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藝家를 찾아서

시대와 불목(不睦)한 위대한 화가 고암 이응노의 후손들

“벽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생동감이 동양화”(이응노)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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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한국적인 미(美)를 그리다 도불(渡佛) 후 세계적인 추상화가로 이름 남겨
⊙ 고학으로 그림을 배우다 영친왕의 서화 스승(김규진)에게 그림 배워
⊙ 6·25 당시 헤어진 양아들(이문세) 만나러 동베를린(동백림) 갔다가 2년 6개월간 수감
⊙ 본처인 박귀희는 충남 예산 수덕사 밑에서 수덕여관 운영… 평생 수절하며 남편 기다려
이응노 화백의 후손들. 오른쪽부터 고암의 손녀 이경인, 손자 이종진, 손자며느리 배정희씨.
  고암(顧庵) 이응노(李應魯·1904~1989) 화백은 일제의 억압, 6·25의 상흔, 분단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온몸으로 받아낸 ‘예외적’ 인물이다. 시대와 불목한, 그러나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로 기억된다. 사군자와 서예로 가장 한국적인 미를 그리다 도불(渡佛) 후 세계적인 추상화가로 이름을 남겼다.
 
  1967년 동백림(東伯林) 사건에 연루돼 ‘이응노’란 이름은 한때 국내에서 금기시됐지만 그의 그림은 프랑스에서, 유럽의 화단에서 더욱 조명을 받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일 때 그림을 그리고 싶어 잉크를 대신해 간장으로 화장지에 데생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념의 잣대로 그의 일생을 바라보기에는 고암이 남긴 자취가 너무 크다.
 
  고암은 190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예산에서 자랐으며 고학으로 그림을 그리다 구한말 영친왕의 서화(書畵) 스승이자 당대 명필이던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1868~1933)의 제자가 되어 사군자를 배웠다. 33세 때인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이번에는 서양미술을 배웠고 남화계(南畵界)의 대가로 꼽히는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桂月)의 문하에 들어갔다.
 
  55세 때인 1958년 국내 화단을 떠나 독일을 거쳐 프랑스 파리에 갔다. 한때 그의 제자였던 박인경(朴仁京·1926~)과 동행했다. 동백림 사건에 이어 백건우·윤정희 납치 미수사건(한때 공안당국은 박인경을 ‘북한공작 협조자’로 보았으나 이후 처벌하지 않았다. 대공(對共)혐의가 없는지, 아니면 공소시효가 지난 것인지 알 수 없다)에 연루되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던 이응노는 1989년 1월 10일 새벽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사망한 날은 고국에서 그를 재조명하는 작품전이 열린 날이었다. 무엇이 그의 심장을 멎게 한 것일까.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었을까.
 
  이응노의 도불 후 한국에 남은 이응노의 본처 박귀희(朴貴姬·1909~2001)는 예산 수덕사 밑에서 수덕여관을 운영하면서 수절하며 남편을 기다렸다. 2001년(92세) 노환으로 사망했다.
 
 
  전의 이씨(全義李氏) 집안 이야기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이응노 화백은 구속됐다. 1심에서 징역 5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사진은 법정에서 고암의 모습.
  이응노는 시골 서당 훈장이던 이근상(李根商)의 5남1녀 중 넷째로 알려졌다. 그러나 전의 이씨(全義 李氏) 가계는 훨씬 복잡하다. 이근상은 풍양 조씨와의 슬하에 3남, 김해 김씨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다. 이응노의 친모는 김해 김씨다. 8남매 중 2남이 일찍 사망해 5남1녀만 호적에 올랐다고 한다. 필노(弼魯)·종노(從魯)·봉노(鳳魯)·옥노(玉魯·딸)·응노·흥노(興魯) 순이다.
 
