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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家를 찾아서

학생과 농부를 사랑했던 출판계 代父 김익달

밀알이 거름이 되어 수많은 다른 밀알을 키워낸 삶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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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년 11월 1일 피란지 대구에서 월간 학생교양지 《學園》 창간
⊙ 1964년 농촌잡지 《農園》 창간… 녹색 유니폼 입은 600명 보급원 논두렁 누벼
⊙ 말년에 위암 투병… “평소 65kg 몸무게가 29kg으로 줄어”
⊙ ‘온실 안의 화초가 되지 마라’ ‘검소해라’ ‘고생을 해야 인간이 된다’… 돈보다는 인간 강조
⊙ 1953년 첫 장학생 뽑아 올해 제52기 선발. 한국 산업화·민주화 주역이 돼
국내 출판 1세대이자 출판계 대부인 김익달 선생.
  출판문화인이자 사회사업가 김익달(金益達·1916~1985) 선생은 국내 출판계 1세대로 꼽힌다. 잡지와 백과사전을 만들고 장학사업을 통해 ‘학원 세대’라는 마르지 않는 청춘의 샘을 길었다. 어른들이 저지른 살육의 6·25를 체험한 전후(戰後) 청소년들이 책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생각의 힘’을 갖게 했으며, 한국 산업화·민주화의 밑거름으로 성장시켰다.
 
  김익달은 1952년 11월 1일 포성이 멎지 않은 피란지 대구에서 월간 학생교양지 《학원(學園)》을 창간했다. 《학원》 문예란을 거쳐 정식 문인이 된 이가 100명이 넘는다. 창간 1년 만에 그 수익금으로 전후 최초의 개인장학회를 설립한다. 훗날 장학생들은 과학자, 교육자, 정치인, 관료, 언론인, 의료인, 법조인, 화가, 도예가, 전문 CEO 등으로 성장한다.
 
  백과사전은 이름난 학자의 논문을 유집(類集)한 책이다. 18세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현대적 백과사전이 출현하는데 우리나라는 1958년에야 학원사판(學園社版) 6권이 출간된다. 그해 9월 15일 발행한 《대백과사전》으로 한국은 ‘백과사전이 있는 나라’가 되었고 한글이 사전을 기록한 언어요, 문자가 되었다.
 
  여성잡지 《여원(女苑)》 《주부생활(主婦生活)》을 창간한 데 이어 1964년 4월 전대미문의 《농원(農園)》이란 농촌잡지를 발행했다. ‘새마을운동’이란 말조차 없던 시절, 김익달은 꽁보리밥을 먹으면서 《학원》과 백과사전으로 번 돈을 영농기술・농업 합리화의 월간지에 쏟았다. 초판 10만 부를 찍으며 농촌과 농민을 사랑한 그였지만 통권 44호 67년 12월호를 끝으로 폐간하고 말았다.
 
  그가 출판계 대부(代父)로 불리는 이유는 ‘학원사’를 거쳐 독립한 출판경영인이 많은 까닭이다. 학원사는 출판 사관학교였다. 1985년 11월 2일 선생이 별세하자 언론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일제히 실었다. 그해 11월5일자 《동아일보》 기사 중 일부다.
 
  <…(중략) 학원장학회를 통해 400명에 가까운 인재와 오늘 내로라하는 명사들의 터를 잡아주었다. 사장들이 도망가기에 바쁜 6·25 아침 사원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초창기 《주부생활》 주식의 3분의 2를 사환을 포함한 사원에게 나누어 준 사람, 자기 밑에서 일하던 사람에게 인기 있는 책의 지형을 주거나, 아무 조건 없이 집 한 채를 사주어 30여 명의 출판사 사장을 만든 사람, 김익달은 갔다. 병마에 시달리는 29kg의 체중에도 평생의 신조이던 보리 혼식 등의 경험을 살려 별세 사흘 전까지 유저(遺著)로 남을 《21세기의 자연건강법》 교정을 끝낸 사람, 어떤 정치인 어떤 유명 관료보다도 우리는 이런 ‘문화의 지렛대’적 생애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문화의 지렛대’가 살아온 생애
 
