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사진작품 중 가장 고가로 팔리는 사진 연작 〈소나무〉, 엘튼 존과 벨기에 왕실도 소장
⊙ “평생 구입한 책 1만여 권, 30여 종의 잡지 구독하는 잡지 마니아”
⊙ “동양적인 인물 사진이 다음 작품 주제”
裵炳雨
⊙ 65세. 홍익대 응용미술학과·홍익대 대학원 공예도안과 졸업.
⊙ 서울예술대학 사진과 교수, 독일 빌레펠트대 사진디자인과 연구교수 역임,
C20 한국대표예술가 선정.
⊙ 저서: 《빛으로 그린 그림》 《대양을 향하여》 《청산에 살어리랏다》
《신들의 정원 앙코르와트》 등.
⊙ “평생 구입한 책 1만여 권, 30여 종의 잡지 구독하는 잡지 마니아”
⊙ “동양적인 인물 사진이 다음 작품 주제”
裵炳雨
⊙ 65세. 홍익대 응용미술학과·홍익대 대학원 공예도안과 졸업.
⊙ 서울예술대학 사진과 교수, 독일 빌레펠트대 사진디자인과 연구교수 역임,
C20 한국대표예술가 선정.
⊙ 저서: 《빛으로 그린 그림》 《대양을 향하여》 《청산에 살어리랏다》
《신들의 정원 앙코르와트》 등.
〈숲은 열리고 닫히는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곳, 밤같이 드넓은 정신에 새로운 빛을 채우는 영혼, 그래서 숲에 있다는 것은 우주라는 조개껍데기 안에 있는 것이다. 숲은 시간과 공간이 따로 노는 곳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짠 비단결 같은 곳, 가장 먼 곳이 바로 내 앞에 있는 곳, 가스통 바슐라르 식으로 이야기하면 숲은 ‘숨겨져 있는 웅대함처럼 깊은 것’이다.〉
신준환 전 국립수목원장이 쓴 책 《다시, 나무를 보다》의 한 대목이다. 문장을 곱씹어 본다. 문득 사진작가 배병우가 떠오른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소나무〉 연작이 생각난다. ‘시간과 공간이 짠 비단결’. 배병우가 흑백의 빛으로 그린 소나무 군락을 보며, 얼핏 소나무 뒤편 어딘가에, 숲이 존재해 온 수백 년의 세월이 내는 웅성거림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 걸 본 것만 같은 적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벨기에 국왕·엘튼 존이 고객
배병우가 누구인가. 여수 촌놈 출신(특별히 여수시나 어촌을 비하하고자 쓴 표현은 아니다), 사진이 아닌 응용미술을 전공하며 사진을 찍었고, 1984년 서른넷의 나이에 소나무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삼십 년, 전국을 순례하며 소나무를 찍어 왔고, 어느 순간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대열에 올라섰다. 한 점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그의 사진은 벨기에 왕실과 엘튼 존 등 큰손 컬렉터들의 소장 목록에 올라 있다.
궁금해졌다. 하나의 종을 30년 넘게 마주한 사람의 정신세계란 어떤 모습일까. 책 많이 읽기로 유명한 그의 서가엔 어떤 책이 꽂혀 있을까.
인터뷰 날짜를 잡는 배 작가의 전화 목소리는 활기찼다. 프랑스에서 전날 막 돌아온 참이라고 했다. 장거리 비행의 여독은 물론, 예순이 넘은 나이도 느낄 수 없었다. 배 작가는 지난해 여름부터 프랑스 샹보르 성(Chateau de Chambord)에서 사진작업을 하고 있다. 샹보르 성은 루아르 지역에 있는 고성이다. 내년이 한불 수교 130주년이 되는 해인데, 이를 기념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프랑스 측의 초청을 받아 진행 중이다.
알려준 주소를 들고 경기도 파주 헤이리마을을 찾았다. 스마트폰의 지도 앱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유영호 조각가의 대형 조각상 ‘그리팅맨(Greeting Man)’이 보인다. 그 뒤로 3층짜리 건물이 나타났다. 그의 작업실이다.
서재는 3층에 있었다. 탁구대가 있는 1층을 지나 각종 작업실이 있는 2층을 지나쳤다. 계단을 따라 옆에는 책이 쌓여 있다. 그 옆 구석에 손바닥만 한 미니어처 그리팅맨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다.
“왜 그리팅맨 조각이 작업실 안팎에 있나. 특별히 좋아하는 작품인가”고 묻자, “유영호 작가가 작품 제작비가 모자랄 때 돕고 싶어서 사준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투리는 어렴풋이 흔적만 남아 있는데, 머리를 긁적대며 대답하는 모습에서 어째 ‘촌놈’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것이 어쩌면 배 작가의 성공 비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촌놈’이라는 단어는 종종, 빠른 속도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속도로 사는 사람을 반쯤 질투하며 쓰는 표현이기도 하니 말이다.
