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의 詩] 박해람 : 월간조선

악기 보관창고에 숨어 지내다 보면 그곳만큼 조용한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민한 현악기처럼 혹은 묵직한 관악기처럼 그렇게 한동안 성당의 악기들 틈에서 숨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한동안 초면인 신(神)과 함께 피정(避靜)에 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먼지를 뒤집어쓴 악기들이나 그 악기를 보관하고 있는 창고나 또 여전히 고통을 실천 중인 신과 그리고 숨어 있는 한 시대와 은신처. 그리고 불안했다. 악기들이 어느 순간 일제히 소리를 내는 꿈을 꾸곤 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춘들은 바빴다. 순서는 이러했다. 울분하고 뛰쳐나가고 뛰어들었다. 그러다 수배를 받고 먼 곳으로, 때로는 위장된 신분 속으로 숨어들었다. 영장도 없이 가택수색을 당하고 친한 친구의 집이 ‘집뒤짐’을 당하고 있는 사이 봄은 또 어떤 뒤짐을 당했는지 길거리며 옥상이며 온천지에 꽃들을 다 내놓고 있었다.

한 편의 시를 쓰고 나면 말소(抹消)되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창고를 마련하고 그 속에 진열이든 나열이든 집어넣고 나면 철컥 잠기는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오래 수거했고 분리했다. 악기들은 두 가지 방식이다. 입술을 대거나 손을 대는 것으로 인간의 가장 위무(慰撫)적인 부위의 조력으로 소리를 낸다. 그래서 그 소리들은 인간을 위로한다.

백 리를 기다리는 말

로사리오를 넘기는 손 안의 말들이
다섯 마디로 역은 환(環)
고리가 없는 말들이 묵주를 따라 돈다.
‌화관(花冠)을 쓰고 있는 시간, 귀머거리 암송(暗誦)이
‌늙은 교회력들이 마당을 쓸고 있는 공소(空巢)는 지금 피정에 들어 있다.

장미 콩이 여물어 가는 당나귀의 잔등
‌비스듬히 누워 있는 미사 시간이, 포도주가 시큼하게 상해 가는 코르크마개의 안쪽
신부가 없는 계절을 빌려
‌‌바람은 타인(他人) 그늘은 정인(情人)이라는 푯말을 걸고 묵언 중인데
당신은 백 리 밖에서 말을 하고
‌당신의 백 리 밖에서 나는 오독이 묻어 있는 말을 듣는다.

‌저자(著者)가 여럿인 암송을 묵언으로 읊조리고 있다.
생각이 달려 있는 기도는 오래된 종교이겠지
‌절이 있는 질책을 들었다면 너, 어느 벽돌 기둥의 모서리에 가려지지 않았겠지
어둑한 말의 모양을 두 손에 받아 들고
백 리를 기다리는 말이나 돌보고 있다고
말 잔등을 보내겠다고
‌측은한 피정 중이라고, 측은한 가명을 한동안 쓰고 싶었다.
여름의 타인보다 겨울의 정인이 더 그립다.

오십 리를 기다리다 오십 리를 마중 나간다.
외면하는 첫마디를 베고 쉬겠다.

‌생일에 정한 성인(聖人)의 거푸집, 양쪽의 눈을 닮은 밀떡이 입안에서 녹아 간다.
‌듣는 말로 세례를 받고 기생(妓生)의 이름으로 냉담 중이다.

-《백 리를 기다리는 말》 중에서

직접 조각한 서각 작품과 최근 출간한 시집 《백 리를 기다리는 말》.

오래된 시간을 헐어서 살고 있다기보다는 그 시간을 헐어서 스스로 치유하는 일이 인간에겐 자주 일어나는 일인 것 같다. 가령, 목소리가 다분히 커지는 즈음이라면 그때의 그 악기 보관창고에서 들었던, 미사 시간에 들려오던 부드러운 사제의 음성을 떠올리려 애를 쓴다. 누구나 다 악기였던 시절이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호흡의 차이다. 운지법과 호흡의 조율이 악기의 배후에는 분명 있다는 사실. 연주로 친다면 사제는 참으로 부드러운 연주였고 나는 지금도 그렇지 못하여 다분히 감정적이다.

