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여파로 고려대, 경북 영양서 준비하던 탄생 100주년 행사 미뤄져
⊙ 고운 詩, 깊은 학문… 《志操論》을 읽으면 접할 수 있는 매운 기개와 지성
⊙ 리젠트 스타일의 장발에 검은 뿔테 안경… 늘 한복 차림, 두루마기 입고 외출
⊙ 술이 거나해지면 文友와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 자작시 ‘밤길’ 낭송
⊙ 폐침윤에 기관지 확장으로 각혈. 심해지면 그때마다 입원
⊙ 고운 詩, 깊은 학문… 《志操論》을 읽으면 접할 수 있는 매운 기개와 지성
⊙ 리젠트 스타일의 장발에 검은 뿔테 안경… 늘 한복 차림, 두루마기 입고 외출
⊙ 술이 거나해지면 文友와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 자작시 ‘밤길’ 낭송
⊙ 폐침윤에 기관지 확장으로 각혈. 심해지면 그때마다 입원
- 탄생 100주년을 맞은 시인 조지훈 선생.
한국인이 좋아하는 절창인 시(詩) ‘승무(僧舞)’와 ‘낙화’ ‘절정’ ‘고풍의상’을 쓴 조지훈(趙芝薰·본명 東卓·1920~1968) 시인이 탄생 100년을 맞았다. 고운 시, 깊은 학문, 매운 지조(志操), 고고한 지성의 시인은 ‘지훈 한양(漢陽) 조공(趙公) 동탁지묘(東卓之墓)’로 경기도 양주 땅 마석의 송라산 기슭에 누워 있지만, 아직도 그의 시는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탄생 100주년 행사가 미뤄지고 있으나 조만간 그가 교편을 잡았던 고려대에서, 고향인 경북 영양에서, 조지훈 전집(全集)을 간행한 나남출판사에서, 그리고 대산문화재단에서 각종 학술대회와 세미나가 열릴 계획이다. 또 우크라이나 키예프국립대에서 조지훈 흉상과 시비 건립이 추진 중이다. 선생은 영면하기 직전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병치레가 잦았지만, 너무나 이른 마흔여덟에 세상을 떠날 줄 누구도 몰랐다. 1968년 1월 《사상계》에 발표된 선생의 시 ‘병(病)에게’는 선생의 마지막 작품이다.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종래 그에게서 볼 수 없던 극적인 발상의 시였다.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조지훈의 ‘병에게’ 1연과 2연, 6연 중에서
기자는 4월 10일 서울 옥수동에서 선생의 3남인 조태열(趙兌烈·66) 전 주(駐)유엔대사를 만나 시인의 삶과 문학을 더듬어보았다. 조 전 대사는 최근 주유엔대사에서 물러났다. 40년간 직업 외교관으로 주스페인 대사, 외교부 차관, 유엔개발계획(UNDP) 집행이사회 의장 등을 역임했다.
늘 한복 차림… 종종 나비넥타이를 매고
조태열 전 대사의 말이다.
“시 ‘병에게’는 돌아가시기 4개월 전에 발표되었으니까 이 땅에 남기고 가신 마지막 시인 셈이다. 마치 살아 계신 병석(病席)의 아버지 음성을 듣는 것 같고 그래서 더욱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시다. 읽을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열세 살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큰형 광렬(趙光烈)은 스물세 살, 작은형 학렬(趙學烈)은 스무 살, 누이 혜경(趙惠璟)은 열일곱 살이었다.
“48세에 돌아가셨지만 20대 때 이미 40대처럼 중후한 모습이셨고 그 모습이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다. ‘일찍 늙으면 중년이 길어 좋다’고 늘 혼잣말을 하셨으니까…. 그때 사진을 지금 꺼내 보면 40대가 아니라 60대처럼 보인다. 자식이 봐도 범접하기 어려운 근엄함이 있었다.
사실 기억 속 아버지 모습은 병석의 아버지다. 제가 초등 3학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4~5년간 사랑방에 누워만 계셨다. 당시 고려대를 다녔던 분을 만나보면 1년에 한두 번밖에 강의를 안 하셨단다. 강의할 몸이 아니셨던 것이다. 폐침윤(肺浸潤)에 기관지 확장으로 각혈을 하셨고, 심해지면 그때마다 입원하셨다.
폐결핵 환자는 검붉은 피를 쏟아내지만, 아버지는 새빨간 피를 토하셨다. 우리 가족은 늘 놋 요강이나 대야를 상비해놓았는데 토혈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봐야 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의 병력은 아주 어릴 때부터였다고 한다. 백일해를 앓아 병을 얻었단다. 요즘으로 치면 병도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치료 약이 없었다.”
아버지의 입술 색이 보랏빛을 띠었고 손바닥은 물론 손톱 색마저 붉은 기가 전혀 없고 늘 검푸른색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시 ‘병에게’를 쓰실 때 죽음이란 걸 예감하고 계셨던 것 같다. 돌아가시기 전날 ‘막내가 보고 싶다’며 저를 병실로 데려오라고 하셨다는데 그때도 아마 죽음의 그림자를 보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식구 중 아무도 아버님의 그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게 한(恨)스러울 뿐이다.”
시인 오탁번(吳鐸藩) 고려대 명예교수는 당시의 스승을 이렇게 말했다.
