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붓만 드시면 세상 아무런 잡념도 사라지는 성 싶게 몰입했다”
⊙ 집이 없어 쪼들렸을망정 자기세계와 관찰에 대한 확신은 오만하리만큼 드세
⊙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 친일의 오점을 남기지 않은 몇 안 되는 문인
⊙ 집이 없어 쪼들렸을망정 자기세계와 관찰에 대한 확신은 오만하리만큼 드세
⊙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 친일의 오점을 남기지 않은 몇 안 되는 문인
- 2014년 4월 1일 ‘횡보 염상섭 상(조각가 김영중 作)’을 광화문 교보생명빌딩 종로 출입구로 이전했다. 제막식에 도종환 시인(왼쪽부터), 염희영 유족대표,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유종호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조현재 문화부 차관, 김영종 종로구청장이 참석했다.
소설가 염상섭(廉想涉·1897~1963)의 본명은 상섭(尙燮)이다. 상섭(想涉)은 필명이다. 그가 소설을 썼던 일제 식민지 시절은 한국역사에서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 그는 난세의 시대를 신문기자로, 소설가로 치열하게 건넜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무정》으로 대표되는 한국 장편소설의 처녀지를 개척했다면, 또 금동(琴童) 김동인(金東仁)이 단편다운 소설(〈배따라기〉 〈감자〉)을 썼다면, 횡보(橫步) 염상섭은 중편소설(〈만세전〉 〈남충서〉 〈미해결〉 〈두 출발〉)로 한국소설의 근간을 세웠다. 춘원·금동과 함께 횡보는 한국 근대문학의 세 갈래 뿌리 중 하나다.
염상섭의 조부(廉仁湜)는 대한제국 시대 중추원 참의, 부친(廉圭恒)은 한일병탄 전까지 전주·가평·의성 군수, 맏형(廉昌燮)은 일본 육사를 나와 육군대위로 예편할 정도로 구한말 세도가였다.
그러나 염상섭 문학 연구자들은 그의 문학 근간이 항일감정에서 비롯됐다고 평가한다. 부친이 군수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반일의식이 자라나 작품 속 중요 모티브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식민지 신문기자로 당대 암울한 현실을 깊이 체험했다는 점 또한 염상섭 문학의 배경으로 작용한다.
염상섭은 1918년 일본 게이오(慶應)대 예과에 입학했으나 자퇴하고 이듬해 창간된 《동아일보》 정경부 기자가 되었다. 이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선생이 창간한 《동명(東明)》의 기자로 자리를 옮겼고, 부인 김영옥(金英玉)과 결혼하던 해인 1929년 《조선일보》 학예부장이 되었다. 1931년 《매일신보》 정치부장, 1936년 만주로 건너가 《만선일보》 초대 편집국장, 해방 후 귀국해서는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1946년 10월 창간)이 됐다. 그는 기자와 소설가의 길을 함께 걸었다.
“만약 기사가 나가면 각오하라”
염상섭은 김영옥과 결혼해 2남3녀를 두었다. 아들은 둘을 낳았다. 《경향신문》과 《동양통신》 기자를 지낸 장남 염재용(廉在瑢)은 이미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 횡보를 닮아 말술이었고 성격이 대쪽 같았다”고 한다. 둘째 희경(廉喜瓊)은 《서울신문》 기자인 김재형과 결혼해 1남2녀를 두었다. 셋째 희영(廉喜英)은 독신으로 오래 독일에 머무르다 귀국해 현재 경기도 일산에 살고 있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온 막내 재현(廉在鉉)은 일산의 한 침례교회 목사로 사역 중이라고 한다. 둘째 딸 희정(廉喜貞)은 100일 만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자료조사를 해 보니, 횡보 자녀가 아버지를 회고하는 인터뷰를 한 적이 없었다. 소설가협회와 출판사 측에 문의하니, 횡보를 추억하는 행사에 유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간혹 셋째 딸(염희영)이 얼굴을 비친다는 얘기를 들었다.
2년 전 기자는 후손을 찾아갔지만 “제발 조용히 살게 내버려 달라”는 하소연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말년의 횡보선생 역시 문단교유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동료 문인과 어울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심지어 집안 내에 물건 부딪는 소리가 나도 상을 찌푸렸다는 것이다.
기자는 그동안 틈틈이 횡보의 작품을 한 편씩 읽어 갔다. 그가 해방 전에 쓴 소설은 별로 재미가 없었고 난삽했으며 유난히 길었다. 그러나 힘들게 한 편을 읽으며 느낀 기쁨은 오래 남았다. 해방 후에 발표된 소설은 해방공간의 이념과 이산(離散)의 혼란 탓인지 드라마틱했고 사회에 대한 풍자와 조소가 가득했다. 기자는 한국전쟁 당시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 《취우》를 읽으며 혹독했던 시절의 사랑을 떠올려 보았다. 단편 〈임종〉 〈두 파산〉 〈일대의 유업〉을 읽으며 인간에 대한 횡보의 냉혹한 탐구정신을 들여다보았다.