  고암의 윗대 어른은 3대에 걸쳐 서당을 운영한 보수적인 집안이다. 이응노가 화가로 이름을 알리자 더러 집안 내에 예술가가 배출됐다. 응노의 손위형인 봉노의 아들 이강세(李綱世·1946~)는 현재 도예가로 활동 중이다. 이응노의 권유로 회화에서 도자기로 전공을 바꿨다고 한다. 그는 고암이 타개하기 한 해 전인 1988년 파리에서 고암과 도화전을 열었다. 고암의 그림으로 만든 이강세의 도자기 작품이 여럿 된다.
 
  또 막내동생 흥노의 아들 이희세(李稀世·1932~2016)도 화가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그는 홍대 미대를 나와 미술교사를 하다가 1964년 8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1966년에는 제1회 파리 개인전을 열었다. 동백림 사건으로 숙부(이응노)가 구속되자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응노는 16세 때인 1919년 고령 박씨인 박귀희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 오래도록 자식이 없자 둘째형 종노의 차남 문세(李文世·1923~1996)를 양자로 데려왔다. 이문세는 권채원(權彩媛·1926~2017)과 결혼해 1남1녀를 낳았다. 이문세는 6·25 당시 월북해 북한 사리원 중학교에서 교감으로 정년을 했다고 한다.
 
  동백림 사건은 이응노가 한국전쟁 당시 소식이 끊겼던 아들 문세를 만나기 위해 동백림, 그러니까 동베를린에 간 것이 화근이 돼 일어났다. 이문세는 1996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분단의 상흔이 가족사에 드리우다
 
  기자는 이응노의 양아들인 이문세의 자식인 이경인(李敬仁·70)씨와 이종진(李鍾震·68)씨를 2017년 11월 28일 성남시 분당에서 만났다. 경인씨는 자신의 이름을 응노 할아버지가 지어 주셨다고 했다.
 
  “(경인) 제 이름이 공경할 경, 어질 인 자를 씁니다. 할아버지가 지어 주신 이름인데, 무슨 여자 이름을 ‘경인’이라고 지으셨을까 그랬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 보니까 그 이름이 참 좋아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어질게 대하고 … 응노 할아버지가 지어 준 이름대로 살려 합니다.”
 
  “(종진) 저는 (이름이) 쇠북 종 자에 진동할 진인데 종이 우레와 같이 울린다는 뜻이죠. 얼마나 시끄럽겠어요? 제가 젊은 시절엔 좀 시끄러웠어요. 하하하.”
 
  이경인씨는 숙명여대 불문과를 나왔다. 불어를 전공한 이유는 프랑스에 정착한 응노 할아버지 때문이다. 그녀의 남편 정상구(鄭相九)는 아주대 명예교수다. 서울대와 베를린공과대학을 나왔다. 그는 독일유학 중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이응노와 함께 옥고를 치렀다. 경인씨의 말이다.
 
  “동백림 사건에 재독 음악가 윤이상과 함께 응노 할아버지가 연루되셨잖아요. 그때 유럽에 유학 중인 박사(학생)가 34명이었어요. 남편이 그들 중 한 명입니다. 당시 베를린공대에서 기차를 타고 조금만 가면 동독이었대요. 거기 가면 담배나 카메라 같은 공산품을 싸게 살 수 있고, 평양냉면도 먹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같은 공대생(임석훈)의 권유로 두 번 (동독에) 간 모양이에요.
 
  이후 남편은 미국으로 건너와 워싱턴대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데 어느 날 중앙정보부에서 찾아왔대요. ‘동독에 두 번 간 것을 증언해 주면 좋겠다’면서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어 주더랍니다. ‘이번 기회에 부모님도 잠깐 뵙고 오라’는 말까지 더해서 말이죠. 그런데 응노 할아버지처럼 한국에 돌아가자마자 바로 구속된 것이죠.
 
