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列傳] ‘쿠웨이트 朴’ 최주봉 : 월간조선

여덟 살 꼬마는 서커스단 개구멍을 들락거렸다. 휴전(休戰) 직후의 일이다. 사람들이 다시 삶을 꾸려 가기 시작했고, 충청도 예산군 삽다리마을에도 5일장이 섰다. 서커스는 매일매일 레퍼토리가 똑같은데, 곡예가 끝나고 보여주는 단막극은 닷새 동안의 프로그램이 다 달랐다. 오늘은 <원수 맺은 두 남매>를 했는데 내일은 <외눈 점박이>를 보여준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견딜 수 없었다. 다섯 편의 이야기를 다 보지 않으면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 같은 느낌. ‘공연 첫날 제 돈 내고 혼자 들어온’ 꼬마 손님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른바 ‘기도(木戶·표받기와 공짜손님을 단속하던 극장 관리인)’들도 둘쨋날부터는 눈을 감아 주었다. 어쩌면, 마지막 ‘연극’하는 시간에만 살짝 묻어 들어간 것이 공짜입장의 비결인지도 모른다. 꼬마의 이름은 최주봉(崔周鳳·68)이다.

—그때는 공짜입장이 흔하던 시절이 아닌가요.

“우리 부모님이 장터에서 건어물점을 하셨어요. 논농사도 20마지기 정도 지으셨고. 그러니 늘 바쁘셨지요. 명절 때나 바쁠 때는 나도 가게 나가서 장사를 도왔습니다. 어린애지만 한몫한다고들 그랬어요. 그땐 다 그랬지. 8남매의 맏이라 일종의 의무감 비슷한 걸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고. 곡마단이 들어오면 나무로 만든 돈통에서 딱 입장료만큼만 꺼내다 가설천막으로 달음박질치는 거죠. 부모님도 내가 구경 다니는 걸 용인해 주시고….”

옆집 살던 조영남

—당당하게 구경 다닌 거네요.

“그렇죠. 다른 아이들은 서커스가 좋다는데 난 첫날 공연 보고 나면 그게 시시한 겁니다. 시시하다기보다 재미가 덜한 거지. 공중그네 나오고 통 돌리기 나오고 말 달리는 서커스…. 똑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되는 거니까. 그런데 연극은 매일 얘기가 달라지는 겁니다. 내일은 도대체 무슨 얘기가 나올지 그게 그렇게 궁금하더라고요.

6·25 때만 해도 서커스가 어디 있어요. 근데 휴전 딱 되니까 장도 서고 공연물이 들어오더라니까. 시골에선 구경났다고 마을 전체가 들뜨고, 그 먹고살기 어려운 와중에도 사람들이 모여서 웃고 울고 박수치고….”

—6·25 직후의 시골 풍경이 그랬군요. 6·25에 대한 기억은 없나요.

“그게 우리 세대의 행운입니다. 저보다 서너 살 많은 선배님들만 해도 6·25의 기억이 생생하죠. 머릿속 한가운데 참혹한 기억이 새겨진 채로 살아가시는 거지. 물론 저도 피란 다니고, B-29 날아다니고, 폭격 피해 방공호 들어가고, 그런 기억은 있어요. 하지만 그 상황이 얼마나 비참하고 힘든 것인지를 제대로 인식할 나이는 아니었던 거죠.”

동네에 약장수가 들어오면 임시로 장이 섰다. 구경거리가 귀하던 시절이라 어설픈 깽깽이(바이올린)와 재담이 전부인데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마이크와 앰프가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물건이던 시절이라 동네 대표가 나가서 마이크를 잡았다. 자꾸 더 하라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쳤다. ‘나는 노래 말고 다른 걸 해야지’라고 꼬마는 생각했다. 약장수가 들어올 때마다 노래를 부르던, 우시장(牛市場) 옆집에 살던 동네 형은 나중에 진짜로 가수가 됐다. 조영남(趙英男)이다.

—두 분, 알고 지낸 사이십니까.

“아뇨. 영남이 형이 먼저 유명해졌으니까 저는 이분이 고향 선배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영남이 형 동생 조영수 교수는 제 동생하고 같은 반이었으니까 그 친구는 어렸을 때부터 알았고. 영남이 형은 어렸을 때부터 소리가 좋았어요. 이북에서 피란 나와서 우리 마을에 자리 잡고 살았는데, 아마 영남이 형은 고향이 북쪽이고 영수는 충청도 태생일 겁니다.”

