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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의 Who

영원한 아나키스트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글 : 문갑식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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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화된 ‘박열’은 의열단의 김원봉과 비견되는 무장독립투사
⊙ 경북 문경서 출생, 3·1운동 후 경기고보서 만세시위 벌이다 퇴학
⊙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아나키스트로 변신
⊙ 의혈단-흑도회-흑우회 조직하는 한편 선전활동에도 주력
⊙ 일본으로 폭탄 반입해 황태자 폭살 계획
⊙ 때맞춰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검거… 22년 넘게 옥살이
⊙ 아내 가네코와 함께 한복 차림으로 재판받아… 가네코는 옥중 의문사
⊙ 재일민단 초대 단장 지낸 후 귀국했다가 6·25 때 납북당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옥중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찍은 사진.
이 사진이 공개되자 일본 야당은 ‘대역죄인 우대’라고 비난했고 결국 내각이 무너졌다.
  6월 28일 독립운동가를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된다. 감독 이준익과 배우 이제훈의 영화 〈박열〉에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라는 부제(副題)가 붙었다.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난 박열(朴烈·1902~1974)은 영화 〈밀정(密偵)〉에서 화제가 된 김원봉과 함께 일제하 항일무장투쟁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본명이 박준식(朴準植)인 박열은 아버지 박지수(朴芝洙)와 어머니 정선동(鄭仙洞) 사이에서 태어난 3남 1녀 중 막내다. 처음 이름은 혁식(赫植)이었으나 어려서부터 열(烈)로 불렀고, 호적에는 준식(準植)이라 기재돼 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경북 문경 마성면 오천리 일대다.
 
 
  밀양 사람 김원봉 문경 사람 박열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의 포스터.
  이곳은 일제가 만든 광산촌이다.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은 일본 자본가들이 유입되면서 광산촌에서는 조선인에 대한 착취와 저임금, 인권유린 등의 폐해가 자행돼 주민들의 반일 정서가 높았다. 오천리에는 삼림과 식수관리, 경로사업 등을 하는 성산조합(星山組合)이 있었다.
 
  이 단체는 1919년 1월 권농(勸農)조합으로 개칭되었다. 박열의 맏형 박정식과 둘째 형이 이 조합의 회원으로 활동했고 1921~22년에는 마을 구장을 맡아보는 등 마을 일에 적극 앞장섰다. 이는 그의 가족들 사이에 ‘일제에 저항하는 피(血)’가 흐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박열의 집안은 전통적인 양반 가문으로 지방 사민(士民)이었다. 하지만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농업과 소작료 수확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정도로 생활이 궁핍해졌다. 박열은 7세인 1908년부터 서당 교육을 받았으며 10세 때에는 집에서 40리나 떨어진 함창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이 지방 최초로 설립된 4년제인 함창보통학교는 소년 박열이 민족의식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16년 3월 졸업식을 앞두고 조선인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자신이 그동안 일본의 압력 때문에 거짓 교육을 한 것을 눈물로 사과하며 조선 역사의 존엄성을 일깨워준 것이다.
 
 
  조선인 교사의 고백에 일제 실상 알게 돼
 
경상북도 문경시에 있는 박열의사기념공원에 복원된 박열의 생가.
  “일본 교사는 형사(刑事)”라는 조선인 선생님의 고백에 충격을 받은 박열은 이때 계속 공부해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보통학교 졸업 후 박열은 “농사를 지으라”는 맏형의 권유를 뿌리치고 경성제2고보(경복고)에 진학했다가 경성고보(경기고) 사범과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일본인 교사로부터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의 ‘대역사건(大逆事件)’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일본 천황 암살 음모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던 박열은 고향 문경으로 돌아왔다.
 
  문경에서 박열은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탄압 만행을 전해 듣고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내렸다. 박열은 1919년 10월 도쿄(東京)로 가기 위해 배에 몸을 실었다.
 
  박열은 도쿄에서 신문배달과 날품팔이, 우편배달부, 인력거꾼, 인삼행상 등을 하며 단기어학 전문학원인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다녔다. 그러며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이와사 사쿠타로(岩佐作太郞) 등 당대의 사회주의자들을 찾아가 직접 교류했다.
 
