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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잘못된 소신도 나라를 망친다 | ‘한일합방’ 앞장선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

일본과의 ‘합방(合邦)’ 통한 문명화 추구했던 친일매국노

글 :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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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란에 가담… 손병희의 측근으로 ‘진보회’ 결성
⊙ 송병준과 일진회 만들어 일본군 지원, 보호국 주장, 의병토벌 협력, 고종 퇴위 시위 등 친일행각
⊙ “사직과 백성을 영원히 보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실로 일본과 한국이 합방하는 데 달려 있을 뿐”
⊙ 망국 2주 후에 일진회 해산당해… 죽기 전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걸까요?”
한일합병에 앞장선 일진회장 이용구.
  ‘친일파(親日派)’의 대명사 이완용(李完用)보다 일본이 ‘진짜 친일파’로 여기는 사람이 일진회(一進會) 회장 이용구(李容九·1868~1912)이다. 우리의 이완용에 대한 ‘친일파’라는 표현은 ‘매국노(賣國奴)’라는 의미다. 하나 일본의 이용구에 대한 ‘친일파’라는 인식은 ‘지사(志士)’라는 뜻이다. 우리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얘기지만 말이다.
 
  이용구는 1868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고려 벽진상군 이총언의 32대손이지만 이용구가 태어났을 때 그의 집안은 몰락한 상태였다. 13세 때 아버지마저 죽었다. 한때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노모와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했다. 그럴 때 사람은 세상을 뒤집고 싶어 한다. 1890년 이용구가 동학(東學)에 입교(入敎)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는 손병희(孫秉熙) 등과 함께 동학의 2대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에게 배웠다. 1894년 동학란이 일어났다. 이용구는 전봉준(全琫準)의 호서군(湖西軍)에서 활동했다. 공주전투에서는 일본군과 싸우다 총상을 입었다. 동학란이 실패한 후 이용구는 투옥됐으나 용케 사형(死刑)을 면하고 풀려났다.
 
  최시형이 처형된 후 손병희는 동학조직을 재건하려 했다. 하지만 ‘동학도=역도(逆徒)’로 치부되던 상황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손병희는 동학 재건을 위해 세계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01년 3월 손병희는 동생 손병흠, 이용구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손병희는 이상헌(李祥憲)이란 가명을 쓰며 조선의 갑부로 행세했다.
 
  당시 손병희는 박영효·오세창·권동진 등 개화파 망명객들은 물론 일본 각계 인사들과 교유(交遊)하면서 문명개화에 눈을 떴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손병희는 교토부(京都府)를 통해 1만 엔의 군사비를 헌납했다. 일본이 승리하고 한국의 내정을 개혁하면 동학 재건의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진보회
 
진보회장 이용구와 일진회장 송병준(왼쪽)은 일진회를 만들어 친일행각을 벌였다.
  손병희는 그해 3~4월경 이용구를 국내로 보내 평안도에서부터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하게 했다. 그해 9월 대동회는 진보회(進步會)로 개칭했다. 대동회나 진보회 모두 문명개화를 할 것을 주장하는 친일적 색채가 강했다. 진보회는 옛 동학 조직을 기반으로 지방조직을 구축해 나갔다. 1904년 12월 진보회의 회원 수는 11만7000여 명에 달했다.
 
  진보회가 세력을 확장하자 송병준이 만든 일진회(一進會)가 손을 내밀었다. 일진회는 1904년 8월 유신회(維新會)라는 이름으로 출범했다가 곧 일진회로 이름을 바꿨다. 일진회는 창립취지서에서 “일진은 일심진보(一心進步)할 주의(主義)”라고 밝혔다.
 
  일진회는 겉으로는 과거 독립협회에 참여했던 윤시병·유홍주·염중모 등이 주도했지만 그 뒤에는 일본군 통역관 송병준이 있었다. 송병준은 제12사단 병참감 오타니 소장을 비롯한 일본 군부가 뒷배를 봐주고 있었다. 일본 정계 요로에 폭넓은 인맥을 가진 극우단체 흑룡회(黑龍會)도 송병준을 후원했다.
 
