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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의 라운지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정호승

“詩는 한 번도 나를 버리지 않았다. 다시 태어나도 시인”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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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는 침묵으로 이뤄지는 것, 말이 많으면 산문이 된다”
⊙ 추미애 장관, SNS 메시지 쓰며 시 ‘산산조각’ 인용, “시는 읽는 사람의 것, 시인이 무슨 말을 하겠나”
⊙ “요즘 세상이 답답, 잠수함 속 토끼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닐까”
⊙ 온라인에서 훼손되는 시, “종이책으로 원문 읽어야”
⊙ 산문집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출간 두 달 만에 10쇄 찍어

鄭浩承
1950년 출생. 경희대 국문과, 同 대학원 졸업 /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동시),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시),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단편소설) 당선 /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밥값》 《여행》 《당신을 찾아서》 등 13권, 시선집 《수선화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 어른들을 위한 동화집 《항아리》 《연인》,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내 인생에 용기가 되어준 한마디》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등 출간 / 소월시인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상화시인상, 지리산문학상, 공초문학상 등 수상
사진=조준우
  일 년에 하루 사람들은 순해진다. 첫눈이 오시는 날이다. 첫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곧 시작될 한파의 시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늘은 첫눈을 내려보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난 세월의 첫눈이 아득해졌듯, 오늘도 곧 과거가 된다고…. 그래서일까. 어른의 땅에 닿은 첫눈은 그리움으로 기화(氣化)한다.
 
  지난 1월 5일 서울 가회동의 김영사 사옥으로 향했다. 정호승(鄭浩承·71)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이튿날 눈이 내린다는 기상청의 예보를 확인하며 작가를 기다렸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지난해 11월 출간한 산문집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시(詩)에 관심이 없는 이라도 정호승 시인의 시는 한 번쯤 읽어봤을 터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수선화에게’ 중)
 
  “마음 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고래를 위하여’ 중)
 
  모두 그가 쓴 시구(詩句)다.
 
  시와 수필을 합쳐 거의 작품 수십 편이 초·중·고 교과서에 실려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은 정호승 시로 한국어를 공부하고, 청년들은 마음에 고래를 품자는 시구에서 희망을 충전한다. 두려움에 휩싸인 이들은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산산조각’)라는 구절에서 평정심을 건네받는다. 살아 있는 한국 시인 중 아마 가장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시인일 것이다. 지난해 11월 출간한 산문집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는 두 달 만에 10쇄를 찍었다.
 
  개인적으로 그에게 궁금한 게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한때 기자였다. 《월간조선》과 《여성동아》 《샘터》에서 젊은 시절 한 시기를 보냈다. 기자를 하며 어떻게 그런 정서를 지켜냈을까,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궁금했다. 기자라고 늘 뒷골목만 들여다보는 건, 시인이라고 평생 별이며 꽃만 바라보고 사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마주 앉자마자 물었다.
 
  ― 기자생활 하실 때 힘들지 않으셨어요.
 
  “힘들었어요. 저는 소설에 대한 꿈이 있었어요. 평범한 회사원도 아니고 잡지 기자로 일하다 보니 마음에 여유가 없는 거예요. 써야 하는 원고도 많았고요. 다니면서 취재하는 게 힘들어서, 나중엔 ‘진행’이라는 자리를 자원해 맡았어요. 전체 기사 상황을 조절하는 자리예요. 마음속으로 생각했어요. ‘소설은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쓰자.’”
 
 
  점심을 거르며 詩作
 
  ― 시는 계속 쓰셨지요.
 
  “월간지다 보니 기사 마감이 끝나고 일주일은 여유가 있었어요. 덕수궁 석조전 지하에 자료실이 있었어요. 도서관처럼 칸막이가 있는 책상도 있었는데 마감 후 일주일 동안은 보통 점심을 안 먹고 거기에서 시를 썼어요. 그렇게 낸 시집이 《새벽편지》예요. 회사에선 제가 시를 쓰는지 잘 몰랐어요. 티를 안 냈거든요.”
 

  ― 애초에 왜 기자가 되셨어요.
 
  “원래 국어 교사가 되고 싶었어요. 고등학생 때 포항 방어진이라는 곳에 갔어요. 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갔는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솔숲이 있었어요. 걷다 보니 학교가 있어요. 방어진 중학교예요. 바다가 보이는 그 학교를 보면서 국어 교사가 되면 좋겠다 생각했어요. 굉장히 노력해서 국어 선생이 됐어요.”
 
  ― 숭실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죠.
 
  “제가 교사로서 자질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어요. 이상과 현실은 다르잖아요. ‘내가 공부가 안 돼 있는데 누구를 어떻게 가르치나’ 했죠. 당시에 교사용 지침서가 있었거든요. 그런 걸 보면서 미리 읽고 준비해서 전달하는 역할밖에 안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안 되겠다, 누굴 가르치는 건 절대 해선 안 된다’ 하는 생각이 들어 3년 반 만에 그만뒀어요.”
 
  ― 아무 계획 없이 그만두신 겁니까.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죠. 한 달 지나니까 불안하더라고. 잡지사 모집 공고를 봤어요. 처음엔 《주부생활》이라는 잡지에 갔다가 함께 일하던 부장을 따라 《샘터》로 갔어요. 친구가 권해서 다시 《동아일보》 출판국으로 옮겼는데, 《가정조선》(현 《여성조선》)에서 옮겨오라는 제의가 왔어요. 《가정조선》에 있는데 《월간조선》으로 발령이 났어요.”
 
