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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列傳

개그맨 하다 연극계로 돌아온 이원승

“연극을 하기 위해 피자를 굽는다”

글 : 장원재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 진행자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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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그맨 데뷔하면서 ‘개그맨 10년, 이후엔 연극배우’ 결심, ‘총 10년간 週 1회 연극공연’ 약속 실천 중
⊙ ‌어린 시절 감동받았던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을 <이원승이 원숭이>로 무대에 올려
⊙ 연출가 강영철 찾아가 사정 끝에 <하늘텬따지>로 연극계 복귀
⊙ ‌오태석, “너는 돈을 벌었는데 무대로 돌아왔다. 너의 성공이 후배들에게는 또 하나의 희망”

李原丞
⊙ 54세. 중앙대 연극영화학과 졸업. 同 신문방송대학원 연극전공 석사.
⊙ 現 ‘극단 하늘땅’ 대표, 피쩨리아 디마떼오 대표이사.
⊙ 출연작: <오호! 종달새> <엘리베이터> <장미의 성> <멀고 긴 터널> <토끼와 포수>
    <하늘텬따지> <프라이프라이데이> <거울보기> <이원승이 웁니다> <이원승이 원숭이>(연극).

張源宰
⊙ 47세.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런던대 연극학 박사.
⊙ 前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現 SNS 바른소리사람들 대표.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 진행.
⊙ 저서: 《증언연극사》 《Irish Influence on Korean Theatre》 《오태석 연극-실험과 도전의 40년》
    《우리는 왜 축구에 열광하는가》.
  사람들은 그를 피자집 사장, 성공한 사업가로 여긴다. 대학로에 자리한 나폴리 정통 피자집 디 마떼오가 그의 가게다. 혹자는 그를 한때 잘나가던 인기 절정의 개그맨으로 기억한다. 1982년 MBC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 10년 동안 내리 각종 고정코너를 맡아 대중의 사랑을 받던.
 
  정작 본인은 자기 자신을 연극배우라고 생각한다. 중·고 시절 지방 연극계의 유망주였으며 개그맨 데뷔 10년 후 연극무대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킨. 그 사이에, 부친의 세 번 출마 세 번 낙선에 이은 집안의 몰락, 방송 출연으로 잘나가던 시절의 이혼, 사업 실패로 인한 자살 시도가 있었다.
 
  지금은 피자집 한편을 소극장으로 개조해서 자신이 직접 출연하는 1인극의 장기공연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다. 2007년 6월부터 한 주에 한 번 공연하고 있으며, 총 10년 예정이다.
 
  또한 경기도 가평에 4000평 땅을 마련해 건물 한 동(棟)을 지었다. 장기적으로는 이곳을 극장과 숙소가 어우러진 ‘연극인 마을’로 꾸미려는 계획을 세웠다. 지역주민들을 출연시켜 ‘생활 속의 연극’을 공연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식당 지하의 공간은 극단 목화에 연습실로 그냥 내줬다. ‘무료는 아니고, 전기세는 받는다’며 웃는다. 이원승(李原丞·54) 이야기다.
 
  ―부친이 세 번이나 선거에 나갔다고요.
 
  “네. 4·19 후에 치러진 1960년 7월 총선 충청남도 참의원(參議員) 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섰다가 낙선, 1971년 4월 대선 직후 치러진 5월 총선에 야당인 국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 1995년 지방자치 서천군수 후보로 입후보한 뒤 낙선했죠.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과 아버지가 나란히 선 국민당 선거포스터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원승의 부친 이연직(李連稙·1932~ 2002)은 읍내에 영화관을 운영했고 밤나무 농장도 소유했던 지역 유지였다.
 
  “제가 한산 이씨(韓山 李氏) 문중입니다. 본명은 성규(星珪). 이일규(李一珪) 전 대법원장과 같은 항렬이죠. 돌아가신 소설가 이문구(李文求) 선생님은 제 바로 아래 항렬입니다. 충청남도 서천군이 제가 태어난 곳인데, 집성촌(集姓村)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19대손(代孫)이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도 우리 문중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죠. 저 어려서만 해도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님의 손자가 아직 살아계셔서, 한학(漢學)도 배우고 그랬습니다. 저희 문중은 항렬 따져서 나이에 관계없이 바로 말 높이고 낮추고, 글자 그대로 고색(古色)이 창연(蒼然)했어요.”
 
  그의 부친이 운영하던 농장은 대지 6만 평의 한산농장이다. 〈대한뉴스〉 973호 ‘밤나무 왕’ 편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읍내에 운영하던 극장은 한산극장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나폴리 정통피자 디 마떼오 대학로 본점 입구. 본인을 닮은 조형물 앞에서.
  ―영화는 원 없이 봤겠네요.
 
  “시골에서는 보통 한 프로그램을 5일에서 일주일 정도 상영했습니다. 새 영화 들어오면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볼 수 있는 만큼 다 봤습니다. 학교 갔다 극장으로 바로 가는 거죠. <돌아오지 않는 해병> <미워도 다시 한 번> <꽃피는 팔도강산>, 신영균 선생님이 열연하고 이순재 선생님이 조연으로 나오는 공군(空軍) 영화 <빨간 마후라>, 김승호 선생님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마부> 같은 영화가 지금도 기억납니다.”
 
  바로 윗집에 살던 ‘의사집 아들’이던 동네 형이 사진작가 김중만이다. 극장에서는 쇼도 공연했다. 지방공연을 내려온 양훈, 양석천 같은 당대의 스타들이 쇼단과 함께 그의 집에서 기숙하기도 했다.
 
  “차력, 마술… 황홀한 세계였죠. 막간극이 그렇게 재미있었고. <애꾸눈 박> 흉내 낸다고, 눈에다 세메다인이라는 접착제를 발랐다가 실명(失明)할 뻔하기도 했습니다.”
 