갤러리로 사용하려 했다는 공간에 왜 탁구대가 주인공인지 물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매일 1시간씩 탁구를 친다”는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학창 시절 유도로 다져진 체격을 유지하는 비결인 듯했다.
지금까지 책 1만여 권 구입
3층에 오르자 본격적인 책세상이 펼쳐졌다. 언뜻 보기에도 수량이 상당했다. 특히 사진과 디자인 관련 도서들이 많아 보였다. 사진집과 각종 도록, 소설책, 인문학 도서 등이 느슨한 분류로 뭉쳐져 꽂혀 있었다. 배 작가는 “어수선하다”고 표현했다.
“공사를 하느라 며칠 전에 책을 다 뺐다가 급하게 다시 꽂아 놓은 참이에요. 무슨 책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있었는데, 덕분에 지금은 헛갈리네요.”
—작업실에 총 몇 권의 책이 있는지 알고 계세요?
“대략 3000권 정도 있을 거예요. 집이랑 여기저기 다른 곳에 2000권가량 흩어져 있고요. 생각해 보니까 살면서 일생 동안 책을 1만권 정도 산 것 같아요. 좋다고 생각하는 책은 여러 권 사서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많이 했고요. 아마 한 사람당 50권에서 100권 정도는 준 것 같아요.”
그의 말대로 여러 권 있는 책들이 눈에 띄었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두 질이 보였다.
“외국에 나갈 때 읽으려고 여러 권을 사기도 해요. 무거우니까 호텔에서 읽고 책을 그냥 놓고 오는 경우도 많거든요.”
—제자들이 책을 빌려간 다음 안 가져오는 경우도 곧잘 있었다는데, 없어진 게 아쉬운 책은 없나요.
“그런 책은 대부분 다시 구입해 놓았어요. 절판돼서 못 구하는 책도 있긴 하지만, 그건 또 그냥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책의 소유 자체를 즐기는 ‘책 물신주의자’는 아닌 듯했다. ‘어떤 책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지’ 물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진가라고 한 에드워드 이스턴이나 모호이너지의 사진집을 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듣고 보니 우문에 현답이었다.
“역사 분야의 책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어떤 분야든 그 역사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거든요. 뷰몬트 뉴홀(Beaumont Newhall)이 쓴 〈사진의 역사(The History of Photography)〉는 엉터리 영어를 다 동원해서 원서로 읽기도 했어요.”
그러고 보니 책장엔 《스페인전쟁》, 《향료전쟁》 등 역사에 관한 책이 많았다.
—책은 주로 어떤 기준으로 고르나요.
“신문에 나오는 책 소개 기사를 꼼꼼히 읽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해 놓고 소개된 책을 구입해요. 기본적으로는 그야말로 잡식성이에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는 편입니다.”
‘讀萬卷書 行萬里路’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점심시간이 됐다. 서가 옆에 자리한 부엌에서,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조수들이 등장하더니 떠들썩하게 점심상을 차린다. 매일 이렇게 점심을 먹는다고 한다. 배 작가와 조수들 사이에 토의가 오간다. 된장국은 빼고 민어를 굽자는 둥 제법 진지하다. 작업실 냉동고에는 항상 제철 생선이 그득하단다.
그러고 보니 그의 서가는 약간 독특했다. 냉장고는 있고, 텔레비전은 없었다. 컴퓨터도 다른 방에 있지, 책과 함께 있진 않았다. 밥을 먹고, 그런 후에는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공간구성이라고 할까.
—여기에 있는 책을 다 읽으셨어요?
“제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무척 좋아합니다. 카잔차키스 집에 책이 많았대요. 1만 권쯤 있었나, 그걸 다 읽었냐고 누가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답니다. ‘이 많은 책을 어떻게 다 읽나, 그 앞을 왔다갔다 하다 보면 대충 내용은 알게 된다.’ 저도 그런 식이에요. 시간 정해 놓지 않고 아무 때나 틈틈이 책을 구경합니다. 지나가다가 쓱 빼서 보기도 하고, 자기 전에 보기도 하고.”
책을 읽은 후에 특별히 정리를 따로 하는지 묻자, 그는 다이어리를 펼쳐 보였다. 붉은색 표지의 몰스킨 다이어리는 연초임에도 ‘진도’가 많이 나가 있었다.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면 다이어리에 옮겨 적습니다. 그리고 다음해가 되면 그 전해에 옮겨 적은 것들을 훑어보며 마음에 와닿는 것들을 골라 새 다이어리에 옮겨 적지요. 다음해가 되면 또 반복하고요. 그러니까 여기에 적혀 있는 말들은 그동안 읽은 글에서 남겨지고 또 남겨진 구절들이에요.”
