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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욱의 演藝, 人 ① 한국의 ‘현대’ 영화를 발굴한 강제규 감독

글 : 남정욱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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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기획할 때 소름이 돋거나 뭔가가 가슴을 쿵! 하고 치는 느낌이 와야”
⊙ “내가 시도했던 모든 것이 기준이 되었다. 나는 힘들었지만 후배들은 그만큼 편했다고 말하면
    과다한 자기 존중일까?”
⊙ “영화의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나라 영화는 끝”
⊙ “이제 즐겁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

강제규
⊙ 53세.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졸업. 제3회 베이징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제8회 부산디지털콘텐츠유니버시아드 심사위원장. 중국 베이징영화학교 명예객원교수.
⊙ 〈은행나무 침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마이 웨이〉 연출.
⊙ 〈안녕 형아〉 〈몽정기2〉 등 제작 투자.

남정욱
⊙ 49세. 강남대 부동산학과 졸업.
⊙ 現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 저서: 《빠이 386》 《편견에 도전하는 한국 현대사》 《불평사회작별기》 《차라리 죽지 그래》 등.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이 관객 1000만명을 돌파했다. 우리나라 영화로는 12번째이다. 이제는 ‘1000만 관객’이라는 말이 그리 생소하지 않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1000만 관객’이란, ‘꿈의 숫자’였다. 그 ‘꿈의 숫자’를 처음 깬 사람이 바로 강제규 감독이다.
 
  1998년 초 영화 〈타이타닉〉이 개봉했을 때다. IMF 사태로 찬바람이 쌩쌩 불던 시기였고 가뜩이나 외환(外換) 보유고도 바닥이라는데 밖으로 달러 내보내는 그 영화를 굳이 봐야겠냐며 직원들을 나무란 뒤 혼자 몰래 극장에 앉아 있었다. 잘 만들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그래 봐야 영화가 거기서 거기지’ 하면서. 아니었다. 신파조의 이야기, 그러나 그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나는 초반부터 기가 팍 죽고 말았다. 제작비 2억 달러라는 게 이런 의미구나. 돈을 쏟아 부으면 이런 그림이 나오는구나.
 
  드라마도 만만치 않았다. 신파라고 얕볼 게 아니었다. 주인공들은 물론이고 조연들까지 줄을 지어 가며 나를 울렸다. 허물어져 가는 갑판에서 악단이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을 연주할 때 나는 미려한 선율과 아비규환의 상황이 충돌하는 언밸런스한 영상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울었다. 남자 주인공인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이 로즈(케이트 윈즐릿)의 손을 놓고 어두운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나는 앞으로는 사랑을 믿을래요’ 다짐하며 펑펑 울었다. 옆에 앉은 아줌마도 우는 타이밍이 비슷했다.
 
  어떤 장면에서인가 나는 울고 아줌마는 울지 않았다. 코를 훌쩍이는 나를 보며 아줌마는 ‘이 자식은 대체 이 대목에서 왜 우는 거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이유가 있었다. 겨우 몇 초에 불과한, 별로 중요하지도 않아 보이는 장면에서 한국 영화 서너 편의 제작비가 훌쩍 날아가고 있었다. 당시 영화 마케팅에 종사하고 있을 때였다. ‘누구는 저런 영화를 만드는데 나는 변방에서 모텔 방과 사무실만 등장하는 시시한 영화의 홍보나 하다 끝나겠구나’ 하는 절망감이 밀려왔다. 그 시기심과 부러움에 눈물이 났던 것이지만 비애야 내 사정이고 그 아줌마에게 나는 참 이상한 놈이었을 것이다.
 
