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藝家를 찾아서] 트로트 가수 고복수·황금심의 후손들 : 월간조선

일제시대 대중가요는 민족적 설움과 통속적 비극이 묻은 신파극이었다. 트로트라고 부르는 ‘뽕짝’은 체념과 슬픔과 자학이 어우러져 식민지 민중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중에서도 고복수(高福壽·1911~1972)가 부른 ‘타향살이’,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의 ‘짝사랑’은 일제시대 최고의 명곡으로 꼽힌다. ‘꾀꼬리의 여왕’으로 불리던 황금심(黃琴心·1922~2001)의 ‘알뜰한 당신’ ‘외로운 가로등’ ‘울산 큰 애기’도 초창기 대중가요의 황금기를 대표한다. 1941년 결혼한 고복수·황금심, 스타커플 1호의 탄생은 장안의 화제였으나 지금은 옛 노래만 기억될 뿐이다.

대(代)를 이어 트로트 가수로 활동 중인 고영준(高英準·60)씨를 만났다. 그는 고복수·황금심의 5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이다. 지금까지 9장의 트로트 앨범을 냈다는 그는 “‘정에 약한 남자’ ‘남자의 길’ ‘눈물 젖은 빵’이 대중에게 알려졌다. 작년부터 ‘무작정 당신이 좋아’를 열심히 부르고 있다”고 했다. KBS 〈가요무대〉나 〈전국노래자랑〉에서 종종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그거 아세요? 일제시대 트로트는 하층민의 노래가 아니었어요. 서구문물을 깨친 인텔리나 개화파 지식인이 향유한 신식 노래가 트로트였어요. 서울대 초대 음대학장이자 가곡 ‘그 집 앞’ ‘나물 캐는 처녀’를 쓴 현제명(玄濟明)이 당시 신인가수 발굴 심사를 봤고 전수린(全壽麟·‘황성 옛터’의 작곡가)은 홍난파(洪蘭坡)와 함께 활동한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홍난파는 가요악단 일원으로 아버지, 어머니 노래를 연주했어요.”

고개를 끄덕이는데 고씨는 ‘타향살이’ 한 구절을 척 하니 부르기 시작했다. “타향살이 몇 해런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 선친 노래 중에서 가장 많이 부른 노래를 꼽자면.

“‘타향살이’ ‘짝사랑’ ‘사막의 한’이지요. 어머니 말씀이, 아버지가 만주에서 공연하실 때 ‘타향살이’ 노래를 듣고 자살한 사람이 있다고 해요. 한 무대에서 ‘타향살이’로 33번이나 앙코르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해요.”

‘타향살이’, 33번이나 앙코르 받아

장남 고영준의 돌 잔치 당시 고복수.

― 얼마나 설움이 북받쳤으면 자살을 했을까요.

“‘타향살이’는 아버지가 스무 살 때 처음 불렀다는데 북간도나 연변, 하얼빈 등지에서 공연할 때마다 객석은 울음바다가 됐다고 합니다.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수년, 수십 년간 객지를 떠돌던 우리 민족의 아픔 때문이지요.”

고영준씨는 “아버지가 창씨개명을 안 하셨다. 당시 대중가요 1절은 우리말, 2절은 일본말로 불러야 했는데 당신은 일본말로 노래 부르길 거부하셨다. 일본인이 아버지를 초청한다고 승용차를 보내면 빈 차로 돌려보내고 인력거를 타고 가셨다”고 했다.

― 꼬장꼬장한 분이셨나 봐요.

“그런 성격 때문에 일본이 패망하기 전까지 몇 년간 아예 노래를 부르실 수 없었어요.”

대중음악 연구가인 단국대 교양기초교육원 장유정 교수에 따르면 한국 가요의 수난기이자 암흑기였던 일제 말 고복수와 황금심은 ‘고복수와 그 악극단’을 조직해 일본의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재일(在日) 조선인을 찾아 위문공연을 했다고 한다. 고씨는 “당시 대중가요가 우리 민족의 무력감, 탄식, 자학을 담았다고 할지라도 당대 비극적 식민지 리얼리티를 그대로 담고 있다”고 했다.

― 고복수의 ‘짝사랑’에 나오는 ‘으악새’가 무슨 말인가요.

“아버지 말씀이 ‘억새’를 뜻한댔어요. 억새가 모진 바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서듯 우리 민족의 한을 상징한다고 하셨어요. 제목이 ‘짝사랑’인데 남녀 간의 사랑이 아니라 조국에 대한 애틋함을 의미한다고 들었습니다.”

“트로트는 당대 식민지 비극적 리얼리티 담아”

목소리가 꾀꼬리와 같다고 하여 ‘꾀꼬리의 여왕’으로 불렸던 황금심.

그러더니 그는 이내 ‘짝사랑’의 한 소절을 불렀다.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 젖은 이지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여기서 ‘이지러진 조각달’이 바로 나라 잃은 조국을 뜻한다. 생전 그의 선친은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언제 광복이 될까’하는 지독한 무력감과 희망을 동시에 품었다고 했다.

― 집에서 고복수는 어떤 아버지셨나요.