어떤 기억으로부터 몇 백 리를 떠나 와 있는 시점이 되면 가끔은 되짚어 그 몇 백 리의 오십 리라도 가고 싶은 것이다. 그리워할 백 리가 있다면 반대로 그 백 리 밖에는 그리워하는 백 리가 있다. 그때와 지금은 단지 백 리의 시간차로 여전히 존재한다. 가야 할 백 리든 기다려야 할 백 리든 모두에게는 백 리의 시차와 기시감(旣視感)과 그리움이 있다. 소실점처럼 가물거리는 그 거리만큼의 예행과 계절들이 오십 리의 이쪽과 저쪽을 서성거리는 것이다.

이율배반과 싸우고 역설과 싸웠다. 안쪽에 갇혀 있으면 바깥이 그립고 바깥에 갇혀 있으면 따뜻한 방 한 칸이 그리웠다. 악필(惡筆)은 악설(惡說)에서 나오기 마련이어서 어떤 미려(美麗)한 서체도 그 내용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관(官)에서 배달되어 오는 모든 종류의 서류를 보면 괜히 불안해진다.

악필(惡筆)

초서(草書)는 여름에 푸르러 겨울에는 죽고 만다.
초목 하나를 휘감아
그늘을 다 털어내고서야 그 결박이 보인다.
소리가 바람을 결박하고
잎은 가장 위엣것부터 불러들이니
창호(窓戶)의 외진 구멍들에게는
근동의 물소리만 벗으로 바쁘다.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어느덧 초목을 지나 낙엽에 이르렀다.
지난밤에는 가장 성긴 치아가 빠져 거친 낮 밤을 우물거리지도 못해
간신히 귀로 마신 차 한 잔이
조식으로 들어앉은 배 속
‌어찰(御札)은 어느 진창을 지나왔는지 다정은 다 빠지고
독설만 얽혀 있다.

근래에는 소문조차 찾아오지 못하게
탱자나무 울타리는 막아 버렸다
답장 없는 간찰 (簡札)처럼 계절은 성급했다
‌무릎을 꿇고 들어야 하는 악필의 문장이 도착했다

각설하고
통증에는 그 어떤 구름도 없어
악필처럼 휘어지는 몸이 예의를 버리는 시간
‌몇 모금 악필이 첨가된 초오(草烏)탕은 몸 하나를 결박
하는 중인지 풀어 주는 중인지 영영.

-《백 리를 기다리는 말》 중에서

알고 보면 악기들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다.

유배란 그 거리와 장소를 불문하고 극지(極地)다. 바슐라르는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 간다’고 했다. 무위(無位)로 옮겨 다니는 여정(旅程)엔 보이지 않는 위리안치(圍籬安置·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유배된 죄인을 가둠)가 있다. 그곳들은 때론 다정한 피붙이이거나 집착이거나 아니면 지독한 허무의 도처(到處)로 동행하거나 지나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詩)는 극(極)을 섭렵하는 일이겠다. ‘지나간 다정함이란 지금 곁에 남아 있는 어린 쓸쓸함만도 못하다’라는 역설. 어린 날 한글보다 한자를 먼저 배웠다. 유학(儒學)의 규범으로 보자면 나는 어린 나이에 이치(理致)에 근접한 신동(神童)이었다. 양명학(陽明學)보다는 주자학(朱子學)에 더 마음이 쓰이는, 시대로 치자면 또래들보다 한참 뒤떨어진 시대를 먼저 공부했다. 선생은 엄했고 공부는 유연했다. 달달한 배 맛보다 이화우(梨花雨)의 처연함을 먼저 알아 버린 늙은 아이였다. 근동(近洞)이 먼저 알아보는 소문의 아이였던 그 시절을 마감하게 한 일은 다름 아닌 집안의 몰락이었다. 그 후로부터 모든 공부는 중도포기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유일하게 중도포기가 아닌 일은 시를 쓰는 일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벚꽃 나무 주소

벚꽃 나무의 고향은
저쪽 겨울이다.
겉과 속의 모양이 서로 보이지 않는 것들
‌모두 두 개의 세상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들이다.
봄에 휘날리는 저 벚꽃 눈발도
겨울 내내 얼려 두었던 벚꽃 나무의
수취불명의 주소들이다.
‌겨울 동안 이승에서 조용히 눈감는 벚꽃 나무
모든 주소를 꽁꽁 닫아 두고
흰빛으로 쌓였던 그동안의 주소들을 지금
저렇게 찢어 날리고 있는 것이다.