 
  글은 살면서 쓰는 것
 
1973년 경희대 문리대 언덕길에서 황순원 교수(왼쪽)와 정호승 시인. 사진=정호승 제공
  ― 아무래도 기자생활을 하면서 긴 호흡이 필요한 소설을 쓰는 건 힘드셨겠어요.
 
  “그런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에요. 글이라는 건 살면서 쓰는 거잖아요. 언제까지 쓰고 언제부터는 안 쓰고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마흔이 되면 직장을 그만두고, 그때부터 소설을 쓴다’ 그러면서 소설을 안 쓴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무모한 생각이었죠.”
 
  ― 진짜 회사를 그만두셨나요.
 
  “1991년에 그만뒀어요. 마흔한 살이었어요. 정작 가족들은 안 말리는데 부장이 세 번이나 말렸어요. 그래도 그만뒀어요. 그만두고 소설만 썼어요. 1991년부터 1997년까지 실컷 고생했죠. 쓰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안 되더라고요.”
 
  짝사랑만은 아니었다. 그는 1982년에 이미 소설로 등단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위령제〉가 당선됐다.
 
  “제가 고등학생 때 친형이 의과대학생이었어요. ‘글을 쓰려면 이런 걸 봐야 한다’며 일요일에 해부학 교실에 데려가 줬어요. 포르말린 탱크 속에 시체들이 둥둥 떠 있고, 해부대로 갔는데 시체를 붕대로 감싸놨어요. 수분이 날아가지 않도록요.”
 
  ― 무섭지 않으셨어요.
 
  “역시 무서운 건 머리카락이에요. 죽은 사람의 머리카락은 무서워요. 해부대 위 시신도 붕대로 전신이 감겨 있는데도 머리카락은 나와 있었어요. 어릴 때 길에서 얼어 죽은 사람을 가마니로 덮어놓은 걸 봤는데, 발하고 머리카락이 나와 있었어요. 발은 안 무서운데 머리카락은 그렇게 무섭더라고. 형이 해부한 걸 보여주면서 이것저것 설명해줬어요. 해부가 다 끝나면 고인을 위해 위령제를 올려줘요.”
 
  ― 그래서 소설 제목이 〈위령제〉군요.
 
  “대학 은사인 황순원 선생님이 심사를 맡으셨어요. 황 선생님은 제자들 작품이면 좋든 나쁘든 아예 안 뽑아주셨어요. 저는 큰아들 이름으로 출품했어요. 당선이 됐다고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기에 털어놨죠. ‘사실 나는 시 쓰는 누구다’ 이미 당선됐는데 어쩌겠어요.”
 
  ― 황 선생님은 뭐라 하시던가요.
 
  “전화해서 ‘죄송합니다’ 했더니, 칭찬하시면서 열심히 하라고 하셨어요. 그러지 못했으니 죄송하죠. 저 때문에 그해 신춘문예에서 떨어지신 분이 계실 텐데 그분에게도 미안하죠. 열심히 했으면 안 미안할 텐데요.”
 
 
  6년간 매달린 소설
 
  소설 작업에 열중하던 그는 1993년 소설을 발표했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 3권짜리 장편소설이었다. 10·26과 김재규를 다뤘다.
 
  ― 소설을 내셨잖아요? 지금 생각엔, 주제가 뜻밖이지만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죠.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요. 소설 공부를 하려면 직장생활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메모해나가면서 하루에 단지 원고지 두세 장이라도, 누에가 뽕잎을 갉아 먹듯이 써야 하는 거예요. 저는 그걸 몰랐어요.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 안다는 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시간의 대가를 너무 많이 치렀어요. 41세부터 47세까지 소설 쓴다고 시간을 그냥 흘려보냈어요. 열심히 뭔가 하긴 했어요. 읽고, 쓰고.”
 
  ― 어떤 시점엔 포기하신 거네요.
 
  “1996년 가을쯤이었어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마다 자신의 문학적 기질에 맞는 장르가 있다. 나는 소설에 대한 문학적 기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시적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 이걸 깨닫는데 6, 7년을 바친 거예요. 누가 가르쳐줬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러면서 가만히 생각하니 이러다 시도 못 쓰겠다 싶었어요. 1991년 시집 《별들은 따뜻하다》 이후엔 시를 한 편도 안 썼거든요.”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1968년 대학 1학년생이던 정호승 시인이 모친과 경희대 본관 앞에서. 사진=정호승 제공
  ― 6년 만에 시로 돌아가셨군요.
 
  “1996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어요. 원고를 다 쓰고 나니 1997년 봄이 됐어요. 1997년 6월에 나온 시집이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예요. ‘내가 다시 시를 써서 시집을 내면 이 제목으로 시집을 내겠다’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제목이에요.”
 
  ― 어디에 나온 말인가요.
 
  “해인사에서 나오는 《해인》이라는 사보를 받아봤어요. 중국의 임제(臨濟) 선사(禪師)가 하신 말씀이 실려 있어요. ‘공부하다가 죽어버려라’,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이 말씀이 큰 화두(話頭)로 다가왔어요. 40대 후반이 됐잖아요. 지금까지 살면서 누구를 진정 사랑했는가. 동시에 아직도 사랑에 연연하는가 이런 생각들을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생각이죠. 죽을 때까지 사랑에 연연해야죠.”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출판사 추산 15만 부 이상 팔려나갔다. 소설가 정호승은 죽어버리고 시인 정호승으로 부활한 셈이다.
 
  ―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직장생활은 계속할 건가요.
 
  “안 그만두죠. 그거야말로 만용입니다. 어리석은 사고를 갖고 있었어요. 문학은 현실 속에서 형성되는 겁니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열심히 직장생활 하면서 잠을 줄여가며 소설을 쓰든지 시를 쓰겠죠. 소설과 시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했어요.”
 
