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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造形 외길 53년’ 기흥성 회장이 말하는 모형과 現代史

“김수근 선생 ‘귀신같다’ 칭찬, 모형 6000점 만든 동력”

글 : 신승민  월간조선 기자

사진 : 조현호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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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가 김수근에게 발탁돼 포철·경부고속도로부터 평창 동계올림픽 모형까지 만들어
⊙ 10·26사건 수사 위해 궁정동 안가 모형, 2000년 남북정상회담 위해 평양전경 모형도 만들어
⊙ “시뮬레이션은 假像, 모형과 비교 불가… 흑백으로만 색칠된 작품이라도, 천연색으로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 좋은 모형”

奇興聲
1938년 황해도 옹진 출생. 前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모형제작팀장, 기흥성모형연구소(주식회사 기흥성) 대표, 건국대·국민대·상명대·계원예술대 실내디자인학과 외래교수, 중국 칭화대 미대 석좌교수. 現 (주)기흥성 회장, 기흥성뮤지엄 관장, 황해도 옹진군 명예군수
  “황해도 종간나들이 여기까지 기어왔네? 아새끼들 어서 끌고 나오라!”
 
  북한군 장교가 확성기 대용으로 종이를 말아 외친다. 산자락을 오르는 북한군의 발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린다. 바위 아래 숨은 어머니는 치마를 들어 두려움에 떠는 아이들을 덮어준다. 곁에 있던 아버지는 새벽이슬에 젖은 옷을 털며 말한다.
 
  “임자, 내 혹시라도 죽게 되면 애들 잘 키우기요.”
 
  유언을 남긴 채 밖으로 나간 아버지는 군인들에게 붙잡혀 손목시계를 빼앗기고 모진 매를 맞는다. ㈜기흥성 기흥성(奇興聲·81) 회장은 일가족이 전란(戰亂)을 피해 고향 황해도 옹진에서 경남 함양 지리산까지 내려온 때를 회고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가 그때 황해도 일대에서 1등 갑부(甲富)였어요. 소주 회사를 크게 했는데 대단했지요. 6·25가 터지니까 인민군들이 쳐들어와서 우리 아버지를 죽이려 했어요. ‘인민의 혈(血)을 빨아서 부자 됐다’고 하면서, 한 번 ‘드르륵’ 긁으면 72발이 나가는 따발총을 쏘고 집이랑 양조장에 불을 다 질러버렸어요. 새벽 4시경에 전쟁이 났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빗발치니까 그냥 반바지에 맨발로 뛰쳐나갔지요.
 
  퇴각하는 국군 군함에 매달려 인천·평택을 거쳐서 수원 밑에 남양(南陽)이라는 곳에 내렸어요. 그때부터 ‘남으로 남으로’ 무작정 걸었지요. 길에서 굶다가 어머니가 밥을 얻으려고 광목 치마까지 벗어서 팔았어요. 뻔득뻔득한 속치마만 남기고….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비참했지요.”
 
  곡절 끝에 전주에 정착한 기 회장 일가는 사업 수완이 좋은 선친이 임업(林業)에 성공하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됐다. 기 회장도 1967년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이하 한국종합)에 입사하면서부터 ‘성공가도’를 달렸다. 당시 한국종합 수석부사장이던 건축가 김수근(金壽根)에게 발탁돼 산업화 시대 주요 국가 기간 시설의 모형 제작을 도맡았다. 그의 모형 세계에 매료된 북한의 관계자가 그를 평양에 초청할 정도였다. 중국의 명문대 칭화대(淸華大)에서는 ‘동시통역 수업’이라는 파격적 조건을 내걸고 석좌교수로 영입하기까지 했다. 30대에 부장 대우를 받는 등 고속 승진을 하던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만든 모형업체는 대(代)를 이어 반세기 가까이 운영되고 있다. 지난 4월 29일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기흥성뮤지엄에서 기 회장을 만났다.
 
 
  스승 金壽根의 극찬
 
경기도 양평 기흥성뮤지엄 지하 1층 전시관에 자리한 황룡사 9층 목탑의 처마 부분.
  기 회장이 29세에 입사한 한국종합은 당시 ‘정부 투자 기관’으로 운영된 국내 최대 규모의 종합기술용역업체였다. 건축·도로·항만·전기 등 12개 부서 아래 350여 명의 설계사들이 박정희(朴正熙) 정부의 국가 개발 프로젝트를 도맡다시피 했다. 기 회장은 “그곳이 반관반민(半官半民) 형태로 운영됐는데, 내가 다닐 때 회장이 아마 3김(金) 중 하나였던 ‘김종필’씨였던 걸로 기억한다”며 “장성이거나 중정(中情) 출신 인사들이 우리 직원을 사위로 데려가려고 이대(梨大) 졸업한 딸들을 입사시킬 정도로 유망한 직장이었다”고 했다.
 