  ―선거에 한 번 떨어지면 집안에 남아나는 것이 없다는데, 세 번이나 낙선하셨으면 농장이나 극장은 어떻게 됐습니까?
 
  “다 남의 손으로 넘어갔죠. 남아나는 것이 있습니다. ‘빚’이 남습니다. 그 빚을 어머니가 다 갚았어요. 어머니 성함이 이복(李福), 외자 이름인데, 농장도 일은 아버지가 벌이고 마무리는 늘 어머니 몫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상론자였고 어머니는 현실론자였죠.
 
  ‘4년 잘 지내자고 평생을 노력하는 건 인생의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이 어머니의 지론이었습니다. 선거 결과가 나오는 밤이면 어머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짐승의 울음 같은, 크게 소리를 내면 더 커다란 짐승이 잡아먹자고 달려들지 몰라 안으로 삭이며 흐느끼는…. 어머니는 지금도 서천 고향을 안 갑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우리 집보다는 서천이 잘살아야 한다며 노선버스도 유치하고, 전기 없던 마을에 자가발전을 해서 전기도 나눠주고, 인맥으로 동네 사람들을 무수하게 취직시켜 주던 ‘공적인 삶’을 산 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일 년에 한두 번, 설날이나 추석 때만 집에 오던 분입니다. 정치활동 하느라고. 가정을 기준으로 하면 아버지가 미운데 마을 전체로 보면 훌륭한 분이고, 아버지를 미워하는 건 자식 된 도리가 아니니까 또 제 내면에 갈등이 생긴 것은 아닌가 싶어요. 아버지는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지만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 적어도 내 앞에서만큼은 웃고 떠들고 즐겁게 해주겠다는 생각을 저 모르게, 제 잠재의식이 했던 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연극에 소질
 
중앙대 졸업식에서 부모님과 함께. 아버지가 정치에 관심을 쏟는 사이 집안을 지켜내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한산초등학교 6학년 때 반장선거에서 떨어졌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어머니를 졸라 혼자 대전으로 유학을 떠났다. 누나와 누이동생은 고향에 남았다. 나중에 서천의 집과 농장이 다 넘어가고, 가족이 모두 대전으로 따라오는 이주(移住)의 서막이다.
 
  기독교계 미션스쿨인 대성중에 입학해서 지역의 명문교 대전고(大田高) 진학을 목표로 했다. 5대(大) 도시에서는 고교평준화가 이미 시행 중이었고, 6대 도시였던 대전은 비평준화 지역이었다. 1960년생은 대전 지역 마지막 고교입시 세대다.
 
  “대전고에 진학했더라면 제 인생의 방향도 바뀌지 않았을까요? 연합고사에서 아홉 문제를 틀렸는데, 대전고 커트라인이 딱 -9였어요. 동점자 처리규정에 따라 국민윤리 점수에서 뒤진 제가 낙방을 한 겁니다. 그래서 진학한 학교가 불교 계통의 보문고(普文高)입니다. 보현보살(普賢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앞 글자를 따 지은 교명(校名)이죠. ‘기타 하나 동전 한 닢’을 부른 가수 이재성이 고교 선배입니다.”
 
  ―그때부터 연극에 뛰어든 건가요?
 
  “직접적 계기는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학교 임원진 캠프입니다. 반장 부반장이 참가하는 학교 주최의 행사였는데, 레크리에이션 강사로 도완석이라고, 당시 숭전대 학생이 왔어요. 이분은 나중에 대전 지역 연극계의 버팀목이 됩니다. 제가 노래 부르고 노는 걸 보고 이분이 저를 오페레타에 조연으로 캐스팅하고, 대전 지역 대학축제를 순회하면서 공연도 함께했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공연장을 누볐습니다. 제 개인 레퍼토리는 배에다 얼굴을 그리고 상체는 기다란 모자를 쓴 것으로 처리한 후 짧은 바지를 입어 신체의 비례를 과장한 채 움직이는 ‘배꼽춤’이었고요.”
 
 
  “이 아이는 꼭 연극 하게 될 것”
 
  숭전대(崇田大)는 기독교 계통의 숭실대(崇實大)와 대전대(大田大)가 통합하면서 생긴 학교다. 지금은 다시 나누어졌는데, 통합을 유지하던 시절에 지금의 대전대가 생기는 바람에 숭전대 대전캠퍼스는 한남대(韓南大)로 교명을 바꾸었다.
 
  “고1 때 충남 교련경연대회 전체 응원단장이었습니다. 고교·대학 축제 등 각종 행사에 공연도 꾸준히 다니고. 팬레터도 받을 정도였다니까요. 처음 출연한 연극은 고1 겨울방학 때, 청림학교라는 야학 돕기 자선예술제에 구두닦이 역으로 출연했는데, 임채무, 한인수 같은 분들이 대전까지 내려와서 출연해 주셨던 잊지 못할 무대였습니다.”
 
  1976년 12월의 일이다. 도완석이 온갖 인맥을 동원해 서울의 방송계와 극단에 부탁을 했던 결과다. MBC 인기드라마 <수사반장>의 분장 담당이던 박수명이 “너, 수사반장 나오면 정말 잘하겠다”고 칭찬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화장실에서 대본을 외웠습니다. 어느 날, 변기 위에서 졸았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는 바람에 놀라서 깼어요. 아버지더군요. ‘정말 그렇게 연극이 좋으냐? 너를 이 길로 이끈 분을 찾아뵙고 싶구나’라고 말씀하셨어요.”
 
  공연 후 이원승의 부친이 도완석을 만난다. 대화는 신사적이었다.
 
  “고1인데, 연극만 하는 건 문화적 편식 아니냐. 성규가 연극을 그만했으면 좋겠다.”
 
  “아버님 뜻이 그러시다면 이제 그만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나중에 꼭 무대에 설 겁니다.”
 