“조지훈 선생은 4·19를 겪으며 이미 이 땅의 가장 존경받는 스승의 높은 자리에 올라 있어서 그의 글과 기백이 캠퍼스 곳곳에 스며 있었다. 구태여 직접 강의실에 꼬박꼬박 나올 필요는 없다고 학생들 스스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당시 학생들 각자가 조지훈 선생의 글을 도서관에서 읽는 일만으로도 쩔쩔맬 정도로 그는 많은 시와 논설과 논문을 가지고 있었다.”
조지훈의 매운 기개와 차가운 지성은 당대의 명문으로 꼽히고 있는 《지조론(志操論)》을 읽어보면 쉽게 접할 수 있다. 후학들의 평가처럼 그는 실로 ‘전체가 부분의 집합보다 큰 인물’이었다.
키가 180cm를 넘은 그는 그야말로 멋쟁이였다. 조 전 대사의 회고다.
“생전의 아버지는 당신 세대에 보기 드문 6척 장신에다 가르마 없이 모두 뒤로 쓸어넘긴 소위 리젠트 스타일의 장발에 검은 뿔테 안경 속의 시선은 항상 먼 하늘에 두고서 느린 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어 다니셨다.”
好酒家… 나그네 가는 길에 주막이 없으리야
― 1960년대 초반 여대생들에게 가장 멋진 남성으로 뽑히셨다고 하던데….
“집안에 계실 땐 늘 한복 차림이었고 외출할 때도 두루마기를 즐겨 입으셨다. 양복 차림에 종종 나비넥타이를 매고 바바리코트나 두꺼운 외투를 걸쳐 입고 나서시면 영국 신사도 오히려 머쓱할 만큼 훤칠하고 준수한 외모의 멋쟁이셨다.”
― 사진 속 선생의 모습에서 독특한 풍모가 느껴진다.
“먼 산을 바라보며 지그시 담배를 물고 계신 모습,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시는 모습, 소매 끝을 슬쩍 걷어 올린 줄무늬 와이셔츠에 베레모를 쓰고 한 손엔 스틱을 쥔 채 성북동 산길을 유유히 산책하시는 모습 등이 떠오른다.”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술 한잔 하고 귀가하셔서는 ‘우리 막내’ 하면서 내 뺨을 비비거나 무릎에 앉히고 얼러주신 적은 종종 있었다. 아마도 두 분 형님이나 누님은 그런 기억이 없지 않을까 싶다. 학교 갔다가 돌아오면 사랑방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가 문을 열고 ‘우리 막내 왔나?’ 하며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도 떠오른다.”
그는 “그런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지금까지 기억에 선명한 아버지 모습은 대부분 술자리에서의 모습”이라고 했다.
조지훈이 세상을 떠난 후 한 주간지에 소개된 ‘우리 역사상 최고의 주객(酒客) 명단’에서 김삿갓, 황진이, 변영로에 이어 4등을 차지했을 만큼 선생은 호주가(好酒家)였다. 집에서도 늘 반주를 했고, 밖에서 술을 마신 후에도 술친구들을 모두 집으로 데려와 아내(金蘭姬 여사)에게 다시 술상을 차리게 한 적이 다반사였다.
“나도 그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감상할 기회가 많았다.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가 주흥(酒興)에 겨워 호탕하게 웃으시며 문우(文友), 제자들과 술잔을 나누는 장면이 멋지게 보였던지 지금도 흑백사진처럼 또렷한 이미지로 뇌리에 남아 있다.”
― 구체적으로 다시 묘사해달라.
“가수 박인희가 노래로 불러서 히트한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은 아버지와 술친구들이 술자리에서 한 소절씩 주고받으며 애송하시던 시다. 나는 초등학교 1~2학년 때 이미 이 시를 하도 많이 들어 거의 외고 있었다.”
술이 거나해진 사람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라고 먼저 운(韻)을 떼면 다른 사람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라고 대구(對句)를 이어가며 암송을 했다.
“‘밤길’이란 제목의 아버지 시도 술자리에서 단골로 애송되던 시 중 하나였다. ‘이 길로 가면은 주막이 있겠지요. 나그네 가는 길에 주막이 없으리야. 꽃같이 이쁜 색시 술도 판다오’라는 첫 구절이 왠지 마음에 들어 저는 입에 술도 대보지 못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 시구를 읊조리곤 했다. 그리고 나도 커서 대학생이 되면 스승과 함께 그런 풍류와 낭만과 격조 있는 술자리를 즐길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물론 대단한 착각이었지만….”
서울 성북동 60–44번지, 조지훈의 집터를 찾다
기자는 조 전 대사를 만나기 전날, ‘서울 성북동 60-44번지’ 조지훈의 집터를 찾아갔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탄 뒤 800m가량을 걸어 도착했지만 옛집은 허물어지고 4층짜리 다가구 주택이 우뚝 서 있었다. 다만 표지석이 놓여 있었다.
〈…시인 조지훈 집터.
성북동 60번지 44호는 조지훈 시인이 약 30년간 살았던 곳이다. 당시 건물은 1998년경에 철거되고 현재 주택이 건축되었다. 시인은 《문장》을 통해 등단하였으며,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일컬어지며, 자연추구와 함께 관조적, 고전적인 품격의 시를 독자적으로 형성한 시인이다. 작품집으로는 《청록집(공저)》 《풀잎단장》 《승무》 등이 있으며, 이 외에 많은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조지훈의 성북동 집터 근처에 ‘방우산장’이란 기념공간도 조성되어 있었다. 마침 산책 나온 시민들이 그곳 동판에 새겨진 시 ‘낙화’를 읽고 있었다. 기자도 그들 틈에 끼어 시를 음미해보았다.
