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는 현실과 마술적 세계를 잇는 地圖다. 그것은 암호가 아니어서 보편적 기호와 약속된 코드를 전제해야 한다. 密지도라 하더라도 방위와 기호에 대한 최소한의 것들이 필요한데 나는 그것이 세대의 보편적 情緖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삶의 어지러운 다양성을 수렴할 수 있다
⊙ 시를 쓰거나 읽는 까닭은 共感 때문…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느낌 자아내야
김병호
⊙ 45세.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同 대학원 박사. 現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출간.
⊙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윤동주문학대상 젊은작가상 수상.
⊙ 시를 쓰거나 읽는 까닭은 共感 때문…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느낌 자아내야
김병호
⊙ 45세.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同 대학원 박사. 現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출간.
⊙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윤동주문학대상 젊은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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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
자명하고 확고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의문을 용납하지 않았던 세계에 회의(懷疑)를 품는 순간, 세상은 동요와 균열, 확장을 시작하면서 흔들린다. 비록 확고한 답에 도달하지는 못할지언정 회의와 의심은 이 세계에 또 하나의 지도를 잇대는 ‘시’를 만들어내게 한다. 시는 결국 자기부정과 혼란 속에서 자신을 되찾는 광활한 사유의 입구가 되고, 새로운 여정의 출발점이 된다. 맹목적 삶에서 벗어나 소외를 의식하는 순간 고통은 증폭되고 절망은 배가되지만, 시는 이 일탈의 세계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무릅쓰면서 자신의 왜소함을 치유하고 존재의 정당성을 찾을 수 있는 지도(地圖)가 된다. 시는 지도다.
광주, 나의 意志와 상관없는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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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을 수상할 때 회장인 신달자 시인과 함께. |
시인도 일상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특히 나라는 사람은 시인이라는 예술가의 미명 아래 어떤 초월의 포즈나 포스를 드러내기보다는 평범한 일상에 갇혀 전전긍긍하며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그저 중년의 사내일 뿐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마흔다섯 살 남자의 삶의 표본 정도가 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면 조금 오만한 걸까. 카드 현금서비스로 눈덩이가 된 빚을 갚아보겠다고 39%의 제2금융권 대출을 이용했다가, 그만 한밤중에 집에서 쫓겨난 아픔이 있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아도 될까.
나는 우리 세대가 지닌 삶의 보편성 속에서 하나의 전형을 찾아내고 시를 통해 개인적 경험을 넘어서려 한다. 우리의 삶이 지니고 있는 건강하고 보편적인 진실을 보편적 기저로 삼아 존재의 지도를 만들어가려는 것이다. 체험의 형이상학적 보편성, 세대의 삶을 반영하면서 스스로 고유한 울림을 지니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시의 본질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내 앞에서 짜장면 곱빼기를 먹고 있는 친구는
길 한복판에서 십 년 만에 마주친 옛 여자의 뒤통수를 치고는
곧장 달음박질쳐 왔단다
펑펑 울 일은 아니지만
한 번 더 목숨 버릴 일도 아니지만
갑자기 급소가 사라져 버렸다며
친구는 서둘러 면발을 끊는다
후회나 막심 따위가 세월이나 허기와 연루된 한낮
배갈 두어 잔에 타박타박 기우는 친구가
먼 데 붉은 구름을 데불고 온다
구름 속에서 자꾸 덜거덕거리는 소리가 난다
- ‘이름 없는 풍경’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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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작년 시창작세미나 시간에 2학년 학생들과 덕수궁의 국립현대미술관에 다녀왔다. 한 학기에 한 번쯤 동물원이나 미술관 나들이를 다녀오곤 한다. |
그러나 어느 순간 생생하게 살아서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 있다. 뱀의 허물처럼 처연한 상실의 흔적. 서둘러 짜장면 면발을 끊으며 “갑자기 급소가 사라져 버렸다”고 외마디 비명처럼 내뱉는 순간처럼 말이다. 애써 내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 어느 날 내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의 당혹감, 혹은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님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 것이라고 우기며 살았는데 그 진실이 철저하게 들통났을 때의 비루함. 마흔을 넘기면서 이런 마음들이 수시로 환절기 몸살 감기처럼 스쳐간다.
