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황무지 개척자’ 서울영동농장 김용복(金龍福) 명예회장 : 월간조선

지난 4월 20일 올해로 10회째를 맞는 한사랑농촌문화상 시상식장. 김용복(金龍福) 서울영동농장 명예회장 겸 한사랑농촌문화재단 설립자는 축사 차례가 오자 “40년 전 나는 나를 키워 준 회사를 배신했다”고 말해 참석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김 회장은 “1976년대 규모의 사우디아라비아 담맘(Dammam) 부두 운송사업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해 미국 국방부 용역회사 빈넬(Vinnel)과 한국의 대한통운이 피 말리는 경쟁을 벌일 때, 나는 빈넬사 직원으로 입찰정보를 대한통운에 제공했었다”며 “지금도 그 애국적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김 회장이 40년간 간직했던 비밀을 털어놓자, 행사장에 참석한 빈넬사 동기생 23명 등 청중은 김 회장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김용복 회장은 1933년생, 올해로 84세다. 김 회장은 1979년 단돈 7달러만 가지고 농부 4명과 함께 삽 4자루를 들고 사우디 사막 한가운데서 ‘기적의 야채농장’을 일군 인물이다. 1989년 1000여만 달러(119억원)를 손에 쥔 그는 1989년 사재 10억원을 털어 ‘용복장학회’를 만들었고, 2005년 100억원을 내놓아 ‘한사랑농촌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김 회장은 이날 문화상 시상식에서 ‘월정어린이복지재단’을 설립한다고 선언했다. 이사장은 이명박 대통령 주치의 최윤식(崔允植) 전 이명박대통령 주치의가 맡았다. 지난 2월 11일 보건복지부 인가를 받은 월정어린이복지재단은 김 회장이 33억원을 출연해 불우한 어린이들을 지원하게 된다. 김 회장은 “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사람은 자기의 능력과 재산을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쓰는 사람”이라며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 사회에 다 희사하니 홀가분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고아 신세 전락

1951년 부산 범일동 미 극동군사령부 장거리통신대대 하우스보이 시절의 김용복 회장.

김용복 회장은 땅 부자라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땅은 단 한 평도 없다”고 했다. 김 회장은 천수답 한 마지기(200평)가 전부인 김홍수(金洪洙) 선생의 3녀2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성장 동력은 어린 시절의 불운과 오기였다. 자신을 낳자마자 돌아가신 어머니, 이른 나이에 집을 떠나 버린 세 누이, 여순반란 사건으로 총살당한 형, 아버지의 나주댁과의 재혼 등으로 김용복은 외톨이가 됐다.

재혼으로 식수(食數)가 늘자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은 더욱 어려워졌다. 급기야 중학교 ‘월사금’을 내지 못해 금릉중학 2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치르다 말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총명했던 그를 아꼈던 담임선생은 몹시 안타까워했다. 김용복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책가방 하나 달랑 메고 아버지에게 하직인사를 올렸다. 1951년 이웃 방매댁 아주머니가 부산으로 이사하는 편에 묻혀 집을 떠났다.

부산 범일동의 방매댁 시동생 집엔 김용복이 머물 공간은 없었다. 이튿날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노숙을 하고 꿀꿀이죽을 얻어먹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부산 도착 한 달 만에 미군 병사들이 미 극동군사령부 장거리통신대대로 데려갔다. 하우스보이로 일하기 시작했다. 영어사전을 끼고 살던 그는 성실함을 인정받아 부대장(하일라인 소령)의 당번병으로 뽑혀 갔다. 그는 김용복을 “son”이라고 불렀다. 이때 김용복은 운전도 배웠다.

김용복은 적극적인 성격만큼이나 운도 따랐다. 한국군에서 최영희(崔榮喜) 5군단장(국방부장관 역임) 운전병을 했고, 미 군사고문단 수석고문관 케시 장군(준장)의 운전병 겸 통역병으로 일했다. 케시 장군의 주선으로 1958년 빈넬사의 한국총지배인 스티브 펄의 운전기사로 취직을 하게 된다. 빈넬사와의 질긴 인연의 시작이었다.

