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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발굴

자료로 본 안익태의 敵과 추종자들

“나, 안익태요. KBS교향악단을 동원해주시오”

글 : 김승열  음악 칼럼니스트·안익태기념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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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음악세계》 5월호… 국내 음악계의 수장이 해외파 안익태를 라이벌로 여기는 듯
⊙ 안익태 “우리나라 음악인들 아주 나쁘다”며 분노 표출
⊙ “오해를 사, 애는 애대로 쓰고도 일부에서 욕을 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느냐”
⊙ 안익태의 독선적 기질에도 그는 부인할 수 없는 20세기 초·중반 동양 최고의 지휘자

金勝烈
1976년생. 서울대 대학원 석사, 파리8대학 석사(공연예술학), 파리7대학 박사 과정(동양학) 수학 / 유럽 50여 개 도시와 일본·중국 등지에서 세계적인 클래식·오페라 거장들의 무대 900여 회 관람 / 저서 《거장들의 유럽 클래식 무대》(2013, 투티)
《음악세계》 1964년 7월호에 실린 제3회 서울국제음악제 당시 안익태의 지휘 모습이다.
  생전 국내 음악인들과 안익태의 반목은 안익태(安益泰·1906~1965)를 폄하하는 쪽에서 수시로 활용하는 레퍼토리였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음악인들이 안익태의 적이었으며, 어떤 경위로 이 같은 갈등구도가 만들어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문헌을 발굴했다.
 
  1964년 4월에 창간된 《음악세계》 5월호에는 서울국제음악제를 목전에 두고 열린 좌담회 기사가 7쪽에 걸쳐 실려 있다. 제목은 ‘국제음악제 중단 논의의 주변’이다.
 
  1962년부터 안익태가 주도한 서울국제음악제는 1964년까지 3년 연속으로 개최됐다. 1964년 음악제는 서울시의 보이콧으로 중단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안익태의 열의(熱意) 덕으로 축소된 규모로나마 열릴 수 있었다.
 
  이 좌담회는 1964년 4월 15일 오후 3시 서울 충무로2가에 있던 양식전문점 ‘미장그릴’ 별실에서 열렸다. 부제는 ‘교향악 운동과 관련하여’이고, 안익태와 당시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임원식(林元植·1919~2002), 음악평론가 유한철(劉漢徹·1917~1980), 《음악세계》 사장 박중규(朴重圭·1925~1991·악기조합 이사장 역임)가 참석했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음악세계》 1964년 5월호 표지와 안익태 출연 좌담회 기사다. 좌담회 내내 임원식은 안익태가 주도하는 서울국제음악제에 곱지 않은 태도로 일관한다.
  두드러지는 인물은 임원식이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전신인 고려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를 지낸 임원식은 당시 국내 음악계의 거두였다. 그리고 국제음악협의회(IMC)가 공인한 한국음악협회(이하 음협)의 이사였다. 이와 비교해, 안익태는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해외파의 거물이었다. 좌담회 내내 임원식은 안익태가 주도하는 서울국제음악제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여기에는 1962년 제1회 서울국제음악제에서 KBS교향악단을 지휘한 후 더 이상 초청받지 못한 임원식의 구겨진 자존심이 저변에 깔려 있는 듯 보인다. 안익태가 3회에 걸친 음악제에서 10차례 지휘봉을 들었음을 감안하면, 임원식의 입장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필자는 1995년 10월 19일(목), KBS홀에서 임원식이 지휘하는 KBS교향악단의 연주회를 관람한 적이 있다. 당시 76세의 노장이 해석한 우종갑(1916~2014)의 관현악을 위한 전주곡 ‘나선’과 랄로의 첼로 협주곡(야노스 슈타커 협연) 및 브람스 교향곡 1번은 선 굵은 박력으로 무장한 무대였다.
 
  임원식은 만주국 국책악단인 하얼빈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 아사히나 다카시(1908~2001)를 보좌한 후, 미국 줄리아드음악학교에서 지휘를 배운 경력을 빼면 순수한 국내파다. 그에 비하면 안익태는 오대양 육대주의 저명한 악단 다수를 지휘한 세계적인 거물이었다. 이런 괴리감이 임원식이 안익태의 호적수로 등극하게 된 배경이 아닌가 싶다.
 
  임원식은 《음악세계》 좌담회에서 여러 차례 안익태를 공박한다. 우선 임원식은 서울국제음악제 상임위원회로부터 상임위원 위촉을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일갈한다. 본인이 이사로 재직 중인 음협에 서울국제음악제 측이 후원 내지 협력해달라는 교섭이 일절 없었다는 점이 그 이유다. 또한 임원식은 안익태와 친분 있는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무보수로 내한공연을 갖는 현실에 질투의 감정을 드러낸다. 안익태의 실력과 명성 덕을 보는 서울국제음악제에 제동을 거는 모양새다.
 