 
  <빨간 피터의 고백>과의 만남
 
도완석(왼쪽)은 이원승을 연극의 길로 이끌었다.
  도완석은 지금도 자주 만난다. 대전에서 여전히 연극을 하고 있다. 하여튼 아버지 때문에 도완석이 연락을 끊으니 출연할 무대도 사라졌다. 연극이 너무나 하고 싶어서 자력갱생(自力更生)을 하기로 했다. 대전 MBC 성우(聲優)들이 조직한 청포도극회 공연계획을 입수하고 무조건 극단 문을 두드렸다.
 
  “1977년 10월 15일입니다. 김자림 작 오덕균 연출 <오호! 종달새>라는 작품에 주인공으로 출연했죠. 장소는 대전 가톨릭 문화회관이었고요.”
 
  이 작품은 두 가지 점에서 이원승의 인생에 변곡점으로 작용한다. 첫째, 성우들과 연습하는 동안 ‘방송 일’에 대한 구체적인 동경이 생겼다는 것. 둘째, 아버지의 반대가 누그러졌다는 것.
 
  며칠 후, 이원승은 운명의 또 다른 얼굴과 조우한다. 추송웅(秋松雄)의 <빨간 피터의 고백> 대전 공연이다.
 
  “이틀 4회 공연을 다 봤습니다. 평생을 뒤흔든 사건이었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어요. 공연이 끝나고도 움직이질 못했으니까. 추송웅 선생님이 숨을 멈추면 관객들이 따라서 다 숨을 멈추었습니다. 네 번 다요. 한 공간에서, 배우 한 명이, 이렇게 많은 사람을 집중시키면서 저토록 많은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구나. 이건 기막힌 공동체(共同體)다. 종교적 행사의 느낌을 주는 공연이다. 추송웅 선생님은 제사장(祭司長)이다. 그리고 나중에 어떻게든 이 작품을 꼭 하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명동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1977년 초연한 <빨간 피터의 고백>은 추송웅의 대표작이다. 원숭이의 움직임을 연구하러 몇 달간 어린이대공원 원숭이 우리로 출근하고, 폭우가 쏟아지는 날 사육사에게 사정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가 원숭이 동작을 따라 했으며, 이때 우연히 우리 앞을 지나가다 ‘사람’ 추송웅을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던 어느 연인의 뒷모습에서 영감을 얻어 동선(動線)을 완성했고, 제작비가 없어 아내가 ‘계주’가 되어 마련한 돈으로 공연한 전설의 연극. 적어도, ‘아이의 우윳값은 벌어다 주는 가장’이 되고 싶어 ‘두어 달 생활비만 남길 수 있으면 원이 없겠다’는 소박한 희망을 품고 시작한 작품. 반응은 기대 이상이었다. 폭발적이었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평소에는 연극을 거의 보지 않는 사람들까지 ‘원숭이’를 보겠다고 몰려들어 극장 입구에 분식집이 새로 생길 정도였다. 연극공연이 문화면을 넘어 신문 사회면과 9시 뉴스 메인토픽으로 올라왔다.
 
  이원승은 이 작품을 언젠가 반드시 공연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서두에 언급한 ‘10년 연속공연’ 프로젝트가 바로 이 작품이다. 원작자(原作者)는 카프카, 원제(原題)는 <어느 학술원에의 보고>, 이원승이 내건 제목은 <이원승이 원숭이>다.
 
  “제가 이 작품을 공연한다니까 추송웅 선생님 유족(遺族) 분들이 조심스럽게 연락해 왔습니다.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제목 자체가 선생님의 창작이고, ‘추송웅’ 하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제목이라, 제가 선생님을 예우하는 마음으로 제목을 다르게 붙였지요.”
 
  사실은 <이원승이 원숭이> 말고도, 추송웅에 대한 이원승의 오마주는 하나 더 있다.
 
  “고2 겨울방학 전에 교내행사로 칼라빈카 예술제를 기획하고 <백수노인의 고백>이라는 1인극을 공연했습니다. 제 나름 풀어쓴 고등학생 버전의 ‘빨간 피터’였지요. 칼라빈카는 불교 경전에 나오는 극락조(極樂鳥)입니다.”
 
 
  배재대 거쳐 중앙대 演映科 진학
 
  1979년 이원승은 배재대에 입학한다. 이미 지역사회에서 알아주던 연극인이던 그는 정성규 교수가 주재하던 한밭극회에 참여, 이재현 작 <엘리베이터>, 차범석 작 <장미의 성>, 도완석 작 <순교자> 등 한밭극회의 거의 모든 공연에 출연한다.
 
  ―그런데 왜 재수를 하고 이듬해(1980년) 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겁니까?
 
  “배재대 시절은 정말 행복했던 시절입니다. 연극에 파묻혀 살았으니까요. 어느 날, 큰물에서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제 두 번째 전학인 셈입니다. 2학기 때 등록을 포기하고 고2 때부터 손을 놓다시피 한 교과서를 파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대본 외우듯이 교과서를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하니 내용이 확 눈에 들어오던데요.”
 
  강주희, 정보석이 동기고 홍상수 감독과 강재규 감독이 1년 후배다.
 
  “그때 연극과 정원이 20명이었습니다. 계산을 했죠. 남자 10명, 여자 10명인데 연출과 스태프 전공인원 다섯을 빼고 나면 경쟁률이 100:1을 넘겠구나. 그렇다면 뚜렷하게 목표를 세우고 공연을 하자. 실기시험장에 들어서서 ‘심사하시느라 힘드실 텐데, 제가 좀 웃겨드리겠습니다’라고 하고 ‘동시통역 잉글리시 타잔’이라는 개그를 했습니다. 선생님들이 막 웃더니 ‘더 해보라’고 그러는 겁니다. ‘제가 바빠서 나가봐야 됩니다. 나머지 부분은 3월 2일 입학식 때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바로 나왔죠. 나오다가 돌아서서 ‘절 안 뽑으시면 후회하실 겁니다. 제가 예비고사에서 명문대 갈 점수를 받았거든요’라고 말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밤새 기획한 내용입니다. 심사위원 한 분이 점수를 확인하더군요. 점수가 좋았던 건 사실입니다.”
 