친구들과 ‘극장놀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보니 뭔가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싶었다. 동네 꼬마들을 모았다. ‘그쪽에서 내가 총을 쏠 거야, 그럼 앞으로 쓰러져. 넷 셀 때까지 움직이지 말고 누웠다가 일어나서 나랑 엎치락뒤치락….’ 나름대로 동작과 대사를 약속하고 10분에서 20분 걸리는 공연을 꾸몄다. 겨우내 여러 작품(?)을 돌아가며 공연했다. 자기 방식대로 살을 붙인 <원수 맺은 두 남매>와 <외눈 점박이>였다. 동네에서 가장 큰 집 안방을 빌렸다. 방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미닫이문이 객석과 무대를 구분하는 장치였다. 담요로 막을 만들고 표도 팔았다. 신문지를 돈 모양으로 네모나게 오려 와야 ‘표’를 내줬다. 아이들 노는 것이 재미있어서였는지, 어른들이 다들 ‘돈’을 가지고 구경을 왔다. 꼬마는 주연배우와 흥행사와 ‘기도’와 수표원을 겸했다.

—‘연극놀이’를 한 게 아니라 ‘극장놀이’를 한 거로군요.

“‘어쩌면 내가 좋아했던 건 연극만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극을 둘러싼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고 할까. 극장이라는 공간이 빚어내는 흥겨운 분위기, 일상을 벗어난 지점에서 펼쳐지는 환상의 세계 전부가 좋았던 거죠. 신문지 오려 만든 돈이라는 건 환상의 세계로 가는 기차표 같은 거고. 배우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흥행도 책임지는 프로듀서 역할도 맛 한 번 본 거죠, 뭐.”

배우들의 일생을 따라가다 보면 필연(必然)이 우연(偶然)을 가장하고 손짓하는 순간이 있다. 예산농고 2학년 때 전교생 소풍. 목적지인 예산수리(水利)조합엔 강당 비슷한 공간이 있었다. 전교생이 모인 김에 장기자랑 오락회를 하기로 하고 선생님들이 최주봉을 사회자로 지명했다.

국어 선생님의 한마디

대학 시절 최주봉을 남사당패로 이끌었던 전위예술가 무세중씨.

공연 날 정신은 없는데 이상하게 흥이 났다. 농담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교장선생님을 무대 위로 모셔 노래도 시켰다. 웃음과 휘파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행사가 끝나고 국어 선생님이 한 말씀을 던졌다.

“너는 그냥 배우더라.”

잊고 지냈던 유년의 추억이 수리조합 수문(水門)이 열렸을 때 물 쏟아지는 것처럼 가슴을 채웠다. 상과(商科)나 정치학과 진학계획이 방향을 틀고 있었다.

“처음엔 못한다고 했어요.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하니까 되더라고. 그것도 즐겨 가면서. 선생님들 말씀이, 어색한 구석이 하나도 없더라는 거야. 선생님들은 교육 전문가 아닙니까. 이분들이 확신을 가지고 말씀하시니까 ‘아하, 이 길이 내 길이로구나’라는 느낌이 온 거죠.”

중앙대(中央大) 연극영화과(演劇映畵科) 64학번. KBS 드라마국장을 역임한 최상식(崔常植)이 동기동창이고, 한 살 위인 박인환(朴仁煥)과 세 살 위인 윤문식(尹文植)은 내내 학교를 같이 다닌 사이다. 셰익스피어와 유진 오닐과 안톤 체호프를 배우는데 뭔가 살짝 허전하고 갈증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당시 중앙대 조교를 하던 김세중(金世中)이 ‘좋은 데가 있으니 가 보자’고 했다. 나중에 전위(前衛)예술가로 활약하는 무세중(巫世衆)이 그 사람이다. 둘이서 당도한 곳이 망원동 남사당(男寺黨)패다. 제3한강교가 놓이기 전이라 망원동 개천 공터엔 모래가 지천이었다. 거기서 훗날 인간문화재가 되는 남용운, 박계희 같은 분들과 신나게 연습하고 놀고 거리공연도 했다. 몇 달 동안 함께 생활하다 아예 남사당패 단원이 되어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두 번이나 출전하기도 했다. 갈증이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극단 ‘가교’에서 활동 시작

극작가 이근삼씨.

“대학에서 했던 작품이 다 서양에서 내로라하는 작품이었습니다. 현대극 <고래>, 고전극 <햄릿>, 아일랜드 극작가 존 밀링턴 싱의 <서쪽나라에서 온 장난꾸러기>. 이 작품들은 하나같이 불멸의 명작이고 박자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물건’들 아닙니까.

그런데 뭔가 마음속에서 엇박자로 뛰노는 기운이 있더라고요. 정제되지 않은, ‘연극적 야성(演劇的野性)’,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연극의 출발점이랄까, 원형(原形)을 탐색하고 싶다는 마음이랄까, 뭐 그런 갈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 ‘흥겨운 느낌’을 흠뻑 맛보고 싶었다, 그렇게 쓰시면 되겠네.”