  영화만큼이나 관객 동원도 엄청났다. 서울 관객 200여만명에 전국 관객 ‘추산’ 450만명(당시에는 정확한 집계 시스템이 없을 때다). 그보다 8년 전 〈사랑과 영혼〉이 썼던 흥행기록을 순식간에 뛰어넘은, 말 그대로 꿈의 숫자였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 기록을 넘어선 게 바로 〈쉬리〉다. 그것도 〈타이타닉〉 개봉 후 불과 1년 만에. 이전까지 한국 영화 신기록은 〈서편제〉의 116만이었다. 그것도 봄부터 가을까지 초장기 상영한 끝에 억지로 얻은. 〈타이타닉〉을 침몰시킨 〈쉬리〉가 500만명의 고지를 향해 질주할 즈음엔 공중파의 9시 뉴스까지 그 감동의 순간을 생중계했다. 당시 〈쉬리〉는 하나의 사회 현상이자 거대한 국민적 이벤트였다. 서울 시민의 30%가 관람했으며 초등학생까지 이름을 알고 있었던 〈쉬리〉의 연출자는 강제규. 요새 말로 하면 영화 한 편으로 ‘국민 감독’의 지위에 오른 그는 당시 데뷔작 한 편을 성공적으로 마친 신인 감독이었다. 〈타이타닉〉을 3D 영화로 알고 있고(타이타닉은 2012년 3D로 재개봉했다) 〈쉬리〉는 송강호의 데뷔작 정도로 기억하는 요즘 관객들 앞에서 ‘웬 고색창연한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 영화 산업에서 〈쉬리〉는 결코 가볍게 처리하고 넘어갈 빛바랜 기록이 아니다. 얌전하게 말하면 〈쉬리〉 한 편으로 한국 영화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쉬리〉가 없었다면 한국 영화 산업의 현재는 지금의 이 자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내 말이 더 극단적이라고? 과연 그럴까.
 
  〈쉬리〉가 개봉한 지 15년이 지난 2014년 겨울, 논현동의 한 사무실에서 강제규 감독을 만났다. 일단 〈쉬리〉 때 얘기부터 들었다.
 
 
  한국 영화 같지 않았던 한국 영화 〈쉬리〉
 
1999년 2월 설연휴 기간 동안 영화 〈쉬리〉를 보기 위해 관객들이 극장 밖에서 장사진을 치고 있다.
  —시사회 보고 나온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이거였죠. “한국 영화 같지 않네”라는 것.
 
  “스케일도 스케일이지만 아마 총격전 장면을 보고 그랬을 겁니다. 당시 한국 영화에는 총격전에 가짜 총을 등장시켰어요. 관객이 바보인가요. 프라모델 총으로 서로 쏘고 죽는 장면을 보며 몰입할 수 있는 관객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리얼리티가 전혀 없었던 거지요. 내 관심사 중 하나는 얼마나 사실을 사실답게 재현하는가였습니다. 그게 당시 한국 영화의 약점이기도 했고요.”
 
  —사실답게 재현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나요.
 
  “처음으로 미국의 깁슨사(社)에서 대규모로 총기를 빌려왔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총기 대여 업체 중 하나인데 한국 영화 제작사에 대한 신뢰가 없던 시절이라 보험을 들라 하더라고요. 15만 달러였나? 착수금도 내라 했어요. 다 냈죠 뭐. 한두 정(?) 들어온 적은 있었겠지만 M16 10정 등 30정 가까이 들여온 건 처음일 겁니다. 촬영은 삼성전자 수원공장에서 했어요. 식당 주방이었는데 정말 컸습니다. 추석이라서 52시간이 비는데 그 시간 동안 촬영을 마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세관에 걸린 거죠. 유례 없던 무기 대량 반입이라 관련 부처인 국방부와 국정원에서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난감해했어요.
 
  미치는 줄 알았어요. 생난리를 쳐서 겨우 촬영장으로 총기를 공수할 수 있었습니다. 공포탄 넣고 처음 쏘는데 눈물이 났어요. 52시간 동안 한숨도 안 자고 촬영했어요.”
 
  —인체공학상 52시간 동안 깨어 있을 수 없는 게 인간 아닌가요.
 
  “됩니다. 아니, 나만 그랬습니다(웃음). 추석이라 촬영 중간에 송편을 깔아 놓고 스태프들 먹이려고 했는데 아무도 안 먹었어요. 그 잠깐이라도 자려고. 연기자, 스태프 할 것 없이 꾸벅꾸벅 졸다가 자기 부분 나오면 촬영했습니다. 일주일 이상 찍어야 하는 장면을 이틀에 몰아 찍었으니 당연한 일이기는 했어요.”
 
 
  삼성과 지방투자자 사이에서
 
  —당시 한국 영화 제작비가 5억에서 6억 사이였던 것 같은데요?
 
  “내 기억으로 좀 괜찮은 영화는 10억에서 12억 정도 했어요. 처음에 시나리오 쓰고 제작비를 뽑아 보니까 30억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까 〈쉬리〉는 세 배 정도였지요. 그런데 누가 그 거금을 대겠습니까. 줄이고 줄이니까 28억까지 낮출 수 있었습니다.
 