-‘벚꽃 나무 주소’ 일부

최근에 새 시집(詩集)이 나왔다. 그리고 봄, 계절의 주소들을 찢고 있는 봄꽃 나무들의 이사철인 것이다. 어디서 시작되어서 이곳에 살고 있나 여러 번 되짚어 가 보고 다시 돌아왔다. 그렇게 다시 돌아왔을 때마다 이곳엔 늙어 가는 중년은 온데간데없고 주자(朱子)에게 야단을 맞은 늙은 아이가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그 오랜 시간을 쫓아 찾아온 이치를 살살 달래 가면서 문단 말석에 끼여 기웃거리는 것이다.⊙

詩人이 만난 詩人

“세상에서 제일 잘한 일요? 가족을 만들었다는 거죠”

⊙ ‌강릉 밀양 박씨 종갓집 長孫으로 태어나 父親에게서 四書三經 배워
⊙ ‌부친의 사업 실패로 집안 풍비박산·검정고시로 대학 입학·재학 중 두 차례 수배
⊙ ‌“죽음은 경계가 없는 것… 어릴 적 익힌 동양철학이 지금의 나를 이루는 근간이자 전부”

목련은 봄에 추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꽃잎 시커멓게 타 들어가는 그 소멸이 꽃의 질서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박해람 시인의 방식으로 풀이하자면 추(醜)해서 미(美)가 뭉쳐지는 것. 죽음이 삶에게로 끊임없이 의지의 양분을 보내고 있음을 그의 카페 ‘우리집을 못 찾겠군요’에서 느낀다. 주소란 본디 적을 두어야 하는 것이지만 시인의 사유(思惟)는 여전히 수취인불명에 있다. 카페 안은 목련 봉우리의 환한 내부처럼 시인의 손길로 어루만져졌다. 창문이며 나무의자, 드문드문 보이는 서각(書刻)과 솟대들 모두 그의 손재주다. 어쩌면 그에게서는 이번 생의 주소가 다만 여기일 뿐, 목련이 지고 나면 겨울 너머 새로운 전입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葬地까지 따라가며 輓歌 즐겨 들어

박해람 시인은 강원도 강릉의 밀양 박씨 집성촌에서 종갓집 장손으로 자란다. 어린 나이에 전통 장례, 제례 등을 반드시 참관하고 치러야 했다. 당시 고령(高齡)의 문중 어른들은 한 달에 네 분이나 돌아가시기도 했단다. 이때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입관(入棺)이 반복되면서 그에게 이런 생각이 깃든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연장선상이구나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죽음을 자꾸 예견하게 되더군요. 장례를 많이 참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듣게 되는 것이 상여를 끌며 내던 상여소리 만가(輓歌). 그 소리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인근에서 누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새벽같이 일어나 그 마을에 가서 장지(葬地)까지 따라가며 그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어요. 그 단순하고 처량한 만가 소리가 얼마나 좋았던지…. 죽음은 경계가 없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삶이 끝나서 정지되는 것이 죽음이 아니고 또 다른 삶이라고요. 저는 그때 삶과 죽음의 관계성을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사물과 사물의, 사람과 사람의, 풍경과 풍경의 관계성 말입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했던 시절 구원처럼 만난 아내는 인생의 영원한 반려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대학시절 무속(巫俗)에 관한 과제를 하면서 삶이 찰나이듯 죽음에 대한 관점을 이렇게 정리한다.

“찰나라는 순간이 죽음입니다. 출생이라는 것이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사는 것인데, 그전에는 그 존재가 부친의 뱃속에 있었겠죠. 그러니까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이 첫 번째 죽음입니다. 세상이 바뀌는 거니까요. 또한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는 순간도 죽음입니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죽는 태아가 예전에 많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죽음을 단계로 보면 몇 단계까지 이어져 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겪는 찰나들은 모두 죽음이다’고 생각했습니다.”

