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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고백

前 필리핀 영사 서대용씨가 겪은 한국인 납치·살인 사건

그곳에서 죽음은 일상이었다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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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영사 시절, 일상에서 죽음이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죽음은 한 달에 한두 번 살인사건이나 자살사건으로 일어났어요. 참혹한 현장에서 돌아올 때면 사는 게 뭔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죽음이라는 커다란 고통을 잠시나마 면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기도 했습니다.”

⊙ 필리핀 찾는 한국인 연간 160만명… “잊히지 않는 수많은 사건·사고 겪어”
⊙ ‘1000만 페소(2억1000만여원) 준비하라’는 문자를 받았을 때…
⊙ “납치된 교민, 살아 돌아왔을 때 가장 기뻐”
  지난 5월 16일 필리핀 마닐라 북부 칼로오칸이라는 지역에서 58세 한국인 김모씨가 총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한국 경찰청은 수사관과 감식요원 등 4명으로 구성된 공동조사팀을 필리핀 현지로 급파했다.
 
  현재 경찰은 필리핀에서 한국인 피살사건이 발생하면 현지로 수사 전문인력을 파견하고 있다.
 
  경찰대 2기로 경찰청 정보1과장, 경북 울진경찰서장, 필리핀 영사를 지낸 서대용(徐大用·55)씨는 “한국인 관광객이 많으니 자연스레 관련 사건·사고가 많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필리핀은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나라”라며 “한국인 조폭과 전과자가 개입된 사건이 현지에서 발생하는 것도 필리핀으로 도피성 유입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필리핀 치안력이 부실한 점도 한국 교민을 겨냥한 납치·살인 사건·사고가 많은 이유 중 하나다.
 
  현재 필리핀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 수는 해마다 늘어나 2017년 필리핀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662만명 가운데 한국인이 160만여명으로 가장 많다. 중국인(98만여명), 미국인(95만여명), 일본인(58만여명)보다 많아 전체 외국인 관광객의 24.3%다.
 
  최근에는 한국인 선교사 백모씨가 필리핀 경찰에 의해 구금되자, 우리 정부가 나서 달라는 청와대 청원이 접수된 일도 있다. 백씨는 필리핀 경찰의 한국계 선교법인의 압수수색 과정에서 총과 탄약, 수류탄이 발견돼 검거됐는데, 필리핀 현지에선 이 사건을 한국인을 겨냥해 벌어지는 ‘셋업(Set up) 범죄’로 보고 있다.
 
  ‘셋업 범죄’란 표적을 정해 덫을 놓고 행해지는 범죄를 말한다. 한국인 주변을 모니터링한 뒤 그의 집이나 사무실에다 총알과 수류탄 같은 무기류나 마약류 등을 몰래 가져다 놓고 현지 경찰에다 신고한다. 꼼짝없이 걸려들 수밖에 없다. 그러곤 석방조건으로 거액의 합의금과 금품을 요구한다.
 
  살인·납치 사건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법무연수원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2012~2016년)간 해외에서 살해된 한국인은 164명. 그중 필리핀에서 피살된 한국인이 48명으로 미국(21명), 중남미(19명), 중국(13명), 일본(10명)보다 많다. 서대용 전 영사가 필리핀에서 근무할 때도 납치·살인 사건이 많았다. 하나하나 잊히지 않는 사연들이다.
 
  “필리핀 영사 시절, 일상에서 죽음이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죽음은 한 달에 한두 번 살인사건이나 자살사건으로 일어났어요. 참혹한 현장에서 돌아올 때면 사는 게 뭔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죽음이라는 커다란 고통을 잠시나마 면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기도 했습니다.”
 
  기자는 지난 8월 1일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서 전 영사를 만났다.
 
 
  ‘도망자의 끝’과 안타까운 관광지 사고
 
작년 2월 6일 필리핀 경찰청 본부에서 경찰관들에 의해 살해된 한국인 사업가의 마닐라 회사 직원들이 6일 경찰청 살해 현장에서 추모의 풍선을 날리고 있다. 사진=AP/뉴시스
  맹렬한 태양 빛에 서서히 적응해 가던 어느 날 오후, 한국인 사업가 A씨가 서대용 필리핀 영사를 찾아왔다. 명함을 건네받으며 힐긋 쳐다본 얼굴에서 고생의 흔적이 보였다. 그를 찾아온 이유는 단순했다. 돈을 챙겨 가족과 함께 필리핀으로 도주한 B씨를 찾고 있었다.
 
