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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의 품격

‘서편제 장관’ ‘광대 장관’ 배우 김명곤

“예술은 천형(天刑), 배우는 무당 노릇”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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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극장장, 장관 출신 배우… 영화계 아웃사이더이자 진보 성향 배우
⊙ 〈서편제〉에서 ‘비정한 소리꾼’으로 스타덤… 90년대 이후 이념의 짐 내려놓아
⊙ “연기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표현하는 행위, 테크닉으로 설명할 수 없어”
⊙ “20~30대의 김명곤은 어둠, 돌아가고 싶지 않아”
  배우 김명곤(金明坤·67)을 흔히 ‘서편제 장관’ ‘광대 장관’이라 부른다. 임권택 감독의 1993년작 〈서편제〉는 100만 관객을 모은 작품이다. 요즘은 1000만 관객이 흔하지만 그때는 20만~30만 관객이 와도 흥행이라던 시절이었다.
 
  무명에 가깝던 김명곤은 〈서편제〉의 ‘유봉 역’으로 일약 스타가 됐다. 유봉은 소리를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하는 비정한 소리꾼이다. 벌써 25년 전 작품이지만 사람들은 〈서편제〉 하면 오정해와 김명곤을 떠올린다. 영화 한 편이 평생 그 사람의 인생을 따라다니는 일은 흔치 않다.
 
  〈서편제〉를 제외하고, 그가 출연한 작품은 대중적인 극보다 실험적인 예술작품이 많았다. 한국 최초의 독립영화로 알려진 장선우 감독의 처녀작 〈서울황제〉(1986)도 그렇고, 이장호 감독의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도 흥행 코드가 없는 작품이다. 〈나그네…〉의 원작자인 소설가 이제하는 자신이 만든 노래를 무반주로 부르게 했는데 눈이 펑펑 쏟아지는 강원도 일대를 배경으로 김명곤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신이 명장면으로 꼽힌다.
 
  프랑스 베노데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작인 배창호 감독의 〈정(情)〉(2000)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떠돌이 소리꾼의 슬픔이 녹아든 〈서편제〉도 대중성과 거리가 멀다.
 
  사실 충무로나 대학로에서 그는 아웃사이더였다. 서울대 사대 연극반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연기 경험이 전부다. 무명에 가까운 20년을 보낸 뒤 〈서편제〉로 그해(1993)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은 마흔두 살 무렵이었다.
 
  그런 그가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에 국립극장장이 됐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놀랐다. 그러나 6년간 CEO로 적자 극장을 흑자로 돌려놓아 더 놀라게 했다. 극장장을 그만두자 문화부 장관이 됐다. ‘떠돌이 소리꾼’ 유봉의 화려한 변신이라고 해야 할까. 광대가 장관이 된 것이었다.
 
  공직에서 물러난 김명곤은 지금도 꾸준히 조연으로 만날 수 있다. 최근 양우석 감독의 〈강철비〉에 조연으로 출연했고 tvN 드라마 〈명불허전〉에서 ‘허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야심가 마성태 역으로 묵직한 연기를 보여주었다. 지난 2월 말 서울 논현동에서 그를 만났다.
 
 
  판소리 가락에 춤추던 가객의 모습
 
김명곤은 〈서편제〉의 ‘유봉 역’으로 일약 스타가 됐다. 유봉은 소리를 위해 딸(오정해 분)의 눈을 멀게 하는 비정한 소리꾼이다.
  ― 근황이 궁금합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 홀가분하게 작은 역할에 출연하고 있어요. 연극 〈아버지〉를 연출했고 고전 ‘심청전’을 비튼 〈아빠 철들이기〉에서 심봉사로 출연하기도 했고요. ‘장관배우’가 아닌 그냥 배우로 일하려고 해요. 제작진이나 동료 배우에게 부담되는 존재가 안 되도록 노력하죠. 언젠가 소극장 무대에 섰더니 친구들이 ‘이게 뭐냐’고 하더군요. 왜 예술의전당 같은 큰 무대에 서지 않느냐는 거예요. 제가 그랬죠. ‘내가 원래 소극장 출신’이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것’이라고요.”
 