  삼성이나 대우 같은 제도권에서는 투자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 포기했어요. 개인투자자를 만나고 다녔어요. 부산의 한 금융사에서 28억을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구두로 투자 약속을 받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론 삼성이나 대우와 하고 싶었죠. 좀 안정적으로 가고 싶어서. 밑져야 본전인 셈으로 삼성에 시나리오를 줬어요.
 
  당시 노종윤 대리에게 건네줬는데 담당 이사가 전화를 했어요. 3분의 2까지 읽었는데 자기네랑 하자는 거예요. ‘다 읽지도 않고 무슨 말이냐’ 했더니 그 사이에 누가 투자하겠다고 나설까 봐 그러는 거라더군요. 뭐,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였겠지요. 그래도 기분은 좋았습니다.
 
  다음 날 만났더니 23억에 끊자고 하더라고요. 난감했습니다. 23억에 삼성이랑 할 거냐 28억에 지방 투자자랑 할 거냐, 사흘 동안 진짜 고민 많이 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안정적으로 28억 준다는데 거기랑 하라고 조언했어요. 난 삼성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삼성하고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투자하겠다던 금융사에 6개월 후 문제가 생겼습니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고 삼성이 투자를 결정하니까 이래저래 이익이 많았어요. 아까 식당도 그렇고 첩보본부 촬영 장소로 사용했던 데가 삼성SDS였는데 그거 세트로 지으려면 돈으로는 환산불가입니다. 결국 그런 걸로 5억을 줄인 셈입니다.
 
  정부 기관에서도 도움을 줬어요. 국립중앙도서관 등 당시로서는 촬영이 불가능한 곳을 허가해 줬어요. 그게 다 제작비 절감으로 이어진 거죠.”
 
  〈쉬리〉는 지금도 역대 박스오피스 41위에 올라 있다. 역대 박스오피스 100위 중 2000년 이전에 개봉한 영화는 〈쉬리〉가 유일하다.
 
 
  교수 그만두고 영화계 뛰어들어
 
젊은 영화인들의 창작집단인 ‘영화발전소’ 시절의 강제규 감독. 왼쪽부터 이성훈 감독, 박제현 감독, 강제규 감독, 변무림 PD, 김희철 감독.
  —단순계산으로 하면 세 배지만 그걸 그렇게 계산하면 곤란하지 않은가요. 가령 10억이 제작비라면 그 이후부터 초과되는 1억은 초반에 투자한 1억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부담입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다섯 배 이상이란 얘기지요. 대체 무슨 생각으로 30억짜리 영화를 기획했나요.
 
  “그 계산도 말이 되네요. 사이즈를 키워야 질적(質的)인 발전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파이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한국 영화를 보는 관객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 당시 정서였어요.
 
  나는 아니라고 봤습니다. 영화가 좋아지면 한국 영화를 외면하는 관객도 극장을 찾을 것이고 그러면 파이 자체가 커진다고 믿었습니다. 증명했죠. 영화의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나라 영화는 망합니다. 프랑스가 그랬고 일본이, 대만이 그랬습니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면 질적인 수준이 높아지고 다양한 영화가 가능해집니다. 머릿속에 있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제작비 때문에 접는다면 얼마나 억울해요.”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산업적인 측면에서 고민을 했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하긴 시장경제에서 상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바뀌는 것은 당연한 경로입니다. 그렇게 바뀌지 못하면 탈락하는 거고. 당시 충무로의 제작 방식이 부산, 대구, 경기 등 배급 5개 권역에서 얼마씩 모아 주면 그걸로 영화를 만들어 그들에게 배급권을 주는 일종의 유통자본 생산이었으니까요. 그런 측면에서 〈쉬리〉는 상업자본이 산업자본으로 바뀐 획기적인 사건입니다.
 
  “경제학은 몰라요.”
 
  —맨큐의 경제학에 그렇게 씌어 있어요. 당신의 출발은 어땠나요.
 
  “순탄하게, 그리고 한동안 지리멸렬하게(웃음). 81학번인데 1984년 가을부터 영화를 시작했으니 출발은 빠른 셈입니다. 학교에서는 말렸어요. 교수가 영화판 가면 굶는다고 방송국 가라 하더라고요. 드라마도 찍고 방송도 하고. ‘저, 영화 할 겁니다’ 하고 나왔습니다.
 