  이런 배경에도 일진회는 한계가 있었다. 한성에만 3600여 명의 회원을 두고 있었을 뿐, 지방조직이 전무(全無)했다. 이게 송병준이 탄탄한 지방조직을 갖춘 진보회에 눈을 돌린 이유다. 진보회와 일진회 모두 강령이 흡사했다. 두 단체 모두 황실존중, 정부개혁, 인민의 생명·재산보호, 군정(軍政)·재정정리를 내걸었던 것이다.
 
 
  일진회의 탄생
 
  진보회와 일진회는 1904년 12월 2일 일진회라는 이름으로 통합했다. 이용구는 통합 전에 일진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동양의 일각에서는 단지 일본만이 먼저 문명의 길을 열어 기예를 발달시키고 활기를 배양하여 세계열강과 함께 서 있다. 금일 우리 한국 정부는 혼미의 와중에 있어 아직 개명의 진정한 길을 열지 못하고 구습(舊習)에 젖어 전제 위압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독(毒)을 삼천리에 흘리고, 쇄국(鎖國)하여 2000만의 생령(生靈)에 압정을 가하고 있기에, 외국을 모욕하는 일은 우리 자신에게 화(禍)가 미치고, 내정은 날로 이루어지지 못하며, 국세의 쇠퇴가 목전에 닥치고 있다. … 팔역(八域)에 격문을 날리자 한 번 외침에 백이 답하고 결사의 각오로 모여 여기저기서 단체를 만들었다. 이것은 일심(一心)의 진보라고 생각한다. 그 주지는 1일(日) 1보(步), 2일에 2보이니 일세(一世)의 백성을 1보의 지경에 나아가게 하는 일이다.〉(강창일, 《근대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
 
  송병준도 “500년의 포학한 정령(政令)에서 벗어나고, 우리의 생명재산의 안고(安固)를 도모하고, 다른 나라의 군사적 행동 또는 압박에 의한 병탄을 면하여 2000만 민중이 영원히 노예 상태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 2000만 민중이 문명의 세례를 받아 자자손손(子子孫孫) 영원무궁한 복지를 향수(享受)하도록” 운운하며 이에 화답했다.
 
  통합 초기 일진회는 중앙본회와 지방본회라는 이원(二元)조직으로 운영됐다. 중앙본회 회장은 윤시병, 지방본회 회장은 이용구가 맡았다. 송병준은 평의원장을 맡았다. 1905년 9월 일진회는 중앙조직과 지방조직을 일원화하는 조직 개편을 했다. 윤시병이 본부 회장, 이용구가 지방총장, 송병준이 평의원장을 맡았다.
 
 
  일진회, 자기 돈 써 가면서 일본군 지원
 
  일진회의 양대 모토는 ‘친일’과 ‘반(反)정부’였다. 일진회는 친일단체였지만 일종의 야당을 자임했던 것이다. 당연히 대한제국 정부는 일진회를 탄압하려 했다. 하지만 러일전쟁과 함께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이 일진회를 노골적으로 비호했다. 일진회는 이런 일본군을 위해 몸 바쳐 충성했다.
 
  일진회는 경의선 철도 공사와 일본군의 병참 지원에 회원들을 동원했다. 1904년 10월부터 1년 동안 경의선 공사에 동원된 일진회 회원 수는 14만9114명에 달했다. 흥미로운 것은 총 경비 14만9114엔 가운데 일본군이 이들에게 지급한 액수는 2만6410엔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차액 12만2704엔은 일진회원들이 부담했다.
 
  이용구와 송병준은 일진회 통합 이전인 1905년 6~10월 북진수송대라는 것을 조직, 일본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지원했다. 11만4500명이 동원됐다. 이들 중 49명이 죽거나 다쳤다. 북진수송대 역시 일본군이 부담한 비용보다 스스로 부담한 비용이 더 많았다. 총 경비 19만7750엔 가운데 일본군이 지불한 액수는 6만3530엔에 불과했다.
 