작은 글씨로 한문과 한글, 영어가 빼곡이 적혀 있다. 제일 첫 줄엔 한문 구절이 적혀 있었다. ‘讀書破萬卷 下筆有如神(독서파만권 하필유여신)’. ‘만권의 책을 읽으면 신들린 듯이 글을 쓸 수 있다’는 뜻, 두보가 한 말이다.
마음에 담아 둔 구절을 그대로 실천하는 걸까. 독서량도 상당하지만, 배 작가는 집필량도 상당하다. 지금까지 16권의 책을 냈단다. 올해 또 4권의 책이 나온다.
“제가 젊었을 때 결심한 게 있어요. ‘한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쓴 사진작가가 되겠다. 한국에서 제일 사진 많이 찍은 사진작가가 되겠다’. 저는 양이 질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20대에는 야영까지 하며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었고, 30대에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전시는 다 찾아다니면서 봤어요. 소나무 사진 한 장에 그 세월이 다 담겨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동기창이 이런 말을 했지요.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 책을 만권 읽고 여행을 만 리하면 좋은 예술가가 된다고요. 결국 여행과 독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든, 예를 들면 정치인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진책 번역해 준 아버지
그의 사진은 반짝하는 아이디어로 찍은 것이 아니고 철저히 ‘노동집약적’인 것이다. 그 과정은 장인의 작업에 가깝다. 거의 항상 한 개의 렌즈만 사용하며, 트리밍(trimming)도 하지 않는단다. 사진을 찍을 때 이미 어디에 빛이 얼마큼 노출될지 계산하고 찍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빛을 아주 잘 다룰 줄 알아야 한다. 트리밍은 사진을 찍은 후 인화 과정에서 구도상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는 식으로 사진을 손보는 것을 말한다.
심지어 뷰파인더를 들여다보지 않고 셔터를 눌러도 대개 원하는 대로 사진이 나온다고 한다. 렌즈가 곧 그의 눈이 된 셈이다.
—창덕궁이나 종묘 같은 건축 사진도 많이 찍으셨고, 여행도 많이 다니셨는데, 어떤 건축물이 가장 눈에 들어오던가요.
“가장 좋아하는 집은… 언덕 위에 있는 집이에요. 바다가 보이는. 알람브라 궁전도 언덕 위의 집이에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을 생각하면 돼요. 그런 집을 좋아해요. 예전에 알람브라 궁전을 찍는 작업을 할 때는 아예 택시기사를 고용해서 안달루시아 지방을 여행한 적도 있어요.”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배병우의 사진은, 독서를 통해 쌓인 인문학 교양이 여행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조형성 혹은 미감(美感)이 되어 한 폭의 사진으로 탄생한다는 걸.
그의 책 《빛으로 그린 그림》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소나무 작가로 알려졌지만 난 본능적으로 바다가 좋다. 나에게 바다는 고향이고, 나의 영감의 원천이며,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다. / 내 기억 속에 자리한 가장 오래된 그림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교실 뒷벽에 붙어 있던 것이다. 큰 나무 밑에 기와집이 납작 엎드려 있고 멀리 바다가 보이는 크레파스 그림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마음 한쪽에 자리한 탓인지, 사진 작업들은 모두 그 그림을 닮아 있다.〉
“언덕 위의 집이라는 게 결국 어릴 때 본 그 그림에 나오는 집이 아닌가”고 물었다.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그렇지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의 마음속 풍경이 형성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바다라면, 풍경 속을 걷도록 이끌어 준 이는 배 작가의 부친이 아닐까. 사실, 배 작가의 서가를 방문하기 전, ‘이건 꼭 보고 와야겠다’ 결심한 책이 있었다. 그의 서가 외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책, 바로 그의 부친이 아들을 위해 직접 사진 이론서들을 번역해 정리해 놓은 노트였다.
이제는 그 유효기간이 다 됐을 것 같은 노트를, 아들은 역시 작업실 서가 한쪽에 잘 보관해 두고 있었다. 표지를 넘겨 보았다. 깨끗하게 정서된 글씨는 정갈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모르는 세계의 얘기를 아들을 위해 번역하며,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글자 글자마다 아들의 ‘무운’을 비는 기도를 수도 없이 새겨 넣지 않았을까.
“1970년대에는 한국에 번역되어 있는 사진 이론서라고는 다 해서 200권도 안됐어요. 생선장사를 하셨던 아버지는 일본어를 잘하셨어요. 일본에서 출판된 사진 관련 책들을 구해서 저를 위해 번역을 하신 거예요. 삼십 권 정도 될 거예요. 그 당시 아마 우리나라에서 우리 아버지가 가장 사진 이론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몰라요. 전에 언젠가 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이 노트를 보더니 ‘손볼 것 없이 그대로 책으로 내도 좋겠다’면서 감탄하기도 했어요.”