  그때 대전교도소에서 응노 할아버지가 구속된 남편을 본 거예요. 남편은 전자공학을 전공했는데 할아버지가 보시기에 ‘저 학문을 배우면 우리 손녀 굶기지는 않겠구나’ 싶으셨대요. 또 ‘곁에서 지켜보니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이더라’는 거예요.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시부모님이 우리집과 이웃해서 살고 있었어요. 참 묘한 인연이죠?”
 
 
  동백림 사건과 이응노
 
1968년 2월 고암 선생의 손자 이종진씨의 고교 졸업 때 찍은 가족사진. 고암이 수감 중일 때다. 맨 왼쪽부터 박인경, 이융세, 이종수, 박귀희, 이종진, 이경인, 권채원(고암의 며느리), 이봉원.
  1967년 64살이던 이응노가 동백림(동베를린)에 간 것은 아들 문세의 소식을 듣고서다. 아들 문세는 6·25 사변 때 소식이 끊어졌었다. 이응노는 한달음에 동베를린에 있던 북한대사관을 찾았다.
 
  얼마 후 한국대사관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박정희 대통령이 민족문화를 선양한 이응노 화백을 초청했다는 것이다. 이응노는 10년 만에 고국을 둘러보고 싶었다. 그러나 김포공항에 도착하자 바로 갇히고 말았다. 1심에서 징역 5년,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2년 6개월 만인 1969년 3월 풀려났다. 당시 유럽을 중심으로 윤이상과 이응노구출위원회가 조직됐을 정도로 한국 정부에 대한 압박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고암의 손자 이종진씨는 연세대 화공과를 나왔다. 현재 자동차와 연료탱크에 쓰이는 액량(液量) 조절부품(liquid lever sensor)을 제조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2006년 창업했다. 그의 말이다.
 
  “응노 할아버지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 기피인물이라서 우리가 마음대로 연락 드리기조차 어려웠어요. 저는 해외여행도 못했어요. 젊은 시절, 독일계 회사에서 일했는데 윤정희·백건우 사건으로 해고당한 적이 있어요.”
 
  《월간조선》은 2003년 7월호에 유고 주재 북한대사가 유고 정부에 대해 윤정희·백건우 부부 납치공작을 시인한 외교문서를 공개한 적이 있다. ‘윤정희·백건우 부부 납북 미수사건’은 1977년 당시 파리에 거주하던 이들 부부가 연주회 초청을 받아 스위스 취리히 공항을 거쳐 공산국가인 유고로 들어갔다가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될 뻔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이응노의 아내 박인경이 납치에 관련됐다는 의혹이 있었다.
 
수덕여관 앞에서. 고암과 손자 이종진. 프랑스로 가기 전의 모습이다.
  — 왜 해고를 당했나요.
 
  “오퍼상이란 곳이 외환관리 쪽에 문제가 있으면 안 돼요. 세무조사를 당할 수 있어서 제 같은 이가 근무하면 회사에 피해가 가지요. (중정에서) 왜 저란 사람을 채용했느냐고 추궁당할까 봐 저를 해고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번에는 경인씨 말이다.
 
  “응노 할아버지가 출옥 후에 마포의 제 친정집에서 몸을 추스르시다 (프랑스로) 가셨어요. 나중 할아버지가 상파울루 비엔날레 때 작품상을 받은 파피에콜레(종이를 붙이는 수법)를 프랑스로 가져오라고 해서 갖다 드린 일이 있어요. 그 작품은 동백림 사건과 관련이 있어요.”
 
  이응노는 1965년 브라질에서 열린 제8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특별상을 받으면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경인씨의 계속된 말이다.
 
  “그 작품은요, 사실 할아버지가 박 대통령께 선물로 드리려고 동백림 사건 때 프랑스에서 가지고 오셨어요. 그런데 2년여 동안 옥고를 치르셨으니 선물할 마음이 사라지셨죠. 그래서 손자네(이종진)에 두고 가셨어요. 지금 그 그림은 프랑스에 있어요.”
 
