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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강명주 지지옥션(GG Auction) 회장

“시사 만화 그리며 익힌 역발상으로 경매업계 밝힐 수 있었다”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조준우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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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한국 최초로 경매전문지 창간, 경매 정보 대중화하자, 경매 브로커들 사라져
⊙ 대학 입학금 모아준 고교 은사들의 은혜, 51년 뒤 1만 배로 갚아
⊙ 대학시절, 학보사 시사만화로 수경사 끌려가 고초 겪기도
⊙ 매주 연재하는 경매 만평, 1000회 돌파

姜明周
1943년생. 고려대 축산학과 졸업, 고려대 경영대학원 석사 / 1983년 《계약경제일보》(지지옥션 전신) 창간 / 2007년부터 한국기원 후원, 지지옥션배 바둑대회 개최, 現 한국기원 이사 / 2010년 지지자산운용사 설립 / 2019년 12월 경매만화 1000회 돌파
서울 청파동 지지옥션 사옥에서 만난 강명주 회장.
  음습한 골목이 밝아질 땐 필시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가로등이나 감시카메라가 추가되는 식으로 말이다. 부동산 경매(競賣)는 부동산 업계에서 일종의 음습한 골목이었다. ‘브로커’ ‘집달리’ ‘빨간딱지’ ‘압류’ 같은 꺼림칙한 용어들이 어른거리곤 했다.
 
  지금은 어떨까. 경매에 참여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일명 ‘경매학원’은 문전성시다. 경매로 집을 수십 채 사들였다는 30대 직장인에게 ‘선생님 선생님’ 하며 은퇴한 60대들이 머리를 조아리는 시대다. 현 정부 들어서 주택 대출에 규제가 쏟아지자, 경·공매 시장에 투자자들이 몰리고 있다. 경매 전성시대다.
 
 
  최초로 경매 정보지 창간
 
  이렇게 되기까진 한 사람의 역할이 있었다. 강명주(姜明周·77) 지지옥션 회장이다. 어감이 독특해서일까. 경매에 관심이 없는 이도 지지옥션이란 이름은 한 번쯤 눈여겨본 기억이 있을 터다. 지지옥션은 경매 정보를 제공하는 회사다. 구독자들에게 온라인과 종이신문 형태로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 1983년에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국에선 최초였다. 이후 비슷한 업을 하는 회사가 여럿 생겼지만, 지지옥션은 업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있는 지지옥션 사옥에서 지난 4월 28일 강 회장을 만났다.
 
  ― 경매 정보라는 게 뭡니까.
 
  “전국의 각 법원에서 쏟아지는 부동산 경매 정보를 모아서 알려주는 겁니다.”
 
  그는 얼핏 봐도 두툼해 보이는 신문을 내밀었다.
 
  “이게 경매 정보지입니다. 전주법원 한 법원의 경매 정보만 모은 것도 이 정도예요. 전국 곳곳에 법원이 있는데 이런 게 전주지법, 제주법원 등 하루에 열 종류씩 나옵니다. 페이지 수로 치면 세계에서 제일 두꺼운 신문이지요. 정기구독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합니다.”
 
  ― 인터넷으로 구독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텐데 종이신문 발행은 적자 아닙니까.
 
  “적자지요. 구독 부수가 많지 않으니까요. 온라인 수익으로 상쇄합니다.”
 
  ― 종이신문을 유지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경쟁사가 여럿 있지요. 그런데 종이신문은 저희만 만듭니다. 오래된 신뢰라고 할까요. 구독자들에겐 종이신문을 갖고 있는 회사와 그렇지 않은 회사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업체들은 종이신문을 만들다 만들다 실패하고 결국 인터넷만 하고 있어요. 법원별로 구독을 신청할 수 있는데, 대구지법 영덕지원 같은 곳은 구독자가 10명도 안 됩니다. 부수가 10부도 안 되는데 계속 제작할 수 있겠습니까.”
 