전문 도서관 만들고 싶어
그는 ‘잡지 마니아’이기도 하다. 책꽂이 곳곳에는 잡지 과월호가 꽂혀 있었다. 수십 년간 구독한 《월간조선》은 물론,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기타 여성지, 인테리어 잡지까지 30여 종을 구독한단다.
—잡지나 신문 등의 인쇄매체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여러 얘기가 많은데요. 필름 카메라의 경우는 어떨까요. 필름으로만 작업을 하시는데, 미래에도 필름으로 사진작업을 할 수 있을까요.
“5년 내로 없어질 겁니다. 시장이 없으니까요. 시장이 남아 있다고 해도 공장이 없어지는데 별 수가 있습니까. 결국 자본의 문제이지요. 언제 없어질지 모르니 필름을 2년 쓸 만치 미리 사다 놓아요.”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거의 매일 사진을 찍지요. 찍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기도 하고요. ‘사진의 대중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진은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 도구에 익숙해지는 건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예술이라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책장을 둘러보던 배 작가는 “도서관을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다.
“이 공간을 회화, 판화, 사진 전문 도서관으로 꾸미고 싶어요. 여기저기 책장을 잘 배치하면 10만권 정도는 소장할 수 있을 거예요. 괜찮지 않겠어요? 그러려면 책을 지속적으로 구입해야 하니까, 고민 중입니다. 이 건물도 나중엔 기부할 생각이에요.”
—지금까지 소나무, 바다, 제주도 오름, 고건축물 등에 천착해 오셨는데,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계획이 있습니까.
“포트레이트, 인물 사진을 찍고 싶어요. 그냥 인물 사진이 아닌 한국의 전통적인 시선을 반영해 찍는 인물 사진입니다.”
“소나무는 나쁜 나무”
—소나무를 좋아하시나요.
“소나무를 30년 넘게 찍어 왔지만, 솔직히 좋아하는 나무는 아닙니다. 시각적으로만 좋아한다고 봐야겠지요. 소나무는 나쁜 나무예요. 근처에 다른 나무는 못 살게 하거든요. 참나무나 밤나무가 좋은 나무지요. 특히 참나무는 숲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소나무는 뿌리에서 갈로타닌(gallotannin)을 분비하는 등 뿌리뿐 아니라 잎, 줄기에서 다른 종에 해로운 생화학물질을 분비한다. 바로 타감작용(他感作用)이다. 지표의 면적을 더 많이 차지해 햇빛을 더 많이 쬐기 위한 소나무의 전략이다. 심지어는 동종의 어린 개체도 타감물질 때문에 자리 잡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강원도 삼척의 ‘솔섬’을 찍은 사진을 두고 대한항공과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 사이에 법적 공방이 벌어졌다. 케나가 찍은 사진을 모방해서 찍은 사진을 이용해 대한항공이 광고를 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법원은 ‘자연물 촬영은 구도 설정에 창작성이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했다. 법은 그렇지만 현실도 그럴까.
요즘도 수많은 사진가들이 소나무를 찍으려 경주 남산을 간다지만, 그 누가 아무리 그럴싸하게 찍더라도 적어도 향후 100년간은 배병우의 아류에서 벗어나지 못할 터다. 알람브라 궁전이나 샹보르 성 사진도 마찬가지다. 동양적인 시선으로 서양 고성을 바라본 아시아인 사진가로는, 금세기 중엔 배병우가 유일할 수도 있다. 사진작가로서의 그의 존재가 소나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 이유다.
만약 배병우가 걸어다니는 소나무라면, 그를 키워 낸 땅은 여수 바다, 생선장수 아버지, 오랜 시간 그를 믿어 줬던 부인, 그리고 지인들이다. 지금의 그를, 앞으로의 그를 성장하게 하는 건 이국의 바람과 그를 스쳐간 만 권의 책이다.
〈나무는 커갈수록 더 혼자가 되어 간다. 나중에 엄청난 크기로 자라면 엄청난 적막을 이겨 내야 한다.〉 《다시, 나무를 보다》의 한 구절이다.
배병우가 마주하고 있는 적막은 아주 많이는 적막하지 않을 듯하다. 수많은 고금의 저자들이 헤이리 그의 서가에서, 늘 끼고 다니는 다이어리 속에서 시공간을 넘어 공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신준환 전 국립수목원장이 쓴 책 《다시, 나무를 보다》의 한 대목이다. 문장을 곱씹어 본다. 문득 사진작가 배병우가 떠오른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소나무〉 연작이 생각난다. ‘시간과 공간이 짠 비단결’. 배병우가 흑백의 빛으로 그린 소나무 군락을 보며, 얼핏 소나무 뒤편 어딘가에, 숲이 존재해 온 수백 년의 세월이 내는 웅성거림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는 걸 본 것만 같은 적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벨기에 국왕·엘튼 존이 고객
 |
| 작업실로 쓰는 3층 건물의 1층을 탁구대가 차지하고 있다. |
궁금해졌다. 하나의 종을 30년 넘게 마주한 사람의 정신세계란 어떤 모습일까. 책 많이 읽기로 유명한 그의 서가엔 어떤 책이 꽂혀 있을까.