  서울극장(합동영화사) 공채(公採) 1기로 영화를 시작했어요. 당시 이황림 감독이 우리나라에도 스필버그가 나오려면 일찍부터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해서 실시한 공채입니다. 경쟁률이 110 대 1이었어요. 연출 파트에서는 넷이 뽑혔죠. 초봉이 25만원이었는데 대기업 초봉이 28만원 정도 했으니 좋게 받은 셈입니다.
 
  연출부로 참여한 첫 작품이 〈미녀공동묘지〉였는데 질색하는 뱀을 손가락에 끼고 던지고 참 열심히 했어요. 이때부터 지리멸렬입니다. 가 보니까 제작사들이 한국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외화 수입 쿼터를 따기 위한 것이더라고요. 졸속 제작은 당연한 것이었고요. 영화를 계속해야 하나, 회의(懷疑)가 들었습니다. 회의는 회의고 먹고살려니 별거 다 했습니다. 홍보영화 촬영, CF, 베스트극장 대본 등 닥치는 대로. 생활은 생활이고 영화적 고민 끝에 얻은 결론은 한국 영화의 가장 큰 약점은 시나리오라는 거였습니다.”
 
 
 
‘게임의 법칙’

 
  —백상예술대상 각본상까지 받았으니 작가로서는 성공을 거둔 셈입니다.
 
  “내가 쓴 시나리오가 처음 영화로 만들어진 건 김성홍 감독의 하이틴 영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였어요. 이어서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장미의 나날〉 〈게임의 법칙〉을 줄줄이 썼어요. 상은 〈용의 발톱〉으로 받은 거고.”
 
  —〈게임의 법칙〉은 한국 갱스터 무비의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그 영화가 최초의 컬트였던 사실을 압니까. 지방에 가면 재개봉관에서 동네 양아치들이 〈게임의 법칙〉을 보며 “아무도 나 타치(touch) 못해! 한 방에 뜨는 거야!” 같은 대사를 따라하곤 했습니다. 서울로 진출 못한 자신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거지요.
 
  “하하하. (잠시) 이전까지 깡패 영화의 약점도 리얼리티 부재였어요. 액션도, 폭력도, 사회적인 문제도 외면했죠. 그러니 관객이 들겠습니까. 업계 종사자들을 만나 취재를 많이 했어요. 사람이 사람에게 폭력을 구사하는 방법이 그렇게 다양한지 처음 알았어요. 물론 영화에 다 반영하지는 못했지만요.”
 
  —88만원 세대의 ‘게임의 법칙’인 유하 감독의 〈비열한 거리〉를 봤습니까. 당신에 대한, ‘게임의 법칙’에 대한 열렬한 오마주로 보입니다.
 
  “보았으나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어디가 닮았다는 건가요.”
 
  —검사 살해, 승전보를 울리며 룸살롱에서 축하연 할 때 노래 부르는 장면, 스폰서로부터 배신당한 주인공이 아랫것에게 죽는 것 등등. 주인공이 부른 노래가 ‘남행열차’에서 ‘땡벌’로 바뀐 것 정도가 다르던데요.
 
  “느끼지 못했습니다. 영화를 너그럽게 보는 편입니다. 한 번 볼 때 집중해서 보는 편이고 세 번 이상 본 영화가 없습니다. 영향을 받은 감독도 별로 없고.”
 
  —자칫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네요.
 
  “나, 겸손한 사람입니다. 예술로서의 영화를 바라보는 내 시각이 그렇다는 얘기죠. 한 영화를 반복해서 보지 않은 이유는 내가 가지고 있는 영화에 대한 관념이 흐트러질까 봐 우려해서 그런 것입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창작은 반복 재생산될 수 없다는 것이 신조입니다.”
 
 
  ‘충무로 期待株’에서 ‘충무로의 神話’로
 
강제규 감독의 데뷔작인 영화 〈은행나무침대〉.
  —시나리오로 쌓은 내공이 만개(滿開)한 게 〈은행나무 침대〉죠. 데뷔작부터 큰 걸 했네요.
 
  “판타지와 러브스토리를 엮어서 썼습니다. 신씨네 오정완 이사에게 줬는데 밤 12시30분에 신철 대표에게서 자기가 하겠다고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한 시간까지 기억합니까.
 