김익달 선생이 창간한 잡지들. 왼쪽부터 《학원》 《농원》 《주부생활》 《여원》 창간호.
  김익달은 아내 하성련(河聖蓮·작고)과 사이에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김영수(金永壽·75)는 아버지의 출판업을 이어받았으나 자신이 창간한 일간지 《민주일보》가 부도나는 바람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현재 미국에 머무르고 있다. 일간신문 창간은 선친의 꿈이기도 했다. 김익달은 1960년 5월 어린이 일간신문의 효시인 《새나라신문》(그해 12월 31일까지 발행), 1970년 10월 《독서신문》을 창간했다.
 
  종합 일간신문인 《민주일보》는 1989년 11월 21일 창간됐다. 주간 《일요신문》을 확대한 이 신문은 한글 가로쓰기로 매일 컬러 4면과 흑백 4면 등 8면이 발행되었다. 그러나 경영난으로 1991년 7월13일자 신문을 끝으로 발행을 중단했다.
 
  차남 김성수(金成壽·73) 역시 출판경영과 인쇄업을 모두 접고 전남 여수로 내려갔다.
 
  3남 김인수(金仁壽·72)는 건국대 농대와 일본 오사카 긴키대(近畿大) 농학부를 졸업하고서 농업 근대화를 희망했던 선친의 꿈을 이루려 했다. 이후 1980년 학원사의 미국 LA지점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국내로 돌아와 경기도 군포에서 살고 있다.
 
  4남 김은수(金恩壽·67)는 치과의사로 재직 중이고, 두 딸 (김현옥・김승옥)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기자는 3남 김인수씨를 만났다. 그는 학원사 미국 LA지사에서 일한 지 5년 만에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400여 개의 교포 마켓과 서점 등을 통해 매월 《주부생활》을 1만 부씩 판매했다고 한다.
 
  “지금 사는 군포는 제 고향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75년 이른 봄부터입니다. 서울 한복판인 종로구에서 태어나 26세가 될 때까지 서울에서만 살아왔기에 농촌이나 농사에 대해 전혀 모르는 그야말로 ‘서울 촌뜨기’였죠. 두 형님은 선친의 사업인 ‘주부생활사’와 ‘학원인쇄소’를 물려받았지만 저는 3세 때 앓은 소아마비로 맑은 공기와 푸른 자연환경이 필요하다는 부친의 생각 때문에 지금의 군포 대야미동으로 오게 된 것이죠.
 
  벼와 보리, 사과나무와 배나무, 고추 잎사귀와 고구마 덩굴도 구별하지 못했던 제가 1971년 건국대 농과대학(원예학과)을 졸업하고 일본 긴키대에서 2년간 조경학을 배웠습니다.”
 
 
  1964년 농촌잡지 《농원》과 군포 ‘밀알농장’
 
김익달 선생의 3남 인수씨와 아내 고희숙씨.
  “농촌이 잘살아야 국가가 잘산다”는 박정희 대통령과 똑같은 신념을 가진 부친 때문에 서울 태생의 셋째 아들은 농대를 졸업하고 농업 유학까지 다녀와야 했다. 김익달은 군포에다 ‘밀알농장’을 세워 그에게 운영을 맡겼다.
 
  “아버지는 1964년 농촌잡지인 《농원》을 발간하면서 국민훈장 동백장과 서울시문화상 등 국가로부터 수많은 공로상을 받으셨어요. ‘가나안 농장’과 같은 시범농장을 본인이 직접 만들기 원하셨죠. 임야 1만 평, 논 3000평, 밭 3000평을 포함, 1만6000평 규모의 땅을 구입하셨고 110평 규모의 우사와 사일로, 3채의 농가를 한꺼번에 지으셨어요.”
 
