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발굴] 6·25전쟁의 火魔에서 서울 문화재 구한 金龍周 전 주일공사 : 월간조선

1945년 2월 13일 밤 10시14분. 영국 본토를 출발한 796대의 랭카스터 폭격기와 모스키토 폭격기 9대가 엘베 강변에 위치한 드레스덴(Dresden)으로 날아들었다. 독일 공군의 저항은 미미했고, 이들은 군사시설이건 주택이건 가리지 않고 2660t의 폭탄으로 융단폭격을 가했다.

폭탄의 절반가량은 네이팜(Napalm)탄이었다. 네이팜탄은 알루미늄, 비누, 팜유, 휘발유 등을 섞어 만든 유지소이탄(油脂燒夷彈)으로, 3000℃의 고열을 내면서 건물과 산림·군사시설 등 투하지역 반경 30m 이내를 초토화해 생명체를 말살한다.

3시간 후 다시 529대의 영국 랭카스터 폭격기들이 날아와 180t 이상의 고폭탄을 저공 비행하며 투하했다. 다시 10시간 후, 이번에는 미국의 B-17 폭격기 311대가 771t의 고폭탄과 네이팜탄을 기차역과 철도시설에 쏟아부었다.

역에는 전날 폭격으로 공포에 사로잡힌 드레스덴 시민들이 피란을 가기 위해 몰려 있었고, 폭격기를 호위하던 미 공군의 무스탕 전투기들은 이들에게 기총소사를 가했다. 이 세 차례 공습으로 18세기 아우구스트 대왕 시절 호화롭고 웅장한 건축물로 가득해 ‘엘베의 피렌체’로 불리던 아름다운 고도(古都) 드레스덴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연합군 공식 발표에 따르면, 문화유산 50여 개를 비롯해 최소한 2만5000명의 시민들이 네이팜탄의 이글거리는 고열 속에서 잿더미가 됐다.

미국의 전쟁부 장관이 보호한 일본의 교토

1945년 연합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독일 드레스덴의 처참한 모습.

1944년 여름, 태평양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미군은 드디어 일본 본토로 항공력을 집중시켜 전쟁을 조기 종결하려고 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B-29 폭격기의 소이탄 투하는 목재 건축물이 대다수인 일본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미군의 도쿄 공습 하이라이트는 드레스덴 공습 한 달 만인 1945년 3월 9일 단행된 도쿄 대공습이었다. B-29 폭격기 344대는 약 100만 발에 달하는 폭탄 2400t을 도쿄 상공에서 투하했고, 3시간도 채 안 되는 이날 공습으로 도쿄와 그 일대는 쑥대밭이 됐다. 도쿄 시민 10만명이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드레스덴 시가지에 소이탄을 퍼붓는 연합군 폭격기들.

3월 11일 나고야, 13일 오사카, 16일 고베, 19일 나고야 2차 공습이 이어졌다. 10일간 공습이 계속되면서 일본의 대도시는 불길에 휩싸였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대도시 50여 곳이 쑥대밭이 됐지만, 교토와 히로시마(廣島), 니가타(新潟), 고쿠라(小倉), 나가사키(長崎) 등 5개 도시는 예외였다. 연합국은 일본의 조속한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 교토를 제외한 4개 도시를 원자폭탄 투하 대상 도시로 삼았던 것이다.

드레스덴이 연합군의 융단폭격으로 사라질 때, 아시아에 있는 1000년 고도(古都) 교토(京都)가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당시 전쟁부 장관이었던 헨리 스팀슨(Henry Lewis Stimson·1867~1950)의 강력한 반대 때문이었다. 헨리 루이스 스팀슨은 공화당원이었으나 민주당인 루스벨트와 트루먼 정부하에서 요직을 맡았다. 1945년에 그가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할 때의 나이는 78세였다. 미국 지도부 인사들 중 최연장자였고, 공직 경력이 화려했다. 이런 권위로 인해 대통령도 그를 존중했다고 한다.

1893년에 그는 마벨 웰링턴 화이트와 결혼해 신혼여행을 일본 교토로 갔다. 1000년 고도의 아름다움에 취했고, 일본인들의 정직과 예절에 반했다고 한다. 1945년, 미국 지도부는 개발에 성공한 원자폭탄을 투하할 후보지를 논의하고 있었다. 1차 후보지로 추천된 곳은 히로시마, 교토, 니가타, 고쿠라였다. 이들 도시는 그때까지 폭격을 당하지 않았으며 군(軍) 시설이 있었다.