 
  광고 없는 신문 창간
 
  ― 어떻게 이런 일을 시작할 생각을 했습니까.
 
  “대학 졸업하고 교직원으로 학교에 1년 동안 있었어요. 그러다 그만두고 석유 곤로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곤로 만드는 업체가 대여섯 개였어요. 하필 그때 석유 파동이 일어난 겁니다. 가스레인지도 보급됐고요. 곤로 제작업체가 싹 다 망했어요. 곤로 만들다 골로 간 거죠. 제조업이 하나 망하면 비참합니다. 연관되는 업체도 쭉 도산하니까요.”
 
  ― 부도가 난 겁니까.
 
  “재산을 다 날렸죠. 가장이 됐는데 굶고 있을 수도 없고, 뭐 좀 해보려고 반년 동안 다니면서 연구를 했어요. 짜장면집도 생각했어요. 우선 눈에 보이는 게 길거리 간판인데, 맨 식당, 다방 이런 거밖에 안 보여. 보증금이 있었으면 식당을 열었을 거예요. 그런데 보증금이 없었어요.”
 
  ― 식당 주인이 될 뻔했네요.
 
  “저는 사실 신문쟁이입니다. 학교 다니는 내내 《고대신문》에 있었어요. 그래도 신문은 좀 아니까 신문 사업을 하려는데, 광고 받는 데에 영 자신이 없었어요. 학보사 있을 때 보면 서울대, 고대, 연대, 이대, 숙대 정도까지만 광고가 실리고 다른 곳은 힘들었어요. 광고 달라고 매달리는 걸 많이 봤기 때문에 광고 없는 신문을 만들겠다고 처음부터 작정을 한 거죠. 연구해서 내놓은 게 정보지입니다.”
 
  ― 그중에서도 경매 정보를 선택하신 거군요.
 
  “그때는 법원 경매 정보를 일일이 각 법원에 가서 직접 확인해야 했습니다. 실질적으로 개인이 전국의 경매 정보를 볼 방법이 없었어요. 이거라면 광고 없이 운영이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때는 문화공보부에 등록을 해야 했어요. 《계약경제일보》라고 일간신문 등록을 했지요. 계약은 입찰 계약이라든가 경매를 뜻했어요.”
 
 
  구독료 안 걷히자 선불제로
 
  ― 첫 반응이 어떻든가요.
 
  “처음엔 ‘지라시’처럼 프린트해서 무료로 나눠줬어요. 이런 게 없었는데 신기하거든. 줄을 좍 서더군요. 그래서 나중에 1000원씩 받았어요. 그래도 줄을 서. 그래서 2000원씩 받았어요. 나중엔 정기구독을 받았어요. 하루에 몇십 명씩 신청합디다. ‘야 이런 사업도 있네, 왜 진작 안 했을까’ 했죠.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요.”
 
  ― 어떤 문제였나요.
 
  “구독료가 안 들어오는 겁니다. 하도 돈이 안 들어와서 전화를 했어요. 그러면 내일 보내준다고 하고 안 보내주는 거예요. 정보지는 인기 있는데 돈은 안 들어오고 어떻게 합니까. 선불제로 바꿨어요. 주위 사람들이 미쳤냐고 난리였어요. ‘《조선일보》도 후불인데 이 지라시를 선불로 판다고?’ 그런데 워낙 필요하니까 선불로 구독을 합디다.”
 
  ― 그럼 전국의 법원마다 가서 경매 공고를 베껴오셨나요.
 
  “그렇지요.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사람을 보내서 경매 공고를 베껴오는데 이것도 또 힘들었어요.”
 
  ― 못 베끼게 했나요.
 
  “일반인들이 법원에 가면 쉽게 열람도 못 했어요. 게다가 ‘브로커’들이 있었어요. 오늘 경매한다 해서 법원 가서 열람하면 80건이면 10개는 없어졌어요. 브로커들이 법원 경매계와 짜고 그걸 감춘 거예요. 공고문만 찢어버려서 없어지면 일반인들은 모르잖아요. 경매가 유찰이 되면 한 번 유찰에 20%에서 30%씩 가격이 떨어져요. 두 번 세 번 유찰되면 반값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내준 법대 졸업생”
 
  ― 어떻게 해결했나요.
 