꽃이 지기로 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조지훈의 ‘낙화’ 1~6연 중에서
시인의 집터에서 ‘낙화’를 읽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성북동 60-44’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던 시업(詩業)의 공간이었다. 이 집은 디귿자(ㄷ) 모양의 한옥이었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장남 광렬씨는 성북동 집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홍익대 건축미술과(지금의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골목으로 난 서향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간 왼쪽에 작은 뒷마루가 있고 문간방으로 들어가는 미닫이문이 있었다. 이 문간방은 옆의 사랑방과 미닫이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골목에서 대문을 열고 문간에 들어서서 높은 문지방을 넘으면 작은 마당이 나오는데 그 마당을 향해 남쪽으로 트인 디귿자 집이었다.
마당 북쪽의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서쪽엔 사랑방과 문간방, 서남쪽에 방 하나와 그 옆에 변소가 기역자(ㄱ)로 붙어 있었고, 그 사이에 대문과 문간이 있었다. 큰 마루 동쪽엔 안방이 있고, 그 안방 남쪽에 부엌과 방 하나가 기역자로 붙어 있었다. 사랑방과 안방 사이에 있는 대청 남쪽에 마당으로 나가는 유리창이 달린 미닫이문이 있었다. 북쪽에도 유리창이 달린 미닫이문이 있었는데 그 문을 열면 뒷집 담 사이에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공간이 장독대가 있는 동쪽 뜰로 향해 열려 있었다.”
“혜화동 고개에 올라 우이동 연봉을 바라보는 맛”
시인은 사랑방에서 손님을 맞고 집필도 했지만, 막내 태열이와 함께 잠을 자던 공간이기도 했다. 장남 광렬씨에 따르면 조지훈은 성북동을 좋아했다. 어느 방향으로 가나 5분만 가면 바위와 숲이 있어서였다. 그는 “혜화동 고개에 올라서서 성(城) 돌에 앉아 우이동 연봉을 바라보는 맛과 삼선교에서 성북동 뒷산을 보며 황혼길을 걸어오는 맛은 동양화의 운치가 있다”고 장남에게 말하곤 했다.
조지훈은 성북동 집을 ‘방우산장’이라 불렀다. 방우산장이란 ‘마음속에 소를 한 마리 키우면 직접 소를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없다’는 방우즉목우(放牛卽牧牛)의 사상을 담고 있다.
말년의 시인은 자연과 가까운 곳에 서재가 있는 운치 있는 집을 짓고 살고 싶어 했다. 실제로 성북동 양지바른 곳에 땅을 매입해 집을 팔고 계약금까지 받았다. 집 지을 동안 거처할 전셋집까지 마련해놓고 이삿날을 기다릴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건축가인 광렬씨는 선친을 생각하며 쓴 《승무의 긴 여운 지조의 큰 울림》(나남 刊)에서 성북동 집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당신이 좋으셨거나 싫으셨거나 그래도 아버지가 평생을 사셨던 집이었는데 경제적으로 여유만 있으면 그 집에서 살지는 않더라도 그 집을 영구히 기념으로 보존하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물론 성북동 집을 자주 드나들던 지인이나 제자분들 심정도 나와 다를 바 없으리라. 어쩌면 우리 가족보다 더 아쉬워할지도 모르겠다.…〉(88~89쪽)
지훈이 사망하자 집안은 더욱 기울었다. 조 전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3~4년간 사랑방에서 같이 잤다. 그런 면에서 형들보다 아버지와 스킨십이 많았는지 모른다. 아무런 재산도 남겨놓지 않고 새집을 짓는 일도 허사가 됐다. 이후 수없이 이사를 했다. 중2 때 연희동, 고1 때 대방동에서 살다가 대학교 때는 수유리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서울대까지 하루 3시간씩 통학했다. 10년 가까이 서울 시내를 동서남북으로 이동하며 살았던 셈이다. 형제 중 큰돈 버는 사람은 없었고, 나는 가난한 공직에 있었으니 줄곧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다.
어쨌든, 큰형의 꿈은 지금도 성북동 옛집을 복원하는 것이다. 이미 설계까지 해놓았다. 그 꿈이 이뤄질까….”
아내 김난희 여사가 좋아하는 시 ‘마음’
조지훈의 아내 김난희(金蘭姬) 여사는 올해 백수(白壽)인 99세다. 조태열 전 대사가 공직에서 물러난 뒤 김 여사를 모신 지 한 달이 됐다. 몇 해 전 낙상(落傷)을 해서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약간의 노인성 치매 증상을 앓고 있다. “50~60년 전 시집와서 겪었던 일은 다 기억하지만 5분 전 일은 기억 못 한다”고 한다. 조 전 대사의 말이다.
“평생을 그릇이 큰 남편을 떠받들고 사셨고 그걸 자랑으로 여기셨다. 어머니가 종부(宗婦) 노릇을 하셨는데 지금도 시집와서 장작 패고 지게로 물 긷고 살았다는 얘기만 종일 하신다. 내가 스페인・영국・이탈리아・프랑스・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할 때 세상 구경을 시켜드렸지만, 여전히 젊은 시절 고생한 얘기만 하신다. 너무 큰 짐 속에 사신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에게 지적(知的)으로 떨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셨는지 부단히 한문 공부도 하시고… 그것 때문에 정신줄을 안 놓으시고 나름 건강을 유지하고 사셨다.”
