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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書架 ⑧ 고미술 감정가 김영복(金榮福) 옥션온 대표

“한문 교육은 백년지대계”

글 : 하주희  월간조선 기자  everhope@chosun.com

사진 : 조준우  월간조선 객원사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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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가의 문제는 양심의 문제. 결국 최종 책임은 구입한 이에게 있다”
⊙ “안목은 타고나는 것. 타고난 미감 없는 이가 미술계에 많아지면 좋지 않다”
⊙ “모든 문화재를 국내에 끼고 있을 필요는 없다. 50년 이상 된 문화재 반출하려면
    문화재청 허가받아야 하는 제도는 재검토되어야”
⊙ “학교에서 한문을 미리 배워놔야 깊은 미술사 연구가 가능하다”

김영복
1954년생. 중동고 졸업 / 노촌 이구영, 백아 김창현, 소당 윤석오, 청명 임창순 사사 /
〈TV쇼 진품명품〉 감정위원, 옥션온 대표
  한자를 잘 안다는 이유로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얼결에 취직했다. 한문 선생님의 추천으로 인사동 통문관에 들어간 것이다. 이곳은 고서점의 총본산이자 인사동의 터줏대감이다. 소년은 책더미 속으로 들어갔다. 책 정리하고 손님 응대하며 고서를 찾는 당대의 지성을 지켜봤다. 이희승, 양주동, 남광우… 그 시절 소년은 자신이 평생의 업을 만났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김영복 옥션온 대표는 ‘도제식’으로 고미술 감정을 익혔다. 1975년부터 1990년 초까지 통문관에서 일했다. 군 복무 기간을 빼면 13년이다. 이후 문우서림을 차려 독립했다. 2005년부턴 〈TV쇼 진품명품〉에서 감정위원으로 시청자를 만난다. 일주일에 한 번은 지방으로 묻혀 있는 보물을 찾아나선다.
 
 
  45평 아파트에 1만5000권 빼곡
 
김 대표는 함석헌 선생에게서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라는 가르침을 들었다고 했다. 함 선생의 자필 서명이 있는 함 선생의 저서.
  평생 인사동에서 살 것 같던 그가 서울 강남으로 출근하기 시작한 건 지난해 11월 옥션온 대표이사를 맡으면서부터다. 옥션온은 K옥션의 관계사인 온라인 경매회사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 자택에 들어서자 책더미가 눈에 보였다. 문간방 하나는 책으로 꽉 차 있었다. 입구로 가는 복도도 책이 점령하고 있었다. 집 전체가 서재였다. 고서만 있을 줄 알았는데 역사서, 철학서도 보였다. 그런데도 책더미가 답답하게 보이지 않았다. 책도 집주인의 쾌활함을 닮은 듯했다. 함께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책이 몇 권이나 있는 겁니까.
 
  “1만5000권가량 됩니다. 여기 말고도 더 있어요. 인사동 사무실에도 있고, 책만 보관해 놓는 창고도 따로 있고.”
 
  ― 가족들이 불평 안 합니까.
 
  “아내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책 가지고 밥 먹는 사람인데 당신이 책을 퇴치하려 하면 안 된다.’ 가족들은 제가 책을 어디에 놓으면 그 책을 함부로 못 옮겨요. 제가 못 찾으니까요. 한번 잘못 놓으면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그런 식으로 못 찾는 책이 몇 권 있어요. 거의 모든 책의 위치가 머릿속에 있는 셈이지요. 다행히 아내가 이해를 해줍니다.”
 
  ― 아파트가 몇 평인가요.
 
  “45평입니다. 1976년부터 책을 샀는데 군대 가면서 오륙천 권 되는 책 가운데 반을 없앴지요. 《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이런 돈이 될 만한 책을 그때 많이 정리했습니다. 초창기엔 사서삼경, 노자, 장자, 순자, 한비자, 사마천의 《사기》 같은 책을 사모았어요. 장자나 성경은 함석헌 선생님 쫓아다니며 읽기 시작했지요.”
 
  ― 함석헌 선생은 어떻게 만나신 겁니까.
 