  ― 후회하십니까.
 
  “인생이 후회의 점철이잖아요. 후회가 후회를 낳고, 후회 속에서 후회의 방향이 형성되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가지요. 후회는 되지만 어쩌겠어요. 시간은 자기가 만드는 거지 어디서 주어지는 게 아니에요. 시간이 주어지면 시집도 많이 내고 소설집도 많이 낼 거라는 생각은 사실은 헛된 망상이 아닐까 싶어요.”
 
 
  詩의 첫 행은 神의 선물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에 수록된 시 ‘그리운 부석사’의 첫 행이다. 그의 시를 가만히 읽다 보면 첫 행, 첫 문장부터 울컥한 경우가 많다.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그대 떠난 뒤에도/ 내 그대를/ 사랑하기에 아직 늦지 않으리”(‘이별노래’)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풍경 달다’)
 
  “꽃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 별이 진다고 그대를 잊은 적 없다”(‘꽃이 진다고 그대를’)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 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달팽이’)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시의 첫 행은 신(神)의 선물’이라는 말이 있거든요. 첫 행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소설도, 기사도 첫 문장, 리드가 중요하잖아요.”
 
  ― 기사 쓸 때 첫 문장 쓰면 절반 쓴 거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시도 그래요. 시 첫 행에서 다 얘기하는 거예요.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사실은 이걸로 끝나는 거예요. 그다음 행들은 보충할 뿐이죠.”
 
  염무웅 문학평론가는 그의 시를 평하며 이런 표현을 썼다. ‘예의 바른 사람과 오래 앉아 있을 때 느끼는 불편함 같은 것’.
 
  ― 염무웅 평론가의 평가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염무웅 선생님을 20대 때 만났어요. 많은 문학인이 개방적이고 자유스럽고, 때로는 다른 이한테 엎어지기도 하고 욕도 하며 자기를 드러내잖아요. 저는 안 그렇습니다. 염 선생님은 다양한 문인들을 만나셨는데 저 같은 사람은 못 만나신 거죠. 불편할 수 있어요. 시도 그렇습니다. 자유분방하고 정제되지 않은 시를 쓰려면, 차라리 산문을 쓰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 요즘 발표되는 한국 시 중엔 산문시가 꽤 많은데요.
 
  “시는 침묵으로 이뤄지는 거다, 침묵만 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몇 줄 쓰는데 다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저의 고정관념이자 편견이겠죠. 시는 맑고 깨끗한 방향을 지향한다, 시에 욕설은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시 정신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은유잖아요. 은유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산문으로 빠져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말이 많으면 산문이 되는 겁니다.”
 
 
  “나이 들면 詩가 짧아져”
 
2016년 4월 대구 범어천 광장에 정호승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시 ‘수선화에게’가 새겨져 있다. 사진=조선DB
  ― 시는 침묵으로 이뤄지는군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중엔 별로 할 말이 없잖아요. 두 사람 사이에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사랑이지요. 그것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있으면 굳이 그 말을 안 해도 되잖아요. 시도 마찬가지예요. 시가 제 인간적 기질에 맞는 거예요. 단순하고 장치가 없고 화려하지 않고 절제된.”
 
  ― 예전엔 산문시도 쓰셨잖아요. ‘서울의 예수’는 꽤 긴 산문시입니다.
 
  “저도 젊을 땐 길게 썼어요. 노인이 되면 말도 많고 간섭도 많아진다는 게 일반적인 이야기지만, 사실 늙어간다는 건 점점 할 말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적극적으로 해야 할 말들을 했지만, 지금은 많은 말을 안 하고 축약하게 돼요. 인생이 짧다는 걸 아니까 시도 짧아져요. 많은 시인이 나이 들면서 시가 짧아져요.”
 
  그의 시 ‘미안하다’도 참 짧다.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기억에서 열정이 휘발되면 그 끝엔 미안함이 남는다.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단숨에 쓴 시라고 시인은 말했다.
 
  “단숨에 쓴 흔적이 보여요. ‘풍경 달다’도 그래요. 산사 처마 밑에 풍경을 달고 운주사에 갔어요. 와불님 구경하고 산사로 돌아온 밤에 쓴 시예요. 종이쪽지에 썼어요. 크게 손대지 않고 단숨에 완성했어요. 그 시가 많은 독자에게 사랑을 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 대표 시 중 하나로 꼽히지요.
 
  “시인들에겐 한두 편의 대표작이 있잖아요. 윤동주는 ‘서시’ ‘별 헤는 밤’, 서정주는 ‘국화 옆에서’ ‘추천사’, 이육사는 ‘절정’, 김소월은 ‘진달래꽃’. 시인이 스스로 정하는 건 아니에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경로와 원인을 통해 결정되는 겁니다. 내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에 제 대표 시로 결정된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근데 이런 생각은 들어요.”
 
  ― 어떤 생각이죠.
 
  “시 ‘슬픔이 기쁨에게’가 대표작이 될 줄 알았으면 그 후엔 시를 안 써도 됐을 텐데…. 편하게 다른 일 하면서 살았을 텐데 그건 20대에 썼거든요. 그런데 사실 그게 아니에요. 평생 써야 그게 대표작이 되는 거예요. 시인들은 평생 써야 한두 편이 남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일평생 시를 써야 대표작이 꼽히는 시인의 반열에 입후보할 자격을 받는 것 같다.
 