  일진회는 1904년 9월 18일 이용구와 송병준의 약속에 따라 ‘문명화 및 일한일체화(日韓一體化)에 대한 서약의 표시’로 일제히 단발을 단행했다. 103명의 일진회원이 시작한 단발운동은 곧 전국으로 번져 20여만명이 단발했다. 이 사건은 《대한매일신보》(1904년 9월 19일 자)에 보도될 정도로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일본의 보호국 되기를 자처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일진회는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1905년 11월 5일 일진회는 이용구 명의의 성명을 발표했다.
 
  〈지금 한일 양국의 관계를 옛날로 회복하고자 함은 마치 사자(死者)를 회생시키려는 것이니 그 성패는 자명하다. 만약 외국의 간섭을 거부하고 독립의 명실(名實)을 완전히 하고자 한다면 분연히 궐기하여 그 이유를 만국에 선언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방의 지도에 순응하여 문명을 진척시키고 독립을 유지함이 가하다. …
 
  한일 양국의 관계에 장래 어떤 변화가 있을지는 알 수 없더라도 가령 외교의 권한을 일본 정부에 위임하여 재외공사의 송환, 주한공사의 철퇴(撤退)가 있더라도 생길 문제는 무엇이겠는가. 이것을 논하는 자는 말하길 독립의 대권(大權)이 침해당하고 국가의 체면이 손상되며, 혹은 황망분주하며 망국의 탄식을 발하는 자도 있다. 하지만 이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니, 앞서 정한 한일의정서 중에 이미 외교의 일은 대소 없이 일본 정부가 추천한 고문관의 자문을 구한다고 명기하고 있으니, 만일 외교의 일을 전부 일본 정부에 위임하는 것과 그 차이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실체는 하나일 뿐 단지 형식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해외공사와 같은 것은 이름만 있는 허식이니, 차라리 우방 정부에 위임하여 그 힘에 의지하여 국권을 보유하는 것도 또한 폐하 대권의 선양이 아닐까. 내치의 일도 마찬가지로 선진 고문을 택하여 폐정(弊政)을 제거하고 민덕(民德)을 진취해야 한다. … 독립보호・강토유지는 대일본황제 조칙을 세계에 공포하신다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는 일심동기와 신의로써 우방과 교류하고 성의로써 동맹을 대하며, 그 지도 보호에 의지하여 국가의 독립과 안녕, 행복을 영원무궁하게 유지하고자 이에 감히 선언한다.〉(강창일, 《근대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
 
  이날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메이지(明治) 천황의 친서를 갖고 도쿄를 출발하던 날이다. 그해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됐다. 12월 22일 이용구는 일진회 회장으로 승진(?)했다.
 
 
  동학에서 축출되다
 
동학 3대 교주 손병희.
  이용구의 친일 행각에 손병희는 크게 놀랐다. 손병희도 한때 일본의 힘을 빌려 국정을 개혁하고 동학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이용구처럼 국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병희는 이용구를 불러 야단을 쳤다.
 
  “도대체 어쩌자고 보호선언이란 망동(妄動)을 하였느냐?”
 
  “현하(現下)의 대한은 보호독립이 시의(時宜)에 적합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보호를 받으면 독립이 아니요, 독립을 하면 보호가 불필요한 것인데, 어떻게 보호독립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선생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이토에게 ‘안네기’를 걸었습니다. 이제 적당한 시기에 제가 닥치기만 하면 이토는 나가 자빠질 것입니다.”
 
  “이토가 어떤 사람인데 ‘안네기’에 걸리겠나? 바로 그대가 걸리면 걸렸지.”
 
  그해 12월 1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했다. 이어 이용구 등 친일파 62명을 출교(黜敎) 처분했다. 이용구는 송병준 등과 함께 시천교(侍天敎)를 만들었다.
 
