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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

가수 장혜진

시대에 맞는 신선한 음악으로 아이돌과 정면승부하는 25년차 가수

글 : 이근미  월간조선 객원기자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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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꿈속에선 언제나’로 데뷔, 최근 ‘나는 가수다’ 출연으로 제2의 전성기
⊙ ‘내게로’(바다) ‘키 작은 하늘’(린) ‘1994년 어느 늦은 밤’(임형주) 등은 후배 가수들이 계속 리메이크
⊙ 美버클리音大에서 실용음악 전공하고 귀국한 후 한양여대 교수로 임용
⊙ 脫北者 강제北送 반대하는 연예인 모임 ‘크라이 위드 어스(Cry with Us)’ 활동

장혜진
⊙ 50세. 美 보스턴 버클리음대 프로페셔널 뮤직과, 경희대학교 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 퍼포밍아트학
    졸업.
⊙ 現 한양여자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
⊙ 수상: 18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발라드가수상(2011), 제4회 아시아가요제 특별상(1999).
  요즘 1990년대 활동한 가수들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MBC ‘나는 가수다’(나가수), KBS ‘불후의 명곡’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가창력 있는 가수들이 화제에 오른 데 이어 MBC 무한도전 특집 ‘토요일토요일은 가수다’(토토가)에 1세대 댄스가수들이 출연하면서 복고 열기가 달아오르는 중이다. 1990년대 댄스가수들의 곡이 음원 차트 상위권을 휩쓰는 가운데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20년 전 음악을 장착한 빅쇼(Back to the 90')가 열리는 등 1990년대 가수들의 전성시대가 다시 시작된 느낌이 들 정도이다.
 
  아이돌의 댄스뮤직이 일주일 단위로 출시되는 현재와 달리 1990년대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고루 사랑을 받는 가운데 밀리언셀러 앨범이 잇달아 나오던 시절이다. 나가수와 토토가를 보면서 향수에 젖었던 이들이 새삼 놀란 것은 새 노래가 쏟아져 나오는 디지털 음원 세상에서도 20년 넘게 정상을 지키는 가수들이 있다는 사실 아닐까.
 
 
  ‘파워풀하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
 
  나가수 출연으로 건재함을 알린 가수 장혜진은 여러 면에서 기록을 남기며 주목받고 있다. 1991년 ‘꿈속에선 언제나’로 가요계에 데뷔하여 ‘키작은 하늘’ ‘내게로’ ‘1994년 어느 늦은 밤’ ‘완전한 사랑’ ‘꿈의 대화’ ‘못 다한 사랑’ ‘아름다운 날들’ ‘마주치지 말자’ ‘불꽃’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낸 그녀는 여자가수 가운데 처음으로 전임교수 임용이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목소리를 내야 할 때 사회를 향해 분명한 의사를 표하고 있다.
 
  ‘파워풀하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섬세한 감정표현으로 어떤 스타일의 노래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가요계의 최고 디바’라는 평을 듣는 만큼 여자 댄스가수들이 오디션을 볼 때 가장 많이 선택하는 노래가 다름 아닌 장혜진의 곡이다. 바다가 부른 ‘내게로’, 린의 ‘키 작은 하늘’ 등 그녀의 노래는 리메이크가 많이 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1994년 어느 늦은 밤’은 이은미, 김범수, 유미, 럼블피쉬 등 여러 유명 가수들이 다시 불렀다. 팝페라 테너 임형주도 2월 발매 예정인 ‘가요 리메이크 앨범’ 수록곡 중에서 ‘1994년 어느 늦은 밤’을 미리 공개해 화제를 낳았다.
 
  장혜진은 지금까지 정규앨범 7집을 비롯하여 디지털 싱글, 프로젝트 싱글, 미니 앨범, 리메이크 앨범 등을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냈다. 최고의 가창력과 표현력을 갖춘 가수들만이 의뢰받는다는 드라마 OST 작업에도 1997년 이후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 ‘장밋빛 인생’ ‘개와 늑대의 시간’ ‘하얀 거탑’ 등 최고의 시청률을 올린 드라마 등에서 호소력 짙은 목소리를 선보였다.
 