1959년 10월 이순례씨와 결혼한 김용복은 1960년 27세에 종로구 낙원동에 있는 건국대 정외과 야간학부에 입학한다. 신입생 중 최고 연장자였다. 주경야독으로 혹사당한 그의 몸은 폐결핵으로 나타났으나, 부인의 내조 덕에 1964년 2월 간신히 학사모를 쓸 수 있었다. 1965년 김용복은 미8군 사령부 내 주한 메릴랜드주립대학 서울분교의 교무과장이라는 안정적 직업을 뒤로 하고 베트남으로 간다. 아내는 물론 미국인 교무처장까지 “미국 유학을 보내 주겠다”며 베트남행을 말렸으나 막무가내였다.

1965년 7월 12일 김용복이 도착한 캄란만은 군항으로, 사막처럼 모래바람이 불었다. 그는 월급 350달러의 최말단 잡역부로 미군들의 오물을 치웠다. 얼마 안 가 그는 배차계장, 보급창 행정계장을 거쳐 한국인으로는 최고 직위인 행정 감독관으로 승진했다.

150원짜리 설렁탕 장사

빈넬사와의 5년 계약이 끝날 무렵, 김용복이 꼬박꼬박 송금한 돈으로 부인 이순례는 영동(현재 강남지역)에 평당 200원짜리 땅 1만 평을 사 놓았다. 때마침 1966년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착공하고 강남개발 붐이 일기 시작하면서 1년 만에 땅값이 3000원으로 상승했다. 김용복은 졸지에 땅 부자가 됐다.

1970년 5월 30일 김용복이 베트남에서 귀국했을 때 금싸라기로 변한 영동지역의 땅 1만 평이 김용복의 소유로 돼 있었다. 지금 시가로 5000억원이 넘는 땅이었다고 한다. 김 회장은 “월남 땅에서 귀국할 때 천하를 얻은 듯 비서까지 대동하고 화려하게 귀국하는 등 의기양양했다”면서 “이때 실패의 징후가 보였다”고 했다.

김용복은 창동에 수출포장재를 만드는 ‘국제수출포장공업사’를 설립했다. 부인이 사 둔 영동 땅을 모두 처분해 꿈에도 그리던 자신의 회사를 차린 것이다. 당시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한창이라 수출품을 포장하는 폴리백은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최고급 승용차를 뽑고, 일본에서 고가의 기계를 정신없이 들여왔다. 어느날 새벽 기숙사에서 밥을 하던 식모가 비명을 질렀다. 잠을 자던 직공 5명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그중 2명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참담한 실패였다. 영업부장에게 공장을 헐값에 넘기고 얼마간 허송세월을 했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으로 실뱀장어를 수출하는 양식사업을 시작했다가 중국산 실뱀장어가 일본에 먼저 상륙하는 바람에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 날리고 말았다.

그 바람에 영동의 금싸라기 땅도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김용복 회장은 “훗날 사우디의 농장 이름을 서울영동농장으로 한 것도, 현재 영동농장 본사를 강남 로데오거리에 세운 것도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라며 “당시에 아내와 딸 명화, 갓 태어난 아들 태정이가 없었다면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김용복은 장사 밑천을 위해 결혼 패물을 모두 내다 팔았다. 이렇게 모은 돈은 채 100만원이 안 됐다. 1974년 봄 서울을 떠나 성남에 둥지를 틀었다. 당시 성남은 서울의 철거민들이 대거 이주해 살고 있는 신생 도시였다. 그는 그곳에서 설렁탕집을 전세 내 150원짜리 설렁탕을 팔면서 연명했다.

부인은 막내아들을 등에 업고 주방에서 일했고, 김용복은 낮에는 낡은 누비바지를 입고 150원짜리 설렁탕 배달을 다녔다. 밤에는 울분을 못 이겨 소주병으로 나발을 불어 댔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어 언제부터인가 호주머니에 자살하려고 약을 넣고 다녔다고 한다. 특히 김용복은 자신이 보는 앞에서 술 취한 손님들이 아내를 희롱하는 것을 볼 때면 미칠 것만 같았다.

