 직업개발 교육 등을 지원하고 있다.
 
  — 잠깐만요. ‘댄서스 잡마켓’? 무슨 뜻인가요.
 
  “일종의 공개 합동 오디션입니다. 공연을 앞둔 무용단과 공연 출연을 희망하는 무용수들이 함께 작업할 기회를 제공하고, 출연료 일부를 지원합니다.”
 
  — 그러니까 센터에서 출연료를 대신 내주는군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문화위원회가 후원하는데, 클래스를 실시한 뒤 오디션을 진행합니다. 작년에 360명이 (출연료를) 받았는데 신청자가 800명이 넘었어요. 그냥 주지 않고 심사를 해서 지원하죠. 철저하게….
 
  코로나19 이후에는 공개 오디션은 안 하고 서류지원 심사를 하고 있어요.”
 
  — 코로나19로 공연예술인들도 타격을 받고 있겠네요. 안타까워요.
 
  “공연 수익이 줄어드니 생계가 문제입니다. 커피숍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요. 현장 공연이 없더라도 센터에서 온라인 공연을 하면 출연료 지원을 하고 있지요.”
 
  전문무용수지원센터는 무용수들의 직업 전환 교육을 위해 무용 재활 전문 트레이너, 물리치료사, 공연기획자, 무용평론가, 무용해설가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아직은 직종이 제한적이다. 이를테면 네덜란드 국립발레단 주역 무용수는 10년 활동 후 항공 파일럿이 됐다고 한다. 독일인 무용수는 은퇴 후 의학을 전공해 학술단체 무용의학협회를 만들었다.
 
  “더 많은 직종을 개발해야죠. 우리 센터도 대학원 학비를 지원하고 있어요. 도시공학을 전공하거나 물리치료사가 된 분도 있지요. 지금은 최대 200만원을 지급하는데 과거에는 500만~600만원을 지급했어요. 금액이 줄어든 이유는 신청자가 너무 많아서….”
 
  로열 발레단 수석 무용수로 은퇴한 영국 출신 발레리나 리안 벤저민은 2013년 은퇴 후 건축설계 학위를 받기 위해 첼시예술대학에 입학했다. 영국 무용수직업전환센터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아 무사히 학업을 마쳤고 현재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중2 때 발레와 만나
 
  박인자는 서울 토박이로 1953년 6월생이다. 서울 충무로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박명근(朴明根)씨와 노오례(盧五禮) 여사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는 피아노를 쳤고 금란여중에 다니면서 발레와 처음 만났다.
 
  “여중 2학년 특별활동 시간에 강당에서 발레를 배웠는데 무용 선생님이 보시기에 팔다리가 길었던 모양이에요. 유연성도 있고.
 
  그때는 그래도 발레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물자가 풍부하지 않았지만 말이죠. 요즘은 다소 입시(入試) 중심의 무용으로 바뀐 측면이 있어요.”
 

  한마디로 아름다운 선을 가진 소녀였다. 키는 162cm, 토슈즈를 신고 발끝으로 서면 170cm가 훨씬 넘었다.
 
  1968년부터 발레계의 대부(代父)라 불리던 임성남(林聖男·1929~2002)의 문하에서 본격적인 발레 수업을 시작했고 1969년 서울예고 2학년 때 벌써 국립발레단 정기공연에 참가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 그러니까 수도여자사범대학교(현 세종대) 무용과에 진학한 박인자는 대학 4학년 때인 1974년 동아발레콩쿠르에서 〈지젤〉 솔로로 어렵다는 대상을 받았다.
 
  “서울예고 진학하고 본격적으로 하게 됐어요. 발레는 자기와의 싸움이지요. 무척 어려운 예술이고요. 정확해야 해서 발레리나들은 시간 약속을 잘 지킵니다.”
 
  이 대목에서 기자는 뜨끔했다. 10분 지각을 했기 때문이다. 사족(蛇足)이지만, 10분 늦는다고 문자를 보냈다. 정확하게 9분 늦었다.
 
  “발레리나는 남 얘기를 잘 하지 못해요.”
 
  뒷담화를 안 한다는 얘기로 들렸다.
 
  “별 볼 일이 많았어요. 별 보면서 학교에 갔다가 별 보면서 집에 들어갔으니…. 종일 연습한 후 버스 타고 집에 갈 때 졸다가 버스 종점까지 간 적도 많지요.”
 
 
  24세 때 교수 임용
 
젊은 시절 박인자 발레리나.
  — 발레리나는 체력도 좋아야 하지만 체중 관리도 잘 해야 하지 않나요.
 