독일의 보급선 차단을 위해 드레스덴 폭격을 지휘한 아더 해리스 영국공군 총사령관.

스팀슨은 교토를 제외시켰다. 일본의 정신이 담긴 이 도시를 파괴하면 민심이 흉흉해져 전후 관리가 어렵다는 것이 공식적인 이유였다. 원폭투하지 선정위원회는 제외된 교토 대신에 나가사키를 집어넣었다. 1945년 8월 6일 새벽, 사이판 옆에 있는 티니안 섬을 출발한 미군의 B-29 폭격기는 오전 8시15분 히로시마 상공에서 우라늄 폭탄을 투하했다.

8월 9일 새벽, 소련이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를 침공했다. 이날 오전, 티니안을 이륙한 미군 B-29는 요코하마 상공에서 호위 전투기와 합류한 뒤 목표지인 북(北) 규슈 고쿠라 상공에 도착했다. 고쿠라의 하늘은 안개와 연기에 덮여 있었다. B-29는 몇 번 상공을 선회했으나 투하 목표물을 육안(肉眼)으로 볼 수가 없었다.

기장(機長)은 B-29를 대체 목표지인 나가사키로 돌렸다. 여기도 구름에 덮여 있었다. 기름이 줄어드는 B-29가 마지막으로 상공을 선회하는데 구름이 갈라지면서 아래로 미쓰비시 중공업이 보였다. 그곳을 향해 ‘팻맨’이란 별명을 가진 플루토늄탄을 투하했다. 고쿠라와 나가사키 두 도시의 운명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스팀슨 장관의 주장에 따라 교토는 B-29 폭격대상은 물론 원자폭탄 투하 후보지에서 빠질 수 있었던 것이다. 교토와 나라(奈良)가 간직하고 있는 료안지(龍安寺), 긴가쿠지(金閣寺), 뵤도인(平等院) 등 1000년이 넘은 목조 사찰 등 각종 문화재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 수도 서울의 문화재가 온존한 것은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 이 수수께끼는 김용주(金龍周·1905~1985) 전 주일공사가 6·25전쟁 기간 중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를 방문해 폭격 중단을 간청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경복궁과 덕수궁, 종묘와 사직단이 건재한 건 ‘문화적 기적’

최서면(崔書勉) 국제한국연구원장은 김용주 전 공사와 생전에 만나 그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을 《월간조선》에 알려왔고, 기자는 최근 김 전 공사의 자서전 《나의 회고록-풍설시대 80년》(신기원)을 입수해 그의 서울 문화재 보호와 관련한 내용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다. 김 전 공사는 작고 1년 전인 1984년 자서전을 출간해 가까운 지인(知人)들에게만 돌린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최서면 원장은 “6·25전쟁 직후 북한은 해외 교포들을 상대로 남한의 문화재가 미군의 폭격으로 전부 파괴당했다고 선전하고 있었다”며 “그러나 막상 서울에 와 보니 남대문, 덕수궁, 경복궁, 동대문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4대문이 온전한 것에 놀랐다”고 했다.

최 원장은 “남대문이 건재한 것을 보니 마치 파리의 개선문이 무사한 것보다도 더욱 절실한 느낌이 들었다”며 “보통 전쟁을 치른 수도는 철저하게 파괴되는 것이 관행인데, 경복궁과 창덕궁, 덕수궁, 종묘와 사직단 등이 이토록 건재한 건 ‘문화적 기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이토록 문화재가 온전한 것은 누군가가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해 수소문하니 김용주 전 주일공사라고 누군가가 귀띔해 주더라”며 “김용주씨를 만나 확인하니, ‘그 내용을 책으로 쓴 게 있다’며 본인 입으로 말하기 쑥스러운지 책 한 권을 건네는데,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李承晩 대통령, 6·25전쟁 직전 주일공사로 임명

1996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히로시마 ‘원폭돔’. 원래는 원자폭탄 투하로 파괴된 히로시마의 산업장려관이다.

최서면 원장은 “조선 500년의 숨결을 안고 있는 광화문 일대가 인류의 영원한 보물로 남게 된 것은 우리 문화재를 지키려고 했던 이들의 소중한 사랑 때문”이라며 “건물 한 채만 남긴 채 폐허로 변해 버린 평양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가 됐다”고 했다.