 
  메모하는 습관
 
정호승 시인과 동화작가 정채봉(오른쪽). 사진=정호승 제공
  ― 시를 쓸 때 제목부터 정하고 쓰시나요.
 
  “시인마다 스타일이 다른데 저는 제목을 먼저 정합니다. 나중에 바뀔 수는 있어요. 90% 이상은 정해둔 제목대로 가지요.”
 
  ― 시는 일주일에 한 편 쓰는 식으로 꾸준히 쓰셨나요.
 
  “저는 시를 몰아서 씁니다. 평소에 메모한 걸 두고, 두 달이든 넉 달이든 고조된 마음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씁니다. 일단 쓰기 시작하면 무지하게 많이 씁니다. 지난해 1월에 《당신을 찾아서》 시집을 냈어요. 수록된 시가 125편이에요.”
 
  ― 한 권에 담긴 시 분량으론 많네요.
 
  “많이 쓰는데 어떡해요. 버리고 추린 게 그 정도예요. 2~3년에 걸쳐서 쓴 시들이지만, 2~3년에 걸쳐 쓴 건 20~30편밖에 안 됩니다. 나머지 100편은 집중적으로 6개월 동안 쓴 겁니다.”
 
  ― 시를 위한 메모를 많이 해두시나 봐요.
 
  “옛날부터 많이 했어요. 그때그때 느낌과 생각을 메모해놓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메모해놓지 않으면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려요. 기억력을 믿으면 안 됩니다. 동화작가 정채봉씨도 항상 메모를 했어요. 저는 지금은 그때그때 스마트폰에 메모해요. 갤럭시 노트로 스마트폰도 바꾸려 해요.”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메모장을 보여줬다. ‘아득하다’라는 단어가 보였다.
 
  “‘아득하다’라는 말이 어느 날 다가오는 거예요. ‘아득하다 시 제목’ 이런 식으로 메모해둡니다. 그러곤 노트북 파일에 옮겨 적어요. ‘써야 할 시’ ‘쓰고 있는 시’ 식으로 파일들을 만들어둡니다. 시 제목으로 파일을 만들어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거기에 메모를 해두는 거죠. ‘이런 생각은 아득하다에 들어가면 좋겠다’ 싶으면 ‘아득하다’라는 파일에 계속 써넣어요.”
 
  ― 그러다 어느 날 시가 되는 건가요.
 
  “계속 써넣다 보면 A4 기준으로 두세 장 정도가 돼요. 그중 건질 수 있는 한두 개가 시를 완성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 한 번에 시를 완성하시나요.
 
  “끊임없이 고칩니다. 출간할 때까지 고쳐요. 재교, 3교, 더 고치고 싶은데 그러면 책을 못 내잖아요. 3교쯤에서 멈추죠. 시집이 나와서 읽어보면 고쳐야 하는 게 또 눈에 띄어요. ‘아 이 부분은 빼야 했었다, 이 작품은 버려야 했었다’… 그래서 저는 시집이 나오면 한 번 읽고 안 읽습니다.”
 
  얼마 전 그의 시가 정치 뉴스에 등장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때문이었다. 추 장관은 사의 표명 사실이 알려진 직후인 지난해 12월 16일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공명정대한 세상을 향한 꿈이었다”며 정 시인의 시 ‘산산조각’을 인용했다.
 
  ― 인용 소감(?)을 묻는 전화를 많이 받으셨습니까.
 
  “많이 왔어요. 이렇게만 말했어요.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시는 읽는 사람의 것이에요. 그게 어떻게 읽히든 시인은 자기 의견을 나타낼 수 없죠.”
 
  ― 추미애 장관은 예전에도 여러 번 정 시인의 시를 인용했습니다. ‘바닥에 대하여’나 ‘나무에 대하여’를 소셜미디어(SNS)에 올렸어요.
 
  “그분은 시와 가까이 계신 분인 거 같아요. 시집 《새벽편지》에 ‘부치지 않은 편지’라는 시가 있어요. 박종철 열사의 죽음을 기린 시예요. 여기에 백창우씨가 곡을 붙였지요. 나중에 정식으로 녹음하자며 김광석씨가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며 녹음했어요. 그 다음 날 아침에 김광석씨가 죽었잖아요. 그의 육성이 남은 마지막 노래가 됐지요.”
 
  ― 요즘도 자주 불리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노무현 대통령 추모곡으로 불렸어요. 그 후엔 노회찬 의원의 추모곡으로 불렸고요. 이렇게 시는 어디에 한정되어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건 박종철 열사를 위해 썼기 때문에 박종철기념사업회에서만 사용해야 한다’고 할 순 없잖아요. 시는 만인의 것입니다. 시인 자신도 그렇지만 다른 사람도 뭐라고 해서는 안 돼요. 보도블록 틈새의 민들레를 보고 있는 노숙자에게 ‘노숙자 주제에 왜 꽃을 보냐’고 하면 되겠습니까. 시는 계층과 세대와 국가와 이념을 초월합니다.”
 
 
  시인과 칼럼
 
  그의 바람과 달리 그의 글이 이념 논쟁에 걸려든 적이 있다. 두 편의 칼럼 때문이었다.
 
  “2009년 5월이었어요. 강연하러 기차를 타고 가는데 전화가 왔어요.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그날 바로 글을 써달란 요청이었어요. 기차 안이라 못 쓴다고 거절했는데 거듭 전화가 와요. 전화로라도 불러 달라는 거예요. 할 수 없이 종이를 꺼내 적은 다음 전화로 불렀어요.”
 