  기 회장은 입사 첫해 김수근의 눈에 들었다. 당시 김수근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프로젝트 설계를 직접 보고하는 위치에 있었다. 브리핑 때마다 도면만 가지고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대통령과 관료들의 이해를 돕는 모형이 필요했다.
 
  기 회장은 그때 건축부에서 설계 디자이너로 근무했는데, ‘구로동 무역박람회 마스터플랜’이라는 프로젝트를 맡아 일하고 있었다. 박람회라는 개념조차 희미했던 그는 외국 잡지를 보고 박람회장 모습을 떠올렸다. 작업실에 굴러다니는 미술 재료들을 잘라 붙여 제법 그럴싸한 모형 하나를 만들었다. 이를 창가의 커튼 뒤에 숨겨놓고 나오는 순간, 작업실로 들어오는 김수근과 눈이 마주쳤다. 기 회장은 가슴을 졸였다.
 
  “그때만 해도 (김수근) 선생이 귀하신 몸이라서 만날 시간도 없었어요. 만나도 작업이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불호령을 내렸지. 동료들이 그림만 그리면 다 욕을 먹었을 때니까, 내 모형도 뭐라고 지적할 것 같았죠. 박람회 모형을 숨겨놓고 드로잉하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데, 이 양반이 갑자기 커튼 쪽으로 가는 거야. 그러더니 한참을 머물러. 몸을 옆으로 기울이면서 아주 유심히 보시더라고요. 높이, 스타일, 분위기를 다 보신 거죠.
 
  그러더니만 ‘저거 누가 해놨어?’ 하고 물으시더군요. 우리 캡틴(팀장)이 ‘미스터 기가 했습니다’ 하니까, 이분이 눈을 번쩍 뜨시면서 ‘기흥성? 야, 너 아주 귀신같은 놈이다. 너 같은 놈도 있냐?’ 하시더군요. 그분으로서는 극찬의 표현이었죠.”
 
 
  청와대의 호출
 
기흥성 회장이 20분의 1 크기로 복원된 황룡사 9층 목탑을 바라보고 있다.
  실향민으로 타지를 전전하던 기 회장은 그때부터 새 삶을 살게 됐다. 당시 공사 내에 불어닥친 ‘감원(減員) 바람’을 피해 승진까지 했다. 김수근의 전폭적인 신임 아래 1969년 신설된 모형제작팀 팀장을 맡게 된 것이다. 그때가 31세였다.
 
  기 회장의 모형 제작은 누구보다 속도가 빠르고 완벽했다. 남들이 겨우 스케치를 마치고 배경 판을 자르고 있을 때,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 수준이었다. 지나친 도색(塗色)과 장식을 피하고 균형 감각을 살린 깔끔한 디자인도 강점이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한강·여의도 종합개발계획 등 대규모 국가 개발 프로젝트에 사용될 여러 모형을 3~4명의 팀원과 함께 설계・제작했다.
 
  청와대의 특명(特命)을 받아 국가 기밀시설 모형도 제작했다. 작업실 내·외부에 빛과 소리를 차단하는 검은 패널이 부착되고, 무장군인들이 출입을 통제했다. 청남대(靑南臺) 모형을 만들 때에는 기 회장이 직접 청와대비서실장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청와대의 은밀한 호출도 있었다.
 
  “그때 무척 떨었어요. 제가 국가 기밀시설 모형을 많이 만들었잖아요. ‘뭘 잘못 만들어서 걸려 들어가는 건가’ 하고 걱정했지요. 청와대에 도착하니까 한 고위 인사가 ‘기 선생, 요즘 살기가 어떤가. 더 도와드릴 건 없나’ 하고 묻더군요. 저는 얼어붙어서 ‘별거 없다’고 하고 그냥 나왔지요. 알고 보니까 저에 대한 이야기가 청와대까지 좋게 퍼져서 특별히 도와준다고 부른 거였어요. 칭찬하는 일인 줄 알았으면 다르게 말했겠지요.”
 
  명성이 알려지면서 골치 아픈 일도 종종 생겼다. 청와대 비서진이 공사로 찾아와 일주일 정도 소요되는 모형을 ‘하룻밤 만에’ 만들어달라는 무리한 요청을 해왔다. 대통령 앞에서는 ‘며칠 내로 보고하겠다’고 장담했는데 진척이 없어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기 회장에게 매달린 것이었다. 기 회장은 “그 사람들이 청사진만 적당히 그려서 주니까 대통령이 이해를 못 했던 것”이라며 “그래서 나한테 와서 ‘한국에서 제일 빨리 만드는 기 선생이 나 좀 살려달라’는 둥 죽는소리를 자주 했다. 그때 무척 고생했다”고 털어놨다.
 