  낙농·원예·농사를 담당하는 3명의 전문 관리인을 채용해 대규모 초지를 조성했다. 정부로부터 융자를 받아 젖소 20마리를 구입했는데 젖소 한 마리가 200만~300만원을 호가했다. 매일 200~300kg 정도의 우유를 착유해 해태유업에 납품했다. 또 2000평 규모의 방목장을 갖춘 ‘기업낙농’ 형태로 주변의 소규모 낙농인들로부터 많은 부러움을 샀다. 인수씨는 이곳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큰딸(김지윤)도 이곳에서 낳고 키웠다. 그러다 1980년 학원사의 LA지점에 파견돼 미국으로 떠났다가 1994년 귀국했다. 그의 말이다.
 
  “1990년 이후 산본 신도시가 생겨나고 화성군 대야미리가 군포시에 편입되어 대야미동으로 바뀌었죠. 어느덧 초가집들이 없어지고 크고 작은 아파트 단지들로 변모하기 시작했어요. 이제 대야미동에서는 이랑을 갈던 황소의 워낭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죠. 그 많던 논도, 목장도 사라지고 지금은 자급자족을 위해 짓는 채소농사나 정원수 재배를 위한 밭들만 군데군데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한때 제 손으로 직접 만들어 운영해온 ‘밀알농장’도 일손 구하기가 힘들어지고 땅과 하천 오염방지법이 강화되면서 낙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할 수 없이 가든 식당을 운영하다 지금은 그만둔 상태입니다.”
 
 
  1952년 피란지 대구에서 나온 《학원》
 
김익달 선생이 발행한 사전류 책들. 《대백과사전》의 출간은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9번째로 세계대백과사전을 보유하는 문화국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김익달의 생애를 볼 때 가장 극적인 순간은 언제일까. 나라가 전란에 휩싸인 1952년 11월에 대구에서 학생잡지 《학원》을 창간할 때가 아닐까. 우리나라 잡지문화의 서장을 본격 연 고리가 바로 《학원》이었다.
 
  전쟁으로 국가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몰라 감히 출판을 생각조차 못 하던 시절, 김익달은 어른이 아닌 학생들이 읽는 잡지 《학원》을 만들어 매달 10만 부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다. 먹고살기조차 버거운 전시 상황을 감안하면 엄청난 부수였다. 최대 일간지 발행부수가 겨우 5만 부를 넘던 시절이었다.
 
  “생전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서점과의 할인율 문제로 이견이 생겨 전국의 서점이 단합해서 《학원》 취급을 보이콧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학원사 직원들이 서울역과 광화문 등 요지에다 잡지를 수천 권씩 쌓아놓고 가판을 했는데, 학생들이 줄을 서서 책을 사 가자 서점들은 사흘을 못 가서 두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가난한 아이들에게 읽힐 수 있는 값이 싸고 좋은 잡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소위 돈이 되는 과자나 소비품 광고를 아예 《학원》에 싣지 않았죠. 돈 없는 아이들에게 캐러멜 과자나 값비싼 학용품을 사라고 권하는 광고를 실을 수 없다셨지요.”
 
  김익달을 기억하는 사람 중에 《학원》 《대백과사전》과 더불어 《농원》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농촌에 관한 변변한 책이 없던 시절에 창간한 《농원》은 농촌에 대한 김익달의 의지가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예였다. 계속된 인수씨의 말이다.
 
  “이 잡지는 농업 전문지 내지 농어민의 교양지일 뿐만 아니라 농촌 부흥의 길잡이로서 창간됐습니다. 아버지가 1956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렸던 국제출판협회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독일 라인강 변과 30도 이상 경사진 산기슭에다 석축을 쌓고 감자를 심는 독일 사람들의 농사짓는 법을 보고 큰 감명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귀국 후 우리도 잘사는 농촌을 만들어보자, 그러기 위해 축산 마을을 일궈야겠다고 결심하셨다는 겁니다.”
 