“당신께서 정하신 가훈이 ‘몸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말하지 말라’셨어요. 어린 시절 저는 아버지께 군대식으로 경례를 붙였어요. ‘아버지! 용무 있습니다. 친구집에 갔다가 ○시○분까지 귀가하겠습니다’하고 거수경례를 했어요.”

― 거수경례를요.

“아버지는 누구에게나 ‘군대 갔냐’를 먼저 물으셨어요. 아버지가 6·25 때 군 위문공연을 많이 다니셨기에 무슨 부대가 어디에 있는지 훤히 아셨으니까요. 군에 안 갔다고 하면 ‘예끼, 이 사람아. 자네는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야’라고 상대를 무안하게 만들었어요. 두 분은 시장 점포에서 절대 물건을 사지 않으셨어요. 좌판 상인의 물건을 골랐고 그들에게 에누리를 하거나 덤으로 더 달라는 말도 않으셨죠. 상인들이 반가워 두 분의 손을 잡으려다 손이 더러워 주저하면 ‘놀고먹는 손이 더럽지, 일하는 손은 깨끗하다’시며 먼저 (손을) 내미셨어요.”

아들 고씨에 따르면, 6·25 당시 북한 인민군이 고복수·황금심을 납치, 명동성당에 감금시켰다. 그때 후배 가수 계수남(桂壽男)이 ‘가극동맹’ 붉은 완장을 차고 나타나 고복수에게 “고 동무”라고 부르더란다. 고복수를 “고 선생님”이라 깍듯하게 대하던 계수남의 돌변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아내 황금심은 임신 중이었다.

“아버지가 충격을 받으셨어요. 계수남은 아버지 양말을 빨던 까마득한 가요계 후배였거든요. 아버지가 계수남에게 ‘이보게, 이 사람아. 아내는 임신했으니 보내달라’고 청했고 계수남은 그 청을 거절할 수 없었던지 어머니를 내보냈다고 해요. 어머니는 떡 장수로 변장해 남쪽으로 피란 갔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버지(고재천)와 함께 북으로 끌려가던 길에 도망을 쳤다고 해요. 원산 부근에서 작은아버지가 ‘형님은 살아야 한다’며 아버지를 웅덩이에 빠뜨렸고 아버지는 웅덩이에 숨어 있다가 어느 사찰에서 승복으로 갈아입고 도망치던 중 우리 국군을 만났다고 해요.”

국군이 고복수에게 “암호를 대라”고 하자 얼떨결에 “타향살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러고 국군의 차를 빌려 타고 대구까지 와서 ‘육군 군예대’ 창설 멤버로 전쟁기간 내내 각지로 위문공연을 다녔다. 이후 계수남은 어떻게 됐을까. 그는 1951년 공안기관에 체포돼 사형 언도를 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다.

수감자들로 구성된 ‘계수남과 그 악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가요계의 박시춘, 이난영 등이 법정에 출두해 옛 동료를 돕는 증언을 했고 결국 감형됐다. 계수남은 법정에서 “6·25 당시 한강교가 끊어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인민군에 체포돼 부역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출옥 후 가톨릭에 귀의해서 성가극, 반공극 등에 출연했다. 계수남은 2004년 사망했다.

고복수·황금심의 러브 스토리

1992년 노태우 대통령에게 옥관 문화 훈장을 받은 황금심.

―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조선총독부의 관립극장이던 부민관에서 공연하던 아버지 모습을 어머니가 보시고 어머니가 한눈에 반하셨대요. 그때 어머니 나이가 요즘 나이로 초등학교 3, 4학년쯤 됐을까요? 어머니는 미국배우 ‘게리 쿠퍼’를 빼닮은 아버지를 보고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키가 180cm로 당시로선 훤칠했으니까요.”

― 180cm요.

“어머니가 16세(1937년) 무렵 ‘오케 레코드 콩쿠르’에 나가셨는데 그때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아버지셨대요. 아버지도 그때 눈여겨보셨나 봐요. 어머니가 계셨던 반도악극좌에 아버지가 입단(1940년 3월)해 〈옥중 춘향전〉을 연기했는데 고복수는 이몽룡, 황금심은 성춘향으로 분(扮)했어요. 전국을 돌며 공연할 때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나 봐요. 아버지가 예비 처갓집에 찾아갔더니 외할아버지가 몽둥이를 들었다고 합니다.”

― 왜요.

“여성 팬이 많은 고복수와 결혼하면 평생 고생한다고요. 얼마나 인기가 많았던지, 아버지가 1회 공연을 마치고 2회 공연을 해야 하는데, 1회 공연 손님이 객석에서 버텨 소방차를 불러 물벼락을 내렸다고 합니다. 어머니 말씀이, 고복수를 만나려고 당대 인텔리 여성이나 기생들이 진을 쳤지만 어머니와 정분을 나눈 뒤로는 일절 눈길을 주지 않았대요. 그러니까 황금심은 평생 고복수밖에 몰랐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식도암으로 오래 투병하셨는데 어머니는 밤 공연을 마치시면 집에 안 들르시고 곧장 병원으로 향하셨어요.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아버지 곁을 지키셨어요.”

