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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 연구

‘20세기 균형 있는 진보 정치인’ 헬무트 슈미트 총리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기민당 메르켈 총리를 도와주라”고 연설

글 : 양돈선  한반도선진화재단 독일연구포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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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무·국방장관 거쳐 8년간 총리로 재직
⊙ ‘독일의 정직성을 대표하는 인물 1위’ ‘사민당이 배출한 최고의 기민당 정치가’ 소리 들어
⊙ “총리 부부가 테러범들에게 살해되더라도 절대 이들과 어떤 교환도 거부한다”는 유언장 써놓고 적군파에 맞서
⊙ 소련이 동유럽에 SS-20 핵미사일 배치하자, 反戰·反核 시위에도 미국의 퍼싱-2 미사일 배치

梁敦善
1951년 출생. 고려대 정경대 통계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독일 본대학 경제학과 수학, 경기대 경제학 박사 / 재정경제부 개발협력과장, 駐獨 재정경제관,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 기획행정실장, 한국자금중개(주) 부사장 / 現 한반도선진화재단 독일연구포럼 대표 / 저서 《기본에 충실한 나라, 독일에서 배운다》
  21세기 들어 독일은 막강한 국가 경쟁력과 세계 1위의 국가 브랜드 파워를 구가하고 있다. 이는 상당 부분 안정된 정치 리더십에서 나온다. 역대 독일 총리들의 면면을 보면 모두가 훌륭한 정치가들이다. 이 중에서도 독일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총리는 헬무트 하인리히 발데마르 슈미트(Helmut Heinrich Waldemar Schmidt・1918~2015) 전 총리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다른 정치인은 물론, 지성인・종교인・연예인까지 제치고 종합 평가 1위를 유지하고 있다. 90이 넘은 나이에 아이돌 스타보다도 더 사랑과 인기를 누린 정치인이 바로 슈미트 총리다. 2010년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여론조사 기관인 TNS 연구소에 의뢰하여 ‘독일의 정직성을 잘 대표하는 인물’ 10인을 조사한 결과, 정치인들이 상위권을 차지했다. 그중에서 슈미트 총리가 1위로 뽑혔다. 재임 중에는 서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혔다.
 
  독일인들이 슈미트 총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사례로 슈미트의 흡연을 든다. 환경을 매우 중시하는 독일에서, 그것도 실내 공공장소에서 슈미트는 거침없이 담배를 꺼내 문다. 흡연이 철저히 금지된 오페라 극장에서도 슈미트만은 유일하게 담배를 피운다. 슈미트의 담배 연기는 공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슈미트 총리는 1918년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함부르크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할아버지는 유대인인데 나치 시대에 이를 비밀로 하고 살았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의 소꿉친구와 결혼해 70여 년을 해로(偕老)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징집되어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났다. 종전(終戰) 후 바로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하면서 정치의 길로 들어섰다. 1953년 하원의원에 선출되었으며 그 후 사민당 부총재, 빌리 브란트 총리 내각에서 국방장관・재무장관 등을 역임했다.
 
  브란트 총리 시절 귄터 기욤이라는 총리 비서가 동독(東獨) 간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장기간 서독의 극비 정보가 동독으로 유출되었으며, 동독이 서독에 대하여 정치 공작을 자행한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브란트 총리는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이에 따라 슈미트가 1974년 브란트의 뒤를 이어 총리에 올랐으며, 1982년까지 약 8년간 총리로 재직했다.
 
  슈미트는 퇴임 후 독일 주간지 《디 차이트》의 공동 발행인을 지냈다. 그는 세계적인 인물이 된 후에도 독일 중산층이라는 뿌리를 잃지 않았다. 함부르크의 소박한 연립주택에 살면서 저술과 강연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저서가 10권이 넘으며,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90세가 되어서도 세계 각국으로부터 인터뷰・강연 요청이 쇄도하였다. 저술 인세(印稅)와 강연료 중 100만 유로(13억원)를 기부하였다. 그는 음악에 조예가 깊고,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정도의 피아노 연주 수준을 자랑하며, 바흐와 모차르트 곡으로 CD 음반을 내기도 했다. 2015년 11월 96세로 작고했다.
 