  을사조약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統監)으로 부임해 왔다. 을사조약에 따르면 통감은 대한제국의 외교관계 사무만 관장하게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내정 전반을 감독하는 사실상의 총독이었다. 통감 정치 아래서 일진회의 입지는 묘했다. 일진회의 후원자인 흑룡회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가 통감부 조사촉탁으로 부임했다.
 
  일진회도 우치다를 고문으로 영입했다. 당연히 일진회와 통감부 사이는 밀접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이토는 일진회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대한제국 정부와 함께 일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끊임없이 정부를 비판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일진회가 부담스러웠다.
 
  통감부 이전 주한일본공사관이나 일본 외무성도 같은 이유에서 일진회를 마뜩잖게 여겼었다. 일진회가 태생부터 조선주차군(駐箚軍)사령부를 비롯한 일본 군부와 가까웠던 것도 이토가 일진회를 안 좋게 본 이유였다. 통감부-대한제국 정부와 조선주차군사령부-일진회 간에 보이지 않는 대립구도가 형성됐다. 이는 일본 내에서부터 이어진, 이토 히로부미를 우두머리로 하는 문치파(文治派・문민그룹)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를 우두머리로 하는 무단파(武斷派・군부) 간의 대립이었다.
 
  하여튼 통감정치가 시작되자 일진회에 의탁해서 한자리하려는 무리가 나타났다. 덕분에 일진회는 ‘100만 회원’을 호언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일진회는 이런 힘을 배경으로 박제순(朴齊純) 내각에 ‘개혁’을 요구했다. 1907년 5월 일진회는 박제순 내각 탄핵문을 발표하고 내각 총사직을 권고했다. 총리대신 자리를 노리던 학부(學部)대신 이완용도 박제순을 흔들어댔다. 이완용은 일진회에 제휴의 손길을 내밀었다.
 
  1907년 6월 이완용 내각이 출범했다. 일진회의 송병준이 농상공부 대신으로 입각(入閣)했다. 이완용과 일진회의 송병준이 손을 잡았다고 해서 이완용-송병준 연립내각이라고 한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이완용을 ‘통감세력 및 송병준 내지 일진회 휘하에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일진회의 응견(鷹犬)’이라고 평했다.
 
  일진회 고문 우치다 료헤이는 “송병준이 없는 이완용 내각은 허세(虛勢)에 불과하다”고 했다. 송병준의 내각 진출과 함께 일진회원이 지방 관찰사(도지사), 군수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에 보은이라도 하듯 1907년 7월 헤이그밀사 사건이 일어나자 송병준은 일진회원 300여 명을 동원해 고종 퇴위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완용과 일진회의 갈등
 
송병준과 매국 경쟁을 벌인 이완용.
  이완용과 송병준의 밀월관계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완용은 형 이윤용을 궁내부 대신, 사돈 임선준을 내부(內部)대신, 처남 조민희를 평리원 재판장(대법원장)으로 앉히는 등 친위(親衛) 세력을 구축했다. 이완용과 가깝거나 먼 친척으로 요직에 나간 자가 20여 명, 벼슬살이를 하는 자가 60여 명이 넘는다는 소리가 나왔다.
 
  일진회는 “이완용이 정치 개선에 힘쓰지 않고 ‘가족정부(家族政府)’ 형성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완용도 반격했다. 이완용 내각의 법부대신 조중응은 보부상 단체를 동원, 일진회 해산운동을 벌였다. 이완용은 일진회에 프락치를 심어 조직 붕괴를 꾀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 이완용은 1908년 6월 개각(改閣)에서 송병준을 내부대신으로 영전(榮轉)시켜 화해 제스처를 보였다. 여기에 지방관 추천권까지 주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일진회 출신 관찰사는 4명에서 1명으로 줄어들었다. 화해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일진회는 개각 직후 특별평의원회를 열고 ‘총리대신 이완용 사직권고’를 내놓았다.
 