  ‘대통령은 세상을 버릴 자격이 없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그의 칼럼 ‘슬프다 슬프다 슬프다’는 당시 상당히 화제가 됐다. 예상치 못한 비판도 날아왔다. 이 대목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나는 노 대통령 시대를 살아온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그의 죽음을 어떻게 용납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이것은 국민인 나의 숙제이자 우리 국가의 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노 대통령께서 쓴 유서에는 우리 국가의 앞날에 대한, 통일 조국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당부의 말씀이 없다.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국민에 대한 어루만짐이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러셨을까.〉
 
  그의 말이 이어졌다.
 
  “온갖 욕을 다 먹었어요. 한국작가회의 총회에선 정호승 제명 연판장이 돌았어요. 당시 이시영 작가회의 이사장이 딱 잘랐어요. ‘작가회의는 문학을 위한 집단이다.’ 제명은 없었던 일로 됐지요.”
 
 
  “나는 기가 꺾인 사람”
 
  ― 2010년에 천안함 침몰 희생 장병을 추모하는 칼럼을 쓰셨을 때도 비슷한 일을 당하셨지요.
 
  “무지하게 욕먹었지요. 제 시집을 불태우기도 했어요. 저는 그때 이명박 대통령이 너무 나약하다고 생각했어요. 결과적으로 북한에 당하기만 했잖아요. 수장(水葬)된 46명의 장병이 내 형제나 조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썼더니 난리가 났어요. ‘북한이 한 거라 아직 밝혀지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쓰냐’고….”
 
  ― 깜짝 놀라셨겠어요.
 
  “저는 기가 꺾인 사람이에요. 그 후엔 칼럼을 못 썼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어도 안 썼죠. 그게 무서운 겁니다. 기를 팍 죽여버린 거예요.”
 
  ― 서정시를 쓰는 시인이 시사 현안에 대해 발언한 게 싫었던 걸까요.
 
  “시를 쓴다고 해서 시인에게 생활이 없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민주화 꽃이 피었다고 하는 1990년대가 되기 전까진 거의 사회참여적인 시를 썼어요. 독자들은 한 시인의 출발부터 끝을 관통해서 이해하는 게 아니고 자신이 경험한 부분만 이해해요. 저는 서정적인 시를 쓰는 외로움의 시인, 슬픔의 시인, 희망의 시인, 사랑의 시인으로 규정되어 있어요. 사실 전 그렇지 않아요. 그 틀은 저와 아무 상관 없어요.”
 
  ― 시와 칼럼은 또 별개인데요.
 
  “‘천안함 침몰시킨 북한을 응징하라’ 했으니 놀라긴 놀랐을 거예요. 그런데 이 시대를 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거든요. 시와 시인의 삶이 일치되기는 어려워요. 저는 일치되기를 원하지도 않아요. 윤동주와 이육사 시인은 삶과 시가 일치되는 분들이시지요. 저는 전혀 비교대상도 안 돼요.”
 
 
  잠수함의 토끼
 
1973년 1월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을 마치고 부친(오른쪽)과 서소문 네거리 대한일보빌딩 앞에서. 사진=정호승 제공
  그의 시 ‘서울의 예수’ ‘부치지 않은 편지’ 등 여러 작품과 그가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는 실질적으로 유신·군사 정권의 그늘을 조명한다.
 
  “이제는 저도 나이가 들었어요.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가. 인생의 파편들 중에 시가 될 수 있는 조각조각들을 가지고 시를 쓰는 거죠. 요즘엔 사는 게 답답해요. 누가 가슴을 발로 팍 밟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진실과 비(非)진실이 혼재되어 있는 시대예요. 시인으로서 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뜻밖에 비감한 어조였다. 그는 소설 《25시》를 쓴 루마니아의 작가 게오르규의 얘길 꺼냈다.
 
  “게오르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잠수함을 타본 적이 있는데 당시엔 잠수함에 토끼를 태웠답니다. 토끼가 공기 중 산소 비율이나 수압 같은 요소에 민감했기 때문이에요. 토끼에게 이상이 생기면 산소가 부족한 거니 물 위로 올라가는 식이었죠. 그런데 토끼가 어느 날 죽어버렸어요. 그러자 민감한 게오르규를 그 자리에 앉혔다는 거예요. 게오르규가 잠수함의 토끼가 된 거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게오르규처럼 토끼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난해 7월엔 가수 안치환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신곡 ‘아이러니’를 발표한 후였다. ‘일 푼의 깜냥도 아닌 것이 눈 어둔 권력에 알랑대니, 콩고물의 완장을 차셨네. 진보의 힘 자신을 키웠다네’라는 가사가 문제가 됐다. 소위 ‘386세대’를 대변하는 민중가수로 불리는 그가, ‘아이러니’ 때문에 겪은 소동은 그야말로 아이러니였다. ‘기회주의자를 비판한 것이지 진보 진영 전체를 비판한 게 아니다’라는 해명까지 했다.
 
  “안치환씨도 이미 어떤 발언을 하기 어려운 거예요. 무엇이 진실이고 진실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들을 음악으로 솔직히 표현했는데 그렇게 공격이 들어오니 본인도 놀랐을 겁니다.”
 
 
  미당 서정주와 김수영
 
  무거운 얘기뿐인 것 같지만 한 시인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당 서정주(未堂 徐廷柱)다. 기자는 지난해 전북 고창에 있는 미당문학관을 찾았다. 미당의 친일(親日) 행적이 줄줄이 나열된 게시글이 전시실의 하이라이트 부분에 붙어 있었다. 일명 ‘친일시(親日詩)’. 후학을 위해 미당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조명한다는데, 별다른 이의를 제기할 순 없다.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6년에 시작된 일이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후인 2018년엔 기어이 미당문학상이 폐지됐다. 문학상이야 이런 시대가 됐으니 언젠가 다시 살아날 날을 기다린다지만 시인의 8할을 키워낸 고향에서도 그런 대우라니 미당이 문득 가엾어졌다.
 