  “운동하면 칼로리 소모가 크지만, 다이어트를 할 수밖에 없긴 해요. 저는 다이어트를 심하게 하지 말라고 권해요. 훗날 골다공증이 생기거든요. 특히 남자 무용수들은 키가 커야 하잖아요. 그래서 (성장기 때는) 딱 2시간만 배우라고 하죠. 잘 먹고 잘 자야 성장하니까.”
 
  — 남녀 무용수의 평균 신장이 궁금하네요.
 
  “요즘엔 기가 막힌 체격을 가진 무용수들이 많죠. 남자 무용수들의 평균 키가 185cm, 여자는 167cm 정도로 알고 있어요.”
 
  박인자는 대학 3학년 무렵 장충동 국립극장에 생긴 국립발레단 1기로 입단한다. 당시 월급이 5000원. 지방에 공연 가면 경찰 오토바이가 에스코트했다고 한다.
 
  국립발레단에 입단했으나 학업을 이었다. 세종대 대학원에 진학해 1978년 무용과 전임교원이 되었다. 24세 무렵이었다. 아직도 깨지지 않은 무용계 최연소 교수 임용이었다.
 
  〈… 박인자는 대학 시절 동아발레콩쿠르 대상 수상, 고등학생 신분으로 국립발레단의 공연에 출연할 정도로 빼어난 무용수였다.
 
  또한 많은 작품을 안무하고, 재구성했다. 뷔히너와 아라발의 희곡을 토대로 한 작품, 러시아 컴퓨터 아티스트와의 협업 작업 등 기존의 정형화된 틀을 벗어나는 과감한 창작 작업을 보여주었고, 이 중에는 한국 무용사에 남을 만한 화제작도 적지 않다.…〉(15쪽, 《박인자 발레 50년》)
 
 
 
“푸에테를 24회나 도는 저력”

 
박인자 안무의 〈나는 뭐드라?〉 공연 장면. 위 오른쪽 사진은 〈가을 저녁의 시〉 공연 사진이다.
  1982년 박인자발레단이 출범했다. 발레 입문 이후 7년 뒤였다. 서울무용제(당시 명칭은 대한민국무용제)와 발레협회 정기공연 때 고전 발레 재안무 및 창작 발레를 선보였다.
 
  1984년 음악 공연예술 전문지 《객석》 창간호는 기획 기사로 향후 한국의 예술계를 이끌어갈 유망 예술가들을 다루었는데, 무용 부문에 조동화·김영태·채희완 3명의 무용평론가는 박인자를 추천하면서 다음과 같이 추천 이유를 밝혔다.
 
  “1982년 9월 〈백조의 호수〉 3막 중 오딜(黑鳥)에 도전한 박인자는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으로 눈이 부시도록 현란한 푸에테를 24회나 도는 저력을 보였다. 1983년 5월 그가 춘 오데트 솔로 역시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무대였다. 그 후 쇼스타코비치의 〈아다지오〉와 〈녹색의 변주곡〉에서 그는 지체(肢體)의 포물선을 감각적으로 금 긋는 데 기여했다.”
 
  한 다리로 서서 몸을 완전히 회전시키는 푸에테란 발레리나의 자존심이 걸린 고난도 테크닉이다. “당시만 해도 그의 연속 푸에테는 세간의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고 한다. 그것도 24회나 연속 돌았으니 관객과 평론가들이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박 이사장의 말이다.
 
  “토슈즈 벗은 것은 40대였고요, 벗고 나서부터는 창작 발레를 주로 많이 했죠.
 
  〈나비부인〉(1993), 〈피아노〉(1994· 2003), 〈홍등(紅燈)〉(2004) 같은 창작 발레에서 맨발로 춤을 췄어요.”
 
  〈피아노〉는 제인 캠피온이 감독한 영화 속 주인공의 사랑과 갈등을 춤으로 육화한 것이다. 〈홍등〉은 장이머우가 감독한 영화를 무대화해 욕망과 질투, 사랑 등을 강렬한 춤 언어로 보여주었다.
 
  박 이사장은 2001년 무용예술상 작품상 수상작인 〈달 그림자〉(2001)를 비롯해 〈남몰래 흐르는 눈물〉(1995), 〈삼륜 자전거를 타고〉(2000) 등 안무가로서 적지 않은 화제작을 남겼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세종문화상,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 한창때 신던 토슈즈가 집에 있나요.
 
  “그때 토슈즈가 어디 있어요. 다 버렸죠. 하하하.”
 
  — 그걸 왜 버려요.
 
  “저는 뒤 안 봐요. 앞만 보며 가는 사람이에요. 미련이 없어요.”
 
 
  박인자와 강수진
 
  — 아이고 아까워라. 혹시 발 사진 없나요?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의 발 사진이 널리 알려졌어요.
 