아무도 모르게 꼭꼭 감쌌던 마음의 풍경, 풀어헤치면 날아갈까 감히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려 애써 멀리 돌아가곤 했던 마음자리의 낭떠러지. 마흔을 넘긴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곳에 가보지 않았을까. 마음의 절벽에 섰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에 맞서는 배수진의 결연함 대신 구멍 난 바지주머니 같은 마음의 결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게 ‘급소’라고 생각한다.
스무 살, 서른 살이 지나면서 우리는 급소를 감추려고 몸부림치지만, 마흔이 넘으면서는 ‘급소’가 또 다른 삶의 원동력임을 깨닫는다. ‘급소’가 없으면 결국 괴물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잊지 못하는 첫사랑일 수도, 지우려고 할수록 더 큰 얼룩이 지는 가족의 누구일 수도 있는, 밤새 쓴 일기장 같은 ‘급소’.
시를 쓰거나 읽는 까닭은 공감(共感)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로잡아 나와 통하게 하는 것, 특히 시를 통해 공감을 자아내는 일은 언어를 매개로 정신과 마음과 감정이 번지고 섞이는 일이어서, 유행가 가사처럼 ‘내 거인 듯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이것이 바로 공감의 본질이다. 어떤 낯선 풍경에 대해 자신의 경험과 기억과 상상을 정돈하고 갱신하는 과정이 공감의 과정이라면, ‘급소’의 상실 역시 마흔의 사내들이 사춘기처럼 겪어내야 하는 통과의례가 아닐까.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지, 인간의 진실은 무엇인지, 우리가 맞서고 있는 이 세계는 얼마나 기만적인지 치열하게 깨닫는 나이가 된 것이다.
풀 먹인 홑청 같은 봄
베란다 볕 고른 편에
아이의 신발을 말리면
새로 돋은 연둣빛 햇살들
자박자박 걸어 들어와
송사리 떼처럼 출렁거린다
간지러웠을까
통유리 이편에서 꽃잠을 자던 아이가
기지개를 켜자
내 엄지발가락 하나가 채 들어갈까 말까 한
아이의 보행기 신발에
봄물이 진다
한때 내 죄가 저리 가벼운 때가 있었다
- ‘난생처음 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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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을 수상할 때 축하해 주러 온 대학원생과 학부학생들. 시를 더 열심히 쓰면 좋을 텐데 그저 착하기만 할 뿐이다. |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아이가 태어나고서는 출판사로 직장을 옮겼다. 대학 강사의 불완전한 신분으로 한 가정의 가장(家長) 몫을 한다는 것은 그리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교정과 교열, 기획과 마케팅, 그리고 가끔 필자나 기자들과의 밤늦은 술자리가 낯설기만 하던 어느 날, 새벽 가까운 시간의 귀갓길에 8차선 대로(大路)의 육교 한가운데에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주사가 있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감정이 북받쳤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도도히 흐르는 삶과 생활이 무서웠다. 잠시 멈칫거리거나 한눈을 팔면 소용돌이에 휘말려 끝없이 가라앉아 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시간은 멈춘 듯했고, 육교 아래로 달리는 빈 택시의 표시등이 조등(弔燈)처럼 보였다. 얼마나 울었을까, 어떻게 집에 들어왔을까. 눈부신 햇살에 늦은 아침잠을 못 이뤄 뒤척거리다 일어나 보니, 부엌에서는 아내의 도마 소리가 들려오고 채 돌이 되지 못한 아이가 혼자 보행기를 탄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는 천국일까, 지옥일까.