  ― 아직도 김명곤 하면 〈서편제〉를 떠올립니다.
 
  “대학 시절, 우연히 시골 국악원에서 소리 광대의 한(恨)을 목격한 일이 있어요. 그리고 순우리말 잡지인 《뿌리 깊은 나무》의 기자로 만나 취재했던 명인·명창의 삶이 제게 영향을 주었고 예술관과 감수성까지 변하게 만들었어요.
 
  제가 〈서편제〉를 임권택 감독과 각색을 같이 했는데, 그간 만났던 수많은 광대의 삶이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각색 과정에 투영됐다고 생각합니다.”
 
  김명곤은 대학 시절 인간문화재 박초월 선생에게 직접 판소리를 배웠다. 배움이 10여 년 이어졌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뿌리 깊은 나무》의 기자로 전국 각지에 흩어진 여러 광대와 소리꾼을 만났다.
 
  《뿌리 깊은…》은 당시 드물게도 우리 문화에 대한 애정 어린 탐색을 고수한 잡지로 기억된다. 기자를 그만둔 뒤에도 독어교사와 연극배우, 자유기고가를 오가며 광대와 소리꾼을 계속 취재했다.
 
  “제가 만났던 명인·명창의 삶은 고통스런 것이었어요. 대개 비천한 노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분들에게, 설날 떡방아 찧을 쌀이 없다고 바가지를 긁는 아내에게 거문고로 방아타령을 지어 들려주었다는 백결 선생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 이 시대에도 그런 예술혼이 필요할까요.
 
  “그럼요. 현실은 비참하고 남루하고 괴롭지만 지금도 자신의 기예(技藝)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는 예술인이 있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평생을 갈고 닦아야 명인이 될 수 있어요.”
 
  ― 만났던 명인·명창들의 공통점이 있을까요.
 
  “하나같이 자기만족을 몰랐다고 할까요? 언젠가 박녹주 명창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아마 여든 무렵이었을 거예요. ‘내가 소리를 한 지 60년이 되어 가는데 이제 조금 귀가 뚫리려 하니까 숨도 차고 곧 골로 간다’고요. 마지막 강산제 명창인 정권진 선생은 ‘어렸을 때 전봇대 같은 뜻을 세웠는데 이제 죽을 날이 가까워 보니 이쑤시개만큼도 못 이루었다’고 하셨지요.”
 
 
  처음으로 배우 김명곤을 세상에 알린 영화 〈바보 선언〉
 
이장호 감독의 〈바보 선언〉(1984)에서 김명곤은 ‘똥칠’이라는 바보역을 맡았다. ‘똥칠’은 뚱보 운전사(이희성 분), 창녀(이보희 분)를 따라다닌다.
  기자는 젊은 시절 ‘기자 김명곤’이 썼던 글을 도서관에서 찾아보았다. 판소리 명창 정광수와의 인터뷰 한 대목을 소개한다.
 
  “암자 뒤의 절벽 위에서 소리 공부를 죽으라고 했어. 이를 갈고 구슬땀을 흘리면서 소리를 지르면 소리가 살살 터져 나와. 그렇게 한나절 하고 나면 계란 덩어리 같은 소리가 나오는디 그 소리를 지름 상성이라고 혀. 한없이 높은 소리가, 생전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가 어디에선가 튀쳐(뛰쳐) 나와. 그 소리에 미쳐. 제 소리에 제가 반해 가지고 아침부터 절벽 끝에 있는 석대에 올라가 뒷짐 지고 소리를 혔어.”(김명곤이 쓴 〈정광수, 옛법을 존중하는 귀족적인 소리 광대〉 중에서)
 
  “판소리허는 것은 팔자 속이여. 타고나야 돼. 제가 제 소리에 반해 가지고 죽자사자 소리를 하면 득음이 되고, 꿈에도 바라던 소리가 목에서 튀어나오면 부귀공명이 문제가 아니여. 그러게 옛날에 아편 하시던 어떤 분이, 나는 약으로 아편쟁이인데, 너는 소리로 아편쟁이로구나, 하고 말하더군. 그만큼 미쳐야 돼.”(〈한승호, 오기로 버틴 외길 60년〉 중에서)