  1964년 4월 25일 창간한 《농원》은 놀랍게도 15만 부(초판 10만 부)를 발행했다. 자전거 600대에 녹색의 유니폼을 입은 보급원들이 전국 골골의 논두렁, 밭이랑을 누비며 잡지를 외상으로 배달했다. 판매라기보다 보급에 가까웠다.
 
  그러나 돈을 내고 잡지를 읽을 만큼 농촌 사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적자가 쌓이자 주변 사람들이 《농원》을 포기하라고 강권했다. 김익달은 굽히지 않았고 4년을 더 지탱하며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실의에 빠졌고, 결국 폐간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여러 차례 복간 노력을 했으나 농업은 산업화에 밀려 자리를 잃었다. 생전 김익달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비록 오래가진 못했어도 지금도 자랑할 수 있는 잡지예요. 내용이 충실했고 농촌문화, 농촌경제 확충을 위한 사회사업의 뜻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서울 태평로 서울신문사 뒤에 있던 4층 빌딩을 없앨 정도로 빚을 졌지요. 그 무렵부터 얻은 당뇨병이 지금도 낫지 않고 있어요. 그러나 《농원》만큼은 다시 복간하고 싶은 의욕을 잠재우지 않을 만큼 뜻깊은 일이었다고 자부해요.”
 
 
  범접하기 어려운 아버지의 29kg 몸무게
 
김익달 선생의 가족사진이다. 부인 하성련 여사는 생전 “아이들이 사회적인 아버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출판인이자 사회사업가로 알려진 김익달 선생은 가정에서는 범접하기 힘든 엄격한 아버지였다. 부인 하성련 여사는 생전 “아이들이 사회적인 아버지라고 생각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인수씨의 말이다.
 
  “때로는 학원사의 경영난으로 장학금 지급이 어려울 때도 있었어요. 이때 아버지는 빚을 내서 장학금을 지급하셨어요. 자식들은 학비를 못 내도 말이죠. 이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하신 적이 많았어요.
 
  아내로부터 사랑받지 못했던 남편, 웃음과 칭찬의 따뜻한 대화를 자녀들과 함께 나누어본 적이 별로 없었던 아버지, 뒤늦게 경제적 좌절로 부산 바닷가 아파트에서 홀로 병치레를 하신 아버지, 노후의 외롭고 병든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 아버지가 어려우셨나요.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면서도 가까이하기 가장 어렵고 두려웠던 분, 그랬기에 지금까지 매 순간 그분을 의식하고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운명하시기 3개월 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평소 65kg 내외던 몸무게가 29kg으로 줄어든 위암 말기 최악의 상태였죠. 의사들도 2~3개월을 넘기지 못하리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말기 암 환자를 위한 요양소에서 치료받기를 원하셨어요.
 
  1960년대 일본 최고의 베스트셀러 《빙점》의 작가인 미우라 아야코가 직장암에 걸려 투병할 때 그 요양소에서 식이요법과 물리치료로 20년을 더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던 겁니다.”
 
  의사들은 음식물도 섭취할 수 없는 상태로 해외여행을 할 수 없다고 말렸다. 가족들은 아버지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할 수 없어 난감했지만, 3남 인수씨가 아버지를 모시고 일본 말기 암 요양소에 들어가 닷새간 머물렀다. 당시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제 가운데 너(김인수)를 가장 많이 염려했었다. 네가 세 살이 되던 해 6·25전쟁이 터지고 피란 중 미군기의 폭격으로 주변이 불바다가 되었지. 너는 굉음과 진동의 충격으로 인해 온몸이 마비되어 식물인간 상태가 1년이나 계속되었어. 병원도 없고 의사도 없는 전쟁 통에서도 기적적으로 살아날 수 있었지. 그렇지만 이후부터 앓기 시작한 소아마비로 네 몸이 불구가 되어버린 거란다.”
 