  앨범을 낼 때마다 새로운 시도를 했던 그녀가 지난 1월 26일 0시 각종 음악 사이트를 통해 신곡 ‘오래된 사진’을 공개했다. 이번 곡은 실력파 래퍼 딥플로우가 피처링을 하고 유명 힙합 에이전시 스톤쉽과 음악 프로듀서 TK 등 흑인 음악 전문 스태프들이 대거 참여했다. 특히 곡의 특성에 맞춰 소속사 캔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인디 레이블 ‘주식회사 발전소’가 이번 음반의 배급을 맡았다.
 
 
  50세의 나이에도 새로운 실험
 

  “24년의 활동기간에 정규앨범 7장은 너무 적은 게 아니냐고들 하시는데 저는 ‘이런 음악을 하고 싶다’는 그림이 그려져야 음반을 내는 성격이에요. 몇 년 전부터 흑인 인디 음악에 끌려 관심을 갖고 있다가 그쪽 전문가들과 만나게 되면서 결실을 맺었습니다. 7곡의 음원을 차례로 발표하고 마지막에 서너 곡을 추가해서 연말쯤 8집 앨범을 낼 계획입니다. 거대한 싱글 시장을 갖춘 미국 방식이죠.”
 
  반응은 ‘신선하다. 이런 조합이 있다니 놀랍다. 나이 든 사람이 트렌디한 곡을 부르면 거부반응이 일어나는데 일부러 어린 티를 내지 않으며 적절히 잘 표현했다’는 등 대체로 긍정적이다. 50세의 나이에 새로운 실험을 한 장혜진은 반응이 좋아 안심했다면서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며 웃었다.
 
  그녀는 대학에서 체조를 전공하다가 부상을 당해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자 27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데뷔를 했다.
 
  “1집과 2집은 록음악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소리 소문 없이 잘 나갔는데 없어서 못 팔 정도였어요. ‘장혜진 1집 음반 꿈속에서 있음’이라는 안내문을 붙여 놓은 레코드점들도 있었죠. 3집 앨범의 ‘1994년 어느 늦은 밤’과 ‘내게로 오라’는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과 1, 2위를 다툴 정도로 인기가 있었어요.”
 
  클레오파트라로 변신해 발표한 4집의 타이틀곡 ‘완전한 사랑’과 라틴 댄스곡 ‘그냥 두지 마’도 큰 인기를 끌었다. 7집의 ‘마주치지 말자’는 당시 유행했던 미디엄템포로 젊은 층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워너비 발라더’
 
  정규앨범 외에 수시로 발표한 싱글앨범을 통해서도 새로운 시도를 했다. 힙합그룹 리쌍의 개리가 참여한 디지털 싱글 ‘불꽃’이 큰 사랑을 받았고 2006년에 남성 듀오 바이브와 함께 부른 ‘그 남자 그 여자’는 지금까지도 노래방 애창곡으로 손꼽히고 있다. 일락, 먼데이키즈 등의 까마득한 후배들과 ‘Voice One’이라는 프로젝트팀을 결성해 젊은층의 사랑을 받았다. 2001년에는 남성가수들의 명곡을 담은 리메이크 앨범을 발매하여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늘 새로운 시도를 하는 그녀를 익히 보아 온 주변에서는 이번에 발매한 흑인 음악 앨범에 대해서도 “장혜진이기에 가능하다”는 평을 내렸다.
 
  “데뷔한 지 24년 되었지만 새로운 음악들을 ‘장혜진화’하여 트렌드와 적절하게 조화시켰고, 발매하는 앨범에서 매번 히트곡들이 나오면서 새로운 팬층이 늘어났어요. 그 덕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죠. 일부러 트렌드를 맞추려고 한 게 아니라 관심 있고 좋은 음악을 시도하려고 늘 노력했어요. 다행히 대중이 좋아해 주어 고마울 따름이죠.”
 
  ‘디바’ ‘워너비 발라더’라는 호칭이 따라다니는 그녀의 특징은 ‘시원하게 탁 트인 목소리’이다. 2001년 미국 디즈니랜드에서 백설공주 애니메이션 제작 100주년 기념 ‘섬데이 마이 프린스 윌 컴’(Someday My Prince Will Come) 음반을 제작할 때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함께 장혜진을 초청했을 정도로 노래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정작 본인은 “특색 있는 목소리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런 음악을 하든 저런 음악을 하든 상관이 없었던 거죠. 어떤 음악이든 맞춰 갈 수 있어요. 연기자도 너무 특색이 있으면 캐릭터가 한정되어 다양한 배역을 맡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특색 없는 목소리가 여러 음악을 하기에 좋았습니다.”
 