 
  글 속에 경멸과 천시를 이겨낸 광대의 예술혼이 사실적으로 담겨 있었다. 사투리 맛을 살린 표현도 인상적이었다. 그 시절, 김명곤은 명창뿐 아니라 상여 소리꾼, 소거간꾼, 태껸 명인, 고수와 장구재비 등 수많은 예인을 만났다.
 
  “잊혀가는 전통을 발굴해 현대화시키고 기록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어요. 그땐 잡지가 지닌 문화적 영향력이 상당했던 시절이기도 했고요. 영화 〈서편제〉의 ‘유봉 역’도 그런 과정을 겪어서 표현할 수 있었죠.”
 
  ‘서편제 장관’은 우연히 영화 흥행으로 붙여진 이름이 아니었다. 영화 속 남도의 흙먼지 나는 들길을 걸으며 판소리 가락에 춤추던 가객의 모습은 ‘만들어진’ 이미지가 아니었다.
 
  〈서편제〉 이야기는 이쯤에서 멈추고 연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젊은 시절 출연한 영화는 대개가 상업성 있는 작품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저와 함께 작업한 이장호·배창호 감독은 흥행 실패를 예견하면서 과감하게 실험극에 도전할 때 저를 기용했지요. 〈서편제〉도 흥행영화로 처음부터 기획됐다면 제가 끼어들 수 없었을 거예요. 제작비 5억 원 버리는 셈치고, (예술영화로) 기획했고 저를 캐스팅한 것이죠. 배우로서 제 운명이 그랬어요.
 
  저는 한 번도 흥행배우를 꿈꾸지 않았습니다. 스타가 되겠다는 생각은 언감생심이었어요. 저는 영화계의 아웃사이더였으니까요.
 
  배우 김명곤을 처음 세상에 알린 이장호 감독의 〈바보 선언〉(1984) 역시 이 감독이 자포자기 심정으로 만든 작품이지요. 원래 의도했던 시나리오가 검열에 걸리자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독립영화처럼 만든 작품이에요. 그 영화에서 저는 뚱보 운전사(이희성 분), 창녀(이보희 분)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똥칠’이라는 바보 역이었어요.”
 
  〈바보 선언〉이 우여곡절 끝에 완성됐으나 해가 다 가도록 극장에 걸리지 못했다고 한다. 해가 바뀌고 다른 영화가 일찍 종영되는 바람에 땜질용으로 단성사에서 상영됐는데 그게 대박을 터뜨렸다.
 
  “검열로 고통받던 이장호 감독이 죽고 싶다며 만든 작품이 〈바보 선언〉입니다.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 같은 슬랩스틱코미디의 스타일을 취한 이 영화의 양식적 실험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영화라는 것을 망쳐놓고 싶다’던 이 감독의 위악적인 태도에서 나온 것이었어요.”
 
 
  “솔직히… 연기, 점점 모르겠다”
 
  배우는 실업과 취업을 되풀이하는 직업이다. 선택하기보다 선택받으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배우의 삶은 정처 없이 떠다니는 유목민과 다르지 않다.
 
  “배우는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아요. 한 작품이 끝나면 다음 작품을 기다려야 하죠. 기다림의 시간을 잘 보내야 취업도 잘 됩니다. 기다리며 공부하고 훈련하며 준비하는 삶이 배우의 삶이에요. 남들이 볼 때 배우는 백수에 가깝지만 놀 때 바쁜 게 배우입니다.”
 
  ― 연기는 나이에 비례합니까.
 