기자는 예고없이 작년 1월초 고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아내를 앞세워 다시 후손을 찾아갔다. 그는 불청객을 내쫓지 않았다. “인터뷰는 안 하겠다”면서도 오래 익은 선친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후손의 목소리는 갈라져 탁해졌다. 대화 도중에도 여러 차례 “만약 기사가 나가면 각오하라. 당신 회사를 들었다 놨다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며칠 뒤 다시 전화를 걸자 그는 “다신 전화도 하지 말라”며 냉정하게 수화기를 내렸다. 이후 더는 만남을 못 가졌지만 그의 말을 수첩 속에 메모해 두었었다. 이후 횡보의 방계 친척 몇 분을 만나 보았다. 익명을 전제로, 집안에 전해진 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개비의 성냥도 헤프게 쓰지 말라”
해방 후 집 한 채도 소유한 적이 없다는 횡보는 “한 개비의 성냥, 한 장의 종이도 헤프게 쓰지 말라”고 가족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소설 속 인물의 갈등구조를 파헤치고 심리를 관조하는 정신은 이런 근검생활에서 나온 것인지 모른다. “한 개비의 성냥을 만드는 데에 들어간 수많은 사람의 공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당대 손꼽히는 문인으로, 그 많은 인세를 어디다 썼는지 알 수 없지만 “하루 한 끼 먹고 배를 곯을망정 집 장만할 생각은 티끌만치도 없었다”고 한다.
횡보선생은 남과 대화하기 싫어했고 다방 같은 시끄러운 분위기를 피했지만 술을 한잔 마시면 가족들과 밤새워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고집불통이었다. 한번 자신의 생각이 굳어지면 자신의 생각을 뒤집는 법이 없었다. 그런 꼿꼿한 붓대로 평생 글을 쓴 것이다. 기자와 만났던 A 후손 이야기다.
“문예지 《현대문학》에 계신 분들이 우리 집에 다니셨다. 오영수·조연현·황순원씨가 오셨고, 김동리씨는 개인적으로 찾아오셨다. 당시 《현대문학》에서 아버지의 원고를 받으러 오셨던 분이 시인 박재삼씨였는데 그때가 1950년대니까 시인이 아주 젊었을 때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그 시절, 연말이면 각 신문사 신춘문예 최종심에 오른 소설 두 편을 가지고 기자들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낙점을 하셨다. 그렇다고 사례를 받으신 일이 없었다. 사례는 신문을 1년간 공짜 구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당선된 어느 문인이 인사차 선물을 들고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는 선물을 들고 집을 나서야 했다. 뇌물 같은 답례는 전혀 받지 않으셨으니까.
신문연재 소설을 쓸 때 기자들이 원고를 받으러 찾아왔다. 아버지가 원고 대신 약주를 권하시면 원고가 하루 이틀 더 늦어졌다. 결국 신문사 사장이 찾아왔다. 한번은 아버지께 ‘1주일치 원고는 (신문사에) 줘야 하지 않느냐’고 말씀드렸더니 저를 쳐다보고 웃으셨다.”
— 말년의 모습은 어떠셨나.
“아버지는 당신 식구와 집, 동네, 아현동 시장밖에 모르셨다. 시장 선술집에 가서 허름한 지게꾼들과 만나 담소하는 것을 즐기셨다. 괜찮은 선술집이 아니라 드럼통 앞에 막걸리를 서서 마시는 공간이었다. 막걸리 한 잔을 하시고 웃고 얘기하다 돌아오시는 일이 아버지의 낙이었다.
산책하시며 남의 집 문패를 바라보곤 하셨는데 글 쓸 때 등장인물의 이름 때문이었다. 그 시절엔 이름의 항렬이 중요했다. 이름 지을 때 메모하고 다니시던 기억이 난다.”
— 고집이 셌지만 자상하셨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글 쓰실 때 (가족들은) 집안에서 소리를 못 냈다. 방 문고리 잡아당기는 것도 몰랐을 정도다. 아버지가 (자식들) 방에 들어오시면 두 다리 뻗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무릎 꿇고 방석 위에 앉아야 했다. 집 안에서도 맨발로 있을 수 없었다. 누가 선물로 무언가를 줘도 어머니가 ‘받아라’고 하시면 받아야 했다.
대신 자상하셨다. 글 쓰시다가 혹은 약주 드시다가도 라디오에서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송민도’라는 뽕짝 가수가 나오면, 어머니를 부르셨다. 듣고 일하라는 뜻이었다.
제가 밖에 나갈 때는 신발이고 양말까지 한눈에 점검하셨다. 이상이 있으면 제게 말씀은 안 하시고, 어머니를 불러서 ‘얘 구두는 안 닦아 놓았냐’고 하셨다. 저희를 평생 끌어안고 사셔서 우리 형제들은 세상 어려운 줄 몰랐다. 우리 형제들은 수영을 못 배웠다. 물에 빠질까 봐 걱정이 돼 수영장에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참 많이 위하셨다. 아버지가 늦게 결혼해서 그러셨던가 보다.”
“일본 경찰이 서랍에 둔 돈뭉치, 거들떠도 안 봤다”
염상섭의 유유자적한 생활은 취중(醉中)뿐이었다. (만주에서 《만선일보》 편집국장을 할 때, 신문사를 그만두고 만주 ‘대동항건설주식회사’ 홍보담당 촉탁으로 일할 때는, 상당히 부유했다. 해방 이후 38선을 넘어 서울로 돌아오면서 재산을 사리원에 맡겨 두었지만 분단으로 영영 못 찾았다고 한다.)
A 후손의 계속된 말이다.
“이기붕씨가 서대문에 살 때였는데 파티나 송년회가 열리면 우리집에 수시로 왔다. 아버지는 한 번도 가신 적이 없었다. 무슨 작가협회 회장 뽑는다는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가서 옆사람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고 중립을 지키셨다. 저쪽에서 회장이 되면 이쪽 사람을 어렵게 만드니까…. 원고는 《자유문학》, 《현대문학》에다 똑같이 쓰셨지만 (양쪽 진영에) 나가시진 않았다. 외출을 해서 작가를 만나는 일도 없었고 젊은 후배를 만나시는 일도 드물었다. 아버지가 외로웠던 이유는 대학교수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교수였다면 따르는 제자가 많았을 테지만 혼자 글만 쓰셨다.”
