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탐구] 鄭道傳 연구의 선구자 韓永愚 교수가 말하는 鄭道傳 : 월간조선

정도전(鄭道傳)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KBS는 연초(年初)부터 대하사극 <정도전>을 방영하고 있다. 출연진의 훌륭한 연기에다 요즘의 정치를 떠오르게 하는 대사(臺詞)들도 일품이어서 모처럼 보는 정통대하사극이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MBC에서도 <기황후(奇皇后)>의 후속작으로 정도전을 소재로 한 <파천황(破天荒)>이라는 사극을 준비하다가, 현재 보류한 상태라고 한다.

소설가 김탁환씨는 2월 초 두 권짜리 역사소설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을 내놓았다. 이 책은 3월 14일 현재 교보문고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 15위에 올라 있다. 이 책 외에도 ‘정도전’을 제목이나 소재로 한 역사소설들이 적지 않다. 역사/문화 부문에는 정도전 관련 서적이 10위 안에 세 권이나 올라 있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개정판·조유식 지음)이 4위, 만화책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1:개국》이 5위, 《정도전과 그의 시대》(이덕일)가 8위에 올라 있다. 교보문고 광화문점 등 대형서점에 가보면 정도전에 대한 책들만 모아 별도의 코너를 꾸며 놓고 있다. 이 코너에는 《삼봉집(三峯集)》《불씨잡변(佛氏雜辨)》 등 정도전의 저작도 함께 놓여 있다.

정도전과 관련한 베스트셀러들을 보면 독자의 입맛이 조금 부박(浮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응당 주목받아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는 책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한영우(韓永愚)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 그 책이다. 한 교수가 1999년 지식산업사에서 펴낸 이 책은 지난 2월 말 표지를 새로 해서 13쇄가 나왔다. 이 책은 정도전의 생애와 사상을 종합 정리한 책이다. 1973년에 《정도전 사상의 연구》를 낸 이래 평생 정도전 연구에 매진해 온 한 교수의 역작(力作)이다. 정도전과 관련한 드라마나 대중역사서, 소설 등은 이 책에 빚지고 있는 바가 크다. 한 교수의 책을 현대 독자의 입맛에 맞게 잘 버무린 비(非)전공자의 책들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지만, 평생 정도전 연구를 해온 노(老)역사학자의 ‘원조(元祖) 정도전’은 별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서울 낙성대 인근 아파트에 있는 한영우 교수의 연구실 호산재(湖山齋)를 찾아가 정도전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정도전 연구의 선구자는 최근 불고 있는 정도전에 대한 관심에 무척 기분이 좋은 듯했다. “우연히 얼마 전 교수님이 번역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올재 펴냄)을 읽었다”고 하자, 한 교수는 “그 책을 다 읽었어요?”라면서 반가워했다.

“조선 500년을 지탱한 힘 찾으려 연구 시작”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진 鄭道傳.

―정도전에 주목한 이유가 있습니까?

“전공이 조선시대사입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에는 국사(國史)교과서에 ‘조선 건국의 3대(大) 국시(國是)’라는 것이 실려 있었어요. 이병도(李丙燾) 선생이 주장했던 것인데, 농본주의(農本主義), 억불숭유(抑佛崇儒), 사대주의(事大主義)를 말합니다. 과연 이게 옳은 얘긴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과연 그런 나라가 어떻게 519년이나 지탱할 수 있었을까? 조선을 500년 넘게 지탱할 수 있었던 다른 요인들을 찾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조선 건국의 주역인 정도전부터 시작하게 되었죠. 이전까지 정도전은 고려왕조를 배신했고, 태종 이방원(太宗李芳遠)에게 맞서다가 죽은 반역자, 사대주의를 들여온 사람이라는 인식 때문에 평가가 대단히 나빴지요.”

―정도전에 대해 연구해 보니 어떤 사람이던가요.

