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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현대사

1970~80년대 中東特需의 증인 박승돈

“땀 흘린 熱砂의 中東 근로자 잊은 것 같아 섭섭해”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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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사우디 대사관 무관, 극동건설, 정우개발에서 일하며 中東 현장 누벼
⊙ 현대건설 주베일 항만공사 노사분규… 사우디군 총참모장 설득해 계속 시공 설득
⊙ 베트남戰 당시 한국군 최초의 헬리콥터 중대 창설 이끌어

朴承敦
1932년 함경도 안변 출생. 육사 12기 / 주월군사령부 작전처 근무, 육군 25사단 632 포병대대장, 주 사우디 대사관 무관, 보병 50사단 부사단장(대령), 극동건설 상무, 정우개발 중동본부장, 현대중공업 전무, 예림인터내셔널 회장 역임 / 화랑무공, 인헌무공, 보국훈장 3·1장 수훈
  육사 12기 출신인 박승돈(朴承敦·87) 예비역 대령은 1970~80년대 중동(中東)바람의 주역이다. 외교관(무관)으로 건설업체 간부로 모래바람, 사막의 전갈과 싸우며 오일머니를 벌어들이는 데 땀을 흘렸다. 스스로 “오직 나라와 겨레의 번영을 위해 했었던 일”이라며 가난했던 조국을 앞세웠다.
 
  그는 베트남전에 3년 가까이 참전(1965~1968년)했고 1974년 주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의 무관(대령)으로 중동과 인연을 맺었다. 1980년 3월 보병 50사단 부사단장으로 예편한 뒤 다시 사막으로 향했다. 극동건설 상무이사, 정우개발 중동본부장(전무), 현대중공업 전무, 예림인터내셔널 회장 등을 지냈다
 
  해외건설협회에 따르면 1973〜1986년 사이 우리 건설업체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수주(受注)한 건설공사의 총액은 474억6700만 달러에 달했다. 우리 건설업체의 사우디아라비아 진출이 정점이었던 1983년 당시 사우디에 진출한 한국인 근로자는 10만8000여 명이었다. 박승돈은 그들과 함께 땀이 비오듯 쏟아지는 열사(熱砂)의 땅과 마주했다.
 
  기자는 2018년 11월 말 경기도 분당의 한 실버타운에서 그를 만났다. 백발이었으나 건강해 보였고 말투 속에 따스함과 군 출신 특유의 결기가 녹아 있었다.
 
  “1970~80년대 우리 건설근로자들이 모래바람과 싸우며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 덕에 돈을 벌어 집에 보내주었잖소. 사글세를 살던 이들은 전세로 옮기고, 전세로 살던 이들은 조그마한 집을 장만하고… 다들 그렇게 옮겼지요. 열심히 일해 (중동에) 3년간 있은 사람도 있었어요.”
 
  ― 사우디의 기온은 대개 몇 도인가요.
 
  “밤에는 34~35도쯤이었을 겁니다. 낮에? 하하하. (그는 낮 기온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한번은 자동차 보닛 위에 날계란을 올려놨더니 금세 프라이가 됐어요. 낮에는 일을 못해요. 사우디 사람들은 그늘에서 자고…. 하지만 우리 근로자는 낮에도 왕왕거리고….”
 
  ― 낮에도?
 
  “그럼…. 우리 근로자만 그렇게 낮에 일했어요. 돌이켜 보면 월남(越南)도 월남이지만 중동이 우리나라를 먹여살린 것 같아요. 사우디가 우리 살길을 열어 주었지요.”
 
  한국경제에 사우디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1970년 중반에서 80년대 중반까지 주 사우디아라비아 대사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다. 유양수(柳陽洙·교통부·동력자원부 장관 역임), 장예준(張禮準·건설부·상공부·동력자원부 장관 역임), 최광수(崔侊洙·대통령 비서실장·체신부·외무부 장관 역임), 최호중(崔浩中·외무부·통일원 장관 역임) 대사 등이다.
 