소설가 박용구(朴容九)가 몇몇 문인과 함께 말년의 횡보를 찾아간 일이 있다. 횡보가 작고한 직후 횡보 특집으로 제작된 《현대문학》(1963년 5월호)에 그 사연이 실렸다.
〈“집이 아담하군….”
“이것 선생님 댁인가?”
일행은 잠시 대문 밖에서 이런 말을 주고 받았다.
횡보선생께서 워낙 청빈하게 사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하는 말들이었다. 후에 들으니 이 집은 횡보선생의 소유가 아니라고 하였고, 새삼 가슴이 무거워졌다. 일생을 문학에 바쳤어도 집 하나 제대로 소유할 수 없는 이 나라의 풍토가 원망스럽고 한심하기만 하였기 때문이었다.
예고 없이 우르르 몰려든 일행이었으나 횡보선생께서는 무척이나 반가워하여 주셨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니 외로워서….”
횡보선생은 몇 번이고 외롭다는 말을 되풀이하셨고, 시종 웃음을 띠우시고 이야기를 그칠 줄 모르셨다.〉(p54~55, 《현대문학》 1963년 5월호)
A 후손 이야기다.
“작가 조경희씨와 소설가 박경리씨 같은 분들이 집에 온 적이 있데, 그 시절만 해도 선배 작가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예의를 지키며 무릎을 꿇고 아버지를 만나거나 인터뷰했다. 묻고 싶은 질문만 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 외에 우리집에 출입하는 이가 없었다.”
횡보는 때론 저녁거리가 없어 쪼들렸을망정 자기 세계와 관찰에 대한 확신은 오만하리만큼 드셌다. “붓만 드시면 세상 아무런 잡념도 사라지는 성 싶게 몰입했다”고 후손은 전한다.
횡보의 친척인 B씨가 전하는 말이다.
“횡보선생은 마음에 드는 작품을 탈고하면 자녀들에게 젊은 시절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었다고 한다. 일본 교토(京都)부립 제2중에 다닐 때 작문수업 시간이었다. 당시 작문은 교장선생이 가르쳤는데 작문 시제가 ‘복조리 장사 소리로 시작되는 고향의 설날 풍경’이었다. 선생이 쓴 글을 교장이 감탄했고 전교생 800명 앞에서 읽히게 했다. 그의 글 솜씨 때문인지 학교 수위도 횡보를 볼 때마다 ‘렌상, 렌상’ 하면서 경례를 부쳤다고 전해진다.”
횡보는 1919년 3월 19일 재(在)오사카 조선노동당자 대표 명의로 오사카 덴노우치 공원에서 자신이 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시위를 도모했다. 그 결과 오사카 지방법원에서 금고형 10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해 6월 6일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B씨의 전언이다.
“오사카 덴노우치 공원에서 집결상황을 살피다 불심검문에 걸렸으나 횡보는 정확한 ‘도쿄 표준어’로 형사를 속였다고 한다. 횡보는 법정에서 스물셋의 나이에 늙은 재판장을 변호사도 대지 않고 자기변론으로 울린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곧잘 했다고 전한다. 재판장이 그에게 ‘법학을 배우라’고 권했을 정도였다. 횡보는 ‘문학이 아닌 법학을 했어야 했다’는 말을 했었다.”
횡보의 장남 재용씨와 기자생활을 같이 했던 이민호씨는 이런 말을 했다.
“염재용씨가 부친 얘기를 들려준 일이 있다. 횡보가 1920년 2월 독감에 걸려 하숙집에서 누워 있는데 《동아일보》 기자임명장이 전신환과 함께 도착했다. 빨리 몸을 추스르고 취재에 나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려던 사이토 미노루(齊等寬)를 어렵게 만나 인터뷰했던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일본 정계의 거물로 통하던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를 메이지대학 강연회장의 문전에서 붙들고 늘어져 기어코 회견한 일도 있었다고 자랑하곤 했다.”
《동아일보》 창간호 절반을 채운 염상섭의 기사는 일본의 저명 정치가, 학자, 경제인, 현직 고위관리의 축하 휘호와 축사, 인터뷰였다.
— 기자 시절 선생의 자부심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장남 염재용씨에 따르면, 어느날 횡보선생이 외출을 하고 와서 화를 내면서 ‘조병옥 박사의 회갑연에 기자들이 몰려와 거마비를 달라고 옥신각신하더라’는 얘기를 하더란다. 선생은 자신의 추억을 떠올리며 ‘총독부 출입기자 시절, 일본경찰이 서랍에다 돈뭉치를 넣어 두었지만 거들떠도 안 봤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말년의 횡보를 만났던 김종균 교수의 추억
A 후손은 한 가지 희미한 기억을 들려주었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고생하실 때 고려대 대학원생이 찾아왔다. 그분 이름이… 가물가물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도 찾아왔고 하관할 때 묘가 무너지지 않게 흙을 다지는 작업을 하는데, 일꾼들에게 술도 사 주고 뭘 해 줘야 하는지를 우리 가족이 몰랐었다. 그 대학원생이 끝까지 남아 일꾼들에게 막걸리를 사 주면서 묘소 주변을 다졌다고 한다. 참 고마운 분이다.”
후손이 말한 22살의 젊은 고려대 대학원생은 염상섭 연구의 권위자인 한국외대 김종균(金鍾均) 명예교수다. 지난 4월 5일 서울 종로에서 김 교수를 만나 횡보와의 옛 추억을 더듬었다.