  “1976년 서울 정동교회의 젠센기념관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김영호 목사, 변선학 목사, 윤성범 교수 이런 분들도 거기서…. 함 선생님을 만난 후, 토머스 칼라일이나 헨리 소로, 랠프 에머슨의 책을 읽었습니다.”
 
  ― 쟁쟁한 분들을 다 서점에서 봤지요.
 
  “이희승, 양주동, 두계 이병도, 이가원처럼 당대의 난다 긴다 하는 양반들은 다 통문관에 왔습니다. 예전에는 외상으로 책을 사는 일이 많았어요. 설이나 추석에 오셔서 외상값을 갚으셨지요. 처음엔 돈 때문에 일했는데 제대 후 생각이 달라졌어요. 오라는 대학이 있었는데 통문관으로 돌아갔지. 지금 생각하면 잘한 결정이었어요.”
 
  ―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통문관 주인 이겸로 선생께서 친할아버지처럼 신경 써주셨어요. 그분의 꼼꼼함, 성실함을 옆에서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온 분인데 직접 책을 쓰기도 하셨지요.”
 
  ― 대학을 포기하고 현장을 택하셨습니다.
 
  “대학교수들을 만나보니까 대학에 욕심이 안 나더군요. 대신 다른 공부를 했어요. 청명 임창순 선생 밑에서 한문을 1년 배웠지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하나를 읽으면 열을 알던 때였어요. 독학을 많이 했어요. 초서 공부도 했습니다.”
 
  — 노촌 이구영 선생을 만난 것도 그즈음인가요.
 
  “노촌 선생은 6·25 때 월북했다가 1957년에 남한에 내려와서 장기수로 복역했습니다. 1980년에 출소했지요. 그때 감옥에서 신영복 교수를 만나 한문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분이 나중에 제게 서당을 물려줬어요. 예전에 신 교수가 무슨 글을 쓰려 북한산을 가신다고 해서 제가 안내했습니다. 그때 우스갯소리로 그랬지요. ‘김영복이 안내하고 신영복이 글을 쓴다.’ 노촌 선생께는 통일이나 역사 문제를 배웠어요.”
 
  ― 스승 복을 타고나셨나 봅니다.
 
  “조선시대의 스승은 지금 흔히 말하는 스승과 좀 다릅니다. 숙사, 즉 서당 선생이라는 뜻입니다. 진짜 스승은 학통을 가져야 합니다. 우암 선생 학통 하는 식으로요. 그렇게 말하자면 제게도 학통이 몇 분 있습니다. 6·10 만세사건 주동자였던 이동환 선생께 한문을 배웠어요. 임창순 선생, 백아 김창현 선생께도 가르침을 청했지요. 학문하면서 세상 살면서, 어렵거나 의심이 갈 때 찾아가서 상의할 수 있는 분들이 있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 지금까지도 가슴에 담고 있는 가르침이 있습니까.
 
  “세상은 결과가 중요하다지만 함 선생님은 과정이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경제인과 정치인들은 함 선생님 얘기를 꼭 새겨들어야 해요.”
 
 
  기적처럼 재등장한 다산의 하피첩
 
김 대표는 다산 정약용의 하피첩을 만난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 12년째 〈TV쇼 진품명품〉에서 수많은 골동품을 감정하셨지요. 잊지 못할 작품이 있습니까.
 
  “하피첩이죠. 아마 평생 못 잊을 겁니다.”
 
  하피는 중국에서 혼례를 올리는 신부가 입던 예복을 일컫는 말이다. 다산 정약용은 1789년 과거에 급제했다. 창창할 것 같았던 그의 앞길을 당쟁이 막았다. 1801년부터 기약없는 귀양살이를 시작했다. 다산이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부인 홍씨가 1810년 치마 한 벌을 보냈다. 시집올 때 입었던 그 치마였다.
 
  다산은 치마로 서첩을 꾸몄다. 자식과 후손에게 남기는 글로 정성스레 채운 것이 하피첩이다. 6·25 때 사라졌던 책의 존재가 〈진품명품〉을 통해 알려졌다. 출품자는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한 노인이 파지를 수집하러 왔는데 수레에 골동품 같은 고서가 있기에 파지 더미와 고서를 바꿨다고 했다. 그는 2년 후인 2006년 감정을 의뢰했다.
 