  “일이 되려니까 한 친구가 나타났어요. 지금도 제 아내는 그이를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이라고 해요. 법대 나온 사람이었는데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어요. 어느 날 만났는데 상황이 이렇다고 하니까 ‘그래? 내가 알아서 해주겠다’ 그래요. 법원에 가서 베끼고 있으니까 여지없이 경매계장이 공고 묶은 책을 뺏어가는 거예요. ‘당신 혼자 다 살 거야?’라면서요.”
 
  ― 그분이 순순히 뺏기진 않았을 것 같네요.
 
  “이쪽에선 이렇게 나갔어요. ‘이 사람아,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면 몰라도 혼자 있는데 왜 열람이 안 돼?’ 그래도 계장이 뺏어가는 거예요. 이 친구가 판사실에 올라간 거야. 판사가 자기 친구였던 거예요. 판사가 ‘그건 보여줘야 된다’ 그렇게 말한 겁니다. 그 소문이 전국으로 퍼졌어요. 그 후론 열람하게 해주더군요. 판사 친구가 나서주니까 길이 열린 거예요.”
 
  ― 그 후로는 탄탄대로였겠군요.
 
  “법원에서 브로커들이 감춘 경매 정보는 아예 ‘누락 정보’라고 알려주면서 실었어요. 누락 정보가 나왔다니까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져요. 그러니 브로커들이 없어져버렸지요. 등기 정보도 알려주려고 물건마다 등기부 등본을 다 뗐어요.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지금은 인터넷으로 등기를 뗄 수 있지만 그때는 등기소에 직접 가야 했거든요. 제주도며 속초며 사람을 보냈어요. 몇만 건이 나와도 수익을 쏟아서라도 다 뗐어요. ”
 
 
  등록금 없어 고교 퇴학
 
  회사의 사무실을 둘러보면 창업자의 경영 철학이랄까, 살림살이를 어떻게 꾸려가는지, 어렴풋하게나마 보인다. 창업자가 찬찬히 자수성가한 경우, 대개 사무실이 수수하다. 특히 회장실(사장실)이 검소하다. 자체 사옥이 있다 해도, 공간을 최대한 알뜰히 활용하고, 오래된 구조물을 급하게 교체하기보단 깨끗하게 관리하며 쓰는 것을 선호한다. 몸집은 최대한 느리게 불리고 내실을 다진단 얘기다. 지지옥션도 그렇게 보였다.
 
  ― 부유하게 자라진 않으셨지요.
 
  “고향이 경북 울진입니다. 당시엔 울진에 가려면 포항을 돌아서 가야 했어요. 서울에서 내려가는 데만 이틀이 걸렸지요. 동네 사람들 다 어려웠어요. 나무껍질 벗겨 먹으면서 살았으니까요. 어쩌다 감자를 먹으면 최고의 음식이고요. 짜장면은 중학교 들어가서 처음 먹어봤으니까요. 집에서 붓글씨나 한문만 가르치지 정규 학교는 못 다니게 해서 학교 진학도 늦었어요. 그런데 공부를 하고 싶은 거야. 혼자 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고 서울로 왔어요.”
 
  ― 그때는 지방 수재들이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오곤 했지요.
 
  “처음에 경기고등학교 시험을 봤어요. 떨어졌어요. 덕수상고를 봤는데 붙었어요. 그런데 등록금이 문제였어요. 홀어머니가 갖은 고생을 해서 입학금을 만들어주셨는데 형님이 써버렸어요. 시골에서 등록금은 보내줬지, 학교 다닌다고 해야 할 거 아니에요. 가짜 고등학생이 된 거예요.”
 