“제가 알고 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그를 사대주의자로 보는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그의 사대주의는 전략적(戰略的)인 것이었어요. 명(明)나라가 고려 말 요동(遼東)정벌에 나섰던 이성계에 대한 의심 때문에 조선을 외교적으로 승인하지 않는 데 대한 대응이었던 것이죠.

다음은 민본주의(民本主義)입니다. 정도전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백성을 사랑하는 모습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벼슬아치는 어떤 사람인가? 세금을 먹고 사는 사람이다. 세금은 누가 내는가? 백성이 낸다. 그럼 벼슬아치는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해야 하는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 그 뒤에는 민본주의를 실행하기 위한 강령으로서 권력구조에 대한 이야기가 죽 이어집니다.”

한 교수는 “‘억불정책’으로 이어지는 정도전의 불교비판도 민본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려 말 종교 본연의 자세에서 벗어나 부(富)와 권력을 누리면서 백성을 괴롭히던 불교를 개혁하기 위한 일종의 종교개혁이었다는 것이다. 한 교수는 “정도전을 연구하면서 보면 볼수록 정도전에게 반하게 되었다”면서 “결론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는 밖으로는 주체적인 자주외교, 안으로는 민본주의를 한 나라였다. 그것이 조선왕조가 500년을 가게 한 힘이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鄭道傳 통해 스트레스 풀었다”

한영우 교수가 펴낸 정도전 관련 책들.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서문을 보니, 유신을 전후한 시기 젊은 역사학도의 현실에 대한 고민을 느낄 수 있더군요. 당시 시대상에 대한 불만을 정도전을 통해 풀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까.

이 질문에 한 교수는 껄껄 웃었다.

“지금은 박정희(朴正熙) 전(前) 대통령에 대해 그때와는 다르게 평가하고 있지만, 당시는 나도 혈기왕성한 30대 때였으니까…. ‘500년 전 조선은 이런 의식을 갖고 개국했는데, 지금 우리는 이게 뭔가? 독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은 그때만도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스트레스를 정도전 연구를 통해 푼 것이죠.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흥분할 일은 아니었어요. 허허허.”

―정도전의 재상 중심 정치체제를 강조한 것도 박정희 정권의 독재(獨裁)에 대한 비판의식의 소산 아닙니까.

“재상 중심 체제를 통해 왕의 독재를 견제하려 한 정도전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비판해 보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정도전의 주장은 조선시대 당시로써도 의미가 있는 것이었어요. 군주세습제 아래서 항상 똑똑한 임금이 나와 선정(善政)을 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반면에 재상은 밑에서부터 시작해서 단계적으로 올라간, 상대적으로 검증된 사람이죠. 능력이 검증된 재상이 정치를 하는 것은 민본정치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한영우 교수는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패해 죽었지만, 그의 정신은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그대로 반영된다”고 말했다.

“《경국대전》을 보면, 왕의 권한에 관한 내용은 없지만 의정부(議政府), 즉 재상의 권한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어요. 물론 정치현실은 다르죠. 태종이나 세종 같은 똑똑한 왕이 보기에는 마땅치 않겠지요. 태종이 정도전을,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를 친 것은 재상 중심 체제로 가다간 이(李)씨 왕조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경계심 때문이었죠. 하지만 국왕이 신통치 않을 때에는 다시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재상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家系 콤플렉스

한영우 교수에 의하면, 정도전은 가계(家系)에 대한 콤플렉스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은 지금의 법무부 장관 격인 형부상서(刑部尙書)까지 올랐고 《고려사》에 청백리(淸白吏)로 기록될 정도로 훌륭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원래 대대로 경상도 봉화에서 향리(鄕吏)를 지낸 한미(寒微)한 집안이었다. 귀족 중심의 고려왕조에서는 명함을 내밀기 어려웠다. 모계(母系) 쪽으로는 더 심각한 하자(瑕疵)가 있었다. 김전이라는 승려가 자기가 데리고 있는 종의 아내와 정(情)을 통해서 낳은 딸이 정도전의 외할머니였던 것이다. 이 사실은 후일 정몽주(鄭夢周) 등이 혁명을 추구하는 정도전을 탄핵할 때 빠짐없이 꺼내든 단골 메뉴가 된다.