 
  조봉암 등과 의혈단 조직
 
박열의 동지로 제헌의회 부의장을 지낸 김약수.
  박열은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김찬, 조봉암 등 같은 도쿄의 고학생들을 모아 의혈단(義血團)을 만들었다.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과 이름이 비슷한 이 의혈단은 후에 철권단(鐵拳團)-혈권단(血拳團)-박살단(撲殺團)으로 이름을 바꾸며 존속했다.
 
  이들은 일본 내 친일파들에게 협박장을 보내 일본을 떠나지 않으면 응징하겠다고 위협했다. 박열은 또 당시 도쿄의 최대 조선인 노동단체였던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에서 김약수, 백무, 최갑춘 등과 함께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김약수(1893~1964)는 부산 동래 출신으로 휘문의숙과 경성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의 금릉대학을 거쳐 일본대학에서 공부했다. 1921년 귀국해 조선 최초의 노동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했으며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박열 등과 흑도회를 만든 인물이다.
 
  그는 국내에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했으며 1924년 김사국 등과 조선노동총동맹을 창립하고 1925년에는 조선공산당을 결성했다. 1926년 신의주 사건을 비롯해 모두 세 차례 검거돼 9년7개월간 수감됐다. 일본 경찰관 채용시험 문제에 출제될 만큼 이름을 날린 인물이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의 간부로 피선됐으나 좌익과 결별하고 단독정부 수립에 참여해 한민당 조직부장을 지냈다. 5·10총선에서 당선되어 제헌국회 부의장이 됐으나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체포, 구금되었다가 6·25 때 인민군에 의해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뒤 납북됐다.
 
 
  가네코 후미코와의 운명적 만남
 
  1922년 2월 박열은 그의 평생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와 운명적으로 만난다. 요코하마 태생의 가네코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성적 학대를 받으며 자란 인물로, 천황제와 군국주의에 깊은 반감을 가진, 이른바 ‘자유 여성’이었다.
 
  박열이 도쿄에서 고생했던 것처럼 약 7년 동안 조선에서 말할 수 없는 고초를 치른 가네코는 도쿄의 작은 어묵집에서 일하면서 조선 유학생들과 교류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조선 잡지에 실린 박열의 자작시(自作詩)를 읽고 그를 흠모하게 됐다고 한다.
 
  여기서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간략히 살펴본다. 그는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으나 부모 모두로부터 양육을 거부당해 출생신고조차 하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무적자(無籍者)라는 이유로 학교마저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가정환경이 어려웠다.
 
  그는 친척집에 맡겨져 자라던 중 1912년 충북 청원군 부용면에 살던 고모의 집에 들어갔으나 이번에는 할머니의 학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약 7년간 조선에서 살며 부강심상소학교에서 수학했는데 그를 감동시킨 것은 3·1운동이었다. 이때 가네코는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가네코는 1919년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가네코를 술집에 팔아넘기려 했다. 가네코는 도쿄의 친척집으로 올라와 신문배달, 어묵집 점원으로 일하면서 영어교습소에서 공부했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이들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스트가 됐다.
 
  두 사람은 곧 만나 사상(思想)을 공감했고 민족적 차이를 넘어 계급적 동지로서 함께 항일활동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동거에 들어간다. 조선고학생동우회와 혈권단 등의 활동을 하던 박열은 김약수, 원종린 등과 함께 1921년 11월 29일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했다.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 흑도회 결성
 
박열의 친필.
  흑도회는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였으나 뒤에 서술하는 것처럼 김약수 등의 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북성회와 박열 등의 무정부주의자가 이끄는 풍뢰회(이후 흑우회로 개칭)로 분리된다. 박열은 이후 일시 귀국해 조선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로회(黑勞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박열은 일본의 아나키스트 이와사 사쿠타로의 후원 아래 다양한 항일투사들이 결집된 흑도회의 회원들과 함께 세계노동절 행사를 비롯해 일본 사상단체의 반정부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박열은 또 가네코와 함께 흑도회 기관지 《흑도(黑濤)》의 발간 책임을 맡는 등 선전활동에도 열을 올렸다.
 