김난희 여사는 홀로 된 후 외롭고 울적할 때마다 남편의 시를 붓글씨로 옮겼다. ‘승무’ ‘낙화’ ‘완화삼’ 등 남편의 시를 한글 궁체로 쓰거나 부채를 만들고 채색화, 사군자 등을 그렸다. 10여 년 전 홍일식(전 고려대 총장)·인권환(고려대)·박노준(한양대) 교수 등 조지훈의 제자들이 하도 떼를 써서 전시회도 가졌다. 2002년 6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 마음이 늘 그렇잖아요. 까닭도 없이 마음이 시끄럽고, 잡으려야 잡을 수도 없고. 그래서 수양 삼아 쓰기 시작했어요. 나이 들어 조 선생 글 읽어보니 참 좋데요. 젊어서 곁에 있을 땐 몰랐는데, 그 양반이 남기고 간 시를 읽으면 모났던 마음이 둥글둥글해져요.”
김난희 여사가 좋아하는 남편의 시는 ‘마음’이다.
찔레꽃 향기에
고요가 스며
청대닢 그늘에
바람이 일어
그래서 이 밤이
외로운가요
까닭도 영문도
천만 없는데
바람이 불리고
물 우에 떠가는
마음이 어쩌면
잠 자나요
-조지훈의 ‘마음’ 1~3연 중에서
김 여사가 ‘마음’을 좋아한다면 정작 조지훈 시인은 어떤 시를 좋아했을까. 조 전 대사의 말이다.
“확실히 모르지만 ‘낙화’와 ‘절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돌아가시기 보름 전인가, 가족들을 다 모아놓고 ‘절정’과 ‘낙화’를 직접 낭송하셨다. 그 낭송을 녹음해둔 것이 아직 남아 있다. 당신은 떠날 줄 아셨던 것일까. 그때의 갈라진… 탁한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모(趙東敏·작고)랑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로 끝을 맺는 ‘낙화’를 곡조에 맞춰 부르셨다.”
장남 광렬씨는 ‘밤길’이란 시와 ‘절정’ ‘빛을 찾아가는 길’ ‘산중문답’ 그리고 ‘낙화’를 좋아한다. 막내 조 전 대사는 ‘절정’ ‘낙화’ ‘병에게’를 평소 애송한다. 주유엔대사로 재직하던 지난해 9월 20일 뉴욕에서 선친의 영문 시집 《낙화》를 출간한 일이 있다.
“영문 시집을 출간하며 ‘병에게’를 영어로 낭송했다. 이 시를 읽으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병석의 아버지가 떠오른다. 지금도 이 시를 읽으면 눈물이 난다.”
“다시 불러보는 그 이름, 아버님! 그리운 아버님!”
사실 조지훈 집안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가장 극적으로 체험했다.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의 후손으로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주실)동에 터를 잡은 명문가다. 주실은 한양조씨 집성촌으로 한때는 100여 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70여 호가 산다.
지훈의 조부 조인석(趙寅錫·1879~ 1950)은 구한말 성균관과 사헌부 대간을 지냈는데 6·25 당시 주실마을이 좌우 이념으로 문중끼리 갈등을 빚자 이를 개탄하며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선친 조헌영(趙憲泳·1899~1988)은 일본 와세다대 유학 시절 동경유학생 학우회장을 맡아 3·1운동 6주년을 기념하는 시위를 이끌다 체포되었다. 귀국 후 신간회 총무간사를 지낸 민족주의자였고, 현대 한의학을 체계화한 선구자였다. 그가 저술한 《통속한의학원론》은 한의학을 최초로 이론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와세다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가 한의학에 심취한 이유는 뭘까. 조 전 대사는 “일본 유학 시절 할아버지를 짝사랑했던 일본 여인이 폐결핵에 걸려서 이를 고치기 위해 《동의보감》을 공부하다 동양의학에 심취해서 한의학의 대가가 되었다”고 했다.
조헌영은 광복 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헌법기초위・반민특위 위원으로 활동하다 6·25 때 납북되었다. 아버지 조헌영이 납북되자 어머니 유노미(柳魯尾)는 큰 충격을 받고 피란지인 대구에서 화병(火病)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심지어 6·25 당시 조지훈의 남동생 동위(趙東衛)는 서울대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참전해 전사했고, 여동생(趙東敏·작고)의 남편(李相達)은 서울대 농대 교수로 재직하다 납북되고 말았다. 어린 시절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지훈의 형 동진(趙東振·아호 世林·1917~1937)은 스물한 살의 나이로 병사(病死)했다. 조 전 대사의 말이다.
“집안에 곡절이 많았으나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게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집안에 내려오는 가훈이 ‘삼불차(三不借)’다.”
삼불차는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재불차(財不借), ‘재물을 빌리지 않는다’. 문불차(文不借),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 인불차(人不借),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남의 재물을 빌리지 않았으며 남의 문장을 가져다 쓰지 않았다. 비록 벼슬은 못 해도 학문이 높으면 선비로 대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대(代)를 잇기 위해 인위적으로 양자를 들이지 않았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게 어떨 때는 채찍질이나 세속적 의미로는 족쇄다, 족쇄. 조직사회라는 게 끈, 연줄, 압력, 청탁이 동원되는데 연줄 없는 사람이 어딨겠나. 내가 근무하던 외교부는 1년에 몇 번씩 인사가 있기에 그때마다 외부에서 그런… 반칙 행위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내 뒷덜미를 잡았다. (하하하) 자식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잘못 처신해서 아버지 명성에 누가 돼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고위직에 올라 여러 언론과 만나면 늘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다. 그게 스트레스였다. 잘해야 본전, 못하면 누구 자식이 저 모양이야…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 말씀을 들으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수년간 거의 매일 꿈속에서 당신을 뵙곤 하였다. 신기하게도 매번 이전 꿈의 끝부분이 다음번 꿈에서 연결되어 이야기가 이어지는 연속극 같은 꿈이었다. 꿈속 아버지는 언제나 생전의 모습 그대로인데 나는 계속 나이를 먹으며 성장해가고 있었다. 아마도 사춘기 시절을 아버지와 대화 한번 나누어보지 못하고 보낸 회한(悔恨)이 그렇게 표출되어 꿈속의 대화로 이어져간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도 성북동 좁은 골목의 조그만 한옥 대청마루를 가로질러 쪼르르 달려가면 예의 잘 어울리는 한복 차림의 아버님이 ‘우리 막내 왔나?’ 하며 뺨을 비벼주실 것만 같은데 이젠 꿈속에서조차 아버지를 뵙기가 어렵다.