  “첫 작품이었고 제법 제작비가 들어가는 영화인데 신씨네에서 하겠다니 그렇죠. 캐스팅이 난관이었어요. 안성기, 문성근 등을 두고 쓴 시나리오였는데 다들 고사했습니다. ‘내용은 좋은데 이걸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만들 수 있겠어?’ 하는 표정들이었어요. 연령대가 내려왔고 신현준을 캐스팅했습니다. 심혜진은 미단공주를 염두에 두고 끝까지 버티다 합류한 경우입니다.
 
  CG는 많이 아쉬웠어요. CG라기보다는 컴퓨터의 화면 개입? 그래도 그래픽 초창기이다 보니 관객들의 관용 폭이 있었습니다. 영화 다 만들고 신 대표가 묻더라고요. 관객 얼마나 보느냐고. 50만! 했더니 자기는 25만 본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겼죠. 60만쯤 들었고, 그해 최고 기록이었습니다. 34살 때였고 행복했으며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생길 법하네요. 〈은행나무 침대(이하 은행나무)〉 〈쉬리〉에 이어 〈태극기 휘날리며(이하 태극기)〉로 가 보죠. 대체 그 황당한 제목은 누가 지었나요.
 
  “내 영화 제목은 항상 내가 짓습니다. 스태프들의 반대 엄청났어요. 어떤 인간은 나한테 ‘감독님 극우(極右)세요?’ 소리까지 하더라고요. 〈태극기〉는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고. 징집을 당해 공산주의가 뭔지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싸웠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념으로, 사상으로 선동하고 나섰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어떤 것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원인을 제공한 시대와 역사가 원망스러웠을 겁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역사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제목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지었죠. 그들이 싸운 것은 어렵고 난해한 이념이 아니라 펄럭이는 태극기였을 것입니다. 북한에서였다면 ‘인공기 휘날리며’였을 것이고요.
 
  그런데 대부분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이해하지 않고 그 반대의 지점에서 제목을 해석하더라고요. 영화를 보고 나면 제목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가슴에 안고 가지 않겠냐고 스태프들에게 열심히 설명했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 제목 놓고 고민

 
한국영화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태극기 휘날리며〉.
  —먹혔나요.
 
  “안 먹혔습니다(웃음). 제작 발표를 해야 하는데 답답했어요. 제목 없이 가제(假題)로 나갈 수도 없고. 언론에 소개되는 상황이었거든요. 전날인가 영화평론가와 통화했는데 그 사람은 좋다고 했습니다. 평소 믿고 신뢰하던 사람이 해 준 말이라 용기가 생겼습니다. 밀어붙였죠. 아참, 그 사람은 상당히 좌측에 속하는 사람이었는데, 왜 그랬나 몰라요(웃음). 촬영하는 동안에도 내내 부정적이었습니다. 집요한 사람들이죠.”
 
  —〈태극기〉 기획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영화를 기획할 때 소름이 돋거나 미세한 경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뭔가가 가슴을 쿵! 하고 치는 느낌? 〈쉬리〉 때 그랬어요. 내가 기획하고 내가 쓰는데 그렇습니다. 〈쉬리〉 끝나고 미국 진출을 염두에 두고 SF를 쓰는데 한국형으로 풀다 보니 난항의 반복이었습니다.
 
  답답한 나날이었는데 어느 날 조감독이 ‘다큐를 하나 봤는데 정말 감동적’이라며 추천했어요. 봤죠. 쿵! 하고 느낌이 오더라고요. 전사자(戰死者)의 유품(遺品)을 확인하러 간 할머니가 삼각자를 보고 자기 남편이라고 끄덕이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내가 생각했던 한국전쟁의 모든 상징이 그 한 편의 다큐에 담겨 있었어요. 그렇게 영감(靈感)을 받아 출발한 게 〈태극기〉의 시작입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로 바꿨지요.”
 
  —도입부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닮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좋아했으면 오마주라고 밝혔을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영화를 너그럽게 보는 편입니다. 물론 조감독과 스태프들은 우려했죠. 영화 도입부부터 비슷한 장면으로 가면 위험하지 않겠냐고. 그러나 분단이 가져다준 상처, 그리고 긴 기다림의 순간들을 함축적으로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구조이자 모티브라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영화의 시작이 다큐와 맞닿아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 다큐를 보면서 받았던 느낌과 울림을 전달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큐에 완전히 꽂혀 있었거든요.”
 