흥겨운 기분? 최주봉이 생각하는 연극의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인지 서서히 감이 오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활동을 시작한 곳이 극단 ‘가교(架橋)’다. 1965년에 동국대, 한양대,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어 창단한 단체. 극작가는 이근삼(李根三·2003년 74세로 작고), 연출가로는 이승규(李昇珪·74세)와 김상열(金相烈·1998년 57세로 작고)이 관계했고 배우로는 추송웅, 권성덕, 박근형, 윤문식, 박인환 등이 주축이었다. ‘가교’의 매력은 연중무휴(年中無休) 공연이 가능한 국내 유일한 극단이었다는 점이다.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에 연극 공연장이 얼마 없던 시절이다. 극단들이 극장 대관을 위해 제비뽑기를 하고, 그나마 봄 가을 시즌에만 공연을 하던 것이 당시의 관례다. 그런데 가교는 무슨 수로 연중무휴 공연을 할 수 있었을까.

나병 퇴치 계몽극단

“마가렛 모아라는 미국인 선교사가 계셨어요. 이분이 이근삼 선생한테 ‘전국을 돌며 계몽극을 공연할 단체가 있느냐, 추천을 해 달라’, 그래서 ‘가교’랑 연결이 된 거죠. 모아 여사가 제작비를 전액 부담하고, 신수동 자택 한쪽에 극단 사무실도 마련해 주셨어요. 한센병, 그때는 나병(癩病)이라고 그랬지요. 나병 퇴치 연극도 하고, 기독교 성극(聖劇)도 하고….”

최주봉의 데뷔작은 농촌 계몽극 <퇴비탑의 기적>(1969)이다. 당시의 상황을 이승규는 이렇게 회상한다.

“후원자들의 요구는 아래 사항을 널리 알려 달라는 것이었어요. 1. 나병은 불치(不治)의 병이 아니다. 2. 나병은 유전병이 아니고 전염병이다. 3. 보건소나 구호기관에서 무료로 치료해 주고 있다.

지방 구석구석에 연극을 보여줄 수 있고, 장기간에 걸친 공연을 통해 단원들의 연기훈련을 도울 수 있으며 계몽적 기능을 통해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후원자들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습니다.”

트럭 한 대에 장비를 싣고 충남, 충북, 경북, 경남, 전남, 전북의 순으로 4월 1일부터 7월 5일까지 96일간 80여 군데를 돌며 121회 공연에 25만4340명을 동원한 공연. 초등학교 교정, 수덕사 절마당, 공주교대 강당, 청송면 개천가, 남천강변, 함안 나환자 정착촌 분교, 전남여고, 함열면사무소 앞 공동묘지 등등이 공연장소였다. 숙소는 여관을 이용하거나 야영하는 강행군이었다. 생전 처음 연극을 접하는 관객이 태반이요, 약장사거나 기타 상업적 의도가 숨어 있는 공연이라고 의심을 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극단의 선의(善意)를 믿어 주지 않다가 한센병 치료약인 D.D.S.라는 말이 나오면 “그러면 그렇지” 라며 무릎을 치기에 “이 약은 국가에서 무료(無料)로 배포하는 약이다”라는 즉흥대사를 하니 그제서야 관객들의 얼굴에서 경계심이 사라지더라는 일화도 전한다.

“글자 그대로 유랑극단이지요, 뭐. 이근삼 선생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유랑극단>은 이때의 경험을 극화한 겁니다. 가교의 전국순회공연은 계몽극이지만 그래도 연극적 재미를 흠뻑 녹여 넣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중간중간에 웃는 대목, 흥겨운 대목도 만들어 넣고 아침나절에는 트럭에 앰프 달고 가두선전도 다니고 그랬어요.”

2010년, 90세 할머니가 되어 수십 년 만에 한국을 찾은 모아 여사와 가교 식구들은 뜨겁게 재회했다. 모아 여사가 유창한 한국어로 “주봉이, 문식이, 고마워!”를 연발하는 바람에 울다가 웃다가 하며 잔치판이 제대로 펼쳐지기도 했다.

生活苦

봄 가을 시즌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 이강백(李康伯)의 <셋>, <내마>, 미국 뮤지컬 <판타스틱스>, <포기와 베스> 같은 작품을 했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입대, 육군 12사단 의무중대에서 1년을 보내고 전곡에 있는 미(美)1군단 사령부로 차출되어 나머지 기간을 카투사로 복무했다. 그때 유심히 관찰한 흑인 병사들의 오리걸음을 무대 위에서 재현해서 대히트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 연극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는다는 것.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생활비가 절실했다.

“후배 처(妻)의 친구를 소개 받았습니다. 그때 제 아내가 중소기업 회사원이었는데, 바로 ‘이 사람이다’ 싶더라고요. 부모님도 좋아하시고. 그런데 그 사람은 내 옷차림을 보고 첫인상이 안 좋았다네. 제가 밝고 야한 옷을 좋아하거든요.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이 사람, 진국이구나’ 싶어서 마음이 끌리더래요. 1년 연애하고 1974년에 결혼에 골인했죠. 제 장인이 군수(郡守)까지 지내신 공직자신데, 연극하는 사위를 처음에는 썩 내켜하지 않으셨지. 그래서 ‘5년만 지켜봐 달라’고 말씀드렸지요.