애국하는 산업스파이

1975년부터 1978년 2월까지 김용복 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미 빈넬사에서 민병대 교육을 담당한 군사고문단 지원업무를 맡았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김 회장의 보스인 시슬 앨리슨, 맨 오른쪽이 김용복 직원.

1975년 초 어느 날, 식당에서 조간신문을 읽던 그가 갑자기 솟구치듯 뛰어나갔다. 그를 베트남으로 가게 한 빈넬사의 구인광고(WANTED)였다. 그길로 해외개발공사로 달려갔다. 350달러 월급을 지급한다는 광고에 공사 앞은 인산인해였다. 몇 시간 헤맨 끝에 어렵사리 원서 한 장을 손에 들고 하위직인 월급 375달러의 행정보조직을 지원해 무난히 합격했다.

출국을 위해 남은 가족들이 살 성남의 반지하 단칸 사글셋방을 얻고 나자 단돈 7달러가 남았다. 김용복 회장은 “주머니 속에 만져지는 꼬깃꼬깃한 지폐를 꽉 움켜쥐면서 이를 악물었다”며 “전남 강진의 110만 평 농장은 7달러가 종잣돈인 셈”이라고 했다.

김용복과 123명의 동료 기능공들은 빈넬과 18개월의 계약을 했다. 사우디 리야드에 도착한 일행은 사우디 민병대를 훈련시키는 미 군사고문단에 배속됐다. 일주일이 지나 김용복은 동부지역 담맘의 군수품을 취급하는 파견대로 갔다. 미국인 2명, 요르단인 통역 1명과 함께 모두 4명이 담맘 부두나 다란 공항을 통해 들어오는 군수물자를 민병대 사령부가 있는 리야드까지 수송하는 일을 했다.

단조로운 임무가 계속되자 김용복은 시간 나는 대로 현지 영자신문을 챙겨 읽었다. 어느날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를 보았다. 사우디 정부 차원에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대형 프로젝트에 편승하면 큰 돈벌이가 있을 것’이라며 김용복의 머리는 바빠졌다. 공사가 시작되면 한국업체들이 진출할 것이고, 한국인 노무자들을 상대로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 바로 ‘김치 프로젝트’였다. 그의 말이다.

“오일달러를 벌기 위해 반드시 우리나라 기업들이 중동에 진출할 것인데 그들이 제일 견디기 힘들어할 것은 무엇일까. 더위는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김치가 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베트남에서도 김치가 없어서 폭동까지 일어났으니까요. 한국인은 김치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DNA를 갖고 있습니다.”

그는 사우디 사막에서 배추와 무 재배를 구상했다. 주말마다 사우디 전역을 누비며 잡초 서식지와 오아시스를 찾아보았다. 사막 한가운데 알팔파라는 사료작물을 재배하는 농장에서 작물 사이에 잡초가 자라는 것을 보았다. ‘잡초가 자라는데 배추나 무가 살지 못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

김용복 회장은 “6개월에 한 번씩 휴가를 얻어 한국에 올 때마다 흙과 물을 비닐봉지에 몇 개씩 담아 가지고 나왔다”며 “농업진흥청과 국립공업연구소에 토양검사와 수질검사를 의뢰했다”고 했다. 그러나 번번이 부정적인 결과가 나왔다. 그 와중에 김포공항에서 보석 밀수꾼으로 오해를 받았다. 해외 근로자들은 대개 전자제품, 화장품, 술을 사오는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과 흙만 갖고 오니 수상쩍게 생각했던 것. 세관원들은 흙속에 보석을 숨겼는지 정밀검사를 하느라 부산했다.

빈넬사는 김용복에게 계약기간을 1년 더 연장해 주었다. 1976년 빈넬사와 한국의 대한통운이 담맘 부두 항만운송사업 입찰경쟁이 붙었을 때, 김용복은 대한통운에 필요한 입찰정보를 동아그룹 최준문(崔竣文・최원석 전 회장의 부친) 회장의 비서실장인 유영철(劉泳哲)씨에게 제공해 입찰을 대한통운이 따내도록 도와주었다. 김 회장의 말이다.