 
  “사민당이 배출한 최고의 기민당 정치가”
 
헬무트 슈미트는 빌리 브란트(왼쪽) 내각에서 재무·국방장관으로 일하다가 후임 총리가 됐다. 사진=독일연방문서청
  슈미트 총리는 냉전(冷戰) 시대에 서독(西獨)의 부흥을 일구었다. 재임 중 두 번의 오일 쇼크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경제성장과 복지체계를 정착시켰다. 또한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선진국 클럽인 G7(미국·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캐나다·일본) 회의를 제안하여 성사시켰다. 또 1975년 유럽 평화의 상징인 유럽안보협력회의(헬싱키 회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유럽 통화 통합과 유럽중앙은행을 지지함으로써 현 유럽연합(EU)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대외적으로 보수 성향의 기민당(기독교민주연합・CDU) 출신인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총리의 친(親)서방 정책, 브란트 전 총리의 동방 정책을 계승·융합하여 발전시켰다. 좌우 이념을 초월하여 외교력을 발휘함으로써 동서 화해와 협력을 이끌어냈다. 서독·구(舊)소련 정상회담, 동·서독 정상회담을 비롯하여 동·서독 교류를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통일을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
 
  슈미트는 냉철했지만 균형감을 유지한 객관적인 인물이었다. 모든 일은 매우 진지하게 처리했다. 독단(獨斷)을 경계했다. 혼자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내각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충분한 토의와 숙의를 거쳐 결론을 내리고 실천했다. 전(前) 정권 정책이라고 하여 무조건 폐기 처분하지 않았다.
 
  그는 보수 야당에 대하여도 타협과 포용의 정치를 펼쳤다. 정적(政敵)들도 그를 “사민당이 배출한 최고의 기민당 정치가”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그는 2011년 11월 사회민주당(사민당) 전당대회에서 당 원로로서 후배 당원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정적인 기민당의 메르켈 총리를 도와주라” “주변 국가에 겸허하라”고 설파했다. 이 연설이 끝난 후 6분여 동안 열렬한 기립 박수가 이어졌다. 이 연설은 금세기 최고의 명연설로 꼽히고 있다.
 
  슈미트는 무엇보다 기본 역량이 탁월했다. 지식인을 능가하는 지력(知力) 외에도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겸비했다. 그는 국방장관 시절이던 1972년, 중국의 잠재력을 알아차리고 빌리 브란트 총리를 설득하여 중국과 수교했다. 미중(美中) 수교보다 7년, 한중(韓中) 수교보다 20년 앞선 일이었다.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연설은 아무 가치가 없다”
 
슈미트는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승, 1975년 7월 에리히 호네커 동독공산당 서기장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사진=독일연방 문서청
  그는 차분한 달변에 날카로운 분석력, 시대의 핵심을 꿰뚫는 카리스마를 지녔다. 그의 단순 명쾌한 언변과 연설은 상대방을 감복시킬 정도로 설득력을 지녔다. 게다가 근면성과 진솔함, 공정성까지, 정치인들이 지녀야 할 덕목을 두루 갖추었다. 그는 정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부정이나 스캔들에 연루된 적이 없었다.
 
  슈미트는 ‘내 행위에 대한 책임은 오로지 나 혼자 져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실천했다. 그는 힘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결정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근거들을 찾았다. 슈미트의 사후적(事後的) 지력과 혜안은 이러한 철학적 사고에서 길러졌다. 그는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부터 평정심, 즉 심리적 냉철함을 얻었으며,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로부터 ‘도덕과 정치가 함께 가야 함’을 배웠다. 자기 이익보다는 법치(法治) 안에서 도덕적 의무를 충족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독일 철학자 카를 포퍼의 주장대로 전체주의적 유토피아와 독재를 거부하고 급격한 변혁을 경계했다.
 