제가 부모님께 참 죄송한 게, 마흔네 살까지 시골에서 보내 주시는 쌀로 생활했습니다. 어머니는 ‘내려와서 가업(家業)을 이으라’고 하시고. ‘뭐 하러 배우 한다고 그 고생을 하느냐’고.

그래서 명절 때도 고향을 못 가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네 요즘 뭐 하나?’ 물어보는데, 배우는 직장이 뚜렷한 사람이 아니잖아요? 매번 얼버무리고, 부모님은 또 이런 제 모습을 보면서 제 눈치를 살피시고. 나중엔 저는 핑계를 대고 서울에 있고 아내와 아이만 내려가게 했습니다.

아내도 고생 많이 했죠. 내려갈 때마다 어머니가 건어물 장사 해서 모은 돈을, 그 꼬깃꼬깃한 돈을 챙겨서 찔러 주시면 처음에는 거절하는 척하다 모른 체 받고. 안 받을 수가 없는 게, 그 돈 없으면 생활이 안 되니까요. 아이들 밥은 먹여야 하잖습니까?”

그래서 들어간 곳이 극단 ‘현대극장’이다. 1976년에 ‘연극의 기업화’를 내걸고 창단한 대형극단. 상임연출로 가 있던 김상열이 가교 후배들을 스카우트했다. 1980년부터 1년6개월간 최주봉은 그곳에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 같은 뮤지컬에 출연했다.

영국의 세계적인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작품을 무허가로 공연한(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이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막을 올린 초(超)호화 배역의 야심작. 예수 역엔 이종용, 가롯 유다가 김도향, 추송웅의 더블 캐스팅, 막달라 마리아가 윤복희, 빌라도는 유인촌, 헤롯왕이 후라이보이 곽규석이었다. 최주봉의 역할은 요한, 바리새인, 로마병정 등의 일인다역(一人多役).

디즈니 원작영화를 극작가 이반(李盤·72세)이 한국형으로 각색한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에서 무릎 꺾고 키를 낮춰 ‘일곱난장이’를 연기했던 배우들이 최주봉, 박인환, 윤문식이다. 월급 20만원을 받기로 한 계약은 다섯 달 후 ‘기약이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사실 그것은 구조적인 문제였다. 뮤지컬은 무대세트, 의상에 상대적으로 많은 제작비가 필요하다. 장기흥행을 해야 고정비를 줄여서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시엔 뮤지컬 장기공연을 이어 갈 만한 극장이 없었다. 거의 매일 만원을 기록해도 수지타산은 겨우겨우 적자를 면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최주봉이 선택한 길은 ‘나랏밥’을 먹는 것. 봄 가을로 45일씩 국방부 홍보단 공연에 참여해서 ‘백령도에서 철의 삼각지대까지’ 육해공군 위문순회 공연을 했다. 무용, 쇼, 반공극 등이 어우러진 ‘종합선물세트’ 같은 공연이다. 최주봉에게 참여를 권한 이 공연의 총연출자가 나중에 서울시립가무단 단장을 지내는 박만규다.

쓰가 고헤이와의 만남

<뜨거운 바다>를 쓴 재일동포 극작가 쓰가 고헤이.

오리무중(五里霧中) 암중모색(暗中摸索)의 시기에 또 다른 인연이 손짓을 해 왔다. 1985년 어느 날이다. 후쿠오카 출신의 재일동포 극작가 쓰가 고헤이(한국명 김봉웅·金峰雄·2010년 62세로 작고)가 쓰고 연출한 <뜨거운 바다>. 쓰가는 1982년 재일동포로는 물론, 전후(戰後)세대 최초로 아오키상(直木賞)을 수상한 당대 일본 최고의 연극인이었다. 그의 원작소설 <아타미(熱海) 살인사건>을 극화, 일본에서도 1972년에 초연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연극이다.

씨네텔 서울의 전옥숙 대표가 최주봉을 호출했다. 쓰가를 소개하더니 프랭크 시네트라의 마이 웨이(My Way)를 불러 보라고 했다. 가사를 모른다고 했더니 테이프를 주고 내일 다시 올 수 있겠느냐고 했다.

“다음 날 열심히 연습해서 그 노래를 불렀더니 쓰가 얘기가 판소리, 타령(打令), 창(唱)이 섞인 ‘마이 웨이’라는 겁니다. 일본 공연 때 그 노래가 쓰였던 거죠. 즉석에서 그럼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부를 줄 아느냐고 해, 한 곡 불렀더니 바로 ‘오케이’ 하더라고요.”