  손자 종진씨는 할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예술관을 들은 적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가 제게 그러셨어요. ‘동양화의 생명은 기운 생동에 있다’고요. ‘기운 생동이란 고구려 쌍영총 벽화에 나오는 현무도의 용의 꿈틀거림이라든지, 말 타는 궁수의 활달함이라든지. 마치 벽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살아 움직이는 기운이 없다면 동양화가 아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니까 단순히 아름다운 산수화는 그림이 아니라고 하셨죠. 살아 움직이는 용틀임이 있어야 동양화의 정수라고 하셨죠.”
 
  — 언제 그런 말씀을 하셨나요.
 
  “동백림 사건이 나서 할아버지가 출옥하시고 몇 달 같이 살았거든요. 그때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제가 대학교 2학년 때였어요. 그때 응노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계신 수덕사에도 가셨어요.”
 
 
 
천하의 명필 해강 김규진의 제자가 되다!

 
충남 예산군 수덕사 아래에 있던 수덕여관 모습. 멀리 아기를 안고 고무신을 신고 있는 이가 이응노 화백이다.
  한때 고암의 출생지를 두고 충남 홍성군과 예산군이 다툰 적이 있었다. 고암의 생가는 홍성(홍성군 홍북면 중계리 386번지)이고 고향은 예산(예산군 덕산면 낙상리 24번지)이다. 두 곳이 서로 인접해 있다. 종진씨의 말이다.
 
  “홍성군이 응노 할아버지 생가복원 사업을 오래전부터 해 왔거든요. 그런데 예산은 할아버지 고향이에요. 그러니까 예산에서 기념사업을 해야 한다고 맞섰어요. 재판까지 갔어요. 그때 우리 집안에서 ‘응노의 출생지가 홍성’이라고 정리를 해 줬습니다. 제가 얼마 전 선산에다 할아버지 그림을 넣어서 비석을 세웠어요. 선산은 행정구역으로 보면 홍성에 가까워요.”
 
  — 이응노 화백의 묘는 프랑스에 있잖아요.
 
  현재 고암의 묘는 프랑스 페르 라세즈 공원묘지에 있다.
 
  “(경인) 응노 할아버지가 묻힌 곳은 예술인이 잠든 곳이라고 합니다. 할아버지 곁에 있는 이가 유명한 상숑가수라고 해요.”
 
  — 그럼 선산에 있는 묘는 일종의 가묘겠네요.
 
  “(종진) 그럼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프랑스에 가서 제가 머리카락을 한 뼘 잘라 왔어요. 그걸로 가묘를 세운 겁니다.”
 
  기자는 작년(2017년) 해강 김규진 선생의 후손인 김정림 여사를 만난 적이 있다. 해강은 창덕궁 희정당 벽에 걸린 〈만물상 추경〉과 〈총석정 해경〉 등을 그린 당시 전통 서화계의 거목이다.
 
  — 고암이 해강의 제자가 되었다고 하지요?
 
  “(종진) 할아버지 호가 처음엔 죽사(竹史)였는데 해강 선생이 지어 주신 호예요. 제자 고암이 워낙 대나무를 잘 그려서 그런 이름을 내리셨대요.”
 
  “(경인) 할아버지는 성격이 대나무처럼 곧으신 분이셨대요. 해강의 아들 청강(晴江) 김영기(金永基·1911~2003) 선생이 응노 할아버지랑 가까우셨는데 그분 회고 글에 ‘(고암이) 부지런하면서도 정직하며 인사성이 발랐고 그림 재예(才藝)가 뛰어났다’는 표현이 나와요. 할아버지는 무려 15번이나 퇴짜를 맞은 끝에 해강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응노 할아버지는 청강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집안 심부름을 해 주며 저녁이면 그림공부를 할 수 있었대요. 얼마나 열심이셨던지 눈병이 날 정도였는데, 해강이 집에 가서 쉬라고 떠다밀어도 안 가셨대요. 기차를 타고 집으로 가다가 고암이 다시 돌아오자 해강은 ‘그 참 지독한 놈’ 그러셨다고 합니다.”
 
