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賢母良妻가 꿈이었다가, 1998년 러시아에서 <어머니>를 공연한 후 연극과 뒤늦게 사랑에 빠졌다”
⊙ 연극 연출하던 남편이 사업하다 부도 낸 후 라디오 진행 등 하면서 22년간 빚 갚아
⊙ “자기가 행복한 배우가 최고”
張源宰
⊙ 47세.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런던대 연극학 박사.
⊙ 전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現 SNS 바른소리사람들 대표.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 진행.
⊙ 저서: 《증언연극사》 《Irish Influence on Korean Theatre》 《오태석 연극-실험과 도전의 40년》
《우리는 왜 축구에 열광하는가》.
⊙ 연극 연출하던 남편이 사업하다 부도 낸 후 라디오 진행 등 하면서 22년간 빚 갚아
⊙ “자기가 행복한 배우가 최고”
張源宰
⊙ 47세. 고려대 국문학과 졸업, 런던대 연극학 박사.
⊙ 전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現 SNS 바른소리사람들 대표. TV조선 <돌아온 저격수다> 진행.
⊙ 저서: 《증언연극사》 《Irish Influence on Korean Theatre》 《오태석 연극-실험과 도전의 40년》
《우리는 왜 축구에 열광하는가》.
대한민국(大韓民國) 근현대사는 파란곡절(波瀾曲折)로 얼룩졌다. 중세적 전근대사회와 첨단 정보통신기술(IT) 강국 사이에 불과 100년의 시간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다. 남덕우(南悳祐·1924~2013) 전 총리는 그래서 ‘20세기를 지낸 한국인들은 문명사적으로 5000년을 산 것과 진배없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모순(矛盾)이나 부작용(副作用) 없이 발전하는 역사는 없다. 하물며, 다른 곳에서는 수백 년이 지나도 크게 바뀌지 않는 ‘생활관습과 예의와 풍속의 기준’이 수십 년 사이에 몇 번씩이나 천지개벽(天地開闢)하듯 뒤집어진 대한민국의 경우에서랴.
손숙(孫淑·70)은 ‘파란곡절’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배우가 아니라, 그 자신이 파란곡절한 삶을 견뎌 온 사람이다. 지금의 잣대로 보자면 터무니없을 일들이 ‘관습’의 미명하에 벌어지던 시절. 딱 한마디로 정리해 보자.
손숙에게는 어머니가 여러 분이다. 한두 분 정도가 아니다. 네 분이다. 마흔 넘어서는 남편의 사업 빚을 혼자서 벌어 다 갚았다. 그것도 무려 22년에 걸쳐서.
—어렸을 때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네요.
“뭐, 꼭 그렇지도 않아요. 제가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밀양의 안동손씨 집성촌(集姓村)입니다. 기와집 많은 양반촌이었는데 8촌까지 한동네에 모여 살았죠. 아랫동네는 하인들이 살아 하인촌(下人村)이라고 불렸고. 보수적이라기보다는 고루할 정도로 체면과 관습을 따지는 분위기였어요. 예컨대, 동네 아저씨들과 잠깐만 놀아도 동네방네 금방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까.”
떠돌이학교
광복이 되자 죄우가 격렬하게 대립했다. 밀양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섯 살 때 읍내 장에 나갔다가 시신을 목격한 적도 있다. 사람들이 ‘빨치산의 시체’라길래 할머니께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다음부턴 장에 가지 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음 날, 빨치산들이 야밤에 동네에 몰래 내려와 ‘손씨들을 손보겠다’는 경고문을 붙이고 갔다. 인근에 지서(支署)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경찰 한두 명이 근무하는 소규모였다. 그래서 손숙의 식구들은 솔가(率家)를 해서 읍내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가 천석꾼의 2대 독자(獨子)여서 먹는 걱정은 없이 자랐습니다. 또래들과 비교하면 축복받은 인생이었죠. 그래도 요즈음의 환경에 대면…. 제가 다니던 밀양초등학교가 6·25동란 때 육군병원으로 징발이 되었거든요. ‘떠돌이학교’라고, 선생님들이랑 아이들이 칠판 머리에 이고, 가마니 들고, 공터 찾아다니며 여기저기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부친 손태목(孫泰穆·1919~2013)과 모친 정남교(鄭南橋)는 1934년에 혼인했다. 두 분 모두 16세 때다. 어머니의 본향은 상주(尙州). 외가가 더 양반 가문이라고 들었는데, 중매 배경은 모른다. 어머니의 외사촌 동생이 고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한 연극평론가 여석기(呂石基·92)다.
“아버지는 동래고보(東萊高普) 졸업 직후, 그러니까 혼인하자마자 도일(渡日)해서 교토(京都) 리메이칸(立命館)대학 상과를 다니셨습니다. 거기서 여자 유학생 만나 살림 차리고 4남매를 낳으셨지요.”
손숙에게 아버지는 제사 때, 명절 때, 방학 때만 잠깐잠깐 볼 수 있었던 사람이다. 평생 몇 번 만나지 못했다. 결혼식도 아버지 없이 했다.
어머니가 네 명
“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은 듬뿍 받았죠. 중학교 때까지 할머니 방에서 같이 잤으니까. 할아버지는 그 옛날에 자가용 타고 다니시던 밀양의 대지주셨습니다.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하셨고.
저는 어머니한테 지금도 농담처럼 말해요. 아버지랑 딱 세 번 주무신 거 아니냐고. 8세 위 언니, 저, 두 살 아래 남동생, 어머니 소생은 이렇게 삼남매니까. 남동생 손용삼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기도 했습니다. 소설로.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미국에 이민 가서 잘삽니다. 저랑 언니 사이에 새엄마가 낳은 언니 둘이 있고 둘은 제 동생이죠. 호적에는 다 저희 어머니 소생으로 되어 있습니다. 새엄마가 낳은 동생 하나는 용삼이랑 출생시기가 비슷해서, 쌍둥이로 올렸어요.”
손태목은 ‘신여성(新女性)’인 두 번째 부인과 주로 생활을 같이 했다. 손숙은 아버지가 여름방학 때 4남매를 데리고 밀양 본댁에 오곤 했었다고 기억한다. 현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자리에 있던 정동(貞洞)호텔 경영자가 손태목의 직함이다.
—세 번째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요.
“유흥업소에서 일하시던 분이래요. 6·25 때 아버지는 부산으로 피란 가서 남포동에서 카페를 했답니다. 그때 두 분이 함께 지내셨다는데, 사실은 그 전부터 알고 지낸 듯합니다. 저보다 여섯 살 위인, 가수 현미(76) 선생이랑 친구인 언니가 하나 있거든요. 그 언니는 호적에 올리지 않았고, 제사 때 가끔 얼굴을 비치곤 했죠. 미8군 무대 가수였는데 일찍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가끔 미국 가면 이 언니랑 만나서 수다 떨고 놀고 밥도 먹고 그러죠.”
네 번째 어머니는 일본 여성이다. 손숙의 부친과는 무려 19살 차. 마스다케(松竹) 영화사 소속 신인 여배우로, 미스 도쿄(東京)였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아버지, 일본 오가며 영화제작·수입
“아버지가 영화제작도 하고, 일본을 통해 외화도 수입하고 그랬어요. 일본 영화사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큰 고객이었으니까, 만찬 자리에 인사 삼아 자기네 영화사 소속 배우들을 동반한 거죠. 그 자리에서, ‘일본 마마’가 아버지한테 반했다고 해요. 아버지는 호텔만 하신 것이 아니고 무역회사도 같이 했는데, 나중에 무역회사가 망하면서 호텔 경영권도 남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 무렵에 도일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쭉 일본에서 살았습니다. ‘일본 마마’는 아버지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분입니다. 슬하엔 아들 둘이 있어요.”
영화사료(映畵史料) 수집가인 정종화는 손태목이 관계하던 영화사를 신한문화사라고 증언한다. 1948년 개봉, 1949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2개 부문을 수상한 영국 발레영화 <분홍신(The Red Shoes)>을 수입한 회사. 한국 개봉은 1953년 12월 6일이다. 정종화의 평가다.
“<분홍신>은 절망에 빠져 있던 당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선사한 영화입니다. 젊은 지휘자와 발레리나의 로맨스를 다룬 이 영화를 보고 수많은 미래의 문인들과 음악인들이 영감을 얻었죠. 지금도 이 영화 이야기를 하는 올드팬들이 적지 않을 정도입니다. 흥행이 보장되는 서부극이 수입영화의 90%를 차지하던 시절이었죠. 고상한 취향이 없었다면 <분홍신>을 수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분홍신> 팸플릿에 나와 있는 신한문화사의 다음 수입 작품이 작곡가 헨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악성(樂聖) 그레이트 미스타 헨델>입니다. ‘청년들에게 이런 영화를 보여줘야지, 그래도 누군가는 이런 영화를 보겠지’,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전란 직후에 이런 영화들을 수입해서 개봉한 영화수입업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영화팬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國劇의 추억
‘일본 마마’는 아직 살아 있다. 손숙과는 지금도 가끔 만난다. ‘남동생’들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우리들 아버지와 어떤 관계냐’고 묻기도 했다.
“결혼 직후, 그래도 직접 찾아뵙는 것이 도리다 싶어 일본으로 찾아갔습니다. 여권 내려면 이런저런 서류를 수백 장 써 내야 했던 시절이죠. 비행기 안에서 계속 걱정했어요. 내가 과연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을까. 잠깐이나마 뵈었던 적이 벌써 10여 년 전이었으니까. 그런데, 핏줄이라는 게 정말 신기하죠? 하네다 공항에서 아버지를 바로 알아봤다니까요.”
‘신여성’ 어머니는 아버지 도일 후 재가(再嫁)를 했다. 손숙의 어머니는 그쪽 4남매를 다 거뒀다.
“옛날 분이라 그런지, 혈육은 어찌 되었든 다 거둬야 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어렸을 때의 장래희망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버스 차장이요. 하루 두 번 버스가 다녔는데, 차장 언니들 베레모며 돈 받는 가죽가방이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나 호기심 같은 것이 많았던 거죠.”
—배우를 꿈꾼 건 아니고요.
“전혀. 다만 1년에 한두 번, 서커스나 여성국극(國劇)이 들어오면 정신없이 구경은 다녔죠. 곡마단이 낙동강 줄기 남천강변에 텐트를 치고 북 둥둥 울리면서 가두선전을 하면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학교도 가기 싫고…. 임춘앵 국극단(國劇團), 김진진 국극단은 읍내의 허름한 공회당에서 공연을 했는데, 어른들이 떼놓고 갈까 봐 문앞에 지키고 섰다가 기를 쓰고 따라나섰어요. 막이 조금 들려 있는 사이로 배우들 다리나 구두가 살짝 보이는데 그것만 봐도 며칠씩 잠도 못 잘 만큼 흥분하고.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서커스단 따라가려고 보따리 싸서 두 시간 가출(家出)한 적도 있습니다. 입단하면 매일 식초를 한 사발씩 먹어야 한다는 소문에 무서워서 얼른 집으로 돌아왔지만. 지금도 혼자만 알고 있는 가출 스토리입니다.”