최주봉의 역할은 범인 모모타로다. 모모타로가 처음 등장할 때 ‘한껏 폼을 잡으며’ 불렀던 노래가 ‘마이 웨이’. 쓰가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청한 건 그 노래가 일본인 모두의 그 시절 애창곡이었기 때문이다. 가왕(歌王) 조용필(趙容弼)이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망라하여 ‘아시아 최고의 가수’로 떠오르던 시절이다. 오죽하면 그녀가 죽었을 때 《요미우리 신문(讀賣新聞)》이 ‘이제 쇼와시대(昭和時代)가 진정 끝났다’고 보도했던 일본의 국민가수 미조라 히바리도 이 노래를 일본어로 취입했겠는가. 미조라는 ‘돌아와요 부산항에’ 한 소절만은 한국어로 부른다. 여담이지만, 미조라의 혈통이 한국계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녀에게 불행한 가족사가 있다고 짐작하지만, 그 전모가 밝혀진 적은 없다. 어느 누구든 면전에서 가족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미조라는 격하게 대화를 끊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극찬한 <뜨거운 바다>

“나중에 보니, 전무송·강태기·김지숙·나, 넷을 이미 추천을 받아 캐스팅을 완료해 놓고 불렀던 겁니다. 멤버도 좋고, 쓰가 고헤이의 연출 스타일도 마음에 들어서 ‘이 사람이랑 한 일 년만 연극하면 내 연기가 확 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쓰가 고헤이는 작품의 큰 틀만 던져 놓고, 대사며 동선(動線)을 배우더러 찾아가라고 했다. 연습을 마치면 거의 매일 마포로 몰려가서 주물럭고기를 앞에 놓고 토론을 했다. 그 내용이 다음 날 연출노트로 돌아왔다.

“쓰가가 어머니랑 오래 살아서, 한국어를 거의 다 알아들어요. 말은 잘 못하지만. 그러니까 배우들이랑 커뮤니케이션이 되는 겁니다. 연습과정, 밥 먹는 것 자체가 다 연극적이었다니까.”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막을 올린 <뜨거운 바다> 한국어 초연은 거의 전석 매진의 열광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거의 매해 재(再)공연되며 최주봉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 멤버 그대로 일본엘 갔어요. 쓰가가 나한테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시킬 때부터 그 사람 머릿속에는 일본 공연 구상이 다 들어 있었던 겁니다. 한국어로 진행하는데도 일본 관객들이 다 알아듣고 웃다가 울다가 난리가 났어요. 물론, 일본에선 워낙 유명했던 작품이니까 사전에 스토리를 다 알고 오는 관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 대목을 한국 배우들은 이렇게 표현하는구나, 그런 점이 재미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 언론이 ‘역대 최고의 <뜨거운 바다>다’라고 극찬했지요.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뜨거운 바다>는 처음이다’라고 했으니까.”

지금은 없어진, 단성사 맞은편 미리내 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린 <뜨거운 바다> 1986년 재공연. 공연 도중에 정전(停電)이 됐다. 흐름의 감정선(感情線)이 다 끊어졌을 법한데, 3분 쯤 기다리다 불이 들어왔을 때 배우들은 중단된 바로 그 대목부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연기를 이어 갔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집중력이죠. 서로가 서로를 믿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탁소 장씨’

공연이 끝나고 누군가가 분장실을 찾아왔다. 방송극작가 김운경과 MBC의 이승렬 PD였다. “며칠 후 전화가 왔습니다. 매주 일요일 방송하던 연속극 <한지붕 세가족>(1986~1994)에 한 번 나오는 역할로 출연 가능하냐고. 바로 그러마고 했지요.

갔더니 쟁쟁한 분들이 다 앉아 있는 겁니다. 강남길, 임채무, 윤미라, 박원숙…. 일단 연습을 했습니다. 제 역할이 세탁소 주인 ‘장세탁’인데 혼자 세탁도 하고 짐도 나르고 동네를 하루 종일 왔다갔다하는 재미있는 아저씨였죠. 그래서 제가 충청도 사투리를 써 가면서 역할을 재미있게 가공했습니다.”

—방송 출연은 그때가 처음이었나요.

“아뇨. 1970년대 초에 임동진 등이 나오던 TBC 드라마 <형사>에 도둑놈으로 출연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영화는 이두용 감독의 데뷔작 <잃어버린 면사포>(1970)가 첫 출연입니다. 신성일, 문희, 한은진, 주증녀 같은 분들이 나오는 작품인데 나이트클럽 웨이터로 나왔습니다. 영화 전단 돌리는 홍보요원 겸 단역배우였죠.”

—<한지붕 세가족>은 한 번 출연이 아니라 8년을 출연했잖아요.

“그다음에 또 연락이 왔어요. ‘최 선생님, 모니터를 봤는데 두어 번 더 나오셔야 할 것 같아요.’ 4번까지 나오고 나서 아예 고정출연을 해 달라고 하더군요. 녹화 마치고 집에 가서, 아이고, 집에 가는 길이 그날따라 왜 그렇게 멀던지. 집에 가서 아내 앉혀 놓고 ‘여보, 나 인제 맨날 나오랴’ 그랬더니 아내가 울더군요. 둘이 붙들고 같이 울었지요, 뭐.