“염상섭 소설은 누워 심심파적으로 읽는 소설이 아니었다. 많은 작품이 단행본으로 출판되지 않아 옛 신문이나 잡지를 뒤져 읽어야 했다. 나는 그의 작품을 통해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게 됐다. 횡보는 26편의 장편소설과 150편의 중단편 소설, 100여 편의 문학비평문, 수필 기타 잡문을 더해 총 47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나는 횡보선생의 작품을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그런 노력으로 만들어진 책이 《염상섭연구》(고려대 출판부, 1974년 刊)다. 전체 570쪽으로 당시엔 한 작가에 대해 이렇게 방대한 분량으로 쓴 연구서가 없었다.”
김 교수는 “나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한 일이다. 제자들이 나보고 ‘염종균’이라고 불렀고, 어떤 친구는 내 얼굴이 염상섭과 닮아 간다고 놀렸지만 그 말이 싫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작가 염상섭을 좋아했다”고 회고했다.
— 어떻게 염상섭을 찾아갔나.
“1962년 4월 21일 처음 찾아갔다.(김 교수는 날짜를 기억하는 이유로 평생 일기를 써 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삼양동 783-13번지로 찾아가는데, 봄날의 진흙을 밟으며 논두렁, 밭머리를 지나야 했다. 선생의 댁 앞에서 대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었다. 우두커니 서 있자니 한 젊은 청년이 나와서 용건을 물었다. ‘선생님을 뵈러 왔다’고 하니 ‘계시기는 하지만 편찮으셔서 아무런 말씀을 못하신다’는 답을 들었다. 뒤돌아 서려는데 고통에 찬 외마디 소리가 대문 밖까지 들렸다.”
— 다시 찾아간 때는 언제인가.
“그해 5월 21일이었다. 그 사이 이사를 다시 가셔서 성북동 145-52번지로 찾아갔다.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니 ‘어디 내가 논문감이 되나’고 하셨다. 선생을 따라 안방에 들어서는데 방 안엔 아무런 치장이 없었다. 논문을 준비하며 궁금했던 것들을 여쭈었다. 선생은 친히 연필로 메모도 해 주시고 틀린 부분을 지적도 하셨다. 주로 출생과 성장, 학창시절, 교토에서의 생활을 중심으로 말씀하셨다.
점심을 선생과 겸상하며 먹었는데, 나를 위해 마련한 밥상은 아니었겠지만 정갈했다. 선생은 그때도 반주를 드셨다. 감사하다는 인사말과 함께 일어서자, 선생이 벽장문을 여시더니 주섬주섬 몇 권의 책을 주셨다. 《모란꽃 필 때》 《이심》 《삼대》 《취우》, 그리고 신문 연재분 중 보관하셨던 원고, 자필이력서, 자필 작품 연보, 족보 초록 등이었다.”
“한점 부끄럼 없이 사셨다”
22살의 ‘대학원 1학년 김종균’은 한 달 뒤인 6월 5일 다시 성북동을 찾았다. “지금 생각하면 분명 염치없는 짓이었다”고 했다.
“선생은 오사카에서의 독립시위 당시를 말씀하실 때는 매우 신기가 좋아 보였다. 노동자들을 상대로 격문을 써 배포하던 일, 헌책방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를 샀던 일 등을 떠올리셨다.”
그다음 횡보선생을 찾아간 것은 그해 10월 16일이었다. 인터뷰 형식으로 질문을 하며 답변을 들었다. 김 교수는 “당시 병중이셨지만 자상하고 친절하게 일러주시고 격려도 해 주셨다. 그의 부인은 늘 함께 계셨고 집 안은 조용했다”고 기억했다.
김 교수는 이후 도서관에 파묻혀 본격적인 염상섭 작품 읽기에 빠져들었다. 신문과 잡지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차례로 읽으며 횡보가 남긴 글을 더듬어 갔다. 복사기가 보급되기 전이라 일일이 그 자리에서 작품을 찾아 읽어야 했다. “신대륙을 찾아 나선 탐험가의 기분이었다”고 했다. 책장을 넘기다 ‘염상섭’이란 활자가 눈에 띄면 “가슴에 어떤 충격을 느꼈다.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을 때의 기쁨과 같았다”고 했다.
“서고 안에서 신문 연재 장편소설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좀약 냄새가 코를 찌르고 여름에는 통풍이 안 되어 한증막 같으며, 겨울이면 서고 안에 난로가 없어 한기가 감돌았다. 등불마저 희미해 골머리가 아파 왔다. 젊은 시절이었지만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새 작품을 찾게 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이보다 어려운 일은 각 도서관에 없는 잡지를 구해 보는 일이었다. 당시 개인으로 많은 잡지를 소장하셨던 분이 김근수(金根洙) 선생과 백순재(白淳在) 선생이다. 이분들은 잡지를 그 자리에서 보여주기는 했어도 빌려주지 않았다. 한 편의 소설을 다 읽기 위해 하루는 김선생 댁, 이튿날은 백선생 댁, 다음 날은 중앙대 도서관이나 연세대 도서관을 찾아야 했던 일이 떠오른다.”
그러던 중 1963년 3월 14일 조간을 펴는 순간 깜짝 놀랐다. 횡보선생이 타계했다는 부고기사였다.