 
  “한 달 동안 死線을 걸었다”
 
  —〈태극기〉는 관객 수 1000만명을 돌파했습니다. 최초로 500만, 1000만을 뛰어넘은 건 개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질 법도 한데요.
 
  “그렇기는 하지만 과정은 고달팠습니다. 대략 140억원 언저리로 제작비가 나왔는데 제작비의 40%는 있어야 영화 출발이 가능합니다. 투자를 다 못 받아 회사 돈으로 시작했고 융자 받고 어쩌고 해 보니까 60억까지는 가까스로 맞출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나머지 80억인데 투자가 이루어진다는 보장이 없었어요. 게다가 2월이었는데 겨울 장면부터 촬영해야 중공군(中共軍)이 퇴각하는 장면을 찍을 수 있었어요. 놓치면 1년 기다리거나 아니면 접거나 해야 하는 거였죠.
 
  회사 대표는 말렸습니다. 회사랑 감독님이랑 동시에 파산(破産)한다고요. 왜 투자가 안 이루어졌을까 생각해 보니 전쟁에 대한 표현이나 묘사 등에 대한 투자자들의 확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비주얼과 리얼리티였습니다. 난 자신이 있었죠. 겨울 장면을 찍으면, 그리고 그걸 보여주면 상황이 바뀔 거라 생각했어요.
 
  원빈도 문제였습니다. 소속사와 불화 끝에 원빈이 군(軍) 입대를 결정한 것입니다. 일본하고도 가(假)계약으로 투자배급 계약을 맺었는데, 2월에 촬영 들어가야 하는데, 영장(令狀)이 나온 거예요. 피가 마른다는 말이 어떤 건지 제대로 알았습니다. 한 달 동안 사선(死線)을 걸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입대 연기를 하고 촬영에 들어갔습니다.
 
  트레일러(짧은 예고편)를 만들어 칸에서 틀었습니다. 다음 촬영을 이어가야 하는데 돈은 없고 주변은 불안에 떨고 회사 분위기는 흉흉했습니다. 칸에서 소식이 왔어요. 〈태극기〉 상영하는 부스에서 외국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고 다 난리인데 박수 치는 사람까지 있다고요. 당시 칸의 모든 포커스는 〈태극기〉였습니다. 가능성을 타진한 쇼 박스가 제안을 해 왔고 그렇게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거 안 됐으면 당신과 나 영화 이야기 하면서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아 있지 못합니다.”
 
  —원래 인터뷰라는 게 3분의 2 정도는 화목하고 3분의 1은 좀 불편합니다. 이제 불편할 차례입니다. 〈마이 웨이〉는 확신이었고 〈태극기〉 때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던 지적인데 강제규의 내러티브에 적신호(赤信號)가 켜졌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내러티브를 통제하지 못하는 감독, 이거 치명적인 거 아닌가요.
 
 
  노르망디의 코리안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의 포로가 된 동양인 독일군 병사(왼쪽). 영화 〈마이웨이〉는 이 사진을 모티브로 만든 것이다.
  “진짜 불편하네요. 일단 〈마이 웨이〉부터 이야기합시다. 돌아보면 미국에서 SF를 준비하며 보낸 4년이라는 시간이 아쉽습니다. 오우삼처럼 좀 더 준비를 해서 갔어야 했죠. 그리고 감독으로서만 기능을 발휘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몸에 밴 스타일 때문에 혼자 다 하려고 했어요. 할리우드가 그렇게 만만한 동네가 아닌데요.
 
  〈태극기〉 끝나고 약간 자만했다고 해야 하나요. 에이전시에서 대접도 그랬고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기획, 제작에 시나리오까지 쓰고, 북 치고 장구 치고, 그게 미국서도 가능한 줄 알았어요. 내 프로젝트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고 또 누군가는 옆에서 방향을 잡는 데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해 줬어야 했는데 생각이 짧았습니다. 마음은 급하고 생각은 앞서고.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시나리오를 읽는 입장에서는 좀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할리우드는 정형화된 시나리오를 원합니다. 더 쉽게 풀어서 갔어야 했습니다.
 
  SF가 주춤하는 사이 에이전트로부터 50~60편의 시나리오를 받았습니다. 이미 SF에 대한 고집이 신념으로 바뀐 터라 다른 게 눈에 안 들어왔죠. 그러는 사이 시간이 지나고 〈태극기〉로 번 돈도 슬슬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개인 다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워너브러더스에서 들어온 게 〈마이 웨이〉 시나리오였습니다. 사진 한 장에서 출발한.”
 