<한지붕 세가족>을 하면서 광고도 찍었고…. 그 드라마는 저에게 생활의 안정을 찾게 해 준 고마운 작품입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옆 테이블의 손님들이 최주봉에게 미소와 목례를 건네며 알은체를 했다.

“쿠웨이트 박이시죠?”

‘쿠웨이트 박’의 탄생

어떤 배우가, 수십 년이 지나도록 대중의 가슴속에 이토록 선명한 이미지를 남길 수 있을까. 소설가 박영한(朴榮漢·2006년 59세로 작고)의 원작을 각색해서 1989년 2월 8일부터 4월 27일까지 이종한 연출, 김원석 극본으로 KBS가 방영한 <왕룽일가>. 최주봉은 중동(中東) 건설현장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카바레 출입을 즐기는 ‘제비’ 역으로 나왔다.

“<한지붕 세가족>을 하는 도중에 제안이 왔습니다. ‘쿠웨이트를 다녀온, 하모니카를 잘 부는 쿠웨이트 박.’ 5회부터 출연했죠. 청량리 하모니카 학원에서 일주일 교습받고 여의도 댄스스쿨에서 한 달 동안 춤 배우고.

그런데 녹화 첫날부터 NG를 냈습니다. 같은 대목에서 연속으로 7~8번 NG를 내니까 PD가 면박을 주는 겁니다. 하모니카도 못 불면서 어떻게 탤런트가 됐느냐고.

‘딱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10분 쉬고 하겠다’고 했는데 다시 NG. 배우들과 스태프들 얼굴에 짜증기가 피어나는데야, 대책이 없잖아요. 그래서 하모니카 대신에 노래로 하겠다고 제안을 했습니다. ‘실력을 봐야겠다, 스태프들 다 보는 앞에서 해 봐라’ 그러기에 김국환씨의 ‘꽃순이를 아시나요’를 불렀지요. 눈을 지그시 감고 불렀는데 감독이 박수를 치면서 OK 사인을 냈죠. 스태프들도 다들 박수치고. 그래서 매 장면 하모니카 대신 노래를 부른 겁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거죠.”

—뽀글이 파마, 원색(原色)의 촌스러운 의상과 소품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야한 의상을 입은 쿠웨이트 박’이라고 쓰는 건 작가의 몫이고 이걸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건 배우의 몫이죠. 캐릭터를 가만히 생각해 보고 남대문 시장에서 싸구려 옷들을 사서 의상을 만들었습니다. 진달래 색깔의 머플러랑 팔찌를 보더니 녹화장에 난리가 났어요. ‘어떻게 저런 설정을 하고 나올 수 있냐’고. 지금도 연락을 하는, 당시 상대역으로 나왔던 박혜숙씨가 웃느라고 녹화를 못할 정도였으니까….

쿠웨이트 박 캐릭터는 제 중학시절 서울에서 내려온 이웃집 대학생 형이 모델입니다. 아닌 척하며 사람들을 의식하는 말투와 행동을 따라 한 거죠. 창조는 곧 모방 아닙니까.”

1990년 8월 2일부터 4일까지 벌어졌던 쿠웨이트 전쟁. 이라크의 침공으로 나라 전체가 점령당하고, 마침 무슨 행사에 참여하느라 일시 귀국해 있던 쿠웨이트 교민들의 처지가 딱하게 됐다. 갈 곳도 없고 잘 곳도 없게 된 사람들을 위해 ‘쿠웨이트 박’이 앞장을 섰다. 롯데백화점 이벤트홀과 88체육관을 빌려 논노 제품을 50% 세일로 판매하는 쿠웨이트 교민돕기 바자회. 최주봉은 수익금 전액을 적십자사에 기증했고 나중에 쿠웨이트교민회에서 감사의 인사를 전해 왔다. 두 번이나 가족 전부를 초청해 주었는데, 일정이 겹쳐 방문을 못한 것이 미안할 따름이다.

樂劇

최주봉은 1990년대에 극단 ‘가교’의 동지들과 악극을 공연했다. 악극 <비내리는 고모령>의 한 장면.

1990년대 10년간 최주봉은 극단 가교의 동지들과 악극(樂劇)을 공연했다. 1993년 <번지없는 주막>을 시작으로 <홍도야 울지마라> <굳세어라 금순아> <비내리는 고모령> <가거라 삼팔선>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을 연이어 제작했다. 김상열이 대본을 쓰고 연출을 했는데, 공연할 때마다 ‘중장년층을 위한 최고의 공연’, ‘효도 상품’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는 히트상품이 됐다. SBS와 MBC 등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제작에 참여했고, 처음엔 대관을 거절하던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도 나중엔 문호를 개방해 주었다. 예술의전당과 국립극장에서 전석 매진의 진기록을 세운 시절을 잊지 못한다.