“3월 18일 오전 10시에 거행된 문단장(文壇葬)에 참석하고 그 길로 창동 천주교 묘지까지 갔다. 봄날이라 흙이 질었다. 영구차에서 내려진 관에는 흰 광목 띠가 있었고, 양쪽에서 관을 들 수 있는 손잡이가 있었다. 나도 그 한끝을 차지하여 묘지까지 관을 들고 갔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길은 미끄러웠다. 오후 4시쯤 장례식이 끝이 났다. 하늘은 낮게 드리워 있고 날씨는 포근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 염상섭 문학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서울 본토박이 염상섭은 서울 어디에도 자기 집 한 칸이 없었다. 염상섭이 돈과 권력으로부터 초연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롭게 살았음을 말한다. 문인 중에서 유일하게 친일의 오점을 남기지 않은 것도 돈과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염상섭은 결코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당당하게 한세상을 살았다.”⊙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가 《무정》으로 대표되는 한국 장편소설의 처녀지를 개척했다면, 또 금동(琴童) 김동인(金東仁)이 단편다운 소설(〈배따라기〉 〈감자〉)을 썼다면, 횡보(橫步) 염상섭은 중편소설(〈만세전〉 〈남충서〉 〈미해결〉 〈두 출발〉)로 한국소설의 근간을 세웠다. 춘원·금동과 함께 횡보는 한국 근대문학의 세 갈래 뿌리 중 하나다.
염상섭의 조부(廉仁湜)는 대한제국 시대 중추원 참의, 부친(廉圭恒)은 한일병탄 전까지 전주·가평·의성 군수, 맏형(廉昌燮)은 일본 육사를 나와 육군대위로 예편할 정도로 구한말 세도가였다.
그러나 염상섭 문학 연구자들은 그의 문학 근간이 항일감정에서 비롯됐다고 평가한다. 부친이 군수자리에서 물러나면서 반일의식이 자라나 작품 속 중요 모티브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식민지 신문기자로 당대 암울한 현실을 깊이 체험했다는 점 또한 염상섭 문학의 배경으로 작용한다.
염상섭은 1918년 일본 게이오(慶應)대 예과에 입학했으나 자퇴하고 이듬해 창간된 《동아일보》 정경부 기자가 되었다. 이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선생이 창간한 《동명(東明)》의 기자로 자리를 옮겼고, 부인 김영옥(金英玉)과 결혼하던 해인 1929년 《조선일보》 학예부장이 되었다. 1931년 《매일신보》 정치부장, 1936년 만주로 건너가 《만선일보》 초대 편집국장, 해방 후 귀국해서는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1946년 10월 창간)이 됐다. 그는 기자와 소설가의 길을 함께 걸었다.
“만약 기사가 나가면 각오하라”
염상섭은 김영옥과 결혼해 2남3녀를 두었다. 아들은 둘을 낳았다. 《경향신문》과 《동양통신》 기자를 지낸 장남 염재용(廉在瑢)은 이미 사망했다. 그는 “아버지 횡보를 닮아 말술이었고 성격이 대쪽 같았다”고 한다. 둘째 희경(廉喜瓊)은 《서울신문》 기자인 김재형과 결혼해 1남2녀를 두었다. 셋째 희영(廉喜英)은 독신으로 오래 독일에 머무르다 귀국해 현재 경기도 일산에 살고 있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온 막내 재현(廉在鉉)은 일산의 한 침례교회 목사로 사역 중이라고 한다. 둘째 딸 희정(廉喜貞)은 100일 만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자료조사를 해 보니, 횡보 자녀가 아버지를 회고하는 인터뷰를 한 적이 없었다. 소설가협회와 출판사 측에 문의하니, 횡보를 추억하는 행사에 유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간혹 셋째 딸(염희영)이 얼굴을 비친다는 얘기를 들었다.
2년 전 기자는 후손을 찾아갔지만 “제발 조용히 살게 내버려 달라”는 하소연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말년의 횡보선생 역시 문단교유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동료 문인과 어울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심지어 집안 내에 물건 부딪는 소리가 나도 상을 찌푸렸다는 것이다.
기자는 그동안 틈틈이 횡보의 작품을 한 편씩 읽어 갔다. 그가 해방 전에 쓴 소설은 별로 재미가 없었고 난삽했으며 유난히 길었다. 그러나 힘들게 한 편을 읽으며 느낀 기쁨은 오래 남았다. 해방 후에 발표된 소설은 해방공간의 이념과 이산(離散)의 혼란 탓인지 드라마틱했고 사회에 대한 풍자와 조소가 가득했다. 기자는 한국전쟁 당시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 《취우》를 읽으며 혹독했던 시절의 사랑을 떠올려 보았다. 단편 〈임종〉 〈두 파산〉 〈일대의 유업〉을 읽으며 인간에 대한 횡보의 냉혹한 탐구정신을 들여다보았다.
기자는 예고없이 작년 1월초 고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아내를 앞세워 다시 후손을 찾아갔다. 그는 불청객을 내쫓지 않았다. “인터뷰는 안 하겠다”면서도 오래 익은 선친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후손의 목소리는 갈라져 탁해졌다. 대화 도중에도 여러 차례 “만약 기사가 나가면 각오하라. 당신 회사를 들었다 놨다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며칠 뒤 다시 전화를 걸자 그는 “다신 전화도 하지 말라”며 냉정하게 수화기를 내렸다. 이후 더는 만남을 못 가졌지만 그의 말을 수첩 속에 메모해 두었었다. 이후 횡보의 방계 친척 몇 분을 만나 보았다. 익명을 전제로, 집안에 전해진 선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개비의 성냥도 헤프게 쓰지 말라”
 |
| 1935년 서울에서의 가족 사진. 부인 김영옥 여사, 장남 재용(당시 4살), 장녀 희경(2살). |
횡보선생은 남과 대화하기 싫어했고 다방 같은 시끄러운 분위기를 피했지만 술을 한잔 마시면 가족들과 밤새워 이야기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고집불통이었다. 한번 자신의 생각이 굳어지면 자신의 생각을 뒤집는 법이 없었다. 그런 꼿꼿한 붓대로 평생 글을 쓴 것이다. 기자와 만났던 A 후손 이야기다.