인터뷰 날짜를 잡는 배 작가의 전화 목소리는 활기찼다. 프랑스에서 전날 막 돌아온 참이라고 했다. 장거리 비행의 여독은 물론, 예순이 넘은 나이도 느낄 수 없었다. 배 작가는 지난해 여름부터 프랑스 샹보르 성(Chateau de Chambord)에서 사진작업을 하고 있다. 샹보르 성은 루아르 지역에 있는 고성이다. 내년이 한불 수교 130주년이 되는 해인데, 이를 기념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프랑스 측의 초청을 받아 진행 중이다.
알려준 주소를 들고 경기도 파주 헤이리마을을 찾았다. 스마트폰의 지도 앱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유영호 조각가의 대형 조각상 ‘그리팅맨(Greeting Man)’이 보인다. 그 뒤로 3층짜리 건물이 나타났다. 그의 작업실이다.
서재는 3층에 있었다. 탁구대가 있는 1층을 지나 각종 작업실이 있는 2층을 지나쳤다. 계단을 따라 옆에는 책이 쌓여 있다. 그 옆 구석에 손바닥만 한 미니어처 그리팅맨 조각상들이 늘어서 있다.
“왜 그리팅맨 조각이 작업실 안팎에 있나. 특별히 좋아하는 작품인가”고 묻자, “유영호 작가가 작품 제작비가 모자랄 때 돕고 싶어서 사준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사투리는 어렴풋이 흔적만 남아 있는데, 머리를 긁적대며 대답하는 모습에서 어째 ‘촌놈’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것이 어쩌면 배 작가의 성공 비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촌놈’이라는 단어는 종종, 빠른 속도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속도로 사는 사람을 반쯤 질투하며 쓰는 표현이기도 하니 말이다.
갤러리로 사용하려 했다는 공간에 왜 탁구대가 주인공인지 물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매일 1시간씩 탁구를 친다”는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학창 시절 유도로 다져진 체격을 유지하는 비결인 듯했다.
지금까지 책 1만여 권 구입
 |
| 3000여 권의 책 중 일부는 계단 옆에 쌓여 있다. |
“공사를 하느라 며칠 전에 책을 다 뺐다가 급하게 다시 꽂아 놓은 참이에요. 무슨 책이 어디에 있는지 다 알고 있었는데, 덕분에 지금은 헛갈리네요.”
—작업실에 총 몇 권의 책이 있는지 알고 계세요?
“대략 3000권 정도 있을 거예요. 집이랑 여기저기 다른 곳에 2000권가량 흩어져 있고요. 생각해 보니까 살면서 일생 동안 책을 1만권 정도 산 것 같아요. 좋다고 생각하는 책은 여러 권 사서 주변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많이 했고요. 아마 한 사람당 50권에서 100권 정도는 준 것 같아요.”
그의 말대로 여러 권 있는 책들이 눈에 띄었다.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 두 질이 보였다.
“외국에 나갈 때 읽으려고 여러 권을 사기도 해요. 무거우니까 호텔에서 읽고 책을 그냥 놓고 오는 경우도 많거든요.”
—제자들이 책을 빌려간 다음 안 가져오는 경우도 곧잘 있었다는데, 없어진 게 아쉬운 책은 없나요.
“그런 책은 대부분 다시 구입해 놓았어요. 절판돼서 못 구하는 책도 있긴 하지만, 그건 또 그냥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책의 소유 자체를 즐기는 ‘책 물신주의자’는 아닌 듯했다. ‘어떤 책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지’ 물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진가라고 한 에드워드 이스턴이나 모호이너지의 사진집을 들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듣고 보니 우문에 현답이었다.
“역사 분야의 책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어떤 분야든 그 역사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거든요. 뷰몬트 뉴홀(Beaumont Newhall)이 쓴 〈사진의 역사(The History of Photography)〉는 엉터리 영어를 다 동원해서 원서로 읽기도 했어요.”
그러고 보니 책장엔 《스페인전쟁》, 《향료전쟁》 등 역사에 관한 책이 많았다.
—책은 주로 어떤 기준으로 고르나요.
“신문에 나오는 책 소개 기사를 꼼꼼히 읽습니다. 기사를 스크랩해 놓고 소개된 책을 구입해요. 기본적으로는 그야말로 잡식성이에요. 분야를 가리지 않고 읽는 편입니다.”