  하지만 이듬해 2월 순종(純宗)의 순행(巡幸) 때에 송병준이 불경(不敬)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대신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일진회 세력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관리에 임용된 일진회원은 군수 이하 지방직 2명에 불과했다.
 
  이용구는 1908년 9월 도일(渡日), 도쿄에 머물고 있던 통감 이토를 만났다. 이용구는 이토에게 이완용 내각 경질과 일진회에 대한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이토는 “한국 내각은 어떤 사람을 내세워도 그 치적에서 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며 이완용 경질을 거절했다. 이용구는 흑룡회를 통해 야마가타 아리토모 추밀원(천황의 자문기구) 의장,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육군대신 등 군부 강경파들과 접촉, 이토 경질운동을 벌였다.
 
  이용구는 이완용 내각을 붕괴시키기 위해 송병준에게 내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송병준이 거절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는 한때 불편해졌다. 이용구는 이완용 내각을 무너뜨리기 위해 반일 애국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서북학회와 함께 ‘3파 제휴운동’도 벌였다.
 
  이완용과 일진회의 갈등은 다분히 그들의 출신 계급상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완용은 흥선대원군의 친구이자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이호준의 양자로 개화기 최고의 엘리트 관료였다. 이용구는 몰락 양반의 후예였고, 송병준은 함경북도의 말단 관리와 기녀(妓女)의 아들이었다. 나라가 사실상 망한 상황에서도 이용구와 송병준은 양반 기득권을 공격해 댔고, 이완용은 기득권을 지켜보겠다고 안간힘을 썼다.
 
 
  일진회의 합방안
 
일진회원과 일본인들로 구성된 자위단. 앞줄이 무장한 일진회원들이다.
  이완용 내각과 갈등을 벌이는 동안에도 일진회의 친일행각은 계속됐다.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투쟁이 치열해지자 일진회는 일본군의 진압작전을 돕기 위해 1907년 11월 ‘자위단’을 결성했다. 1907년 5월에는 이용구가 의병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의하면 1907년 7월~1908년 5월 피살된 일진회원의 수가 9200명에 달한다고 한다.
 
  도를 넘는 친일행각에 일진회원들조차 환멸을 느껴 조직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수십 명씩 떼를 지어 이탈하는 회원이 늘어나자 이용구는 “합방 이후 정부 각 대신과 13도 관찰사 및 군수직은 모두 일진회원이 맡을 것”이라고 선전하기도 했다.
 
  이 무렵 일본 정부는 한국 병합(倂合) 방침을 결정하고, 그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1909년 7월 6일 일본 내각은 〈대한(對韓)정책확정의 건(件)〉을 결정하고 천황의 재가를 얻었다. 이에 앞선 1909년 6월에는 통감 이토가 일본의 추밀원 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진회는 이러한 움직임에 편승해서 재기를 도모했다. 이용구는 송병준과 20회 이상 편지를 주고받은 끝에 〈연방안(聯邦案)의 세목(細目)〉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대한국을 한국으로 칭할 것.
  - 황제를 왕으로 칭할 것.
  - 왕실은 현금(現今)대로 한국에 존립게 할 것.
  - 국민권은 일본 국민과 동등하게 할 것.
  - 일본 관리는 모두 고빙(雇聘)하여 현금보다 그 수를 감소케 할 것.
  - 인민의 교육, 군대를 진기(振起)시킬 것.
  - 본문제는 한국 정부로부터 직접 일본 정부에 교섭게 할 것.
 
  1909년 12월 3일 일진회 간부총회는 이를 바탕으로 다음의 내용을 일본 정부에 제의하기로 했다.
 
  - 한국 황실을 영구히 안전케 할 것.
  - 한국 정부는 이를 폐지하고 일본 정부가 정령(政令)을 행할 것.
  - 통감부를 폐지할 것.
  - 일진회만 남기고 다른 단체는 일절 해산할 것.
 
