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부터 이메일 행복편지 배달… 500명에서 700명으로 늘어
⊙ 11월 초 행복편지 글 모아 아홉 번째 책 발간
⊙ 預保 특별조사부장, 정리금융공사 사장 역임… 한때는 기업의 ‘저승사자’로 불려
朴市浩
⊙ 60세. 중앙대 경영학과, 동국대 법무대학원 졸업.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 재경부총리 비서관, 정리금융공사 사장, 우체국예금보험지원단 이사장 역임.
⊙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 겸 행복편지 발행인, 사진가.
⊙ 11월 초 행복편지 글 모아 아홉 번째 책 발간
⊙ 預保 특별조사부장, 정리금융공사 사장 역임… 한때는 기업의 ‘저승사자’로 불려
朴市浩
⊙ 60세. 중앙대 경영학과, 동국대 법무대학원 졸업. 서울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 재경부총리 비서관, 정리금융공사 사장, 우체국예금보험지원단 이사장 역임.
⊙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 겸 행복편지 발행인, 사진가.

- 우체국예금보험지원단 이사장에 재직할 당시 박시호씨가 선보인 ‘감성경영’은 두고두고 회자한다. 전체 직원을 1대 1로 만나 얼굴사진을 찍으며 조직문화를 바꾸었다. 그 결과 3년 연속 우수공기업 평가를 받았다. 그의 등 뒤로 직원들의 사진이 보인다.
그는 때로 못난 아빠·남편이 되곤 하지만, 타인이 자신에게 상처를 주도록 허락하지 않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는 또, 상처를 두려워해야 할 만큼 늙지도, 도전을 포기해야 할 만큼 나약하지도 않다.
매일 오전 일곱 시, 행복을 보내는 멋쟁이 남자에 대한 얘기다.
행복경영연구소 이사장이자 ‘행복편지’ 발행인 박시호(朴市浩)씨는 700명의 지인들에게 매일 아침 행복편지를 이메일로 보내고 있다. 배달한 편지 중 일부를 모아 책으로 출판하고 있는데, 지난 11월 초 아홉 번째 책을 완성했다. 책의 수익금은 좋은 곳에 기부한다.
서울 신사동에서 만난 그는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일상에서 쉽게 만들 수 있다”는, 알듯 말듯한 얘기부터 시작했다.
“하루 중 재미있는 일은 몇 번이나 있습니까? 하루 중 감탄하는 일은 몇 번이나 있습니까?”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하루 중 기분 좋은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하루 중 미소는 몇 번이나 짓습니까? 칭찬은 얼마나 하십니까?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질문을 쏟아내더니 모범답안까지 말했다. “행복은 늘 내 곁에서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데 느끼지 못하고 흘러가게 하는 일이 많다”며 “행복한 사람의 눈에는 행복만 보이고, 불행한 사람의 눈에는 불행만 보인다”고 말했다. 그의 행복론은 거침없어 보였다.
박시호 발행인은 다양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다. 국회 보좌관, 경제부총리 비서관을 거쳐 IMF가 터졌을 때는 예금보험공사(예보) 특별조사부장, 정리금융공사 사장, 우체국예금보험지원단 이사장을 지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강연과 여행, 출판, 사진촬영 등으로 인생 후반기를 새롭게 물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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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직생활을 마친 뒤 그는 강연과 저술, 사진촬영 등으로 제2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다. |
〈…몇 년간 남편 병 수발을 하던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죽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이렇게 말했습니다.
“병상에 누워만 있었어도 남편이 있을 때가 든든했어요.”
남편이 아내에게 줄 가장 큰 선물은 돈도 아니고 꽃도 아니고 ‘든든함’입니다. …〉
이 사연을 읽은 독자의 마음도 ‘든든함’으로 채워졌으리라.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제가 국회에 있을 때 나중에 국회의원에 출마할 생각이 있었어요. 정치인들이 출판기념회를 하잖아요. 그래서 틈틈이 글도 쓰고 좋은 글도 모았는데, 제가 어느 모임의 대표를 맡으면서 모아 둔 글을 인사문에 첨부해서 보내기 시작했어요.”
