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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람

40년 만에 가수 복귀한 1970년대 하이틴 스타 이현

“다 가라앉은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 챙겨주시는 분들은 누군가”

글 : 장원재  장원재TV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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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군번 1번 이형근 전 육군참모총장, 외할아버지는 초대 육군참모총장 이응준 장군
⊙ 대학 재학 중에만 가수 한다는 조건으로 아버지 허락 얻었다가, 졸업 후 “그만두라”는 아버지 엄명에 활동 접어
⊙ “박춘석 선생은 이현을 정통 트로트와 팝송의 중간지대를 개척할 가수로 픽업한 것”
⊙ 박춘석 작사·작곡의 데뷔곡 ‘내 사랑 지금 어디’로 데뷔… 가요는 물론 영화·CF까지 진출한 1970년대의 아이돌 스타
⊙ 아버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넌 가수를 하는 게 나을 뻔했다”
사진=조준우
  1970년대는 고교야구의 전성기였다. 모든 경기가 매진이었다. 이촌향도(離村向都)와 고교야구(高校野球)는 정서적 합일체(合一體)였다. 그래서 단순한 스포츠 행사가 아니었다. 육화(肉化)한 내 고향의 현현(顯現)이었다. 고향 팀은 ‘내 팀’이었다. 내 고향이자 가족이었다. 꼭 동문이 아니더라도 관계없었다. 운동장에서 땀 흘려 뛰는 고향 동생들을 한마을 사람들이 모여 익숙한 사투리를 쓰며 목청껏 응원한다는 자체가 흥겨웠다. 운이 좋으면 서울 어디서 어떻게 지낸다더라며 소문으로만 소식을 듣던 친구와 선배를 직접 만날 수도 있었다. 월차를 내고 설레는 마음으로 야구장에 모인 사람들이 음식을 나누고 소식을 교환했다. 후배들 먹으라고 아이스크림 수백 개를 사서 관중석에 돌리던 열혈 선배도 있었다. 전국대회가 열리던 서울운동장 야구장은 그렇게 생활문화가 피어나던 삶의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울려 퍼지던 불멸의 응원가가 있다. 김영광 작사·작곡의 ‘잘 있어요’(1973년)다. 승패(勝敗)가 갈릴 때쯤 승자(勝者)의 응원석에서 어김없이 터져 나오던 노래. ‘잘 있어요 잘 있어요~ 그 한마디였었네~ 잘 가세요 잘 가세요~ 인사만 했었네~’.
 

  가사는 슬프지만 곡조는 경쾌하다. 졌으니 어서 고향 마을로 잘 돌아가시라는 당부, 약 오르지 라는 승자의 승리감이 절묘하게 겹친다. 그래서 이 노래는 승전가(勝戰歌)의 대명사였다.
 
 
  사라진 가수
 
  고교야구 팬이던 황지우 시인의 ‘5월 그 하루 무덥던 날’이라는 작품에도 이 노래가 등장한다.
 
  〈在京慶北高等學校同門應援團 쪽은, ‘잘 가세요 잘 있어요’를 부르며,
  징을 치며, 북을 치며, 그쪽은 그쪽대로 난리다.
  李선배는 그쪽으로도 박수를 보낸다.
  무엇에든 집착하지 않는 그의 천성을 나는 매우 존경한다. 그는 경쾌하고 경솔하다.〉
 
  최근에는 종목을 건너뛰었다. 2020 아시아 챔피언 울산 현대 FC의 응원단은 승리가 확정될 무렵 이 노래를 부른다. 홈경기 때는 ‘잘 가세요’를, 원정 경기 때는 ‘잘 있어요’를 연창(連唱)한다. 일본 팀과 경기할 때 ‘사요나라~’로 가사를 바꿔 불렀다는 전설도 있다.
 
  1970년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청춘들은 다른 곳에서도 이 노래를 들었다. 고고장에서 통행금지 시각이 가까워지면, 영업 마감을 알리는 이 노래를 부르고 장사를 마쳤다.
 