고복수는 1972년 사망했고 황금심은 파킨스씨병으로 투병하다 2001년 세상을 떠났다.

장남 고영준씨가 보관 중인 고복수, 황금심의 앨범.
상단 왼쪽 앨범은 〈박시춘 메로듸 NO.1〉. 작곡가 박시춘은 고복수, 황금심을 위해 많은 곡을 썼다.

― 두 분은 서로 어떻게 부르셨어요.

“집에선 큰누나 이름을 따서 ‘영희 아버지’라고 하셨지만 밖에서는 ‘고 선생님’으로 부르셨어요. 집 밖에서는 남편 이전에 가요계 선배니까요. 아버지는 ‘영희 엄마’ 혹은 ‘내자(內子)’라고 하셨어요.”

― 가요계의 선후배 위계가 엄정했나 봐요.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김정구(金貞九) 선생이 아버지보다 5년 아래인데 제일 많이 혼이 났다고 할까요? 꼼짝을 못하셨대요. 대기실에서 가수들이 모여 잡담을 하면 으레 혼이 나야 했대요. 아버지는 ‘무대 오르기 전, 기가 빠지면 안 된다’시며 후배들 간 잡담조차 허락지 않았다고 해요. 아버지가 양복 윗옷을 벗어 의자에 걸어두면 후배 가수들이 감히 그 앞을 못 지나갔대요. 어머니는 등이 파인 드레스를 평생 못 입으셨어요. 한복만 입으셨는데 아버지 때문이었어요. 어머니는 이를 드러내고 웃으신 적도 없어요.”

고씨는 이런 일화도 소개했다.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회장이 두 분을 좋아했는데 한 번은 식사자리를 마련했대요. 박 회장이 ‘백화점 물건 중에 갖고 싶은 것을 골라라’고 하자 어머니는 내심 값비싼 패물이 갖고 싶었지만 자존심이 센 아버지는 ‘커튼 천이면 된다’고 하셨대요.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도 두 분을 따로 불러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양복 기지만 두 벌 받아오셨어요. ‘(이병철 회장이) 애써서 번 돈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어요.”

꾸밈없는 창법 vs. 꺾기·흔들기의 달인

차남 고영민과 아내 손현희씨.

아들 고씨는 고복수・황금심의 창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꾸밈이 없는 창법으로 노래하셨어요. 마치 누군가에게 말씀을 건네시듯 트로트 가수가 흔히 구사하는 ‘꺾기’나 ‘흔들기’ 같은 창법으로 부르지 않으셨어요. 있는 그대로 자연스런 바리톤 음성에 한(恨)이 묻어났어요.

그러나 어머니의 창법은 달랐는데 ‘아~’라고 소리를 내도 중·저·고음의 음색이 서로 달랐어요. ‘흔들기’와 ‘꺾기’를 반복하면서 톤이 변화무쌍했어요. 언젠가 가수 남진이 제게 ‘초등학교 때 황금심의 가슴 아프게를 듣고 울었다’며 ‘황금심이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라고 했어요.”

3대째 음악집안 이어가

고복수·황금심의 장남 영준씨.

고복수·황금심은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아들 3형제 영준·영민·병준은 나란히 음악인이 됐다. 첫째 아들 고영준은 1977년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고 아내 김영숙도 ‘유활란’이란 예명으로 남편보다 1년 먼저 가수 주현미와 함께 ‘어쩔 수가 없네요’ ‘가야만 하네’ 등의 노래를 불렀다. 김씨는 2001년 2월 암으로 사망했다.

둘째 고영민과 손현희 부부는 가톨릭 음악선교단체(선교세상)에서 가스펠을 부르고 있다. 며느리 손현희는 1983년 강변가요제에서 ‘이름 없는 새’로 대상을 받았던 실력파 가수다.

이들의 맏아들 태욱은 2012년 MBC 〈위대한 탄생3〉에서 ‘블루스완 팀’으로 출전했고 두 딸 유빈과 유선은 ‘유화’와 ‘은실’이란 예명으로 걸그룹 ‘칠학년일반’에서 활동, 3대째 음악집안 업을 잇고 있다. 막내 고병준은 2001년 한국방송대상 음악상을 수상한 재능 있는 음악감독이었으나 2004년 사망했다.

올해로 제26회째를 맞이한 ‘울산 고복수 가요제’가 8월 20일 오후 7시30분에 울산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에서 개최된다. 올 7월 진행된 예심에 전국 각지에서 396명이 신청, 이 중 10개 팀이 본선에 올라갔다.

“고복수 가요제를 ‘고복수·황금심 가요제’로 이름을 바꾸면 어떨까요? 어머니도 울산 사람에게 시집갔으니 울산 사람이잖아요. 두 분이 금실 좋게 사셨으니 부부가요제 형식으로 재편하는 것도 좋고요. 저는 이런 말을 자주 해요. ‘부부간 사랑도 저축해야 한다’고요. 둘 중에 어느 한쪽이 아프고 병들었을 때 차곡차곡 쌓아둔 사랑을 찾아 쓰면 좋잖아요. 고복수·황금심이 그렇게 살았듯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