―정도전은 자신의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많았던 사람이군요.

“사람이 제일 서러운 것이 출신 때문에 차별받는 것입니다. 나는 충남 온양읍(邑)에서 초·중·고를 다 나온 촌놈이에요. 서울대에 와보니 읍에서 온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물론 신분제는 없어진 시대에 살고 있지만, 지방 출신의 서러움을 많이 느끼면서 살았어요. 학자의 길을 걷는 동안 인간관계에서 어려움도 많이 겪었고…. 그러니 정도전의 경우는 오죽했겠습니까? 출세한 아버지 덕분에 개경으로 올라와 벼슬살이를 하고 있지만, 귀족, 권문세가(權門勢家)들이 중심이 된 고려체제 아래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영우 교수는 “조선 건국의 주체들 가운데는 정도전처럼 혈통이나 출신 지역 때문에 차별받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내가 조준(趙浚), 남은(南誾) 등 조선개국공신들에 대한 논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서출(庶出)이 많아요. 당시 첩(妾)은 대개 노비 출신인 천첩(賤妾)이 많았어요. 부계(父系)로는 집안이 좋은데, 모계로는 문제가 많은 것이죠. 이성계도 당시 무장(武將)으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사람대접을 못 받는 축에 들었습니다. 고모는 여진족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습니까? 반면에 이들과 맞섰던 정몽주나 최영(崔瑩)은 다 집안이 좋았습니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정치적 대결의 이면(裏面)에는 이런 요소가 많이 작용하고 있어요.”

“이성계의 四不可論은 정도전의 작품일 것”

태조 이성계.

드라마 <정도전>에도 나오지만, 정도전은 우왕(禑王) 원년(元年)인 1395년, 영접사(迎接使)가 되어 북원(北元)의 사신을 접대하라는 명(命)을 거부했다가 이인임 등 권신(權臣)들에게 밉보여 귀양을 간다.

전라도 나주 회진현 거평부곡에서 2년, 고향인 경상도 봉화에서 4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는 권문세족의 탐학(貪虐)과 왜구(倭寇)의 침략으로 고통을 받는 민초(民草)들의 삶을 체감(體感)한다. 《삼봉집》에 실린 시문(詩文)에는 물론이고, 《조선경국전》의 토지·조세제도에 대한 대목에서도 고려 말 민초들의 어려움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후 정도전은 한양 삼각산에서 서당(書堂)을 열어 생계를 이어가지만, 그를 미워한 권세가들의 횡포로 정착하지 못하고 김포, 부평 일대를 떠돌아야 했다.

1383년 정도전은 이성계의 함주(咸州) 군막(軍幕)을 찾아간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정예 군사들을 보고 “참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라고 말한다. 이성계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정도전은 “동남방의 근심인 왜구를 칠 수 있다는 뜻”이라고 둘러댄다. 하지만 실은 쿠데타를 종용(慫慂)하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정도전은 1383년 함주 군막에서 이성계와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까요.

“그전에도 서로 이름은 듣고 있었겠지만, 직접 만나서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눈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이후 이성계가 이인임을 제거하거나 위화도 회군(回軍)을 하는 과정에서 정도전이 책사(策士)로 역할을 한 게 있습니까.

“사서(史書)에 구체적으로 얘기가 나와 있는 것은 없어요. 하지만 정도전이 역할을 했을 것으로 유추(類推)할 수는 있어요. 예를 들어 요동 출병(出兵) 당시 이성계가 주장한 사불가론(四不可論) 같은 경우, 무장인 이성계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정도전의 손에서 나왔을 것으로 보는 게 맞을 겁니다.”

遼東정벌 추진

‘사불가론’은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반대하는 이유로 내세운 네 가지 이유, 즉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할 염려가 있다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주장을 말한다.