  ― 학교도 안 다니면서 다니는 척을 하신 건가요.
 
  “이 학교, 저 학교 가도 받아주는 데가 있어야지.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야간학교에 들어갔다가 등록금이 없어서 퇴학당했어요. 고향에선 학교 다니는 줄 아는데 큰일 났지. 2년 동안 신문 돌리고 다방 돌아다니며 껌이며 귤을 팔아서 돈을 모았어요. 그렇게 간 곳이 영락상고예요. 영락교회에서 만든 야간 상고였습니다. 남학생 30명, 여학생 30명 딱 한 학급 있었어요.”
 
 
  등록금 대준 여학생
 
2016년 12월 1일 서울 관악구 영락高에서 열린 장학금 1억원 전달식. 기부자인 강명주(가운데) 지지옥션 회장이 모교 재학생들, 정흥남(왼쪽에서 첫 번째) 교감, 남현주(왼쪽 뒷줄에서 세 번째) 부장교사, 원인진(오른쪽에서 두 번째) 교장과 환하게 웃고 있다.
  ― 등록금은 어떻게 충당하셨어요.
 
  “못 내서 쩔쩔맸지. 그런데 어느 날 등록금을 누가 내줬다는 거예요. ‘이상하다, 내줄 사람이 없는데’ 나중에 누군지 알았어요.”
 
  ― 누구였나요.
 
  “같은 반 여학생이었어요. 등록금 못 내서 허덕거리는 게 애처로웠나 봐요. 은혜를 갚진 못했습니다. 몸이 약해 일찍 세상을 떠났어요.”
 
  ― 공부는 열심히 하셨나요.
 
  “졸업장만 어머니 갖다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지요. 60명 중에 59등도 했어요. 그러다 학교에서 지능검사를 했는데 140이 나온 거예요. 그걸 보고 당시 교장이던 백상용 선생님이 담임이던 조병린 선생님에게 그랬대요. ‘강명주가 왜 공부를 안 하는지 좀 알아봐라’ 조 선생님이 1년 동안 저를 붙들고 공부를 시켰어요.”
 
  강 회장은 1년 동안 공부해 고려대에 붙었다.
 
  “사실 건국대 축산학과에 가려고 했어요. 진학만 하면 덴마크로 유학을 보내준다 했거든요. 고대에 붙고 나니까 학교에서 건국대 입시원서를 안 써줍디다.”
 
  여전히 문제는 돈이었다.
 
  “입학금이 없어서 진학을 포기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교장선생님부터 선생님들이 다 말리는 거예요. 선생님들이 1만원을 모아서 입학금 하라고 줍디다. 그때 울진군 국회의원이었던 진기배 의원도 소식을 듣고 1만원을 보태줬어요. 저희 고향 출신이 고려대에 입학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거든요. 그 돈으로 입학금을 냈어요.”
 
  강 회장은 2016년 영락고에 장학금 1억원을 기부했다. 다 같이 어려웠던 시절, 제자를 대학에 보내겠다며 사재를 턴 스승의 은혜를 51년 뒤 1만 배로 불려 후배들에게 돌려준 셈이다.
 
  대학에 입학 후 그의 인생은 또 한 번 방향을 틀었다. 만화였다.
 
  “《고대신문》에 들어갔어요. 시사만화 그리는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그렇게 네 컷짜리 시사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타이거’가 주인공이었는데, 200회 그렸습니다. 그때는 데모가 잦아서 휴교를 자주 했어요. 1년이면 삼십몇 주밖에 신문 발간을 못 했어요. 주간으로 나오는 신문에 200회를 연재했다는 건 7년 동안 그렸다는 거죠. 군대 다녀와서 6개월 쉬는 기간에도 그리고, 대학원에 다니면서도 그렸어요.”
 
 
  시사만화 때문에 고초도
 
  대학 학보사에 7년간 있던 기자는 아마 그가 유일할 거다. 첫 직장도 《고대신문》이었다. 만평을 계속 그려달라며 김상협 고대 총장은 학교를 졸업한 그를 《고대신문》 간사로 발령내줬다.
 