 
  이용구의 ‘정합방론(政合邦論)’
 
이용구에게 영향을 준 다루이 도키치의 《대동합방론》.
  이용구가 모델로 삼은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국왕을 겸하되, 헝가리는 자체의 정부와 의회를 갖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공동으로 대외(對外)정책을 결정하고 있었다. 한국의 정치체제를 일본과 통합시켜서 일본 천황을 한일 양국의 원수(元首)로 하되, 한국에는 ‘황제’에서 호칭이 격하된 왕과 정부를 두자는 것이 이용구의 당초 구상이었다.
 
  이용구는 1909년 11월 26일 대한협회 총무 윤효정과 만나 “30% 정도의 국권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를 70%대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황제를 왕으로 격하시켜 일본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용구는 자신의 주장을 ‘정치체제의 통합’이라는 의미에서 ‘정합방론(政合邦論)’이라고 불렀다.
 
  이런 생각은 이용구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일본인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가 1880년대부터 주장했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이 원조다. ‘대동합방론’은 “백인종의 침략에 대항하여 황인종이 단결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이 대등한 형태로 합방하여 ‘대동국’이라는 연합국을 세우고, 청나라와는 긴밀하게 제휴(합종・合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용구 스스로도 자신의 생각이 다루이에게서 온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다루이의 주장을 한 꺼풀 벗기고 보면, 일본 도쿄의 중앙정부가 한국의 외교・군사・입법권을 주관하고 한국은 그에 종속된 지방정부가 되어 완전한 지방자치를 실시케 하자는 것으로 대등한 주권행사가 아니다(한명근, 〈일진회의 대일인식과 ‘정합방론(政合邦論)’〉).
 
  송병준은 이용구와는 달리 ‘일본으로의 완전한 병합’을 추구했고, 그런 방향으로 이용구를 설득했다. 일진회 간부총회가 결의한 합방안이 ‘한국 정부의 폐지’ 등을 담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한합방청원서
 
  1909년 12월 4일, 이용구는 ‘100만 일진회원’의 이름으로 〈일한합방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와 함께 순종 황제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일한합방’을 촉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에게는 ‘청원서’를 보냈다. 〈일한합방성명서〉를 보면 이용구가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볼 수 있다.
 
  〈(前略) 갑오년(1894)에 일본(日本)은 일청전쟁(日淸戰爭)을 일으켜 거액의 전비를 소모하고 수만 명의 군사를 희생시켜 가면서 청나라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 우리 한국의 독립을 확고히 해주었다. 그런데도 정사를 어지럽히고 호의를 배격하여 이 만대(萬代)의 기초를 능히 지키지 못한 것은 우리 한국 사람들 스스로가 초래케 한 것이다. 마침내 일로전쟁(日露戰爭)의 인과를 초래하여 일본의 손해는 갑오년의 10배나 되었으나 우리를 러시아 사람들의 범 아가리에 한 덩어리의 고기로 먹히게 되는 것을 면하게 하고 온 동양 판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노력하였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이 선린주의(善隣主義)에 즐거이 따르지 않고 도리어 이 나라에 붙었다 저 나라에 붙었다 하는 폐단을 만들어내어 마침내는 외교권을 남에게 넘겨주고 보호조약을 체결함에 이른 것도 또한 우리 한국 사람들 스스로가 초래한 것이다. (中略)
 
  종래에 우리 한국은 전제 정치로 인민들의 권리를 속박하여 자유롭지 못하였던 민족인 까닭에 스스로가 채택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하여도 될 것이다. 과거를 돌이켜보고 앞날을 생각하면 안위존망(安危存亡)을 결코 민족의 책임으로 돌린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지난날의 교훈이 오래지 않은 만큼 그 전철을 밟지 말고 500년을 지내온 종사(宗社)가 폐허로 되고 2000만의 백성이 한 명도 남지 않을 비참한 지경에 빠질 것이다.
 