  슈미트는 자신의 롤 모델이 되는 지도자로 토머스 제퍼슨(통찰력・실천력), 존 F. 케네디(카리스마), 교황 요한 23세(관용),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실용) 등을 꼽았다. 이들 모두 독일인이 아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그의 지도자관(指導者觀)을 엿볼 수 있다.
 
  슈미트는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말한 정치가의 세 가지 자질, 즉 균형·열정·책임감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 그리고 용기를 매우 중요시했다. 그는 막스 베버가 제시한 두 가지 유형의 정치적 신념, 즉 신념윤리(信念倫理)와 책임윤리(責任倫理) 중 책임윤리를 중시했다. 신념윤리가는 책임은 본인에게서 찾지 않고 남 탓만 하지만, 책임윤리가는 자신의 행위로 인한(예상되는) 결과들을 직접 책임진다.
 
  그는 책임윤리에 따라 행동하고 그대로 실천하였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말을 실천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질 줄 알았다. 그는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연설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믿었다. 그의 책임 정치의 밑바탕에는 도덕과 윤리가 자리 잡고 있다.
 
 
  특공대 보내 항공기 납치한 적군파 사살
 
  슈미트 총리는 강력한 리더십과 결단력을 겸비한 소신주의자였다. 국가 위기 관리 능력이 뛰어났다. 그의 리더십은 위기 때 더욱 빛을 발했다. 그의 특유의 돌파력과 추진력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신속하고 대담했다. 그는 국내 테러 위협과 구(舊)소련 핵(核)으로부터 나라를 지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2년 엘베강 대홍수로 함부르크가 물에 잠겼다. 이때 함부르크 주(州)정부 내무장관이던 슈미트는 그에게 없던 권한까지 동원해 경찰과 군(軍) 병력을 신속히 투입해 수천 명의 인명을 구해냈다. 초기에 월권(越權)이라는 비난이 거셌으나 그에게는 인명 구출이 더 급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는 주민들로부터 큰 신망을 얻으며 일약 전국적 스타가 되었다.
 
  1977년 10월, 독일 극좌 강경 학생운동 세력들이 조직한 ‘적군파(赤軍派·RAF)’ 테러리스트들이 독일 루프트한자 항공기를 납치했다. 이들은 90여 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인질로 잡고, 복역 중인 테러범 석방 등 무리한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국내에서는 “승객의 안전을 위해서는 테러범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슈미트 총리는 이 항공기를 아프리카 소말리아 수도인 모가디슈 공항에 비상 착륙하도록 유인하면서, GSG-9라는 특공대를 급파하여 테러범들을 모두 사살하고 인질들을 전원 무사히 구출하였다.
 
  사실상 이 인질 구출 작전은 슈미트 총리로서는 정치생명을 건 일대 모험이었다. 이전에도 적군파는 검찰총장·연방판사·정당 간부·경총(經總) 회장 등 요인을 납치·암살하고, 주(駐)스웨덴 독일대사관을 습격하는 등 수차례 극악한 테러를 자행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슈미트 총리 집 근처에도 출몰하여 살해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굴하지 않았다. 적군파 요원 소탕을 위해 대대적 작전을 벌이는 등 이들의 악행(惡行)에 강력 대응했다. 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총리 부부가 테러범들에게 살해되더라도 절대 이들과 어떤 교환도 거부한다”는 유서를 써두고, 이 사건을 직접 진두지휘했다. 불의(不義)에 타협을 하지 않았다.
 
  결국 이 인질 구출 작전이 성공하면서 적군파 핵심 지도자들은 집단 자살하고 조직은 와해되었으며, 적군파 테러의 불안과 혼란은 막을 내렸다. 슈미트의 정치 기반은 좌익 진보 성향의 사민당이다. 그러나 그는 좌익 성향의 적군파를 끝까지 추적하여 궤멸시켰다.
 