1998년 ‘문학사상’ 데뷔 후 8년 만에 첫 시집 《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를 내자 문단은 단숨에 독특한 문체(文體)의 그를 주목한다. 죽음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소재를 통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독특한 성찰을 담았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시집 곳곳 문장들은 삶과 죽음이 찰나로 겹쳐지고 또 현재로 비어져 나왔다. 그리하여 순간순간 죽음을 일상으로 견고하게 이어 놓았다.

냄새라는 악취를 채우고 있는 나나
땅에서 분리되어야 죽는 나무와
땅으로 들어가야 죽는 나나
일생을 서로 주고받는 사이라는 것이지

- ‘향기와 냄새’ 중에서

낡은 배낭 하나가 정처였던 날들의 어느 바닷가에서.

박해람 시인은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검정고시를 통해 이듬해 대학을 갔다. 대학 4년 전액 장학금 수혜자였지만 국문과를 스스로 자퇴했다. 당시 그는 학생운동을 하면서 대자보 쓰는 일을 전담하다 국가보안법 등으로 수배를 받는다.

1차 수배는 해병대 지원으로 피했지만, 복학하자마자 2차 수배를 받고 집을 떠나 전국을 떠돌았다. 마치 숙명(宿命)처럼 홀로 걸어야 했고, 진정한 나를 찾듯 시작도 끝도 없는 여정이 2년 동안 계속됐다.

중학교 때 고향 강릉의 한 다방에서 음악DJ를 하며 용돈을 벌어 썼다. 그때 들은 팝송과 클래식은 시인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대전에서는 바텐더를 하고 대구에서는 어느 레스토랑에서 음악DJ를 하는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지요. 20대 초반이었는데 마음이 내내 편치 못했습니다. 여행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다 어느 날 전라도 광주 버스터미널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버스 한 대가 들어오는데 한자로 물 수(水)자가 쓰인 ‘水原’행 버스를 보게 되었죠. 당시에는 버스에 매단 행선지를 한자로 표기했었죠. 제 고향이 강릉 바닷가이다 보니 물이 그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그 버스를 탔습니다.”

시인은 당시 주머니에 라면 한 그릇 값도 없었다.

“배낭을 하나 메고 수원에 내렸죠. 아무 데나 가서 일을 달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길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닿은 곳이 아주 큰 레스토랑이었는데 지배인이 저를 보더니 면도기를 주더군요. 일단 면도를 하고 다시 오라고. 면도를 하고 가니까 바로 채용됐어요. 저도 이유를 모르겠지만요. 막일을 잘할 것처럼 보였나 봐요. 그런데 한 달도 안 되어 지배인이 됐습니다. (웃음) 그런 인연으로 수원에서 한참을 살았어요. 그 사이 수배도 풀렸고요.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양식 주방장이 됐습니다. 요리에 재능이 있었는지 제가 만든 음식이 손님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어요. 여러 레스토랑에서 주방장으로 데려가려고 서로 경쟁이 붙기도 했었죠. 그런데 좀 지나다 보니 주방에 갇혀 있는 게 너무 답답했습니다.”

카페 ‘우리집을 못 찾겠군요’ 연 이유

카페 ‘우리집을 못 찾겠군요’는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터이자 시를 쓰는 작업실이면서 아이들의 놀이터이다.

그의 카페 ‘우리집을 못 찾겠군요’의 태생은 이 무렵이다. 수원 생활에서 알게 된 술자리의 멤버 박경원(시인), 배용제(시인), 김도연(소설가) 등이 하나둘씩 문인으로 등단하게 된 것도 주된 영향이었다. ‘나도 등단을 해야 되는 거야?’란 농담에 섞여 시에 대한 열병이 그에게 찾아온다. 무작정 시를 쓰기 위해 용인에 마련한 카페 공간이 그 후 어느덧 20년을 같이한 것이다.

“시를 쓰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게 그 첫해 겨울날이었습니다. 그땐 시를 전동타자기로 썼었죠. 눈이 내리는 날 새벽 시 한 편을 쓰고 나와 담배를 피우는데 이런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신이 나한테 좋은 시 한 편을 쓸 수 있게 해 준다면 내 수명 10년을 줄 수도 있을 텐데.’ 처음에는 시를 그냥 썼다가 나중에는 오기가 생기다 보니까 좋은 시 한 편과 십 년 수명을 맞바꾸고 싶었던 겁니다.”