  한때 B씨는 국내 국영기업체의 재무담당자였다. 평소 업무상 금전거래가 있던 A씨의 회삿돈을 몰래 챙겨 해외로 도주한 것이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서 영사는 B씨의 인물사진을 포함한 서류를 받아 두었다. 그리고 B씨와 관계된 사람이 대사관에 찾아올 것을 대비해 직원들에게 미리 알렸다.
 
  어느 날 예상대로 B씨의 아내로 추정되는 C씨가 대사관을 찾아왔다. 그녀는 자녀의 고등학교 입학에 필요한 서류를 공증 받으러 왔다는 것이었다. 서 영사는 멀찌감치 서서 C씨를 확인한 뒤 차분하게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며칠 후 B씨가 그를 찾아왔다. 나머지 일은 빠르게 진행됐다. 얼마 후 B씨 가족을 태운 한국행 비행기가 마닐라를 이륙했다.
 
  “이 사건은 필리핀 영사 업무를 처음 시작할 무렵 일어났어요. B씨 가족을 태운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 ‘앞으로 이런 일을 얼마나 겪게 될지’ 하는 막연한 불안감이 밀려왔었습니다.
 
  영사 업무를 보던 마닐라 마카티(Makati)는 서울의 ‘강남’처럼 겉으론 대도시의 면모를 갖췄지만 빈부격차가 커 갈등이 많은 지역이었어요. 필리핀에 처음 도착해 대사관으로 출근하기 전에 한국인 사망사건이 발생, 현장부터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필리핀의 유명 관광지인 팍상한 폭포(Pagsangjan Falls)는 영화 〈지옥의 묵시록〉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다. 마닐라 근교 투어의 꽃으로 마닐라에서 차로 2시간 30분 정도 떨어졌다.
 
  폭포 상류로 올라갈수록 바위와 자갈이 많아 사공들이 배에서 내려 배를 밀고 끌며 힘겹게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천혜의 필리핀 정글이 장관을 이뤄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영사 업무를 시작한 지 1년이 될 무렵의 어느 일요일 오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인이 래프팅을 하던 중 절벽 위에서 정글의 원숭이가 던진 돌에 맞아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신고 내용을 접하고 과연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 믿기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야 사고 현장에 도착, 관할 시장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시장은 “10여 년 전에도 비슷한 사고가 발생해 안전모 착용을 의무화했다. 그러나 이번 한국인 사망자는 안전모를 쓰고 있었는데도 불행하게도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서 전 영사는 “시신을 수습하러 필리핀에 온 유족들에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안전모가 불량해 사고가 났을지 모른다고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다”며 “그저 조용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돌아가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보상금을 신청하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 후로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전형적인 몸값요구 사건과 어둠 속에서 탈출
 
  마닐라의 파라냐께(Paraaque)는 필리핀에서도 한국 교민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필리핀인 남편과 한국인 아내는 평소 자주 찾던 시장에 가기 위해 남편 차를 타고 가다가 신호대기 중 ‘NBI 요원’이라고 사칭한 괴한들에게 납치됐다. 이들은 한인회를 통해 200만 페소(한화 약 4200만여 원)의 몸값을 요구했다.
 
  전형적인 한국인 겨냥, 금품을 노린 납치사건(Kidnap for Ransom)이었다. 서 영사는 필리핀 경찰청의 납치전담팀에 연락한 뒤 모처에서 피해자의 아들을 만났다. 몸값요구 사건의 특성상 대사관에서 범인들과 직접 협상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긴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다행히 한국인 아내는 구출됐으나 필리핀인 남편은 바다에 내던져지고 말았다. 이 사건은 그가 필리핀에서 겪은 수많은 사건의 하나였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또 다른 사건도 기억에 남는다. 앙헬레스(Angeles)는 필리핀 루손섬 팜팡가 주에 위치한 도시다.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이 도시는 골프, 카지노를 하기 위해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우리 교민이 2만5000명가량이 살고 있다. 《재외동포신문》에 따르면, 필리핀에서 한인을 상대로 발생하는 강력범죄의 60%가량이 앙헬레스에서 일어난다고 한다.
 
  지금은 현지 코리아타운에 한인 파출소가 두 곳이지만 서씨가 영사에 재직할 당시엔 한인 파출소가 없었다.
 