  김 대표는 사진으로 감정품을 보는 순간 몸이 떨렸다고 했다. 논의 끝에 의뢰인에게는 진품 여부를 사전에 알려주지 않고 녹화했다. 감정가는 1억원이었다. 의뢰인은 귀가하는데 손이 떨려 운전을 제대로 못 했다고 한다.
 
  ― 감정가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이는 없었습니까.
 
  “낮춰달라는 사람, 높여달라는 사람, 다 있어요. 너무 비싸면 집안에 다툼이 일어나거든요. 그렇다고 감정가를 고무줄같이 늘였다 줄였다 할 수는 없지요. 다만 10% 정도는 융통성 있게 해드립니다.”
 
  ― 골동의 세계에선 ‘골동은 주인을 고른다, 주인이 따로 있다’는 말이 있지요.
 
  “물각유주(物各有主)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 있어도 나에게 왔는데 그때 돈이 없으면 못 사지 않습니까. 불교에선 인연이라고 하지요. 예전에 《소학질서》를 산 적이 있어요. 어느 아전이 필사한 것인데 가만히 보니 제가 갖고 있는 어느 책이랑 글씨가 비슷한 거야. 대조해 보니 필사자가 같습디다. 20년 간격을 두고 산 건데도 말이지요. 책이 절 찾아왔다고 할 수밖에 없지요.”
 
 
  3년 월급 날리고 추사 연구 매진
 
현관을 들어서면 보이는 풍경.
  ― 추사 김정희를 오래 연구하셨지요.
 
  “추사라는 분은 공부하면 할수록 끝이 없는 분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이 양반에게 글씨를 청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지요. 수준이 안 맞으면 같이 어울리겠습니까. 요즘도 그렇잖아요. 처음 한두 번은 사업 때문에 만날 순 있어도 서너 번 이상은 수준이 안 맞으면 못 만나요.”
 
  ― 추사 글씨에 얽힌 일화도 있다고요.
 
  “2~3년치 봉급을 한 번에 날린 적이 있어요. 추사의 글씨라고 샀는데 아니었던 겁니다. 그게 엄청난 공부가 됐어요. 속이 쓰려 그 후 더 추사를 파고들었으니까요.”
 
  ― 추사 글씨에 특징이 있습니까.
 
  “추사의 글씨를 시기에 따라 분류합니다. 제주도 유배 전에는 글씨가 예쁘고 날카롭다는 장점이 있고 유배 후로는 조형적으로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어요. 말년에는 그 모든 걸 다 타파하고 쓰고 싶은 대로 썼습니다.”
 
  ―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글씨가 있다면.
 
  “하나를 꼽자면 ‘진흥북수고경’입니다. 추사가 함경도에 귀향 갔을 때 쓴 거예요. 이때 황초령 진흥왕순수비를 보존하기 위해 비각을 만들었는데 이 비각 위에 쓴 글씨입니다. 추사가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후배 윤정현이 감찰사로 오자 세운 건데, 추사는 비문에 자기 이름도 못 넣었어요. 물론 추사가 아닌 다른 사람은 쓸 수 없는 글이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지요.”
 
  ― 옛 문인 중 저평가된 인물은 누가 있습니까.
 
  “예를 들면 한석봉을 우린 너무 우습게 봐요. 어머니가 떡을 썰었다는 얘기, 사실은 고사에도 없어요. 글씨는 정말 좋습니다. 그분의 시도 좋은데 알려져 있지 않아요.”
 
 
  소장자도 진짜인지 몰라
 
박태원 작가가 자필로 쓴 엽서. 김 대표가 아끼는 소장품 중 하나다.
  ― 내내 인사동에 계시다가 강남으로 옮겨가셨습니다.
 
  “K옥션이 고미술 분야를 활성화하려 한다니 힘껏 도와야지요. 고미술계 자체에 문제가 있지요. 첫째, 진가(眞假)입니다. 두 번째론 감정가가 작품 가치에 맞춰 형성되는 게 아니라 들쑥날쑥하다는 거고요.”
 
  ― 감정가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정상 아닙니까.
 