  ― 미당과 김수영 시인의 시를 좋아하셨다 들었습니다.
 
  “저는 경희대에 문예장학생으로 들어갔습니다. 68학번이에요. 문예장학생으로 5명이 뽑혔어요. 당시에 김수영과 서정주 두 분이 신문 지상에서 논쟁을 했어요. 참여시와 순수시 논쟁이었어요. 20대였던 저희에겐 김수영의 참여적인 시들에 대한 열망이 있었어요. 김수영의 세례를 받던 시대였지요. 미당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가 지니고 있던 전통성, 비현실성을 비판했죠.”
 
  ― 그럼 대학 다닐 땐 미당을 비판하신 거군요.
 
  “그런데 군(軍) 복무를 하면서 미당의 시로 공부를 했어요. 서정주 시선(詩選)을 필사했어요. 서정주의 시는 김소월로부터 내려오는 정신적 맥락이 위에 서 있어요.”
 
  ― 정신적 맥락이라는 게 전통적인 운율 같은 건지요.
 
  “내재적 운율이지요. 서정주 시집을 필사하면서 전통적·내재적 운율이 자연스럽게 체득되기도 했어요. 지금 제가 쓰는 시를 보면 저 자신도 모르게 내재적 운율이 있는 편입니다. 그래서 작곡하는 분들이 제 시를 선호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제 시가 얼마나 노래로 만들어졌는지 저도 잘 몰라요. 70여 곡이 넘는데, 어느 시점까진 헤아려보다가 이제는 안 해요.”
 
  ― 미당문학상도 폐지됐어요.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하다. 북한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감사하다.’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났으면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고 조국의 광복을 바라보지 못하고 살았을 겁니다. 노천명, 이광수 같은 문인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오늘의 잣대만으로 과거를 재는 거예요.”
 
  ― 그들의 행적을 들어 문학작품까지 외면당하는 듯합니다.
 
  “비판은 하되 외면은 해선 안 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한국 시문학사에 서정주가 없어지느냐 노천명이 없어지느냐, 아니에요. 그대로 존재해 있어요. 현재의 잣대로 비판할 순 있지만 껴안고 가야 된다는 거죠.”
 
 
  인터넷 시대의 詩 훼손
 
사진=조준우
  문득 그에게서 예상하지 못한 얘기가 나왔다.
 
  “아침에 제가 일어나면 뭘 하는지 아세요? 네이버나 다음 고객센터에 접속해 명예훼손 신고를 합니다. 한두 개도 아니고 시간이 꽤 걸려요. 마치고 나면 정오가 넘을 때도 있어요. 어떨 땐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어요.”
 
  무슨 말인가 했다. 인터넷 블로그나 카페에 잘못 올라가 있는 그의 시들을 아침마다 고친다는 얘기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훼손 정도가 심각했다. 단순 오탈자나 행을 잘못 배열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제목부터 틀립니다. ‘풍경 달다’를 ‘풍경 소리’라고 써요. 다른 사람의 시를 제 이름으로 올린 경우도 많아요.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제목의 시를 어느 목사님이 쓰셨어요. 이게 제 작품으로 둔갑해 인터넷을 떠다녀요.”
 
  그가 썼다며 인터넷에 떠도는 시 중엔 ‘첫눈 내리면’이라는 시도 있다. 물론 그의 작품이 아니다. 문제는 온라인에 있는 시가 오프라인으로 다시 퍼진다는 점이었다.
 
  “엮음시집을 많이 내잖아요. 저작권자한테 허락을 구하기 위해 저에게 연락이 옵니다. 시 10편을 선택했다며 출판사에서 모은 원문을 보내와요. 인터넷에서 찾은 거라 다 틀려요. 여긴 토씨가 틀렸고, 저기는 한 행이 빠졌고…. 고치다 화가 나는 거예요. 편집자가 인터넷에서 떠도는 시를 보내서 저에게 본문 확인을 시키는 겁니다.”
 
  시 애호가 중 시집이 아닌 인터넷으로 시를 보는 이들이 많은 걸까. 그의 시로 시 낭송을 했다며 음반을 보내왔는데, 그가 쓰지 않은 시를 수록한 경우도 있었다. 그가 쓰지 않은 시로 쓴 서예 작품을 버젓이 전시한 경우도 있었다.
 
  “인터넷 시대에 시인이 자기 작품을 어떻게 지키면서 존재하는가가 큰 숙제예요. 시가 망가졌어요. 그런 의미에서 종이로 된 시집이 중요합니다.”
 
 
  군인교회 성막이 된 시
 
1971년 춘천 야전공병단 군인교회 앞에서. 군종병으로 군 복무하며 쓴 시와 동시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사진=정호승 제공
  시인 김승희는 일찍이 정호승의 시 세계를 두고 ‘자본주의적 사창가를 처단하는 참혹한 맑음’이라 표현했다. 이즈음의 정호승적 서정은, ‘처단’이라는 무서운 단어보다는 ‘인간의 쓸쓸함을 가만히 바라봐주는 겸손한 위로’에 더 가깝지 않을까.
 
  그는 가톨릭 신자다.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사랑과 죽음에 대해 강연할 때의 그는 얼핏 성직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의 시에도 종교적 소재가 자주 등장한다. 기독교와 불교의 정서가 한 시집 안에 존재하는데, 그게 또 위화감이 전혀 없다. 종교의 향내를 내는 단정한 감정은 경건해 보이기도 하다.
 