시에는 보편적 情緖 들어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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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을 교환교수로 미국에 와서 뉴욕 차이나타운에서 딸아이와 한 컷. 정작 미국의 느낌도, 차이나타운의 분위기도 드러나지 않는다. |
시는 이렇게 현실과 마술적 세계를 잇는 지도다. 그것은 암호가 아니어서 보편적 기호와 약속된 코드로 전제해야 한다. 비밀지도라 할지라도 그것을 풀어낼 수 있는 방위와 기호에 대한 최소한의 것들이 필요한데 나는 그것이 세대의 보편적 정서라고 생각한다. 삶을 창조하고 고양시키는 내용적 가치의 전제는 보편성인데, 이를 통해 삶의 어지러운 다양성을 수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현실에서 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시에서 출발하여 현실로 진입한다. 시는 이미 세계 자체이며, 가장 근원적인 세계이며, 그 세계로부터 시인의 경험이 나오고 시를 통해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마술적 세계로의 낭만적 탈주, 나는 여전히 당신과의 탈주를 꿈꾸고 싶다.⊙
詩人이 만난 詩人
고요히 포효하는 시인
⊙ 고교생 때 광주 지역 고교연합위원장 맡고 공장에도 취업
⊙ 한 편의 시 완성 위해 백 번 정도 소리 내 읽어… 독자와의 공감 가장 중요
⊙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시골 정서로 가득… 外家의 기억이 그를 시인으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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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사진 찍는 일은 노래 부르는 일 다음으로 힘겨운 일이다. 2014년 일본 나고야항 근처에서. |
필자가 지난해 여름 폭우 속에서 낙상(落傷)으로 정형외과 병실에 누워 있을 무렵, 그는 연구년을 맞아 미국행(行) 비행기를 탔다. 물론 그 전날 한밤 수면제 주사를 맞고 비틀거리며 잠을 좇는 필자를 찾아와 쾌유를 비는 덕담을,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 명확한 우리말로 전하고 갔다. 그날 그가 만난 사람은 한국과 뉴욕의 거리 1만1000km의 의미와 앞으로 적어도 1년 동안은 대면(對面)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복합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상실된 일종의 심신취약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한밤의 짧은 송별례를 하고 떠나 지금은 미국 뉴저지 중북부의 버드레이크(Budd Lake)라는 작고 조용한 호수마을에 살고 있다. 그의 단정함, 그의 살색과 솔음, 그의 백수와 블루블랙의 머릿결과 선명한 가르마와 하얀 얼굴은 이제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그와 그의 시를 생각하는 한 사람의 마음에 테제(These)가 되어 있다. 그의 이미지가 하나의 전제가 되어 그의 시를 예단케 해서는 곤란하지만, 적어도 외양이 내면과 무연(無緣)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외할아버지의 ‘환하고 평평한 징검돌’
김병호 시인의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 때’를 보면 그의 단정한 모습이 작품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알 수 있다. ‘환하고 평평한 징검돌’을 남기고 떠난 할아버지와의 정신적·정서적 별리(別離)의 도정(道程)에서 한 어린 영혼이 우주의 순명(純明)에 도달하는 슬프고 아름다운 장면을 볼 수 있다.
대문에서 토방을 거쳐 사랑방에 이르는 긴 듯 짧은 할아버지의 한 생(生)은 어린 화자(話者)의 눈을 통해 ‘징검돌’에서 ‘별자리’에 이르는 이미지의 확장과 ‘삼칠일도 안 된 송아지’의 가족사라는 정서적 심화로 이어지고 마침내 대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삶으로 긍정된다.
하늘은 오래된 청동거울처럼 깊습니다
바람은 저녁을 다듬어
첫 별 뜨는 곳으로 기울고
내가 앉은 징검돌들이
지워진 별자리를 찾아 오릅니다
-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 때’ 일부
할아버지가 떠난 빈자리는 ‘지워진 별자리’가 되어 징검돌이 ‘찾아 오르는’ 인연의 고리가 되고 있다. 이미지 변주나 대상과의 유기적·능동적 소통이야 한 사람의 언어적 우주가 탄생하는 데 기본적 자질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인간 조건에 대한 깊은 사유를 동반하고 있는 점은 여느 당선작과 구별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저는 저희 세대가 공동체의 보편적 기억인 고향을 가지고 있는 마지막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하면 시골이 고향인 마지막 세대지요. 도시에서 태어났어도 부모 세대의 고향이 대부분 시골이어서, 그 공동체적 삶을 체험하고 공유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가 아닐까 생각하는 거죠. 방학 때마다 열흘에서 한 달 정도 외가(外家)에서 생활했습니다. 모내기도 해보고, 토끼몰이도 해보고,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피기도 하고, 산등성이에서 비료 포대(布袋)를 타기도 했습니다.”