  이에 안익태는 반발한다. 해외 초청 연주자들에게 지급할 달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실에서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팔아서라도 세계적인 연주자의 연주를 듣게 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말이다. 안익태는 “우리나라 음악인들 아주 나쁘다”며 분노를 표출한다.
 
  서울시립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을 통폐합해서 걸출한 악단 하나를 만들자는 안익태의 제안에도 임원식은 반발한다. 실직한 단원들은 어떻게 먹고사느냐는 이유에서다. 이런 임원식에 대해 사회를 맡은 음악평론가 유한철은 음협의 적극적인 활동을 주문한다. 막대한 예산을 정부로부터 따내는 체육계를 예로 들면서, 임원식이 이사로 재직 중인 음협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서두에서 유한철은 ‘서울국제음악제와 관련이 없다’는 성명을 발표한 음협에도 속 좁은 행태라며 핀잔을 준다. 이에 임원식은 국민들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IMC의 유일한 국내 산하단체인 음협이 서울국제음악제와 무관하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로 맞받아친다.
 
  유한철은 안익태에게도 지나친 원맨십을 버려달라 주문한다. 그것 때문에 오해를 사, 애는 애대로 쓰고도 일부에서 욕을 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에 안익태는 작년에도 홀로 추진해서 국제음악제가 성사된 거라며, 올해도 꼭 국제음악제를 성사시키겠다고 말한다. 그 결과, 5월 19일부터 26일까지 예년의 절반 규모로 제3회 서울국제음악제가 개최됐다.
 
 
  안익태의 적대자들
 
  필자가 좌담회 기사를 반복해서 읽고 난 느낌은, 국내 음악계의 수장 임원식이 해외파의 거두 안익태를 라이벌로 여기는 듯한 기류가 지배적이었다. 그의 스승인 일본의 명장 아사히나 다카시보다 안익태는 두 살 위인 대선배였다. 그럼에도 임원식은 아사히나 다카시를 평생 스승으로 극진히 섬겼음에 반해, 그보다 세계적인 지휘자 안익태는 호적수 정도로 폄하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1971년 11월 4일과 5일, 상임지휘자 아사히나 다카시가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서울시민회관에서 첫 내한공연을 가졌을 때도 임원식은 스승에 이어 둘째 날의 지휘봉을 들었다. 그리고 스승이 타계한 후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추모음악회에 초청받아 지휘하기도 했다. 이렇듯 임원식이 아사히나 다카시와 안익태를 대한 태도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안익태의 적대자는 이외에도 적지 않았다. 해방 이후 1949년 한국 최초의 음악평론집 《음악과 현실》을 펴낸 음악평론가 박용구(1914~2016)는 또 다른 안익태의 적이었다. 박용구는 1965년 9월26일자 《주간한국》에 쓴 추도글 〈최후의 로맨티시스트 안익태〉에서 안익태를 적잖이 깎아내리고 있다.
 
  “씨와 나는 서울시 주관으로 개최하려다가 유산된 제3회 국제음악제 때문에 과격한 말다툼을 벌인 일도 있고, 어느 신문이 비난조로 말한 ‘그와 반목하여 고인을 괴롭혔던 일부 국내 음악인’의 한 사람이지만 (후략)”과 “씨의 대표작인 ‘코리아 판타지’가 환상곡 형식으로 된 것은, 씨가 주제 전개에 작곡 기교가 따르지 못해서 교향곡 형식으로 구성해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가 이를 증명한다.
 
  이 외에도 박용구는 같은 글에서, “씨가 독·이·일 추축의 시류를 타고 일본의 아악(雅樂) ‘월천악(에텐라쿠)’을 발표한 것은 스승 슈트라우스의 인생 태도와 비슷하다고 하겠으나 그것은 또 다른 문제에 속한다”라고 안익태를 폄훼한다.
 
  필자의 판단으로 박용구는 ‘월천악(에텐라쿠)’이 통일신라시대 옥보고의 ‘강천성곡’에서 비롯됐고, 안익태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야상곡과 에텐라쿠’를 작곡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원로음악평론가 이상만(1935~ )은 1965년 11월호 《신동아》에 쓴 추모글 〈안익태씨의 명성과 고집〉에서 안익태의 ‘강천성악’을 졸평한 일을 언급한다.
 