  “IMF가 벌써 이십여 년 전 얘기인데, 그림 값은 그때보다 쌉니다. 90년대 초에 우리나라 그림 값이 이상하게 흘러갔어요. 당시 떠돌던 돈이 엉뚱하게 흘러서 미술시장을 왜곡한 겁니다.”
 
  ― 인사동이 불신을 받는 건 진가의 문제 때문이 아닙니까.
 
  “진가는 양심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사는 사람도 노력해야 해요. 물건을 샀는데 문제가 생기면 최종적으론 산 사람 탓이지 판 사람 탓이 아닙니다.”
 
 
  문화재 해외 반출 제도 재검토해야
 
  ― 문화재와 관련해 제도상의 문제는 없습니까.
 
  “50년 이상 된 유물들은 해외로 반출하려면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연도가 오래된 것들은 직원들이 허가를 안 해줍니다. 문제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일본 같은 경우는 국보 등의 문화재를 빼면 반입 반출이 자유롭습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에게 들은 얘기예요. 한국관을 꾸며서 전시를 하고 싶은데 소장한 문화재가 들쑥날쑥한 겁니다. 어떤 분야는 많고, 어떤 분야는 부족한 식으로요.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전시하고 싶은데 구할 데가 없는 겁니다. 여기서 나갈 수가 없으니까요.”
 
  ― 해외 문화재 환수운동이 활발합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들이 외국에 있다면 가져와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있는 것들이라면 왜 굳이 가져와야 합니까. 외규장각 의궤도 그렇습니다. 일부는 가져와야지요. 전부를 가져올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미 우리에게도 꽤 있으니까요. 다만 약탈당했다는 점이 문제인데, 형식상으로라도 반환을 받고 그 후에 우리가 기증하는 식으로 하면 됩니다.
 
  문화재 환수운동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다른 나라에 경종을 울릴 수 있으니까요. 다만 우리나라에 여러 점이 있는데도 굳이 다 가져와야 한다는 게 잘못됐다는 겁니다.”
 
  ― 고서 수집의 ‘선수’는 몇 명이나 있습니까.
 
  “기십 명은 될 겁니다.”
 
  ― 다들 서로 알겠네요.
 
  “대충 서로 다 알지요.”
 
  ― 일화도 있겠습니다.
 
  “책을 다들 좋아하다 보니 도둑질도 하고 야료도 부리고 친구의 소장품을 뺏어오기도 하지요. 예전에는 좋은 골동을 사면 친구들이 딱 옵니다. 도자기 두고, 그림 걸어놓고 감상하는 거죠. 그리고 수집한 사람이 술을 삽니다. 직지사의 흥선스님을 제가 참 좋아합니다. 그분이 ‘그림이나 글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공공의 목적으로 빌려달라 하면 빌려줄 의무가 있다’고 하셨어요.”
 
  ― 좀 다른 얘깁니다만, 한때 간송미술관의 전시 방식에 대해 논란이 일었지요. 일 년에 두 번만 일반에 공개하고, 연구자들에게도 잘 공개를 안 했잖아요.
 
  “저는 간송이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우리 미술사 수준이 높은 편이지요. 예전엔 이렇지 않았어요. 이렇게 되기까진, 서울대 안희준 교수님 덕이 크다고 봅니다. 그분이 우리 미술사의 틀을 잡았다고 볼 수 있어요. 어떤 수준에 오르지 않았는데 미술을 공개하면, 해설도 잘 안 됐을 겁니다. 지금은 공개하는 쪽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간송이 가지고 있는 자료 중에 그 작가에 대해 모르는 작품이 꽤 있을 겁니다.”
 
  ― 젊은 세대가 가면 갈수록 한문에서 멀어져서 우려됩니다.
 
  “미술사는 한문을 알아야 합니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으니 한문 공부를 따로 해야 하지 않습니까. 중·고등학교 때 한자 천 자만 가르치면, 대학교 가서 이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퇴보하는 겁니다. 자료는 계속 발굴하고 있는데, 깊이 있게는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 요즘 공교육에서 한자가 빠졌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한자를 거의 모른다고 봐야 하는데요.
 