  슈미트는 이 인질 구출 작전에 성공하고 나서 눈물을 흘렸다. 그의 생애에 두 번째 눈물이었다. 첫 번째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終戰) 후 귀향(歸鄕)해 부인과 재회했을 때였다. 90여 명의 인질의 생사가 걸린 국가적 위기 앞에서 중압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간다. 그는 “만일 이 작전이 실패한다면 총리직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건설적 불신임’ 받아 총리 물러나
 
항구도시 함부르크 태생인 슈미트 총리는 ‘독일의 선장’을 자처하면서 선원 모자를 즐겨 썼다.
  슈미트 총리는 정의와 법치를 존중하는 원칙주의자다. 그는 시류(時流)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포퓰리즘 정책을 펴지도 않았다. 지금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나라 전체 입장에서 크고 넓고 멀리 보는 정치를 하였다. 사리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당론(黨論)이라고 하더라도 추종하지 않았다. 정년(停年) 연장 반대, 노조 권력 축소 등 당론과는 배치되는 소신으로 당과의 불편한 관계도 불사하였다. 환경론자들이 극력 반대하는 원전(原電)에 대하여도 찬성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소신과 용기가 그의 정치적 자산이자 성공의 원천이 되었다.
 
  슈미트 총리는 1982년 의회에서 ‘건설적 불신임’을 받아 물러났다. 이 제도는 독일 기본법(헌법)에 특유한 제도로, 현직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낼 때 새로운 총리 후보도 함께 세우도록 하는 제도이다. 후임 총리 후보가 연방하원에서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어야 현직 총리에 대한 불신임이 인정된다. 후임 총리에 대한 합의가 쉽지 않기 때문에 야당이 함부로 총리 불신임안을 남발할 수 없다. 총리 불신임안을 둘러싼 국정 공백을 없애 정국 안정을 기하기 위한 제도이다.
 
  이 불신임을 당한 연방 정치인은 독일 헌정(憲政) 사상 슈미트 총리가 유일하다. 슈미트 총리는 당시 연정(聯政) 파트너인 자유민주당(자민당)과 국내 정책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소신을 꺾지 않았으며 총리직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결국 자민당은 사민당과의 연정을 포기하고 기민당과 연정을 꾸렸다. 이에 따라 정권은 기민당으로 넘어갔다. 기민당의 헬무트 콜(Helmut Kohl) 원내 총무가 총리가 되었다.
 
 
  核에는 핵으로
 
슈미트는 소련의 SS-20 미사일 배치에 맞서 미국의 퍼싱-2 미사일을 배치했다.
  슈미트 총리는 좌파 진영이 소홀히 했던 안보에 대해서도 좌우 이념 논리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는 동서 냉전으로 세계 안보 불안이 심각했던 시절이다. 그러나 그는 동서 데탕트를 통해 서독의 안보 위기 해소와 유럽 전역의 평화 질서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그는 자국(自國)의 안보에 관한 한 절대 양보를 하지 않았다. “안보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1975~76년 소련은 동독과 동유럽에 중거리 핵미사일 SS-20을 배치하였다. 이 핵미사일은 사거리가 5000km로 서독을 포함한 전 서유럽을 사정권(射程圈)에 둔, 핵탄두를 3개 탑재할 수 있는 공포의 무기였다. 당시 소련과 미국은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통해 서로를 겨냥하는 대륙간탄도미사일 등 전략무기 사용을 자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협정 내용에 서유럽은 빠져 있어 사실상 서유럽 전체가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 이 무기가 언제 서독 상공에 떨어질지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소련은 이미 1948년에 베를린을 봉쇄하고 서베를린에 지속적으로 위협을 가한 적이 있었다. 1962년에는 쿠바에 핵미사일 배치를 추진하면서 미국과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전쟁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 때문에 유럽인들은 소련의 유럽 핵미사일 배치에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슈미트는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동분서주 고군분투하였다. 소련에는 지속적으로 핵 감축을 요구하는 동시에, 서방측에는 재무장 카드를 내밀었다. 그는 서방의 방위기구인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이중결정(Doppelbeschluss)’ 카드를 제의하였다. 이중결정이란, ‘동유럽에 배치된 소련 핵무기가 폐기될 때까지는 서유럽에도 동일한 수준과 규모의 핵무기를 배치한다’는 의미다.
 