  그런데 노래는 불멸(不滅)이지만 가수가 사라졌다. 1970년에 데뷔해서 딱 5년만 활동하고 불현듯 팬들의 곁을 떠난 가수. 인터넷에서도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원곡자 이현(李玄·71 )을 만난 이유다.
 
  ― ‘잘 있어요’를 야구장에서 들어본 적이 있나요.
 
  “없습니다. 전 OB 베어스 감독을 하던 윤동균(尹東均), 제일은행·OB 베어스·빙그레 이글스에서 활약했던 김우열(金宇烈)이랑 친한데, 이 친구들이 ‘그 노래 좀 못 하게 막을 수 없냐, 지고 있을 때 들으면 정말 약 오른다’고 하더라고요. 제 입장에서는 이 노래를 잊지 않고 그렇게 불러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 데뷔 5년 만에 갑자기 은퇴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아버지가 ‘그만하라’고 하셨으니까요.”
 
 
  장군의 아들
 
이현의 외할아버지인 이응준 초대 육군참모총장.
  당대의 최고 인기가수는 아버지의 엄명을 두말없이 따랐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현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군번 1번 이형근(李亨根·1920~2002년) 장군이다. 대한민국 국군 창군 주역이자 원조(元祖)로 불리는 바로 그분이다. 1951년 9월에 휴전회담 대표로 참여했고, 1952년 1월에는 육군 제1군단장을 맡았다. 휴전 당시 동부 휴전선을 38선에서 북쪽으로 훨씬 밀어 올려 속초·고성 등 수복지구를 획득한 것도 그의 공이 크다.
 
  그래서 가수 이현은 데뷔 초부터 ‘장군의 아들’로 불렸다. 소개 기사에 ‘가수 이현 군’이라고 하고, 괄호 안에 ‘이형근 장군 자제’라고 설명을 단 글이 있다. 가수 이현은 ‘장군의 손자’이기도 하다. 집안에 장군이 한 분 더 계시기 때문이다. 평안남도 안주 출생으로 대한민국의 초대(初代)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李應俊·1890~1985년) 장군이 그의 외할아버지다.
 
  이런 명문가 출신이 가수를 한다는 건 당대 관념으로는 파격 중의 파격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가수들의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지만, 대중예술가들을 ‘딴따라’라는 멸칭(蔑稱)으로 부르던 것이 당대의 풍경이다. 가수를 포함한 대중 예술가는 명문가의 자제가 택할 수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광대(廣大)를 천민(賤民) 중의 천민으로 취급하던 성리학의 인습(因習)이 생활 곳곳에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시절이다.
 
윤보선 대통령(오른쪽)에게서 駐필리핀대사 신임장을 받은 이형근 전 육군참모총장(왼쪽). 가운데는 장도영 내각수반.
  ― 가수 한다고 하실 때 집안에서 좀 반대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없었어요. 사연이 있습니다. 제 학업과 성적이 좀 꼬였거든요. 아버지가 1961년 6월에 필리핀대사로 나가실 때 같이 따라갔다가 1년도 못 돼서 저만 먼저 왔어요. 개인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혼자 귀국해서 할머니와 살았죠.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인 1963년 아버지가 영국대사로 발령이 났는데, 저는 중학교 졸업하고 갈 생각이었고, 어른들은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면 좋겠다고 하시고…. 그래서 영국에 가기는 갔는데 영어도 그렇고 공부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1년 남짓 영국에서 살았는데, 한국 공부도 영국 공부도 다 어중간하게 되어버린 거죠. 간신히 대학에 진학하긴 했는데 학업을 마치려면 가수가 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어요.”
 
 
  ‘낙하산 데뷔’
 
  사정을 좀 더 들어보자. 이현이 고3 때 대입 제도가 바뀌었다. 1968년 12월부터 1980년 11월까지 13년간 이어진 예비고사-본고사 제도다.
 
  “예비고사를 통과해야 본고사를 치를 수 있는데, 저는 실력 미달이었죠. 예체능계는 예비고사 없이 갈 수 있다기에 중대 연극영화과에 원서를 넣었습니다.”
 