유엔군은 전쟁 발발 2개월 만인 1950년 8월, 한반도 전역에서 제공권을 장악했으며 그 결과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연합군 지상군과 해군의 작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1952년 8월 29일에는 극동공군 항공모함 함재기들이 1403소티를 출격시켜 평양을 폭격했는데, 이는 전쟁 중 하루 최대 공습이었다.

6·25전쟁 때 평양은 미군의 집중 폭격으로 폐허가 됐다. 북한은 40만명이 살던 평양에 42만 발의 폭탄이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전후의 평양 사진에 남아 있는 건물은 일제 강점기의 화신백화점 단 하나뿐이었는데 그것이 현재의 평양 제1백화점이다.

최서면 원장은 “일본의 식자층 중에는 김용주 공사의 스토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면서 “그들은 교토의 문화재는 미국인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보호받은 것이지만, 한국의 서울 문화재는 한국인 스스로 쟁취해 보호한 것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교육가이자 사업가였던 김용주 전 공사는 김문희(金文姬) 용문학원 이사장(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모친), 김창성(金昌星) 전방 명예회장, 김무성(金武星)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父親)이다. 김 전 공사는 전남방직(현 전방)을 설립해 회장을 역임했고, 1960년 4·19 직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인 경남 함양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참의원에 당선돼 원내총무를 지냈다.

1925년 5월 9일 자 《동아일보》에 보면, 김용주 전 공사는 포항에 노동야학을 개설해 무료로 학생들을 가르친다. 1930년대에는 포항에 자신의 재산 절반을 털어 영흥학교를 세워 조선인의 교육에 앞장섰다.

김용주 전 공사는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주일대표부 특명전권공사를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승만 대통령이 신흥우(申興雨) 주일공사의 후임으로 김용주를 발탁한 배경에는 그가 대일선박반환청구교섭 사절단장으로 미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교섭하면서 이 대통령과 신뢰가 쌓인 결과였다.

인천상륙작전을 앞둔 1950년 9월 초, 김용주 주일공사는 인민군의 저항을 분쇄하고 북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미 공군이 서울을 대대적으로 폭격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도쿄에 있는 맥아더사령부를 찾아간 김 공사는 “이번 작전에서 서울에 대한 폭격을 피할 수 없느냐”고 폭격 중단을 요구했고, 이에 대해 맥아더 원수는 “그건 공사의 인식부족이다. 원래 도시란 파괴된 뒤에 새로운 도시로 재건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김용주 공사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자서전 내용을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맥아더, “원래 도시란 파괴 뒤에 재건하는 것”

일본을 대표하는 교토의 천년 고찰 긴가쿠지(金閣寺).

<1950년 9월로 접어들면서 도쿄 항간에선 ‘미군 반격 상륙작전 박두설’이 파다하게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한 전망은 주로 전국(戰局)의 추세에 민감한 군사평론가들의 지상(誌上) 해설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나대로 얼마 전 군 요원 1000명 주선 요청 건과 관련해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 핵심 정보참모인 찰스 윌로비(Charles Willoughby) 소장이 나에게 말한 적이 있는 것처럼, 한국 모 해안 상륙작전 감행 예정설에 대해 냉철히 생각을 다듬어 보았다.

현재 남한 깊숙이 파고든 북괴군의 주력을 분단, 괴멸시키려면 전략상으로나 지리상으로 장차 미군이 택할 대규모 상륙지점은 인천이나 군산이 아닐까 싶었다. 미군은 군산이나 인천에서 서울로 진격할 것이다.

인천이라면 수도 서울과는 근거리다. 미군의 재래식 전략에 비추어 보면, 미군은 자국 군대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우선 점령에 앞서 그 점령 목적지에 치열한 공중폭격을 가할 것이고, 이번에도 미 공군은 필시 상륙작전 개시에 앞서 수도 서울에 산재한 모든 북괴군 진지에 대해 전략적 대폭격을 가할 것이다. 북괴군은 북괴군대로 최후의 거점을 서울로 정하고 서울 시내의 대건물을 토치카로 삼아 최후까지 저항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미군은 서울 시내의 모든 건물을 완전 파괴 소각하는 전법을 쓸 것이다.