손숙이 초등학교를 마치자 어머니는 손숙과 남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다. 1957년의 일이다. 8살 위 언니는 미리 상경(上京)해서 정동호텔 살림채에 머물며 이화여대를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미 일본으로 건너간 상태였다.
“어머니는, 당신이 ‘신여성’이 아니어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어요. 내 아이들은 그렇게 살게 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평생 처음으로 시부모께 대들었죠. 돈암동에서 방 한 칸 얻어 살았는데, 그래도 시골에서 계속 쌀은 올라오고…. 고생은 많이 했지만 적빈(赤貧)은 아니었습니다.”
풍문여중에 입학해서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 사투리 때문이다. 입만 열면 바로바로 급우들이 폭소를 터뜨리는 통에 6개월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서울에 경상도 출신 거주자가 많지 않던 시절이다. 침묵에 빠진 밀양 최고의 모범생을 구원한 건 급우의 편지다. 중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짝이 편지를 보내 왔다. 세련된 문장이었다.
“너무나 잘 쓴 글이었죠. 저도 바로 답장을 보내고, 편지 왕래를 계속했어요. 주로 책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말하자면, 선의의 독서경쟁을 했다고 할까. 둘 다 도서관에 붙박이로 틀어박혀서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 일본문학 단편선을 읽었죠. 이 무렵의 독서가 나중에 제 연극적·문학적 감수성에 자양분이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김연(金燕). 소설가 김광주(金光洲·1910~1973)의 딸이자 《칼의 노래》 《남한산성》을 쓴 소설가 김훈(金勳)의 누나다. 손숙은 풍문여고에 진학해서 문예반장을 했다. 고교생 문학반 연합서클에서 만났던 선후배 인물이 《장길산》의 황석영(黃晳暎),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趙世熙), 《갈 수 없는 나라》의 조해일(趙海一)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가 준 충격
고2 때 김연이 연극 티켓을 가져왔다.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한 유진 오닐 작 이해랑(李海浪·1916~1989) 연출의 <밤으로의 긴 여로>. 이해랑이 아버지 역으로, 황정순(黃貞順·89)이 어머니 역으로, 장민호(張民虎·1924~2012)가 형, 훗날 KBS 드라마 PD로 활약하는 최상현이 동생, 여운계(呂運計·1940~2009)가 하녀로 출연했다.
“충격이었죠. 책에선 느끼지 못했던 직접적인 감동이 너무 컸으니까. 어렸을 때 서커스 보고 국극 구경 다닌 것 말고는 처음 공연을 접한 건데, 뭐랄까, 봉인된 감정이 한꺼번에 차오르는 느낌? 지금도 대사를 다 기억합니다. 소름 돋았어요. 바로 내 얘기 같았으니까.”
유진 오닐은 육친(肉親)의 비참한 과거를 스스로 폭로한 이 작품을 ‘피와 눈물로 점철된 오랜 슬픔의 연극’이라고 불렀고, 사후(死後) 25년간 공개를 하지 말라고 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타계(他界) 2년 후인 1955년 초연이 이루어졌다. 사후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유진 오닐에게 생애 네 번째 퓰리처상을 안겼다. 늙은 연극배우인 아버지 제임스 티론, 마약중독자 어머니 메리, 알코올 중독자인 형 제미, 병약하고 시인 기질을 가진 동생 에드먼드(청년시절의 작가) 등 일가족이 빚어 내는 하루 저녁의 음울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밤으로의 긴 여로>는 손숙의 가족사(家族史)와 일부 닮은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때부터 연극에 흠뻑 빠져들었어요. 고3 때 드라마센터에서 전국 고교생 연극 경연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남학교는 <왜 싸워>, 여학교는 <춘향전>이 지정작품이었죠. 너무너무 춘향이를 하고 싶은데 성격상 오디션에 나서지는 못하겠고, 입시도 걸려 있고. 결국 오디션 응모를 안했어요. 잘난 척, 관심 없는 척, 쓸데없이 자존심 세우느라고. 저보다 한 학년 후배인, 나중에 <모닥불> <끝이 없는 길> <방랑자여>를 부른 가수 박인희가 춘향이로 뽑혔고, 저랑 같은 학년이던, 배우를 하다 지금은 국회의원으로 일하는 김을동이 방자 역을 했지요. 그래서 제가 참다 참다 못해서 스태프로 참여하게 된 겁니다. 그것도 연습실 주변을 며칠을 맴돌다가 겨우…. 제 자존심 때문에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못하게 된, 평생 굉장히 힘든 기억입니다.”
‘여배우 탄생’
그때 연극을 지도하러 왔던 연출가가 훗날 손숙의 남편이 되는 김성옥(金聲玉·79)이다. 아홉 살 연상의 기성극단 배우였던 김성옥은 손숙에게 ‘조연출 해볼래?’라고 권했고, 손숙은 팀에 합류해서 두 달간 학교에서 합숙하며 연습했다. 공연은 성공리에 끝났다. 김을동이 연기상을 받았고, 손숙은 류길촌(柳吉村) 등의 연극인과 안면을 익혔다.
—대학은 사학과를 갔네요.
“저는 계속 문학을 하겠다고 했는데 학교 선생님께서 ‘정말 문학을 하고 싶다면 먼저 역사와 철학을 알아야 한다’며 국문과보다 사학과를 권했어요. 고대 사학과 63학번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여학생이 드물던 시절이라 ‘풍문여고 연극반 조연출이 입학했다’고 소문이 돌았어요. 전 바로 고대 극회(高大劇會)로 납치(?)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입학한 해에 개교 60주년 기념 선후배 합동공연이 있었습니다. <삼각모자>라는 스페인 코미디인데, 포도농사 짓는 늙은 농부의 젊은 아내를 시장(市長)이 탐낸다는 내용이었죠. 연출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당시 실험극장 연출로 있던 허규(許珪·1934~2000), 늙은 농부 남편 역이 김성옥, 제가 젊은 아내, 시장에 나영세, 시장 부인이 여운계. 고교시절 저희를 가르치던 그분을 같은 과 선배로, 고대 극회 선배로 다시 만난 겁니다.”
과연 연기가 괜찮기는 한 건지 걱정이 많았는데, 연극평론가이자 이화여대 교수였던 김갑순(金甲順)이 손숙을 가리켜 ‘여배우 한 명이 탄생했다’고 《동아일보》에 평을 썼다. 허규와 김성옥은 친구사이였다. 손숙은 첫 무대에서 주인공을 맡은 자기의 ‘파격적 캐스팅’ 배후에 김성옥의 입김이 작용한 듯하다고 믿는다.
어머니의 반대 무릅쓰고 결혼
—연극계 원로들은 두 분의 사랑이 열렬했었다고 회고합니다.
“전 사랑에 빠지면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래서 대학 3학년 때 결혼하면서 학교도 중퇴하고, 연극도 그만뒀어요. <삼각모자> 이후 <바비도> <목장의 새악시> 등의 대학연극에 출연했거든요.”
모친의 결혼반대는 생각 이상이었다. 예비사위와의 첫 상면은 극장 로비에서였는데, 어머니는 김성옥의 분장한 얼굴을 못마땅해했다. 여석기 교수가 평소에 김성옥을 아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손숙은 어머니께 “석기 아저씨께 물어보시라”고 했다. 돌아온 답은 “배우로서는 괜찮은데 뭐할라꼬 그리 시집보내노?”였다.
“어머니가 교육에 한이 많았잖아요. 그래서 딸 아들 구별 안 하고, 딸도 배워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사회에 나가서 일하라는 게 아니라 좋은 남자 만나 잘살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는 게 어머니의 신념이었던 것 같아요.
6개월 동안, 정말로 말 한마디도 안 하고 냉전(冷戰)했습니다. 이 결혼 하면 당신이 먼저 죽겠다고, 치마끈으로 목을 매기도 했다니까요.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키웠는데, 네가 그럴 수 있느냐’는 거였죠.
조건만 봐도 하나도 맞는 게 없었잖아요. 나이는 아홉 살이나 차이가 나지, 모아 놓은 재산은 없지, 직업은 불안정하지, 고향도 전혀 다르지. 자식에 대한 기대가 산산이 부서진 거지. 아마 제 딸이 그랬다면 저도 어머니와 똑같은 심정이었을 거예요.”
“1년에 연극 두 편만 하게 해 달라”
—언니와 형부의 응원으로 결혼에 골인하셨다고요.
“맞아요. 제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늘 어머니와 애증(愛憎)의 관계였어요. 특히 전 예민했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 굉장히 심했어요. 당신의 한(恨)을 저희를 통해 풀려고 하는 것이 힘들었고, 도대체 왜 평생을 저러고 사시나 싶었던 거죠. 그래서 결혼을 해서 집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죠. 아버지의 부재(不在)를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으로 메우려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돌아가실 때까지도 저랑 어머니는 관계가 팽팽했어요. 안 뵈면 너무 가슴 아픈데, 막상 만나면 화가 나는 그런 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정말 후회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생의 업으로 배우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주부로 가정을 지키고 싶었다. 일단 대학을 졸업하라는 남편의 권유에 뭐하러 졸업을 하느냐고 반문했을 정도였다.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결혼해서 2~3년 살다 보니 이상하게 무대에 대한 향수(鄕愁)가 저를 아프게 했습니다. 어느 날 명동 시공관(현 명동 예술극장)을 우연히 지나는데 눈물이 핑 돌더군요. 이 느낌은 뭘까 싶은 게…. 게다가 그때는 여배우가 귀하던 시절이라 대학연극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에겐 프러포즈가 많았습니다.
남편한테 1년에 연극 딱 두 편만 하게 해 달라고 사정했어요. 어렵게 허락을 받아서 시작한 작품이 유진 오닐 작 정일성(鄭一成) 연출의 <상복(喪服)이 어울리는 엘렉트라>였습니다. 유진 오닐의 작품이라는 데 깜빡한 거죠.”
<喪服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극단 동인극장(同人劇場)이 제작한 이 작품이 손숙의 기성극단 데뷔작이다. 엘렉트라(손숙)의 동생 역으로는 오지명(吳知明)이, 어머니 역으로는 정치인 조순형(趙舜衡)과 결혼한 김금지(金錦枝)가 열연했다.