박시호의 행복편지는 딱 700명에게만 전달된다. 그러나 그의 편지를 받은 이가 주변의 지인들과 공유, 10만명이 넘는 사람이 그의 편지를 훔쳐보고 있단다.
“왜 700명이냐고요? 몇 년 전만 해도 500명에게만 보냈어요. 구글 메일을 쓰는데 무료로 한 번에 보낼 수 있는 양이 500통이거든요. 그래서 구글이랑 싸웠어요. 구글에 저를 전담하는 직원까지 생겼어요. 지금은 월 사용료를 내고 유료메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행복에 포섭된 700명의 독자
700명의 행복편지 독자들은 그냥 ‘포섭’한 게 아니다.
“일단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어야 해요. 누군지도 모르는 이에게 일방적으로 뿌리기 싫어요. 저와 일면식이 없는 분이 메일수신을 원하면, 이력서와 사진을 받은 후 일단 만나 보고 편지를 보낼지 말지를 결정해요.
또 제가 메일을 보내도 받기만 하고 의견을 안 주거나 소통을 안 하는 분이면 가차 없이 잘라 버립니다. 그래야 만남이 계속되거든요.”
—상당히 까다롭네요.
“어느 부장판사가 행복편지를 받고 싶다는 겁니다. 제가 그랬죠. 이력서와 사진을 보내라고요. 그랬더니 진짜로 보내 왔어요. 서초동에서 만났죠. 서로가 잘 맞았는데 이분이 창원지법원장으로 내려가게 됐어요. 축하의 뜻으로 제가 찍은 사진을 액자에 담아 보냈더니 ‘예술법정(藝術法庭)’을 만들고 싶다는 겁니다. 외국 법원은 법정에 예술품이 전시돼 있는데 우리는 서늘한 빈 벽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제안했죠. ‘필요한 만큼 작품(사진)을 선물하겠다. 또 지인을 통해 예술작품을 더 보내겠다. 창원지역 예술가협회 도움을 받아 법정을 바꾸면 어떻겠느냐’고요.”
창원지법은 강민구(姜玟求·현 부산지법원장) 법원장 취임 후 형사·민사·소년법정과 8개의 조정실에 100여 점의 예술품을 전시, 예술법정을 현실화시켰다. 그러자 삭막하던 진주지원과 밀양지원, 통영지원, 거창지원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박시호 발행인은 “처음엔 법원 직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민원인은, 대법원은, 심지어 언론은 어떻게 반응할까 고민이 많았는데 의외로 너무 좋아했다”며 “이제는 경남지역 외에도 부산고법과 대전고법, 수원지법(안양지원)으로 예술법정이 확대됐다”고 했다.
“행복편지 가족들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음을 느껴요. 그래서 저부터 행복해지려 합니다. 제가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남에게만 이렇게 살자, 저렇게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닌지 많은 반성도 하게 돼요.”
—어떤 사연으로 행복편지들을 채웁니까.
“일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요. 하지만 저 혼자 하긴 힘들어요. 행복편지 가족들이 보내 온 사연, 어느 글이 좋더라,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내용을 싣기도 하죠.
소재는 아주 다양해요. 그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감동적인 이야기고, 인생을 사는 데 귀감이 되는 내용, 화목한 부부 이야기,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이야기 등입니다. 요즘은 가을이고 해서 좋은 시 한 편씩 소개하고 있죠.”