  외교관 자녀 등 외국 생활을 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례(特例)입학 제도 자체가 없던 시절이다. 중대 연극영화과는 당시 국내 유일의 4년제 연극영화과였다. 1기 졸업생으로 추송웅, 박근형 등이 있고 69학번인 이현의 동기 중에는 2006년 KBS 대하드라마 〈대조영〉에서 연개소문으로 분(扮)한 김진태가 있다.
 
  ― 그래서 바로 가수가 된 겁니까.
 
  “입학은 했는데 수업을 따라가기가 또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과 이름도 낯설었지만, 연극이나 영화를 직업으로 삼겠다고 생각해서 진학한 것도 아니고, 공허(空虛)하고 허무하다는 생각도 자꾸 들고…. 그래서 학교도 잘 나가지 않았어요.”
 
  당시 과 선배로 현역 가수였던 배성, 펄시스터즈의 배인순 등이 길을 알려줬다. 음반을 내거나 연기를 하면 실기(實技) 학점을 딸 수 있다는 얘기였다. 아버지께 직접 말씀은 못 드리고, 이현의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비서 아저씨’에게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다. 아버지의 대답은 “좋다. 단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그리고 자기 힘으로 벌어서 해라”였다. ‘비서 아저씨’의 지인(知人) 가운데 작곡가 박춘석(朴椿石·1930~2010) 선생과 통하는 분이 있어 오디션을 봤다.
 
  “지구레코드를 찾아갔죠. 팝송을 불렀던 것 같은데, 무슨 노래였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잔뜩 긴장을 했었거든요. 박춘석 선생님께서 노래를 들어보시더니 앨범을 내주겠다고 하셨어요. 한마디로 ‘낙하산 데뷔’였죠.”
 
 
  박춘석이 이현을 키운 이유
 
작곡가 박춘석 선생과 이현.
  이현 본인은 ‘아버지 찬스’라고 했지만, 1972년 TBC 입사, 2002년 여수 MBC 대표이사를 끝으로 퇴임한 편성의 대가 오명환(吳明煥) PD의 견해는 다르다.
 
  “박춘석 선생은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다. 한 곡만 받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가수가 한둘이 아니었다. 아무리 집안이 좋았다 해도, 가능성이 없었다면 바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박춘석 선생에게는 가능성 없는 재능에 시간을 투자할 여력이 없었다는 뜻이다. 박춘석 선생은 이현을 정통 트로트와 팝송의 중간지대를 개척할 가수로 픽업한 것이다. 통기타 포크 뮤지션과는 다른 유형으로, 자기만의 색깔로 청년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가수. 외국에서 오래 생활한 귀공자풍의 이현은 그래서 한국 가요가 다양한 색깔로 분화하며 진화하는 데 크게 공헌한 가수 가운데 하나다.”
 
  6개월 동안 박춘석 선생은 이현을 조련했다. 창법, 호흡, 가사전달 등을 확실하게 배웠다. 매일같이 하루 7~8시간 반복훈련을 거듭하던 인고(忍苦)의 시절이다. 예명 이현(李玄)도 박춘석 선생의 작명이다. ‘본명 이헌(李憲)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아버님께 누가 되지 않을 거다’라며 만들어주었다.
 
  박춘석 작사·작곡의 데뷔곡 ‘내 사랑 지금 어디’(1970년 4월)는 발매되자마자 대히트했다. 고급스러운 마스크의 21세 청년이 나지막한 저음으로 부르는 사랑 노래에 모든 여성이 열광했다. 10대 소녀부터 50대 중년까지를 모두 사로잡는 캐릭터였다.
 
  1971년 2월에 나온 두 번째 앨범의 타이틀곡 ‘이별이 주고 간 슬픔’도 빅히트였다. 역시 박춘석 작사·작곡이었다. 이 노래로 이현은 MBC 〈금주의 히트곡 무궁화 인기가요〉 7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톱가수로 등극한다.
 