  “나이가 들었다고 연기가 완성되는 게 아니더군요. 지금도 모자라는 게 너무 많아요. 판소리 스승이 하신 말씀(전봇대 같은 뜻을 세웠으나 이쑤시개만 한 뜻도 못 이뤘다)이 그저 겸사의 표현이 아니에요. 솔직히… 연기를 점점 모르겠어요. 초심자 시절, 순수한 열정이나 감정이 사라져 가면서 형식적인 연기를 하는 듯해요. 내심 ‘이러면 안 되지’ 하고 다짐하지요.
 
  제가 만난 명창도 그러셨어요. 명창은 테크닉을 다 익힌 분들입니다. 그러나 소리의 본질은 테크닉이나 나이와 상관이 없어요. 여전히 본질에 다가서려 몸부림쳐요. 저는 지금도 연기 공부를 합니다. 다른 배우의 연기를 열심히 관찰합니다. 요즘의 연기 트렌드가 뭔지 유심히 살핍니다. TV 드라마 연기는 많이 안 해봐서 사실상 신인에 가까워요. (웃음) 젊은 배우를 보면서 섬세하고 현대적인 정서랄까… 그런 감각을 배워요.”
 
 
  “서편제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
 
  김명곤은 “연기의 본질은 같아도 영화나 연극, TV 같은 장르나 매체에 따라 연기 방식이 다르다”고 했다.
 
  “확실히 다릅니다. 카메라의 속성, 무대라는 틀이 다르기 때문이죠. (저는) 젊은 시절, 연극 연기에 적응이 돼서 영화 연기를 못해 애를 먹었어요. 어디서 카메라가 도는지 몰랐어요. TV 연기는 영화 연기와 또 다릅니다. 찍는 방식이나 화면의 크기가 달라요. TV 연기를 영화적으로 하면 어색해요. 섬세한 연기가 필요한데 확실히 TV 드라마에 익숙한 전문배우들이 잘해요. 영화는 화면이 대형이다 보니 연기가 대형 화면에 맞는 약간의 ‘뭔가’가 필요해요. 미묘한 시스템의 차이랄까, 한순간의 차이랄까. 커트 커트로 찍는 것에 대한 빠른 적응이 필요해요. 아무래도 연극에 훈련된 사람은 연극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죠.”
 
  연기 방식이나 발성, 화술, 동작술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10여 년 전 영화나 드라마의 배우 몸짓이나 발성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배우는 연기방법론에 따른 그 시대의 ‘보조과학’이 필요하다.
 
  “작년 말 방영된 tvN의 〈명불허전〉을 찍을 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 극은 일반적인 사극의 무거운 이미지를 경쾌한 코미디 느낌으로 해석한 작품인데 아무래도 제 대사톤이 조금 무거운 느낌이 들었습니다. 연출 감독도 ‘중후하고 무거운 이미지 대신 가벼워야 하는데 걱정…’이라고 했대요. 그래서 젊은 배우의 연기 트렌드를 익히며 약간 가벼운 듯 미묘하게 맞춰가는… 그러다 보니 새롭게 연기 공부를 하게 됐어요.
 
  연기에 해답도, 정답도 없어요.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 작품과 캐릭터에 맞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 언젠가 ‘〈서편제〉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하셨지요.
 
  “〈서편제〉는 제게 특별한 작품이지만 솔직히 다른 연기도 보여주고 싶어요. 고집스럽고 타협하지 않는 모습 말고 부드럽고 소프트한 현대인의 감성도 보여주고 싶은데 그런 작품이 제게 안 들어와요. 저를 캐스팅하는 역할도 강한 캐릭터가 대부분입니다.”
 
  1760만 관객이 본 〈명량〉(2014)의 왜군 장수 ‘도도’도 김명곤의 카리스마가 두드러진 캐릭터다. 자신을 자극하는 구루지마(류승룡 분)의 공격에도 도도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순신(최민식 분)과 구루지마의 전쟁을 멀리서 지켜보며 다급해 하지 않고 때를 기다린다. 류승룡과 대조되는 연기가 인상적이었다.
 