불바다의 서울! 폐허의 서울! 사태가 이렇게 번지면, 나는 머릿속에 한 줄기의 우려가 짚였다. 미 공군의 전면폭격 바람에 수도 서울에 담긴 귀중한 우리 고유문화재와 사적들이 모조리 파괴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너무도 심각하게 느껴져 연합군 최고사령부 맥아더(Douglas MacArthur·1880~1964) 원수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맥아더 장군의 부관은 그날따라 나에게 면회의 용건을 물었다. 나는 “서울시 수복작전에 관한 것”이라고 답해 두었다. 나의 내의(來意·찾아온 뜻)에 신경을 기울였던가, 나를 맞아들인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옆자리에 극동군 참모장 히키(Hickey) 중장을 위시해 수명의 참모 장성들을 동석시키고 있었다. 그들이 시선을 내게 집중하자 나는 약간 가슴이 설다.

나는 맥아더 장군에게 인사를 건넨 후, “유엔군 반격에 따른 서울시 수복전략에 대해 의견을 말씀하려고 왔다”는 말로 운을 떼고, “서울시 공략에 있어서는 비록 시일이 걸리고 어느 정도 희생이 나더라도 ‘전면폭격’ 같은 것은 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다.

맥아더 장군은 성급한 내 말에 선뜻 납득이 안 가는 모양인지, “왜요? 폭격에 의해 서울 거리가 잿더미로 화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뜻인가요?” 하고 도리어 반문했다.

“네, 한마디로 말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김 공사, 그 점은 걱정 마시오. 원래 도시란 천재(天災) 또는 전화(戰火) 등을 겪고 나면 이전에 비해 몇 갑절 더 크고 좋은 도시로 부흥되게 마련이오. 더욱이 이번 한국의 경우는 전후 우리 미국이 책임을 지고 재건을 도울 것이니 서울은 앞으로 이상적인 현대 도시로 탈바꿈할 것이오.”

신도시도 좋지만…

헨리 스팀슨 전쟁부장관(왼쪽). 신혼여행지 교토의 매력에 반한 그는 교토와 나라 폭격을 결사반대했다.

나를 타이르는 듯한 맥아더 장군의 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다시 의견을 내놓았다.

“그것은 나도 짐작합니다. 물론 서울시가 전후 훌륭한 신도시로 복구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만, 나는 서울에 있는 우리 문화재와 사적이 타 없어지는 것을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우리 한국은 장구(長久)한 역사와 고유문화를 가진 나라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과거 몇 차례에 걸친 외적의 침략으로 찬란한 문화재와 사적들은 그때마다 소진(燒盡) 또는 파괴, 약탈을 당해서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대부분 서울에 보존돼 그런대로 그 자취를 찾아 볼 수 있는 실정입니다. 이번 폭격이 그곳에서 시작되면 그것마저 완전히 소멸될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 한국 민족은 마지막 남은 역사적 문화재와 사적들에 그지없는 긍지와 뜨거운 민족의 얼을 느끼고 그 보존에 온갖 정성을 다해 왔습니다. 그런 문화재, 그런 사적들입니다. 전후에 생길 이상적 신도시도 좋습니다만, 우리의 민족감정과 염원은 몇 개의 신도시보다 여기에 비중을 더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각하, 그런 뜻에서 서울 폭격 계획을 철회하실 수는 없겠습니까?”

내말을 다 듣고 나서 맥아더 장군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양 묵묵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그러한 반응에 대해 옆자리의 히키 참모장은 그것은 그것이고 작전은 작전이란 듯이, “하지만 전략상 서울 폭격은 안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라며 약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맥아더 장군은 그 말을 가로막듯, “아니오, 김 공사는 매우 뜻깊은 말씀을 했소”라며 히키 참모장에게 “김 공사의 의사를 신중히 검토해 보라”고 명령했다. 이에 히키 참모장을 선두로 참모진은 나를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들어가 보니 그 방은 큰 홀이었으며, 벽 전체가 한국 지도로 채워져 있는 전쟁상황실(War Room)이었다.

히키 참모장은 벽에 붙어 있는 지도 중에서 정밀한 서울 시가지도 한 장을 떼어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그리고 내게 문화재와 사적보존을 위해 파괴해서는 안 될 지점을 차례차례 색연필로 표시하라고 했다.