  박승돈은 유양수 대사 시절, 주 사우디 대사관 무관으로 일했다.
 
 
  베트남전 참전과 헬리콥터 부대 창설
 
베트남전 당시인 1968년 5월 주월야전군사령부는 UH-1H 15대와 U-6 연락기 2대로 한국군 최초의 헬리콥터 중대를 창설했다. 사진은 UH-1H 헬리콥터다.
  1932년생인 박승돈은 함경도 안변이 고향이다. 지금은 대전에 있는 호수돈여고가 황해도 개성에 있을 때 부친(故 朴台錫)을 따라 개성에 정착했다. 그의 아버지는 호수돈여고 교무주임, 훈육주임을 거쳐 개성공업중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박승돈은 6·25가 발발할 당시 개성송도중학교(6년제) 6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졸업장을 못 받고 미 군용화물선을 타고 부산에 정착했다. 1950년 12월 31일 육군 제2훈련소에 입대했고 상등병 시절인 52년 초 우연히 육사 생도 모집공고를 보게 됐다.
 
  “그때 육군포병학교 신병교육대 대장이셨던 정봉욱(鄭鳳旭) 장군(소장 예편)이 저더러 육사에 지원하라셨어요. 정 장군도 저와 같이 이북 출신이셨어요. 낙동강 전투에서 인민군 위치와 전술을 꿰고 계셔서 아군의 반격작전 때 큰 공을 세우셨지요. 2018년 3월 9일 작고하셨습니다.”
 
  정봉욱 장군 하면 7사단장 시절이 떠오른다.
 
  1966년 DMZ에 벌초작업을 하던 아군이 미리 침투해 있던 북한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화가 난 정 사단장은 사단 포병대에 연락해 밤새 북한군에 사격을 가했다. 북한군 피해가 1개 중대병력이었다는 설(說)이 있을 정도였다. 그는 “아군에서조차 무리한 공격을 질타했으나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정봉욱이 아니면 그렇게 못해. 잘했어’라고 칭찬했다는 일화가 있다”고 했다.
 
  박승돈은 1956년 6월 소위로 임관했다. 전후방 여러 부대를 거치며 소령으로 진급했다. 1965년 3월 월남 파병이 현실화되자 파월부대에 최초 자원했다. 주월한국군사령부(작전처)에서 작전상황·편제·교육 관련 보직을 한꺼번에 맡아야 했다. “세 가지 업무를 감당하자니 1주일에 닷새는 꼬박 새우는 날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베트남에 도착하니 우리 군 장비는 M1소총에 카빈, 구형 기관총뿐이었어요. 반면 베트남군은 전부 M-16에 M-60 기관총이었죠. 맹호·백마·청룡 부대가 베트콩에게서 노획한 M-16을 재정비해 한국으로 보내 ‘청와대 경호용’으로 활용했지요.”
 
  주월미군사령부(USMAC-V)는 우리 군의 무기편제가 형편없었던지 M-16, M-60 등을 비롯한 최신형 무기와 공병(工兵) 장비의 현대화를 요청할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훗날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될 중장비 기능공들이 많이 양성됐다고 한다.
 
  ― 베트남어 통역관 양성을 맡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민간인을 절대 해쳐서는 안 된다’는 채명신 사령관의 언명이 있었어요. 누구나 베트남어를 습득하려 노력했으나 그게 어려웠죠. 결국 그 과제는 ‘교육담당’이던 제게 떨어졌어요. 1개 대대에 1명씩 최소 24명의 베트남어 통역관을 양성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만만치 않았어요.”
 
  베트남 중류급 가정에서 지내며 그들의 습관과 언어를 배우기란 쉽지 않았다. 당장 통역요원 숙식비·체재비 부담을 해결해야 했다.
 