  이미지 확장과 변신을 시도하며 발매한 번안곡 ‘춤추는 첫사랑’(Ten Guitars) 역시 대박을 터뜨리며 3연타석 홈런. 그는 당대의 청춘스타로 떠올랐다. 노래뿐 아니라 〈유쾌한 청백전〉 등 예능 프로그램에 얼굴을 보이고 〈아름다운 청춘〉을 데뷔작으로 여러 편의 영화에도 출연했다. 〈아름다운 청춘〉(1971년, 김영걸 감독)에서 공연(共演)한 배우가 이예춘(李藝春)–이덕화(李德華) 부자(父子)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당시 동아제약이 첫선을 보인 음료수 ‘오란씨’의 광고 모델로도 2년간 활동했고 카네스텐이라는 여드름 치료제 CF도 찍었다. 청년들의 청량음료 오란씨 CF 파트너가 배우 윤여정과 김미영이다.
 
 
  아이돌 스타가 되다
 
이현의 음반들.
  이현은 그 시절의 아이돌이었다. 당시 한 신문의 기사 중에는 ‘팬들이 이현의 머리카락을 뜯어가고 옷을 찢어서 가지고 갔다’ ‘지방 공연차 묵은 숙소에 들어와 신발과 옷을 가져갔다’는 대목이 있다. 화제만발(話題滿發)이다 보니 사진 기자의 요청으로 ‘여성 팬을 피해 뛰는 이현’ 연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사진 속에서 ‘이현을 향해 뛰어오는 여성 팬’은 그의 여동생이다.
 
  “그땐 지방을 돌며 극장식 공연을 많이 했죠. 한번은 부산에서 대구로 이동했는데 제가 묵은 여관까지 부산의 여고생 팬들이 따라왔어요. 같은 건물에 방을 잡은 거죠. 야단을 치고 제 차에 태워서 집까지 보내줬습니다.”
 
  당시 이현의 인기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글이 있다. 박성서 평론가의 칼럼이다.
 
  “1970년 데뷔 첫해, ‘내 사랑 지금 어디’와 ‘첫사랑의 왈츠’로 TBC 방송가요대상 남자 신인상을 수상하는 이현은 이듬해인 1971년 2월에 발표하는 ‘이별이 주고 간 슬픔’으로 그해 5월, 일간스포츠 ‘가요베스트 20’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단숨에 톱스타 대열에 합류한다. 아울러 외모가 출중한 그는 스크린에도 진출, 김영걸 감독의 영화 〈아름다운 청춘〉에 출연. 하이틴 스타로 발돋움한다. 그의 히트곡 ‘이별이 주고 간 슬픔’도 이 영화에 삽입되었다. 아울러 이 무렵 옴니버스 음반 〈러브 스토리〉를 통해 발표하는 ‘춤추는 첫사랑’(Ten Guitars의 번안곡, 지명길 작사, 홍현걸 편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 이를 계기로 트로트 가수 이미지에서 벗어나 팝가수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1974년 KBS·MBC·TBC 10대 가수상 휩쓸어
 
  참고로 1971년 6월 25일부터 3일간 시민회관에서 열린 〈팝과 포크의 베스트 히트 플레이어쇼〉에서 이현은 팝가수를 대표해 무대에 오른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이 무대를 장식한 포크가수는 서유석, 쉐그린, 라나에로스포, 팝가수는 이현, 장미리 등이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팬층도 급격히 10대 위주로 확산되자 작곡가 박춘석 역시 이어 발표하는 ‘슬픈 행복’(1971년)을 타이틀로 한 음반에서 이 노래들을 포함해 ‘마음은 집시’ ‘고향의 푸른 잔디’까지 직접 편곡해 수록하기에 이른다. 때를 같이해 청소년들 사이에 불기 시작한 ‘이현 신드롬’은 스크린으로까지 이어져 영화 〈아름다운 청춘〉에 이어 출연하는 작품마다 10대들의 발길을 극장으로 불러모았다.
 