돌아가실 무렵의 아버지보다 열일곱 살이나 더 먹은 늙은 아들이 되어버렸으니 이젠 그리움의 샘조차 말라버린 것일까? 추억 속의 아버지보다 더 늙은 아들이 되어 다시 불러보는 그 이름, 아버님! 그리운 아버님!”⊙
코로나19 여파로 탄생 100주년 행사가 미뤄지고 있으나 조만간 그가 교편을 잡았던 고려대에서, 고향인 경북 영양에서, 조지훈 전집(全集)을 간행한 나남출판사에서, 그리고 대산문화재단에서 각종 학술대회와 세미나가 열릴 계획이다. 또 우크라이나 키예프국립대에서 조지훈 흉상과 시비 건립이 추진 중이다. 선생은 영면하기 직전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병치레가 잦았지만, 너무나 이른 마흔여덟에 세상을 떠날 줄 누구도 몰랐다. 1968년 1월 《사상계》에 발표된 선생의 시 ‘병(病)에게’는 선생의 마지막 작품이다. 죽음을 예감했던 것일까. 종래 그에게서 볼 수 없던 극적인 발상의 시였다.
어딜 가서 까맣게 소식을 끊고 지내다가도
내가 오래 시달리던 일손을 떼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리려고 할 때면
그때 자네는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네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자네는 나의 정다운 벗, 그리고 내가 공경하는 친구
자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나는 노하지 않네
-조지훈의 ‘병에게’ 1연과 2연, 6연 중에서
기자는 4월 10일 서울 옥수동에서 선생의 3남인 조태열(趙兌烈·66) 전 주(駐)유엔대사를 만나 시인의 삶과 문학을 더듬어보았다. 조 전 대사는 최근 주유엔대사에서 물러났다. 40년간 직업 외교관으로 주스페인 대사, 외교부 차관, 유엔개발계획(UNDP) 집행이사회 의장 등을 역임했다.
늘 한복 차림… 종종 나비넥타이를 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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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의 3남 조태열 전 유엔대사. |
“시 ‘병에게’는 돌아가시기 4개월 전에 발표되었으니까 이 땅에 남기고 가신 마지막 시인 셈이다. 마치 살아 계신 병석(病席)의 아버지 음성을 듣는 것 같고 그래서 더욱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시다. 읽을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열세 살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큰형 광렬(趙光烈)은 스물세 살, 작은형 학렬(趙學烈)은 스무 살, 누이 혜경(趙惠璟)은 열일곱 살이었다.
“48세에 돌아가셨지만 20대 때 이미 40대처럼 중후한 모습이셨고 그 모습이 돌아가실 때까지 이어졌다. ‘일찍 늙으면 중년이 길어 좋다’고 늘 혼잣말을 하셨으니까…. 그때 사진을 지금 꺼내 보면 40대가 아니라 60대처럼 보인다. 자식이 봐도 범접하기 어려운 근엄함이 있었다.
사실 기억 속 아버지 모습은 병석의 아버지다. 제가 초등 3학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4~5년간 사랑방에 누워만 계셨다. 당시 고려대를 다녔던 분을 만나보면 1년에 한두 번밖에 강의를 안 하셨단다. 강의할 몸이 아니셨던 것이다. 폐침윤(肺浸潤)에 기관지 확장으로 각혈을 하셨고, 심해지면 그때마다 입원하셨다.
폐결핵 환자는 검붉은 피를 쏟아내지만, 아버지는 새빨간 피를 토하셨다. 우리 가족은 늘 놋 요강이나 대야를 상비해놓았는데 토혈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봐야 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의 병력은 아주 어릴 때부터였다고 한다. 백일해를 앓아 병을 얻었단다. 요즘으로 치면 병도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치료 약이 없었다.”
아버지의 입술 색이 보랏빛을 띠었고 손바닥은 물론 손톱 색마저 붉은 기가 전혀 없고 늘 검푸른색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아마도 시 ‘병에게’를 쓰실 때 죽음이란 걸 예감하고 계셨던 것 같다. 돌아가시기 전날 ‘막내가 보고 싶다’며 저를 병실로 데려오라고 하셨다는데 그때도 아마 죽음의 그림자를 보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식구 중 아무도 아버님의 그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게 한(恨)스러울 뿐이다.”
시인 오탁번(吳鐸藩) 고려대 명예교수는 당시의 스승을 이렇게 말했다.