기자에게 보낸 오늘자(11월9일) 행복편지에는 나태주 시인의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라는 시를 담았다.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너무 섭섭하게 그러지 마시어요 하나님, // 저에게가 아니에요 / 저의 아내 되는 여자에게 그렇게 하지 말아 달라는 말씀이어요 // 이 여자는 젊어서부터 병과 함께 약과 함께 산 여자예요 / 세상에 대한 꿈도 없고 그 어떤 사람보다도 죄를 안 만든 여자예요 // 신발장에 구두도 많지 않은 여자구요 / 한 남자 아내로서 그림자로 살았고 / 두 아이 엄마로서 울면서 기도하는 능력밖엔 없었던 여자이지요 // 자기의 이름으로 꽃밭 한 평 채전밭 한 뙈기 가지지 않은 여자예요 / 남편 되는 사람이 운전조차 할 줄 모르고 쑥맥이라서 / 언제나 버스만 타고 다닌 여자예요 // 너무 그러지 마시어요 / 가난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 / 저의 아내 되는 사람에게 너무 섭섭하게 하지 마시어요〉
저승사자에서 행복교 敎主가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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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시호씨는 가끔 ‘충성도가 높은’ 행복편지 독자들과 만나 영화관람도 하고 여행도 떠난다. |
1996년 설립된 예보는 금융기관에서 보험료를 받아 금융기관의 파산 때 고객들의 예금을 대신 지급해 주는 기관이다. IMF 위기 이후에는 기업부실로 어려워진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조사부에는 부실금융기관, 은닉재산 추적, 부실기업을 특별조사하는 3개 부서가 있었는데 그는 조사1부장이었다.
“나웅배(羅雄培) 경제부총리와의 인연으로 국회에 처음(1981년) 왔는데 그땐 ‘권력’이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끝나고 노태우(盧泰愚) 정권이 들어서자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떠나더군요. 권력이 무상해요. 그런데 뭐랄까, 전두환 정권 때 눈치를 보던 그룹사 회장들은 정권이 바뀌어도 멀쩡해요. 속으로 생각했죠. ‘이 세상은 권력이 아니라 돈이구나’ 하고요.
제가 나웅배 부총리를 따라 재경부로 가면서 예보 설립에 참여하게 됐어요. 초대 총무부장이 되어 직원도 선발하고 사무실도 마련했죠. 그러다 IMF가 터졌어요. 10년 뒤 위기를 예상하고 (예보를) 준비했는데 1년 만에 터져 버린 겁니다. 기가 막혔어요.”
당시 언론에선 그를 두고 ‘재계(財界)의 중수부장’ 내지 ‘저승사자’로 비쳤다. 저녁 방송 9시뉴스 때마다 ‘서슬 퍼런’(?) 얼굴이 나왔다고 한다. 김우중 대우 회장, 최순영 신동아 회장, 장치혁 고합 회장, 장진호 진로 회장, 안병균 나산 회장과 부실 은행장들이 모두 그와 대면했다고 한다. 그의 손을 거쳐 부실기업 경영진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진행됐다. 국민 혈세로 마련한 공작자금을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IMF로 기업들이, 대마불사(大馬不死)라던 시중은행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가는 과정을 생생히 목도하게 됐습니다. 검사 5명과 예보 직원 300여 명이 부실기업을 뒤졌는데 당시엔 특검보다 힘이 더 셌어요. 내로라하는 거물들이 불려와 조사를 받아야 했고 제 권한으로 재산압류도 했죠. 당시 예보는 부실 책임자들의 경영 잘못을 추궁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 규정을 잘 지켰는지 따졌고 변호사 자문 등 최대한 검증을 거쳤어요.”
눈코 뜰 새 없던 어느 날, 억울함을 호소하던 한 은행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큰 충격을 받았다.
“제 일에 전력을 다했지만, 너무나 가슴이 아팠어요. 돈이 뭐길래, 혹시 내가 잘못한 것은 뭔가, 얼마나 억울했으면…, 하는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문득 세상이라는 게 돈도, 권력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그는 속으로 ‘돈도, 권력도 아니라면 명예로 먹고 사는 교수는 행복할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교수들을 만나 보니 자기생활에 만족하는 분이 드물었어요. 결국엔 소박하게 사는 게, 자기 일에 만족하고 사는 게 행복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예보 시절에 처음 행복편지를 보내게 됐어요.”
—게을러질 수도 있을 텐데 12년간 빠뜨리거나 하지는 않았습니까.