다음 작품은 김기팔(金起八)이 쓰고 임영웅(林英雄)이 연출한 <그 여자의 옷을 입혀라>였다. 손숙의 역할은 유학 중 우울증에 걸린 여학생이었는데, 반바지에 와이셔츠를 입고 출연해서 ‘선정성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것이 화제가 되고 홍보가 되면서 연극은 대박이 났다. 두 작품 연속 안타를 치고 나니 출연 제의가 끊이지 않았다.
—늘 주인공만 하시고, 배역운이 최고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복 받은 배우죠.”
—임영웅 선생을 따라 극단 산울림에 입단하셨네요. 좀 더 직업적으로 연극을 해 보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한 건가요.
“연극을 장기적으로 하려면 소속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헨리8세와 여인들> <꽃피는 체리> <홍당무> 등이 산울림 시절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연극입니다.”
1969년, 국립극단이 체코 극작가 카렐 차페크의 <인조인간>을 공연했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로봇’이라는 단어는 차페크가 이 작품을 위해 만들어 사용한 조어(造語)다. 어느 날 장민호 선생이 급히 부르신다기에 달려가 보니 대역(代役) 부탁이었다.
이해랑의 칭찬
“문정숙(文晶淑·1927~2000) 선생이 사정상 출연이 불가하게 되었다, 부탁한다.”
개막까지 남은 시간은 딱 보름. 죽어라고 연습해서 무대에 섰다. 이때 연출가 이해랑과 처음 만났다. 며칠 동안의 공연이 무사히 막을 내리자 이해랑이 손숙을 불러 “<홍당무>의 주인공 16세 소년 역은 일본에서 유명한 여배우들이 많이 거쳐 간 역이다. 그런데 손숙만큼 잘한 배우가 없더라”고 말했다.
“산울림 공연을 보셨던 거죠. 대가(大家)한테 인정을 받은 셈이라, 정말 좋아서 많이 울었습니다. 이해랑 선생님은 제 인생의 스승이시죠. 안목, 인품, 카리스마…. 그만큼 책을 많이 읽고, 자존심 지키시고, 예술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한 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공연이 인연이 되어 손숙은 1971년 국립극단에 입단한다. 1990년 퇴단할 때까지 이해랑 연출로는 <들오리> <파우스트> <바냐 아저씨> 등을 했고 도쿄예술대 출신인 원로 이진순(李眞淳)과는 <페르귄트> <징비록(懲毖錄)> <손탁호텔> <산수유>를 함께 했다. 김정옥(82) 연출로는 <베르나르 알바의 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가 기억에 남는다.
—이해랑, 이진순 선생은 리얼리즘 연극을 평생 동안 추구하신 분이고 김정옥 선생은 총체극(總體劇) 개념을 한국 연극계에 처음 도입하신 분인데, 연출가로서 각각 어떤 장점이 있습니까. 손숙의 예술적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스승 임영웅도 리얼리즘 연극의 거두(巨頭)이시고.
“제가 감히 그분들을 평할 수는 없죠. 다만 이런 얘기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신극(新劇)이 도입된 이래 리얼리즘 연극을 정극(正劇)으로, 그 밖의 시도들을 예술적 실험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였잖아요? 저는 마당극이나 탈춤 혹은 한국적 요소를 가미한 연극, 예컨대 극단민예나 오태석(吳泰錫) 선생이 주재하는 극단목화의 작품들의 예술적 가치를 존중합니다. 다만 제 취향이 리얼리즘 쪽이라고 할까요?
노래로 치자면, 즉흥연주도 넣고 변주도 하고 즉석화음도 넣고 관객 박수도 유도하는, 그렇게 부르는 가수도 있고, 악보대로 박자 딱딱 지켜 가면서 부르는 가수도 있잖아요? 저는 후자(後者)입니다. 정해진 틀과 규칙을 가급적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때가 가장 편합니다. 신명이나 원초적 연극성보다는, 정제되고 걸러진 형식미가 제 몸에 더 잘 맞는 거죠.”
국립극단은 그 위상과 역할을 두고 여러 가지 논란이 많았다. 특히 2010년 6월에 있었던 이른바 ‘법인화(法人化) 논란’이 하이라이트다. ‘민영화의 전 단계다’라는 법인화 반대 의견은 ‘철밥통엔 개혁이 필요하다’는 찬성론과 맞섰다. 예컨대, ‘수익성을 추구하다 보면 예술성이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의견과 ‘국립극단은 예술성을 추구하기 이전에 이미 전속단원의 철밥통으로 전락했다’는 의견이 대립한 것이다.
법인화의 핵심은 ‘예술감독제’다. 급여를 받는 단원들을 내보내 고정비용을 줄이는 대신, 예술감독이 매 작품의 연출가와 배우들을 오디션으로 선발해 공연을 이어 간다는 아이디어다. 선의로 해석하자면, 이 논란은 배우 중심이냐 제작 중심이냐의 철학적 논쟁이기도 하다.
김옥숙 여사에게 국립극단 급여 인상 건의
—이미 법인화 작업은 마무리되었습니다만, 국립극단에 19년 동안 몸 담았으니 할 말씀이 좀 있겠지요.
“저는 왜 국립극단이 명실상부한 기관이 되지 못하나 불평불만이 많았어요. 국립극단은 일반극단이 하기 어려운 고전이나 창작극을 공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일류들이 모여 문화의 수준을 높이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순회공연도 하고. 국립극단은 연극인들의 꿈과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한 단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뭐가 문제였습니까.
“사실 국립극단 단원들이 받았던 처우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때 공연 보러 오신 김옥숙(金玉淑) 여사한테 면담 신청을 했겠어요? 그때 급여가 100% 올랐고 그 뒤로는 지금까지 거의 인상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연극계가 많이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일부 단원들의 의식수준도 공무원처럼 변해 가더군요. 그래도 고정수입이 있으니까,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느니 그냥 하던 일을 하자는 식으로요. 예술가가 ‘실패’를 두려워하고, ‘고인 물’처럼 머물러 있으면 곤란한 것 아닌가요?”
—해결책은 있습니까.
“장충동 국립극장은 연극 공연장으로는 최고가 아닙니다. 명동 예술극장이 오히려 더 나아요. 일단 국립극단에 걸맞은 공연장이 하나 필요하죠. 배우들 문제는, 국립창극단을 보면 인간문화재 제도를 잘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국립극단도 한 10명 내외로, 정말 대단한 분들만 모아서 종신단원제를 시행하면 어떨까 합니다. 급여는, 많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월 300만원 정도면 어떨까요. 외국에는 왕족이나 퍼스트레이디가 후원회장을 맡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도 그런 전통을 만들어 가면 좋을 것 같고….”
“돈 독이 오른 것 맞아요”
인터뷰 날짜를 잡고 일주일 동안 라디오를 들었다. 월~토 아침 9시부터 두 시간동안 방송하는 CBS 라디오 ‘손숙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 손숙의 목소리는 명징(明徵)했다. 뭉그러지는 발음이 없었다.
영상매체 출연자는, 다소 발음이 무뎌도 큰 지장을 받지 않는다. 입술읽기(lip reading)를 통해 시청자들이 출연자들의 말을 따라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라디오는 다르다. 오로지 명확한 발음으로만 승부해야 한다. 연극배우도 마찬가지다. 마이크 없이, 저 멀리 3층 객석까지 오직 자기의 목소리로만 대사를 전해야 하는 것이 배우의 숙명이다. 대중에게 손숙은 연극배우보다는 라디오 진행자로 더 친숙하다.
그래서 연극계 일각에서는 ‘왜 손숙이 연극을 등한시하느냐’며 다소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분들이 있다. 1989년 MBC라디오 ‘여성시대’로 처음 마이크를 잡은 이래, 손숙은 24년째 라디오 진행을 이어 오고 있다. 라디오뿐 아니라 각종 행사에 사회를 보러 다니자 심지어는 ‘돈 독이 올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손숙에게는 방송 일을 해야만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돈 독이 오른 것 맞아요. 남편이 부도를 냈거든요. 1989년부터 갚기 시작했는데, 2010년인가 2011년쯤에야 그 빚을 다 껐습니다. 얼마인지도 몰라요. 수십억은 되겠죠? 하나를 갚으면 다른 채권자가 툭 나타나고, 그거 갚으면 은행에서, 보험사에서 대출금 상환 통지서가 날아오고, 며칠 있다가 또 세무서에서 세금 내라고 독촉장 보내고….”
독립기념관 화재로 남편 회사 부도
—남편이 무슨 일을 했던 거죠.
“밀랍인형 만드는 사업. 독립기념관에 있는 독립투사 밀랍인형이 제 남편 회사에서 제작한 겁니다. 런던에 ‘마담 타소’라는 밀랍인형 전시관 있잖아요, 그곳이랑 정식 라이선스 계약 맺고 영국에서 제작 전문가 불러다가 6개월간 저희 집에 숙식을 시키며 인형을 만들었죠. 안마사도 매일 불러다 마사지도 시켜 주고…. 그런데, 독립기념관 화재가 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1986년 8월 4일, 준공 및 개관을 11일 앞두고 독립기념관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본관 지붕이 거의 녹아 내릴 정도의 큰 사고였다. 원인은 배선공사 부실이지만, 준공을 1년 앞당기려고 무리하게 서두르다 화재가 발생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인형들을 만들어서 전시장에 가져다 놓았는데, 다 녹아 버렸습니다. 밀랍인형이라 그야말로 초처럼 녹아내렸어요. 장인(匠人)은 이미 출국(出國)했지, 계약상 최종 납품(納品) 후 대금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준공은 무기연기되었다고 하지, 돈 들어오면 바로 갚겠다고 끌어다 쓴 돈은 많지, 독립기념관 개관 후엔 자동홍보가 될 테니 기업체, 박물관에서 순차적으로 주문을 받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다 어그러진 거죠. 아, 지금은 없어진 드림랜드에 납품했으니까 딱 두 군데 설치하고 끝난 거네요.”
남편은 도피하고, 집으로는 거의 매일같이 청구서가 날아왔다. 국립극단 월급은, 요즈음 감각으로 150만원 정도였다. 남편의 빚보증인이 ‘손숙’으로 올라 있어서 남편을 고발하지 않는 한 이혼을 한다 해도 ‘손숙’에게 갚을 의무가 있다고 했다.
마침내, 대구세무서에서 ‘차압’ 고지가 오고 세간에는 ‘빨간 딱지’가 붙고, 한 달 안에 집을 내줘야 하는 극한 상황이 왔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릴까도 생각
“집이 경매로 넘어갔어요. 친구가 도와줘서 미분양 아파트 하나를 겨우 얻었죠. 이사 전날, 정말 죽으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때 아이들이 맘에 걸렸죠. 제가 딸만 셋인데, ‘내가 죽으면 쟤들은 어떻게 되나’. 그래서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다가 참았습니다. 정말 마지막 순간에 겨우….”