“조지훈 선생은 4·19를 겪으며 이미 이 땅의 가장 존경받는 스승의 높은 자리에 올라 있어서 그의 글과 기백이 캠퍼스 곳곳에 스며 있었다. 구태여 직접 강의실에 꼬박꼬박 나올 필요는 없다고 학생들 스스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당시 학생들 각자가 조지훈 선생의 글을 도서관에서 읽는 일만으로도 쩔쩔맬 정도로 그는 많은 시와 논설과 논문을 가지고 있었다.”
조지훈의 매운 기개와 차가운 지성은 당대의 명문으로 꼽히고 있는 《지조론(志操論)》을 읽어보면 쉽게 접할 수 있다. 후학들의 평가처럼 그는 실로 ‘전체가 부분의 집합보다 큰 인물’이었다.
키가 180cm를 넘은 그는 그야말로 멋쟁이였다. 조 전 대사의 회고다.
“생전의 아버지는 당신 세대에 보기 드문 6척 장신에다 가르마 없이 모두 뒤로 쓸어넘긴 소위 리젠트 스타일의 장발에 검은 뿔테 안경 속의 시선은 항상 먼 하늘에 두고서 느린 걸음으로 휘적휘적 걸어 다니셨다.”
好酒家… 나그네 가는 길에 주막이 없으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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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 산길을 오르는 생전의 조지훈 시인. |
“집안에 계실 땐 늘 한복 차림이었고 외출할 때도 두루마기를 즐겨 입으셨다. 양복 차림에 종종 나비넥타이를 매고 바바리코트나 두꺼운 외투를 걸쳐 입고 나서시면 영국 신사도 오히려 머쓱할 만큼 훤칠하고 준수한 외모의 멋쟁이셨다.”
― 사진 속 선생의 모습에서 독특한 풍모가 느껴진다.
“먼 산을 바라보며 지그시 담배를 물고 계신 모습,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이시는 모습, 소매 끝을 슬쩍 걷어 올린 줄무늬 와이셔츠에 베레모를 쓰고 한 손엔 스틱을 쥔 채 성북동 산길을 유유히 산책하시는 모습 등이 떠오른다.”
그러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도 술 한잔 하고 귀가하셔서는 ‘우리 막내’ 하면서 내 뺨을 비비거나 무릎에 앉히고 얼러주신 적은 종종 있었다. 아마도 두 분 형님이나 누님은 그런 기억이 없지 않을까 싶다. 학교 갔다가 돌아오면 사랑방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가 문을 열고 ‘우리 막내 왔나?’ 하며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도 떠오른다.”
그는 “그런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지금까지 기억에 선명한 아버지 모습은 대부분 술자리에서의 모습”이라고 했다.
조지훈이 세상을 떠난 후 한 주간지에 소개된 ‘우리 역사상 최고의 주객(酒客) 명단’에서 김삿갓, 황진이, 변영로에 이어 4등을 차지했을 만큼 선생은 호주가(好酒家)였다. 집에서도 늘 반주를 했고, 밖에서 술을 마신 후에도 술친구들을 모두 집으로 데려와 아내(金蘭姬 여사)에게 다시 술상을 차리게 한 적이 다반사였다.
“나도 그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감상할 기회가 많았다.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가 주흥(酒興)에 겨워 호탕하게 웃으시며 문우(文友), 제자들과 술잔을 나누는 장면이 멋지게 보였던지 지금도 흑백사진처럼 또렷한 이미지로 뇌리에 남아 있다.”
― 구체적으로 다시 묘사해달라.
“가수 박인희가 노래로 불러서 히트한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은 아버지와 술친구들이 술자리에서 한 소절씩 주고받으며 애송하시던 시다. 나는 초등학교 1~2학년 때 이미 이 시를 하도 많이 들어 거의 외고 있었다.”
술이 거나해진 사람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라고 먼저 운(韻)을 떼면 다른 사람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라고 대구(對句)를 이어가며 암송을 했다.
“‘밤길’이란 제목의 아버지 시도 술자리에서 단골로 애송되던 시 중 하나였다. ‘이 길로 가면은 주막이 있겠지요. 나그네 가는 길에 주막이 없으리야. 꽃같이 이쁜 색시 술도 판다오’라는 첫 구절이 왠지 마음에 들어 저는 입에 술도 대보지 못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 시구를 읊조리곤 했다. 그리고 나도 커서 대학생이 되면 스승과 함께 그런 풍류와 낭만과 격조 있는 술자리를 즐길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물론 대단한 착각이었지만….”
서울 성북동 60–44번지, 조지훈의 집터를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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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 60–44호 조지훈 집터. 옛집은 허물어지고 다가구 주택이 들어서 있다. 집 앞에 조지훈 집터 표지석이 있다. |
〈…시인 조지훈 집터.
성북동 60번지 44호는 조지훈 시인이 약 30년간 살았던 곳이다. 당시 건물은 1998년경에 철거되고 현재 주택이 건축되었다. 시인은 《문장》을 통해 등단하였으며,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일컬어지며, 자연추구와 함께 관조적, 고전적인 품격의 시를 독자적으로 형성한 시인이다. 작품집으로는 《청록집(공저)》 《풀잎단장》 《승무》 등이 있으며, 이 외에 많은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조지훈의 성북동 집터 근처에 ‘방우산장’이란 기념공간도 조성되어 있었다. 마침 산책 나온 시민들이 그곳 동판에 새겨진 시 ‘낙화’를 읽고 있었다. 기자도 그들 틈에 끼어 시를 음미해보았다.