“유영철 비서실장과 알코바 사무실 앞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습니다. 미국은 사우디의 경제개발계획을 좌지우지하고 있고, 실제로 사우디에 몇 개의 대형 프로젝트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가난한 대한민국이 따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애국심에 호소하더군요. 입찰가격을 빼달라는 거였지요. 양심의 가책은 물론이거니와, 노출되면 산업스파이로 철창 행이었습니다. 고민고민하다 ‘입찰이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고 매달리는 그들에게 결국 승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감독관이 있는데, 서류를 빼돌리는 게 가능했습니까.

“새벽 2시경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입찰문서 가운데 가격 부분에 해당하는 30~40페이지를 복사했습니다. 등에서 식은땀 정도가 아니라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며칠 후 대한통운이 근소한 차이로 공사 낙찰을 받았습니다. 나는 보스인 시슬 앨리슨(Cecel Alison, 1981년 작고)의 숙소로 찾아가 죽을죄를 지었다고 울면서 사과를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내 등을 탁탁 치더니 ‘미스터 킴, 걱정 마라. 내가 처리할게. 너는 애국자다(Mr. Kim, don’t worry. I’ll take care. You are brave!)’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나를 고발하지 않고, 오히려 6개월간 더 일하도록 조치를 한 후 귀국시켰습니다.”

김식품의 배신자들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 제1영동농장에 모인 7명의 농부가 밭의 이랑을 고르기 전에 자리를 같이했다. 왼쪽에서 두번째가 김용복 회장.

유영철 비서실장은 “김 선생은 정말로 애국자”라며 계열사인 동아건설 부장직을 제의했다. 그러나 김용복은 동아건설의 식품납품권을 달라고 역으로 제의했다. 건설의 ‘건’ 자도 모르는 사람이 회사에 덜렁 들어가 겉도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동아건설은 그의 제의를 흔쾌히 수락했고, 1977년 알뜰하게 모은 돈과 동아건설의 도움으로 ‘김식품(현지명 Takico)’이라는 회사를 사우디에 설립했다.

땅집고 헤엄치는 듯 보였던 회사 운영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국법상 외국인이 국내에서 사업을 할 수 없어 사우디인 타이어 알리(Thire Ali)를 ‘바지사장’으로 영입했고, 서울에서 16명의 인력을 데려왔다. 김용복은 빈넬과의 근무계약을 어길 수 없어 낮에는 빈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김식품에서 일을 보는 이중생활을 했다.

김식품은 현지에서 두부를 만들면서 여러 가지 식품을 동아건설에 독점 납품했다. 회사는 하루에 수만 리얄씩 벌어들였고, 김용복은 유창한 영어로 냉장창고를 확보해 대량으로 유통을 시켰다. 한편으로 야채 재배도 꾸준히 연구했다. 그러나 믿었던 회사 직원에게 감쪽같이 당하고 말았다.

평소 직원 가운데 품행이 의심스러운 직원 두어 명이 있었다. 어느 날 김용복은 창고를 점검하면서 평소 취급하지 않는 이상한 물건들을 잔뜩 발견했다. 그중에는 회교국에서 거래가 불법인 조니워커, 시바스리갈 등 위스키도 있었다. 직원들이 사장 몰래 술장사를 해 왔고, 납품용으로 들여온 캘리포니아산 쌀과 참기름 등 고가의 식품을 훔쳐내 다른 회사에 팔아먹고 있었다.

김용복은 문제의 직원에게서 사표를 받고 귀국을 종용했다. 운명의 장난일까. 1978년 2월 김용복은 빈넬사와 2차 고용계약까지 끝나 비자를 갱신해야만 했다. 한국에 다녀와야 했다. 2주일에 걸친 한국행은 그들에게 역모의 시간을 주고 말았다. 그들은 형식상 대표인 알리를 구슬러 김용복이 약속한 수익분배 비율 6대4를 2대8로 바꿔 주고, 추가로 많은 혜택을 주겠다고 꼬드기며 김용복 축출을 시도했다.