  “언어를 배우려면 현지인과 24시간 늘 붙어있어야 하고, 그것도 속성으로 배워야잖소? 그 복잡한 문제를 USMAC-V가 4만 달러가량을 지원해 가능했죠. 정말 고마웠어요. 어쨌든 3개월간 베트남어 교육을 마치고 현지인과 자유자재로 대화한다는 보고를 받은 윗분들이 흡족해한다는 얘기를 듣고 보람을 느꼈지요.”
 
  베트남전 당시 주월야전군사령부(나트랑 소재)에 UH-1H 15대와 U-6 연락기 2대로 편성된 한국군 최초의 헬리콥터 중대를 창설할 때의 회고다. 1968년 5월로 기억된다.
 
  “본래 한국군에는 2인승 정찰기인 L-19 고정익(Fixed-Wing·항공기 동체에 고정된 날개) 조종사밖에 없어 부대 창설이 처음부터 난관이었죠. 미국 항공학교에 파견해 ‘회전익(Rotary Wing·통상 헬리콥터를 지칭) 조종사’로 기종 전환교육을 받도록 했지요. 조종사 36명을 선발해 미국 항공학교에 보내는 비용 80만 달러를 주월미군사령부가 부담토록 설득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그 일을 저와 미군 칼러지(Collergy) 중령이 추진했죠.”
 
 
  1억 달러 사우디 군복 납품 스토리
 
대구 제일모직 ‘골덴텍스’ 공장. 박승돈 주 사우디 대사관 무관이 사우디군 관계자와 함께 제일모직 대구공장에 들렀다.
  주월한국군사령관인 채명신 장군과 부사령관 김용휴 장군은 박승돈 소령이 베트남에 계속 남아 주길 희망했으나 육군본부는 난색을 표했다. “3년씩이나 계속 근무시킨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한국으로 귀환했다.
 
  “채명신 사령관이 군용 비행기 대신 일반여권으로 홍콩~도쿄~김포 간 항공권을 끊어 주셨죠. 또 대령급 참모들에게 주는 위로금까지 챙겨 주셨어요.”
 
  이후 1년 과정의 육군대학을 졸업(69년 9월. 당시 계급은 중령이었다)한 뒤 육군 25사단 633 포병대대장과 합동참모본부 작전과(1974년 4월 대령으로 진급), 그리고 당시 처음 발족된 한국군 전력증강 사업인 ‘율곡사업단’ 등지에서 근무했다.
 
  어느 날 이병형 합동참모본부장(육사 4기, 중장 예편)이 그에게 “주 사우디 대사관 무관으로 부임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부랴부랴 신변을 정리해 사우디로 향한 것은 1974년 9월 24일이었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딸 셋을 서울에 남겨 두고 4살 된 막내딸만 데리고 저희 부부는 김포와 방콕, 카라치(파키스탄)를 거쳐 사우디 다하란과 리야드를 경유해 한국대사관이 있던 홍해 연안의 제다에 도착했어요. 밤 11시쯤이었을 겁니다. 사흘이 걸려 사우디 공항에 도착해 느낀 후끈한 첫 공기는 한국의 한여름 공기가 아니라 사우나탕에 들어간 것 같았죠.
 
  ‘여기서 어떻게 지내지?’ 하는 걱정이 덜컥 앞섰어요. 그래도 우리 대사관에서 장기호 영사와 사우디 진출 기업체 직원 2~3명이 나와 사흘 만에 한국말로 대화할 수 있었던 게 너무나 반가웠어요.”
 
  무관 임무를 시작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사우디 국방성 군수국장인 후메이드 장군을 만났더니 1억 달러 규모의 군수품(군복) 발주를 한국 측에 제안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후메이드 장군과 사우디 장교 14명을 대동해 한국을 찾았다. 대구의 제일모직 공장을 찾았을 때 골덴텍스(Goldentex) 양복감이 생산되는 광경을 보고 ‘감탄에 감탄’하는 사우디군 관계자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후메이드 장군이 “구라파에서 판매되는 양복지 골덴텍스가 삼성에서 생산, 수출된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서울 구로공단에서 재봉틀 300대를 놓고 능수능란하게 작업하던 여공들의 모습을 보고 사우디군 관계자들은 아연실색을 했죠. 사우디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니까요.”
 