아침에 대구에 있는 세무서에 가서 손이 발이 되게 빌고, 허겁지겁 서울로 돌아와서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때, 공연을 계속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전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었을 겁니다. 매일 무대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신없이 바쁘고, 그래서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던 거죠.”
그때 이후, 남편과는 ‘20년째 별거 중’이다. 손숙에게 남편은 ‘아이들 아빠’다. 서로 잘살고, 가끔 만나고, 소식 듣고 하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식구들 먹을 것을 마련해 놓고, 그 후에 하고 싶은 연극을 하겠다는 생각을 그 남자가 했을 수도 있었겠구나’라고 좋게 이해하기로 했다. 그야말로 막판까지 내몰렸을 때, 하늘에서 보내 준 동아줄이 ‘라디오 진행’이다.
“MBC 라디오 박수현 PD가 편지를 하나 주면서 읽어 보라는데, 슬픈 내용이라 금방 처지가 오버랩되면서 정신없이 빠져들었지요. 며칠 후 박 PD가 ‘라디오 안 해 보실래요?’라며 연락을 해 왔습니다. <봉두완 손숙의 여성시대>. 라디오 발탁 배경은 지금도 몰라요.”
‘라디오 진행자’ 손숙의 별명은 ‘수도꼭지’였다. 방송 중간에 너무 울어서 생긴 별명이다. 청취율이 급등했다. ‘너무 슬퍼서 차를 세우고 울었다’는 편지가 쇄도했다. 강연이든, 원고청탁이든, 신문칼럼이든, 요청이 오면 마다하지 않았다. 절실했으니까.
“제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아무도 몰랐어요. 나중에 사정을 알고 제 딸들이 ‘엄마, 그때 어떻게 견뎠어요’라고 했을 정도니까. 겨우 한 군데 빚을 끄고 나면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서류가 또 날아옵니다. 출연료 반은 보증보험에서 차압이 들어와서 자동으로 가져가고, 나머지로 남은 빚 끄고 생활비 쓰고…. 방송국 로비에 늘 누군가가 앉아서 저를 감시했습니다. ‘아마도 사채업자로구나’, 그렇게 짐작했지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어요.”
경제적인 문제 말고도 손숙이 라디오에 감사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라디오를 진행하기 전엔 제 스타일이나 성격이 좀 뾰족하고 자존심 세고 매사 분명하고, 뭐랄까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쪽이었습니다.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하면서 인생공부 제대로 했지요. 고부(姑婦)간, 부부간 온갖 사연들을 읽으면서 제 스스로 치유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이 모든 이야기들이 인생교과서 같다는 생각을 하고…. ‘라디오에서 제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위로가 될 수도 있고 비수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조금 더 상대방을 배려하게 되고….”
손숙의 라디오 경력은 SBS <손숙 김범수의 아름다운 세상> <김승현 손숙의 편지쇼> 등으로 단절없이 이어졌다.
—라디오를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화가 있다면요.
“IMF 때 ‘회사도 망하고, 친가 처가 다 망했습니다. 이 편지가 제 유서(遺書)입니다’라는 사연을 받았어요. 펑펑 울면서 방송했죠. 제 빚 갚는 얘기도 처음으로 털어놓고. ‘제발 죽기 전에 나랑 전화 좀 하자’, 막 울부짖고.
2013년 대구에서 <어머니>를 공연할 때 어떤 신사 분이 딸, 부인 동반해서 찾아오셨어요. ‘방송 듣고 다시 살자고 결심했다’고, 자기가 바로 그 편지를 보냈던 당사자라고, ‘지금은 다 해결했다’고. 분장실에서 붙들고 또 막 울었지요.”
<어머니>
1990년대 중반부터 그래도 연극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매일 방송국과 극장을 오가는 강행군을 자청하며 <셜리 발렌타인의 일기> <담배 피우는 여자> <그 여자의 작은 행복>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위기의 여자-모노드라마 버전> <엄마, 안녕> 등을 공연했다.
—중년 여성의 인간선언 같은 작품들이 주류입니다.
“의도적인 건 아니고,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아냐, 내 잠재의식이 그리로 날 몰아간 걸까? 큰일을 겪고 나니 자유가 찾아오더군요. 예순 무렵에 연두색 비키니 입고 무대에 서고(<셜리 발렌타인의 일기>), 딸이 자살한다는데도 ‘쟤가 죽으면 나는 어쩌나, 오빠 집에 가 있으랴?’고 자기생각만 하는 이기적이고 철없는 엄마도 연기하고(<엄마, 안녕>).
우리 세대의 여성이란 늘 희생하고 배려하고 그런 걸 미덕이라고, 어쩌면 운명이라고 알고 살았는데, 이제는 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되는 것 아닌가요? 다 내려놓으면 편해집니다.”
—어떤 인터뷰를 보니 평생 여러 번 다시 공연하고 싶은 작품으로 이윤택 연출의 <어머니>를 꼽으셨더군요.
“1999년에 시작했고, 거의 해마다 공연하는, 제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작품이죠. 제 어머니가 자꾸 생각나니까. 전 평생 어머니 가슴에다 못질하는 딸이었어요. 계속 뜻을 거스르고 살았으니까. 후회스럽고 죄송하고. 이윤택(李潤澤)은 천재입니다. 대중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타고난 재능이 있습니다. 제작비라든가 현실적 여건이 조금만 좋아지면 격(格)을 확 높여서 갈 수도 있을 텐데….”
“‘어머니’라는 단어는 세계 공통어”
<어머니>는 또 다른 의미에서 손숙의 개인사와 얽혀 있는 작품이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환경부 장관으로 내정되었던 손숙은 장관 내정 발표 이후 러시아 공연을 갔다가, 무대 위에서 우리나라 기업인들로부터 격려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으며 장관직을 사퇴했다.
“안 가면 어떨까, 잠깐 고민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국제적인 약속이 다 되어 있고, 대역을 연습시키기엔 절대 시간이 모자랐으니까. 장관 임명 발표가 나고 극단 자유의 이병복(李秉福)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왜 장관 한다고 그랬니? 그런데, 러시아는 꼭 가야 한다’고. 격려금은 배우들한테 다 나눠주었죠. 그 일이 구설수에 오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후회 없어요.”
역설적으로, 손숙은 배우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바로 그때 그 공연을 꼽는다.
“모든 러시아 관객이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제 인생에 그런 찬란한 박수는 처음 받아 봤어요. 내가 배우가 아니라면 어디 가서 어떻게 이런 환영을 받을 수 있을까, 뿌듯한 자부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꽃 한 송이씩을 들고 줄을 쫙 서서 분장실로 들어왔어요.
그래서 제가 ‘왜 울었냐? 내용은 이해하고 울었냐?’고 물었더니, 그들이 ‘어머니라는 단어는 세계 공통어다. 우리도 전쟁을 겪고, 어렵게 살았다. 연극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지금도 힘들 땐 그때 러시아 관객들의 반응을 생각하며 위기를 벗어납니다.
국내 공연 때도 우는 분이 많은데, 관객들이 우는 연극은 배우가 힘들어요. 끝나면 6개월간 온 몸이 아프지요. 아마 에너지가 바닥까지 방전이 돼서 쉽게 지치는 것 아닐까요. ‘무대 위의 이야기’가 알게 모르게 실제 삶에 영향을 미치는 거죠.”
김대중과의 인연
연극 <어머니>와 얽힌 사연은 한 가지가 더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의 일인데, 제가 밀양에 가서 공연을 했거든요. 밀양 공연은 고향 떠나고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3분의 1쯤 이야기가 흘러갔나 싶은데 객석 중간에 어머니가 앉아 계신 겁니다.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전 생생하게 봤어요. 그날 어떻게 공연했는지 모르겠어요. 넋이 나가서….
공연이 끝나고 연출자 이윤택씨가 와서 ‘여태껏 공연 중에 최고였다’고 흥분했습니다. 제가 ‘우리 어머니가 왔었어’라니까 ‘선생님, 나중에 밀양에서 <어머니> 공연하다 돌아가세요’라고 말하는데 하나도 안 섭섭한 거야. 그러고 싶어요. 근사할 거야, 그렇죠?”
—그 공연이 계기가 돼 이윤택 선생이 밀양에 터를 잡은 거로군요.
“그렇죠. 시(市)에서 폐교(閉校)를 내줘서 거기에 연극촌(演劇村)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연희단 거리패가 상주하면서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평소부터 교분이 있었나요.
“그분이 문화에 관심이 많았죠. 직접 북도 좀 치시고. 1987년인가, 1988년엔 누가 동교동으로 인사를 갔는데 ‘김성옥이랑 손숙은 잘 있느냐’고 묻더랍니다. 제 남편이 목포 출신이잖아요. 그래서 그 뒤로 공연할 때마다 티켓을 보내 드렸죠. 선거 때도 꼭 부부동반으로 구경 올 만큼 연극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작품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때때로 금일봉도 주시고. 액수는, 배우들 한 끼 밥 먹을 정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최초로 노래방에 출입하게 한 주인공이라면서요.
“1992년 대통령 선거에 떨어지고 한참 어려울 때였어요. 영국 다녀와서. 행사 마치고, 그날 제가 사회를 봤거든요. ‘노래방 가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 번도 없다셔요. ‘온 국민의 오락인데 정치인이 거길 안 가 봤다면 말이 안 된다’고 하고 그날 저녁에 신촌에 있는 허름한 노래방에 가서 한 시간 반 정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DJ는 첫 선곡이 ‘목포의 눈물’이었고 이희호 여사는 찬송가 비슷한 노래. 노래방 스타일하고는 좀 안 어울리는 곡이었죠.”
“늦사랑이 무섭더라”
—다른 분께도 늘 건넸던 질문입니다만, 손숙에게 연극이란 무엇입니까.
“전 연극이 제 평생의 길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큰일을 겪기 전까지는요. 제 꿈은 현모양처(賢母良妻)였고 연극은 취미나 여기(餘技)였어요. 남편이 그만두라면 그만두는…. 사명감이 없었던 거죠. 그런데, 러시아에서 <어머니>를 공연한 후 연극과 뒤늦게 사랑에 빠졌습니다. 늦사랑이 무섭던데요? 연습실에 앉아 있을 때가 너무 행복합니다. 어떤 배역이든 상관없이, 그 자체가 좋아요. 연극은, 저한텐 ‘돌아온 옛사랑’입니다.”
—가족 가운데 연극인은 없는지요.