  고음을 편하게 낸다는 평을 듣는 그녀는 ‘소리 만들기’에 오랜 기간 공을 들였다고 전했다.
 
  “대학 다닐 때 신촌 음악다방에서 디제이로 일했는데 고음을 지르는 곡은 질리기 때문에 편안한 곡을 주로 틀었어요. 저는 고음을 싫어하는데 작곡가들이 꼭 고음이 들어가는 곡을 줍니다. 고음을 어떻게 편안하게 들려줄까, 많이 연구했어요. 성대를 누르지 않고 편안하게 불러야 듣기 좋은 목소리가 나오는데 그러려면 복부와 다리에 힘을 넣고 버텨 줘야 합니다. 울리는 공간을 열어서 공명이 잘되도록 해야 부담스럽지 않은 음을 만들 수 있어요.”
 
 
  “모든 가수가 스승, 듣는 게 공부다”
 
  좋은 소리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들으면서 연구했다고 한다.
 
  “모든 가수가 저의 선생님이에요. 들으면서 따라 부르고, 어떻게 소리냈을까 연구합니다. 많은 가수의 흉내를 내다 보니 저절로 깨닫게 되더라고요. 매일 듣는 게 소리를 잘 내는 비결이에요.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새로운 세대는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부르나 살펴봅니다. 학생들의 독특한 창법은 그대로 살려주면서 저도 배우는 거죠.”
 
  그녀는 교수가 되기 전부터 스스로 터득한 발성법으로 남편 강승호 대표가 운영하는 캔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의 보컬 트레이닝을 맡았다.
 
  “김종서와 박상민이 저랑 동갑이에요. 둘이 녹음할 때 제가 디렉팅을 하고 남성 듀오 캔과 박완규의 보컬 트레이닝을 맡기도 했죠. 신인들은 직접 가르쳤는데 경험한 걸 전하다 보니 이론적으로 맞는지 어떤지 답답하더라고요.”
 
  1990년대 중반에 유학을 가겠다고 하자 남편이 “무슨 공부냐, 그냥 노래하고 애나 잘 키우라”고 일축했다.
 
  “우연히 빛과소금의 장기호씨가 제가 유학 가고 싶어한다는 얘기를 듣고 ‘장혜진은 밤무대 체질도 아니고 미사리 라이브카페 무대에 어울리는 음악 스타일도 아니다. 가르치는 거 좋아하니 유학을 보내라’고 충고하자 남편이 그제야 저한테 공부하러 가라는 거예요.”
 
  정작 남편이 허락한 이후에는 이런저런 걱정으로 미적거렸단다.
 
  “나이도 먹은 데다 영어를 잘 못해서 용기가 나지 않더라고요. 2001년에 저의 6집 앨범을 직접 프로듀싱하다가 유학을 결심했어요. 막연히 감(感)으로 할 게 아니라 공부를 하자는 생각에서였죠. 6집 앨범 준비에다 유학 고민까지 겹쳐 살이 37kg까지 빠졌어요.”
 
  2002년 초, 실용음악의 명문인 미국 보스턴의 버클리음대로 유학을 갔다.
 
  “아직 영어도 익숙지 않은데 첫 12주 동안 성적을 보고 입학을 결정하겠다는 거예요. 수업 내용을 모두 녹음해서 한국 학생들을 붙잡고 도움을 청했어요. 그렇게 통과한 뒤 학교 다니는 동안 하루 3시간밖에 안 잤어요. 수업 받고 피아노 연습에다 미디(MIDI·뮤지컬 인스트루먼트 디지털 인터페이스·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 장비까지 배우느라 원형탈모증이 생길 정도였어요. 지금 하라면 못할 거 같아요.”
 
  한 해에 3학기 수업을 받아 프로페셔널 뮤직학과 4년 과정을 2년3개월 만에 마쳤다. 이론을 배우면서 답답했던 것들이 많이 해소되었고, 백지로 갔다가 여러 그림을 그려서 돌아온 게 수확이라고 했다.
 