  ― 만화에 당시 시대상황도 담았겠네요.
 
  “그렇죠. 《고대신문》이 당시 인기가 대단했어요. 시대 흐름에 예민하게 반응했거든요. 교수들의 글도 다른 학교와 달랐어요. 4·19혁명도 고대 때문에 일어났잖아요.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시대였지요.”
 
  ― 군사 정권 시절이었는데 고초를 겪지는 않으셨나요.
 
  “1971년 위수령(衛戍令)이 발동됐어요. 모이라고 해서 갔더니 저를 딱 집어내더군요. ‘너 나와’ 해요. 얼굴을 다 알아요. 몇 명이 잡혀서 수도경비사령부(수경사)니 중앙정보부니 이리저리 끌려다녔어요. 트럭 같은 차에 실려서 엎드려서 가는데 고개 들지 말라고 해요. 어디로 끌려가는지 보고 싶잖아요. 남산 지하터널 들어가기 전에 여긴 어딘가 고개를 들었다가 맞아서 죽을 뻔했어요.”
 
  ― 만화 그린 죄였나요.
 
  “제일 마지막엔 수경사로 갔어요. 한 방에 한 명씩 가둬놓고 물통에 물을 떠서 딱 가져다 놔요. 무섭죠. 저는 만화 그린 죄밖에 없는데 만화 얘긴 묻지도 않아요. 뒤에서 누가 조종하냐고 자꾸 그 얘기만 물어요. 조종한 사람이 누가 있어야 말이지.”
 
  ― 어떻게 풀려나셨어요.
 
  “수사관도 여러 종류예요. 한 명이 ‘장가 안 가냐, 애인은 있냐’ 물어요. 나중에 장인 장모가 된 당시 여자친구 부모님이 조선호텔 아케이드에서 보석상을 하고 있었어요. 수사관이 거길 왔다 갔다 하면서 장모를 알고 있던 거예요. ‘내가 그 집 사위 될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래?’ 하더군요. 그렇게 살아나왔어요.”
 
 
  신문사 스카우트도 거절
 
강명주 회장이 그린 경매만화. 지지옥션 제공
  ― 졸업 후에 신문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땐 대학신문에 만화를 그리는 게 좀 특별했어요. 속 시원하거든. 그때 ‘타이거’ 하면 서울에선 모르는 대학생이 없었으니까. 《동아일보》 《중앙일보》에서 오라고 했어요. 다 거절했어요.”
 
  ― 왜요.
 
  “《고대신문》 조판을 《조선일보》에서 했어요. 학교 공부해야지, 만화 그려야지 뭐해야지 나는 시간이 없는데, 다른 애들은 일요일마다 놀러 다니는 거예요. 글은 누가 대신 쓸 수 있지만, 만화는 대신할 수가 없잖아요. ‘고바우’ 김성환 화백도 만나보고 ‘두꺼비’ 안의섭 화백도 만났는데 똑같은 얘기라. 가족들이랑 창경원에 놀러 가서도 자기는 속으로 만화 구상하고 있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만화 안 그리겠다고 했어요.”
 
  애써 피했던 만화였는데, 다시 만났다. 경매 만평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터넷 시대가 시작됐는데, 정보를 생산해서 올려놓으면 밤사이에 다른 업체에서 다 베껴가는 겁니다. 베껴서 디자인을 더 예쁘게 하면 당장 보기엔 그게 더 좋아 보이잖아요. 도저히 베낄 수 없는 게 뭘까, 결국 만화였어요. 내로라하는 신문사에서 오라는 걸 거절했는데 사업이 목숨처럼 중하니 다시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겁니다. 돌아보면 만화가 사업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역발상이라고 할까, 남들이 안 하는 걸 만화 덕에 생각해낼 수 있었어요.”
 