“손녀들 가운데 예술이 꿈인 아이들이 둘. 큰딸의 딸이 지금 대학교 1학년인데, 호주에서 학교를 다닙니다. 2013년 극단 신시의 <미남이시네요>에 출연했었죠. 이름은 조민지. 제가 ‘일단 공부는 마쳐라. 연극은 그 뒤에 해도 된다’고 조언했어요. 둘째가 낳은 외동딸 하예린은 이제 계원예고 2학년에 올라갑니다.”
—좋은 배우란 어떤 존재입니까.
“관객과 교감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배우가 좋은 배우죠. 혼자서만 잘하는 건 소용이 없어요. 자기가 행복한 배우가 최고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무엇을 위해서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연극을 하는 배우. 요즈음 후배들은 다 똑똑해서 다들 잘할 겁니다. 김소희·황정민·서은경·이지아, 이런 친구들의 미래가 정말 기대됩니다.”
인터뷰는 이렇게 끝났다.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이 떠올랐다. ‘연극적’인 것은 그녀가 출연한 작품들인가 아니면 그녀의 인생 자체인가. 온갖 사연으로 점철된 손숙의 생애는, 어쩌면 대한민국 여성들의 고난을 증거하는 실물 샘플인 것은 혹시 아닐까. “인터뷰 초고(草稿)를 보겠느냐”는 말에 손숙은 웃으며 손사레를 쳤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손숙(孫淑·70)은 ‘파란곡절’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배우가 아니라, 그 자신이 파란곡절한 삶을 견뎌 온 사람이다. 지금의 잣대로 보자면 터무니없을 일들이 ‘관습’의 미명하에 벌어지던 시절. 딱 한마디로 정리해 보자.
손숙에게는 어머니가 여러 분이다. 한두 분 정도가 아니다. 네 분이다. 마흔 넘어서는 남편의 사업 빚을 혼자서 벌어 다 갚았다. 그것도 무려 22년에 걸쳐서.
—어렸을 때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네요.
“뭐, 꼭 그렇지도 않아요. 제가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밀양의 안동손씨 집성촌(集姓村)입니다. 기와집 많은 양반촌이었는데 8촌까지 한동네에 모여 살았죠. 아랫동네는 하인들이 살아 하인촌(下人村)이라고 불렸고. 보수적이라기보다는 고루할 정도로 체면과 관습을 따지는 분위기였어요. 예컨대, 동네 아저씨들과 잠깐만 놀아도 동네방네 금방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까.”
떠돌이학교
광복이 되자 죄우가 격렬하게 대립했다. 밀양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섯 살 때 읍내 장에 나갔다가 시신을 목격한 적도 있다. 사람들이 ‘빨치산의 시체’라길래 할머니께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다음부턴 장에 가지 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음 날, 빨치산들이 야밤에 동네에 몰래 내려와 ‘손씨들을 손보겠다’는 경고문을 붙이고 갔다. 인근에 지서(支署)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 봐야 경찰 한두 명이 근무하는 소규모였다. 그래서 손숙의 식구들은 솔가(率家)를 해서 읍내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가 천석꾼의 2대 독자(獨子)여서 먹는 걱정은 없이 자랐습니다. 또래들과 비교하면 축복받은 인생이었죠. 그래도 요즈음의 환경에 대면…. 제가 다니던 밀양초등학교가 6·25동란 때 육군병원으로 징발이 되었거든요. ‘떠돌이학교’라고, 선생님들이랑 아이들이 칠판 머리에 이고, 가마니 들고, 공터 찾아다니며 여기저기서 수업을 들었습니다.”
부친 손태목(孫泰穆·1919~2013)과 모친 정남교(鄭南橋)는 1934년에 혼인했다. 두 분 모두 16세 때다. 어머니의 본향은 상주(尙州). 외가가 더 양반 가문이라고 들었는데, 중매 배경은 모른다. 어머니의 외사촌 동생이 고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한 연극평론가 여석기(呂石基·92)다.
“아버지는 동래고보(東萊高普) 졸업 직후, 그러니까 혼인하자마자 도일(渡日)해서 교토(京都) 리메이칸(立命館)대학 상과를 다니셨습니다. 거기서 여자 유학생 만나 살림 차리고 4남매를 낳으셨지요.”
손숙에게 아버지는 제사 때, 명절 때, 방학 때만 잠깐잠깐 볼 수 있었던 사람이다. 평생 몇 번 만나지 못했다. 결혼식도 아버지 없이 했다.
어머니가 네 명
“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은 듬뿍 받았죠. 중학교 때까지 할머니 방에서 같이 잤으니까. 할아버지는 그 옛날에 자가용 타고 다니시던 밀양의 대지주셨습니다. 와세다(早稻田)대학을 졸업하셨고.
저는 어머니한테 지금도 농담처럼 말해요. 아버지랑 딱 세 번 주무신 거 아니냐고. 8세 위 언니, 저, 두 살 아래 남동생, 어머니 소생은 이렇게 삼남매니까. 남동생 손용삼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기도 했습니다. 소설로.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지금은 미국에 이민 가서 잘삽니다. 저랑 언니 사이에 새엄마가 낳은 언니 둘이 있고 둘은 제 동생이죠. 호적에는 다 저희 어머니 소생으로 되어 있습니다. 새엄마가 낳은 동생 하나는 용삼이랑 출생시기가 비슷해서, 쌍둥이로 올렸어요.”
손태목은 ‘신여성(新女性)’인 두 번째 부인과 주로 생활을 같이 했다. 손숙은 아버지가 여름방학 때 4남매를 데리고 밀양 본댁에 오곤 했었다고 기억한다. 현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자리에 있던 정동(貞洞)호텔 경영자가 손태목의 직함이다.
—세 번째 어머니는 어떤 분인가요.
“유흥업소에서 일하시던 분이래요. 6·25 때 아버지는 부산으로 피란 가서 남포동에서 카페를 했답니다. 그때 두 분이 함께 지내셨다는데, 사실은 그 전부터 알고 지낸 듯합니다. 저보다 여섯 살 위인, 가수 현미(76) 선생이랑 친구인 언니가 하나 있거든요. 그 언니는 호적에 올리지 않았고, 제사 때 가끔 얼굴을 비치곤 했죠. 미8군 무대 가수였는데 일찍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가끔 미국 가면 이 언니랑 만나서 수다 떨고 놀고 밥도 먹고 그러죠.”
네 번째 어머니는 일본 여성이다. 손숙의 부친과는 무려 19살 차. 마스다케(松竹) 영화사 소속 신인 여배우로, 미스 도쿄(東京)였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아버지, 일본 오가며 영화제작·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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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서울에 잠깐 다니러 온 아버지와 식사를 함께 하고 있는 연극배우 손숙(왼쪽). |
영화사료(映畵史料) 수집가인 정종화는 손태목이 관계하던 영화사를 신한문화사라고 증언한다. 1948년 개봉, 1949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2개 부문을 수상한 영국 발레영화 <분홍신(The Red Shoes)>을 수입한 회사. 한국 개봉은 1953년 12월 6일이다. 정종화의 평가다.
“<분홍신>은 절망에 빠져 있던 당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선사한 영화입니다. 젊은 지휘자와 발레리나의 로맨스를 다룬 이 영화를 보고 수많은 미래의 문인들과 음악인들이 영감을 얻었죠. 지금도 이 영화 이야기를 하는 올드팬들이 적지 않을 정도입니다. 흥행이 보장되는 서부극이 수입영화의 90%를 차지하던 시절이었죠. 고상한 취향이 없었다면 <분홍신>을 수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분홍신> 팸플릿에 나와 있는 신한문화사의 다음 수입 작품이 작곡가 헨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악성(樂聖) 그레이트 미스타 헨델>입니다. ‘청년들에게 이런 영화를 보여줘야지, 그래도 누군가는 이런 영화를 보겠지’,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전란 직후에 이런 영화들을 수입해서 개봉한 영화수입업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영화팬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國劇의 추억
‘일본 마마’는 아직 살아 있다. 손숙과는 지금도 가끔 만난다. ‘남동생’들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우리들 아버지와 어떤 관계냐’고 묻기도 했다.
“결혼 직후, 그래도 직접 찾아뵙는 것이 도리다 싶어 일본으로 찾아갔습니다. 여권 내려면 이런저런 서류를 수백 장 써 내야 했던 시절이죠. 비행기 안에서 계속 걱정했어요. 내가 과연 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을까. 잠깐이나마 뵈었던 적이 벌써 10여 년 전이었으니까. 그런데, 핏줄이라는 게 정말 신기하죠? 하네다 공항에서 아버지를 바로 알아봤다니까요.”
‘신여성’ 어머니는 아버지 도일 후 재가(再嫁)를 했다. 손숙의 어머니는 그쪽 4남매를 다 거뒀다.
“옛날 분이라 그런지, 혈육은 어찌 되었든 다 거둬야 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어렸을 때의 장래희망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버스 차장이요. 하루 두 번 버스가 다녔는데, 차장 언니들 베레모며 돈 받는 가죽가방이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나 호기심 같은 것이 많았던 거죠.”
—배우를 꿈꾼 건 아니고요.
“전혀. 다만 1년에 한두 번, 서커스나 여성국극(國劇)이 들어오면 정신없이 구경은 다녔죠. 곡마단이 낙동강 줄기 남천강변에 텐트를 치고 북 둥둥 울리면서 가두선전을 하면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학교도 가기 싫고…. 임춘앵 국극단(國劇團), 김진진 국극단은 읍내의 허름한 공회당에서 공연을 했는데, 어른들이 떼놓고 갈까 봐 문앞에 지키고 섰다가 기를 쓰고 따라나섰어요. 막이 조금 들려 있는 사이로 배우들 다리나 구두가 살짝 보이는데 그것만 봐도 며칠씩 잠도 못 잘 만큼 흥분하고.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서커스단 따라가려고 보따리 싸서 두 시간 가출(家出)한 적도 있습니다. 입단하면 매일 식초를 한 사발씩 먹어야 한다는 소문에 무서워서 얼른 집으로 돌아왔지만. 지금도 혼자만 알고 있는 가출 스토리입니다.”
손숙이 초등학교를 마치자 어머니는 손숙과 남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다. 1957년의 일이다. 8살 위 언니는 미리 상경(上京)해서 정동호텔 살림채에 머물며 이화여대를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미 일본으로 건너간 상태였다.
“어머니는, 당신이 ‘신여성’이 아니어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어요. 내 아이들은 그렇게 살게 하지 않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평생 처음으로 시부모께 대들었죠. 돈암동에서 방 한 칸 얻어 살았는데, 그래도 시골에서 계속 쌀은 올라오고…. 고생은 많이 했지만 적빈(赤貧)은 아니었습니다.”
풍문여중에 입학해서는 상처를 많이 받았다. 사투리 때문이다. 입만 열면 바로바로 급우들이 폭소를 터뜨리는 통에 6개월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서울에 경상도 출신 거주자가 많지 않던 시절이다. 침묵에 빠진 밀양 최고의 모범생을 구원한 건 급우의 편지다. 중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짝이 편지를 보내 왔다. 세련된 문장이었다.