—악극을 공연하게 된 동기가 있었나요.

“객석이 흥겨운 작품을 만들고 싶었던 거죠. 꼭 한 번 트로트를 가지고 공연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 어머니, 고향 마을의 옆집 아저씨가 좋아하실 만한 공연. 예전에, 전국 순회공연을 다닐 때 생전 처음 연극이라는 걸 보러 왔던 분들의 눈동자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열망.

난, 내 정서가 정극(正劇)보다는 악극이나 서커스랑 더 통한다고 지금도 얘기합니다. 예컨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입에 물고/ 산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자, 어떤 이미지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나요? 직설적이지 않게, 에둘러 가면서 은근하게 마음을 정하는 트로트 곡들의 가사들이 저는 너무 좋아요.”

—연극을 너무 상업적으로 대한다는 비난과 공격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혹시 외롭지는 않으셨는지요.

“난 외로울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배우들은 타인(他人)을 행복하게 해 주는 존재입니다. 악극을 공연하는 내내 관객들이 눈물 흘리는 걸 보고 난 내가 ‘배우’라는 걸 확인했어요. ‘연극은 반드시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생각에 얽매이기보다는, 조금 자유롭게 살아가는 거죠.”

밤무대 시절

TV를 통해 이름이 널리 알려진 뒤, 최주봉은 5년간 밤무대에 출연했다. 이를 두고, 연극계 일각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최주봉의 말이다.

“무대 나가서 노래를 불렀죠. 전통가요, 그러니까 트로트. 전국 각지를 안 돌아 다닌 데가 없습니다. 방송 녹화 마치고, 매일 저녁을 신촌-부천-부평-제물포-영등포 하는 식으로 순회하는 겁니다. 수도권 이외의 지역을 무박(無泊)2일로 돌기도 했고요. 처음에 제안을 받았을 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출연료가 세다는 무대는 과연 어떤 곳일까’ 하는 호기심이 일더군요.

그리고 난 어떻게든 내 손으로 집을 장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습니다. 20대에 장남으로서 내 의무를 다하지 않았으니, 그걸 만회하는, 누구나가 인정하는 ‘상징’이 필요했던 것이랄까요?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최주봉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처음에 6개월 계약을 했는데, 중간에 매니저 역할을 하던 사람이랑 이견이 생겼어요. 나한테 돌아오는 실질 수입이 영 기대 이하였던 겁니다. 그래서 게약기간 채우자마자 친척 중에 한 사람을 골라 매니저 겸 기사로 일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6개월간 비(非)효율적으로 시간과 체력을 썼으니 그걸 만회한다고 6개월,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 보자고 다시 1년, 딸린 스태프들이 생겼으니 바로 그만두지 못해 다시 1년 더…. 결국, 집 한 채 사고 밤무대 일을 접었죠.”

—취객들한테 봉변을 당하기도 하고, 출연 여부를 놓고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경우도 없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다. 밤무대는 인간행동의 여러 가지 극단적인 형태를 다 만나는 곳이죠. 흥겨움, 취기, 몸싸움, 실랑이…. 무대 아래, 무대 뒤가 더 극적인 사건이 많이 일어나는 공간입니다. 재미있었어요. 몸은 말이 아니죠. 집사람이 방 하나를 내 전용 침실로 만들어 줬어요. 완전 방음(防音)에 빛이 하나도 안 들어오게. 잠을 조금이라도 설치면 바로 다음 날 일정에 지장이 생기니까. 그때의 경험도 내 연기에 오롯이 다 녹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이 뭐라고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어요.”