김용복이 한국에서 비자를 갱신해 사우디에 들어가 보니 숙소에 건장한 현지인 6~7명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김용복의 여권을 빼앗고는 “당장 오늘 밤으로 서울로 돌아가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김용복에게 알리와 맺은 6대4 동업 비율은 사우디법을 위배했고, 한국인 직원 16명을 데려올 때 지다공관에 뇌물을 줬다고 증언할 사람이 있다고 협박했다. 게다가 김용복이 빈넬사와 김식품에서 이중 근무를 한 것도 위법이라고 했다.

죄수처럼 사우디에 숨어 들어가다

김용복은 한국공관의 외교관들까지 다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김용복은 단돈 10원도 챙기지 못하고 옷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귀국했다. 사우디 진출 2년6개월 만이었다.

1978년 6월 20일, 건설회사 청화기업의 조수영(趙守榮·주 사우디 대사관 노무관 역임) 전무의 도움으로 비자와 여권을 만들어 사우디에 들어갔다. 청화기업 노무자 신분이었다. 알리 일행을 피해 죄수처럼 사우디에 숨어들다시피 입국했다. 김식품이란 회사를 강탈당하고 사우디에서 쫓겨난 지 3개월 만이었다. 청화기업의 도움으로 비바람을 피할 조그마한 방 한 칸을 얻었다.

땅을 찾아나섰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불안감도 점차 사라졌다. 리야드와 알카라지 중간쯤인 그곳은 삼호주택, 한신공영, 진흥기업, 삼익건설, 경남기업 등 국내 건설업체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이들 15만명의 근로자에게 야채를 팔면 단번에 부자가 되겠다는 계산이 머리를 스쳤다.

김용복은 알 무트레프(Al Mutref)라는 사우디인이 운영하는 알팔파 농장을 주목했다. 식물이 살고 있다는 것은 그 지역에서 야채가 자랄 수 있다는 징표였다. 농장을 임대하려고 10여 일이나 찾아갔으나 헛걸음만 했다. 결국 알 무트레프를 만나 그들 격식대로 무릎을 꿇고 농장을 빌리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알 무트레프는 김용복의 제안에 심드렁해했다. 밤을 새워 다음 날 계획서를 가져가자, 알 무트레프는 사라센 상인으로 돌변했다. 변호사와 전문가 5명을 배석시키고는 자신은 한 푼도 투자하지 않고 땅만 빌려주는 대신, 이익금을 나누자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46세의 김용복이 사우디 사막에 농장을 시작하게 됐다. 땅 계약을 하고 농사를 시작하려면 인부를 데려와야 했다. 그러나 한국대사관을 찾아 김용해(金容海) 노무관에게 문의하니 송출허가서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유양수(柳陽洙) 대사도 “한국 사람이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건 턱도 없는 소리”라고 했다. 떼쓰기 작전으로 노무국장 관사에 드러누워 버리자, 노무관은 “내일 대사관에서 해결해 보자”고 했다.

김용복은 송출허가서를 받아들고 서울로 돌아왔다. 전문 농사꾼을 인선하는 것도 문제였다. 고등채소를 재배하는 등 특이한 농사를 짓는 사람을 수소문해 8명의 일꾼을 뽑았다. 인선을 마쳤을 때, 자금 문제가 벽에 부딪혔다. 기본경비에다 직원들 서너 달치 월급은 당장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결국 공직자 출신 일꾼 한 사람이 퇴직금 400만원을 빌려주기로 했다. 국내에서의 문제가 해결되니 이번에는 사우디에서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김 회장은 “사우디는 11월 파종이 적기인데, 해가 바뀌어 1979년 1월 하순에야 비자가 도착했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삽 네 자루의 ‘농사드림팀’

1980년 사우디 영동농장에서 자신의 몸만한 배추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김용복 회장의 아들 김태정군. 김태정씨는 이후 서울대 농대에 과수석으로 합격했고 전남대에서 농학석사 학위를 받고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1979년 2월 4일, 김용복과 ‘농사드림팀’ 일행 4명은 옷가방 한 개와 삽 한 자루씩을 쥐고 김포공항에 모였다. 리야드 공항에는 마중 나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앞날이 결코 순탄치 않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첫날 건설회사의 사무실 복도에서 잠을 청한 후, 이튿날 알 무트레프 씨를 찾아갔다. 그는 프랑스로 여행을 떠나고 없었다. 국제전화로 간신히 연결하니 “당분간 독일인 기술자들이 사는 온실에서 같이 지내라”고 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김용복 일행과 함께 지내는 것을 거절했다.