“행복편지는 매일 아침 7시에 보내는데 조금만 늦어도 난리가 납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 어디 아픈 게 아니냐, 아직 편지가 안 왔는데 빨리 보내 달라는 식의 편지와 전화를 받아요. 저도 때로는 짜증나고 귀찮게 여겨질 때가 있어요. 그런데 저 한 사람으로 인해 많은 분이 행복하게 아침을 시작하고, 행복편지로 하루가 행복해진다는 생각을 하면 게을러질 수 없어요.”
| 행복편지에 실린 사연 하나 큰 백화점 입구에서 거지 한 명이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순 살이었지만 행색은 그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였습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흰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심지어는 지난밤 길바닥에 누워서 잤는지 잡초가 붙어 있기까지 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같은 자리에서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두 손을 앞으로 펼치고 구걸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를 스쳐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사람들이 애써 그를 피해 가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여섯 살 꼬마가 거지에게 다가와 옷자락을 잡아당겼습니다. 거지가 내려다보니 예쁜 꼬마 아이가 조그마한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거지는 몸을 숙여 그것을 받았습니다. 거지의 손바닥에는 100원짜리 동전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거지는 얼굴 가득 주름을 만들어 가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돌아서는 아이의 손에 쥐여주었습니다. 아이는 기뻐 어쩔 줄 몰라하며 저만치서 기다리는 엄마에게 팔랑팔랑 뛰어갔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깜짝 놀랐습니다. 딸의 손에는 100원짜리 동전 두 개가 쥐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엄마는 거지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저, 우리 아이가 준 것은 겨우 백 원짜리 하나인데, 그걸 돌려주셨더군요. 오히려 당신이 하나를 더 보태서 말이에요. 이러면 안 되니까 다시 가져왔어요.” 아이의 엄마는 동전을 그의 손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러자 거지는 그 동전을 다시 아이 엄마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냥 아이에게 주세요. 누군가를 도우면 자신이 준 것보다 더 많은 걸 돌려받는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싶었거든요.” |
500여 명의 직원을 1 대 1로 만나 사진을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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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시호씨는 1년에 2~3차례는 해외여행을 떠나 새로운 세상과 만난다. |
“그땐 정리금융공사의 기업순위가 1위였어요.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받은 채권만 따져 자산규모가 최고였던 셈이죠. 어쨌든 채권을 매각해 공적자금을 회수해야 했는데 직원 수를 한없이 늘릴 수가 없어 나중 한국자산관리공사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됐어요.”
퇴직 후 푸르덴셜자산운용 상임감사로 자리를 잠시 옮겼다가 이명박(李明博) 정부가 들어선 2008년 다시 공직으로 돌아와 우체국예금보험지원단 이사장이 됐다.
취임하자마자 우중충한 사무실과 복도부터 뜯어고쳤다.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걸고 복도와 화장실에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게 했다. 그리고 ‘행복경영’을 선언했다. 직원들이 처음엔 뜨악했다고 한다.
“공무원이나 공기업 직원들은 대개 무표정하고 딱딱하며 정이 없어 보인다고 하잖아요. 그들에게 행복이 없을 리가 없겠지만 생활태도가 그런 모습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장 행복한 직장을 만들자고 결심했죠. 복도와 사무실마다 꽃 사진을 걸고, 매주 금요일엔 옥상에서 미니콘서트를 열어 스트레스를 날렸고, 연말에는 ‘몸짱 만들기 대회’를 열었죠. 또 500명이 넘는 직원을 1 대 1로 만나 사진도 찍었죠.”
—예? 전직원을요?
이사장 집무실에 사진관에서나 볼 수 있는 스튜디오 장비를 갖췄다고 한다.
“미리 사진을 찍겠다고 하면 전날 미장원 가고, 새 옷 차려입고 얼마나 부담이 되겠어요? 불시에 불러 사진 찍겠다고 하면 처음엔 벌벌 떨고 땀을 연신 흘리죠. 그런데 카메라를 앞에 두고 ‘결혼은 했는지, 출퇴근이 어렵지 않은지, 눈이 참 예쁘다고 말해 주거나 뽀뽀는 언제 해 봤냐고 물어보면 긴장이 풀리고 공감대도 금방 형성돼요.”