나는 처음엔 덕수궁, 경복궁, 창덕궁, 남대문, 동대문 등 몇 군데를 중점적으로 가려 붉은 칠을 하다가 이것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시는 대부분이 목조건물이라 한 번 소이(燒夷) 폭격을 당하면, 전체가 연소될 우려가 있다고 직감했다. 내친김에 한술 더 떠 대략 정동을 기점으로 남대문을 거쳐 퇴계로에 이르는 반월형(半月形)의 지형을 따라 광범위하게 스윽 선을 긋고 그 선 이동(以東), 이북(以北), 이서(以西)를 모두 폭격대상에서 제외해 달라고 힘을 주어 말했다.

덕수궁과 남대문에 색연필로 동그라미 표시

1951년 무렵의 숭례문. 서울 폭격을 피한 숭례문은 6·25전쟁 중에도 총탄 피해만 있었을 뿐 무사했다.

이에 대해 참모들은 서울지도상의 시외로 뻗는 도로들을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면밀히 검토하더니, 내가 그려 보인 그 선엔 “전략상 도저히 따를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나는 다시 범위를 좁혀 정동에서 을지로, 왕십리에 이르는 선을 그어 보였다. 그것도 용납할 수 없었던지 히키 참모장은 이번엔 아예 나를 제쳐놓고 자기가 손수 색연필을 들었다.

그는 정동에서 구부스름하게 청계천으로 선을 그어 보이며, “이 정도로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그렇다고 절대보장은 다짐할 수 없으니 양해하라”고 덧붙였다. 나는 다시 히키 참모장이 그어 보인 그 선에서 자칫 밖으로 밀려나갈 위험성이 있어 보이는 덕수궁과 처음부터 선외(線外)에 놓이게 된 남대문 등의 두 지점에 굵은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고, “위치가 위치인 만큼 이 두 지점에 대해서는 특별 배려를 잊지 말아 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이윽고 참모들과 이야기를 마치고 전쟁상황실을 나와 맥아더 장군을 다시 만났다 그에게 “충분한 합의를 보았다”며 감사의 인사를 했더니, 맥아더 장군은 “오늘, 김 공사는 나에게 좋은 어드바이스를 해 주어 대단히 기쁩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하고 내 등을 정답게 두드렸다.

그 후 미 공군의 서울 폭격은 이런 사려하에 결행됐다. 그리고 미 공군은 나와 히키 참모장 사이에 맺어진 절충안을 진지하게 지켜 서울의 문화재와 사적들은 전화(戰禍)를 모면하게 됐다. 그로부터 5~6년 후 어느 날, 나는 서울서 이 대통령 특별비서로 있던 미국인 레디 씨를 우연히 만났더니 레디 씨는 나를 향해 “당신은 서울을 전화에서 구출한 공로자”라고 하면서 자신이 미국 모 장성으로부터 서울시 문화재 수호에 대한 그 전략 비화를 들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는 그동안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그때의 일을 어느새 망각하고 있던 터라 레디 씨의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때 그 일이 감개(感慨) 깊게 되새겨졌다.>

好男兒이자 愛妻家

1995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종묘.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이다.

김용주 공사가 연합군총사령관이자 미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 원수를 상대로 서울 폭격을 ‘전면폭격’에서 ‘부분폭격’으로 작전변경을 한 것은 맥아더 원수와 인간적인 신뢰를 쌓은 덕분이었다. 김 공사는 자서전에서 1950년 5월 주일공사로 부임해 맥아더 사령관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와의 개인적 인연을 발전시켜 국가적 이익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특히 6월 28일 서울이 실함(失陷)당한 상태에서 본국과 연락이 두절돼 도쿄에서 고군분투하던 김용주 공사가 가까스로 연결된 이승만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 “미군 F-51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연합군사령부에서 빌려 전선에 투입하라”는 지시를 받고, 맥아더사령부를 찾아가 전투기 지원을 요청하는 부분은 약소국 외교관의 ‘속살’을 보는 것 같아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날은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기 직전, 트루먼 대통령이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해 즉각 한국전선에 미군 투입을 결정했고, 작전의 책임을 미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에게 맡긴 날이기도 했다.

6월 28일 밤 9시 연합군사령부로 전투기 지원요청을 위해 맥아더사령부를 찾아간 김용주 공사는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며 “이미 우리 미 공군기가 한국전선에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고, 나도 오늘 아침 8시에 한국전선으로 날아가 이 대통령을 만나고 이제 막 돌아왔소”라는 말을 듣고 김 공사는 자서전에서 “하늘의 복음(福音)과도 같은 또 하나의 새로운 중대 뉴스”라며 “내 심정은 그야말로 환희작약(歡喜雀躍)이었다”고 회고했다.