  — 고암 선생은 일본에 가서도 유명한 화가의 제자가 됐어요.
 
  “(종진) 할아버지는 도쿄의 유명한 화가인 마쓰바야시(松林桂月)를 찾아갔는데 ‘몬젠바라이(門前ばらい, 문전에서 쫓겨나는 것)’를 1년 동안 당했대요. 섬돌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해 질 녘까지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묵화 한 보따리를 싸 가지고 담을 넘어 들어가 문 앞에다 그림을 펴놓고 사람을 불렀대요. 사환이 나와서 ‘나가라’고 해서 싸우게 됐는데 그 소리를 듣고 마쓰바야시 선생이 놀라서 쫓아왔다고 합니다. 응노 할아버지가 바닥에 펴 놓은 그림은 거들떠도 안 보고서 ‘나는 조선 총독이나 이왕(李王) 전하(영친왕)의 소개장이 없으면 받아 주지 않으니 돌아가라’고 하더래요. 그래 할아버지는 속으로 ‘옳거니’ 하고서 ‘제가 바로 이왕 전하의 스승인 해강 김규진 선생에게 직접 배운 제자’라고 했대요. 그제야 ‘깅가이코, 깅가이코(김해강)’ 하며 바닥에 있던 할아버지 그림을 보고 문하생으로 받아 주었다고 합니다.”
 
  —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가 봐요.
 
  “(경인) 해강 선생에게 그림을 배운 뒤 전주로 내려가 간판점을 차렸는데, 옛날 말로 ‘뺑끼(페인트)’칠을 하셨대요. 인부가 30~40명이 될 정도로 큰돈을 버셨는데 그걸 다 정리하고 일본에 그림을 배우러 가셨어요.
 
  그때가 1936년이니 할아버지 나이 33살입니다. 도쿄에서 요미우리 신문배달소를 운영했는데 집안 조카 30여 명을, 18살 이상 ‘세(世)’ 항렬의 조카들을 죄다 (일본에) 부르셨다고 합니다. (할아버지께) ‘조카들을 왜 불렀는지’ 여쭤 보니, 집안을 일으키려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셨대요. 할아버지는 조카들에게 ‘밥은 먹여 줄 테니 신문을 돌려라’고 하셨고 박귀희 할머니는 새벽마다 풍로 불로 30인분의 밥을 지었대요.”
 
청강 김영기가 본 이응노
 
 
“인생이란 이런 것을 전화위복이라 하는 것이겠지”

 
  이응노는 당대 명필인 해강 김규진에게 그림을 배웠다. 청강 김영기는 해강의 장남이다. 청강과 고암은 해강을 잇는 화가로 평생을 의지하며 그림공부에 정진했다. 고암이 프랑스에 정착해 고생할 때 청강에게 고생담을 편지로 썼다고 한다. 그 내용이 청강이 쓴 《동양미술논총》에 나온다.
 
  〈… “내가 처음 파리에 와서 한 프랑스 노파가 주인인 집에 사글세로 살았는데 몇 달 동안 방세를 못 내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네. 돈은 없고 갈 데도 없고 하여 할 수 없이 우리 세 식구가 ‘세느 강’ 다리 밑의 기둥받이 아래 모랫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서 지내게 되었다네. 그래도 나는 이 다리 밑에서 불철주야로 열심히 작품을 만들어 가지고 화랑을 찾아갔지(이것이 바로 유명한 ‘파피에콜라주’를 만들어 가지고 파게티 화랑을 찾아간 것). 그랬더니 이 작품이 화랑주인 눈에 합격하여 처음으로 파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어 신문에까지 나게 됐다네. 이 소식을 들은 전에 살던 셋방 집 주인 노파가 신문을 들고 다리 밑으로 찾아와 ‘자기가 모르고 너무 경솔히 대하여 미안하니 용서하고 도로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였으나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그보다 더 좋은 집에 가서 살게 되었지 무엇인가! 인생이란 이런 것을 전화위복이라 하는 것이겠지” 하는 것이었다. 이야말로 과연 고암 형의 그 백절불굴의 용기와 굳은 의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p.208~209)
 