  ― 군 복무 시절 군인교회에 성막을 기증하셨다면서요.
 
  “교회에 가보면 강대상과 의자가 있잖아요. 그 뒤쪽에 걸어두는 막이 성막이에요. 당시 가장 좋은 옷감이 벨벳이었어요. 《한국일보》 신춘문예 상금을 받아 기증했어요.”
 
  ― 신춘문예 상금이 많았나 봐요.
 
  “《대한일보》 신춘문예 상금이 7만원쯤이었어요. 그걸로는 어머니 틀니를 맞춰드렸어요. 당시 한 달 월급이 7만원이 안 됐거든요.”
 
 
  부모님 댁을 작업실로
 
  밥값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시 중에 어머니를 향한 시 두 편이 있다.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로 시작하는 시 ‘밥값’과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다. 그가 지난해 말 낸 산문집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에는 부모님에 관한 일화가 여러 편 실려 있다.
 
  ― 돌아가셔서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이들 중에 꼭 한번 보고 싶은 사람을 꼽으면요.
 
  “부모님이지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부모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달아요. 부모님 살아계실 때 제가 깨달았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얼마나 불효를 저질렀고, 부모님이 그 불효를 감내해주면서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비로소 깨닫는 거예요.”
 
  그는 2002년부터 부모님 집으로 ‘출근’을 했다. 아파트 방 한 칸을 작업실로 삼았다. 그런 그가 불효를 말한다.
 
  “죽고 나면 보고 싶어도 못 보잖아요. ‘이렇게라도 해서 부모님을 매일 만나자’는 의도였어요. 남들은 그래요. ‘정호승은 작업실을 부모님 집으로 해서 매일 부모님을 돌봤다.’ 그렇지 않습니다. 얼굴도 보고, 때로는 청소도 하고, 손톱도 깎아드리고, 면도도 해드리곤 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세 가지가 마음에 걸렸어요.”
 
  ― 그게 뭔가요.
 
  “아버지가 공중목욕탕 가시는 걸 좋아해요.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지를 모시고 공중목욕탕에 갔어요. 아버지는 온탕에 들어가시면 꼭 주무셨어요. 들어가서 5분쯤 지나면 아버지 눈이 스르르 감겨요. 그러면 몸이 물속으로 스르르 들어가는 거예요.”
 
  ― 위험하네요.
 
  “당시 아버지는 귀가 어두웠어요. 처음엔 (온탕에서) ‘아버지 왜 자요. 눈 뜨세요’ 하고 큰 소리를 내니까 아버지가 그러시는 거예요. ‘너는 왜 나한테 화를 내노.’ 그래서 다음번에는 아버지 옆에 앉아서 아버지 발에 제 발을 대고 있었어요. 아버지가 눈을 스르르 감으면 발을 딱 찼어요. 그때는 내가 잘못하는 거라고 생각을 못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아들이 아버지 발을 막 찬 거예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있었는데.”
 
  그의 불효 행각 고백이 이어졌다.
 
  “약속이 있어 가방을 들고 작업실을 나섰어요.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계시다 말을 거셨어요. ‘너 오늘 바쁘나, 내가 꼭 니하고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뭐라 했을까요.”
 
  시인의 표정은 온화했지만 목소리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이랬어요. ‘아버지 또 무슨 잔소리 하시려고 그러세요. 바쁩니다, 바빠요. 나중에 봐요 아버지.’ 다녀와서 제가 아버지한테 물었을까요, 묻지 않았을까요. 묻지 않았어요. 아버지께 너무나 시간을 안 준 거예요. 그때 아버지가 제게 무슨 얘기가 하고 싶으셨는지 듣고 싶지만 이젠 들을 수 없어요.”
 
 
  지키지 못한 임종
 
  기자에게도 낯설지 않은 후회였다.
 
  “부모님 집이 8층이었어요. 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아파트 단지 안을 절뚝절뚝 걸어 다니시는 거예요. 그걸 8층에서 지켜만 봤지, 한 번도 제대로 아버지와 산책을 한 적이 없어요. 근처에 탄천, 양재천 천변이 있어요. 거길 아버지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한테 정말 인색했던 거죠. 저는 아버지한테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어요. ‘이놈의 새끼’ 야단 한 번 안 치셨어요. 뭐든지 받아주신 아버지에게 저는 그랬어요.”
 
  그는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안면도에 강연을 하러 갔어요. 강연 10분 전에 집사람한테 전화가 왔어요. ‘여보, 아버지 돌아가셨어’…. 10분 전인데 어떡해요.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소식 듣고 강연을 1시간을 했어요.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어머니 임종만은 꼭 지켜보려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부턴 누워만 계시면서 식음을 전폐하셨어요. 곡기를 끊으면 곧 돌아가신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어리석어서 빨리 파악을 못 했어요. 그러다 오후 5시쯤 누나에게 전화가 왔어요. ‘어디니, 어머니 돌아가실 거 같다’…. 갔더니 어머니가 숨을 쉬고 계시더라고요. 마침 외부에서 전화를 받은 참이었어요. 강연 자료 파일이 안 열린다고 빨리 다시 보내 달라는 거예요.”
 
  ― 자리를 뜨셨나요.
 
  “어머니를 보니 한두 시간 안에 돌아가실 거 같진 않았어요. 누나가 독일 간호사 출신인데 ‘누나, 강연 자료 좀 보내고 올게’ 말하니 ‘갔다 와도 될 거 같다’ 해요. 전철로 두 정거장 거리였어요. 자료 파일을 보내는데 마음이 이상하게 급한 거예요. 초조해서 자판도 제대로 못 치겠더라고. 아파트 문을 열고 탁 들어섰어요. 누나가 그래요. ‘돌아가셨다’. 아이고, 이 바보 같은 놈. 파일 보낼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거예요.”
 