위화도 회군으로 중단됐던 요동정벌은 조선 건국 후 정도전에 의해 다시 추진된다. 정도전은 <진도(陣圖)>를 가지고 군사훈련을 하는 등 요동정벌을 추진했다. 이 부분은 한영우 교수가 정도전을 높이 평가하는 대목 중 하나이다.

명나라에서도 이를 눈치챘다. 명나라는 조선으로 보내는 외교문서에 “정도전은 조선의 화원(禍源)”이라고 적시(摘示)해서 조선 조정에 충격을 주었다. 명나라는 자기들에게 보내는 조선의 외교문서에 불경한 표현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책임자로 정도전을 지목, 명나라로 압송(押送)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정도전이 정말 요동정벌을 진지하게 추진했던 것일까요.

“명나라의 국력이 커지면서 고려 말보다 사정이 더 안 좋아진 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정도전에게는 늘 고구려 땅을 되찾겠다는 의지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도전은 고려 태조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국호를 고려라고 한 것과 북진(北進)정책을 편 것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물론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왕자와 공신들이 거느린 사병(私兵)을 혁파(革罷)하려는 국내정치적 목적도 있었죠.”

―드라마 <정도전>을 보면, 정도전이 《맹자(孟子)》를 읽으면서 혁명의지를 불태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정말 정도전이 《맹자》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을까요.

“당시 정치사상서로는 《맹자》만 한 것이 없었습니다. 임금이 잘못하면 쫓아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당시로써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죠.

물론 《맹자》를 공부한 것이 정도전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책이라도 누가 어떤 환경에서 읽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반응은 다를 것입니다. 학문을 머리로 하는 사람이 있고, 몸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도전은 유배 및 유랑 시절에 민초들의 어려움을 직접 보면서 《맹자》에 보이는 혁명사상을 실천에 옮길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그 시대의 다른 사대부들과 달랐던 것이죠.”

《조선경국전》을 보면 흉년(凶年)에 빈민(貧民)들에게 곡식을 대여해 주는 의창(義倉)의 운영이나, 지역 특산물을 진상(進上)하는 상공(上貢)의 운영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정도전은 고려시대에 이들 제도들이 기득권 세력에 의해 악용되고 농민들에게 부담이 되었음을 강조하면서, 그 공정한 운영을 강조한다. 하지만 ‘어떻게’ 공정하게 운영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결국 조선시대에 와서도 후기로 갈수록 정도전이 지적했던 문제들은 그대로 되풀이된다. 한영우 교수에게 이런 느낌을 얘기하면서 정도전이 ‘경륜가(經綸家)’로서는 한계가 있었던 것 아니냐고 물었다.

“물론 정도전도 한계가 있었지요. 그가 모든 걸 다 개혁할 수는 없었죠. 하지만 그가 이룩한 것도 많습니다. 과전법(科田法) 도입의 경우, 기득권 세력의 소유권을 박탈하고 왕실재산을 국고(國庫)로 환수(還收)하는 엄청난 토지개혁이었어요. 지금도 그런 개혁은 엄두를 낼 수 없을 것입니다.”

“鄭道傳의 불교 비판은 政略的”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을 보면, 정도전의 정치·경제·사회사상과 철학·윤리사상을 정리해 놓고 있다. 문외한(門外漢)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맹자》 등에 보이는 유가(儒家)의 주장이나, 송대(宋代) 성리학(性理學)의 학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한영우 교수는 “정도전은 이론가가 아니라 정치가, 행정가였다”고 말했다.

“정도전이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을 주장했지만, 이는 불교를 치기 위한 무기(武器)로 활용하기 위해서였어요. 경세적(經世的) 측면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인 것이죠. 그에게는 백성들이 굶어 죽는 상황에서 철학적으로 파고들 여유가 없었습니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성리학을 철학적으로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은 사화(士禍) 이후부터였어요.”