  어느새 각 방송사의 주요 프로그램마다 빠지면 안 되는 스타로 부상함과 동시에 1971년 동아방송 개국 8돌 인기가수퍼레이드, MBC 개국 10주년 올스타 쇼에 이어 1972년 동아방송 개국 9주년 기념공연까지 주요 행사무대에 올라 인기를 증명해 보였다. 1972년과 1973년, 그의 질주는 거침이 없었다. 이 2년이라는 기간 동안 무려 7장의 독집음반을 발표한 것이다. 아울러 1973년 MBC 10대가수상까지 수상한다.
 

  이때 발표한 독집음반들을 살펴보자면, 〈모래집/인형의 사랑〉(1972년), 〈먼 여로〉(1972년), 〈임은 어디에/타향등〉(1972년)을 비롯해 지구에서 오아시스로 전속을 옮겨 발표하는 〈오아시스 전속기념음반/잊지마〉(1973년), 〈잘 있어요/애원〉(1973년), 〈내 너를 만나서〉(1973년) 등이다.
 
  이 노래들의 인기가 채 식기도 전인 1974년, ‘똑같애’ ‘불타는 사랑’ ‘불량소년’ ‘라라라’ ‘너를’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당시 3대 방송사인 KBS, MBC, TBC가 시상하는 10대가수상을 모조리 휩쓴다. 좀 더 상세히 소개하자면, 1974년, 그해 9월에 열린 ‘제10회 TBC 방송가요대상’을 시작으로 12월 2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MBC 10대가수상’, 같은 달 28일 ‘TBC-TV 7대 가수상’ 수상에 이어 12월 30일에 열린 ‘제3회 KBS 연예대상 남녀 10대가수상’까지 모조리 거머쥔 것이다.
 
 
  대학 졸업과 함께 활동 접어
 
  또한 영화배우로서, 하이틴 스타로서 그는 ‘겹치기 출연’까지 해야 할 정도로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심지어 세 편의 영화를 동시에 촬영하고 있다는 보도도 눈에 띌 정도. 그가 출연한 영화들을 살펴보면 스크린 데뷔작인 〈아름다운 청춘〉을 시작으로 〈별난 장군〉(1972년, 변장호 감독), 〈청춘교사〉(1972년, 김기덕 감독), 〈뜨거운 영광〉(1973년, 편거영 감독), 〈방년 18세〉(1973년, 이원세 감독), 〈처녀시절〉(1973년, 이성구 감독) 등 주로 하이틴 물. 각각의 상대역 또한 당시 인기 정상의 하이틴 스타들인 임예진, 안인숙, 이영옥, 서미경, 주미 등과 호흡을 맞췄다.
 
  아울러 당시 ‘문화영화’라는 이름으로 제작되었던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1972년), 〈웃고 노래하는 팔도유람〉(1973년), 〈노래 실은 금수강산〉(1974년) 등에 출연해, 거리에는 온통 그의 사진이 실린 영화포스터가 나붙었다. 라디오와 TV에서는 연일 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거침없이 인기가도를 질주하며 전성기를 구가, 스테이지와 스크린을 동시에 장악하던 1975년. 그러나 〈누구일까/언약〉 음반을 마지막으로 모든 활동을 접고 지금까지도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가수 이현.
 
  5년간 11장의 앨범을 발표했고 발매하는 앨범마다 히트곡을 내며 승승장구하던 이현이 갑자기 사라진 때는 1975년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하루는 아버지가 절 부르시더니 말씀하시더군요. 당장 관두라고. 끝났으니까. 학교 다니는 데 가수 활동이 도움이 된다면 하라고 한 건데 졸업했으니 끝난 거라고.”
 
  레코드사와 계약을 갱신하고 막 음반을 발매한 직후였다. ‘계약’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했지만, 이형근 장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계약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음반사에서도 국가유공자를 예우해 계약 위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제가 법관이 되길 바라셨어요. 제 가수 활동을 좋게 생각하지 않으셨죠. 외할머니도 제가 신인상 받고 세배드리러 갔을 때 돌아앉아 우셨어요. 그땐 집에서 아버지가 자식한테 뭐 하지 말라고 그러면 더 할 수가 없었죠. 다들 그랬던 시대니까. 가수가 몰래 할 수 있는 직업도 아니잖아요? 그래서 관두게 됐습니다.”
 