그렇게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해 그는 그해 쓴 15편의 시를 묶어 첫 응모한 문예지 《문학사상》에 단박에 데뷔한다. 보통의 경우 문청(문학청년)들이 수년간 공부하고 응모해 얻는 과정을 생각한다면 복권 당첨과도 같은 등단이었다. 그러한 그의 비범한 시적 재능은 어릴 적 이야기에서 엿볼 수도 있겠다.

시인은 카페의 테이블, 의자, 창문, 소품 등을 직접 만들었고 아내는 그림으로 화답했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유학을 배웠죠. 초등학교 다녀오면 아버지가 ‘오니라’ 하셔서 공부를 시켰죠. 그 당시에 동네에서는 제가 대통령 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신동(神童)이라고 소문이 났거든요. 어린 나이에 한글보다 한자를 먼저 배워 천자문을 다 떼고 초등학교에 들어가 한시 백일장 장원을 하기도 했거든요, 6학년 때에는 아버지한테서 《중용(中庸)》을 배웠죠. 그러니까 사실은 유학의 수순으로 보자면 굉장히 높은 단계까지 교육을 받았던 것이지요. 그때는 ‘이걸 왜 배워야 하나?’ 푸념이 들면서 아무 쓸모도 없을 것 같은 학문을 배우는 게 싫었죠. 지금 생각해 보니 사실은 지금의 나를 이루는 근간이고 전부였습니다. 그때는 열 살 나이에도 스무 살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지요.”

그런 그의 작품세계를 당시 모 출판사에서 미래의 시를 다섯 그룹으로 분화하고 거기에 그의 이름을 거론하며 ‘다양한 상황의 시적 재현에 공들이는, 철저하게 개별화된 시적 담론을 추구하는 그룹’에 포함시켰다. 이런 사실에 대해 그는 크게 웃었다.

“칭찬일 수도 있지만 별 특별한 특징이 없다고도 볼 수 있지 않나 싶군요. 시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부류가 만들어지면 정치적으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집단이 되니까요.”

일상의 모든 것이 政治

정치(政治). 어쩌면 박해람 시인에게 정치란 대학시절 수배처럼 개인적 불행을 가져다준 상처이면서 가혹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모 신문에 고(故)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서거 추모 시를 쓰기도 하면서 여느 시인과는 다른 행보를 이어 갔다. 문학과 정치의 함수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대한민국의 정치란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에도 정치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문학판에서의 학연, 지연 등이겠지요. 이렇듯 일상의 모든 것이 정치라고 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왜곡된 말이 정치이지요. 정치라는 뜻이 무언가를 바르게 다스린다는 것인데 지금의 정치는 그런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처음에 노무현 대통령 추모시를 썼던 이유는 모 신문사에 아는 후배 기자가 있었는데, 그 기자가 추모시를 써 달라 해서였습니다. 사실은 어느 때부터인가 지금의 정치를 대변하듯 시인이 정치인을 존경한다는 말은 치욕적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존경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봤을 때는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너무 화가 나더군요. 정치 현실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그 노무현이라는 사람에 대해 화가 났습니다. 그런 생각이 교차하면서 마음 아파 할 때 마침 후배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지요. 그때 썼던 추모시가 모 잡지에서 가장 잘 쓴 추모시라고 평가되기도 하더군요.”

후배 기자는 그 다음부터 계속 시인에게 시를 부탁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 추모시도 써 달라고 했어요. 물론 원고료는 안 받았던 것 같아요. (웃음) 그래서 오죽했으면 감사패라도 하나 달라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제가 쓰는 시와 정치적 성향과는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시는 현실을 토대로 하여 미학적인 구조로 보인 것이지만, 정치적 성향이라는 것은 제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노선 같은 개념입니다. 어쩌면 인간에게 기여하는 측면에서는 지금의 정치가 아무리 나쁘고 낡고 유치하여 스트레스를 주더라도 저는 오히려 정치가 시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표절 시비로 2년간 정신과 치료 받아

시인은 인터뷰 말미에 “이 세상에 와서 제일 잘한 일은 막일 하던 제가 가족을 만들었다는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박해람 시인에게 큰 시련이 있다면 카페에서 ‘경운서당’ 모임을 갖고 나서인 것 같다. 그가 말하는 경운서당은 시를 공부했다기보다 유학사상을 토대로 사물에 대한 인식 방법을 논의하고 공유하는 모임이었다. 이러한 방식의 수업은 시적 세계관과 직관력을 높여 시의 가장 중요한 골간을 키웠을 것이다. 모임은 더 나아가 동서양 철학의 비교, 어렵다던 스피노자 ‘에티카’ 강독도 이어 갔다.