  오늘날이 어떠한 때인가? 외교권 한 가지를 이미 넘겨준 결과로 재정이 우리에게 있는가, 군기(軍機)가 우리에게 있는가? 통신이 우리에게 있는가, 법률이 우리에게 있는가? 이른바 조약이라는 것은 하나의 무용지물이 되고 나라의 기백과 백성의 목숨은 빠르게 죽음의 구렁텅이로 떨어져 가고 있다. 오늘에 지난날이 다시 오지 않고 내일에 오늘이 다시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제 오늘을 알지 못하는 만큼 오늘에 내일을 대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 우리 2000만 국민의 머릿속에 충만된 조국 정신을 떨쳐내어 큰소리로 외쳐서 지금 일본의 여론이 주창하는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하여 그 파란을 안정시키면서 우리 황제 폐하와 일본 천황 폐하가 하늘까지 통할 하나로 뭉친 정성으로 애달프게 호소하여 우리 황실을 만대에 높일 수 있는 기초를 공고히 하고 우리 백성들에게 일등 대우의 복리를 누리게 하며 정부와 사회가 더욱더 발전하게 할 것을 주창하여 일대 정치적 기관(機關)을 이룩하도록 하는 것이 곧 우리 한국을 보호하는 것이다.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우리 2000만 국민은 노예의 멸시에서 벗어나고 희생의 고통을 면하여 동등한 대열에 서서 완전히 새롭게 소생하여 앞을 향하여 전진해 보고 실력을 양성한다면 앞날의 쾌락을 누리고 뒷날의 살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은 확연 명료하다. (後略)〉(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 순종 2년 12월 4일)
 
 
  해산비 15만원 받고 일진회 해산
 
  이용구의 주장은 대한제국의 대내외 정책의 실패를 비난하면서, 한국민이 보호국 체제 아래서 일본제국의 지배를 받는 열등한 국민으로 남아 있느니, 차라리 대등한 자격으로 일본제국의 정치체제 아래 편입되어 들어가 문명개화의 길로 나가고 국민들로 하여금 ‘세계 1등국민’인 일본제국 국민의 지위를 누리게 하자는 것이었다.
 
  순종에게 올린 상소문에서 이용구는 “우리나라는 일본과 본래 같은 종족에서 나와서 아직까지 탱자와 귤만큼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 아니고 지금 서로 다투는 것도 심하지 않은 만큼 그 국경을 없애고 두 이웃 사이의 울타리를 아주 없애버려서 두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한 정치와 교화 밑에서 자유로이 노닐면서 다 같이 함께 살고 함께 다스려지는 복리를 누리게 한다면 누가 형이고 아우고를 가릴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올린 상소문에서는 “우리 대한국의 전도에 절실하고 우리나라 사직과 백성을 영원히 보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실로 일본과 한국이 합방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어쩌면 이용구는 조국의 자주독립보다는 민족의 문명개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폴란드・인도・베트남처럼 열강의 지배 아래 있던 주변부 국가 지식인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이었다.
 
  이상의 문건들에서 이용구는 ‘병합(倂合)’이 아니라 ‘합방(合邦)’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약소국인 대한제국이 강대국인 일본에 흡수 통합되는 ‘병합’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에서 통합되는 ‘합방’이라는 주장이었다. 물론 그것은 궤변이었다. 국호가 ‘대한국’에서 ‘한국’으로 바뀌고, ‘황제’가 ‘왕’으로 격하되는 데서부터 ‘대등’한 통합일 수가 없다.
 
  당연히 여론은 분노했다.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조차 “중외(中外)의 인심이 격분하여 술렁댔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일본제국은 이용구가 요구한 대등한 통합을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 사이에 체결된 ‘합병(合倂)조약’은 이용구의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일제는 ‘병합’이라는 말을 ‘합병’이라는 새로 만든 말로 포장했지만 본질은 한국의 식민지화였다.
 