박시호 이사장은 직원들의 사진을 회의장과 강당에 걸어 두고 서로의 얼굴과 이름을 알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개인사진은 일일이 CD에 담아 직원들에게 감동까지 선물했다.
“그랬더니, 어제까지는 제가 출근하면 로비에서 물 갈라지듯 피하던 직원들이 먼저 알아보고 다가오는 겁니다. 또 외부 약속이 비게 되면, 총무과장을 시켜 시간이 되는 직원 10명씩 따로 불러 식사를 같이 했어요. 장소·메뉴도 알아서 정하게 하되 회사 얘기는 일절 안 하는 조건으로 말이죠. 그랬더니 이런저런 소문이 들려요. ‘일은 안 하고 딴짓이나 하고, 애들이나 불러 밥이나 먹는다’고 말이죠.
저는 그랬어요. 기관장 평가는 공공기관 경영평가로 판가름 난다고요. 3년 연속 우수등급을 받았어요. 공기업 가운데 3년 연속은 처음이라고 하데요. 덕분에 (연말성과급을) 3년 연속 180%를 받았죠. 전에는 60% 정도 받았다고 해요. 그러니 아무도 제 욕을 못했어요.”
“공기업이 완전 민간기업과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고, 행동과 사고가 바뀌니 일에 대한 능률도 좋아져 신바람 나는 직장이 됐다”는 것이다.
—성공한 CEO와 실패한 CEO의 차이는 뭘까요.
“세상살이가 모두 인간관계의 연속입니다. 상대방을 무시하고 일방적인 뜻만 관철시키려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고 소통도 불가능해요. 사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한다는 것은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해요. 인내심을 갖고 경청한 후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설득하는 게 중요합니다. 말 못하는 아이는 울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죠. 울음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우는 아이 입장에서 뜻을 찾아야 합니다.”
“주변이 함께 행복해야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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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시호씨는 아내 윤영희씨와 한 번도 부부싸움을 한 적이 없단다. |
—버킷리스트가 있다면.
“첫째, 스스로 만족하는 사진을 찍고 싶어요. 인간에게 만족이란 없으니까 죽을 때까지 열심히 찍겠지요? 지금은 주로 꽃 사진만 찍지만 대상이 조금씩 변하고 있어요. 둘째, 좋은 사진을 찍으면서 세계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 행복편지를 죽을 때까지 만들어 보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복편지를 읽고 행복해졌다는 인사를 ‘끝없이’ 듣고 싶어요.”
그는 고교 동창인 사진작가 김중만(金重晩)에게 사진을 배웠다. 친구에게 처음 사진을 배울 때 “뭘 찍었는지 모르겠다. 메시지가 없다”는 핀잔을 들었다. 다시 찍기를 반복, 3년 뒤에는 “스스로 길을 찾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요즘엔 자선단체에 사진을 기증하는 일도 많다. 기업체에서 달력을 만들겠다며 꽃 사진을 사 가면, 그 수익금을 불우이웃에게 기부한다.
“제가 찍은 사진이 다른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그 덕분에 기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이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밤을 새워도 피곤하지 않고 오히려 활력이 생기고 자신도 생겨 삶이 더 행복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은 저만 행복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주변이 함께 행복해야 행복해진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행복은 공유하고 나눌수록 커지니까요.”
—40~50대 중년에게 덕담 부탁합니다.
“맡은 바 직분에 최선을 다하면 성공하고 행복해진다고 확신합니다. 불평 불만은 패배자들의 말입니다. 최선을 다한 후 다음을 기다려 봅시다. 그리고 100세 시대에 평생 하고 싶은 일이 무얼까 생각하고 준비해야 해요. 지나고 보니 세월이 빠르더군요. 저는 뒤늦게 예술과 관련된 법적 문제를 배우려 대학원에 등록, 문화예술법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매일 IT와 스마트폰 분야 등 새롭게 변해 가는 세상을 알기 위해 공부하고 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