 
  지방 연극계
 
자신의 연출 데뷔작 <밧줄>의 개막공연 당일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원승.
  대학 1학년 때 5·18이 터졌다. 학교가 휴교하고 수업도 없어졌다. 그는 대전으로 내려가 한밭극회 일에 매달렸다.
 
  “3월에 이재현 작 <멀고 긴 터널>에 윤석진 역으로 출연했습니다. 지금은 유명배우가 된 남명렬도 천영환 역으로 함께 나왔죠. 겨우내 연습하고 중대 입학한 후에도 주말마다 내려와 연습하고 공연했습니다. 6월에는 역시 한밭극회가 제작한 박조열 작 <토끼와 포수>에 출연했고요. 전 이른바 ‘지방 연극계’에 애정이 많습니다.”
 
  ―지방 연극계는 분위기가 어떤가요?
 
  “그때만 해도 서울에서 대전까지 서너 시간이 걸리던 시절이었죠. 아침에 출발해서 일보고 당일로 돌아온다는 전제가 불가능한 겁니다. 대학로의 화제작 1인극 <염쟁이 유씨>의 유순웅씨가 매일 충청도에서 서울을 오가며 공연한다는데, 격세지감이죠. 경제발전이 서울과 지방 사이의 문화 간격을 줄인 겁니다.
 
  대전 지역의 잠재적 연극 관객이 상대적으로 소수(少數)이니 시장이 작잖아요. 당연히 전업(專業)배우도 나올 수 없죠. 어쩌다 서울에서 공연이 내려오면 그것이 큰 공부이자 앞선 문화를 접촉하는 기회였습니다. 대전 인근에 사는 교사, 대학생 등이 모여 진지하게 토론하고 몇 달 연습해서 하루나 이틀 공연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 사이의 설렘이 존재했어요.
 
  1982년 3월 13일에 시민회관 소강당에서 공연한 유진 오닐 작 <밧줄>은 잊을 수 없는 작품이죠. 저한테 연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거든요. 기획부터 연출에 출연에 장내정리까지, 모든 단원이 연극공연의 모든 부분을 함께 책임지고 만들어간다는 것이 지방 연극의 묘미입니다.”
 
 
  ‘남을 웃기는 일’에서 가치 발견
 
  ―1980년과 82년 사이에는 시간이 빕니다. 어떤 일을 했나요?
 
  “1981년 1월 6일에 입대, 육군 6사단 3중대 행정병으로 복무했습니다. 근무지는 강원도 철원, 병과는 포병.”
 
  대원들을 웃기면서 인기를 끌자 문선대(문예선전대)에서 데려가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사단에서도 공문을 보냈는데 중대장이 필수인력이라며 차출을 불허했다.
 
  “제가 포병교육 1위였거든요. 중대장께 찾아가 비장한 각오로 ‘사회 나가면 형님 같으신 분이 동생 한 번 봐주십시오’라며 부탁했는데 결국 안 됐어요.
 
  기가 죽어 있을 때 훈련을 나갔는데, 척후병으로 산에서 깃발신호를 보내는 것이 제 역할이었습니다. 선임병과 둘이 잠들었다가 훈련에 차질이 빚어졌고, 선임하사께 ‘그에 합당한’ 구타를 당했습니다. 절룩이면서 가다가 포에 무릎을 부딪혔는데 피가 엉길 정도의 부상이라 그 길로 후송을 갔죠. 진단은 무릎 연골파열. 수술받고, 철원사단 본부, 야전부대, 청평 후송병원, 대구 통합병원을 옮겨다니며 환자들을 웃겼습니다. 그것도 매일 다른 레퍼토리로.”
 
  이 무렵, ‘남을 웃기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현장에 ‘내가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1년 만에 의병제대로 병역 필. 지금도 ‘무릎나이’는 다른 부분에 비해 +10년이다. 제대 후 정 교수팀과 <길손>이라는 작품으로 충청남도 전역의 각 교회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1982년에 복학하고, 6월에 열리는 MBC 개그콘테스트를 준비했습니다. 아이디어 짜서 연습도 하고, 이성미, 김학래 두 분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의 콩트 부문을 집필하는 라디오 보조작가도 하고. 대회 결과 동상(銅賞)을 받았습니다. 대상(大賞)은 최병서, 금상(金賞)이 황기순이었죠. 처음으로 신문에 제 이름이 실렸습니다.”
 
 
  개그맨 데뷔
 
중학교 시절부터 이원승은 배꼽춤으로 인기를 끌었다. 배꼽춤의 분장을 하고 있는 이원승.
  신문을 보고 아버지가 중대 장학생 기숙사로 전화를 걸어왔다. ‘연극을 하기로 했으면 연극을 해야지, 왜 경로를 이탈하느냐’고 꾸짖고 그로부터 2년간 연락을 끊었다.
 
  “지금 강원문화재단 이사장으로 계시는 신종인 PD의 도움으로, 임예진, 이택림 두 분이 사회를 보던 <영 일레븐>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에 데뷔했습니다. 데뷔 동기가 이경규, 김정렬, 바로 위 선배가 이홍렬입니다.”
 
  출연 3주 만에 고정출연자로 승진했다. 소싯적부터의 필살기였던 배꼽춤, 그리고 ‘햇볕은 쨍쨍하고 해 뜰 날 돌아지 도라지 백-두산 뻗어내려도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안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하는 식으로 이어지는 끝말잇기 메들리가 레퍼토리였다.
 