  어느 날 대사관으로 전화벨이 울렸다. 앙헬레스에서 한국인 두 명과 필리핀인 한 명이 권총으로 살해됐다는 피해 신고였다. 곧바로 피해 현장으로 달려갔다. 범인들이 생매장하려고 파 둔 구덩이에서 시신들이 발견됐다. 총에 맞았던 피해자 중 한 명이 구사일생으로 의식이 돌아와 구덩이를 파헤치고 나와 경찰에 신고한 것이었다. 그는 심장이 아닌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서 전 영사는 “만약 그가 의식에서 깨어나지 못해 구덩이에 묻혔다면 미제로 남았을 사건”이라며 “훗날 듣기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생존자는 평소 마닐라 성당에 다니던 착실한 신자였다고 하더라”고 했다.
 
 
  ‘당신이 누군가를 납치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작년 10월 25일 필리핀 경찰 특수부대원들이 이슬람국가(IS)와 연계된 무장조직으로부터 접수한 남부도시 마라위에 진입하고 있다. 사진=AP/뉴시스
  서 전 영사에게 기억하기 싫은 사건이 있다.
 
  “지금은 두 다리를 쭉 뻗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사건이 해결되기 전까지 두 달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호흡이 가빠진다. 더군다나 사건 발생 지역이 이슬람 반군 활동 지역인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마라위(Marawi)였다.
 
  필리핀은 크게 루손·파나이·세부·보홀 등 11개의 큰 섬과 7000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돼 있다. 민다나오 섬은 그중에서도 가장 자원이 풍부한 섬이지만 종교적 갈등이 잦고 반군(反軍) 활동이 왕성한 곳이다. 인구는 2200만명인데 가톨릭 교도가 63%, 이슬람교도가 32%다. 필리핀 본섬은 가톨릭 신자가 90%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마라위에는 필리핀 전체 인구의 5%에 이르는 약 400만명의 무슬림(모로족)이 살고 있다.
 
  어느 날, 그의 휴대폰에 이런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은 우리가 안전하게 데리고 있다. 1000만 페소(2억1000만여 원)를 준비하라. 아부 바칼(AbuBacal)’
 
  등골이 오싹해졌다.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한 후에 필리핀 경찰청 관계자(PACER, Police Anti-Crime and Emergency Response)에게 전화를 걸어 신속한 사건 처리를 당부했다.
 
  한국에서 온 사업가를 광산에 투자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솔깃한 말로 유인한 뒤 납치한 사건이었다. 당시 서 영사는 사건 발생 지역이 민다나오 섬이라서 더 신경이 예민해졌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겉으론 일상적인 출장인 듯 민다나오를 수차례 다녀와야 했다. “한 달이 지나도록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아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고 회고했다.
 
  사건 현장으로 가기 전, 한국에서 온 절박한 피해자 가족을 만났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했지만 마음속으론 신(神)을 찾았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사건이 해결되고 마닐라에 도착했을 때의 심정은 쉽게 표현할 수 없다.
 
  “살아서 돌아왔구나 하는 마음에 눈물이 쏟아졌어요. 통상 이런 사건은 석방 조건으로 합의금을 치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얼마를 주고 풀려났는지 (피해자에게) 감히 물을 수 없었어요.
 
  만약 누가 제게 납치사건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할 수 있어요. ‘당신이 누군가를 납치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그럼 답이 나올 겁니다. 인도적으로 풀어준다? 가능할까요? 인질범에게 인도적인 감정을 요구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사실 금품을 내놓지 않으면 인도적으로 풀려날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정부가 금품을 대신 내놓을 수도 없지요. 그래서 영사 업무가 괴롭고 힘들었어요.”
 
  — 민다나오 섬에 이슬람 반군이 많은 이유가 뭘까요.
 
  “필리핀 본섬과 민다나오 섬은 차이가 많아요. 민족 구성이 다르다고 할까요? 또 종교도 달라요. 필리핀 사람들은 대개 가톨릭을 믿지만 민다나오 주민엔 이슬람교도가 많습니다. 그곳에 출장을 갈 때면 불안감을 많이 느꼈어요.”
 
  지금까지 필리핀 정부군과 민다나오 지배세력인 기독교계가 반군과 무력충돌을 지속하면서 약 15만명이 사망하고 30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작년 7월 마라위 지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이슬람 반군을 소탕하기 위해 M16으로 중무장한 경찰의 모습이 해외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서 전 영사의 말이다.
 
  “납치 이유는 어떻게 보면 간단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 납치 대가를 바라서죠. 한국사람들이 차림새가 말끔하고 현금을 많이 갖고 다닌다는 인식도 퍼져 있어요. 또 제 경험상, 일본인·중국인과 비교해 한국인은 뭔가 달라요. 튄다고 할까? 목소리가 크고 행동이 좀 달라요. 또 필리핀인이 개입되지 않은 한국인끼리, 한국인 조폭이 개입된 납치·살인 사건도 적지 않습니다.”
 