개집 같은 소형 트레일러 3개를 구해 잠자리를 해결했고, 20~30리얄의 비싼 한국식당에서 냉면조차 먹을 수 없어 예멘인이 운영하는 불결한 식당을 이용했다. 모기향도 없어 모기에 물리면 침을 발라 가며 잠을 청해야 했고, 석회질 가득한 수돗물을 끓이지 않고 벌컥벌컥 마셔야 했다.

문제는 채소농사가 불가능한 사막 기후였다. 1979년 2월 16일 악조건 속에서도 함께한 근로자들과 정성을 다해 파종을 했다. 5km 떨어진 곳에 관정을 파 물을 길어 날랐고, 인근 양계장에서 닭똥을 사다 거름을 주었다. 그러나 씨앗은 싹트기도 전에 말라 버렸다. 낮엔 섭씨 50도, 밤엔 섭씨 7도라는 극심한 일교차, 작열하는 태양열, 사막의 모래바람이 배추밭을 덮쳤다.

김 회장은 “어느 날 가장 믿었던 직원이 찾아와 절대로 농사짓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해 분노의 심지가 폭발한 적이 있다”면서 “직원 8명을 한밤중에 불러세워 놓고 ‘지금부터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이 삽으로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하자 직원들이 ‘사장님 잘못했다’고 해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김용복은 사막에서 채소를 재배하려면 특수비료의 배합, 관수시설 등 특별한 농사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터득했다.

하루 2~3시간만 자는 피눈물 나는 고생 끝에 모래땅을 비집고 초록색의 여린 싹이 돋아났다! 1979년 4월 20일 김용복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경남기업 후생담당자가 우연히 농장 옆을 지나다가 무와 배추를 발견하고 헐레벌떡 김용복을 찾아왔다. 한국에서 배로 운반하는 김치는 사우디 현지에 도착하면 ‘식초’가 돼 있었다. 기업마다 배추와 무가 귀한 손님이다 보니 김치 확보에 혈안이 돼 있었다.

경남기업 담당자는 김용복에게 자라지도 않은 무와 배추를 몽땅 사겠다고 했다. 그는 “kg당 5리얄을 주겠다”며 빳빳한 현찰 2500리얄을 김용복의 손에 선금으로 쥐여주었다. 드디어 배추 500kg을 2500리얄(약 50만원)에 입도선매(立稻先賣)한 것이다. 그날 밤 직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의 순간을 만끽했다(김용복 회장은 처음으로 배추 500kg을 수확한 그날, 4월 20일을 기려 영동농장 창사 기념일로 정했다).

첫 수확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폭주하는 주문을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야채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다고 한다. 무 하나가 15kg 나가는 것도 있었는데, kg당 1달러50센트 정도, 무 하나에 우리 돈으로 2만7000원이나 받을 수 있었다. 한번 싹을 틔운 사막의 땅은 잇달아 싱싱한 초록 야채들을 생산했다.

김용복 사장의 집 뒤 창고에는 현찰 달러가 궤짝으로 가득 찰 정도였다고 한다. 매일 들어오는 돈을 세기에 바빴다. 김용복은 ‘녹색혁명의 기수’라는 거창한 칭호와 함께 1980년 이후 한동안 개인 외화보유 랭킹 1인자의 위치를 고수했다. 매일 5만~6만 달러의 돈이 수중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송금하기 위해서는 농장에서 43km 떨어진 리야드 시내까지 가야 했기에 사우디 왕족들이나 타는 벤츠500을 구입했다.