  “공부를 하면서 감으로 했던 것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했어요. 막연히 생각하고 연구했던 걸 전문용어를 사용해 전문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죠. 피아노로 코드를 짚을 수 있게 되고 작곡도 배웠습니다. 공부를 하고 나서 음악 분석에 좀더 디테일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목소리와 음악이 잘 묻는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꾸준히 작곡을 하고 있는데 발표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디지털音源 시대에 히트곡 낸 최고령 가수
 
   유학을 다녀와서 경희대학교 아트퓨전디자인대학원에 다니며 2년간 준비해 2006년 1월에 7집 ‘4 시즌 스토리’를 발표했다. 타이틀곡 ‘마주치지 말자’로 인기를 누리는 가운데 그해 6월 디지털 싱글 ‘불꽃’도 발표했다.
 
  “마주치지 말자는 일주일간 1위를 하는 가운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라디오에 출연했더니 ‘괜찮은 신인가수가 나왔네요’라는 댓글 많이 달리더군요. 나이든 목소리가 아니라는 뜻이어서 반갑더라고요. 이번에 ‘오래된 시간’을 발표한 이후에 ‘나이와 목소리가 매치가 안 된다. 장혜진의 목소리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댓글이 달려 기뻤어요. 10대와 20대 가수가 대부분인 시장에서 성공이 쉽지 않은데 예상 외의 뜨거운 사랑을 받아 감사할 따름이죠.”
 
  2007년 8월에는 42세의 나이로 데뷔 이후 첫 댄스곡을 발표했다. 스페셜 파워 앨범 타이틀 곡인 ‘가라 사랑아’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나이트클럽에서 폭발적인 호응을 얻는 기록도 남겼다.
 
  디지털음원 합법 다운로드가 2004년부터 시작되면서 음악시장이 완전히 바뀌었다. 음악사이트 멜론이 다운로드와 스트리밍 수치를 합산하여 발표한 디지털음원 10년 결산 ‘톱976’곡 가운데 장혜진의 노래 2곡이 포함되었다. 디지털음원 차트에 이름을 올린 가수 중 가장 나이가 많다는 기록도 남겼다. 한 살 아래인 이승철을 제외하고 대개 어린 가수들이 음원차트를 석권하고 있다. 멜론과 지니에서 음원성적과 화제성을 들어 매년 히트곡을 발표하는데 2006년에 장혜진의 ‘마주치지 말자’와 함께 이름을 올린 이들 가운데 백지영, 싸이, 김종국, 성시경이 그나마 나이 든 가수들이다.
 
  성과를 올리며 부지런히 달려온 장혜진은 2011년 나가수에 출연하면서 대중과 한층 가까워졌다. 최고의 가창력을 갖춘 가수들이 경연을 하면서 1위도 하고 꼴찌도 하는 나가수에서 장혜진도 매회 화제를 뿌리며 엄청난 에너지를 뿜었다.
 
  “그 이전까지 음악프로 이외에는 출연을 안 했어요. 가수가 왜 오락프로그램에 가서 웃겨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나가수도 처음에는 나가지 않으려고 했어요. 정당하게 표를 사고 공연장에서 노래를 듣는 게 마땅하건만 대단한 가수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평가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나가수 이후 공연문화가 활성화하고 있다는 PD의 설득을 듣고 프로그램을 봤더니 한국 최고의 연주자들이 연주를 하고, 사운드부터 시작해서 무대시설이 엄청나더군요. 결국 무대가 탐이 나서 큰 결심을 했죠.”
 
 
  나가수 출연 후 카메라 공포증 사라져
 
  처음에는 나가수만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상당히 힘들었다고 한다.
 
  “평소에도 설렘과 긴장으로 무대에 나가기 전에 떠는 편이에요. 무대에 딱 서면 음악이 나오면서 떨림이 멈추고 그때부터 행복한 에너지가 솟아올라요. 그런데 나가수는 무대에 서면 1분 이상 정적이 흘러요. 음악이 나와야 감정을 실어 노래를 하는데 정적 속에서 평가단이 지켜보고 있으니 정말 힘들더라고요. 생전 처음 겪는 긴장 속에서 우울증 걸리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들었어요. 뒤로 갈수록 조금 편안해졌지만 평가받는다는 건 힘든 일이에요.”
 