‘讀萬卷書 行萬里路’
 |
| 배 작가는 주로 새벽 시간에 홀로 하나의 렌즈를 들고 숲에 가 사진을 찍는다. |
그러고 보니 그의 서가는 약간 독특했다. 냉장고는 있고, 텔레비전은 없었다. 컴퓨터도 다른 방에 있지, 책과 함께 있진 않았다. 밥을 먹고, 그런 후에는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공간구성이라고 할까.
—여기에 있는 책을 다 읽으셨어요?
“제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무척 좋아합니다. 카잔차키스 집에 책이 많았대요. 1만 권쯤 있었나, 그걸 다 읽었냐고 누가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답니다. ‘이 많은 책을 어떻게 다 읽나, 그 앞을 왔다갔다 하다 보면 대충 내용은 알게 된다.’ 저도 그런 식이에요. 시간 정해 놓지 않고 아무 때나 틈틈이 책을 구경합니다. 지나가다가 쓱 빼서 보기도 하고, 자기 전에 보기도 하고.”
책을 읽은 후에 특별히 정리를 따로 하는지 묻자, 그는 다이어리를 펼쳐 보였다. 붉은색 표지의 몰스킨 다이어리는 연초임에도 ‘진도’가 많이 나가 있었다.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만나면 다이어리에 옮겨 적습니다. 그리고 다음해가 되면 그 전해에 옮겨 적은 것들을 훑어보며 마음에 와닿는 것들을 골라 새 다이어리에 옮겨 적지요. 다음해가 되면 또 반복하고요. 그러니까 여기에 적혀 있는 말들은 그동안 읽은 글에서 남겨지고 또 남겨진 구절들이에요.”
작은 글씨로 한문과 한글, 영어가 빼곡이 적혀 있다. 제일 첫 줄엔 한문 구절이 적혀 있었다. ‘讀書破萬卷 下筆有如神(독서파만권 하필유여신)’. ‘만권의 책을 읽으면 신들린 듯이 글을 쓸 수 있다’는 뜻, 두보가 한 말이다.
마음에 담아 둔 구절을 그대로 실천하는 걸까. 독서량도 상당하지만, 배 작가는 집필량도 상당하다. 지금까지 16권의 책을 냈단다. 올해 또 4권의 책이 나온다.
“제가 젊었을 때 결심한 게 있어요. ‘한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쓴 사진작가가 되겠다. 한국에서 제일 사진 많이 찍은 사진작가가 되겠다’. 저는 양이 질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20대에는 야영까지 하며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었고, 30대에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전시는 다 찾아다니면서 봤어요. 소나무 사진 한 장에 그 세월이 다 담겨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동기창이 이런 말을 했지요. ‘독만권서 행만리로(讀萬卷書 行萬里路)’, 책을 만권 읽고 여행을 만 리하면 좋은 예술가가 된다고요. 결국 여행과 독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든, 예를 들면 정치인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진책 번역해 준 아버지
 |
| 배병우 작가의 부친은 아들의 공부를 위해 일본어로 된 사진 이론서를 구해 직접 번역했다. |
심지어 뷰파인더를 들여다보지 않고 셔터를 눌러도 대개 원하는 대로 사진이 나온다고 한다. 렌즈가 곧 그의 눈이 된 셈이다.
—창덕궁이나 종묘 같은 건축 사진도 많이 찍으셨고, 여행도 많이 다니셨는데, 어떤 건축물이 가장 눈에 들어오던가요.
“가장 좋아하는 집은… 언덕 위에 있는 집이에요. 바다가 보이는. 알람브라 궁전도 언덕 위의 집이에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을 생각하면 돼요. 그런 집을 좋아해요. 예전에 알람브라 궁전을 찍는 작업을 할 때는 아예 택시기사를 고용해서 안달루시아 지방을 여행한 적도 있어요.”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배병우의 사진은, 독서를 통해 쌓인 인문학 교양이 여행이라는 필터를 거치면서 조형성 혹은 미감(美感)이 되어 한 폭의 사진으로 탄생한다는 걸.
그의 책 《빛으로 그린 그림》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소나무 작가로 알려졌지만 난 본능적으로 바다가 좋다. 나에게 바다는 고향이고, 나의 영감의 원천이며,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이다. / 내 기억 속에 자리한 가장 오래된 그림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교실 뒷벽에 붙어 있던 것이다. 큰 나무 밑에 기와집이 납작 엎드려 있고 멀리 바다가 보이는 크레파스 그림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마음 한쪽에 자리한 탓인지, 사진 작업들은 모두 그 그림을 닮아 있다.〉
“언덕 위의 집이라는 게 결국 어릴 때 본 그 그림에 나오는 집이 아닌가”고 물었다.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그렇지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의 마음속 풍경이 형성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바다라면, 풍경 속을 걷도록 이끌어 준 이는 배 작가의 부친이 아닐까. 사실, 배 작가의 서가를 방문하기 전, ‘이건 꼭 보고 와야겠다’ 결심한 책이 있었다. 그의 서가 외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책, 바로 그의 부친이 아들을 위해 직접 사진 이론서들을 번역해 정리해 놓은 노트였다.