  “아이디어가 샘솟던 시절이었죠. 이홍렬과 진행한 ‘무성영화 변사’에서는 슬로비디오, 다시 보기 기법을 활용해서 연기를 했고 종각부터 동대문까지 음악다방 DJ들과 다 교분을 트고 팝송가사 중에 우리 말처럼 들리는 부분을 찾아 코너를 꾸몄죠. 비틀스의 ‘이매진(Imagine)’은 ‘임예진 얼굴 이뻐’, 올리비아 뉴튼 존의 노래 가사는 ‘냄비 위에 밥이 타’ 하는 식으로. 연영과 학생이 장학생 기숙사에 들어가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는데, 하도 전화가 걸려와서 쫓겨났습니다.”
 
  ―학교는 꾸준히 다녔나 봐요?
 
  “4년 다니고 졸업했습니다. 여름학기, 겨울학기 다 듣고 학점을 채웠거든요.”
 
  방송 스케줄로 정신이 없었을 텐데도 학업을 제 시간에 마쳤다는 건 훌륭한 일이다. 일을 미루지 않는 그의 성격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개그 말고 드라마, 영화도 찍었습니다. 이규형 작 캠퍼스드라마 <햇빛 사냥>에서는 최명길씨와 함께 출연했고, 박철수 감독이 연출한 단만극 <혜미의 서울>에서는 주인공을 맡았죠. 남성훈, 변희봉 선생님과 함께 촬영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혜미의 서울>은 《조선일보》 문화면에 정중헌 기자가 ‘참 신선했던 드라마’라는 평을 따로 썼을 만큼 화제를 모았던 작품입니다.”
 
  영화는 김웅천 감독의 <춤추는 청춘대학> <김치국 일병> <돌아온 손오공> 등 청춘물, 코믹물을 주로 찍었다. 그가 조연으로 나온 <내 사랑 짱구>는 고등학생이던 김희애의 데뷔작이다. 주연은 손창민.
 
  “사실은, 좀 더 묵직한 영화 제의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혜미의 서울>이 방영되고, 배창호 감독이 시나리오 들고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당대 최고 인기감독이 약속도 없이 찾아오셔서 신종인 PD가 깜짝 놀랐죠. 저는 그저 황송했고.”
 
  <고래사냥>에서 김수철이 맡았던 역이 막판에 그를 비껴갔다. 하지만 방송 운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코미디 극장>에선 지금 〈싱글벙글 쇼〉를 진행하는 김혜영과 주연을 맡았고 <청춘만만세> <폭소대작전> <일요일 일요일 밤에> 등에서도 주요 멤버로 활동했다. 라디오 <두 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의 주말 고정게스트이기도 했다.
 
  ―제 기억으론 광고도 찍었던 것 같은데, 그 정도 활동이면 수입도 상당했을 듯합니다.
 
  “롯데 옥수수바 광고를 찍고 중고 브리사 승용차를 구입했죠. 한화제약 감기약 광고도 찍고…. 84년 음악다방 DJ를 시작으로 86년부터 90년까지 전국의 호텔 디스코텍 DJ로 활동했습니다. 8시50분 명동 마이하우스, 9시 이태원, 9시40분 크라운호텔, 11시 캐피탈호텔 하는 식으로 일정을 짜서 30분 단위로 디스코텍을 도는 겁니다. 하루에 여덟 군데를. 롯데호텔, 리버사이드호텔은 4년을 다녔어요. 돈을 쓰고 싶어도 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짠돌이’ 소리를 들은 이유
 
  그쪽 업계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80년대에 스스로 판을 틀며 리듬을 살려서 즉석 믹싱을 하며 두 곡을 연결하던 DJ는 딱 두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이원승, 다른 하나는 SM의 이수만이다.
 
  “피자집 손님 가운데 아직도 그때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 계세요. ‘우리 부모님은 지금 완전히 속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위해서 방방 뜹시다!’라는 멘트를 기억하는 분도 있고. 남들과 다르게 하고 싶어서, 미군부대를 통해 12인치 DJ전용 판을 구해서 가지고 다녔죠. 보통 판들이 4000원 할 때 DJ판은 장당 가격이 3만5000원~7만원이었습니다. 이때의 흔적은 디 마떼오 남이섬 지점에 4만5000장의 LP로 남아 있습니다.”
 
  이원승은 왜 그렇게 돈을 모았을까? 당시 방송가에선 이원승이 ‘짠돌이’다, 점심때 한 번도 밥을 안 산다, 집들이라고 초대해서 갔더니 김밥만 주더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주간지에 이와 비슷한 기사가 실린 적도 있다.
 
  “점심 얘기는…. 이런 얘기까지 해야 되나? 85년에, 영등포여고 앞에 선물가게를 하나 차렸습니다. 여섯 평이었어요. 제 전세방 보증금 300만원 빼서 보증금 120에 인테리어비 100만원 쓰고 80만원 남은 돈으로는 물건 갖다놓았습니다. 제가 개그맨으로 이름이 좀 알려질 무렵이라, 첫날 매출액이 50만원을 넘어가더군요. 그때, 아버지 선거 빚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군대 갈 때, ‘빚쟁이들이 설마 군대까지 찾아오지는 않겠지’라며 후련해할 정도였으니까요. 정말로 먹을 쌀이 부족해서, 어머니는 제가 점심 먹으러 집에 가지 않으면 혼자서 그냥 굶었어요. 매일매일 집에 가서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입니다. ‘어머니가 믿을 건 남편이 아니라 아들인 나다’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서당개 3년이면 풍월 읊는다’
 
개그맨 시절. 가운데가 김명덕, 오른쪽이 최병서다.
  앞선 두 번의 선거 빚은 어머니가 갚았고, 95년 선거 빚은 이원승이 갚았다. 일가친척한테 정보수집을 부탁하고, 그야말로 돈가방을 들고 빚이 남아 있는 서천의 약국, 식당, 가스집을 순회하며 ‘현찰’로 외상장부를 ‘깠다’.
 