  2015년 KBS 2TV 수목드라마 〈왕의 얼굴〉에서 보여준 송내관 역도 기억에 남는다. 김명곤의 내시는 원로배우 오현경이 보여준 내시와 다르다. 오현경의 내시가 억양 없는 목소리로 대사를 길게 이어가는 왜소한 남성상이라면, 김명곤의 내시는 넉넉한 인품과 지혜를 지닌 다소 비밀스런 인물이다. 추창민 감독의 영화 〈광해〉(2012)에서 보여준 조내관(장광 분)의 이미지와 닮았으나 좀 더 강렬하다고 할까.
 
  “어떤 내시로 표현할까 고민이 많았어요. 기존에 TV나 극에서 보던 내시는 목소리가 가늘고 간사한 느낌이었어요. 《뿌리 깊은 나무》 기자 시절, 취재했던 내시를 다시 찾아봤어요. 조선시대에는 선이 굵고 남자다운 내시도 많았다고 해요. 기골이 장대하고 무장인 내시, 학문을 닦은 내시도 있었고 이들은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았어요. 우리가 알던 내시상(想)과는 달랐어요. 경험과 혜안을 지닌 내시를 표현하려 했는데, 극중 제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지 연출감독과 상의하기도 했죠.”
 
 
  “연극을 운동 차원에서 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김명곤은 마당극 운동 1세대 배우로 1986년 극단 아리랑을 창단했다.
  ― 연기자는 천품(天稟)을 타고나야 성공할 수 있나요.
 
  “무용이나 악기는 기본기를 익혀야만 하지만, 연기는 다릅니다. 다섯 살 아이가 감동적인 연기를 할 수도 있고, 80세 베테랑 노배우가 엉터리 연기로 망신을 당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연기는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표현하는 행위잖아요. 테크닉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게 연기 속에 있어요.
 
  어떤 배우는 타고났다고 할 만큼 뛰어난 이가 있어요. 그러나 모든 배우가 타고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후천적 노력으로 성공한 배우도 있어요. 물론 노력해서 다 되는 것도 아니에요. 타고난 것이 어느 정도 있고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명인·명창 선생님들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재주 많은 이는 끈기가 없다’고. 판소리에 타고난 이들은 하다가 중도에 포기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혼이 나면서도 득음을 한 명창들은 타고났다기보다 갈고 닦은 분들인 것 같아요.
 
  연기도 판소리처럼 기예의 한 갈래입니다. 재능이나 감이 없으면 고생길을 걷게 돼요. 그렇지만 10년, 20년 하다 보면 나름대로 노하우와 스타일이 생겨 좋은 연기자가 될 수 있어요. 20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좋은 연기자가 됩니다.”
 
  ― 버티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버텨내면 좋은 배우가 되나요.
 
  “얼마만큼 성실하게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어떤 배우는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어요. 애써서 기른 턱수염을 고집합니다. 극중 역할이 턱수염과 안 어울리는데도 안 깎아요. 배우는 끊임없이 깨뜨리고 변신하려고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그걸 두려워하지 않아야 해요. 자기 취향이나 개성도 극중 인물에 맞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게 어렵습니다.”
 
2002년 3월 국립극장장 시절의 김명곤. 오른쪽은 아나운서 황수경.
  20~30대 무렵 김명곤은 영화에선 예술극 단골배우였지만 연극에선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진보 성향의 배우였다. 마당극 운동 1세대 배우로 극단 아리랑을 창단한 일도 있다. 민주화 투쟁으로 체포된 양심수의 문제를 재판 형식으로 다룬 연극 〈인동초〉를 직접 쓰고 연출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이념의 무게를 내려놓고 인간 영혼에 천착한 작품으로 나아갔다.
 
  “결혼한 지 2년 반쯤 지난 1989년 5월 ‘아시아의 외침(Cry of Asia)’이란 작품의 유럽순회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아시아 10개국 배우들이 유럽 각지를 도는 대장정인데 저는 한국 대표로 참여했어요.
 