  지지옥션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첫 화면에 ‘지지’군(君)이 등장한다. 만화의 주인공이다. 지난해 12월 1000회를 넘겼다. 강 회장은 “자꾸 시사만화 그릴 때 버릇이 나와서 그려놓고 못 싣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궁금했던 질문을 꺼냈다.
 
  ― ‘경매로 산 집은 재수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 재수 없나요.
 
  “재수 없었지요. 경매에 나온 걸 브로커가 사서,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강제로 내쫓다시피 했잖아요. 합법적이라지만, 당한 사람은 얼마나 고통을 받았겠어요. 없는 사람들 쫓겨나는 걸 옆에서들 보고요. 그러니 경매 넘어간 집이라며 인식이 안 좋을 수밖에 없었지요.”
 
  ― 경매 정보지에 대한 인식도 그저 그랬겠습니다.
 
  “예전엔 그랬어요. 무슨 사업을 하냐고 물어요. ‘경매 정보지’라고 하면 ‘정보지’는 듣지도 않고 ‘경매’만 듣고 인간 취급도 안 했어요. 지금은 사람들이 좋아해요. 세상이 바뀌었어요.”
 
  ― 왜 바뀐 걸까요.
 
  “첫째, 정보지가 나왔잖아요. 브로커들이 독점하던 정보를 누구나 볼 수 있게 됐어요. 둘째, 법이 바뀌었어요. 예전엔 경매 방식이 호가제였어요. 서로 얼굴 보면서 여기선 1억, 저기선 1억1000, 제시하는 식이었어요. 그때는 입찰하러 나가면 발로 막 차요, ‘나가지 마, 내가 낙찰되면 돈 줄게’ 깡패들이 지키고 있기도 했어요. 금액을 적어서 입찰하는 식으로 바뀌면서 그런 게 없어졌지요.”
 
  지지옥션의 청파동 사옥도 경매로 구입한 거란다. 용산이 주목받기 직전에 낙찰받았다. 20억원도 안 줬다. 어림짐작으로도 상당한 시세차익이다. 그의 안목이 부러워졌다.
 
 
  “좋은 부동산은 가장 안전한 자산”
 
  ― 부동산이 앞으로 더 오를까요.
 
  “저는 기본적으로 정보사업을 창업한 사람입니다. 취급하는 정보의 성격상 부동산을 많이 접하게 됐지요. 회사를 경영하며 느낀 건 부동산은 길게 보면 내려가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주식이나 금을 사두는 것보다는 좋은 부동산을 사두는 게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 아파트보다 땅을 살까요.
 
  “그건 각자의 기호예요. 제 친구 한 명은 꼭 땅을 삽니다. 전 제가 직접 이용할 부동산을 샀어요. 길게 보면 부동산은 상승합니다. 다만 단기적으로 어떻게 될 거라는 예측은 할 수 없어요. 그건 알 수 없어요. 신문에 대여섯 사람 나와서 ‘부동산이 올해는 오를 거다, 내릴 거다’ 전망하는 건 별로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내렸으니 다시 오를 거다’ 이런 말은 누구라도 할 수 있어요.”
 
 
  자산운용사 진출
 
지난 3월 9일 열린 지지옥션배 어린이 대항전에 출전한 어린이 바둑기사들. 김민서(오른쪽) vs 조상연. 사진=한국기원
  강 회장은 10년 전 자산운용사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 왜 자산운용사를 시작하셨어요.
 
  “회사가 커지니 어떤 신사업을 할까 연구를 많이 했어요. 정말 세상에 좋은 사업이 없어. 탐이 나는 사업이 없더라고. 그러면 경매로 운용하는 부동산펀드를 해보자 생각한 거죠. 아파트 경매에는 많이 응찰하지만 경매물건이 100억원대가 넘어가면 경쟁률이 확 떨어져요. 유찰이 되면 20%, 30% 가격이 떨어지니까, 200억, 300억짜리를 거의 반값에도 낙찰받아요.”
 
  ― 주로 상업 건물이겠네요.
 