 
  디스코텍 ‘스튜디오 80’ 차려
 
  LP와 사진을 다 소각하고 각종 트로피도 내다 버렸다. ‘무언(無言)의 시위’였지만 아버지의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가수 시절을 추억할 자료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정말 단 한 점도 남아 있지 않다.
 
  은퇴 이후 사업을 하며 가요계와의 연을 끊었지만, 노래를 향한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창 노래의 맛을 알아가던 시기에 딱 그만뒀기 때문이다. 무대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에 1979년 강남역 뉴욕제과 뒤에 디스코텍 ‘스튜디오 80’을 오픈했다. 친구인 복싱 세계챔피언 홍수환(洪秀煥)이 영감을 줬다. 홍수환 챔피언이 운영하던 이태원 스포츠 댄스 클럽을 보고 ‘이거다’ 싶었다. 홍수환 챔프도 ‘네가 하면 잘될 것’이라며 용기를 줬다. 300평 규모로 꽤 크게 터를 잡은 ‘스튜디오 80’은 고(故) 이주일 등 당대 톱스타들이 무대에 섰던 장안의 명소였다. 몰려드는 손님을 밀어낼 정도로 번창했지만 1년 후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아버지 때문이다.
 
  명절 때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동생들과 이야기하다 가게 이야기가 나왔다. 이형근 장군에게 얘기했던 업종은 ‘음악감상실’. 며칠 후 예고도 없이 이형근 장군이 ‘스튜디오 80’으로 찾아왔다. 그러고 아들에게 당장 가게를 접으라고 했다. 이후로는 정말로 은둔의 삶을 살았다. 인테리어, 건축, 통신 등 사업에 전념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가수 이현은 ‘잊힌 전설’이 되어 대중의 아련한 기억 저편으로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 갔다.
 
 
  태어나자마자 세상 떠난 어머니
 
이현의 가족이 총출동한 비타민 아로나민의 광고. 이형근 장군은 어머니를 일찍 여읜 이현에 대한 미안함에서 온 가족이 광고에 나오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이형근 장군의 일관된 자세가 보여주듯 장군은 아들이 연예인이 된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절대불가(絶對不可)였다. 이형근 장군이 특별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시 사회 지도층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오히려 한시적이지만 가수 생활을 허락한 것이 더 이례적인 결정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가수 생활을 허락한 건 마음의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의 생일은 1950년 9월 7일. 하지만 생일을 축하할 수 없다. 본인도 생일 축하를 받을 마음이 없다. 이날이 어머니의 제삿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를 낳고 어머니가 바로 돌아가셨어요. ‘아들이냐, 딸이냐?’고 물으시고는 할머니가 ‘아들이다’라니까 ‘한번 안아보자’라고 하시고는 바로 돌아가셨다고 해요. 글자 그대로, 저를 ‘딱 한 번’만 안아보신 거죠. 그래서 저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움은 있는데 얼굴도 모릅니다. 모습도 사진으로밖에는 뵙지 못했으니까요.”
 
  사인(死因)은 임신중독이다. 인천 상륙작전 결행일이 1950년 9월 15일이니 이현의 어머니 이혜란(李惠蘭) 여사는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고 대한민국이 벼랑 끝에 몰렸던 시기에 아들을 출산한 셈이다. 출생지는 임시 수도 부산이다. 이형근 장군은 부산 출신의 유명한 의사 박기출(朴己出·1909~1977) 박사의 댁에서 세를 살았다. 진보당(進步黨) 조봉암의 정치적 동지로, 1967년 7대 대선 때 국민당 후보로 출마, 4위로 낙선한 바로 그 사람이다(득표율 0.36%).
 