  어떤 일이 있어도 결강을 하지 않는 그녀는 수업과 나가수 준비를 겸하느라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나가수 이후 카메라 공포증이 사라진 걸 큰 소득으로 생각했다.
 
  “나가수 이후 어느 무대에 가도 떨지 않아요. 초청하는 데가 많아진 것도 고마운 일이죠. 작년에는 호텔에서 디너쇼를 했는데 비싼 티켓이 매진됐어요. 나가수 후광도 있었을 거예요.”
 
  나가수 출연 이후 가장 불편해진 건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는 일이라고 한다.
 
  “제가 나가수에 14번 연속 나갔는데 최다 출연이라고 하더군요. 그 전까지 이름은 알려져도 사람들이 제 얼굴은 잘 몰랐어요. 남편은 사람들이 많이 알아봐요. 저랑 같이 가면 ‘저 사람 장혜진 남편이야’라고 하면서도 옆에 있는 저는 못 알아봤어요. 나가수 출연 이후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알아봐서 불편하게 되었지요.”
 
 
  남편은 ‘깡통 매니저’ 강승호 대표
 
  그녀의 남편인 캔엔터테인먼트 강승호 대표는 소방차의 로드매니저로 시작하여 김완선, 김종찬, 김민우, 윤상, 손무현의 매니저로 일하다가 1991년에 회사를 설립했다. 장혜진이 캔엔터테인먼트 1호 가수이며 김종서, 박상민, 캔, 박완규가 이 회사를 거쳐 갔다. 목소리가 크고 인상이 강해 ‘깡통 매니저’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강승호 대표는 TV에 종종 얼굴을 비치는 데다 MBC 목표달성 토요일 ‘악동클럽’ 출연으로 얼굴이 많이 알려졌다. 외모와 달리 ‘가요계의 신사’로 통하는 강 대표는 어려운 일을 당한 연예인에게 가장 먼저 달려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태지도 ‘시나위’ 해체 후 가장 먼저 강 대표를 찾아갔을 정도이다.
 
  헤비메탈계의 전설이었던 김종서를 대중 속으로 끌어들였고 외모지상주의가 절정일 때 박상민, 캔 같은 가수들이 정상에 설 수 있게 한 실력자로도 유명하다. 2000년 들어 먼데이키즈와 일락을 배출해 젊은 층과도 친숙하다. 캔엔터테인먼트의 오디션 기준은 오로지 ‘노래 실력’이다. 최고의 가창력을 지닌 1호 가수 장혜진을 24년간 든든하게 후원해 온 강 대표는 방송에서 “혜진이를 만나 캔기획을 설립했고, IMF 때 완전히 거지나 다름없는 형편에 놓여 좌절했을 때 괜찮다며 위로해 주고, 앨범을 내고 공연을 하면서 나를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줬다”며 고마움을 표한 바 있다. 딸 강은비는 펜싱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활약하며 아시아 주니어 선수권대회에서 개인 동메달을 따기도 했다.
 
  장혜진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한양여자대학교 실용음악과에서 겸임교수로 후학을 가르치다가 2009년에 여자가수 가운데 최초로 전임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동안 레인보우의 지숙, 베이비(Bay,B)의 미엘, 살찐고양이를 비롯하여 인디계열의 밴드들까지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요즘 가장 경쟁률이 높은 학과가 다름 아닌 실용음악과이다. 보컬과는 평균 200~300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합격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예전에는 실용음악과를 개설한 학교가 많지 않았는데 아이돌이 인기를 얻으면서 붐이 일어 실용음악과가 많이 늘었습니다. 그런데도 워낙 지원자가 많아 경쟁률이 어마어마합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기름을 부었다고 할 수 있죠. 평범한 이들이 스타가 되는 걸 보고 꿈을 꾸는 친구들이 많아졌어요. 덩달아 실용음악을 가르치는 입시학원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면서 꿈과 희망이 아닌 바람을 넣는 일이 많아졌지요. 전혀 가능성 없는 친구들까지 부추기는 일도 있어요. 시험 보러 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음정이 안 맞는데도 열심히 노래하는 친구들을 보면 안타깝지요. 악기는 오래 걸리니 너도 나도 보컬에 몰려 보컬학과가 경쟁률이 높은 겁니다.”
 