  응노의 양아들 이야기
 
이응노 화백과 박인경 여사.
  이응노의 양아들 이문세는 연세대 영문학과를 나왔다고 전해진다. 《전의이씨 청강공파보(淸江公派譜)》에는 ‘동경제국 상업 졸’로 기재돼 있다. 상당히 수재였고 영어를 잘했다고 전해진다. 경인씨의 말이다.
 
  “아버지(이문세)는 광복 후 미 대사관에서 근무하셨대요. 일제 때 영어를 전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왜 영문학을 전공하려느냐’고 물었더니 아버지 말씀이 ‘앞으로 영어하는 세상이 와요’라고 하셨대요.
 
  항상 지프를 타고 출퇴근했는데, 6·25 사변 뒤에 북한에 가서 처음 한 일이 미군들에게 확성기로 ‘항복하라’고 말하는 것이었대요. 그걸 4~5년 하고 나니 너무 외롭고 죽을 것 같아서 (북한에서) 다시 장가를 들었다고 합니다.
 
  사리원 중학교에서 교감으로 은퇴하셨다고 합니다. 평양에 안 간 이유는, 평양에 가면 공산당에게 휘둘리기 싫어 그냥 시골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77세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 이응노 화백은 아들 문세를 언제 만났다고 들었나요.
 
  “(종진) 동백림 사건이 1967년 났으니까 그 이후는 아니고 그 이전에 봤겠지요.”
 
  “(경인) 동독의 북한대사관에서 (아들을) 만나고 온 뒤 할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꼭 잡아서 데리고 나오려고 그랬어. 하지만 그걸 못해 너무 아쉬워’라고요.”
 
  후손들은 고암이 아들 문세를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에서 만났다고 말했으나 다른 증언도 있다. 1977년 윤정희·백건우 납북 미수사건이 불거지자 고암이 프랑스로 망명을 택했고 1983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평양을 찾았다고 전한다. 청강의 회고로는 이응노·박인경 두 사람은 1987년 아들을 만나러 평양에 갔다고 했다. 또 그해 평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는 기록도 있다.
 
  — 동백림 사건이 나고 해금되기 전까지 고암의 그림은 어떻게 거래가 됐나요.
 
  “(종진) 거래 자체가 안 됐어요. 심지어 표구도 못했어요. 표구사에 가면 쉬쉬했으니까요. 또 갤러리에서 소장한 그림조차 숨겨야 했지요.”
 
  — 그동안 집에선 그림을 어떻게 보관했나요.
 
  “(경인) 수덕여관을 하셨던 할머니께서 배접해서 보관을 잘하셨어요. 여관 부엌이 굉장히 넓었는데 부엌 위에 다락이 있었어요. 부엌에서 늘 불을 때니까 곰팡이가 안 슬게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림 300여 점을 홍성 이응노생가기념관에 기증했어요.”
 
  — 윤정희·백건우 납치미수 사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종진) 전혀 들은 바가 없어요. 신문에 난 것 외에 모릅니다.”
 
  청강 선생은 고암이 1958년 한국을 떠나 프랑스로 간 이유에 대해 저서 《동양미술논총》(1999년, 우일출판사)에 이렇게 밝힌 바 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국전(國展)이 개최되어 고희동(高羲東), 손재형(孫在馨) 등의 해강 반대파가 권력을 잡고 나가매, 고암과 청강 등은 국전에서 무시와 멸시를 당했다. 이로 인하여 고암 형은 조국 화단에 환멸을 느끼고 드디어 유럽으로 떠난 것이다. …〉(p.207~208)
 