“너무나 잘 쓴 글이었죠. 저도 바로 답장을 보내고, 편지 왕래를 계속했어요. 주로 책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말하자면, 선의의 독서경쟁을 했다고 할까. 둘 다 도서관에 붙박이로 틀어박혀서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 일본문학 단편선을 읽었죠. 이 무렵의 독서가 나중에 제 연극적·문학적 감수성에 자양분이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김연(金燕). 소설가 김광주(金光洲·1910~1973)의 딸이자 《칼의 노래》 《남한산성》을 쓴 소설가 김훈(金勳)의 누나다. 손숙은 풍문여고에 진학해서 문예반장을 했다. 고교생 문학반 연합서클에서 만났던 선후배 인물이 《장길산》의 황석영(黃晳暎),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세희(趙世熙), 《갈 수 없는 나라》의 조해일(趙海一)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가 준 충격
고2 때 김연이 연극 티켓을 가져왔다.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한 유진 오닐 작 이해랑(李海浪·1916~1989) 연출의 <밤으로의 긴 여로>. 이해랑이 아버지 역으로, 황정순(黃貞順·89)이 어머니 역으로, 장민호(張民虎·1924~2012)가 형, 훗날 KBS 드라마 PD로 활약하는 최상현이 동생, 여운계(呂運計·1940~2009)가 하녀로 출연했다.
“충격이었죠. 책에선 느끼지 못했던 직접적인 감동이 너무 컸으니까. 어렸을 때 서커스 보고 국극 구경 다닌 것 말고는 처음 공연을 접한 건데, 뭐랄까, 봉인된 감정이 한꺼번에 차오르는 느낌? 지금도 대사를 다 기억합니다. 소름 돋았어요. 바로 내 얘기 같았으니까.”
유진 오닐은 육친(肉親)의 비참한 과거를 스스로 폭로한 이 작품을 ‘피와 눈물로 점철된 오랜 슬픔의 연극’이라고 불렀고, 사후(死後) 25년간 공개를 하지 말라고 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타계(他界) 2년 후인 1955년 초연이 이루어졌다. 사후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은 유진 오닐에게 생애 네 번째 퓰리처상을 안겼다. 늙은 연극배우인 아버지 제임스 티론, 마약중독자 어머니 메리, 알코올 중독자인 형 제미, 병약하고 시인 기질을 가진 동생 에드먼드(청년시절의 작가) 등 일가족이 빚어 내는 하루 저녁의 음울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밤으로의 긴 여로>는 손숙의 가족사(家族史)와 일부 닮은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때부터 연극에 흠뻑 빠져들었어요. 고3 때 드라마센터에서 전국 고교생 연극 경연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남학교는 <왜 싸워>, 여학교는 <춘향전>이 지정작품이었죠. 너무너무 춘향이를 하고 싶은데 성격상 오디션에 나서지는 못하겠고, 입시도 걸려 있고. 결국 오디션 응모를 안했어요. 잘난 척, 관심 없는 척, 쓸데없이 자존심 세우느라고. 저보다 한 학년 후배인, 나중에 <모닥불> <끝이 없는 길> <방랑자여>를 부른 가수 박인희가 춘향이로 뽑혔고, 저랑 같은 학년이던, 배우를 하다 지금은 국회의원으로 일하는 김을동이 방자 역을 했지요. 그래서 제가 참다 참다 못해서 스태프로 참여하게 된 겁니다. 그것도 연습실 주변을 며칠을 맴돌다가 겨우…. 제 자존심 때문에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못하게 된, 평생 굉장히 힘든 기억입니다.”
‘여배우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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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2년 연극 <신의 아그네스>를 연습 중인 신애라, 손숙, 박정자(왼쪽부터). |
—대학은 사학과를 갔네요.
“저는 계속 문학을 하겠다고 했는데 학교 선생님께서 ‘정말 문학을 하고 싶다면 먼저 역사와 철학을 알아야 한다’며 국문과보다 사학과를 권했어요. 고대 사학과 63학번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여학생이 드물던 시절이라 ‘풍문여고 연극반 조연출이 입학했다’고 소문이 돌았어요. 전 바로 고대 극회(高大劇會)로 납치(?)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입학한 해에 개교 60주년 기념 선후배 합동공연이 있었습니다. <삼각모자>라는 스페인 코미디인데, 포도농사 짓는 늙은 농부의 젊은 아내를 시장(市長)이 탐낸다는 내용이었죠. 연출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당시 실험극장 연출로 있던 허규(許珪·1934~2000), 늙은 농부 남편 역이 김성옥, 제가 젊은 아내, 시장에 나영세, 시장 부인이 여운계. 고교시절 저희를 가르치던 그분을 같은 과 선배로, 고대 극회 선배로 다시 만난 겁니다.”
과연 연기가 괜찮기는 한 건지 걱정이 많았는데, 연극평론가이자 이화여대 교수였던 김갑순(金甲順)이 손숙을 가리켜 ‘여배우 한 명이 탄생했다’고 《동아일보》에 평을 썼다. 허규와 김성옥은 친구사이였다. 손숙은 첫 무대에서 주인공을 맡은 자기의 ‘파격적 캐스팅’ 배후에 김성옥의 입김이 작용한 듯하다고 믿는다.
어머니의 반대 무릅쓰고 결혼
—연극계 원로들은 두 분의 사랑이 열렬했었다고 회고합니다.
“전 사랑에 빠지면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래서 대학 3학년 때 결혼하면서 학교도 중퇴하고, 연극도 그만뒀어요. <삼각모자> 이후 <바비도> <목장의 새악시> 등의 대학연극에 출연했거든요.”
모친의 결혼반대는 생각 이상이었다. 예비사위와의 첫 상면은 극장 로비에서였는데, 어머니는 김성옥의 분장한 얼굴을 못마땅해했다. 여석기 교수가 평소에 김성옥을 아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손숙은 어머니께 “석기 아저씨께 물어보시라”고 했다. 돌아온 답은 “배우로서는 괜찮은데 뭐할라꼬 그리 시집보내노?”였다.
“어머니가 교육에 한이 많았잖아요. 그래서 딸 아들 구별 안 하고, 딸도 배워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사회에 나가서 일하라는 게 아니라 좋은 남자 만나 잘살기 위해서 배워야 한다는 게 어머니의 신념이었던 것 같아요.
6개월 동안, 정말로 말 한마디도 안 하고 냉전(冷戰)했습니다. 이 결혼 하면 당신이 먼저 죽겠다고, 치마끈으로 목을 매기도 했다니까요. ‘내가 어떻게 너희들을 키웠는데, 네가 그럴 수 있느냐’는 거였죠.
조건만 봐도 하나도 맞는 게 없었잖아요. 나이는 아홉 살이나 차이가 나지, 모아 놓은 재산은 없지, 직업은 불안정하지, 고향도 전혀 다르지. 자식에 대한 기대가 산산이 부서진 거지. 아마 제 딸이 그랬다면 저도 어머니와 똑같은 심정이었을 거예요.”
“1년에 연극 두 편만 하게 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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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연극 <매디슨 카운티의 추억>에서 손숙은 중년에 찾아온 ‘늦사랑’의 여주인공 역을 맡아 열연했다. |
“맞아요. 제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늘 어머니와 애증(愛憎)의 관계였어요. 특히 전 예민했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미움이 굉장히 심했어요. 당신의 한(恨)을 저희를 통해 풀려고 하는 것이 힘들었고, 도대체 왜 평생을 저러고 사시나 싶었던 거죠. 그래서 결혼을 해서 집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죠. 아버지의 부재(不在)를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으로 메우려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돌아가실 때까지도 저랑 어머니는 관계가 팽팽했어요. 안 뵈면 너무 가슴 아픈데, 막상 만나면 화가 나는 그런 사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정말 후회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생의 업으로 배우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주부로 가정을 지키고 싶었다. 일단 대학을 졸업하라는 남편의 권유에 뭐하러 졸업을 하느냐고 반문했을 정도였다. 계기는 우연히 찾아왔다.
“결혼해서 2~3년 살다 보니 이상하게 무대에 대한 향수(鄕愁)가 저를 아프게 했습니다. 어느 날 명동 시공관(현 명동 예술극장)을 우연히 지나는데 눈물이 핑 돌더군요. 이 느낌은 뭘까 싶은 게…. 게다가 그때는 여배우가 귀하던 시절이라 대학연극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에겐 프러포즈가 많았습니다.
남편한테 1년에 연극 딱 두 편만 하게 해 달라고 사정했어요. 어렵게 허락을 받아서 시작한 작품이 유진 오닐 작 정일성(鄭一成) 연출의 <상복(喪服)이 어울리는 엘렉트라>였습니다. 유진 오닐의 작품이라는 데 깜빡한 거죠.”
<喪服이 어울리는 엘렉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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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9월 1인극 〈담배피우는 여자〉 연습 도중 연출가인 임영웅씨(왼쪽)와 대본을 살펴보는 손숙. |
다음 작품은 김기팔(金起八)이 쓰고 임영웅(林英雄)이 연출한 <그 여자의 옷을 입혀라>였다. 손숙의 역할은 유학 중 우울증에 걸린 여학생이었는데, 반바지에 와이셔츠를 입고 출연해서 ‘선정성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것이 화제가 되고 홍보가 되면서 연극은 대박이 났다. 두 작품 연속 안타를 치고 나니 출연 제의가 끊이지 않았다.
—늘 주인공만 하시고, 배역운이 최고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복 받은 배우죠.”
—임영웅 선생을 따라 극단 산울림에 입단하셨네요. 좀 더 직업적으로 연극을 해 보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한 건가요.
“연극을 장기적으로 하려면 소속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헨리8세와 여인들> <꽃피는 체리> <홍당무> 등이 산울림 시절 제 기억에 남아 있는 연극입니다.”
1969년, 국립극단이 체코 극작가 카렐 차페크의 <인조인간>을 공연했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로봇’이라는 단어는 차페크가 이 작품을 위해 만들어 사용한 조어(造語)다. 어느 날 장민호 선생이 급히 부르신다기에 달려가 보니 대역(代役) 부탁이었다.
이해랑의 칭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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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연극 〈홍당무〉에 남장을 하고 출연한 젊은 날의 손숙(오른쪽). 이해랑 선생이 이때 그의 연기를 두고 극찬했다. |
개막까지 남은 시간은 딱 보름. 죽어라고 연습해서 무대에 섰다. 이때 연출가 이해랑과 처음 만났다. 며칠 동안의 공연이 무사히 막을 내리자 이해랑이 손숙을 불러 “<홍당무>의 주인공 16세 소년 역은 일본에서 유명한 여배우들이 많이 거쳐 간 역이다. 그런데 손숙만큼 잘한 배우가 없더라”고 말했다.