  “그렇죠. 펀드를 청산하고 수익을 배당하는 식입니다. 경매에 직접 못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간접투자의 길도 열어줄 수 있겠다 싶었어요.”
 
  ― 목표 수익률은 몇퍼센트인가요.
 
  “십 년 전에만 해도 자산운용사가 60~70개였어요. 지금은 200곳 됩니다. 좋은 부동산을 그만큼 구하기 어려워진 거죠. 강남은 3%, 4%대 수익률이 나와요. 우리는 7%대를 유지하려니 얼마나 물건 구하기 어렵겠어요.”
 
  ― 부동산 경기가 안 좋아지면 약속한 배당을 못 할 수도 있겠네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어요. 사실 펀드 운용은 마음만 먹으면 사기도 칠 수 있는 구조예요. 그런데 저희는 정보 제공이 본업이잖아요. 회사의 얼굴에 먹칠을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큰 물건도 안 해요. 큰 부동산은 몇천억씩 하는데 저희는 커 봤자 500억원 정도입니다. 보통 100억원, 200억원대지요.”
 
  ― 지금도 목표 수익률이 7%인가요.
 
  “지금은 6%로 내려갔어요. 금리가 워낙 떨어졌잖아요.”
 
  지지옥션은 경주에 호텔도 갖고 있다. ‘지지호텔’이다.
 
  ― 호텔업엔 왜 뛰어드셨나요.
 
  “친한 친구가 경주에서 호텔 사장을 하다 그만뒀어요. 어느 날 그러더군요. ‘호텔이 하나 나왔는데 수익이 괜찮아 보여.’ 사서 그 친구에게 운영을 맡겼어요. 그런데 생각만큼 안 되는 거예요. 친구는 손들고 나가버렸어요. 결국 할 수 없이 내가 사장을 맡고 있어요. 호텔업이 요즘 잘 안 돼요. 경주에 지진도 났고, 신종 코로나19 사태도 왔잖아요.”
 
  ― 그래도 갖고 계시네요.
 
  “규모가 작으니 그냥 두고 있어요. 지지옥션배 바둑대회 개막식을 거기서 열기도 해요. 4년 전부터는 신혼여행을 경주로 가는 신혼부부에겐 호텔방을 무료로 제공합니다. 도대체 신혼여행을 왜 외국으로 가야 합니까? 호텔 안에서만 머무르는 경우가 태반이잖아요. 경주엔 도시 곳곳에 문화재가 있어요. 여행 가서 문화재도 보면 좋지 않나요.”
 
  경주로 신혼여행을 오면 호텔 숙박권을 준다고 발표하자, 감복한 지인이 경주시 관계자와 강 회장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 자리에서 강 회장은 이런 말을 들었단다. ‘그렇게 해서 사업을 어떻게 하십니까?’
 
  “기업 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실행에 옮기는데 시 관계자라는 사람은 그렇게 나옵디다. 그 만남을 제 머리에서 씻어내버렸어요.”
 
  이 외 사회 공헌을 하는 분야가 또 있다. 바둑이다. 그 자신도 바둑을 둔다. 아마 4단, 일반인 중엔 거의 최고수급이다. 한국기원을 오랫동안 후원 중이다. 회사 이름을 따서 ‘지지옥션배 바둑대회’를 연다. 올해 14기 대회가 개막했다.
 
 
  “민간 경매 도입 필요”
 
  강 회장도 실패를 맛본 경매 분야가 있다. 바로 ‘민간 경매’다.
 
  ― 민간 경매가 뭡니까.
 
  “지금은 법원에서 하는 경매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하는 공매가 있습니다. 세금을 체납한 경우 캠코에서 공매를 하지요. 경매는 법원에서 민사집행법에 의해 하는 겁니다. 두 가지 다 관(官)이 하는 겁니다. 이와 달리 일반 개인이 경매로 부동산을 거래하는 방식이 있어요. 민간 경매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 새로운 경매 분야네요.
 