  “영등포 가게는 저희 식구 밥줄이기도, 개그맨들의 아이디어 회의장이기도 했습니다. 이경규, 김정렬, 황기순, 강석, 탤런트 김주승 등이 단골 출입멤버였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가끔 빨래도 해주고. 돈을 벌어 그 가게 건너편 집으로 전세를 가고, 또 돈을 벌어 그 옆 67평짜리 2층 건물을 8300만원에 구입했습니다. ‘집들이 사건’의 현장이죠. DJ 일을 하니까 동료들이랑은 밤에 같이 어울릴 일이 드물었어요. 처음에 25명이 오기로 해서 음식을 35인분 마련하고 기다렸죠. 그날따라 녹화가 일찍 끝나서 PD도 오시고, PD가 온다니 다들 그리로 가자고 해서 손님이 갑자기 50명으로 불어난 겁니다. 나중에 오신 분들은 진짜 김밥만 드셨어요. 다 제 불찰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초 그의 인생설계는 ‘개그맨 10년, 이후엔 연극배우’였다. 92년 어느 날, 연출가 강영걸(康英傑)을 무작정 찾아갔다. <불 좀 꺼주세요>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로 정상을 달리던 강영걸은 이원승을 만나주지 않았다.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했다. ‘연예인의 객기가 아니냐’기에 ‘개그맨은 연극을 잉태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답했다. ‘정말 방송 접고 할 거냐?’기에 ‘최소 3년은 방송 안 하겠다’고 했다. ‘왜 3년이냐?’ ‘서당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으니까요.’ 연출가가 폭소를 터뜨렸다. 이원승은 그렇게 연극으로 돌아왔다.
 
 
  오정혜와 <하늘텬따지> 공연
 
  “처음엔 <빨간 피터의 고백>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어요. 강영걸 선생님이 ‘지금은 때가 아니다. 잘해봐야 추송웅 아류(亞流)고 잘못하면 평생 짐으로 남는다. 일단은 이 작품을 해보자’고 하시며 김영무 작 <하늘텬따지>를 권해주셨죠. 불교적인 바탕을 깐 작품인데, 한 소년이 유산을 얻기 위해 목포에서 속초까지 무전여행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1992년 7월 1일 바탕골 소극장에서 막을 올린 <하늘텬따지>는 정말 3년을 롱런했다. 미국 순회공연도 다녀올 정도였다. 거지라고 놀림받고, 모기에 뜯기고 개에 쫓기고, 여러 오해를 받아가며 길을 걷는 연기를 하며 이원승은 메마른 논에 물이 차오르는 듯한 충족감을 느꼈다고 한다. 배경음악을 작곡하고 라이브 기타연주를 들려주던 사람은 지금은 고인이 된 김해영, 고수(鼓手)로 나와 약장사도 하고 북도 치며 창을 들려주던 배우는 오정혜다.
 
  “김소희(金素姬) 선생님 제자인데다 중대 후배라 캐스팅했는데, 너무 열심히 해서 제가 감동할 정도였습니다. 임권택 감독님, 이태원 사장님이 연극 보시고 신라호텔 중식당으로 저를 초대해 주셨는데, 영화를 같이하자고 하시더군요. 저 대신 오정혜를 추천했죠. 그 작품이 바로 <서편제>입니다. 저한테 제의한 역할은 김규철씨가 연기한 오정혜의 남동생 역인데, <고래사냥>도 그렇고 <서편제>도 그렇고, 그때 그 역을 맡았더라면 제 인생의 방향이 지금과는 달라졌겠죠?”
 
 
  극장 마련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말대로, 연극으로 돌아오니 극장을 갖고 싶었다. 토탈갤러리 문신규 회장 댁에서 매일 새벽 다섯 시 반부터 일주일을 기다렸다.
 
  ―그 자리가 바로 지금 디 마떼오 피자가 들어선 건물 아닌가요?
 
  “맞습니다. 저한테 조언도 많이 해주고 ‘이 건물을 이원승에게 13억에 팔기로 했다’는 각서도 써주셨습니다. 나중에 부동산 가격이 많이 올랐는데도 그 가격 그대로 넘겨주었어요. 사실 각서가 법적인 효력이 있는 문서가 아닌데, 저한테 신의를 지키신 겁니다.”
 
  융자받고 가진 것 다 팔아 극장을 마련했다. 지하에 소극장이 둘, 1, 2층은 어린이집, 3층은 살림집이었는데 영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제작자를 겸했죠. 94년에 박완서 선생님을 찾아뵙고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을 연극으로 해보겠다고 말씀드리니 ‘자식같이 아끼는 작품이다. 어찌 이리 나를 흔드시나’고 하시더군요. ‘아들을 맡기는 심정으로 허락해 달라.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씀드리고 700만원에 판권을 획득했습니다. 강부자(姜富子) 선생님 1인극이었는데 낙선 후 칩거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도 보러 오시고 정몽준, 이주일, 아무튼 굉장히 많은 분이 다녀가셨습니다.”
 
  ―다른 공연도 꾸준히 했죠?
 
  “연극 제작비와 극장 운영비를 대려고 밤무대에 다시 섰습니다. 기억나는 작품이라면… 김덕수 사물놀이패 초창기 멤버인 이광수 선생 모시고 <이광수와 노름마치>라는 공연을 6개월간 했습니다. 그 무대의 태평소 연주자가 당시만 해도 무명이던 장사익입니다. 제2관의 대표작은 박은희 구성의 교육극 <거울보기>입니다. 제가 교사 역으로 출연했죠. 학부형, 학생들이 주 관객이었는데, 공연 후 교사 역을 맡은 제가 무대에 올라 ‘어떤 역을 맡은 배우와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고 묻고 즉흥공연을 하나 더 하는 겁니다. ‘너, 왜 집 나간 거야?’ 묻기도 하고, 때로는 한 시간 이상 뒷공연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최현묵 작 강영걸 연출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구?>는 3류건달과 술집여자가 동반 사망하는 내용이다. 연극 내용처럼 이원승은 실제로 추락하고 있었다. 흥행은 실패했고, 극장운영 적자는 꾸준히 증가, 연극에만 매진하는 가장을 두고 이혼이야기도 나오기 시작했다.
 