  이현 집안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현이 태어나고 불과 17일이 지났을 때 다른 가족이 세상을 떠났다. 작은아버지 이상근(李尙根·1922~1950년)의 전사(戰死)다. 이형근의 바로 아래 동생이던 육군 수도사단 이상근 대령은 9월 24일 영천지구에서 전사했다. 이 대령은 사후(死後) 준장으로 1계급 추서됐다. 이상근의 생애를 극화한 영화가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증언〉(1974)이다. 이상근 장군의 역할을 맡은 배우는 김진규다. 집안도 나라도 안팎으로 전시(戰時)요 비상시국이었던 것이다.
 
 
  알 수 없는 슬픔이 깃든 노래
 
  만삭의 임신부와 갓난아기를 섬세하게 돌볼 상황이 아니었다. 혼란의 와중에서 이현을 기른 건 할머니다. 그의 그리움은 그래서 그윽하고 아득하다. 허무하고 공허한 마음은 소년을 점점 내성적으로 만들었다. 어린 시절 소풍을 가면 늘 장기자랑에 나가 노래를 불렀으니 내향(內向)과 외향(外向) 어느 편이 더 천성(天性)에 가까운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어머니의 부재(不在) 때문이었을까, 올드팬들은 ‘가수 생활을 할 때도 이현은 어딘지 모르게 우울하고 쓸쓸하며 그래서 모성(母性)으로 품어주고 싶은 가수’였다고 말한다. 아무리 신나는 노래를 불러도 그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 많이 들었죠.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아, 내가 어머니를 이렇게 그리워하는구나, 다른 사람 눈에도 그것이 보이는구나 라고 생각했죠. 그렇다고 어머니 얘기를 하기는 좀 그랬어요. 어머니 얘기는 오늘 처음 털어놓는 겁니다.”
 
  박춘석 선생은 이 사실을 알았다. 알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주변에서 눈치챌까 봐 사연을 살짝 바꿔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어 이현에게 주었다. 1971년에 나온 ‘그리운 어머니’라는 노래다.
 
  “저에게 별말씀 없으시다가 박춘석 선생님이 어느 날 무심한 듯 ‘이 노래 한번 불러봐’라시며 악보를 주셨어요. 영화 주제가라고 하시더라고요. 어느 잡지에 감정을 잘 살려서 노래했다고 기사가 나왔는데, 그냥 제 얘기니까 감정을 살리고 말고 할 것이 없었죠. 이 노래를 부르면서 힐링이 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음속 어머니와 다시 만나는 느낌이었으니까요. 이 자리를 빌려서 고(故) 박춘석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어머니와는 그렇게 만나셨는데, 그럼 아버님은 어떠셨습니까? 가수 이현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셨나요.
 
  “아뇨, 인정하셨죠. 인정하시기는 했는데…. 아버지가 2002년 작고했는데 병환으로 오래 누워 계셨어요. 그때 저한테 ‘넌 가수를 하는 게 나을 뻔했다’는 말을 하시더군요. 기뻤지만, 좀 허무했죠. 그냥 좀 하게 놔뒀으면 제 나름대로 성과를 좀 냈을 텐데, 중간에 뚝 잘라버리고…. 그걸 몇십 년 지나서, 다 지나간 다음에 그걸 했으면 좋았을걸 그랬다는 건…. 제 딴에는 부친 말씀 듣겠다고 그만둔 건데, 결과적으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황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아버지의 깊은 뜻은 제가 모르지….”
 
 
  40년 만의 복귀
 
이현의 복귀를 알리는 공연 포스터.
  ― 본인이 가장 아끼는 곡은 어떤 노래입니까.
 
  “제가 쭉 찾아보니까 취입한 노래가 103곡이 되더라고요. 아낀다기보다 마음의 큰 빚으로 남아 있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장(死藏)된 노래들이죠. KBS 악단장을 하셨던 이길봉 선생님이 주신 ‘누구일까’, 심영섭 선생님이 쓰신 ‘언약’이란 노래가 있어요. ‘똑같애’의 작곡가 진남성씨가 주신 노래도 있고. 제 마지막 앨범에 실린 노래들입니다. 녹음 다 마치고 음반 나오기 직전에 제가 활동을 접으면서 묻힌 노래들입니다. 판은 나왔지만 가수가 사라졌으니 홍보를 할 수가 없었죠. 제작사한테도 미안하고, 심혈을 기울여서 좋은 곡을 써주신 작곡자분들 뵐 면목도 없어요. 지금 들어도 좋은 노래들인데 정말 죄송할 따름입니다.”
 