  “20년 전에 도전했습니다. 법원경매 정보만 제공할 게 아니라 민간 경매라는 새로운 부동산 경매 시장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였어요. 잘 안 됐어요. 거래 중에 가장 큰 게 부동산 거래잖아요? 일반적인 수의계약과 함께 경매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다못해 어시장에서 고기도 경매로 사는 세상에 왜 부동산엔 경쟁 매매가 없습니까.”
 
  ― 외국엔 민간 경매가 있나요.
 
  “미국에선 30% 이상이 민간 경매로 거래됩니다. 경매 회사에 물건을 의뢰하면 홍보, 등기 처리까지 다 해주는 방식을 나라에서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어요. 뉴질랜드도 30% 이상이 민간 경매로 거래돼요.”
 
  ― 한국에선 왜 실패했을까요.
 
  “제도적인 지원도 없을뿐더러 일단 당시 경매에 대한 인식이 아주 안 좋았어요. ‘내가 망하지도 않았는데 왜 경매로 내 집을 파느냐’고 하는데, 거래의 한 방법이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소용이 없는 겁니다.”
 
  ― 한국의 부동산 거래 문화가 좀 독특한가 봅니다.
 
  “한국에선 일반적으로 시간이 갈수록 값을 올리지요. 미국 같은 곳은 현재 가치로 값을 정해요.”
 
  ― 다시 민간 경매에 도전하시나요.
 
  “필요하다고 여전히 생각해요. 인터넷에서 사고 싶은 물건을 찾은 다음, 중개업소로 가야 매도인과 연결되는 기존의 거래 방식이 최선은 아니거든요. 상당히 불편한 방법이에요. 연구도 많이 하는데 실패를 한번 해보니 자신이 좀 없어졌어요. 그러나 제가 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자리 잡을 겁니다.”
 
 
  은행, 법원도 경매 데이터 활용
 
  종이, 인터넷, 그리고 인공지능(AI). 경매 정보는 새로운 도구와 함께 진화하고 있다. 강 회장의 설명이다.
 
  “아마 부동산 경매에 관해선 세계에서 가장 광범한 데이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37년간 쌓인 데이터를 모두 데이터베이스화했으니까요. 지금은 지지옥션의 데이터를 쓰지 않는 은행이 없습니다.”
 
  ― 은행이 경매 정보가 왜 필요한가요.
 
  “은행이 부동산 담보로 대출을 해준다고 합시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새로 감정을 해야 합니다. 감정평가를 맡기면 돈이 많이 들어요. 우리 데이터를 이용하면 감정료를 물지 않고도 감정을 할 수 있어요. 경매에 넘어갔을 때 얼마에 낙찰됐는지 데이터가 누적되어 있잖아요.”
 
  ― 데이터를 가공해서 판매하는 거네요.
 
  “심지어 법원에서 판결 내릴 때 저희 데이터를 참고하기도 합니다. 경매를 하다 분쟁이 붙었다고 합시다. 한쪽은 감정가의 70%에 낙찰이 된다고 주장하고, 다른 쪽은 100%라고 주장하면, 어느 쪽이 맞는지 데이터를 보면 알 수 있지요.”
 
  화제는 자연스럽게 현 정부의 부동산 정책으로 넘어갔다.
 
  ― 문재인 정부 들어 부동산 규제가 참 많이 나왔지요. 아파트 가격은 전국적으로 폭등했고요.
 
  “규제가 만능은 아닙니다. 규제를 하면 반드시 풍선효과가 일어납니다. 수요와 공급의 시장 원리에 맡기는 게 자연스러운 겁니다. 자식 교육도 그렇잖아요? ‘친구 만나지 말고 일찍 들어와, 이런 건 하지 마’ 이런다고 자식 교육이 잘 됩니까. 정치하는 사람들 수준이 좀 높아졌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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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달기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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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선아    (2020-07-16) 찬성 : 0   반대 : 0
유익한 내용이네요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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