 
  피자집 열어… 17번 피자집 찾아온 JP
 
디 마떼오 대학로 본점. 지금은 건물 전체가 이원승의 소유다.
  “90년 1월부터 세 번 만나고 프러포즈, 열 번째 만남이 결혼식이었습니다. 적어도 결혼 이후에 얻은 명성과 재산은 배우자에게도 50%의 권리가 있는 것이겠죠? 그때는 왜 그걸 몰랐을까요.”
 
  흔들리고 있을 무렵, 〈KBS 도전 지구탐험대〉에서 연락이 왔다. ‘G7 회의 때 클린턴 대통령이 먹었던’ 나폴리 유명 피자집 수련 8박 9일 일정. 전생(前生)이 있다면 나폴리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닷새가 지나고, 디 마떼오 사장께 진지하게 청했다. ‘이 일을 하고 싶다’고. 반응이 없었다. 정말 하고 싶었다. 6월 29일에 귀국해서 약속했던 공연을 마치고, 그동안 활동했던 자료 스크랩을 만들어 7월 17일 다시 나폴리로 날아갔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20일에 열린 그 집안의 결혼식. 집안 어른이 ‘저 사람 누구냐’고 물었고 ‘한국에서 온 코미디언이다. 웃겨드리겠다’고 대답한 뒤 손짓 몸짓으로 무려 두 시간 동안 동네 사람들을 다 뒤집어놓았다. 집안 어른은 ‘저런 사람과 동업을 해야 한다’고 힘을 보태주었다. 그 길로 바로 계약을 마치고 98년 1월 9일에 식당 문을 열었다.
 
  ―피자 드시러 오셨던 분 중에 가장 인상 깊은 손님은 누구입니까?
 
  “현직 대통령 시절의 MB가 오신 적도 있지만… 단연 JP죠. 열일곱 번 오셨어요. 처음에 총리실이라고 전화가 오기에 장난전화인 줄 알고 ‘저는 동대문 경찰서 이성규 형사입니다’라며 바로 끊었거든요. 1998년 6월의 일이죠.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열심히 선거운동을 해서 바닥을 다져놓아도, 단 한 번의 방문으로 전세를 뒤집고 가셨던 분. 아버지의 낙선(落選)에 가장 많은 역할을 하신 분이었으니까요. 저한테는, 끊이지 않는 기침 가래 천식을 일으키는 분이었다고 할까요.”
 
  ―왠지 그냥 평범하게 맞이했을 것 같지는 않네요.
 
  “맞습니다. 작전을 짰죠. 최대한 당당하게 인사한다.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양다리 벌리고 한 손으로 악수했습니다. 버릇없다고 할까 봐 이탈리아 주방장 옆에 세우고 ‘봉 죠르노’라고 이탈리아 말로. 주변에서 눈총을 줬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열일곱 번을 오셨다? 그걸 다 일일이 기억하나요?
 
  “매상장부를 보면 다 나옵니다. 국민회의에서 의원 세 명 꿔준 날도 자민련 의원들 다 데리고 오셨어요. JP가 ‘이 사장, 왜 머리를 깎았소?’ 하시기에 ‘자살을 결심했던 서른아홉 살 초심(初心)을 잃지 않으려고 그랬습니다’라고 답했죠. 분위기가 싸늘해지는 겁니다. 아차 싶었어요. 그날 아침 신문 기사 제목이 ‘초심 잃은 세 국회의원’이었던 것이 생각나서. JP가 껄껄 웃더니 ‘우리 정치인들 다 머리 깎아야 돼요. 초심 갖고 있는 정치인이 없어요. 내가 그래요’라며 분위기를 수습하시더군요. 그릇이 크신 분이구나, 하고 감동했습니다.”
 
  이원승은 그 뒤로 JP가 올 때마다 뛰어나가 두 손을 잡고 고개 숙이며 인사를 드렸다. 매상을 많이 올려주던 고객이었기도 한 까닭이다.
 
  “정계 은퇴 무렵, 제가 한번 모시고 싶다고 전화를 올렸습니다. 그때 처음 아버지 얘기를 했죠. 공주고 후배라고, JP 때문에 선거에 떨어지셨다고. 처음 오셨을 때 일부러 그랬다고. 식당을 안 했더라면, 그분에 대해 저만의 편견을 가지고 살았을 것이라고 다 말씀 드렸습니다.”
 
 
  자살 기도
 
이원승의 필생의 꿈 모노 드라마 <이원승이 원숭이>.
  친구들 돈을 빌려서 문을 열었는데 IMF가 터졌다.
 
  “3개월간 파리 날렸어요. 유럽식 피자에 대한 인식도 부족해서, 손님 중엔 화를 내고 돌아가는 분도 계시고. 아내는 저랑 불화 끝에 가출하고, 빚은 쌓이고. ‘아, 이제 인생에서 퇴장할 때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유서 쓰고, 3층 발코니에 앉아 투신하기 전에 가장 많이 도움을 준 친구에게 전화를 했더니 ‘야, 코미디언, 생쇼하지 말고 이따 일곱 시 반에 만나. 끊어 임마. 나 바빠’라는 겁니다. 돈 얘기가 나왔거나 진지하게 받았으면 바로 뛰어내렸을 겁니다. 정말,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습니다.”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그때부터 삭발을 하고 TV와 전화기를 없앴다. 여기가 나의 수도원(修道院)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도를 닦듯이 빚을 갚고 위자료 보내고 미친 듯이 일했다. 은행 빚도 다 갚고 지금은 건물 전체가 그의 소유다. 그가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는 연출가 오태석(吳泰錫)과의 만남도 연극적(演劇的)이다.
 