광화문에서 본 경복궁 전경.
  기 회장과 팀원들은 할 수 없이 이를 악문 채 밤을 꼬박 새우며 작업을 했다. 밤에도 꺼지지 않는 불빛 때문에 ‘돈 많이 버는 회사’로 여긴 건물 주인이 매달 월세를 올리기까지 했다. 어느 날인가는 체신부(遞信部·정보통신부의 이전 명칭) 장관에게 급히 보고할 일이 있어, 삼륜차에 전화국 기지 모형을 싣고 가다가 광화문 서울신문사(社) 앞에서 사고가 나기도 했다. 기 회장은 “그때 브리핑할 모형이 유리로 만든 거였는데, 엎어져서 깨지고 난리가 났다”며 “골조만 남은 걸 보여줄 수가 없어서 장관에게 사실대로 말하고 물러났다”고 했다.
 
  이후 김수근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립 회사를 세운 기 회장은 우리 사회의 주요 시설 모형을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청계천, 서울대 관악캠퍼스, 경주 보문관광단지, 제주 중문관광단지, 광양·포항제철소, 인천국제공항, 금강산 개발계획, 서울올림픽기념관, 평창 동계올림픽 시설 등의 설계 및 모형 제작을 맡았다. 경복궁, 익산 미륵사, 개화기 한양 전경, 경주 황룡사 9층 목탑, 롯데월드 민속박물관 등 전통 건축물 복원 작업에도 참여했다. 미국·일본·중국·캐나다 등 외국 조형물도 그의 손을 거쳤다.
 
  값도 꽤 나갔다. 한 점당 적게는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까지 받았다. 기 회장이 지금껏 만들고 소장해온 모형은 6000여 점에 이른다.
 
  현대사회에서 모형이 필요한 이유가 뭘까. 지금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완성된 형태의 모습을 미리 살펴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기 회장의 말이다.
 
  “양복을 가봉(假縫)하는 것처럼 모형을 만들면서 설계해야 ‘좋은 설계’가 됩니다. 디자인이나 역학적(力學的)으로 불합리한 점을 사전에 알아보고 문제점을 체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재 복원에도 꼭 필요하죠.
 
  3차원 시뮬레이션이 대체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게 실제로 나타나는 건 아니잖아요? 일종의 가상(假像) 아닙니까. 컴퓨터로 돌려보는 거랑 모형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건 디자인을 체감하는 수준이 다른 법이죠. 선진국의 디자인 업계에서는 지금도 모형을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묘소 앞에 모형박물관 지어
 
정교하게 복원된 흥인지문.
  기 회장의 모형업 종사 50주년을 맞아 2016년 11월 개관한 기흥성뮤지엄은 그가 일생 만든 모형 10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기 회장이 3년 전 양평에 모형박물관을 짓게 된 이유는 선친의 묘소가 인근에 있기 때문이다.
 
  “강을 끼고 있는 양평의 지형이 고향인 황해도 옹진과 유사해 두물머리 위쪽 산을 사서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고향 선산에 모실 수 없어 흉내를 조금 낸 것이죠. 막상 모시고 나니까 혼자 땅속에 계시는 게 쓸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맏이가 하는 일 보시라’고 아버지 산소 맞은편에 박물관을 지었습니다.”
 
  뮤지엄 뒤편에는 소나무를 심은 정원이 조성돼 있었고, 그 너머에 남한강이 흐르고 있었다.
 
  지하 포함 총 4층 규모의 전시관에는 각처의 의뢰를 받아 제작하거나 소장용으로 만든 작품이 즐비했다. 지하 1층 제1전시장에는 20분의 1 크기로 복원한 황룡사 9층 목탑부터 고궁·숭례문·흥인지문, 신라 동궁과 월지 등 고증을 받아 전통 건축물을 구현한 미니어처들이 전시돼 있었다. 목조 모형의 경우, 원형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접착제를 쓰지 않고 부품 간 요철(凹凸)을 일일이 맞춰 조립했다. 그중 백미(白眉)인 황룡사 9층 목탑은, 재질이 좋아 한옥 건축 등에 쓰이는 ‘춘향목’을 사용했다. 사대문(四大門)의 성벽은 실제 돌의 무늬와 길이까지 반영하는 등 정교하게 제작됐다.
 
  지상 2층 제2전시장에는 현대 건축 모형들이 전시돼 있었다. 기 회장의 스승 김수근이 설계한 교회부터 63빌딩·백악관·코엑스에 워커힐호텔 테라스,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북한 류경호텔, 외국 고층빌딩까지 있었다.
 
  그중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궁정동 안가(安家) 모형이 기자의 눈에 들어왔다.
 