 
 
잊히지 않는 여러 사건들

 
  필리핀 경제특구인 수비크(Subic)에서 한국인 일가족 3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다른 사건보다 더 많은 착잡한 사연을 숨기고 있었다. 처음 당직전화로 들은 내용은 필리핀 현지 강도들이 수비크 소재 해운회사의 평범한 한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서 든 첫인상은 단순 사건으로 보기에 석연찮은 점이 많았다.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은 한국인 노동자 집에 필리핀인 강도가 침입해 부인과 아들까지 처참하게 죽여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현지 수사기관의 신속한 대처와 수비크 한인회에서 모아준 ‘성금’으로 현지인 용의자를 검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몇 푼 되지 않는 돈을 빼앗으려고 왜 처참하게 한국인을 죽였는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의 말이다.
 
  “사건을 종결짓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서서 가는데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하게 짓눌려 왔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심정도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마닐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적막을 깨는 빗줄기 소리에 갑자기 두려움을 느꼈어요.”
 
  또 다른 사건도 잊을 수 없다.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7시간 떨어진 바기오(Baguio) 인근에서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당시 시신 수습 과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뒷목이 뻐근해진다”고 했다.
 
  한국에서 온 목사를 포함해 한국인 신자 10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화장을 해서 시신을 한국으로 운구하기로 했다. 그런데 마닐라의 장례식장은 10명을 한꺼번에 화장할 만큼 여유가 없었다. 하루 종일 장례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긴 시간 동안 신자들과 유족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시 화장하는 일에 매달려야만 했다. 그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의 고향으로 알려진 민다나오 다바오(Davao)에서 일어난 사건도 떠오른다. 당시 다바오 시장은 두테르테. 지금도 막강한 리더십을 자랑하지만, 당시에도 다바오에서만큼은 치안이 좋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인 남성이 살해되는 총기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직접 두테르테를 만나기도 했다.
 
  “사망 소식을 듣고 필리핀 현지에 온 피해자의 딸과 함께 새벽 첫 비행기를 타고 다바오에 갔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는 민다나오에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여지없이 무너졌지요. 과연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기에 권총으로 범행을 저질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장을 살펴보고 피해자 가족에겐 미안했지만 사건이 미궁에 빠질 것 같은 예감이었어요. 당시 딸과 가족을 위해 모아 둔 돈뭉치가 피해자의 옷에서 발견됐어요. 꼬깃꼬깃한 돈을 바라보며 피해자가 마치 오늘의 불행한 사태를 예견한 것과 같아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서대용 전 영사는 경찰 총경출신이다. 경찰대 2기로 경찰청 정보1과장, 울진경찰서장을 지냈다. 앞줄 가운데가 서대용 전 총경이다.
  서 영사는 밤늦게 감금 신고 사건을 처리하고 개운하지 않은 몸으로 일하다 필리핀 현지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것이 그가 기억하는 필리핀에서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마카티 종합병원에서 2개월을 보낸 후 한국으로 후송됐습니다. 안타깝지만, 지금도 제가 쓰러진 후 필리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해요.”
 
  영사직에서 물러난 뒤 오랫동안 고통스런 투병의 시간을 보냈다. 수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지금은 많이 회복된 상태다. 위기의 가정을 돕는 모임인 ‘스탠드업 커뮤니티’(standup.ijesus.net)에서 장애를 지닌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가르치며 매일 새로운 일상을 쓰고 있다. 그러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필리핀에서 보낸 3년의 세월을 잊을 수 없다.
 
  “29년간 경찰에 재직했지만 공직생활 중 필리핀 영사 시절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한국 교민과 관광객이 관련된 사건·사고를 발생에서 종결까지 모두 혼자 처리했으니까요. 납치범과 긴 시간을 앞에 두고 싸워야 했던 고통스럽고 외로운 시간이었지만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생생히 느꼈어요. 지금도 그때 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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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땡초대사    (2018-08-29) 찬성 : 34   반대 : 18
서대용님 이분은 경찰청장을 지내고도 남을 업무적 열정과 능력, 인품을 인정받던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격무로 쓰러지셔서 더 큰 뜻을 펼치지 못하신 것이 참으로 아쉽습니다. 퇴임 후에도 역시나 좋은 일 하고 계신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요.
  박상규    (2018-08-27) 찬성 : 61   반대 : 64
서 총경님의 헌신이 우리 국민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습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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