  “백년지대계를 생각해야지, 멍청한 거예요. 한문 전문가로 육성하자는 얘기가 아니에요. 학교 졸업하고 영어 구사하는 정도로만 한문을 알아도 충분합니다. 일단 한문을 배우면 일본, 중국에 갔을 때 굉장히 편해요. 가능하다면 앞으로 초등학교, 중학교에서는 서예, 한문, 국악 세 가지를 일주일에 한 시간씩 필수로 가르쳤으면 합니다.”
 
  ― 미술품 보는 안목은 어떻게 하면 길러집니까.
 
  “안목은 노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보는 눈이나, 듣는 귀는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 타고나야 한다고 봅니다. 음감과 미감은 어느 정도 타고나야 한다는 말이지요. 한국에서 미술 하는 사람들은 미안하지만 50% 정도는 안목이 없습니다. 반면에 음악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귀가 열려 있습니다. 미감이나 음감이 없어도 어릴 때 어느 정도는 가르쳐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 하면 안 됩니다. 미감이 없는데 미술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미술계가 어려워지는 겁니다.”
 
  ― 스스로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전 반반쯤이라고 생각합니다. 집안 내력도 사실 중요합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확실히 그런 게 있어요. 글씨를 제일 잘 쓰는 집안이 창녕 조(曺)씨 집안입니다. 그 집안은 확실히 글씨를 잘 씁니다. 그런 걸 보면 타고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 제자는 안 기르십니까.
 
  “앞으로 하려 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책하고 글씨는 어려운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경제적 여유입니다. 이런 일을 하려는 사람은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당장은 돈을 못 벌잖아요. 학교에서 가르치기엔 도제식 교육이 안 돼서 한계가 있고요.”⊙
 
김영복이 추천하는 책

 

  《대동여지도》
  영인본 김정호
  “인문지리 쪽에 관심이 많아 여기저기 다니는데, 여기에 아주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아주 잘 만든 책이에요. 서울 지도를 보면 한강이 두 줄기로 흐르다가 어느 순간 한 줄기로 만나거든요. 두 줄로 나와 있는 곳은 배가 들어가는 곳, 한 줄은 배가 못 들어가는 곳을 뜻해요. 그 정도로 디테일하게 해놓은 겁니다. 소설가 김성동씨가 저를 찾아왔어요. 조선시대에 밥상을 차려줄 때 밥상 위에 그릇은 무엇이었는지, 젓가락은 어떤 젓가락을 썼는지, 반찬은 어떤 반찬이었는질 물었어요. 이걸 얘기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거예요. 이건 굉장히 심각한 얘깁니다. 아직 그 정도로 연구가 안 되어 있다는 거지요.”
 

  《고독의 반추》
  윤오영/관동출판사
  “고등학교 선생으로 있다가 고졸 출신이라고 쫓겨난 분이에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망이 깎던 노인〉이 이분 글이지요. 정민 교수가 빌려가더니 이렇게 표지를 씌워서 돌려주더라고요.”
 
  《조선종전의 기록》
  모리타 요시오/암유당서점
  “8·15 때 조선에 있던 일본사람들의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대단한 책이에요. 일본인들이 어떻게 일본으로 철수했고 어떤 식으로 행동했는지 명료하게 알 수 있습니다.”
 
  《조선구전민요집》
  김소운/일본동경제일서방
  “제 고향이 강원도 원주입니다. 이 책이 얼마나 구전민요를 잘 담고 있는지 고향 부분을 찾아보고 알았어요. 어릴 때 부르던 노래가 고스란히 나와 있더군요.”
 
  《남한강》
  신경림/창작과비평사
  “신경림 시인의 대서사시 모음입니다. 식민 직전 시기부터 해방 후까지를 더듬는 고향에 대한 기록입니다. 충주에서 제 고향 원주를 거쳐 서울로 가는 여정이 시로 펼쳐져 있습니다.”
 
  《농무》
  신경림/현대문학사
  시인의 대표 시집. ‘농무’란 말은 시인이 만든 조어다. 농악을 하며 추는 춤이란 의미다. 1960년대 농촌과 민중의 모습을 한순간으로 포착해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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