  가능성 여부를 알고 싶으면 확실한 전문가를 만나 테스트를 받아 보라고 권한다. 소질이 없으면 빨리 접고 자신의 진짜 적성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게 장혜진 교수의 충고이다.
 
  “학교에서는 발전 가능성이 있고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학생을 선택합니다. 노래만 하기보다 곡도 쓰고 컴퓨터와 악기, 신시사이저를 서로 연결하여 디지털사운드를 만들고 합성할 수 있는 친구가 앞으로 각광받게 될 겁니다. 아이돌도 사랑받겠지만 앞으로는 음악을 잘 만드는 싱어송라이터의 시대가 열릴 겁니다. 이미 그러한 성향의 음악을 하는 인디계열의 친구들이 사랑받고 있습니다.”
 
  교수가 되면서 여기저기서 부르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경제포럼, 아카데미 같은 데서 초빙을 많이 합니다. 이름만 올려놓고 가끔 한 번씩만 와 달라는 곳도 있어요. 제가 그냥 가수로만 활동했더라도 불렀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자존심이 좀 상하기도 해요. 가수는 격이 안 맞다는 건가? 아직도 가수는 딴따라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교수가 되니 지식인층으로 대하는 느낌이에요.”
 
  여러 모임 가운데 특별히 ‘수요포럼 인문의숲’을 선택해 1년간 인문학 공부를 했고 현재 등기이사를 맡고 있다.
 
 
  골수기증협회 홍보대사 맡기도
 
  학생들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 내는 일에도 열심이다. 2011년에 “교육과학기술부의 취업률 평가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히고, 이주호 교과부 장관의 퇴진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에 동참했다. 당시 거의 모든 매체는 “졸업하고도 수년을 갈고 닦아야 대중음악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제자들에게 취업률을 높여 달라고, 전공인 음악과는 상관없는 곳에 취직해서 국세청 세금 납부 근거를 만들어 달라고 독촉할 수 없다”는 장혜진 교수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당시에 프리랜서 가운데 일부도 취업으로 인정한다는 정도로 무마되었는데 예술대학을 취업률로 평가하겠다는 발상이야말로 대표적인 탁상공론 행정입니다. 직접 발로 뛰어 봐야 현장을 알 텐데 답답한 일이죠. 예체능계열에 취업률을 적용해 비율이 낮으면 학과 승인을 취소하는 일도 발생하고 있어요. 계속 개선을 요구하고 있지만 계란으로 바위치기예요. 꿈과 희망을 키워 주는 게 아니라 억누르고 있으니 힘이 빠집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음원저가정책에 항의하는 음악생산자연대 주최 문화제에 참여해 대국민 호소문도 낭독했다.
 
  중국의 탈북자 강제북송을 반대하는 연예인 모임 ‘크라이 위드 어스(Cry with Us)’의 일원인 그녀는 2012년 3월 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열창을 하고 50여 명의 연예인과 함께 “중국 정부가 탈북자들을 북송하지 않게 도와달라”고 세계를 향해 눈물로 촉구했다. 2014년에는 아시안골수기증협회 홍보대사를 맡아 LA에서 자선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평탄하게 지내며 평생 노래하겠다’
 
  24년을 한결같이 달려온 비결을 그녀는 이렇게 정리했다.
 
  “큰 기대를 안 하고 살아요. 스타가 되고 싶다는 욕심도 없어요. 음악이 좋고 노래 부르는 게 좋을 뿐이에요. 일등 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그러면 집착하게 될 테지만 저는 그런 게 없어요.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예요. 남편의 추진력과 책임감을 보고 결혼해서 의리있게 오래 가자고 했고 지금도 친구처럼 지냅니다. 행복해야 하고 너무 사랑해야 하고, 그러면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겠죠. 일이든 가정이든 좋고 행복하면 된다는 생각이니 기복이 크지 않아요.”
 
  다만 욕심을 좀 낸다면 제대로 프로듀싱한 앨범을 내는 것과 자작곡을 발표하고 싶은 정도라고 했다. ‘평탄하게 지내며 평생 노래하겠다’는 것이 그녀의 진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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