  결국 부모님의 임종을 강연 때문에 지키지 못했다. 다른 직업 없이 시만 쓰는 그에게 강연은 생활의 방편이었다. 지옥에서의 용무를 보느라 천국으로 돌아가는 부모님을 배웅하지 못했다. 그의 고해(告解) 같은 자책을 들으며 한편 안도감이 들었다. 한 점의 아쉬움 없는 효도란 아마 세상에 없는 거구나.
 
  그가 부모님 다음으로 꼽은 만나고 싶은 이는 동화작가 정채봉이었다.
 
  “정채봉씨한테 제가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족보에 없는 동생’이라 해주셨지요. 저보다 네 살 많은 제 친형은 1970년대 초반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어요. 정신과 의사가 돼서 지금까지 미국에서 삽니다. 형제라도 한 사람은 미국에서 자기 삶을 사니까요, 일상 속에서 어떤 일을 의논하고 기쁠 때 슬플 때 형 노릇을 해준 사람이 정채봉씨였어요. 어떤 의미에서 제 육친의 형보다 더 형이었지요.”
 
  그러고 보니 정 시인과 형제처럼 표정이 닮은 정채봉 작가는 2001년 세상을 떠났다. 55세였다. 정 작가는 죽기 전 석 달간을 정 시인에게 간병을 받았다.
 
  “너무 일찍 죽었어요. 살아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이 많죠. 정채봉씨 같은 형적 존재를 그 이후엔 만날 수 없었어요. 저는 문단 활동도 거의 하지 않았어요. 이제 칠십이 넘었으니 이런저런 심사를 하는 자리도 더 이상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끝을 냈어요.”
 
  ― 문단에서 외로움을 느끼세요.
 
  “서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힘을 합치면 좋잖아요. 저는 잘 안 되더라고요. 젊을 땐 10년간 동인 활동도 했죠. 어느 시점부턴 문인단체 모임에 나가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후배들을 잘 모릅니다. 가족들에게 얘기해놨어요. ‘죽으면 알리지 말고 조용히 가족장으로 하고, 화장하라’고”
 
 
  인생은 시간으로 이뤄져
 
  그는 인터뷰 내내 자주 ‘시간’을 말했다.
 
  “결국 인생은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어른들이 인생은 짧다고 하잖아요. 그게 60세가 돼서도 가슴에 다가오지 않았어요. 추상적인 개념으로 느껴졌죠. 70이 되니 화들짝 놀랐어요. ‘아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짧구나’…. 60에서 70이 된 10년 동안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구체적으로 매년 뭘 했는지 생각해봐도 잡히는 게 없어요. 10년이 1년처럼, 1년이 한 달처럼 지났어요.”
 
  ― 많은 시집을 내셨잖아요. 시의 웅덩이는 다시 차오르고 있나요.
 
  “밀물이 들어와 수평선이 되는 때는 지났어요. 저는 썰물이에요. 썰물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거죠. 샘은 물을 퍼내면 다시 고이잖아요. 한때는 나도 샘물이 고이듯이 샘을 퍼내면 다시 물이 고였는데 지금은 퍼내면 언제 물이 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가슴 속에 시의 샘물이 있으면 빨리 쓰려 해요. ‘나에겐 써야 할 시가 한 편도 없다’…. 죽을 때 이렇게 되면 얼마나 편안하겠어요.”
 
  ― 다시 태어나도 시인이 되실 건가요.
 
  “저는 시를 쓸 거 같아요. 현생에서 시는 저에게 무한한 선물을 주었어요. ‘시를 써야 한다, 시를 쓰고 싶다, 앞으로 쓸 것이다, 시가 내 가슴에 존재하고 있다’. 이게 제 삶의 가장 큰 생명의 원동력, 뿌리예요. 감사하게도 단 한 번도 시는 저를 버리지 않았어요. 한 가지 시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시를 쓸 때 시간이 천천히 가게 해달라는 거예요. 시를 쓸 때는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시 쓴다고 아침에 앉아 있으면 금방 밤이 돼요.”
 
 
  시인의 두 번째 삶은 詩
 
  ― 김형석 연세대 교수는 100세가 넘으셨는데 그 누구보다 활발히 활동하시는데요.
 
  “김형석 교수님이 저에게 꿀밤을 주실지도 몰라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지금부터 청춘이다’…. 김형석 교수님은 신이 사랑하시는 분인 것 같아요. 이태석 신부님 같은 분도 있어요. 48세, 일찍 돌아가셨잖아요. 작년이 10주기였어요. 우리는 생시의 삶만 있다고 생각하지만 한 사람이 죽고 나서 그 사람의 사후의 삶이 전개되는 거예요. 이태석 신부가 떠난 후 사후의 삶이 전개되잖아요. 수단의 아이들이 한국으로 와 의사가 됐어요.”
 
  그는 덧붙였다. “문인에게 사후의 삶은 작품이겠지요.”
 
  매일 아침 필사적으로 시를 지키려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는 그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2021년의 첫눈이 내릴까 싶었는데 아직이었다. 그날의 마지막 햇살이 시인의 옆얼굴을 비췄다. 단정한 이목구비 위로 노을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보고 있으려니 와락 쓸쓸해졌다. 아무래도 첫눈이 내린 후 다시 그를 만나봐야 할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정호승,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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