꽃이 지기로 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조지훈의 ‘낙화’ 1~6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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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동 60–44호 옛집에서. 조지훈 시인을 중심으로 시계방향으로 아내 김난희 여사, 장남 광렬, 차남 학렬, 딸 혜경. |
시인의 집터에서 ‘낙화’를 읽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성북동 60-44’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던 시업(詩業)의 공간이었다. 이 집은 디귿자(ㄷ) 모양의 한옥이었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장남 광렬씨는 성북동 집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홍익대 건축미술과(지금의 건축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골목으로 난 서향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간 왼쪽에 작은 뒷마루가 있고 문간방으로 들어가는 미닫이문이 있었다. 이 문간방은 옆의 사랑방과 미닫이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골목에서 대문을 열고 문간에 들어서서 높은 문지방을 넘으면 작은 마당이 나오는데 그 마당을 향해 남쪽으로 트인 디귿자 집이었다.
마당 북쪽의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서쪽엔 사랑방과 문간방, 서남쪽에 방 하나와 그 옆에 변소가 기역자(ㄱ)로 붙어 있었고, 그 사이에 대문과 문간이 있었다. 큰 마루 동쪽엔 안방이 있고, 그 안방 남쪽에 부엌과 방 하나가 기역자로 붙어 있었다. 사랑방과 안방 사이에 있는 대청 남쪽에 마당으로 나가는 유리창이 달린 미닫이문이 있었다. 북쪽에도 유리창이 달린 미닫이문이 있었는데 그 문을 열면 뒷집 담 사이에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공간이 장독대가 있는 동쪽 뜰로 향해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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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 마석에 위치한 조지훈 시인의 묘 앞에서. 왼쪽부터 조태열, 조혜경, 조광렬, 김난희 여사, 조학렬. |
조지훈은 성북동 집을 ‘방우산장’이라 불렀다. 방우산장이란 ‘마음속에 소를 한 마리 키우면 직접 소를 키우지 않아도 소를 키우는 것과 다름없다’는 방우즉목우(放牛卽牧牛)의 사상을 담고 있다.
말년의 시인은 자연과 가까운 곳에 서재가 있는 운치 있는 집을 짓고 살고 싶어 했다. 실제로 성북동 양지바른 곳에 땅을 매입해 집을 팔고 계약금까지 받았다. 집 지을 동안 거처할 전셋집까지 마련해놓고 이삿날을 기다릴 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건축가인 광렬씨는 선친을 생각하며 쓴 《승무의 긴 여운 지조의 큰 울림》(나남 刊)에서 성북동 집을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당신이 좋으셨거나 싫으셨거나 그래도 아버지가 평생을 사셨던 집이었는데 경제적으로 여유만 있으면 그 집에서 살지는 않더라도 그 집을 영구히 기념으로 보존하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물론 성북동 집을 자주 드나들던 지인이나 제자분들 심정도 나와 다를 바 없으리라. 어쩌면 우리 가족보다 더 아쉬워할지도 모르겠다.…〉(88~89쪽)
지훈이 사망하자 집안은 더욱 기울었다. 조 전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3~4년간 사랑방에서 같이 잤다. 그런 면에서 형들보다 아버지와 스킨십이 많았는지 모른다. 아무런 재산도 남겨놓지 않고 새집을 짓는 일도 허사가 됐다. 이후 수없이 이사를 했다. 중2 때 연희동, 고1 때 대방동에서 살다가 대학교 때는 수유리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서울대까지 하루 3시간씩 통학했다. 10년 가까이 서울 시내를 동서남북으로 이동하며 살았던 셈이다. 형제 중 큰돈 버는 사람은 없었고, 나는 가난한 공직에 있었으니 줄곧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다.
어쨌든, 큰형의 꿈은 지금도 성북동 옛집을 복원하는 것이다. 이미 설계까지 해놓았다. 그 꿈이 이뤄질까….”
아내 김난희 여사가 좋아하는 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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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김난희 부부와 딸 혜경, 3남 태열. |
“평생을 그릇이 큰 남편을 떠받들고 사셨고 그걸 자랑으로 여기셨다. 어머니가 종부(宗婦) 노릇을 하셨는데 지금도 시집와서 장작 패고 지게로 물 긷고 살았다는 얘기만 종일 하신다. 내가 스페인・영국・이탈리아・프랑스・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할 때 세상 구경을 시켜드렸지만, 여전히 젊은 시절 고생한 얘기만 하신다. 너무 큰 짐 속에 사신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에게 지적(知的)으로 떨어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셨는지 부단히 한문 공부도 하시고… 그것 때문에 정신줄을 안 놓으시고 나름 건강을 유지하고 사셨다.”
김난희 여사는 홀로 된 후 외롭고 울적할 때마다 남편의 시를 붓글씨로 옮겼다. ‘승무’ ‘낙화’ ‘완화삼’ 등 남편의 시를 한글 궁체로 쓰거나 부채를 만들고 채색화, 사군자 등을 그렸다. 10여 년 전 홍일식(전 고려대 총장)·인권환(고려대)·박노준(한양대) 교수 등 조지훈의 제자들이 하도 떼를 써서 전시회도 가졌다. 2002년 6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 마음이 늘 그렇잖아요. 까닭도 없이 마음이 시끄럽고, 잡으려야 잡을 수도 없고. 그래서 수양 삼아 쓰기 시작했어요. 나이 들어 조 선생 글 읽어보니 참 좋데요. 젊어서 곁에 있을 땐 몰랐는데, 그 양반이 남기고 간 시를 읽으면 모났던 마음이 둥글둥글해져요.”
김난희 여사가 좋아하는 남편의 시는 ‘마음’이다.