  인수씨는 “아버지가 이 말씀을 하시며 제 손을 잡고 우셨고 함께 눈물을 쏟았다”고 회고했다.
 
  부자가 함께 흘린 눈물은 그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인수씨가 오사카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어느 날, 햇빛도 들지 않는 협소한 자취방에 아버지 김익달이 불쑥 찾아왔다. 아들이 끓인 김치찌개를 안주로 술에 취한 아버지는 이렇게 속내를 털어놨다고 한다.
 
  “나(김익달)도 정말 한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고생을 많이 했었지. 너무 가난해 너의 고모를 기방(妓房)에 팔아넘기겠다는 네 할아버지 말을 듣고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집을 뛰쳐나와 시장바닥을 전전하고 살았어.
 
  열일곱 살 때 밀항선을 타고 일본 도쿄로 가서 인쇄소 직공으로 일을 했어. 조선인 불법체류자들이 다다미 8칸 방에 8명이 함께 기거하는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하루 16시간씩 일해 벌어 모은 돈을 집으로 부쳐 드렸지. 겪은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그때는 일본 식민지 시절이었어. 그런데 자식들에게 ‘사람은 고생을 해봐야 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늘 말해왔지만 네가 이렇게까지 고생하며 살고 있을 줄 정말 몰랐다.”
 
 
  김익달의 遺作 출판물 《21세기의 자연건강법》
 
경기도 군포에 있는 밀알농장. 한때 기업낙농 형태의 대규모 방목장을 운영했다. 지금은 농장을 운영하지 않고 있다. 사진은 밀알농장을 찾은 김익달 선생과 아들 인수씨.
  김익달은 아들 인수를 혹독하게 키웠다. 초등학교 시절, 일요일이 되면 걸음걸이조차 시원치 않은 그에게 세검정 버스 종점에서 북한산 정상까지 걸어서 돌아오는 하루 7시간의 강행군을 시켰다.
 
  주중에는 소아마비로 인해 약해진 왼쪽 다리로만 하루에 1000번씩 뜀뛰기를 하라고 엄명했다. 바짝 마른 몸매가 부끄러워 죽어도 옷 벗기 싫어했던 그를 수영장에 데려가 억지로 수영을 하게 한 것도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무서워 저는 아버지가 퇴근할 때 제 방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늘 하시던 말씀이 이랬어요. ‘온실 안의 화초가 되지 마라’ ‘검소해라’ ‘고생을 해야 인간이 된다’ ‘돈보다는 먼저 인간이 돼라’ 등 귀에 못이 박히도록 형제들에게 말씀하셨지요.
 
  그런 아버지가 노동자 합숙소 같았던 제 자취방에 오셔서 ‘이제는 그렇게까지 (고생)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요. 마침내 아버지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날 밤새 술에 취하고 옛 생각에 취하고 함께 나누는 대화에 취했었죠.”
 
  안타깝게도 일본 요양소의 진료 결과는 비관적이었다. 너무 늦었다는 것이었다. 이미 음식을 소화할 수 없는 상태라 식이요법이 불가능했다. 몸에 근육이 없어 물리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한시도 생을 포기한 적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만들어야 할 책들에 대한 기획과 편집·광고·배본에 이르기까지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죠. 저는 죽음도 아버지를 정복하지 못하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으나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마셨습니다.”
 
  김익달이 유작으로 남긴 출판물은 《21세기의 자연건강법》으로 1442쪽이나 되는 대작이다. 사람이 떠난 자리가 클수록 슬픔이 큰 법이다. 장례식이 있고 나서도 그의 빈소가 차려졌던 학원사에는 두 달여 동안 조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계속된 그의 말이다.
 