이제는 그 유효기간이 다 됐을 것 같은 노트를, 아들은 역시 작업실 서가 한쪽에 잘 보관해 두고 있었다. 표지를 넘겨 보았다. 깨끗하게 정서된 글씨는 정갈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모르는 세계의 얘기를 아들을 위해 번역하며, 아버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글자 글자마다 아들의 ‘무운’을 비는 기도를 수도 없이 새겨 넣지 않았을까.
“1970년대에는 한국에 번역되어 있는 사진 이론서라고는 다 해서 200권도 안됐어요. 생선장사를 하셨던 아버지는 일본어를 잘하셨어요. 일본에서 출판된 사진 관련 책들을 구해서 저를 위해 번역을 하신 거예요. 삼십 권 정도 될 거예요. 그 당시 아마 우리나라에서 우리 아버지가 가장 사진 이론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을지도 몰라요. 전에 언젠가 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이 노트를 보더니 ‘손볼 것 없이 그대로 책으로 내도 좋겠다’면서 감탄하기도 했어요.”
전문 도서관 만들고 싶어
 |
| 시각예술 전문 도서관으로 꾸며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진집과 예술 관련 이론서를 갖춘 배 작가의 서가. |
—잡지나 신문 등의 인쇄매체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여러 얘기가 많은데요. 필름 카메라의 경우는 어떨까요. 필름으로만 작업을 하시는데, 미래에도 필름으로 사진작업을 할 수 있을까요.
“5년 내로 없어질 겁니다. 시장이 없으니까요. 시장이 남아 있다고 해도 공장이 없어지는데 별 수가 있습니까. 결국 자본의 문제이지요. 언제 없어질지 모르니 필름을 2년 쓸 만치 미리 사다 놓아요.”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거의 매일 사진을 찍지요. 찍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리기도 하고요. ‘사진의 대중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진은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 도구에 익숙해지는 건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예술이라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책장을 둘러보던 배 작가는 “도서관을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다.
“이 공간을 회화, 판화, 사진 전문 도서관으로 꾸미고 싶어요. 여기저기 책장을 잘 배치하면 10만권 정도는 소장할 수 있을 거예요. 괜찮지 않겠어요? 그러려면 책을 지속적으로 구입해야 하니까, 고민 중입니다. 이 건물도 나중엔 기부할 생각이에요.”
—지금까지 소나무, 바다, 제주도 오름, 고건축물 등에 천착해 오셨는데,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계획이 있습니까.
“포트레이트, 인물 사진을 찍고 싶어요. 그냥 인물 사진이 아닌 한국의 전통적인 시선을 반영해 찍는 인물 사진입니다.”
“소나무는 나쁜 나무”
 |
| 배 작가의 소나무 연작 중 하나. |
“소나무를 30년 넘게 찍어 왔지만, 솔직히 좋아하는 나무는 아닙니다. 시각적으로만 좋아한다고 봐야겠지요. 소나무는 나쁜 나무예요. 근처에 다른 나무는 못 살게 하거든요. 참나무나 밤나무가 좋은 나무지요. 특히 참나무는 숲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소나무는 뿌리에서 갈로타닌(gallotannin)을 분비하는 등 뿌리뿐 아니라 잎, 줄기에서 다른 종에 해로운 생화학물질을 분비한다. 바로 타감작용(他感作用)이다. 지표의 면적을 더 많이 차지해 햇빛을 더 많이 쬐기 위한 소나무의 전략이다. 심지어는 동종의 어린 개체도 타감물질 때문에 자리 잡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강원도 삼척의 ‘솔섬’을 찍은 사진을 두고 대한항공과 사진작가 마이클 케나 사이에 법적 공방이 벌어졌다. 케나가 찍은 사진을 모방해서 찍은 사진을 이용해 대한항공이 광고를 했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법원은 ‘자연물 촬영은 구도 설정에 창작성이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했다. 법은 그렇지만 현실도 그럴까.
요즘도 수많은 사진가들이 소나무를 찍으려 경주 남산을 간다지만, 그 누가 아무리 그럴싸하게 찍더라도 적어도 향후 100년간은 배병우의 아류에서 벗어나지 못할 터다. 알람브라 궁전이나 샹보르 성 사진도 마찬가지다. 동양적인 시선으로 서양 고성을 바라본 아시아인 사진가로는, 금세기 중엔 배병우가 유일할 수도 있다. 사진작가로서의 그의 존재가 소나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 이유다.