  결국 1976년 1월 18일 사우디 국방성은 1억1615만 달러 규모의 군복납품 계약서를 발주했다. 실로 대단한 액수였다. 그해 한국정부의 수출 목표가 65억 달러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국내 경제사정은 극도로 나빠 ‘제한 송전’은 고사하고 강남 테헤란로의 가로등마저 꺼져 있어 암흑 자체였어요. 그러던 차에 사우디에 1억 달러 규모의 군복을 납품하게 된 것이죠. 납기일을 맞추려 서울 금호동 달동네에서 재봉틀을 돌리던 주부, 겨우 몇 대의 미싱으로 봉제를 하던 영세업자까지 ‘하청’에 ‘재하청’을 주며 전국이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해요.”
 
  그러나 무리하게 납품을 하다 보니 뜻하지 않은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아랍어를 모르니 동복(冬服)에 붙여야 할 세탁기준표를 하복에 붙이고, 하복에 붙여야 할 걸 동복에 붙이고… 엉망으로 했어요. 그리고 허리 사이즈가 30인데 36, 28인데 40으로 표시되는 등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삼성 측이 인건비를 아끼려 아랍어에 능통한 이를 안 뽑아서 생긴 일이죠. 난리가 났어요.”
 
  ― 제일모직도 그런 큰 물량을 납품한 적이 없었던 모양이네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경험을 쌓았으니 이후 똑같은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당시 그 일로 삼성물산 이은택 사장, 이정균 상무가 물러나고 말았다. 삼성은 국제상사 손상모 사장을 영입해 새로운 사장으로 앉혔다. 손 사장은 사우디 군수국장인 후메이드 장군을 찾아가 사과했다고 한다.
 
  “비록 큰 곤란을 겪었지만 삼성은 1976년 11월의 ‘수출의 날’ 행사에서 6억 달러 수출탑을 받았어요. 그리고 삼성물산 역사상 ‘섬유직물 수출실적 1억 달러’는 지금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다니 뿌듯합니다.”
 
 
  제대병을 중장비 기능공으로 양성
 
1962년 2월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오른쪽)이 유양수 외무국방위원장과 이야기하고 있다. 사우디 대사 시절 유양수는 박 대통령에게 제대병을 중장비 기능공으로 양성토록 건의했다.
  1970년대 중반 사우디 건설공사 현장에는 ‘오일 머니’를 벌기 위해 전 세계가 들끓고 있었다. 사우디 정부도 각 부처마다 공사발주 계획을 세우기에 바빴을 정도다.
 
  그 무렵 사우디에 진출한 국내 업체로는 대림산업, 삼환기업, 한일개발, 동아건설, 전 엔지니어링 정도였다. 주로 도로 건설에 참여했다. 반면 유럽 업체들은 사우디 관료들과 친분을 맺고 대규모 발주공사를 휩쓸었다.
 
  “구라파 업체들은 수주액이 몇 천만, 몇 억 달러 공사인데 우리는 그런 공사를 못 땄어요. 그저 몇 십만, 백만 달러 수준이었어요. 싸구려 공사에 참여하는 한국 업체들은 곡괭이, 삽, 리어카를 끌고 공사를 했잖소.
 
  한번은 사우디에 나와 있던 미군 공병단장에게 ‘도와 달라’고 청했지요. 그가 우리 업체들의 견적서를 훑어보더니 공사단가를 한화(韓貨) 대신 달러화로 쓰라는 겁니다. 그걸 알려주더라고. 그래서 급히 서울에서 다시 브로셔를 만들게 했죠. 그만큼 눈이 어두웠다는 얘기예요.
 