  “만년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볼 때마다 아버지는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불쌍한 사람이었는데 당신이 좀 더 따뜻하게 감싸주지 못했다며 후회의 눈물을 흘리셨어요. 비록 생전에 (아버지가) 교회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남들을 위해 그처럼 선하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훌륭하게 살다 간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어머니는 평소 ‘예수가 태어난 크리스마스 날을 택해 아버지를 찾아가 기쁘게 용서를 구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정말로 아버지 가신 지 13년 후인 1998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새벽 4시, 잠드신 채로 아버지가 계신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강재섭 “학창 시절, 등불과도 같았던 분”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장학사업인 ‘학원장학회’는 《학원》지가 창간한 이듬해인 1953년 2월 마련됐다. 현재의 명칭은 ‘학원·밀알장학재단’이다. 지난 1월 초 제52기 장학생 13명을 선발했다. 1953년 제1기 장학생 12명을 뽑은 이래 학원사가 문을 닫은 뒤에도 이어져왔다. 지금까지 장학금 수여자가 800여 명에 달한다. 김익달 선생은 생전에 가진 인터뷰를 통해 학원장학회를 만든 직접적인 동기를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피란지에서 장사를 해가며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고 결심했습니다. 노변이나 천막 교실에서 공부하는 그들을 보니 어려서 보리죽도 제대로 못 먹고 고학을 하던 저 자신의 가난했던 과거가 새삼스러워지고 뼈가 아파옵디다.”
 
  장학생 선발 방법이나 지원 방식이 다른 장학회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성적이 우수하고 높은 덕성을 갖춘 모범생으로서 가정이 극빈하여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중학생들을 전국 각지에서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서울에서 시험으로 가려 뽑았다. 이때 시골에서 오는 학생에겐 왕복 여비, 숙박비, 잡비 등까지 지급할 정도로 자상한 배려를 했다.
 
  장학생들에게는 고등학교 1학년부터 대학 4년 과정까지(의대는 6년) 학비 전액을 지불했다. 김익달은 장학금을 줄 때마다 꼭 세 가지 다짐을 받았다. 첫째는 건강할 것, 둘째는 국가 사회에 해가 되는 사람이 되지 말 것, 셋째는 농촌을 잊지 말 것이었다.
 
  강재섭(姜在涉) 전 한나라당 대표는 9기 장학생 출신이다. 학창 시절, 학원사에서 펴낸 위인전이나 《학원》을 펴들고 책상 모서리에서 경이로운 세계로 빠져들곤 했다. 강 전 대표는 “우리 나이 또래의 학창 시절에 등불과도 같았던 분”이라며 김익달을 회고했다.
 
  “제가 처음 서울을 구경하고 엄청나게 넓은 세계를 경험하게 된 것도 그 어른 덕분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기 며칠 전 겨울, 학원 장학생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아버지 뒤를 따라 서울로 와서 남산도 올라가 보고 동대문까지 전차도 타보았습니다.”
 
  같이 응시하기 위해 올라온 전국 각지의 학생들이 학원사에서 배려해준 여관에 묵으면서 합격 여부를 떠나 같이 어설픈 토론도 하고 자기 고향 자랑도 했다. 그는 운이 좋게도 장학생으로 최종 선발돼 고1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학교 등록금 등 일체를 보조받았다.
 
  “세상에 장학생도 많지만 우리처럼 형제같이, 자식같이 사랑받아온 장학생은 없을 것입니다. 김익달 선생은 법조인, 의사, 관료가 된 장학생보다는 과학자, 농부, 교사가 된 장학생을 더 좋아하고 더 챙기셨어요. 학원 장학생들은 지금도 한 가족입니다. 우리 장학생 모임의 이름이 ‘밀알회’가 된 것도 모두 그 어른의 깊은 뜻을 받들어 이 사회에 한 톨의 밀알이 되자는 뜻이었습니다.”
 
  강재섭 전 대표는 당 대표 시절, 전북대에 인수(人獸)공통전염병연구소 건립지원을 도와 명예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일이 있다.
 