“산울림 공연을 보셨던 거죠. 대가(大家)한테 인정을 받은 셈이라, 정말 좋아서 많이 울었습니다. 이해랑 선생님은 제 인생의 스승이시죠. 안목, 인품, 카리스마…. 그만큼 책을 많이 읽고, 자존심 지키시고, 예술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한 분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공연이 인연이 되어 손숙은 1971년 국립극단에 입단한다. 1990년 퇴단할 때까지 이해랑 연출로는 <들오리> <파우스트> <바냐 아저씨> 등을 했고 도쿄예술대 출신인 원로 이진순(李眞淳)과는 <페르귄트> <징비록(懲毖錄)> <손탁호텔> <산수유>를 함께 했다. 김정옥(82) 연출로는 <베르나르 알바의 집>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가 기억에 남는다.
—이해랑, 이진순 선생은 리얼리즘 연극을 평생 동안 추구하신 분이고 김정옥 선생은 총체극(總體劇) 개념을 한국 연극계에 처음 도입하신 분인데, 연출가로서 각각 어떤 장점이 있습니까. 손숙의 예술적 동반자라고 할 수 있는 또 다른 스승 임영웅도 리얼리즘 연극의 거두(巨頭)이시고.
“제가 감히 그분들을 평할 수는 없죠. 다만 이런 얘기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신극(新劇)이 도입된 이래 리얼리즘 연극을 정극(正劇)으로, 그 밖의 시도들을 예술적 실험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였잖아요? 저는 마당극이나 탈춤 혹은 한국적 요소를 가미한 연극, 예컨대 극단민예나 오태석(吳泰錫) 선생이 주재하는 극단목화의 작품들의 예술적 가치를 존중합니다. 다만 제 취향이 리얼리즘 쪽이라고 할까요?
노래로 치자면, 즉흥연주도 넣고 변주도 하고 즉석화음도 넣고 관객 박수도 유도하는, 그렇게 부르는 가수도 있고, 악보대로 박자 딱딱 지켜 가면서 부르는 가수도 있잖아요? 저는 후자(後者)입니다. 정해진 틀과 규칙을 가급적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때가 가장 편합니다. 신명이나 원초적 연극성보다는, 정제되고 걸러진 형식미가 제 몸에 더 잘 맞는 거죠.”
국립극단은 그 위상과 역할을 두고 여러 가지 논란이 많았다. 특히 2010년 6월에 있었던 이른바 ‘법인화(法人化) 논란’이 하이라이트다. ‘민영화의 전 단계다’라는 법인화 반대 의견은 ‘철밥통엔 개혁이 필요하다’는 찬성론과 맞섰다. 예컨대, ‘수익성을 추구하다 보면 예술성이 떨어지지 않겠느냐’는 의견과 ‘국립극단은 예술성을 추구하기 이전에 이미 전속단원의 철밥통으로 전락했다’는 의견이 대립한 것이다.
법인화의 핵심은 ‘예술감독제’다. 급여를 받는 단원들을 내보내 고정비용을 줄이는 대신, 예술감독이 매 작품의 연출가와 배우들을 오디션으로 선발해 공연을 이어 간다는 아이디어다. 선의로 해석하자면, 이 논란은 배우 중심이냐 제작 중심이냐의 철학적 논쟁이기도 하다.
김옥숙 여사에게 국립극단 급여 인상 건의
—이미 법인화 작업은 마무리되었습니다만, 국립극단에 19년 동안 몸 담았으니 할 말씀이 좀 있겠지요.
“저는 왜 국립극단이 명실상부한 기관이 되지 못하나 불평불만이 많았어요. 국립극단은 일반극단이 하기 어려운 고전이나 창작극을 공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일류들이 모여 문화의 수준을 높이고,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순회공연도 하고. 국립극단은 연극인들의 꿈과 이상을 현실에서 구현한 단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뭐가 문제였습니까.
“사실 국립극단 단원들이 받았던 처우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때 공연 보러 오신 김옥숙(金玉淑) 여사한테 면담 신청을 했겠어요? 그때 급여가 100% 올랐고 그 뒤로는 지금까지 거의 인상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연극계가 많이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일부 단원들의 의식수준도 공무원처럼 변해 가더군요. 그래도 고정수입이 있으니까,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느니 그냥 하던 일을 하자는 식으로요. 예술가가 ‘실패’를 두려워하고, ‘고인 물’처럼 머물러 있으면 곤란한 것 아닌가요?”
—해결책은 있습니까.
“장충동 국립극장은 연극 공연장으로는 최고가 아닙니다. 명동 예술극장이 오히려 더 나아요. 일단 국립극단에 걸맞은 공연장이 하나 필요하죠. 배우들 문제는, 국립창극단을 보면 인간문화재 제도를 잘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국립극단도 한 10명 내외로, 정말 대단한 분들만 모아서 종신단원제를 시행하면 어떨까 합니다. 급여는, 많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월 300만원 정도면 어떨까요. 외국에는 왕족이나 퍼스트레이디가 후원회장을 맡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도 그런 전통을 만들어 가면 좋을 것 같고….”
“돈 독이 오른 것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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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오진행은 경제적으로 어렵던 시절 손숙에게 내려온 동아줄 같았다. 사진은 MBC 라디오 <손숙 김승현의 여성시대> 신권철 PD(가운데), 김승현씨(왼쪽)와 손숙씨. |
영상매체 출연자는, 다소 발음이 무뎌도 큰 지장을 받지 않는다. 입술읽기(lip reading)를 통해 시청자들이 출연자들의 말을 따라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라디오는 다르다. 오로지 명확한 발음으로만 승부해야 한다. 연극배우도 마찬가지다. 마이크 없이, 저 멀리 3층 객석까지 오직 자기의 목소리로만 대사를 전해야 하는 것이 배우의 숙명이다. 대중에게 손숙은 연극배우보다는 라디오 진행자로 더 친숙하다.
그래서 연극계 일각에서는 ‘왜 손숙이 연극을 등한시하느냐’며 다소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분들이 있다. 1989년 MBC라디오 ‘여성시대’로 처음 마이크를 잡은 이래, 손숙은 24년째 라디오 진행을 이어 오고 있다. 라디오뿐 아니라 각종 행사에 사회를 보러 다니자 심지어는 ‘돈 독이 올랐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손숙에게는 방송 일을 해야만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돈 독이 오른 것 맞아요. 남편이 부도를 냈거든요. 1989년부터 갚기 시작했는데, 2010년인가 2011년쯤에야 그 빚을 다 껐습니다. 얼마인지도 몰라요. 수십억은 되겠죠? 하나를 갚으면 다른 채권자가 툭 나타나고, 그거 갚으면 은행에서, 보험사에서 대출금 상환 통지서가 날아오고, 며칠 있다가 또 세무서에서 세금 내라고 독촉장 보내고….”
독립기념관 화재로 남편 회사 부도
—남편이 무슨 일을 했던 거죠.
“밀랍인형 만드는 사업. 독립기념관에 있는 독립투사 밀랍인형이 제 남편 회사에서 제작한 겁니다. 런던에 ‘마담 타소’라는 밀랍인형 전시관 있잖아요, 그곳이랑 정식 라이선스 계약 맺고 영국에서 제작 전문가 불러다가 6개월간 저희 집에 숙식을 시키며 인형을 만들었죠. 안마사도 매일 불러다 마사지도 시켜 주고…. 그런데, 독립기념관 화재가 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1986년 8월 4일, 준공 및 개관을 11일 앞두고 독립기념관에 대화재가 발생했다. 본관 지붕이 거의 녹아 내릴 정도의 큰 사고였다. 원인은 배선공사 부실이지만, 준공을 1년 앞당기려고 무리하게 서두르다 화재가 발생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인형들을 만들어서 전시장에 가져다 놓았는데, 다 녹아 버렸습니다. 밀랍인형이라 그야말로 초처럼 녹아내렸어요. 장인(匠人)은 이미 출국(出國)했지, 계약상 최종 납품(納品) 후 대금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준공은 무기연기되었다고 하지, 돈 들어오면 바로 갚겠다고 끌어다 쓴 돈은 많지, 독립기념관 개관 후엔 자동홍보가 될 테니 기업체, 박물관에서 순차적으로 주문을 받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다 어그러진 거죠. 아, 지금은 없어진 드림랜드에 납품했으니까 딱 두 군데 설치하고 끝난 거네요.”
남편은 도피하고, 집으로는 거의 매일같이 청구서가 날아왔다. 국립극단 월급은, 요즈음 감각으로 150만원 정도였다. 남편의 빚보증인이 ‘손숙’으로 올라 있어서 남편을 고발하지 않는 한 이혼을 한다 해도 ‘손숙’에게 갚을 의무가 있다고 했다.
마침내, 대구세무서에서 ‘차압’ 고지가 오고 세간에는 ‘빨간 딱지’가 붙고, 한 달 안에 집을 내줘야 하는 극한 상황이 왔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릴까도 생각
“집이 경매로 넘어갔어요. 친구가 도와줘서 미분양 아파트 하나를 겨우 얻었죠. 이사 전날, 정말 죽으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그때 아이들이 맘에 걸렸죠. 제가 딸만 셋인데, ‘내가 죽으면 쟤들은 어떻게 되나’. 그래서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다가 참았습니다. 정말 마지막 순간에 겨우….”
아침에 대구에 있는 세무서에 가서 손이 발이 되게 빌고, 허겁지겁 서울로 돌아와서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때, 공연을 계속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전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었을 겁니다. 매일 무대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신없이 바쁘고, 그래서 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던 거죠.”
그때 이후, 남편과는 ‘20년째 별거 중’이다. 손숙에게 남편은 ‘아이들 아빠’다. 서로 잘살고, 가끔 만나고, 소식 듣고 하는 것이 서로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식구들 먹을 것을 마련해 놓고, 그 후에 하고 싶은 연극을 하겠다는 생각을 그 남자가 했을 수도 있었겠구나’라고 좋게 이해하기로 했다. 그야말로 막판까지 내몰렸을 때, 하늘에서 보내 준 동아줄이 ‘라디오 진행’이다.
“MBC 라디오 박수현 PD가 편지를 하나 주면서 읽어 보라는데, 슬픈 내용이라 금방 처지가 오버랩되면서 정신없이 빠져들었지요. 며칠 후 박 PD가 ‘라디오 안 해 보실래요?’라며 연락을 해 왔습니다. <봉두완 손숙의 여성시대>. 라디오 발탁 배경은 지금도 몰라요.”