  흑도회는 1922년 8월 니가타(新潟)현 나카쓰가와(中津川)에서 조선 노동자들이 착취당해 여러 명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나자 박열과 김약수를 조사단원으로 파견했다. 박열은 9월 7일 도쿄 YMCA에서 조사결과를 보고했는데 일본과 조선의 지식인 1000여 명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니가타현 조선 노동자 학살사건을 계기로 흑도회 내부에서는 분란이 일어났다. 식민체제의 근본적인 파괴와 의열투쟁을 강조하는 박열과 대중적 전위정당을 추구하는 김약수의 의견이 엇갈린 것이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열은 국내에 사건보고를 위해 들어왔다가 의열단과 접촉한다.
 
  김한(金翰) 등 의열단 간부들에게 그는 폭탄 구입을 요청했는데 그러는 사이 김약수는 조선인노동조사회와 노동자동맹을 결성해 흑도회는 해체되고 만다. 박열은 1922년 12월 김약수 등과 결별한 후 직접 행동을 추구하는 회원들과 함께 흑우회를 조직했다.
 
  당시 회원은 박열과 가네코, 신영우, 홍진유, 서상일, 박흥곤, 장상중 등이었다. 흑우는 1923년 5월 한글로 된 기관지 《민중운동(民衆運動)》을 펴내는 한편 일본 및 조선의 여러 사회단체와 함께 합작을 시도했다.
 
  흑우회 회원들은 《후데이센진(太い鮮人)》과 《현사회(現社會)》라는 기관지를 통해 대규모 연합시위를 벌였고 일본 노동단체가 주최한 세계노동절 행사에서 ‘8시간 노동제 실시’와 ‘조선의 해방’을 외치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여기서 《후데이센진》이라는 기관지에 대해 짧게 언급해 본다. 후데이센진은 일본 당국이 ‘조선인 불온분자’를 일컫는 ‘불령선인(후레이센진)’과 발음이 비슷하다. 이로 미루어 박열이 일종의 말장난으로 《후데이센진》이라는 기관지를 만들어 일제를 조롱했음을 알 수 있다.
 
 
  의열단과 접촉해 폭탄 반입 시도
 
  박열은 1923년 4월 중순 흑우회와 별도로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 조선인 15명과 일본인 6명 등 21명으로 구성된 불령사에서 박열은 정기적으로 일본 아나키스트의 강연을 듣거나 국내의 파업투쟁을 후원하고 사회주의를 매도한 조선 기자를 폭행하는 등 반일 직접 활동을 주도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박열은 폭탄을 반입하거나 직접 제조하려 하는 한편, 의열단 간부 김한에게 폭탄 구입을 요청해 폭탄 50개를 반입하려 했다. 세 번에 걸친 폭탄 반입 실패에도 불구하고, 박열은 1923년 가을의 일본 황태자 결혼식 소식을 접하고 다시 거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9월 1일 도쿄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도쿄가 일순 생지옥으로 변하자 일본 내각과 군부는 도쿄시내와 인근 5개 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출동시켰는데 완전무장한 이들은 관동대지진의 혼란을 사회주의자와 조선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 기회로 삼았다.
 
  일본 내각의 유언비어 살포로 인해 일본인들로 구성된 자경단과 주민들까지 학살에 가세해 약 6000여 명의 조선인들이 무참히 희생당했고 6000여 명이 검거됐다. 검거자 중에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해 불령사 회원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처음에 일본 경찰은 박열을 ‘일정한 거주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로 규정해 한 달간 구류시키더니 이어 불령사를 ‘비밀결사의 금지’ 위반 혐의를 들어 구속기소했다. 이 과정에서 박열의 폭탄 반입 계획이 알려졌다. 이때부터 일본은 불령사를 천황 암살사건, 즉 ‘대역사건’의 주범으로 비화시켰다.
 