“난 농고(農高)도 안 나왔다”

농장은 그야말로 번창일로였다. ‘서울영동농장’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나니 김용복의 소문이 사우디 전역에 퍼졌다. 김용복의 농장은 사우디의 명물이 됐다. 사우디 농림부장관을 비롯해 농업에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은 모두 찾아왔다.

이들뿐만 아니라 리야드 농과대학 학생들의 필수 견학코스가 됐고, 장예준(張禮準) 주 사우디 대사(동자부장관 역임) 등 한국 정부 고위인사들도 사우디를 방문하면 꼭 서울영동농장을 시찰했다. 1980년 5월 최규하(崔圭夏) 대통령도 사우디 방문 중 비공식으로 농장방문 계획을 잡았으나,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는 바람에 급거 귀국했다고 한다.

1981년 뜻밖의 방문객이 농장에 나타났다. 이브라힘 알 나무라(Ibrahim Al-Namlha) 장군이 서울영동농장에서 35km쯤 떨어진 자신의 농장에 김용복을 초대하고 싶다고 했다. 다음 날 찾아간 그의 농장은 커다란 관정을 4개나 갖춘 50여만 평의 거대한 규모였다. 그는 김용복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자신의 농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김용복은 이미 사우디인들의 횡포에 덴 바가 있어 거절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돈만 벌게 해 주면 된다면서 김용복에게 아주 유리한 조건을 내걸고는 통사정을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음이 트인 사람인 것 같아 계약을 하고 ‘서울영동농장 제2농장’으로 이름을 붙였다. 김 회장은 “제2농장에서 가장 많은 돈을 벌었다”면서 “다른 농장은 1000m를 파도 물이 안 나왔으나, 이 농장만은 42m에서 물이 콸콸 쏟아졌다”고 했다.

기자가 “농대도 안 나오신 분이 어떻게 이렇게 농사를 잘 지으셨냐”고 하자, 김 회장은 “난 농고도 안 나왔지만, 농사는 끊임없이 연구하는 열정과 두뇌로 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서울영동농장이 운영하는 농장이 수십만 평에 이르고, 직원도 100여 명에 달했다. 김용복은 멈추지 않고 농장을 계속 확장, 사우디에 4개의 농장을 거느렸다. 사우디 정부의 숙원이었던 대규모 밀 경작에까지 성공했다. 1년에 4모작이 가능한 그곳에서 그가 기른 야채 16종을 사우디를 넘어 쿠웨이트, 바레인까지 수출했다.

1982년 김용복이 제2농장에서 무려 11만kg의 밀을 수확, 전량 사우디 농림부에 납품했다. 첫 수확한 딸기를 잘 포장해 사우디 왕궁에 보내자, 그들은 거액의 밀 대금을 안겨 주면서 사우디 왕궁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자식에게 재산 물려주는 것은 독약”

1983년 네덜란드 간척전문회사 기술진들과 고향 강진의 110만평 간척지를 둘러보는 김용복 회장(가운데). 버려진 간척지는 70만평의 비옥한 농지로 바뀌었다.

국내에서도 김용복이란 이름 석자는 농업계는 물론 적지 않은 외화를 계속 국내로 들여보내다 보니 금융계서도 유명세를 탔다. 5공화국 때인 1982년 기능공의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석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받았다.

“1982년 무렵, 사우디에서 차를 타고 농장으로 가는데,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막 무섬증이 들어요. 돈을 벌어 가난해서 못 배우는 사람 돕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책망하는 것 같은 느낌이 무섭게 들었습니다.”

김용복 회장은 그길로 서울여상 교장 앞으로 편지를 썼다. 그렇게 뽑힌 3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해 주는 것을 계기로 1989년 현금 10억원을 출자한 오늘날 ‘용복장학재단’이 탄생했다. 용복장학회는 1991년부터 지금까지 법조인, 교수, 의사, 군장성 등 180여 명의 유수한 인재를 배출했다.

— 재단에 사재를 쏟아붓는 데 대해 가족들의 반대는 없었습니까.

“자식들한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독약을 물려주는 것이나 같습니다. 자식들에게는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면 됩니다. 그래서 나는 자식에게 질 좋은 교육을 시켜 주는 것이 부모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돈에 대해 평소 어떤 철학을 갖고 계십니까.