만약 배병우가 걸어다니는 소나무라면, 그를 키워 낸 땅은 여수 바다, 생선장수 아버지, 오랜 시간 그를 믿어 줬던 부인, 그리고 지인들이다. 지금의 그를, 앞으로의 그를 성장하게 하는 건 이국의 바람과 그를 스쳐간 만 권의 책이다.
〈나무는 커갈수록 더 혼자가 되어 간다. 나중에 엄청난 크기로 자라면 엄청난 적막을 이겨 내야 한다.〉 《다시, 나무를 보다》의 한 구절이다.
배병우가 마주하고 있는 적막은 아주 많이는 적막하지 않을 듯하다. 수많은 고금의 저자들이 헤이리 그의 서가에서, 늘 끼고 다니는 다이어리 속에서 시공간을 넘어 공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의 나무 김진석 김태영 한반도에 분포하는 나무 650여 종의 생태와 특징을 사진과 함께 정리한 나무도감. ‘이건 많이 팔려야 하는 책’이라는 게 배 작가의 평가다. 한글의 탄생 노마 히데키 배 작가가 “내 친구가 쓴 아주 좋은 책”이라며 꺼내 보인 책이다. 화가 출신으로 한국어의 매력에 심취해 다시 대학에 들어가 한국어를 연구한 노마 히데키 전 도쿄외대 교수가 쓴 책이다. 출간 후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정원 일의 즐거움 헤르만 헤세 헤세가 정원에서 느낀 자연과 인생에 관한 생각을 직접 그린 그림, 자필 원고, 사진 등과 함께 실은 책이다. 배 작가는 “헤세의 정원 같은 정원을 꾸미는 게 꿈인데 잘 안된다”고 했다. 영혼의 자서전 1,2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사망하기 직전에 쓴 자서전. 이탈리아, 파리, 베를린, 러시아를 거쳐 크레타로 돌아오는 그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조르바’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된다. 일본 중국 기행 니코스 카잔차키스 1935년 일본과 중국을 방문한 작가가 두 나라의 예술과 당대 각 나라를 지배했던 정신적인 분위기를 잘 옮겨놓은 책이다. 일본을 둘러보며 전쟁의 발발을 예감한 작가의 통찰이 엿보인다. 인페르노1,2 댄 브라운 단테의 《신곡》을 테마로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천재 과학자 로버트 랭던의 활약을 담았다. ‘인페르노’는 단테의 《신곡》에 묘사된 지하세계로, 육신 없는 영혼들이 삶과 죽음 사이에 갇혀 있는 곳을 의미한다. 배 작가는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 단테의 《신곡》을 다시 읽었다”고 했다.  향료전쟁 가일스 밀턴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향료, 구체적으로는 ‘육두구’ 무역을 둘러싼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벌어진 세계전쟁을 흥미롭게 기술했다. 많은 자료에서 뽑아낸 당대 군상들의 모험과 갈등이 박진감 넘치게 펼쳐져 있다. 미의 역사/ 추의 역사 움베르트 에코 아름다움과 아름답지 않음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방대한 자료와 함께 기술한 에코 식 미학 사전이다. 배 작가는 이 책들의 원서까지 구비해 읽었단다. 우현 고유섭 전집 열화당 편집부 우현 고유섭 선생은 한국인(혹은 조선인) 최초로 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를 전공하고, 우리 미술사와 미학을 학문화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기록을 10권의 책으로 묶었다. 언젠가 한국 예술사가 당당히 솟아오른다면, 그 기단이 될 귀중한 기록이다. 배 작가는 이 전집을 10질가량 구입해 주변인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서양철학사 상·하 버틀란드 러셀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중세와 현대까지 서양철학사를 개관한 철학사의 바이블이다. 색채론 괴테 괴테가 쓴 문제적 저작이다. 책이 처음 출간될 당시에는 뉴턴의 광학이 지배적인 색채이론이었다. 괴테는 여기에 반발해 색채를 생리색, 물리색, 화학색으로 구분해 색의 속성을 분석했다. 문호로만 유명한 괴테가 자연과학에도 관심과 조예가 깊었음을 알려주는 책이다. 점 선 면 바실리 칸딘스키 칸딘스키가 바우하우스에서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점과 선, 면이 은유하고 보여주는 의미를 그의 언어로 풍요롭게 해석했다. 몸 윌리엄 유잉 미국 출신의 사진가이자 평론가이기도 했던 저자가 육체성, 정치성, 에로스 등 12가지 관점에서 인간의 몸을 고찰한 책이다. 예술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도판들을 함께 실었다. 배 작가가 소장한 《몸》에는 곳곳에 줄이 그어져 있는 등 꽤 열심히 탐독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