이 시에 등장하는 그의 외할아버지는 중학교 때 돌아가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생전에 손수 가꾼 외가에는 대문에서 토방까지 징검돌이 놓여 있었고 담벼락 끝은 외양간과 이어져 있었고 담장 모서리엔 감나무가 한두 그루씩 심어져 있었다. 마당을 길게 가로지르는 빨랫줄도 있었다. 그러나 20년쯤 지나 결혼을 하겠다며 외가를 찾았을 땐 그 풍경들이 모두 없어져 버렸단다. 결국 돌아가신 외할아버지가 그를 시인으로 만들어준 셈이다.
질풍노도? 그럴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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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는 괄호에서 시작된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식탁에 앉아 시를 쓴다. 최소한의 의복에 헤드랜턴을 쓰고 색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새벽녘에 마주친 아내는 참으로 흉측하다고 했다. |
산하 3개 고등학교의 연합위원장을 맡아 경찰에 쫓기기까지 하고, 졸업식 다음 날에는 몰래 집을 나와 광주 본촌공단 기계공장에 취업해 넉 달 동안 일하기도 하고…. 가끔 부모님께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꼭 너 같은 자식 하나 낳아 키워보라”고 하실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를 딱 하나만 뒀다고.
“저는 문예창작학과 91학번입니다. 입학을 했더니 고등학교 때 글 좀 썼다는 친구들이 전국에서 모여 있었습니다. 모두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기를 원했었는데, 1학기 종강 무렵 기숙사에 있던 동기가 같은 방 선배에게 수업 시간에 합평한 작품들을 내보이고 매긴 예상 등단 순서가 발표되어 학과가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습니다. 40명 정원에서 10명을 추린 랭킹에서 저는 10등이었는데, 일을 주도했던 친구가 저와 친해서 마지못해 10위에 넣었다는 고백을 군대 갈 때 하더군요.”
파란만장한 고교시절과 달리 그의 대학 생활은 치열했다고 한다.
“합평회 위주의 수업이다 보니 강의실 분위기는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는 전쟁터 같았습니다. 강의실 밖에서 선배와 동기들로부터 받은 문학적 세례도 컸어요. 막걸리 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네가 시를 알아?’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어느 선배는 술에 취해 학교 근처 목장 울타리를 넘어 밤새 젖소하고 미당(未堂)의 시를 논(論)하는 일도 있었던 게 그 시절 분위기였지요.”
시인은 군대를 다녀온 후 본격적으로 시를 공부했다.
“선배가 되었으니까, 후배들이 제 작품을 읽을 수 있으니까 더 분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침 9시에 학교 도서관이 문을 여는데, 언제나 1등으로 ‘간행물열람실’에 들어가 국어대사전이 놓인 창가에 자리를 잡고는 공강(空講) 때마다 가서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자유열람실’로 자리를 옮겨 밤 10시까지 작품도 쓰고 시집도 읽었습니다.”
작품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은 많이 없었다고 한다. 어느 방향에 가치를 두느냐보다는 익숙한 것이 맞다는 생각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단다. 즉 낯선 감각의 새로움을 좇기보다는 일상적 정서 속에서 펼칠 수 있는 개성적 공감의 확대가 시의 방향이자 목표였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일관된 방향을 가진 보기 드문 시인인 셈이다.
서녘을 응시하는 고요한 눈
그의 시집 《밤새 이상을 읽다》에는 해설을 쓴 비평가 류신의 말대로 ‘직유의 시인이자 사랑의 시인’으로서 그의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58편의 적잖은 시편이 체제 구분 없이 하나의 범주로 묶여 서정시(抒情詩) 특유의 차분한 성찰의 마음결을 보여주고 있다. “마음의 바깥은 / 애초부터 누구의 몫도 아니었습니다 / 비늘만 잔뜩 묻은 성긴 그물을 들고 / 강가로 나섭니다”라는 그의 서시(序詩)와 같이 세상과 삶을 향한 그의 깊은 시선은 따뜻하다.