“문예지 《현대문학》에 계신 분들이 우리 집에 다니셨다. 오영수·조연현·황순원씨가 오셨고, 김동리씨는 개인적으로 찾아오셨다. 당시 《현대문학》에서 아버지의 원고를 받으러 오셨던 분이 시인 박재삼씨였는데 그때가 1950년대니까 시인이 아주 젊었을 때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그 시절, 연말이면 각 신문사 신춘문예 최종심에 오른 소설 두 편을 가지고 기자들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낙점을 하셨다. 그렇다고 사례를 받으신 일이 없었다. 사례는 신문을 1년간 공짜 구독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당선된 어느 문인이 인사차 선물을 들고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는 선물을 들고 집을 나서야 했다. 뇌물 같은 답례는 전혀 받지 않으셨으니까.
신문연재 소설을 쓸 때 기자들이 원고를 받으러 찾아왔다. 아버지가 원고 대신 약주를 권하시면 원고가 하루 이틀 더 늦어졌다. 결국 신문사 사장이 찾아왔다. 한번은 아버지께 ‘1주일치 원고는 (신문사에) 줘야 하지 않느냐’고 말씀드렸더니 저를 쳐다보고 웃으셨다.”
— 말년의 모습은 어떠셨나.
“아버지는 당신 식구와 집, 동네, 아현동 시장밖에 모르셨다. 시장 선술집에 가서 허름한 지게꾼들과 만나 담소하는 것을 즐기셨다. 괜찮은 선술집이 아니라 드럼통 앞에 막걸리를 서서 마시는 공간이었다. 막걸리 한 잔을 하시고 웃고 얘기하다 돌아오시는 일이 아버지의 낙이었다.
산책하시며 남의 집 문패를 바라보곤 하셨는데 글 쓸 때 등장인물의 이름 때문이었다. 그 시절엔 이름의 항렬이 중요했다. 이름 지을 때 메모하고 다니시던 기억이 난다.”
— 고집이 셌지만 자상하셨다고 들었다.
“아버지가 글 쓰실 때 (가족들은) 집안에서 소리를 못 냈다. 방 문고리 잡아당기는 것도 몰랐을 정도다. 아버지가 (자식들) 방에 들어오시면 두 다리 뻗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무릎 꿇고 방석 위에 앉아야 했다. 집 안에서도 맨발로 있을 수 없었다. 누가 선물로 무언가를 줘도 어머니가 ‘받아라’고 하시면 받아야 했다.
대신 자상하셨다. 글 쓰시다가 혹은 약주 드시다가도 라디오에서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송민도’라는 뽕짝 가수가 나오면, 어머니를 부르셨다. 듣고 일하라는 뜻이었다.
제가 밖에 나갈 때는 신발이고 양말까지 한눈에 점검하셨다. 이상이 있으면 제게 말씀은 안 하시고, 어머니를 불러서 ‘얘 구두는 안 닦아 놓았냐’고 하셨다. 저희를 평생 끌어안고 사셔서 우리 형제들은 세상 어려운 줄 몰랐다. 우리 형제들은 수영을 못 배웠다. 물에 빠질까 봐 걱정이 돼 수영장에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참 많이 위하셨다. 아버지가 늦게 결혼해서 그러셨던가 보다.”
“일본 경찰이 서랍에 둔 돈뭉치, 거들떠도 안 봤다”
 |
| 가족에게 자상하고 너그러웠던 횡보 염상섭 선생과 부인 김영옥 여사. |
A 후손의 계속된 말이다.
“이기붕씨가 서대문에 살 때였는데 파티나 송년회가 열리면 우리집에 수시로 왔다. 아버지는 한 번도 가신 적이 없었다. 무슨 작가협회 회장 뽑는다는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가서 옆사람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고 중립을 지키셨다. 저쪽에서 회장이 되면 이쪽 사람을 어렵게 만드니까…. 원고는 《자유문학》, 《현대문학》에다 똑같이 쓰셨지만 (양쪽 진영에) 나가시진 않았다. 외출을 해서 작가를 만나는 일도 없었고 젊은 후배를 만나시는 일도 드물었다. 아버지가 외로웠던 이유는 대학교수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교수였다면 따르는 제자가 많았을 테지만 혼자 글만 쓰셨다.”
소설가 박용구(朴容九)가 몇몇 문인과 함께 말년의 횡보를 찾아간 일이 있다. 횡보가 작고한 직후 횡보 특집으로 제작된 《현대문학》(1963년 5월호)에 그 사연이 실렸다.
〈“집이 아담하군….”
“이것 선생님 댁인가?”
일행은 잠시 대문 밖에서 이런 말을 주고 받았다.
횡보선생께서 워낙 청빈하게 사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하는 말들이었다. 후에 들으니 이 집은 횡보선생의 소유가 아니라고 하였고, 새삼 가슴이 무거워졌다. 일생을 문학에 바쳤어도 집 하나 제대로 소유할 수 없는 이 나라의 풍토가 원망스럽고 한심하기만 하였기 때문이었다.
예고 없이 우르르 몰려든 일행이었으나 횡보선생께서는 무척이나 반가워하여 주셨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니 외로워서….”
횡보선생은 몇 번이고 외롭다는 말을 되풀이하셨고, 시종 웃음을 띠우시고 이야기를 그칠 줄 모르셨다.〉(p54~55, 《현대문학》 1963년 5월호)
A 후손 이야기다.