 
  관동대지진의 혼란 속에 거사 계획 드러나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일본의 군경과 국민들은 6000여 명의 조선인을 학살했다.
  일본 검찰은 이듬해 1월 27일 박열 부부의 폭발물 유입 계획과 불령사 조직을 연결시켜 이 사건을 ‘대진재(大震災)를 틈탄 조선인 비밀결사의 폭동계획’으로 보도했다. 박열은 기소된 이후,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총 21회에 걸친 신문조사를 받았다.
 
  조사과정에서 그는 일본 천황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그는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죄인 취급하지 말 것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입힐 것, 조선어 사용 등 4가지 조건을 요구했다고 한다.
 
  일본 재판부가 그의 요구를 받아들임에 따라 그는 조선 전통 복장을 입고 출두해 반말투로 답변하는, 초유의 법정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나아가 미리 써둔 ‘음모론’ ‘나의 선언’ ‘불령선인이 일본 권자계급에게 준다’ 등의 글을 읽으며 일본 천황의 죄를 폭로해 일본을 당황케 했다.
 
박열 사건에 대한 일본 언론 보도.
  첫 공판 당시 박열은 옛 조선 관료의 예복인 사모관대 조복을, 후미코는 치마저고리 차림이었는데 이 옷은 시인 조지훈의 아버지인 조헌영씨가 제공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박열은 또 자신들이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므로 재판도 조선말로 할 것이니 통역을 허락하라고 요구했다.
 
  일본 재판부는 1926년 3월 박열과 가네코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일주일 만에 특별 감형한다고 발표하였다. 사형판결 후에 박열은 미소 지으며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맘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했다.
 
  박열에 이어 가네코 후미코는 사형을 면하게 해준다는 사면장을 갈가리 찢어 버렸다. 이러한 두 사람의 기개에 감탄한 일본 재판장은 박열과 가네코에게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가 파면당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사형선고 1개월 전에 혼인서를 제출함으로써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하기로 했다.
 
  하지만 박열과 가네코는 각각 지바(千葉)형무소와 도치기(栃木)형무소로 옮겨졌다. 가네코는 옥중에서 자신의 가혹한 삶과 자유사상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책에 담아 출간했다. 일본은 옥중에 있는 두 사람의 항일의지를 꺾고 전향시키기 위한 공작을 끊임없이 펼쳤다.
 
 
  가네코, 의문의 옥중사망
 
경상북도 문경에 있는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나 독서를 제한하고 글 쓰는 것도 방해하거나 전향을 종용했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23일 급작스럽게 가네코 후미코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박열은 접했다. 자살의 원인이나 방법도 알려지지 않은 타살의 의문 속에, 그녀의 사체는 서둘러 가매장됐다.
 
  가네코의 유골은 옛 동지들의 노력으로 인해 비밀리에 박열의 친형에게 전해졌고 무사히 경북 문경 팔령산(八靈山)에 옮겨져 묻혔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기구한 사랑은 두 사람의 다정한 포즈가 담긴 사진이 언론에 알려짐에 따라 또다시 일본 정계를 뒤흔들었다.
 
  이 사진은 두 사람에게 호의를 가졌던 검사와 예심판사가 찍은 것인데 이 사진을 빌미로 야당은 ‘대역죄인 우대’라는 정치공세를 벌인 것이다. 이로 인해 당시 내각은 총사퇴하고 재판관이 파면되는 등 세간에 커다란 반향이 일었다.
 
  일제는 1933년부터 1938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박열이 전향선언을 했다고 발표했으나 ‘전향서’에는 ‘천황의 적자(嫡子)’를 자처하거나 불교에 귀의하겠다는 등의 내용뿐이어서 조작의 흔적이 짙었다. 더욱이 전향을 했다는 데도 일제는 그에게 어떠한 출옥이나 감형의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박열은 1945년 10월까지도 정치범이 아니라 대역사범(大逆事犯)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했다. 박열을 일제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21세에 투옥된 박열은 1945년 10월 27일 홋카이도(北海島) 변방의 아키타(秋田)형무소에서 44세의 중년이 되어 풀려났다.
 