  나토는 슈미트의 제안을 받아들여 4년 내에 상호금지에 이르지 못하면 서유럽에 미국의 퍼싱-2 핵미사일을 전면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슈미트는 이를 서독 영토에 허용하는 결단력을 보였다. 퍼싱-2는 7분 만에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있는 가공할 무기였다.
 
 
  퍼싱-2 배치로 소련의 양보 이끌어내
 
  퍼싱-2 배치 계획은 서독 내 평화주의자와 환경주의자들의 극렬한 반대를 불러왔다. 반전(反戰)·반핵(反核) 단체들과 일부 극좌 대학생은 연일 데모 시위를 열었다. 이들은 “소련과 동독은 핵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면서 슈미트를 전쟁광(戰爭狂)이라고 비난하였다. 동독 정보기관인 슈타지는 비밀공작을 통해 서독 내 반핵 운동을 성공적으로 조종했다. 심지어는 슈미트의 소속 정당인 사민당 내에서도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였다. 이런 반전 분위기에 편승하여 1980년에는 당내 환경주의자와 평화주의자들이 녹색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슈미트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나토의 ‘이중결정’ 없이는 소련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낼 수 없다”면서 당원과 당내 인사들을 설득하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서방 측의 재무장을 위해 의회 불신임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실제로 소련은 대화에 응하기는커녕 오히려 1979년 11월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단행하여 국제사회의 긴장 완화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여기에 미국·서독·캐나다 등 자유 진영에서도 소련에 대응하여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 불참, 국제적 긴장은 더욱 고조됐다.
 
  퍼싱-2 배치를 둘러싼 국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슈미트는 서독 국민들의 강한 안보 의식, 자신에 대한 높은 신뢰도 등을 바탕으로 1980년 총선에서 사민당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퍼싱-2의 서독 배치에 대한 당위성과 정치적인 추진동력을 갖게 되었다. 1982년 기민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후인 1983년 연방의회의 의결을 거쳐 서독에 퍼싱-2가 실전 배치되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안보 정책은 일관성 있게 추진된 것이다.
 
  소련은 퍼싱-2 배치에 놀라 위기감을 느끼고 양보를 하면서 초(超)강대국 간의 긴장이 완화 기조로 돌아섰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1987년 중거리핵미사일폐기협정(INF)을 체결했다. 이로써 서독을 포함한 서유럽은 소련의 핵 위협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독일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敗戰國)으로서 국토는 분단되고, 군사시설은 철거되고, 군수산업은 해체된 상태였다.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발전 덕분에 경제력은 인정받았으나, 국제정치적 파워나 존재감은 없었다. 그러나 슈미트는 패전국 총리라는 핸디캡을 딛고 승전국이자 초강대국인 미국과 소련을 상대로 전략적 결단을 내렸고, 특유의 뚝심으로 중재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서독, 더 나아가 서유럽의 안보를 지켜냈다.
 
 
  독일의 정치 시스템
 
  한국에서도 헬무트 슈미트와 같은 정치 현인이 나와 난마처럼 얽혀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줄 수 있을까? 독일 정치인과 한국 정치인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양국 간에 역사·문화적 배경, 정치 제도 측면에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경우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정치의 길로 들어서서 각 정당의 재단 연수원에서 정치 수업을 받고 정치적 리더십, 즉 설득력·조화력 및 조정 능력 등을 기른다. 그리고 지방의 기초의회서부터 현실 정치를 익힌다. 그다음 리더십 능력 여부에 따라 주(州)의회, 그다음 연방의회로 진출하는 시스템이다.
 