“작가 조경희씨와 소설가 박경리씨 같은 분들이 집에 온 적이 있데, 그 시절만 해도 선배 작가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예의를 지키며 무릎을 꿇고 아버지를 만나거나 인터뷰했다. 묻고 싶은 질문만 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 외에 우리집에 출입하는 이가 없었다.”
횡보는 때론 저녁거리가 없어 쪼들렸을망정 자기 세계와 관찰에 대한 확신은 오만하리만큼 드셌다. “붓만 드시면 세상 아무런 잡념도 사라지는 성 싶게 몰입했다”고 후손은 전한다.
횡보의 친척인 B씨가 전하는 말이다.
“횡보선생은 마음에 드는 작품을 탈고하면 자녀들에게 젊은 시절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었다고 한다. 일본 교토(京都)부립 제2중에 다닐 때 작문수업 시간이었다. 당시 작문은 교장선생이 가르쳤는데 작문 시제가 ‘복조리 장사 소리로 시작되는 고향의 설날 풍경’이었다. 선생이 쓴 글을 교장이 감탄했고 전교생 800명 앞에서 읽히게 했다. 그의 글 솜씨 때문인지 학교 수위도 횡보를 볼 때마다 ‘렌상, 렌상’ 하면서 경례를 부쳤다고 전해진다.”
횡보는 1919년 3월 19일 재(在)오사카 조선노동당자 대표 명의로 오사카 덴노우치 공원에서 자신이 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시위를 도모했다. 그 결과 오사카 지방법원에서 금고형 10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해 6월 6일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B씨의 전언이다.
“오사카 덴노우치 공원에서 집결상황을 살피다 불심검문에 걸렸으나 횡보는 정확한 ‘도쿄 표준어’로 형사를 속였다고 한다. 횡보는 법정에서 스물셋의 나이에 늙은 재판장을 변호사도 대지 않고 자기변론으로 울린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곧잘 했다고 전한다. 재판장이 그에게 ‘법학을 배우라’고 권했을 정도였다. 횡보는 ‘문학이 아닌 법학을 했어야 했다’는 말을 했었다.”
횡보의 장남 재용씨와 기자생활을 같이 했던 이민호씨는 이런 말을 했다.
“염재용씨가 부친 얘기를 들려준 일이 있다. 횡보가 1920년 2월 독감에 걸려 하숙집에서 누워 있는데 《동아일보》 기자임명장이 전신환과 함께 도착했다. 빨리 몸을 추스르고 취재에 나서, 조선총독으로 부임하려던 사이토 미노루(齊等寬)를 어렵게 만나 인터뷰했던 일화가 전해진다. 당시 일본 정계의 거물로 통하던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를 메이지대학 강연회장의 문전에서 붙들고 늘어져 기어코 회견한 일도 있었다고 자랑하곤 했다.”
《동아일보》 창간호 절반을 채운 염상섭의 기사는 일본의 저명 정치가, 학자, 경제인, 현직 고위관리의 축하 휘호와 축사, 인터뷰였다.
— 기자 시절 선생의 자부심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장남 염재용씨에 따르면, 어느날 횡보선생이 외출을 하고 와서 화를 내면서 ‘조병옥 박사의 회갑연에 기자들이 몰려와 거마비를 달라고 옥신각신하더라’는 얘기를 하더란다. 선생은 자신의 추억을 떠올리며 ‘총독부 출입기자 시절, 일본경찰이 서랍에다 돈뭉치를 넣어 두었지만 거들떠도 안 봤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횡보와 술
외상장부 작성 시기는 1950년대 말부터 1962년까지로 장부에는 소속 기관·이름·외상값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출근도장 찍듯 찾아왔던 문인 중에는 하근찬·오상원·박재삼·정현종·최일남 등과 함께 횡보와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선생의 이름도 있었다. 횡보와 수주 모두 당대 주호(酒豪)들이었다. 언젠가 횡보는 만취가 되어 집 근처의 돌계단에 넘어져 아랫입술에 구멍이 날 만큼 많이 다쳤다. 당분간 술을 끊어야 했지만 그래도 술이 먹고파 마셨더니, 아랫입술 구멍으로 술이 새어 나왔다. 할 수 없이 횡보는 고개를 모로 젖혀 술을 마셨다. 문우들이 그를 보고 “횡보의 횡음(橫飮)”이라 놀렸다. 횡보(橫步)라는 아호도 술을 마신 뒤 걸음걸이가 남다르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
말년의 횡보를 만났던 김종균 교수의 추억
 |
| 한국외대 김종균 명예교수. |
“아버지가 병환으로 고생하실 때 고려대 대학원생이 찾아왔다. 그분 이름이… 가물가물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도 찾아왔고 하관할 때 묘가 무너지지 않게 흙을 다지는 작업을 하는데, 일꾼들에게 술도 사 주고 뭘 해 줘야 하는지를 우리 가족이 몰랐었다. 그 대학원생이 끝까지 남아 일꾼들에게 막걸리를 사 주면서 묘소 주변을 다졌다고 한다. 참 고마운 분이다.”
후손이 말한 22살의 젊은 고려대 대학원생은 염상섭 연구의 권위자인 한국외대 김종균(金鍾均) 명예교수다. 지난 4월 5일 서울 종로에서 김 교수를 만나 횡보와의 옛 추억을 더듬었다.
“염상섭 소설은 누워 심심파적으로 읽는 소설이 아니었다. 많은 작품이 단행본으로 출판되지 않아 옛 신문이나 잡지를 뒤져 읽어야 했다. 나는 그의 작품을 통해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게 됐다. 횡보는 26편의 장편소설과 150편의 중단편 소설, 100여 편의 문학비평문, 수필 기타 잡문을 더해 총 47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나는 횡보선생의 작품을 한 편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다.