  “1961년 나는 그의 연주에 대해서 졸평을 가한 일이 있다. 이 평의 골자는 그가 연주한 자신의 작품인 ‘강천성악’이라는 곡조가 프로그램에 설명한 것과 같이 한국적인 작품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평의 파문은 널리 번져가서 나의 평에 대한 반박이 실리기 시작했었다. 반박의 요지는 세계적인 위대한 대음악가를 일개의 졸장부가 감히 어떻게 평을 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 소동은 널리 퍼져 모기관에서 나의 뒤를 밟은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2019년 11월 21일(목) 밤, 서울 한남동 일신홀에서 열린 ‘스승 나운영을 기리는 이영자 작곡발표회’에서 만난 이상만 선생은 귀중한 증언을 필자에게 해주었다. 젊은 이상만이 “선생님, 왜 일본의 고대 아악인 ‘에텐라쿠’를 작곡하셨습니까?” 하고 묻자, 안익태가 답하기를 “그거 한국에서 넘어간 음악 아니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일화를 통해서도 안익태가 ‘에텐라쿠’를 일본 음악이 아닌, 고대 한반도의 음악으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일국의 장관인데 아예 명령조였다
 
《음악세계》 1964년 7월호에 실린 제3회 서울국제음악제 초청 음악가들 연주 모습이다.
  현존 최고령 음악평론가 김형주(1925~ )는 2012년에 출간한 《나의 음악인생》 중 〈지휘봉 하나로 세계 누비며 민족혼을 심었던 애국자 안익태〉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준다.
 
  “서울시가 주최하기로 한 제4회 국제음악제 준비 과정에서 서울시장이 몇몇 운영위원을 시청으로 초대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안익태, 김성태(1910~2012·작곡가·전 서울대 음대 교수), 정희석(1917~2002·바이올리니스트·전 이화여대 음대 교수), 박태현(1907~1993·작곡가), 전봉초(1919~2002·첼리스트·전 서울대 음대 교수) 그리고 필자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시장실에 둘러앉아 시장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안익태 선생이, ‘이 중에 스코어 볼 줄 아는 사람 있어요?’ 하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이 양반 또 말실수를 하시는구나 했다.”
 
  “또 언젠가는 문공부 장관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나, 안익태요. 서울에 왔소. 지휘를 해야 하니 서울시립교향악단과 KBS교향악단을 동원해주시오.’
 
  그래도 일국의 장관인데 아예 명령조였다. 그래도 그것이 통했다. 그러니 위에서 지시를 받은 악단의 지휘자들 마음이 편했겠는가. 안익태 선생이 국내 음악계에서 인심을 잃어간 한 예이다. 그러나 성질이 곧아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정의를 위해서는 불같은 투지로 싸우는 칼날 같은 기질을 발휘하곤 했다.”
 
  이 같은 인간 안익태의 독선적 기질에도 불구하고, 음악가 안익태는 부인할 수 없는 20세기 초·중반 동양 최고의 지휘자였다. 그가 생전 지휘한 세계적인 악단들의 리스트가 이를 말해준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 파리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스위스 이탈리아 방송 교향악단, 로마 방송 교향악단, 더블린 방송 교향악단,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바르셀로나 이베리카 오케스트라, 바르셀로나 리세우 대극장 오케스트라, 마드리드 심포니 오케스트라, 마요르카 심포니 오케스트라,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 할리우드 볼 심포니 오케스트라, NBC 하우스 오케스트라(N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전신), NHK 심포니 오케스트라,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도쿄 ABC 교향악단 및 동유럽과 중남미, 대만, 필리핀의 주요 악단들….
 
 
  “고노에 백작보다는 안익태씨를 절대적으로 선호하겠습니다”
 
안익태를 높이 평가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총감독 게르하르트 폰 베스터만 박사.
  한편, 전설적인 독일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1886~1954)의 상임지휘자 시절,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총감독으로 있던 게르하르트 폰 베스터만(1894~1963) 박사는 독일·일본협회 베를린 본부 총무에게 보낸 1943년 5월3일자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고노에 백작 초청 건은 당분간 없던 일로 할 수 있을까요? 당신이 제안한 두 명 중에 선택을 하라면 나는 예술적인 관점에서 고노에 백작보다는 안익태씨를 절대적으로 선호하겠습니다.”(코블렌츠 국립문서보관소 소장)
 
  당시 베스터만 박사가 언급한 고노에 히데마로(1898~1973)는 1926년, 지금의 NHK교향악단의 전신인 도쿄 신교향악단을 창단한 일본 음악계의 대부이다. 그는 지금도 일본 관현악계의 초석을 다진 전설적인 지휘자로 일본 내에서 추앙받고 있다. 1930년 5월, 도쿄 신교향악단을 이끌고 세계 최초로 말러 교향곡 4번 음반을 남긴 고노에는 1937년과 1938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돈으로 매수해 모차르트와 무소르그스키, 하이든의 관현악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그의 친형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총리를 지내고 전범으로 낙인찍혀 음독자살한 고노에 후미마로(1891~1945)다.
 