  8개월여 동안 유럽의 연극인을 만나 공연하다 보니, 진보적 연극운동이랄 수 있는 유럽의 68세대가 추구했던 ‘소극장 운동’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러나 예술적으로 성장한 극단은 여전히 활동하고 있더군요. 우리도 그런 시기가 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한국으로 돌아와 단원들에게 얘기했어요. ‘연극을 운동 차원에서 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요. 그런 점에서 (민예총이) 기존 연극협회와 대립할 이유도 사라졌다고 느꼈어요. 이후 연극협회에 가입하고 서로 배우 교류도 했습니다. 같이 연극했던 이들 중에는 ‘저 친구 왜 저러나’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좌파적 시각에서 예술활동을 재단하면 예술의 폭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오랫동안 진보적인 연극 활동을 했지만 연극을 정치적으로 연결시키려는 것과는 선을 그었어요. 연극을 통해 이념적 목소리를 낼 수는 있지만 연극을 정치선동의 도구로 여겨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저 역시 (연극으로) 정치홍보를 하거나 선전을 하는 데 낀 적은 없습니다. 물론 그런 요청은 있었지만…”
 
 
  김명곤의 조연배우론은…
 
2016년 10월 13일 연극 〈배꼽춤을 추는 허수아비〉의 연출을 맡은 김명곤이 구로아트밸리 연습장에서 막바지 점검을 하고 있다.
  가끔 김명곤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5막5장에 나오는 극중 맥베스의 한탄을 떠올리곤 한다. 맥베스의 대사 중 한 대목이다.
 
  “인생이란 한낱 걸어 다니는 그림자, 가련한 배우. 무대에 서 있을 때는 활개 치고 떠들어대지만, 얼마 안 가서 영영 잊히지 않는가.
 
  바보들의 이야기. 광포와 소란으로 가득하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야기….”
 
  김명곤은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정말 인생은 바보들의 이야기일까.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주인공이고 싶지만 영원한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요. 어떤 배우는 주인공을 못 하면 배우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배우에게 전성기가 있으면 슬럼프도, 몰락기도 있어요. 그게 우리 삶이니까….
 
  어떤 배역이든 그 역할이 주어질 땐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요. 싫지만 받아들이는 것이 인생입니다. 또 주인공만이 배우의 목표가 돼선 안 됩니다. 어느 배우도 영원한 스타는 없어요.
 
  흔히 배우를 하겠다는 사람들은 화려함, 조명, 아름다움, 빛, 인기를 원하죠. 그러나 무대에서 2시간 동안 빛을 받기 위해선 2000시간의 어둠이 필요합니다. 연습실이나 극장은 대개 어두운 곳이죠. 그 어둠을 못 견디는 사람은 2시간의 빛을 받을 수 없습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이 환합니다. 오직 빛만 생각하고, 어둠을 못 견디는 배우는 배우가 될 자격이 없어요.
 
  그 빛도 막이 내리면 무대는 다시 어두워집니다. 혼자 남겨지는 게 배우의 인생이죠. 20대와 30대의 김명곤은 정말 어둠이었어요. 솔직히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혼자 견딜 수는 있지만 가족까지 함께 고통받는 게 괴로웠어요. 그러나 현실은 제게 고통과 환멸을 주었지만 인생은 신비한 이야기로 가득 찬 마술 상자를 보여주기도 했어요.
 
  예술은 천형(天刑)과 같아요. 배우는 어쩌면 무당 노릇이고, 그 삶이 천형이기도 해요. 하늘에 속하는 사람이다 보니 순간의 행복을 선택하는 삶이죠. 행복한 예술가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요. 배우의 길은 늘 빛과 어둠이 함께 갑니다. 어둠이 찾아왔을 때 용기를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야 해요.”
 
  어쩌면 그는 배우로서 능력보다 예술 CEO로서 능력이 더 검증됐는지 모른다. 2000년 국립극장장에 발탁, 재임 6년 동안 국립극장의 재정자립도는 7.3%에서 17.9%로 껑충 뛰어올랐고 극장 수입은 3배 가까이 늘었다. 2005년 연봉이 대통령과 총리에 이어 서열 3위였다. 그 덕에 문화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됐다.
 