  “피자가게 열기 전이죠. <프라이 프라이데이>라고, 로빈슨 크루소의 표류기를 흑인 노예 프라이데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입니다. 정진각 선배가 출연했는데, 중간에 ‘종교가 없다면 야만인이야’라는 대사가 있거든요. 어느 날 나무 십자가에 입술을 부딪혀서 이가 부러지고 피가 솟는데, 피를 혀로 핥아가며 공연을 계속하시는 겁니다. 부러진 이는 발로 밟고 입술을 오므려 가며 정확한 발음으로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제가 막 울었습니다. 나중에 이도 해드리고.
 
  그 일 있고 몇 년 후에 같은 문중인 동성제약 이선규 회장님 꿈에 모친이 나오셔서 ‘나를 위해 공연 한 편 올려다오’ 그러셨답니다. 저한테 부탁을 하기에, 정진각 선배님이 오태석 선생님 수제자시잖아요? 바로 연락드려서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1인극을 각색해서 <이원승이 웁니다>로 제목을 바꾸고 1년간 공연했습니다.”
 
  오태석은 이 공연 이후 이원승을 불러 1년에 한 번씩 이렇게 말했다.
 
  “연극은 가난한 예술이다. 그래서 돈을 벌면 거의 다 무대를 떠난다. 너는 돈을 벌었는데 무대로 돌아왔다. 너의 성공이, 인생 자체가, 연극 하는 후배들에게는 또 하나의 희망이다. 네가 주변 사람들에게 꿈을 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묵직하고 값나가는 배우로 살고 싶다”
 
<이원승이 원숭이> 포스터.
  마침내 2007년, 이원승은 피자집 일부를 소극장으로 개조하고 오태석 각색 연출로 ‘빨간 피터의 고백’ <이원승이 원숭이>를 무대에 올린다.
 
  “첫날 공연은 울면서 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내 인생을 달려왔다’는 감회가 밀려와서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2002년, 피자 말고 파스타도 해보자고 생각해서 성악 전공 여학생을 이탈리아어 강사로 모셨다. 방학 때만 일하는 3개월 계약. 그 계약은 피차 간에 종신계약으로 발전했다. 여학생은 이탈리아로 건너갔고, 이원승은 매일 이탈리아로 국제전화를 걸었으며 몇 시간을 쉬지 않고 이야기했고, 로마의 성당 앞에서 우연히 길을 멈추고 “경신씨, 혹시 압니까? 코엘류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듯이, 누군가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준비를 하고 있다고. 지금 종소리가 울리고 비둘기가 날아오르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하는 바로 그 순간에 마법처럼 정말로 종이 울려서 자연스레 준비해 간 반지를 건넸고, 귀국해서는 “이번 생애가 아니라면 다음 생애에서는 꼭 당신과 함께 살고 싶다. 지금까지 당신과 함께한 시간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는 문장으로 결혼 승낙을 받았다. 2002년 2월 3일 월요일 결혼, 주례는 오태석. 이원승은 수요일에 연극을 공연하고 그의 아내는 금요일에 노래를 한다.
 
  ―이원승에게 연극이란 무엇입니까?
 
  “꿈이죠. 저 스스로가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고 할 때 가장 앞에 내세울 수 있는 부분. 피자가 잘돼서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하기 위해 피자를 굽는 겁니다. 앤티크 가구처럼, 묵직하고 값나가고 그렇다고 화려하게 드러나지도 않는 연극배우로 평생을 살고 싶습니다.”
 
  ―좋은 배우란 어떤 존재입니까?
 
  “관객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아닐까요. 관객이 행복하면 저도 행복해지니까, 그런 총체적 감정의 교류를 잊지 못해 연극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태석 선생님의 권유로 <이원승이 원숭이> 공연을 마치고 매번 관객들과 인터뷰를 합니다. 10년 동안의 자료가 쌓이면, 관객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의미있는 통계를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식당 2층에 꾸민 소극장. 객석 33석의 아늑한 공간이다. 이원승은 이곳에서 <이원승이 원숭이>를 10년간 공연한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꿈이 있다면?
 
  “가평에 연극마을을 만드는 프로젝트가 제 필생의 과제입니다. 디 마떼오 고객 분들 덕분에 마련한 4000평 땅이 근거지입니다. 한쪽에서는 치즈도 만들어서 자립경제를 실현하고 한쪽에서는 연극을 하는 거죠. 가평 군내 20개 학교에 연극반을 만들어서 오는 10월에 교육장배 연극경연대회를 합니다. 9월에는 마을 주민들을 배우로 출연시키는 산대연극제(山臺演劇祭)를 개최할 생각입니다. 명필 한석봉이 가평군수였거든요. 대동법(大同法)의 창시자 김육도 가평 분이고, 호명산 호랑이 이야기, 6·25 때 한 동네 사람 300명이 참전하고 그 치열했다는 가평전투를 겪고도 단 한 명의 부상자와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는 미국 유타주 인구 3만의 도시 ‘시다 시티(Cedar City)의 기적의 귀환’ 등 가평 이야기를 연극으로 꾸미는 겁니다. 연극이 힐링도 되고 오락도 되고 삶 자체도 되는 그런 연극 마을을 꼭 만들고 싶습니다.”
 
  그는 이혼 이후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삶이 늘 희망하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절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찾아왔던 고난과 은인들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했다. 다섯 살 때 경대의 돈을 훔쳐 동네 아이들과 영화를 본 날, 눈 날리는 마당으로 밥상째 아들을 집어던졌고, 열 살 무렵 운전을 해본다고 자가용을 논두렁에 처박았을 때 ‘다치지 않았니? 다음부턴 그러지 마라’라며 뒷말이 없었으며, 밖에서는 공인(公人)이었으되 집안일은 돌보지 않았다는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성공을 지하(地下)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계실 것이라는 느낌이 문득 들었다. 이원승은 인터뷰 내내 유쾌한 사업가였고 배우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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