  홀연히 사라졌던 가수는 40년이 훌쩍 지나 팬들을 찾아왔다. 2012년 5월, 5명이 마음을 모았다며 팬카페를 만들겠다고 했다. 동호회처럼 소통하자는 생각에서 좋다고 했다. ‘추억의 70년대 ♡ 가수 이현 팬카페’다. 흩어져 있던 중장년 팬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들었다. 자기들끼리 앨범 자료를 정리하고 노래 영상을 편집해 유튜브에 올렸다. 방송국에서도 연락이 왔다. 여러 차례 출연을 거절하다 ‘딱 한 번’만 하기로 하고 카메라 앞에 섰다. 2014년 7월 KBS 〈콘서트 7080〉이었다.
 
  모습이나 한번 보여주자고 가볍게 생각한 출연이었기에, 의상도 보통 양복을 입고 나갔다. 그런데 기대감에 차서 무대를 바라보는 팬들을 보니 문득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송하기 전까지는 노래를 다시 하겠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자신도 없었고 계획도 없었죠. 속으로 그랬어요. 한 번 하고 다시 할 거 아니니까 모습만 보여주자. 그런 기분으로 했다가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습니다. 연습이라도 확실히 하고 나갈걸. 그런데 무대에서 느낌이 온 겁니다.
 
  녹화 예고가 나갔는데, 녹화 당일 정말 많은 분이 찾아주셨어요. 그것도 음식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공개홀까지 오셨습니다. 울컥했죠. 제가 뭐라고, 40년간 얼굴 한 번 안 비치던 사람을 이렇게까지 환영해주나…. 예전에 노래 몇 곡 불렀다고, 다 가라앉은 나 같은 사람을 이렇게 챙겨주시는 분들은 누군가.”
 
  그래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팬들의 격려와 응원 덕분이다. 무엇보다도 노래 부르는 것이 즐거웠다.
 
 
  다시 가수가 되다
 

  “팬들이 그러시는 겁니다. ‘어느 날 이현에 대해 뭘 찾아보려고 인터넷에 들어가도 자료가 거의 안 나오더라. 그래서 추억을 즐길 수가 없다’. 제가 처음 이 사회에 나와서 직업이 가수였잖아요. ‘그렇다면, 팬들의 사랑에 보답하는 길은 노래를 다시 하는 거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의(自意)로 활동을 중단했던 것도 아니니까 그 마음이 안 지워지더라고요.”
 
  출연 승낙 후 매일 악몽을 꾸었다는 가수는 지금부터는 자신의 꿈에 충실하기로 했다. 다시 신인의 마음으로 연습을 재개하고 2020년에 장욱조 작곡가에게 곡을 받아 앨범을 냈다. ‘멋지게 살아갈 거야’ ‘누가 주고 갔나요’ 두 곡이 담긴 CD다. 1975년 마지막 앨범 이후 무려 45년 만에 나온 신곡이다. 주저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CD를 내며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서 이현의 소망은 현재진행형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지금은 무대가 다 사라졌지만, 팬들과 소통하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노래하고 싶어요. 불러주시는 무대가 있다면 어디든 갑니다. 저를 잊지 않고 기다려주신 분들에게 보답하겠습니다.”
 
  코로나19가 종식돼 관중이 들어찬 축구장 응원단 앞에서 그가 마이크를 잡고 ‘잘 있어요’를 부르는 상상을 했다. 노래는 이내 합창으로 변할 터이다. 1970년대와 2020년대가 노래를 통해 서로 만나고 소통하는 그림이다. 역사(歷史)는 죽거나 사라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세대를 뛰어넘은 응원가를 부르며 확인하고 싶다. 그 노래엔 우리 모두의 열정이 담길 것이다, 아주 커다랗고 힘찬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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