  당시 소를 직접 구입해 정읍의 한 농장에 맡겼는데 훗날 그 소를 팔아 장학재단에 내놓았다. 또 해마다 몇 백만원을 재단에 기부했고 지금도 재단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김익달이 敎主라면 나는 영원한 광신도”
 
학원·밀알장학재단 박원선 명예이사장.
  3기 장학생이자 현재 학원・밀알장학재단 명예이사장인 박원선(朴元善)씨는 서울대 사범대학을 나와 평생 교직에서 근무하다 교장 선생님으로 은퇴했다. 장학재단의 역사를 가장 많이 알고, 가장 애정이 깊은 인물 중 한 명이다.
 
  “요즘 이런 생각을 해요.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학비를 못 주면서, 빚을 내어 장학금을 주던 김익달 선생의 고충이 어땠을까 하고요.”
 
  1950년대 말이었던가 학원사가 재정적으로 어려워 비싼 이자를 주고 변통한 돈으로 장학금을 받은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학원 장학생 일동은 학원사의 형편이 좋아진 다음에 장학금을 받겠다고 김익달 선생을 찾아뵙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어요. 그러나 그분은 우리 손을 잡으시고 ‘어린 소견으로 무엇을 알겠느냐’고 타이르시며 모인 김에 저녁 식사나 하고 가라며 돈을 쥐여주신 일도 있었습니다.”
 
  가끔 장학생들이 예고 없이 불쑥 찾아와도 김익달은 자신의 일정을 모두 미루고 자식 같은 학생들과 어울려 말술도 마다하지 않았고 삼각동, 무교동의 이름난 술집을 순례하곤 했다.
 
  “1959년 8월 15일 학원사가 출판사 최초로 태평로에 4층 철근 콘크리트 빌딩을 신축해서 입주했는데 그해 늦은 가을, 장학생들은 선생님도 뵙고 학원사 신축 건물도 보고 싶어 종종 학원사에 찾아갔어요. 그때마다 일을 서둘러 마무리하고서 푸짐하게 저녁을 사주곤 하셨어요. 평소엔 말씀이 없으셨으나, 장학생들과 함께 있으면 말씀도 잘하고 즐거워하셨어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술에 취해 어깨동무를 하고 신문로에 있던 선생님 댁에 가서 몇 번이나 잠을 자기도 했어요. 그때마다 선생님은 아침 일찍 2층으로 와이셔츠를 가지고 올라와서 입혀주시며 어서 가라고 보내셨어요. 아침을 먹여 보내고 싶으셨겠지만,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던 선생님의 심정을 헤아려보니 만감이 교차하고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이런 모든 일이 저로 하여금 ‘김익달이 교주라면 나는 영원한 광신도로 남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된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박 이사장은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난 때를 떠올렸다.
 
  1984년 12월 26일, 서울대 치대생이던 장학생 18기 강세범이 19기 후배들을 서울로 불렀다. 그는 장학생 모임 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후배들의 대학 진학에 도움도 주고 격려도 할 겸 부른 것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김익달은 “학생들이 여관에서 자다가 연탄가스 중독이라도 되면 어찌하려고 상경시켰냐”며 “당장 내려보내라”고 호통을 쳤다.
 
  강세범이 까마득한 선배인 박 이사장을 찾아와 “큰일 났다”고 도움을 청해 할 수 없이 학생 모두를 박 이사장의 집으로 데려왔다.
 
  “일단 우리 집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죠. 급히 아내에게 음식 준비를 시켰고, 그날 저녁 8시쯤 김익달 선생님을 모시러 나갔어요. 34~35명 장학생들은 그분이 들어오시자 박수를 치고 환호했습니다. 그날 저녁 모임이 선생님과 장학생이 함께 모인 마지막 시간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마냥 즐거워하시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그날 음식이 식고 또 식어도 선생님의 말씀은 끊길 줄 모르고 이어졌지요.
 