찔레꽃 향기에
고요가 스며
청대닢 그늘에
바람이 일어
그래서 이 밤이
외로운가요
까닭도 영문도
천만 없는데
바람이 불리고
물 우에 떠가는
마음이 어쩌면
잠 자나요
-조지훈의 ‘마음’ 1~3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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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아내 김난희 여사. 구순연 때의 모습이다. |
“확실히 모르지만 ‘낙화’와 ‘절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돌아가시기 보름 전인가, 가족들을 다 모아놓고 ‘절정’과 ‘낙화’를 직접 낭송하셨다. 그 낭송을 녹음해둔 것이 아직 남아 있다. 당신은 떠날 줄 아셨던 것일까. 그때의 갈라진… 탁한 음성이 지금도 생생하다. 고모(趙東敏·작고)랑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로 끝을 맺는 ‘낙화’를 곡조에 맞춰 부르셨다.”
장남 광렬씨는 ‘밤길’이란 시와 ‘절정’ ‘빛을 찾아가는 길’ ‘산중문답’ 그리고 ‘낙화’를 좋아한다. 막내 조 전 대사는 ‘절정’ ‘낙화’ ‘병에게’를 평소 애송한다. 주유엔대사로 재직하던 지난해 9월 20일 뉴욕에서 선친의 영문 시집 《낙화》를 출간한 일이 있다.
“영문 시집을 출간하며 ‘병에게’를 영어로 낭송했다. 이 시를 읽으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병석의 아버지가 떠오른다. 지금도 이 시를 읽으면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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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에 있는 지훈 문학관. |
지훈의 조부 조인석(趙寅錫·1879~ 1950)은 구한말 성균관과 사헌부 대간을 지냈는데 6·25 당시 주실마을이 좌우 이념으로 문중끼리 갈등을 빚자 이를 개탄하며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선친 조헌영(趙憲泳·1899~1988)은 일본 와세다대 유학 시절 동경유학생 학우회장을 맡아 3·1운동 6주년을 기념하는 시위를 이끌다 체포되었다. 귀국 후 신간회 총무간사를 지낸 민족주의자였고, 현대 한의학을 체계화한 선구자였다. 그가 저술한 《통속한의학원론》은 한의학을 최초로 이론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와세다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가 한의학에 심취한 이유는 뭘까. 조 전 대사는 “일본 유학 시절 할아버지를 짝사랑했던 일본 여인이 폐결핵에 걸려서 이를 고치기 위해 《동의보감》을 공부하다 동양의학에 심취해서 한의학의 대가가 되었다”고 했다.
조헌영은 광복 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헌법기초위・반민특위 위원으로 활동하다 6·25 때 납북되었다. 아버지 조헌영이 납북되자 어머니 유노미(柳魯尾)는 큰 충격을 받고 피란지인 대구에서 화병(火病)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심지어 6·25 당시 조지훈의 남동생 동위(趙東衛)는 서울대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참전해 전사했고, 여동생(趙東敏·작고)의 남편(李相達)은 서울대 농대 교수로 재직하다 납북되고 말았다. 어린 시절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지훈의 형 동진(趙東振·아호 世林·1917~1937)은 스물한 살의 나이로 병사(病死)했다. 조 전 대사의 말이다.
“집안에 곡절이 많았으나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는 게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집안에 내려오는 가훈이 ‘삼불차(三不借)’다.”
삼불차는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재불차(財不借), ‘재물을 빌리지 않는다’. 문불차(文不借),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 인불차(人不借),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남의 재물을 빌리지 않았으며 남의 문장을 가져다 쓰지 않았다. 비록 벼슬은 못 해도 학문이 높으면 선비로 대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 대(代)를 잇기 위해 인위적으로 양자를 들이지 않았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게 어떨 때는 채찍질이나 세속적 의미로는 족쇄다, 족쇄. 조직사회라는 게 끈, 연줄, 압력, 청탁이 동원되는데 연줄 없는 사람이 어딨겠나. 내가 근무하던 외교부는 1년에 몇 번씩 인사가 있기에 그때마다 외부에서 그런… 반칙 행위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내 뒷덜미를 잡았다. (하하하) 자식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잘못 처신해서 아버지 명성에 누가 돼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고위직에 올라 여러 언론과 만나면 늘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다. 그게 스트레스였다. 잘해야 본전, 못하면 누구 자식이 저 모양이야…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 말씀을 들으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수년간 거의 매일 꿈속에서 당신을 뵙곤 하였다. 신기하게도 매번 이전 꿈의 끝부분이 다음번 꿈에서 연결되어 이야기가 이어지는 연속극 같은 꿈이었다. 꿈속 아버지는 언제나 생전의 모습 그대로인데 나는 계속 나이를 먹으며 성장해가고 있었다. 아마도 사춘기 시절을 아버지와 대화 한번 나누어보지 못하고 보낸 회한(悔恨)이 그렇게 표출되어 꿈속의 대화로 이어져간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도 성북동 좁은 골목의 조그만 한옥 대청마루를 가로질러 쪼르르 달려가면 예의 잘 어울리는 한복 차림의 아버님이 ‘우리 막내 왔나?’ 하며 뺨을 비벼주실 것만 같은데 이젠 꿈속에서조차 아버지를 뵙기가 어렵다.
돌아가실 무렵의 아버지보다 열일곱 살이나 더 먹은 늙은 아들이 되어버렸으니 이젠 그리움의 샘조차 말라버린 것일까? 추억 속의 아버지보다 더 늙은 아들이 되어 다시 불러보는 그 이름, 아버님! 그리운 아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