  그리고 주 사우디 대사였던 유양수 대사께 건의했어요. 그분은 주 베트남 대사도 역임하셨기에 안면이 있어 말씀 드리기가 수월했어요. ‘대사님! 국방부에서 중장비 기능공을 양성해 기업체에 취업시켜 사우디에 진출할 길을 열어 주시면 제대군인이 취업도 되고, 군도 민복(民福) 증진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죠.”
 
  유 대사는 박승돈 무관이 작성한 건의문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고 한다.
 
  “건의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주 베트남 미군 사령부에서 받았던 공병 중장비가 있었거든요. 덤프트럭, 불도저, 포크리프트(하역전용 특수 자동차), 페이로더(동력 삽을 탑재한 굴착기) 같은 장비를 수도사단과 9사단, 해병 2여단 등지에 갖다 두었거든요. 그 장비들을 활용해 제대를 앞둔 군인들을 2~3개월간 교육시켜 사우디에 진출한 우리 기업에 취업시키자는 것이었어요.
 
  박 대통령도 크게 관심을 갖고, 곧바로 경제장관들에게 그 건의문을 배포했습니다.”
 
  그 결과, 1976년 4000명, 77년 7000명 기능공 양성계획이 수립됐다. 그리고 직업훈련을 마친 제대병들은 사우디 진출업체에 취업해 1~2년 가까이 일할 수 있었다.
 
 
  “박 대령! 차렷! 국가가 박 대령에게 내리는 훈령이야!
 
현대건설이 1976년 수주해 시공 중이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장. 이곳을 찾은 정주영(오른쪽에서 둘째)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임직원, 근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1976년 여름, 사우디 정부가 발주한 아랍만 주베일의 대형선박 접안시설 공사에 현대건설이 9억3600만 달러에 응찰했다. 2순위 업체 가격이 12억 달러니 3억 달러 가까이 가격차가 났다고 한다.
 
  입찰가가 너무 낮다고 생각한 사우디 측은 유양수 대사를 초치해 한국정부가 공사이행을 보증하는 확약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듬해 3월 주베일에서 대규모 노사분규 사건이 일어났다. 주변 업체보다 임금이 적었던 건설근로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 분규에 사우디 정부도 깜짝 놀랐다고 한다.
 
  “사우디 군경이 주베일 현대건설 공사장을 포위할 정도였어요. 그때 유양수 대사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박 대령! 차렷! 내가 이제부터 내리는 명령은 나 유양수가 내리는 명령이 아니라 국가가 박 대령에게 내리는 훈령이야! 내일 (사우디군) 총참모장을 만나 현대가 계속 시공할 수 있도록 교섭해! 끝.’
 
  그 말씀만 하시고 휙 돌아서 가시는데 기가 막혔답니다. 당시 분규를 철저히 통제해 국내 언론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 현대건설 쪽도 난리가 났겠네요.
 
  “그럼요. 노사분규가 장기화되면 현대그룹이 망하는 것이었어요. 외환보유고가 고작 29억 달러(1976년)이던 한국도 부득이 모라토리엄(Moratorium·지불유예)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사우디 정부의 기본방침은, 첫째 공사 몰수, 둘째 현대건설 추방, 셋째 선수금 회수였어요.
 
  당시 사우디군 총참모장이 후메이드 장군이었어요. 그분은 ‘현대건설의 공산주의자들이 이스라엘하고 짝짜꿍이 돼서 C-141 비행기에서 무기를 공급받아 사우디를 정복하려 하는 것 아니냐’고 묻더군요. 별별 생각을 다 한 거지요.
 
  일단 안심을 시켰죠. 현대건설에 취업한 근로자 100%가 3년간 군 경력자이고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아서 취업했다고 설득했어요.
 
  총참모장이 저더러 ‘그러면 박 대령이 직접 가서 폭동(Riot)를 진압시킬 수 있겠느냐. 사우디군 일부를 배속시켜 주겠다’고 하더군요. 저는 ‘사우디군 지원은 필요 없다. 혼자서 설득할 수 있다’고 했어요.”
 