  1985년 봄, 선생님이 요양차 머무시던 부산 해운대에 내려가곤 했어요. 무척 야윈 모습을 뵙고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했어요. 하지만 기억은 아주 또렷하셨고, 우리를 반가워하고 말씀도 잘하셨습니다.”
 
  김익달에게 장학금을 받은 이들은 자신이 받았던 큰 은혜를 되돌려주겠다며 지난 1997년 밀알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지금도 십시일반 성금을 내놓고 있다. ‘장학재단이 없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던 덕분이었다. 박 명예이사장 역시 후배들에게 장학재단을 물려줄 때까지 해마다 1000만원을 기부해왔다고 한다.
 
 
  김익달 평전을 쓴 윤상일 변호사
 
《김익달 평전》을 펴낸 윤상일 변호사.
  11기 장학생인 변호사 윤상일(尹相日·서울종합법무법인 대표변호사)은 김익달 탄생 100주년이던 2016년 《학원 김익달 평전》을 펴냈다. 전체 464쪽으로 이루어진 묵직한 책이다. 윤 변호사는 1992년 국내 최초로 법조계를 적나라하게 해부한 장편소설 《하얀나라 까만나라》를 발표하여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소설가이기도 하다. “소설을 쓸 수 있는 문장력이면 평전도 쓸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강권으로 부득이 평전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2007년 8월 ‘지구에서 250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은하에서 113개의 구상성단을 새로 발견했던 서울대 이명균 교수가 제14기 학원장학생 출신입니다. 1953년 《학원》 2월호에 우주의 신비를 밝힐 ‘세계에서 가장 큰 200인치 망원경’을 소개한 지 54년 만에 이 교수가 우주에서 새로운 별을 발견한 것이죠.
 
  2010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무선충전 전기자동차 기술인 OLEV(On Line Electric Vehicle)를 세계 최고의 50대 발명품으로 선정했습니다. 이 기술의 개발을 주도한 이가 카이스트 조동호 교수인데, 그가 바로 12기 장학생 출신입니다.
 
  이처럼 학원장학생 출신 중에는 과학자뿐만 아니라 경제학, 인문학, 역사학, 철학 등 각 분야에서 활약한 교수들이 많아요. 또 과학자나 교수뿐만 아니라 뛰어난 정치인, 관료, 언론인, 출판인, 전문 CEO, 의사, 약사, 화가, 도예가, 교사 등 수많은 인재가 김익달의 ‘밀알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열린우리당 의장으로 활동한 고(故) 김근태(金槿泰) 의원과 그 상대역이었던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는 각각 장학생 7기와 9기였어요. 당은 달라도 두 사람 사이가 각별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는데, 공식 석상에선 으르렁대다가 사석에선 형님 아우 하며 친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낸 일화는 유명하죠.”
 
  ― 평전을 쓰시면서 알게 된 김익달은 어떤 분입니까.
 
  “그분은 평소 자신이 이 땅에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소망하셨어요. 자신이 생전에 한 일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가 누구였는지 그 삶이 어떠했는지 기억하는 이가 많지 않아요. 하지만 그분의 오랜 소망처럼, 당신이 남긴 밀알이 거름이 되어 수많은 다른 밀알을 키워내는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격동의 시기를 살아오신 선생님의 삶을 조금씩 알아갈수록 왜 유기정(삼호인쇄 회장·세계중소기업 총재)님이 ‘지난달의 역사는 모르지만 6·25사변 후 한국에 가장 공로 있던 사람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서슴없이 김익달님을 들겠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어요.”
 
  ― 평전 쓰는 일이 정말 어려웠을 텐데요.
 
  “평전 집필은 감당키 어려운 일이 틀림없었지만 제가 그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영광이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었어요.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 그리고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할 때, 또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번씩 주먹을 불끈 쥐고 이렇게 다짐하고 맹세하곤 했죠. ‘꼭 해낼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해내고야 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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