  안익태는 베스터만 박사의 편지로부터 석 달이 지난 1943년 8월 18일 구베를린 필하모니홀에서 ‘한여름밤의 음악회’라는 공식연주회를 지휘하며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당당히 데뷔했다.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았다.
 
  〈바그너: 오페라 ‘리엔치’ 서곡, 안익태: ‘에텐라쿠’,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D단조(피아노 협연 다그마르 벨라),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이것이 실력만으로 동양인이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최초로 지휘한 무대였다. 이후 정명훈(1953~ )이 1984년과 1987년, 1990년, 2001년, 2014년 다섯 차례 지휘할 때까지 한국인이 다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이 같은 안익태의 걸출한 지휘 능력을 증언한 위인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20세기 일본 음악평론계를 고이시 다다오(1929~2010)와 양분했던 우노 고호(1930~2016)이다. 우노 고호는 1961년 12월 8일 도쿄 히비야 공회당에서 안익태가 모교인 도쿄 구니타치 음악학교 오케스트라의 제15회 정기연주회를 지휘한 무대의 연주회 평을 남기고 있다. 안익태가 지휘한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교향곡 9번 ‘합창’ 해석을 두고, 그는 네덜란드의 전설적 지휘자 빌럼 멩엘베르흐(1871~1951)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면서,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1908~1989)의 베토벤 해석보다 안익태의 베토벤 해석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한다. 안익태의 베토벤 해석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에게서 외에는 들은 적이 없는 대단한 것이라고 그는 적고 있다. 아마도 이런 지휘법은 스승 슈트라우스에게서 배운 주관적인 19세기 풍에다, 안익태의 개성이 어우러진 결과물 같다고 그는 나름의 추측을 하고 있다. 이 같은 우노 고호의 호평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이후 안익태는 일본 내 주요 악단들을 잇달아 지휘하게 된다.
 
  1930년대 말부터 첼로를 접고 지휘로 전향한 안익태가 더욱 경이로운 것은 세계 최고 악단을 두루 지휘한 최초의 동양인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1963년 미국의 《타임》지에서 저명한 음악평론가 열 사람에게 ‘세계 최고 오케스트라 베스트3’을 고르라고 한 결과, 거의 전원일치로 다음의 악단들을 선정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상임지휘자로 있던 서독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오토 클렘페러(1885~1973)가 수장으로 있던 영국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조지 셀(1897~1970)이 음악감독으로 있던 미국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였다.
 
  1963년 당시, 안익태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제외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모두 지휘한 유일무이한 동양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인 1946년에는 스페인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로 취임했으니, 안익태의 지휘 역량이 일찌감치 대가의 반열에 올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안익태가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된 일은 역사상 최초로 동양인이 서양 악단의 수장으로 임명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이후 일본의 오자와 세이지(1935~ )가 1965년 캐나다 토론토 교향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될 때까지, 서양 악단의 수장을 지낸 동양인은 안익태가 유일했다. 그만큼 안익태는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음악계의 독보적인 선구자였다.
 
 
  안익태가 대단한 진짜 이유들
 
1942년 3월 12일 빈 무지크페라인잘에서 안익태 지휘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에밀 폰 자우어와 협연하는 모습이다.
  안익태가 유럽과 미국에서 한창 지휘 활동을 하던 193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시기는 동양인 음악가에 대한 차별이 노골적이던 때였다. 이런 악조건의 시대상황 속에서 그가 이룬 찬란한 음악 업적은 갈채를 받아 마땅하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2년 3월 12일 빈 무지크페라인잘에서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프란츠 리스트(1811~1886)의 마지막 피아노 제자인 전설적인 비르투오소, 에밀 폰 자우어(1862~1942)의 마지막 무대를 함께했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날, 80세의 자우어는 안익태가 지휘한 빈 심포니와 스승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고, 한 달 후인 4월 27일 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우어에게도, 안익태에게도 이날 무대는 의미심장한 콘서트였던 것이다.
 