  장관에서 물러난 뒤 여전히 배우로, 연출가로 무대에 서고 있다. 아서 밀러의 고전 〈세일즈맨의 죽음〉을 우리 시대 가장의 이야기로 재탄생시킨 〈아버지〉(2012)를 직접 제작과 번안·연출했다. 또 고대소설 ‘심청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퓨전 마당극 〈아빠 철들이기〉(2015)도 기억에 남는 김명곤산(産) 작품이다. 당시 예술감독 겸 심봉사 역을 맡았다.
 
  “젊었을 때는 사회적 이슈를 담은 작품에 출연하고 연출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좀 더 현실적인 삶 안에서 느끼는 인간문제에 주목하게 됐어요. 〈아버지〉도 미국 작품 〈세일즈맨의 죽음〉이 아닌 한국적 정서로 어떻게 변화시킬지 신경을 쓰며 만들었어요. 물론 어떤 연출가는 원작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즐겨 하는 분도 있지만 저는 우리가 공감하는 삶의 이야기로 변화시키는 데 관심이 있어요. 언젠가는 〈파우스트〉를 새롭게 쓰고 싶어요. 독일의 〈파우스트〉가 아닌 한국의 〈파우스트〉로….”
 
  또 〈동편제〉를 영화로 제작하는 꿈도 내비쳤다.
 
  “서편제의 정서는 계면조(슬픈 가락)의 소외되고 여성적인 느낌이지만 동편제는 남성적이고 격렬하며 웅장합니다. 동편제는 명창 송흥록을 시조로 전승돼 왔는데 관기(官妓)인 맹렬이와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져요. 1780년쯤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송흥록은 당대 명창 중의 명창으로 요즘으로 치면 가왕(歌王)과 같습니다. 스무 살 무렵, 쟁쟁한 선배들을 물리치고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대구에서 맹렬이란 기생과 사랑에 빠집니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서편제와 다른 이야기로 그려내고 싶어요. 그날이 언젠가는 오겠죠?”⊙
 
김명곤의 배우론
 
  “배우는 심해(深海)를 표류하는 잠수부”
 

  김명곤은 배우를 ‘잠수부’로 표현한다. 심해(영혼)를 헤엄치며 ‘뭔가’를 찾으려 한다. ‘뭔가’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뭔가’를 찾을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기약이 없다. 영원히 표류하며 혼자 헤매는 고독한 작업이다. 그게 배우의 운명이다. 김명곤의 말이다.
 
  “연기는 누구도 가르쳐 줄 수 없다. 방법을 가르칠 수 있지만 그 방법을 배웠다고 연기를 잘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 끊임없이 영혼과 육체를 파고들어야 한다. 배우는 공부할 게 한도 끝도 없다. 육체적 단련은 물론 심리학과 철학 같은 영혼에 대한 학습도 필요하다. 배우가 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세상은 인간이 탐구해야 할 영혼의 세계다. 인간의 본성, 영혼에 대해 공부를 하다 보면 연기라는 미지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특히나 자기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된다.
 
  극중 역할을 어디까지 파고들어야 할까. 답이 없다. 살인자의 역할을 맡게 되면 진짜 살인자의 심리상태와 똑같이 나의 영혼과 인격을 변화시켜야 할까. 적어도 ‘나’라는 의식은 남겨둬야 할까. 어쩌면 ‘나’의 의식이 튼튼하지 않으면 극중 역할에서 빨리 빠져나오지 못해 헤매는 경우가 있다. 몇몇 배우는 현실의 ‘나’와 극중 ‘나’ 사이에서 헤매다가 자살을 택했다. (극중) 역할의 감성에 너무 깊게 젖어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를 의식하며 표현하는 것이 배우의 역할이다. 극중 인물에서 빠져나오고 들어가는 훈련, 결국은 자기 영혼과 인격을 잘 다스려야 한다. 잘 지켜내지 않으면 휘말릴 수 있다.
 
  배우는 일종의 무당과 같은 존재다. 자신의 영혼을 끊임없이 전이시키고 빠져나오고, 표현해야 하는 불쌍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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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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