해임되기 직전 전선을 시찰하는 맥아더와 리지웨이. 가운데가 김용주 주일공사와 문화재 보호문제를 논의한 극동군사령부 참모장 히키 중장이다.

김용주 공사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참전결정이 내려지기가 무섭게 맥아더 원수가 재빨리 한국전선으로 날아가 몸소 이 대통령을 위로하고 한미 양국 군대의 공동작전의 기틀을 마련해 놓고 돌아온 사실을 깨닫고 맥아더와 뜨거운 악수를 길게 나누었다고 한다. 김 전 공사가 자서전에서 맥아더 원수에 대한 인간적 면모를 소개하는 부분이 있어 간단히 소개한다.

<내가 본 인간 맥아더 장군은 허식을 멀리하는 소탈, 소박 그대로의 참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신의와 인정, 쾌도난마(快刀亂麻)와 같은 과단성, 비할 데 없는 청렴 등을 함께 갖춘 신념의 사람이었다. 그는 6척(180cm)이 넘는 거구에 얼굴도 호남형이었으며, 말소리는 명랑하고 영롱한 가운데 저력이 괴어 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종의 정감(情感)을 느끼게 했다.

나는 주일특명전권공사로서 부임한 후 그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그 제정식을 계기로 나는 맥아더 장군과 접촉을 시작했다. 6·25동란이 터지며 그와 운명적으로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유엔군사령부와 관련된 무슨 공무상의 일과 특히 6·25동란으로 그의 옷소매에 매달리기가 일쑤였으며, 또한 그때마다 그는 나의 고려를 이해와 호의로써 가능한 한 풀어 주었다.

맥아더 장군은 처음부터 자의든 타의든 전후 일본의 격동기를 딛고 역사의 풍도(風濤)를 몸소 헤쳐 나가야 할 운명의 사람이었던가 보다. 따라서 투철한 반공인으로서의 진면목이 거기에 부각됐고,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존재,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의 그의 입장 등은 어지러운 역사의 회전과 더불어 길이 후세에 뜻을 남기게 할 것이다.

1945년 9월 27일 도쿄 아카사카의 미대사관저로 맥아더 원수를 예방한 일본 천왕 히로히토. 일본 국민들은 현인신 ‘천황’이 맥아더 앞에서 초라하게 찍은 사진에 경악했다.

나는 공적 생활을 통해 본 맥아더 장군은 물론, 사적 생활을 통해 본 경우에도 그에게 그지없는 인간미를 느꼈다. 그는 남달리 차분한 가정적 분위기를 즐기고 아끼는 위인이었다. 가정 속에 그의 명상(冥想)이 깃들었고, 또한 그 명상을 통해 하루의 진로가 열리고, 하루의 예지(叡智)가 세워졌다. 매일 그 명상이 시작되는 한동안을 위해 그의 연합군사령부 출퇴근 시간은 이례적이었다.

그는 자기의 출근시간을 오전 10시로 정했고, 그 대신 퇴근시간은 오후 8시로 정해져 있었다. 그는 관저에서 늦은 출근시간까지 아침 한동안을 귀중하기 짝이 없는 명상으로 보냈다. 그 대신 여느 사람의 경우와 달리 오후 8시까지 막료들과 함께 정력적으로 계속 근무했다.

가정에 충실해서인지 또는 일본인을 경계해서인지 맥아더 장군은 재임 6년을 통해 외부 연회(宴會)에 모습을 나타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외교관의 공식연회일 경우에도 맥아더 장군은 부인을 대신 내보내고 자신은 따로 임무에 몰두했다.

맥아더 장군은 일본인 중에서도 일본 여자에 대한 경계심이 한결 두드러졌다. 극단적인 예로 일본 진주 후에 일본 천왕 부부가 연합군사령부로 그를 인사차 방문했을 때, 맥아더 장군은 일왕 한 사람만 접견했을 뿐 왕후는 접견하지 않았다. 또 맥아더 장군은 일본 체류 6년간 일본 여자라고는 한 사람도 만나 보지 않았고, 따라서 일본 여자의 손 한 번 쥐어 본 일이 없었다.