  —들은 적 있습니다. 노르망디에서 나치 독일군 복장을 한 채 포로로 잡힌 동양인 남성의 이야기 아닌가요. 소설가 조정래도 《사람의 탈》이라는 제목으로 쓴 적이 있는.
 
  “그렇습니다. 그 사진 한 장을 토대로 쓴 시나리오였어요. 워너 회장이 전쟁영화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감독은 누굴 시킬까 고민하던 중 누군가 나를 추천했던 모양입니다. 〈태극기〉 만든 감독이라고 하니까 바로 오케이였다는 거죠. 게다가 지금 LA에 있다고 하니 뭐 딱이었지요.
 
  솔직히 시나리오는 좀 별로였습니다. 이해가 잘 안 됐는데 얼마 후 그 이야기를 다룬 SBS 3부작 다큐 ‘노르망디의 코리안’을 보고 나니 또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웃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너무 놀랍고 신기하고. 하겠다고 했습니다. 시나리오야 다시 쓰면 되니까요.
 
  그렇게 출발한 게 〈마이 웨이〉입니다. 그런데 잘 안 풀렸습니다. 이제껏 썼던 어떤 시나리오보다 어려웠어요. 미국에서 고치는 동안 한국에서는 이미 진행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가을에 시나리오를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이미 겨울 장면 촬영을 위해 9월부터 프리 프로덕션이 진행 중인 상황인 거였어요.(영화의 투자, 배급에 관한 매우 지루하고 전문적이며 알 필요가 별로 없는 이야기라 중간 생략)
 
  스트레스 많이 받았습니다. 시나리오가 100점 만점에 80점짜리는 나와야 하는데. 내가 원래 80이 아니면 ‘고’를 안 하거든요. 두 달만 시간이 더 있었어도 좀 더 고칠 수 있었는데 그것조차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불편한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마이 웨이〉를 보는 사이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 감독이 시나리오에 집중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구나. 두 번째는 혹시 강제규 감독에게는 시나리오 닥터가 없는 것 아닌가. 가장 최악으로는 강제규라는 감독, 사이즈가 커지면 소화를 못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요.
 
  “집요하네요. 미국에 있는 4년 동안 감이 떨어진 건 사실입니다. 한국 관객들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지 정확히 안다면 더 이상한 일 아닌가요.”
 
 
  강박증
 
  —그렇기는 하지만 당신은 〈은행나무〉 〈쉬리〉 〈태극기〉로 트렌드를 주도했던 사람입니다. 대중의 눈높이를 올려놓은 주인공이기도 하고요.
 
  “그게 다 좋은 건 아닙니다. 혹시 이런 생각 안 해 봤나요. 99년의 〈쉬리〉는 그게 99년이었으니까 의미가 있는 겁니다. 〈태극기〉도 마찬가지고요. 〈마이 웨이〉 역시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항상 시작점에 있다 보니 내게는 기준이 없었습니다. 여유도 없었고요. 기준이 없으면 풍요롭고 다양하게 영화를 만들기 힘듭니다. 후배들은 조금 편할 거라 생각합니다. 〈태극기〉가 있었으니까 〈웰컴 투 동막골〉도 나오고 〈JSA〉도 나올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이런 소재와 형식이 관객들에게 먹힐지 다시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소재를 비틀고 용해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 내기도 수월하고요.”
 
  —마치 자신의 성공에 쫓긴 느낌입니다. 항상 새로운 차원, 높은 단계의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중압감 같은 거 말이죠.
 
  “그동안 시나리오 작가, 감독 그리고 제작자로 걸어오면서 내 역할에 대해 항상 고민했습니다. 어쩌면 영화보다도 더. 4년에 한 편씩을 했는데 항상 새로운 단계에 도전했습니다. 〈은행나무〉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판타지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것이었고 〈쉬리〉와 〈태극기〉는 우리가 부러워하면서 외국 영화를 보았듯이 외국 사람들도 한국 영화를 보며 그랬으면 좋겠다는 욕심에서 출발한 겁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증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새로움에 도전하는 건 창작자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그리고 그게 바른 길이라면 과감하게 문을 두드리고 피를 흘려야 맞지요.”
 