  이용구와 일진회는 ‘합병’ 직후인 1910년 9월 12일 해산됐다. 일제는 ‘해산비’ 명목으로 15만원을 주었다. 1907년부터 이용구는 흑룡회 관계자들과 함께 한일합방 후에는 100만명의 일진회원을 만주로 이주시킨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 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었다.
 
  이용구는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1910년 ‘합병’ 직후 이용구는 데라우치 총독에게 “한국인들에게도 참정권을 달라”고 호소했다. 물론 이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이용구와 조선낭인 다케다 한시, 우치다 료헤이(오른쪽부터).
  일진회가 해산된 직후 이용구는 피를 쏟고 쓰러졌다. 폐병이었다. 그는 일본 효고현의 해안에서 요양을 하며 말년을 보냈다. 그는 죽기 석 달 전 흑룡회의 대륙낭인(大陸浪人) 다케다 한시(武田範之)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부터 평생 제가 추구한 것은 일신상의 사리(私利)가 아니라 국가의 대리(大利)와 인민구제의 소망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잘도 속임을 당하고 잘도 농락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2000만 인민을 일본의 최하등민(最下等民)으로 빠뜨린 죄도 소생에게 있습니다. 문을 나서면 이웃 사람들로부터 조롱받고, 욕 먹고, … 당국의 조치를 보면 우리를 대하는 것이 원수 대하듯, 거지 대하듯, 사냥 뒤의 개 대하듯 합니다. 소생을 보고 매국노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어도, 어찌 입이 있어 변명을 하겠습니까? 지하에 선인(先人)의 영혼이 있다면 거기에 간들 무슨 낯으로 그들을 대하겠습니까? 스기야마, 우치다, 다케다(흑룡회의 대륙낭인들-기자 주)가 속임을 당했는지, 송병준과 이용구가 사기를 당했는지, 태어날 때부터 바보인 소생은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1910년 4월 2일 대륙낭인 우치다 료헤이가 문병을 왔다. 우치다의 손을 잡고 이용구는 탄식했다.
 
  “나는 바보였나 봅니다. 혹시 속은 걸까요?”
 
  우치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뒷날 반드시 현달(顯達)할 것입니다. 오늘은 어리석은 자이지만, 뒷날 반드시 현자(賢者)가 될 것입니다.”
 
  이용구는 1912년 5월 22일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그를 버려두었던 일제는 그에게 훈일등서보장(勳一等瑞寶章)을 수여했다. 그의 관(棺)이 경성역(서울역)에 도착하자 경무총감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를 비롯한 2000여 명이 출영을 나왔다. 장례식에는 5000여 명이 참석했다.
 
 
  아들, “이용구는 나름대로 우국을 한 사람”
 
  이용구의 아들은 해방 후 오히가시 구니오(大東國男)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귀화했다. 다루이 도키치가 제창하고 이용구가 공감한 ‘대동국’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1980년대에 그는 칠십 노구를 이끌고 ‘이용구 재조명’ 작업에 매달렸다. 소설가 이병주를 만나 “이용구는 일본 정부가 작위를 주려 했지만 ‘만일 영작(榮爵)을 받는다면 그 영작을 바라고 나라를 판 놈이라고 해도 나는 변명할 수가 없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동지가 참기 어려운 고난을 겪었는데 나만 영작을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거절했다”면서 “이용구는 나름대로 우국(憂國)을 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이용구는 동학당의 두령에서 일본의 문명개화를 추종하는 개화론자로 변신하고, 당대 최대 규모의 대중조직의 지도자로 부상했다가 결국 ‘일한합방’까지 변신을 거듭했다. 일제에 버림받고 쓸쓸히 죽는 데서는 ‘비극성’마저 느껴진다. 일부 일본인들이 이용구를 ‘지사’로 추앙하려 드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이용구를 ‘현자’로도, ‘나름대로 우국을 한 사람’으로도, ‘지사’로도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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