그런 노력으로 만들어진 책이 《염상섭연구》(고려대 출판부, 1974년 刊)다. 전체 570쪽으로 당시엔 한 작가에 대해 이렇게 방대한 분량으로 쓴 연구서가 없었다.”
 |
| 횡보 염상섭 선생. |
— 어떻게 염상섭을 찾아갔나.
“1962년 4월 21일 처음 찾아갔다.(김 교수는 날짜를 기억하는 이유로 평생 일기를 써 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삼양동 783-13번지로 찾아가는데, 봄날의 진흙을 밟으며 논두렁, 밭머리를 지나야 했다. 선생의 댁 앞에서 대문을 두드려도 인기척이 없었다. 우두커니 서 있자니 한 젊은 청년이 나와서 용건을 물었다. ‘선생님을 뵈러 왔다’고 하니 ‘계시기는 하지만 편찮으셔서 아무런 말씀을 못하신다’는 답을 들었다. 뒤돌아 서려는데 고통에 찬 외마디 소리가 대문 밖까지 들렸다.”
— 다시 찾아간 때는 언제인가.
“그해 5월 21일이었다. 그 사이 이사를 다시 가셔서 성북동 145-52번지로 찾아갔다.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니 ‘어디 내가 논문감이 되나’고 하셨다. 선생을 따라 안방에 들어서는데 방 안엔 아무런 치장이 없었다. 논문을 준비하며 궁금했던 것들을 여쭈었다. 선생은 친히 연필로 메모도 해 주시고 틀린 부분을 지적도 하셨다. 주로 출생과 성장, 학창시절, 교토에서의 생활을 중심으로 말씀하셨다.
점심을 선생과 겸상하며 먹었는데, 나를 위해 마련한 밥상은 아니었겠지만 정갈했다. 선생은 그때도 반주를 드셨다. 감사하다는 인사말과 함께 일어서자, 선생이 벽장문을 여시더니 주섬주섬 몇 권의 책을 주셨다. 《모란꽃 필 때》 《이심》 《삼대》 《취우》, 그리고 신문 연재분 중 보관하셨던 원고, 자필이력서, 자필 작품 연보, 족보 초록 등이었다.”
“한점 부끄럼 없이 사셨다”
 |
| 작고하기 1년 전 장남 염재용과 함께 신문을 읽고 있는 염상섭 선생. |
“선생은 오사카에서의 독립시위 당시를 말씀하실 때는 매우 신기가 좋아 보였다. 노동자들을 상대로 격문을 써 배포하던 일, 헌책방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를 샀던 일 등을 떠올리셨다.”
그다음 횡보선생을 찾아간 것은 그해 10월 16일이었다. 인터뷰 형식으로 질문을 하며 답변을 들었다. 김 교수는 “당시 병중이셨지만 자상하고 친절하게 일러주시고 격려도 해 주셨다. 그의 부인은 늘 함께 계셨고 집 안은 조용했다”고 기억했다.
김 교수는 이후 도서관에 파묻혀 본격적인 염상섭 작품 읽기에 빠져들었다. 신문과 잡지 창간호부터 폐간호까지 차례로 읽으며 횡보가 남긴 글을 더듬어 갔다. 복사기가 보급되기 전이라 일일이 그 자리에서 작품을 찾아 읽어야 했다. “신대륙을 찾아 나선 탐험가의 기분이었다”고 했다. 책장을 넘기다 ‘염상섭’이란 활자가 눈에 띄면 “가슴에 어떤 충격을 느꼈다.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을 때의 기쁨과 같았다”고 했다.
“서고 안에서 신문 연재 장편소설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좀약 냄새가 코를 찌르고 여름에는 통풍이 안 되어 한증막 같으며, 겨울이면 서고 안에 난로가 없어 한기가 감돌았다. 등불마저 희미해 골머리가 아파 왔다. 젊은 시절이었지만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새 작품을 찾게 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이보다 어려운 일은 각 도서관에 없는 잡지를 구해 보는 일이었다. 당시 개인으로 많은 잡지를 소장하셨던 분이 김근수(金根洙) 선생과 백순재(白淳在) 선생이다. 이분들은 잡지를 그 자리에서 보여주기는 했어도 빌려주지 않았다. 한 편의 소설을 다 읽기 위해 하루는 김선생 댁, 이튿날은 백선생 댁, 다음 날은 중앙대 도서관이나 연세대 도서관을 찾아야 했던 일이 떠오른다.”
그러던 중 1963년 3월 14일 조간을 펴는 순간 깜짝 놀랐다. 횡보선생이 타계했다는 부고기사였다.
“3월 18일 오전 10시에 거행된 문단장(文壇葬)에 참석하고 그 길로 창동 천주교 묘지까지 갔다. 봄날이라 흙이 질었다. 영구차에서 내려진 관에는 흰 광목 띠가 있었고, 양쪽에서 관을 들 수 있는 손잡이가 있었다. 나도 그 한끝을 차지하여 묘지까지 관을 들고 갔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길은 미끄러웠다. 오후 4시쯤 장례식이 끝이 났다. 하늘은 낮게 드리워 있고 날씨는 포근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 염상섭 문학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서울 본토박이 염상섭은 서울 어디에도 자기 집 한 칸이 없었다. 염상섭이 돈과 권력으로부터 초연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유롭게 살았음을 말한다. 문인 중에서 유일하게 친일의 오점을 남기지 않은 것도 돈과 권력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염상섭은 결코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당당하게 한세상을 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