  23년 만에 생환한 박열 앞에는 더 극적인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쿄에서 열린 석방환영 대회에서 그를 옥중에서 감시했던 형무소장 후지시타 이사부로(藤下伊三郞)가 조선인들 앞에서 자기 죄를 뉘우치는 연설을 한 뒤 아들을 박열의 양자로 삼고 이름도 박정진(朴定鎭)으로 개명한다고 밝혔다.
 
  박열은 반공(反共)노선을 분명히 하면서 이강훈, 원심창 등과 함께 1946년 1월 20일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해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이 조직의 강령에는 ‘민주주의적 건국의식’ ‘사해동포적 세계협동’ ‘근로대중의 동지’ 등의 문구가 들어 있어 그가 중도우파 노선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의사 유해 송환 앞장서
 
  박열은 1946년 5월 백범 김구의 부탁을 받아 3열사들의 유해송환 책임을 맡았다. 항일 의열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도 모자라 묘소조차 변변치 않았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 3열사의 유해를 발굴해 고국으로 모셔온 것이다.
 
  이즈음 그는 자신의 민족자주적 독립사상과 자유평등 이념을 밝힌 《신조선혁명론》을 발간했다. 신조선건국동맹은 1946년 10월 3일 김구의 임시정부를 법통으로 삼는 재일조선건국촉진동맹 등 우파 단체들과 통합해 재일조선거류민단(이하 민단)을 발족시켰다.
 
  박열은 초대단장으로 추대됐고 부단장에 이강훈, 사무국장에 원심창, 도쿄지국장에 고순흠 등이 임명됐다. 이는 초기 민단이 일제치하에서 아나키즘 사상을 통해 함께 항일운동을 펼친 동지들이 중추를 이룬, 반일-반공산주의적 재일동포단체였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당시 이승만도 미국 방문길과 귀로에 박열을 만났다. 이 회담 후 박열은 ‘건국운동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방침을 밝히고 이승만 계열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지지하는 방향으로 정치노선을 굳혔다. 이에 이승만도 1947년 민단을 재일동포를 대표하는 유일한 단체로 인정했다.
 
  이승만은 박열을 대한민국 국무위원으로 초빙하겠다는 약속은 어겼다. 박열은 1948년 2월 ‘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바뀌기 전, 민단의 재정고갈과 내부 갈등으로 인해 단장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박열은 1948년 8월 15일 귀국했으며 고향을 찾아 부인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를 참배했다.
 
  박열은 재단법인 박열장학회를 설립하는 한편 1949년 5월 영구 귀국을 결심한 뒤 서울에 머물렀다. 하지만 1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밀고 내려와 서울을 점령했고 사흘 뒤 북한은 그를 북으로 데리고 갔다.
 
 
  “국민들이 남아 있는데 내가 어떻게 서울을 떠나나”
 
납북 후의 박열. 1968년 대동강변에서 찍은 사진이다.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 박열은 주위의 피란 권고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모두 서울에 남아 있는데 독립투사인 내가 그들을 버리고 서울을 떠날 수 없다”며 잔류했다고 한다. 북한에 끌려간 뒤 박열의 행적에 관한 자료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며 소수의 이야기만이 전해지고 있다.
 
  몇 안 되는 그의 행적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일이 박열이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 협의회는 당시 그와 함께 북으로 끌려간 조소앙, 안재홍, 엄항섭, 김약수 등 민족 지사들이 남북한 정권 모두에게 자주적 평화통일 원칙을 촉구하기 위해 만든 단체다.
 
  이 단체의 주요 강령은 ▲외국 군대의 즉각적 철수와 군대 축소 ▲임시정부의 수립과 국제적 중립화의 선언 ▲남북한 자유왕래와 교류 ▲총선거 실시와 통일헌법 제정 등 5단계에 걸친 통일방안이다. 하지만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의 제안은 김일성의 거부로 무산됐다.
 
  박열은 1974년 1월 17일 평양에서 72세로 사망했다. 그해 2월 남한에서도 추도회가 열렸다. 사망할 때 그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회장이었다. 정부는 1989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의 묘지는 평양 신미리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특설묘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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