‘라디오 진행자’ 손숙의 별명은 ‘수도꼭지’였다. 방송 중간에 너무 울어서 생긴 별명이다. 청취율이 급등했다. ‘너무 슬퍼서 차를 세우고 울었다’는 편지가 쇄도했다. 강연이든, 원고청탁이든, 신문칼럼이든, 요청이 오면 마다하지 않았다. 절실했으니까.
“제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아무도 몰랐어요. 나중에 사정을 알고 제 딸들이 ‘엄마, 그때 어떻게 견뎠어요’라고 했을 정도니까. 겨우 한 군데 빚을 끄고 나면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서류가 또 날아옵니다. 출연료 반은 보증보험에서 차압이 들어와서 자동으로 가져가고, 나머지로 남은 빚 끄고 생활비 쓰고…. 방송국 로비에 늘 누군가가 앉아서 저를 감시했습니다. ‘아마도 사채업자로구나’, 그렇게 짐작했지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어요.”
경제적인 문제 말고도 손숙이 라디오에 감사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라디오를 진행하기 전엔 제 스타일이나 성격이 좀 뾰족하고 자존심 세고 매사 분명하고, 뭐랄까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쪽이었습니다.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을 하면서 인생공부 제대로 했지요. 고부(姑婦)간, 부부간 온갖 사연들을 읽으면서 제 스스로 치유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이 모든 이야기들이 인생교과서 같다는 생각을 하고…. ‘라디오에서 제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위로가 될 수도 있고 비수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조금 더 상대방을 배려하게 되고….”
손숙의 라디오 경력은 SBS <손숙 김범수의 아름다운 세상> <김승현 손숙의 편지쇼> 등으로 단절없이 이어졌다.
—라디오를 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일화가 있다면요.
“IMF 때 ‘회사도 망하고, 친가 처가 다 망했습니다. 이 편지가 제 유서(遺書)입니다’라는 사연을 받았어요. 펑펑 울면서 방송했죠. 제 빚 갚는 얘기도 처음으로 털어놓고. ‘제발 죽기 전에 나랑 전화 좀 하자’, 막 울부짖고.
2013년 대구에서 <어머니>를 공연할 때 어떤 신사 분이 딸, 부인 동반해서 찾아오셨어요. ‘방송 듣고 다시 살자고 결심했다’고, 자기가 바로 그 편지를 보냈던 당사자라고, ‘지금은 다 해결했다’고. 분장실에서 붙들고 또 막 울었지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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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3월 공연한 <어머니>에서 어머니 역을 맡은 손숙이 전쟁 통에 피란지에서 끝내 병사한 아들을 안고 오열하는 연기를 하고 있다. |
—중년 여성의 인간선언 같은 작품들이 주류입니다.
“의도적인 건 아니고,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아냐, 내 잠재의식이 그리로 날 몰아간 걸까? 큰일을 겪고 나니 자유가 찾아오더군요. 예순 무렵에 연두색 비키니 입고 무대에 서고(<셜리 발렌타인의 일기>), 딸이 자살한다는데도 ‘쟤가 죽으면 나는 어쩌나, 오빠 집에 가 있으랴?’고 자기생각만 하는 이기적이고 철없는 엄마도 연기하고(<엄마, 안녕>).
우리 세대의 여성이란 늘 희생하고 배려하고 그런 걸 미덕이라고, 어쩌면 운명이라고 알고 살았는데, 이제는 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되는 것 아닌가요? 다 내려놓으면 편해집니다.”
—어떤 인터뷰를 보니 평생 여러 번 다시 공연하고 싶은 작품으로 이윤택 연출의 <어머니>를 꼽으셨더군요.
“1999년에 시작했고, 거의 해마다 공연하는, 제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작품이죠. 제 어머니가 자꾸 생각나니까. 전 평생 어머니 가슴에다 못질하는 딸이었어요. 계속 뜻을 거스르고 살았으니까. 후회스럽고 죄송하고. 이윤택(李潤澤)은 천재입니다. 대중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타고난 재능이 있습니다. 제작비라든가 현실적 여건이 조금만 좋아지면 격(格)을 확 높여서 갈 수도 있을 텐데….”
“‘어머니’라는 단어는 세계 공통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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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5월 29일 러시아에서 <어머니> 공연을 마친 후 김재철 무역협회장(맨 왼쪽)으로부터 격려금을 받는 손숙. 이것 때문에 결국 한 달 만에 환경부 장관직에서 하차하고 말았다. |
“안 가면 어떨까, 잠깐 고민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국제적인 약속이 다 되어 있고, 대역을 연습시키기엔 절대 시간이 모자랐으니까. 장관 임명 발표가 나고 극단 자유의 이병복(李秉福)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왜 장관 한다고 그랬니? 그런데, 러시아는 꼭 가야 한다’고. 격려금은 배우들한테 다 나눠주었죠. 그 일이 구설수에 오르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후회 없어요.”
역설적으로, 손숙은 배우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바로 그때 그 공연을 꼽는다.
“모든 러시아 관객이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제 인생에 그런 찬란한 박수는 처음 받아 봤어요. 내가 배우가 아니라면 어디 가서 어떻게 이런 환영을 받을 수 있을까, 뿌듯한 자부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꽃 한 송이씩을 들고 줄을 쫙 서서 분장실로 들어왔어요.
그래서 제가 ‘왜 울었냐? 내용은 이해하고 울었냐?’고 물었더니, 그들이 ‘어머니라는 단어는 세계 공통어다. 우리도 전쟁을 겪고, 어렵게 살았다. 연극의 내용을 충분히 이해했다’라고 대답하더군요. 지금도 힘들 땐 그때 러시아 관객들의 반응을 생각하며 위기를 벗어납니다.
국내 공연 때도 우는 분이 많은데, 관객들이 우는 연극은 배우가 힘들어요. 끝나면 6개월간 온 몸이 아프지요. 아마 에너지가 바닥까지 방전이 돼서 쉽게 지치는 것 아닐까요. ‘무대 위의 이야기’가 알게 모르게 실제 삶에 영향을 미치는 거죠.”
김대중과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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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대통령당선자가 1998년 1월 30일 국회 귀빈식당에서 열린 문화예술계 인사 초청 오찬모임에서 참석자들과 악수하고 있다. 가운데가 연극배우 손숙씨. |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의 일인데, 제가 밀양에 가서 공연을 했거든요. 밀양 공연은 고향 떠나고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3분의 1쯤 이야기가 흘러갔나 싶은데 객석 중간에 어머니가 앉아 계신 겁니다.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전 생생하게 봤어요. 그날 어떻게 공연했는지 모르겠어요. 넋이 나가서….
공연이 끝나고 연출자 이윤택씨가 와서 ‘여태껏 공연 중에 최고였다’고 흥분했습니다. 제가 ‘우리 어머니가 왔었어’라니까 ‘선생님, 나중에 밀양에서 <어머니> 공연하다 돌아가세요’라고 말하는데 하나도 안 섭섭한 거야. 그러고 싶어요. 근사할 거야, 그렇죠?”
—그 공연이 계기가 돼 이윤택 선생이 밀양에 터를 잡은 거로군요.
“그렇죠. 시(市)에서 폐교(閉校)를 내줘서 거기에 연극촌(演劇村)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연희단 거리패가 상주하면서 작품을 만들고 있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평소부터 교분이 있었나요.
“그분이 문화에 관심이 많았죠. 직접 북도 좀 치시고. 1987년인가, 1988년엔 누가 동교동으로 인사를 갔는데 ‘김성옥이랑 손숙은 잘 있느냐’고 묻더랍니다. 제 남편이 목포 출신이잖아요. 그래서 그 뒤로 공연할 때마다 티켓을 보내 드렸죠. 선거 때도 꼭 부부동반으로 구경 올 만큼 연극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작품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때때로 금일봉도 주시고. 액수는, 배우들 한 끼 밥 먹을 정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최초로 노래방에 출입하게 한 주인공이라면서요.
“1992년 대통령 선거에 떨어지고 한참 어려울 때였어요. 영국 다녀와서. 행사 마치고, 그날 제가 사회를 봤거든요. ‘노래방 가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한 번도 없다셔요. ‘온 국민의 오락인데 정치인이 거길 안 가 봤다면 말이 안 된다’고 하고 그날 저녁에 신촌에 있는 허름한 노래방에 가서 한 시간 반 정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DJ는 첫 선곡이 ‘목포의 눈물’이었고 이희호 여사는 찬송가 비슷한 노래. 노래방 스타일하고는 좀 안 어울리는 곡이었죠.”
“늦사랑이 무섭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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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8월 6일 연극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에서 신구와 함께 연습 중인 손숙. |
“전 연극이 제 평생의 길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큰일을 겪기 전까지는요. 제 꿈은 현모양처(賢母良妻)였고 연극은 취미나 여기(餘技)였어요. 남편이 그만두라면 그만두는…. 사명감이 없었던 거죠. 그런데, 러시아에서 <어머니>를 공연한 후 연극과 뒤늦게 사랑에 빠졌습니다. 늦사랑이 무섭던데요? 연습실에 앉아 있을 때가 너무 행복합니다. 어떤 배역이든 상관없이, 그 자체가 좋아요. 연극은, 저한텐 ‘돌아온 옛사랑’입니다.”
—가족 가운데 연극인은 없는지요.
“손녀들 가운데 예술이 꿈인 아이들이 둘. 큰딸의 딸이 지금 대학교 1학년인데, 호주에서 학교를 다닙니다. 2013년 극단 신시의 <미남이시네요>에 출연했었죠. 이름은 조민지. 제가 ‘일단 공부는 마쳐라. 연극은 그 뒤에 해도 된다’고 조언했어요. 둘째가 낳은 외동딸 하예린은 이제 계원예고 2학년에 올라갑니다.”
—좋은 배우란 어떤 존재입니까.
“관객과 교감하고 공감할 수 있는 배우가 좋은 배우죠. 혼자서만 잘하는 건 소용이 없어요. 자기가 행복한 배우가 최고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무엇을 위해서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서 연극을 하는 배우. 요즈음 후배들은 다 똑똑해서 다들 잘할 겁니다. 김소희·황정민·서은경·이지아, 이런 친구들의 미래가 정말 기대됩니다.”
인터뷰는 이렇게 끝났다. 장자(莊子)의 호접몽(胡蝶夢)이 떠올랐다. ‘연극적’인 것은 그녀가 출연한 작품들인가 아니면 그녀의 인생 자체인가. 온갖 사연으로 점철된 손숙의 생애는, 어쩌면 대한민국 여성들의 고난을 증거하는 실물 샘플인 것은 혹시 아닐까. “인터뷰 초고(草稿)를 보겠느냐”는 말에 손숙은 웃으며 손사레를 쳤다. 다른 사람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조영일
(2014-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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