  기 회장은 “(안가는) 1979년 10·26사태 당시 검경(檢警)이 사건 조사를 위해 사용한 모형”이라며 “방송사에서도 큰 사건이 나면 (우리 모형을) 빌려 갔다. 작품마다 금속·유리·아크릴·플라스틱 등을 골고루 써서 역학적으로 조형했기 때문에, 콘크리트만 안 섞였지 실제 건물과 똑같다”고 했다.
 
 
  北 “고향에 가자” 회유도
 
기흥성뮤지엄 2층 전시관과 별도의 창고에는 현대 건축물 및 군함·비행기 등의 모형이 있다.
  뮤지엄 맞은편에는 기 회장이 집무실 겸 창고로 쓰는 흰색 건물이 있다. 이 안에도 다양한 모형이 보관돼 있다. 군함·전차·유조선·비행기·원자로부터 세종시 전경, 해양 가스전 시추 시설까지 있다. 기 회장이 항공모함 모형의 스위치를 누르자 불이 켜지면서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내부 작동 구조까지 구현했기 때문에 실제 물 위에서 항해(航海)도 가능하다고 했다.
 
  기흥성뮤지엄의 대표 작품 중 하나는 ‘평양 전경’이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경호 및 보안 점검과 특집 방송 등을 위해 제작된 작품으로 기 회장이 일본에서 구한 도면을 기초로 했다. 김일성 동상, 주체사상탑, 인민대학습당 등 평양의 주요 북한 시설물이 주택가와 함께 조성돼 있었다.
 
  기 회장은 2001년 3박4일간 평양에 방문했을 때 북한의 실체를 봤다고 했다.
 
  “호텔도 하루에 몇 번씩 전기가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고) 7층 객실을 매일 계단으로 오르내렸습니다. 도로에는 고장 난 차들이 보닛을 연 채로 멈춰 있는데, 개중에는 목탄차(木炭車)까지 있더군요. 내가 피란민 출신이라 평소 북한 공산주의는 질색을 했는데, 실제로 가보니까 평양은 정말 피폐한 도시였습니다.”
 
 
  “모형은 설계 의도 잘 표현해야”
 
기흥성 회장은 “모형은 ‘설계의도’를 잘 표현해야 한다. 비례감·입체감·볼륨감각 등을 제대로 구현해야 한다”며 “모형을 잘 만들려면 ‘잘 볼 줄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남북 교류가 한창일 때 북에서 남한의 대표 모형 작가로 초청하기도 했다.
 
  “저 혼자 오라는데 아내가 ‘안 가면 안 되겠냐’고 걱정을 했어요. 제가 우리나라 주요 시설의 도면을 다 아니까 잘못 갔다가 문제가 생길 수도 있잖아요. 통일부에서 다행히 허락해줘서 가긴 갔는데, 있는 동안 영 불안했어요.
 
  북한 작가들과도 만나고 평양 여기저기를 둘러보는데 (북한 관계자들이) ‘시간이 나면 김일성대학에서 특강을 해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몸이 아프다’고 거절했지요. 다음번에는 ‘고향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회유를 하더군요. 고향이야 가보고는 싶었지만, 괜히 쓸데없이 왔다 갔다 했다가 말썽이 될까 봐 ‘다음에 또 오겠다’고 둘러대고 돌아왔지요.
 
  사실 그래요. 저들(북한)만 아니었으면, 이 한반도가 얼마나 대단하게 될 땅이었습니까?”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기흥성은 1974년 기흥성모형연구소로 출발, 올해 창립 45주년을 맞는다. 기흥성뮤지엄이 있기 전, 본사 사옥의 일부 공간은 단체 관람객을 위한 작품 전시관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기 회장은 앞으로 보관 중인 작품을 더 많이 전시하기 위해 새 전시관을 열 계획이다. 기흥성뮤지엄 뒤편에 2관을 열고, 고향 옹진군과 가까운 인천 송도·덕적도 등지에 대규모 전시관을 세울 계획이다. 기 회장은 “과거에 대구·문경·전주 등에 전시관을 유치하겠다고 했는데, 고향을 그리는 마음으로 (고향과) 가까운 곳에 짓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생각하는 ‘잘 만든 모형’이란 무엇일까.
 
  “모형은 ‘설계 의도’를 잘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고 깨끗해야죠. 구도가 복잡하고 장식이 너덜너덜하면 보는 사람도 시야가 흐려집니다. 흑백으로만 색칠된 작품이라도, 보는 사람이 천연색으로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합니다. 그만큼 비례감·입체감·볼륨감각 등을 제대로 구현해야죠.
 
  모형을 잘 만들려면 ‘잘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저 ‘예쁘다’ ‘멋있다’고 느낄 정도면 평생 모형을 봐도 만들 줄 모릅니다. ‘아름다움’을 알아야 빚어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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