맥아더 장군은 애처가로 유명했다. 그의 부인(Jean Marie Faircloth, 1898~2000)은 부군보다 18세가량 나이가 젊었으며, 어딘가 동양적 분위기를 지닌 현숙한 미모의 여성이었다. 한번은 외교사절단을 자신의 공관에 초대해 각국 외교사절단장 전원이 정시에 공관에 모였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맥아더 장군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관저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외교사절들을 상대로 칵테일을 권하고 있던 부인이 현관으로 달려가서 부군을 맞이했다. 맥아더 장군은 외교사절들에게 건넬 인사의 말은 뒤로 미루고 우선 우리 면전에서 부인을 얼싸안고 긴 키스를 스스럼없이 했다. 물론 구미인의 풍습으로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서 부부 간 키스쯤은 예사로운 일이긴 하지만, 맥아더 장군의 그것은 마치 젊은 애인과 애인 사이를 방불케 할 정도로 열렬하고 다정해 보였다.

트렁크 4개가 이삿짐의 전부

맥아더의 두번째 부인 진 맥아더. 맥아더의 18살 연하였던 그는 2000년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부인 진 맥아더 여사의 생전 모습.

맥아더 장군이 6·25 동란 처리문제(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되자 만주폭격과 중국연안 봉쇄, 대만의 국부군의 사용 등을 주장하다 트루먼과의 대립으로 1951년 4월 11일 사령관의 지위에서 해임)를 둘러싸고 트루먼 대통령과 의견대립을 빚어 마침내 그 직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갈 때, 그의 이삿짐은 트렁크 4개가 전부였다. 그중 2개는 주로 아직 어린 외아들(아더 맥아더 14세·Arthur MacArthur IV, 1938년생)의 장난감을 꾸려 넣은 것이었고, 나머지 2개는 맥아더 자신과 부인의 의복을 담은 것이었다. 이 사실을 통해 그의 청렴한 인격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1951년 4월 16일 맥아더 장군이 일본을 떠나던 날, 사령부에서 하네다공항까지 연도에는 100만명이 넘는 일본 국민들이 운집해 재임 6년에 걸쳐 전후 일본 민주화에 기여한 그의 공적을 기리며 석별의 정을 나눴다. 하네다공항엔 5성표를 기수(機首)에 붙인 맥아더 장군의 특별기가 주인공의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별기 승강구엔 도쿄주재 각국 외교사절단장 전원이 일렬로 도열해 있었다. 물론 그 속엔 나도 끼어 있었다.

70대의 두 반공노장(反共老將) 맥아더와 이승만은 트루먼이 유엔군의 북진에 제동을 거는 것을 막으려고 애쓴다. 맥아더(왼쪽)와 이승만.

맥아더 장군과의 석별의 순간이 왔다. 맥아더 장군은 야전에서 입던 낡아빠진 면포(綿布) 전투복에 오랜 세월 착용한 헌 모자를 쓰고 있었으나, 어깨엔 5성의 원수장(元帥章)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장군은 부인과 어린 아들을 데리고 외교사절단 앞으로 다가서 한 사람 한 사람씩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는 악수만 할 뿐, 도시 말문을 열지 않았다. 한 사람에 대한 소요시간은 불과 수초에 지나지 않았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맥아더 장군은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오오, 김 공사!” 그는 감개 어린 첫 소리와 함께 두툼한 두 손을 모아 내 한쪽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나도 남은 한쪽 손을 그의 손등에 뜨겁게 겹쳤다. “장군,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다니 ….”

나는 제대로 말끝을 맺지 못한 채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며 목이 메었다. 순간, 맥아더 장군의 입가에 뜻있는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는 잡은 손에 불끈 힘을 주었다. 맥아더 장군은 좀처럼 내 앞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악수는 그만큼 길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일본의 NHK 현장실황 방송반은 이 긴 악수를 지켜보며 다음과 같은 감동의 소리를 전파에 실었다고 한다.

“지금, 맥아더 장군은 한국의 김 공사와 서로 손을 맞잡고 깊은 감개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외교사절과는 형식적인 악수에 지나지 않았으나, 유독 김 공사와는 긴 악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벌써 약 2분 이상이 경과했는데도 아직도 서로 손을 풀지 않는 맥아더 장군과 김 공사! 이 길고 뜨거운 악수는 과연 그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 나와 맥아더 장군 ‘우리 두 사람은 이렇게 만났었고, 이렇게 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