  대신 박승돈 대령은 후메이드 장군에게 “현대가 계속 시공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했다.
 
  “당시 총참모장은 정색을 하며 ‘그건 내가 좌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윗분들이 결정할 사항’이라더군요. 그러더니 잠시 후 어딘가로 심각하게 통화한 후 결국 ‘현대건설 계속 시공’으로 결정이 났어요. 저는 ‘슈크란(감사합니다)’, ‘슈크란’만 반복했지요.”
 
현대건설이 시공한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유전지대인 주베일 산업항 모습이다. 당시 세계 건설업계에서 ‘20세기 최대의 역사’라 일컬어지는 역사적인 프로젝트였다.
  한편,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급히 사우디 다하란과 담맘을 거쳐 1977년 3월 18일 공사현장인 주베일에 도착했다. 정 회장은 인접 건설업체인 극동건설, 미륭건설의 시급보다 높이 올려주기로 근로자들에게 약속했고 결국 그날 오후 1시부터 공사가 재개됐다.
 
  “보통의 노사분규가 아니라 차로 막사를 밀고… 막사가 와르르 무너지고… 그게 한두 동이 아니었어요. 현대쪽 시급(時給)이 인근 건설현장의 근로자보다 낮았어요. 현대 김○○ 전무가 그런 인상 요구를 본사에 보고는 했겠지만 묵살했던 거지요.”
 
  그런데 주베일 항만공사는 난공사였다. 수심 3~4m의 해안가를 가로질러 수심 40m나 되는 약 12km 거리까지 왕복 4차선의 도로를 구축하고 최소 30만t급 선박 3~4척이 접안할 수 있는 항만시설을 짓는 공사였다.
 
  “2순위 업체인 ‘아드리언 볼카라’사(社)는 수심 3~4m에 내려가 용접하는 것으로 공사단가를 계산하니 공사비가 엄청났지요. 용접공 임금이 비싸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울산 미포조선에서 선박 접안·하역 시설을 다 만들어 바지선에 싣고 인도양을 거쳐 주베일에 설치만 하면 됐으니 공사비를 줄일 수 있었어요.
 
  어느 누구도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정주영 회장이 그런 생각을 한 거지요. 대단한 거야. 그때 울산에서 주베일까지 한 번도 태풍을 만난 일이 없었어요. 하느님이 도우신 겁니다.”
 
 
  “나하고 일찍 만났다면 작전참모를 시켰을 텐데…”(유양수 대사)
 
  박승돈 대령은 1980년 3월 예편한 뒤 다시 중동으로 돌아왔다. 극동건설, 정우개발을 거쳐 현대중공업 전무로 재직했다.
 
  “우리 사회가 1970~80년대 중동에서 고생했던 이들에게 무심한 것 같아 섭섭해요. 사우디가 우리나라 경제를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를 했다고 봐요. 그때 모래바람과 싸우며 우리 근로자들이 고생들 많이 했어요. 그게 기폭제였지요. 요즘 현대가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마음이 아파요.”
 
  ―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을까요.
 
  “1977년 5월쯤이었어요. 유양수 대사가 사우디 북반부를 한 바퀴 돌아보자셔서 제가 운전해 건설관, 노무관을 대동해 제다를 출발해 리야드를 경유, 주베일 현대건설 캠프에서 1박, 알바틴을 거쳐 북부 따북 지역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한국건업에서 1박, 홍해 연안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극동건설에서 1박, 중부 메디나를 거쳐 나흘 동안 3600km를 주파하고 오후 4시 58분쯤 대사관 정문에 들어섰지요. 당시 대사관 뜰에서 대사 사모님을 비롯해 전 가족이 집결해 환호성을 지르던 때가 기억납니다. 그때 통신사정이 나빠 소식을 전하지 못해 다들 걱정했던 거지요. 유 대사가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박 대령. 나하고 일찍 만났었다면 작전참모를 시켰을 텐데….’”
 
  그는 아직도 1970~80년대 중동의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던 시절이 그리운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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