  “없어요. 강수진의 발은 특이하니까 남편이 찍어서 인터넷에 올린 거죠. 강수진은 정말 예뻐하는 후배입니다. 제가 단장으로 와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박 이사장은 2016년 7월 22일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극장을 직접 찾아갔다. 그날 강수진의 마지막 은퇴공연이 있었다.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 1400명이 ‘고마워요 수진(DANKE SUE JIN)’이라 적힌 흰색 패널을 일제히 들었는데 그 중심에 박인자가 있었다.
 
  “(강 단장이) 이례적으로 국립발레단장을 7년째 하고 있는데 잘하고 있어요. 아주 잘하고 있어요. 다양한 컨템포러리 발레 작품을 많이 공연하고, 안무가를 키우는 육성 작업도 잘 해내고 있어요.”
 
  다시 이야기가 전문무용수지원센터로 돌아갔다. 기자의 눈길을 끈 것은 파킨슨병, 치매 환자를 위한 무용이었다.
 
  센터는 2017년 국제심포지엄을 통해 ‘댄스 포 PD’(Dance for Parkinson’s Disease) 프로그램을 국내에 소개했으며 미국의 마크 모리스 무용단(Mark Morris Dance Group)과 MOU 협약을 통해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춤’ 강사 양성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파킨슨병 환자와 치매 환자를 돕는 무용

 
전문무용수지원센터는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댄스’ 프로그램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사진은 2017년 심포지엄 모습이다.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춤’은 2001년경 파킨슨병 환자 치료를 위해 미국 마크 모리스 무용단이 개발한 무용 프로그램이다. 무용으로 파킨슨병 환자들의 몸과 마음, 삶의 질을 바꿀 힘을 주기 위해 고안됐다. 전 세계적으로 24개국, 250여 개의 커뮤니티 그룹에서 이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무용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을 했어요. 특정인만 보는 발레가 아니라, 무용이 대중 쪽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던 차에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춤’을 시작한 것이죠.”
 
  —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운영하고 있나요.
 
  “네, 현재 온라인으로 일주일에 두 번 교육하고 있어요. 12명이 참여 중인데 이전에는 환자들이 보호자분과 같이 오셨어요. 지금도 ‘대면 수업은 언제 하느냐’는 문의 전화가 와요.
 
  무용은 치료 목적이 아니에요. 환자들에게 신체 변화가 많이 일어나잖아요. 손이 떨리거나 몸이 틀어지고 걸음걸이가 느려져 우울감이 크게 나타납니다. ‘파킨슨병 환자를 위한 춤’을 통해 음악과 함께 움직이니까 유연성이 커지면서 행복감이 늘어나요.”
 
  지금까지 서울 고대 구로병원, 대구 서부보건소, 인천 라이언 요양병원과 광주 파킨슨행복쉼터, 경남 양산 부산대병원 등지에 강사 20명을 파견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센터는 치매 환자를 위한 ‘댄스 포 디멘시아’(Dance for Dementia) 강사 프로그램도 국내 처음으로 도입했다. 서울 금천구 치매안심센터, 강북 웰빙 스포츠센터, 제주 상가리 문화곳간 마루 등지에 강사를 보내 치매 환자들을 돕고 있다.
 
  “2018년부터 무용을 활용해 치매 환자들을 돕는 프로그램을 마련했어요. 2019 인지중재치료학회 춘계학술대회 등에서 ‘치매 환자를 위한 춤’의 효과를 의료계와 관련 업계에 홍보해나가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해 기도할래요”
 
2013년 제32회 세종문화상 수상 당시 모습이다. (왼쪽부터) 김학자, 박인자, 함정도, 김정욱. 박인자는 은사인 김정욱 세종대 명예교수의 소개로 건축가인 함정도와 결혼했다.
  박인자 이사장은 “세례는 받았으나 지금은 교회에 안 나간다”며 “젊은 시절에는 무용이 종교라고 생각하며 실제로 그런 생활을 했다”고 고백했다.
 
  “교회에 가서도 목사님 말씀을 안 듣고 안무 생각만 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요즘은 사찰(寺刹) 투어를 합니다. 하하하. 가서 기도하죠. 우리나라 무용계를 위해,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
 
  — 불교로 개종했나요.
 
  “불교 신자라기보다 기도하기 위해 기(氣)가 좋다는 용문사, 동학사, 월정사, 보리암, 적멸보궁 등지에서 기도하는데… 언젠가 지인(知人)이 그러더라고요. ‘이제는 본인을 위해 기도 하라’고요.”
 
  — 본인을 위해 어떤 기도 하시겠습니까.
 
  “건강이죠. 건강해야 모든 일을 할 수 있잖아요. 이젠 정말 내일모레면 칠십을 바라보니 모든 게 건강과 직결되더라고요. 차범석, 이종덕 선생님 등 주위의 가까운 분들이 건강을 잃고 돌아가시니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여간 내가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는 건강해야겠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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