―《불씨잡변》을 당대 최고 수준의 불교 비판서라고 평가했더군요.

“정도전이 죽기 직전에 쓴 《불씨잡변》은 불교에 대한 이해 측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있는 책이죠. 이 책은 순수한 철학적 책이라기보다는 정략적(政略的) 의미가 강한 책입니다. 조선 건국 후에도 여전히 세력을 갖고 있는 사원경제(寺院經濟)를 개혁하고, 무학(無學) 등 이성계 주위의 승려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쓴 것이죠.”

儒宗功宗

정도전은 조선을 디자인했지만, 결국 이방원과의 정치투쟁에서 패해 죽는다. 정도전과 이방원의 갈등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정도전은 이성계를 파트너로 해서 조선을 세웠습니다. 솔직히 무인(武人)인 이성계는 그다지 지적(知的)이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재상 중심 체제를 추구했던 정도전과 별 문제가 없었어요. 하지만 이방원은 고려 말기에 과거(科擧)에 급제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이었습니다. 이방원 입장에서는 정도전의 생각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겠죠.”

―현실정치적 관점에서는 왕권 강화를 주장하는 이방원의 노선이 옳았던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습니다.

“양자택일적으로 누가 옳고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시대상황에 따라 선택은 달라지는 것이니까요. 정도전이 시작했던 사병혁파, 사원경제 개혁을 실천에 옮긴 사람은 결국 태종 이방원이었습니다. 이방원은 정도전이 주장했던 재상 중심 체제만 빼고는 다 받아들였습니다. 사람은 죽였지만, 그 이념까지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겠지요.”

한영우 교수는 “고종(高宗) 7년인 1870년 정도전에게 문헌(文憲)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면서 ‘유종공종(儒宗功宗·‘유학도 으뜸, 조선을 세운 공로도 으뜸’이라는 의미)이라고 쓴 편액(扁額)을 하사한 것이나, 정조(正祖) 때인 1791년에 왕명(王命)으로 《삼봉집》을 편찬한 것은, 조선왕조에서도 이미 정도전의 업적을 인정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정도전의 인간적인 장점과 약점을 꼽는다면.

“시대를 바꾼 혁명가답게 이상(理想)을 갖고 밀어붙인 추진력은 강점이죠. 하지만 원래 혁명가라는 것이 사회적으로는 정의(正義)로운 사람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정말 못된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착하면 혁명을 못 합니다. 정도전도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죠. 신하로서 자신이 모시던 고려왕조를 배신했고, 자신의 혈통을 시비 걸었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친족이기도 한 단양 우(禹)씨 일족을 핍박했습니다.”

―드라마 <정도전>을 봅니까.

“잘 보고 있어요. 전에 <용의 눈물>에서도 정도전을 긍정적으로 그리기는 했지만, 그때는 어디까지나 이성계나 이방원이 주인공이었어요. 이번에 처음으로 정도전이 주인공이 됐으니, 진일보한 셈이죠.”

“조재현 잘 선택했다”

―정도전 역을 맡은 조재현씨의 연기에 만족하세요.

“눈매가 살아 있는 것이 혁명가다운 기개(氣槪)가 보이는 것 같아요. 배우를 잘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상의 픽션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사극은 다큐멘터리가 아니잖아요. 그걸 시비를 걸면 안 되겠죠. 역사적 사실을 훼손하지 않으면 됩니다. 사극 <기황후>처럼 공인된 악인(惡人)을 미화(美化)하는 것은 곤란하죠. <정도전>은 비교적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다고 봅니다.”

―지금 정도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대상황과 관계가 있겠죠. 가족 동반자살 뉴스에서 보듯, 서민생활이 어렵잖아요. 기업도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 정도만 괜찮지, 중소기업들은 모두 어렵잖습니까. 이처럼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사회적 약자(弱者)인 대중 입장에서는 개혁을 바라는 심리가 있겠죠. 정도전을 통해 일종의 대리만족(代理滿足)을 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