“돈은 한 사람이 너무 많이 오랫동안 갖고 있으면 부패해 구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분뇨와 똑같아요. 하지만 적기에 여러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 뿌려지면 향내가 나는 비료가 돼 죽어 가는 생명도 살릴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몇백억 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 몇 원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 과연 그런 사람들을 부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김용복 회장은 “인생을 3단계로 구분해 볼 수 있다”면서 “1단계(출생에서부터 30세 전후까지)는 인생을 준비하는 단계, 2단계(30세부터 60세 전후까지)는 성취하는 단계, 마지막 3단계(60세부터 생을 마치는 날까지)는 그동안 이루었던 지식, 재능, 경험, 재산을 정리하고 사회에 환원하는 기간으로 설정했다”고 했다.

1983년 9억원을 들여 고향인 전남 강진의 간척지 110만 평을 사들였다. 농업용수로와 도로 등을 뺀 순수 경작지는 70여만 평(3500마지기)이다. 1989년 12월 31일 사우디에서 완전 철수를 하면서 매입한 버려진 갯벌을 네덜란드 간척전문 회사에 10억원을 들여 현대식 농경지로 개발했다. 서울대 농대에 수석 입학한 외아들 태정씨도 졸업 후 전남대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고 아버지의 꿈을 이어 가고 있다.

강진 농장의 명물, 30m 국기게양대

2014년 11월 28일 강진농장 태극기 게양식. 왼편부터 이관치 약국신문 발행인, 이심 대한노인회 회장, 고규남 전 국회의원, 강정일 전 농촌경제연구원장, 송인준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 김용복 회장, 박재갑 국립암센터 초대원장, 최윤식 전 이명박대통령 주치의, 김규택 원아시아 이사장, 이성렬씨, 안병준 두성물산 회장, 김태정 서울영동농장 총괄사장, 마삼렬 전 언론중재위원.

2014년 11월 28일 김용복 회장은 전남 강진군 신전면 벌정리 영동농장 영농조합법인 광장에 30m 높이의 국기게양대에 가로 8.6m, 세로 6m의 대형 태극기를 게양했다. 국기게양대는 김용복 회장이 사비 2억원을 쾌척해 설치한 것이다. 여기에 18m 높이의 국기게양대 8개를 추가로 설치하고 둘레에 17개 광역단체기, 하단에 광역단체별 구호를 석판에 새겼고, 각 단체장의 서명도 담았다.

김용복 회장이 초등학교 5학년 때, 7살 위인 형(김영복)이 빨치산을 도왔다는 혐의로 19살의 나이로 마을주민 16명과 함께 총살을 당했다. 빨치산의 강요에 못 이겨 짐을 한 번 날라 주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 역시 연좌제의 족쇄로 공립 강진중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도 입학을 거절당했고, 미국 빈넬사에 취직돼 베트남 파견 때도 여권발급 불가(avoid) 판정을 받았다.

이효상(李孝祥) 국회의장 시절, 김용복은 건국대 은사인 김옥진(金玉珍) 국회사무처 섭외실장을 찾아가 “군인도 아니고 민간인이 전쟁터에 돈 벌러 가는 마당에 나를 빨갱이로 몰아 갈 것이라면, 나도 기꺼이 빨갱이가 되겠다”면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김옥진 실장은 “외국에 돈 벌러 나가는 애국자에게 무슨 짓이냐”며 서울경찰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천신만고 끝에 베트남행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대한민국은 충분한 교육도 제공하지 않았고, 단지 중학교 중퇴 학력만 주었을 뿐이었다. 그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는 대한민국에 왜 그토록 애정을 갖는가?’ 그가 이렇게 말했다.

“고향 강진이 나를 버리고 대한민국이 나를 버렸지만, 낳아 준 부모를 바꿀 수 없듯 대한민국은 단 하나의 내 조국이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미국 구찌 매장에서 3만 달러를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대한민국 여권을 내밀자 직원에게 무시를 당했습니다. 나라가 가난하면 내가 아무리 부자라고 큰소리쳐도 소용없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