  — 청강의 이런 증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경인) 그 말씀이 맞아요. 일부 화가들이 자기 제자들만 옳다고 하고, 정말 상을 줘야 할 사람을 뺐다고 들었어요. 응노 할아버지가 당시 화단에 대해 실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수덕여관과 본처 박귀희
 
이응노 작 〈구성〉. 이응노미술관이 지난 2008년 10월 ‘고암, 먹빛의 여정전’ 때 공개한 작품이다.
  이응노의 처가 프랑스에 살고 있는 박인경으로 알고 있지만 본처는 박귀희다. 박인경은 이화여대 동양화가 1회생으로 입학, 고암에게 그림을 배우다 관계가 깊어졌다. 두 사람은 22살 차이다. 이응노·박인경 사이에 양자인 이융세가 있다. 이융세는 프랑스에서 화가로 활동 중이다.
 
  본처 박귀희는 평생을 수덕사 입구에서 수덕여관을 운영하며 살았다. 박귀희가 2001년 노환으로 사망하자 후손들은 수덕여관을 수덕사에 팔았다고 한다.
 
  수덕여관은 이응노가 1945년 3월 일본이 패망할 조짐을 보이자 식솔들을 이끌고 잠시 정착한 곳이다. 경성(서울)에 있다가 자칫 징용으로 끌려갈 수도 있었기에 수덕사 인근으로 피신했다.
 
  “(종진) 수덕여관은 원래 비구니가 쓰던 절집(숙소)을 응노 할아버지가 개조한 것이라고 해요. 할아버지가 모아 둔 돈에다 일본서 신문배달소를 처분한 권리금을 합해 샀다고 알려졌어요.”
 
  “(경인) 할아버지가 어느 날 꿈을 꾸셨는데 수덕여관 자리에 용이 앉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집을 사셨대요. 나중 박귀희 할머니가 여관으로 고쳤지요. 후손들은 수덕여관 덕에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었어요.”
 
  “(종진) 박귀희 할머니께서 여관 경영을 잘하셨어요. 일가친척 한 번씩은 수덕여관을 거쳐 갔어요. 모두 할머니 그늘에서 은덕을 입지 않은 분이 없어요. (종진) 할머니(박귀희)는 우리 시대의 ‘마지막 신사임당’이라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인자하고 자애로우셨어요. 그러나 원칙이 분명하신 분이셨어요.”
 
  “(경인) 할머니만 뵈면 눈물이 났어요. 제가 힘이 들어 찾아뵈면, 제 볼을 어루만지며 ‘어디서 요런 것이 났어’ 그러셨어요. 그리고 같이 울곤 했죠. 말년에는 ‘왜 하나님이 날 안 데리고가셔, 데리고 가게 기도 좀 해 줘’ 그러셨어요.
 
  할머니는 평생 공부를 못하신 게 한(恨)이셨어요. 임종 무렵, 기독교에 귀의하셨는데 목사님께 ‘하늘나라에 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대요. 신여성에게 남편을 빼앗긴 가슴앓이의 표현이 아니겠어요?”
 
  종진씨의 아내 배정희(裵貞姬)씨의 말이다.
 
  “할머니가 8개월가량 마지막을 함께하다 임종하셨어요. 남편이 퇴근해 할머니 방에 들어가면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예뻐하셨어요. 마치 나이 어린 손자를 대하듯 말이죠.”
 
  — 이응노 화백은 본처인 박귀희 할머니에게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요.
 
  “제가 프랑스에 가서 할아버지를 간혹 뵙곤 했는데, 그때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내가 너희 할머니 미워서 그런 줄 아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그러셨어요. 할머니에 대한 미움은 없으셨어요.”
 
  — 그럼 박귀희 할머니는 고암 선생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겠죠?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언젠가는 돌아오실 거라고 믿고 사셨어요. 그러나 결국 돌아오시지 않으셨어요. 보통의 여자처럼 가슴속 응어리를 한 번쯤은 쏟아내도 될 텐데 할아버지에 대한 섭섭함을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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