리얼리즘 연극의 정통 노선에서 이탈

일제 강점기, 식민지 지식인들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근대사회의 건설과 독립국가의 건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들의 사상을 전파하는 도구로 ‘연극’을 선택했다. 근대사회의 제도와 문물 가운데 우리 사회에 부재(不在)한 것이었고, 계몽과 홍보의 도구로 이만한 물건을 발견하기도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대중은 읽으려고는 하지 않았어도 들으려고는 했다. 식민지 지식인들이 열광했던 예술사조는 리얼리즘(realistic theatre)이다. 그들이 보기에 리얼리즘은 근대 과학정신의 예술적 투영이었다. 실생활과 매우 근접한 동작과 발성법을 바탕으로 사전에 정밀하게 약속을 정하고 연습을 반복한 뒤, 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무대 위에서 재현해 낸다는 것. ‘과학적 엄밀함’은 즉흥극의 요소가 강한 전통극과 리얼리즘 연극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지표였다. 따라서 리얼리즘 이외의 연극을 다소 폄하하는 듯한 분위기가 한국 연극계에는 어느 정도 존재했다, 적어도 1990년대 중반까지는. 연극은 순수하고 숭고하며 신성한 예술이기 때문에, 무대를 대하는 자세는 늘 엄숙해야 한다고 믿는 ‘진지하고 치열한’ 세계관.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유랑극단과 악극과 TV, 그리고 밤무대까지를 넘나든 최주봉의 연극인생은 이른바 리얼리즘 정통노선과 다른 지점에서 흥겨움과 재미, 관객의 눈물과 웃음을 자양분으로 삼아 나름대로 찬란한 꽃을 피웠다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가교’의 ‘악극 공연’은 전략적으로도 옳은 선택이었다. 유럽과 미국에는 기존의 유행곡들을 모아 제작하는 뮤지컬이 많다. 이런 작품들을 지칭하는 ‘주크박스 뮤지컬’이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다. 기존의 곡을 사용하니 작곡료가 들지 않고, 익숙한 멜로디가 들려 오니 관객들도 편안하다. 언제가 되었든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노래들은 대중적 감수성과 당대의 시대상을 듬뿍 머금고 있다는 것이 주크박스 뮤지컬의 출발점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적 뮤지컬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 1990년대 한국 뮤지컬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합창’의 부재(不在)였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뮤지컬은 합창곡을 위주로 하고 클라이맥스에 독창곡을 배치해 극적 효과를 증폭시키는데, 우리는 배우 개개인이 대사를 노래로 바꿔 부르는 정도로만 ‘노래’를 활용했다. 악극에서 합창을 대신한 건 객석의 관객들이다. 서울에서, 박달재가 있는 제천에서, LA에서, 뉴욕에서, 관객들이 노래를 큰 목소리로 합창했다. 자연히 ‘합창’과 ‘독창’ 사이에서 이야기가 힘차게 전진할 수 있는 ‘긴장’이 만들어졌다. 미국의 흥행사들이 농반진반으로 붙여준 ‘따라 부르는 뮤지컬(sing along musical)’이라는 단어는 아직도 최주봉의 가슴속에 전설처럼 남아 있다.

—그런데 왜 요즘은 악극 공연을 하지 않나요.

“배우가 행복하게 해 줘야 할 사람 중엔 제작자도 있는 겁니다. 악극은 트로트를 호흡하는 관객들을 전제로 하는데, 그 저변이 엷어진 거죠. 통기타 문화랑 비슷합니다. 세시봉으로 붐이 일기는 했지만, 지금 통기타는 아티스트들이 평균 60대, 그들의 노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관객층의 하한선이 40대 중반이잖아요. 통기타 음악의 대중성은 앞으로 점점 사라져 갈 겁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돌파구가 어디 있는지를 고민해야죠. ”

“연극은 順理다”

그래서 최주봉은 11월 말에 국립국악당에서 ‘소리 코리아’라는 극단과 공연을 한다. 인간문화재 묵계월의 제자들이 결성한 단체다. 국악(國樂)을 활용한 도전과 응전(應戰).

최주봉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큰아들은 지금 현대건설 설계사로 카타르에 나가 있고, 둘째 아들이 ‘아버지가 그렇게 말리는데도’ 기어이 이 일을 하겠다며 배우의 길로 들어선 최규완이다.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조급해하지 말 것. 연극은 순리(順理)입니다. 한걸음 한걸음 기초를 다지고 올라가야 오래갑니다. 배우는 기다리는 직업입니다. 인내할 줄 모르면 좋은 배우가 될 수 없어요. 하지만 세월이 흐른다고 무작정 배우가 되는 것은 아니죠. 부모님이 물려준 자신의 특성을 개발하고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노력해야 ‘인정받는 배우’가 될 수 있습니다.”

얘기가 여기에 이르렀을 때, 강릉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연출가 이승규가 군대생활을 할 때 만들었던 야학(夜學)이 재정난에 처하자 가교 멤버들이 의기투합했다. 어떻게든 야학을 살려 보자며 경포대 해변에 천막을 치고 피서객을 대상으로 공연한 <판타스틱스>. 수익금이 꽤 생겼고 야학도 살아 남았다. 그 공연 40주년을 기념해 감사패를 드리고 싶다는 연락이었다.

“벌써 40년이 됐나? 야학, 거기서 인물 많이 났슈. 판사, 검사도 나오고 박사도 여럿 배출했구…. 다들 행복하게 됐으니 나도 기분이 좋네유.”

그가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옛일을 추억했다. 맥주잔 너머로 전해지는 그의 목소리에 반 넘어 사투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누구네 집 안방을 빌려 자기 식대로 <원수 맺은 두 남매>를 공연하던 여덟 살 꼬마의 얼굴이 문득 겹쳐졌다.⊙

상단주메뉴

배우列傳

‘쿠웨이트 朴’ 최주봉

“俳優는 他人을 행복하게 해 주는 사람”

0건

사이트 이용안내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