그 후 경운서당은 신춘문예에 꽤 많은 등단자를 배출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모임은 작가 지망생들로 북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표절 논란과 중복투고 등의 이유로 당선이 취소되거나 엉뚱하게 대필(代筆) 의혹에까지 휩싸이고 말았다.

“그때는 힘든 시기였습니다. 표절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A라는 게 B로 표절했다고 하면 명백한 표절이겠지만, A가 B, C, D, E를 부분적으로 표절했다는 게 참 곤혹스럽더군요. 그렇게 결과를 이미 설정해 놓고 맞춰 나간다면 표절 시비에 안 걸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박해람 시인에게 이 시기는 일생의 가장 암울하고 힘든 나날이었다. 2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였다.

“냉정하게 봤을 때 그런 일련의 나를 향한 시선들이 저에게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면도 많았던 것 같아요.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죠. 제가 우리 아이들을 끔찍이 사랑하는데 계속 그런 문제가 인터넷에 거론되고 하니까 그때는 애들이 옆에 오는 것이 싫었습니다. 제 아이가 옆에 오면 ‘저리 가라’, 이렇게 하곤 했지요. 그것이 제일 마음 아프고 당시에는 이러다가는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고 싶었죠. 너무 힘드니까. 그 다음부터는 죽는다는 게 어떻게 보면 구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그럼에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힘은 제 아내와 아이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가 9년 만인 지난 3월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하였다. 이 시집은 계절적 봄에 집중한다. 자연 속 소생의 계절이 아닌 그 화려한 이면으로 사라지는 죽음을 직관해 낸다. 시적 위치는 봄의 서정적 관찰이지만 미학적 관점에서의 성찰이 이채롭다.

“세상을 역설적으로 보면서 좀 처연해졌다고 할까요. 첫 시집과 두 번째 시집 사이 경운서당 일들이 얽히면서 나이 먹는 속도보다 몇 배는 빠르게 늙어 버린 것 같았습니다. 누가 물으면 ‘요즘 사람으로 안 산다’라고 답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현실적인 문제들을 시에 끌어들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시는 피안(彼岸)이라는 말이 있듯 그 어떤 시만의 독특한 세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시라는 틀 안에서 사고하고 사물을 보고 인지하고 하는 거지요. 그러니 시는 미학적인 구조입니다.”

詩보다 더 중요한 것

모든 걸 접고 다시 한산해진 그의 카페는 99%가 단골손님이라고 한다. 단골이 아닌 사람이 오면 오히려 불편할 정도라고. 카페를 운영해서 돈 벌 생각을 아예 포기하니 단골 위주로 손님을 맞게 되더란다.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그의 카페 ‘우리집을 못 찾겠군요’는 차를 파는 곳이면서, 손재주 작업실이면서, 시인의 자녀들 놀이터이다.

박해람 시인은 최근 새로운 일로 동양사상과 철학을 근거해 정원을 꾸미는 ‘정원설계’에 심취해 있다. 그의 이론대로라면 봄꽃은 이제 주소를 잃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인터뷰 말미에 남긴 말이 그의 가장 인상적인 현생의 주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세상에 와서 제일 잘한 일요? 가족을 만들었다는 거죠. 세상 떠돌며 막일 하던 제가, 아이 둘을 뒀는데 학원을 보내지 않았는데도 공부를 참 잘해요. 중학생 큰 녀석은 저와 비평서도 같이 읽어요.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사실 그게 전부입니다. 인생에 있어 시도 중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과 아이들입니다. 저 스스로가 대견스럽다고 생각해요. ‘나도 가족을 만들 수 있고 또 만들었구나’라고요.”⊙

〈글 윤성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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