짐승의 기미도 사라진 숲에서
기적(汽笛) 같은 나무 몇 그루가
또록또록 눈을 뜨고
죄를 짓듯 꽃을 피우고
(중략)
봄의 등뼈를 베고 누워
한잠 자고 나면, 그새 호호백발이 되어
이 봄을 갚지 않아도 될 성싶다
- 시 ‘그새’
‘그새’는 아이를 대동한 초봄의 어느 산행을 6연 19행의 고요한 깨달음으로 이어간 작품이다. 시적 화자의 삶은 그것대로 느린 듯 질박한 듯 그려놓으면서도, 보채는 아이를 업고 산자락까지 내려오면서 생의 비밀을 깨닫는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조용히 ‘이 봄을 갚지 않아도 될 성싶다’고 한다.
짐승의 기미(機微)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숲에 기적(奇跡)같이 ‘기적(汽笛) 같은 나무 몇 그루가 / 또록또록 눈을 뜨고 / 죄를 짓듯 꽃을 피우고’ 있다. 짐승이 사라진 숲은 더 이상 사람과의 공존의 울타리가 되지 못한다. 이것만도 과거 수천, 수만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숲에서 느꼈던 호젓함과 안도감과 공포심과 경외심을 빼앗은 것이지만, 무엇하러 ‘기적(汽笛) 같은 나무 몇 그루’는 남아 ‘죄를 짓듯’ 꽃을 피우는 것인가? 또 무엇하러 ‘죄를 짓듯’ 어린 딸아이를 데리고 산에 올랐을까? 다리가 아파 투덜거리는 딸아이에게는 아마 ‘한잠 자고 나면, 호호백발’이 되는 생의 진리를 깨우치게 할 요량이었을지 모르겠다. 크게 한잠 잘 수 있는 이런 경지에 오를 때 ‘이 봄은 갚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새’의 핵심적 조응은 ‘죄를 짓다’와 ‘갚지 않아도 될 것이다’이다. 나무와 숲이 짐승과 별리(別離)된 불모의 땅에서 나무는 꽃을 피운다. 자연의 순환 고리가 깨진 곳에 핀 꽃은 그 열렬한 생의 욕동(欲動)에도 불구하고 불구성(不具性)을 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구를 전제로 한 ‘꽃 피우기’는 ‘죄를 짓는 일’이다. 숱한 생태주의 시와 달리 김병호 시인은 여기서 한 생 ‘한잠’으로 살아 호호백발이 되면 죗값을 치르지 않아도 될 성싶다고 한다.
자연(自然)의 말뜻 그대로 스스로 불구성을 벗어나든가, 아니면 ‘꽃’에 무감각한 그 불구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차원을 달리한다는 관점이다. 생을 ‘한잠’으로 표현한 의외성도 놀랍지만, 불구성을 인정하는 그것만으로 자연 파괴의 실상을 여실하게 비판하는 수완이 아주 돋보인다.
어느 독자의 마음을 간지럽게 움직일 수 있다면
‘그새’를 읽고 난 뒤 그가 요새 집중하고 있는 시적 관심이 궁금해졌다. 그와의 인터뷰는 이메일로 했다. 이런 답이 왔다.
“눈송이 하나도 앉을 자리가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숙명론자는 아니지만 삶의 어느 고비에서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을 예감하고 목격하기도 합니다. 가끔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막연함에서 시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형상이나 기미 없이, 얼룩처럼 흔적으로만 남아 있는 것들에 마음이 잘 기우는 까닭이지요. 그리고 가끔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내고 버티는 일이 이 세상에 오게 된 까닭을 지우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그의 시적 관심과 지향에 대한 부가적 해석이나 설명이 필요 없는 명확한 일관성의 표명으로 느껴진다. 그는 고요하지만 천지(天地)가 흔들리듯 포효(咆哮)하는 시인이다.
“저의 시 한 행이 어느 한 독자의 마음을 간지럽게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을 공감이라 하겠는데, 제 시의 시작과 끝이 바로 이곳에 놓여 있고 앞으로도 이 지점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글 金載弘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