  1944년 4월 파리에서 안익태는 당시 프랑스 최고 악단인 파리 음악원 오케스트라(파리 오케스트라의 전신)를 이끌고 3일간의 ‘베토벤 페스티벌’을 지휘한다. 당시 안익태 지휘로 베토벤의 유일무이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 사람이 프랑스 티보 악파의 시조 자크 티보(1880~1953)이다. 그리고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협연한 피아니스트가 알프레드 코르토(1877~1962)이다. 티보와 코르토는 스페인의 전설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1876~1973)와 함께 ‘백만불 트리오’를 결성해 선풍을 일으킨 음악계의 거인들이었다. 이런 희대의 거장들을 협연자로 내세워 안익태가 유럽 최고 악단들을 유럽 본바닥에서 근 80년 전에 지휘했다는 사실은 전대미문의 사건일 수밖에 없다.
 
1944년 파리의 ‘베토벤 축제’ 첫날 안익태와 바이올리니스트 자크 티보가 협연 후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 외에도, 안익태가 1936년 8월 부다페스트에서 오스트리아의 대지휘자 펠릭스 바인가르트너(1863~1942)와 만남을 갖고, 그의 주선으로 부다페스트 교향악단을 지휘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인가르트너는 구스타프 말러(1860~1911) 후임으로 1908년부터 1911년까지 빈 궁정 오페라극장 음악감독을 역임하고, 1930년대 세계 최초로 베토벤 교향곡 전집 음반을 녹음한 인물이다. 바인가르트너는 또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에 해당하는 정기연주회 지휘자직을 1908년부터 1927년까지 지낸 유럽지휘계의 대부였다. 그런 전설적인 존재로부터 약관 30세의 한국 음악가 안익태가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 초, SBS에서 안익태의 헝가리 유학 시절을 추적하는 보도를 3회 연속 내보냈다. 마지막 3회째에서 현존하는 헝가리 음악평론가의 평론을 인용하며, 안익태가 페렌치크란 헝가리 지휘자보다 실력이 부족했다는 뉴스를 접한 기억이 난다. 여기서 언급된 페렌치크란 20세기 헝가리 지휘계의 황금기를 구축했던 야노스 페렌치크(1907~1984)를 가리킨다. 그는 약관 20세인 1927년에 부다페스트 왕립 오페라극장의 지휘자로 경력을 시작했고, 1930년과 1931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1867~1957)의 조수를 지낸 헝가리 지휘계의 기린아였다. 페렌치크는 헝가리의 선후배 지휘자들이 유럽과 미국의 주요 악단 수장으로 불려갈 때, 끝까지 헝가리 국립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있으면서 조국의 음악 발전에 기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페렌치크보다 안익태가 지휘 경력이 짧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동양인 지휘자로서 당시 유럽 음악계에서 안익태가 차별받았고, 페렌치크보다 지휘자의 출발이 10여 년 늦었다는 사실을 간과한 편파적인 보도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분명한 사실은 당시 유럽 음악계에서 안익태를 능가하는 수준의 동양인 지휘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잠든 안익태의 흔적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는 1963년 6월 6일 안익태가 도쿄 구니타치 음악학교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공연과 1962년 2월 5일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공연실황 녹음테이프가 잠자고 있다. 1963년 제2회 서울국제음악제에서 안익태가 서울시립교향악단을 지휘한 자신의 교향시 ‘논개’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지휘실황 녹음테이프 또한 방치되어 있다. 게르하르트 폰 베스터만과 우노 고호 같은 거물들을 비롯해서 세계인을 열광시켰던 안익태의 지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이 같은 음원들의 음반화는 절실하다.
 
  지금껏 전해지는 안익태 지휘음반은 1955년에 녹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레코드관현악단 연주의 〈애국가〉와 〈한국환상곡〉 단편 CD 및 1957년 할리우드 볼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의 ‘한국환상곡’+1961년 과테말라 국립교향악단 연주의 ‘강천성악’ 커플링 LP, 1961년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한국환상곡’ LP/CD, 1963년 제2회 서울국제음악제에서 광주 카리타스 수녀회 합창단을 지휘한 아카펠라 LP가 전부다. 음질은 하나같이 열악하다.
 
  베스터만 박사에 의해 안익태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평가된 바 있는 고노에 히데마로의 지휘음반은 10여 장이나 시판되고 있다. 그 음질 또한 하나같이 우수하다. 기록에 철저한 일본임을 감안하더라도, 한국이 근대음악의 국부 안익태를 대접하는 모양새는 푸대접에 가깝다. 하루 속히 20세기 초·중반 동양을 대표했던 세계적인 지휘자 안익태의 전모를 그려볼 수 있는 지휘음반들이 출시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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