  연방의회 의원들은 설득력·조화력 등 리더십과 청렴성·도덕성 등이 이미 검증이 다 된, 거의 완벽한 정치가들이다. 연방 총리는 이러한 연방의원들 중에서 선출된다. 그러니 비(非)정치인이 어쩌다 총리가 될 가능성은 제로이다. 정치인이라고 하더라도 독일을 이끌어갈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없는 자가 총리가 될 가능성도 없다.
 
  반면에 우리의 경우 판검사·변호사·교수·방송사 앵커·기업인 등의 직업군에서 사회적으로 유명세를 타면 본연의 직업을 버리고 정치판으로 뛰어든다. 이들은 정계 입문 이전에 지도자 수업을 받아본 적이 없고 리더십과 도덕성 여부를 검증받은 바도 없다. 이들은 대부분 정치 지도자로서의 자질, 즉 지력과 지혜, 책임감과 균형감, 용기와 포용력, 결단력과 설득력, 청렴성 등을 갖춘 인물들이 아니라, 자신의 영달을 위해 뛰어든 자들이다.
 
  이들은 보수·진보, 좌・우 진영으로 나뉘어 자신들의 정략적 이익 앞에서는 조금의 양보도 없다. 상대방 비방·위선·공작이 난무하고 극단적인 대치도 불사한다. ‘협치(協治)’는 없고 ‘협치(脅治)’만 횡행한다. 온갖 특권은 다 누리면서도 부패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비생산적이고 소모적인 정치 행태만 답습하고 있다.
 
  대통령은 당선되는 순간부터 진영 논리에 갇혀 지지 세력만 바라보며 스스로 반쪽짜리 대통령 노릇을 자임하고 있다. 패권(覇權) 정치, 한풀이 정치, 보복 정치의 악순환 속에서 대통령이 대승적(大乘的) 차원에서 포용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부끄럽게도 대통령 실패율 100%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정치인들에게 스스로의 개혁과 자정 능력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지경이다.
 
 
  정치인 수준과 民度는 비례
 
  한국 정치의 성공 관건은 바로 국민들에게 있다. 독일 정치인들이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은 정치인 개개인의 자질이 훌륭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국민이 정치인들을 감시하고 심판하여 엄히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인들의 저질화는 정치인 본인에게 1차적 책임이 있지만, 상당 부분은 원인을 제공한 유권자들의 몫이다. 국민은 정치인들의 거짓말과 부정부패에 둔감하거나 아예 무관심하다. 오히려 취업·채용 청탁, 비리 불법 무마, 지역구 현안 사항 등 불가능한 민원만 제기하여 정치인들의 모럴 해저드를 조장하고 있다.
 
  대통령들을 성공한 대통령이 아니라 선동적이고 위선적인 포퓰리스트, 부패 정치인으로 만든 것 역시 국민들의 책임이 크다. 국민들은 대통령들에게 국익을 외면하고 민원성 요구를 하면서, 그것도 가시적이고 즉각적 효과를 기대한다. 이 때문에 대통령들은 표와 여론을 의식하여 장기적인 비전보다는 단기적이고 즉흥적인 포퓰리즘에 의존하게 되고, 이에 따라 저급한 정치 문화가 정착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무능과 부패만 나무란다. 이러한 정치 환경 속에서 헬무트 슈미트 같은 정치 현인이 나올 수 있겠는가? 무조건 국회의원들과 대통령만 비난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국민은 결국 그 수준에 맞는 대통령과 국회, 그 수준에 맞는 국가를 갖는다. 정치인 수준과 민도(民度)는 비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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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간조선 2018년 4월호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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