  —약간 60~70년대 기업인들이 주장했던 ‘산업보국(産業保國)’의 영화판 버전 같습니다.
 
  “사실입니다. 영화인으로서의 사명의식 분명 있었습니다. ‘감독으로 뭘 해야 행복할까’ 대신에 ‘내가 다음 단계에서는 어떤 걸 해야 하나’라는 매우 산업적인 생각을 앞세웠던 것이죠. 세 편은 어프로치에 성공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꿈과 계획을 계속 실현해 나갔고 그 정점(頂點)에 있는 영화가 〈마이 웨이〉였던 것입니다. 그 판단이 옳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획 중이던 SF가 잘 안 풀렸고 그 상황에서 〈마이 웨이〉를 SF의 대체물로 생각한 것은 아닌지, 길이 정확히 안 보이니까 내가 타협을 한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본 적 있습니다.”
 
 
  ‘강제규’라는 이름값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작가동맹) 작가가 한 말이 생각납니다. ‘잃은 것은 예술이요 얻은 것은 이데올로기다’는 것 말입니다. 감독님한테 적용하자면 얻은 것은 산업이요 잃은 것은 영화인데 지금은 어떤가요. 아직도 강제규는 그 이름에 걸맞은, 뭔가 초대형의 것을 해야 한다는 강박이 남아 있습니까.
 
  “최근에 단편을 하나 개봉했습니다. 〈민우씨 오는 날〉이라고, 평양에 가면서 곧 돌아온다던 남편을 평생 기다린 한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내용은 가슴 먹먹한 이야기지만 작품을 하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영화 속에서 놀았습니다. 〈은행나무〉 이후 20년 만에 되찾은 기쁨입니다.
 
  〈은행나무〉는 내가 가장 즐겁게 일했던 작품입니다. 다음 영화 준비도 신났고요. 〈쉬리〉부터는 그만큼 즐겁지 않았습니다. 〈태극기〉는 더했지요. 개인적인 욕망이 이루어지는 것과 행복은 다릅니다. 엄청나게 짓눌렸습니다. 강제규라는 이름값 하느라.
 
  개봉 준비 중인 〈장수 상회〉는 유쾌하고 따뜻한 이야기인데 작품을 하면서 몸이 가볍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영혼이 가벼워지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내가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하고, 어떤 가치를 실현해야 하고, 같은 껍데기를 많이 덜어냈습니다. 100%는 아니더라도 아주 많이요. 아니 거의 없어졌습니다. 명분과 가치에 매달리는 영화가 아니라 편안하게 쓰고 이끌리는 대로 영화를 만들었던 시절처럼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민우씨 오는 날〉의 카피가 천만 관객을 사로잡은 〈태극기 휘날리며〉 강제규 감독의 귀환이다, 이런 얘기군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귀환이자 심리적인 귀향(歸鄕)처럼 들립니다.
 
  “딱 맞는 말이네요.”
 
  —큰 경험이 많으니 사업 제안도 많을 것 같은데요.
 
  “많죠. 특히 중국 쪽에서요. 예전 같으면 바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즐거움과 맞닿아야 손에 쥘 생각입니다. 신중하게 보고 있습니다.”
 
  —긴 시간 감사합니다. 〈장수 상회〉 기대하겠습니다.
 
  “영화의 사이즈나 가치나 뭐 그런 쪽으로는 제발 기대하지 마세요. 나는 이제 즐겁게 영화를 만들고 싶습니다. 사이즈 큰 거 안 하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보다 재미와 즐거움이 우선이라는 얘기입니다.”
 
 
  〈마이 웨이〉 이전과 이후
 
  인터뷰 내내 강제규 감독이 가장 자주 사용한 표현이 ‘돌이켜 보면’이었다. 영광스러웠던 기억을 돌아보는 게 아니었다. 아쉬웠던 것, 놓치고 지나간 것, 잊고 있었던 것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찾은 것으로 보인다. 강제규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마이 웨이〉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 같다. 더 이상 명분이나 가치나 타인(他人)의 시선이나 영화 산업 역군으로서의 의무감 따위에 시달리지 않는, 관객을 즐겁게 만들어 주고 감동을 주는 영화를 기대한다. 〈민우씨 오는 날〉 영화 소개에 달린 댓글 중 하나가 ‘여태껏 본 단편영화 중 가장 여운이 긴 영화였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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