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女性의 性을 느끼는 감독
⊙ “포르노는 동기 없는 섹스”
⊙ 배설을 위한 포르노와 에로는 다르다
⊙ “포르노는 동기 없는 섹스”
⊙ 배설을 위한 포르노와 에로는 다르다
“에로를 단순히 일로서만 다가간다면 그건 노동자입니다. 저는 아티스트입니다.”
영화계에서 에로 거장(巨匠)으로 통하는 사나이가 있다. 연극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지원한 대학에 모두 낙방(落榜)한 젊은이는 고졸학력으로 상경, 충무로 영화판으로 향했다. 집안은 어려웠고, 어머니는 “예술은 경제력이 받쳐줘야 한다”고 만류했다.
“어머니 말씀이 맞더라고요”
10여 년을 몸으로 때우며 영화를 배운 청년은 예술이 왜 배고픈지 깨달았다.
9월 초 서울 태평로 근처 식당에서 만난 봉만대(奉萬大·43) 감독은 배고파 보였다. 아트(art)에 굶주려 있었다. 봉 감독에게 아트는 ‘에로’다.
봉 감독은 서른 살 젊은 나이에 에로 시장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출세작 〈이천년〉을 들고 1999년 혜성처럼 나타났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입소문을 타고 삽시간에 ‘찐한 영화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인터넷이 서서히 태동하던 시절이었다. 〈이천년〉은 비디오 대여점을 중심으로 비디오테이프(VHS) 시장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는 극장용 에로영화의 전성시대였다. 〈애마부인〉(1982년), 〈무릎과 무릎 사이〉(1984년), 〈매춘〉(1988년) 등 한국 영화 시장은 빨간색이 휩쓸었다. 탁 트인 공간에서 남들과 함께 에로를 본다는 것은 불편하다. 그러던 즈음 1988년 올림픽 이후 가정용비디오플레이어(VTR)가 보급되면서 에로를 안방에서 즐기는 시절이 왔다. 이즈음 16밀리(mm)테이프가 보급됐다. 살결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표현하는 데 16밀리가 적당했다. 제작비는 편당 1000만원에 불과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90년대 〈야시장〉의 유호프로덕션, 〈정사수표〉의 한시네마타운 등 에로 메이저가 출범했다.
에로 출신 낙인을 극복한 입지전적 인물
1997년 외환위기(IMF) 사태가 에로 업계엔 오히려 기회였다. 경제 위기로 할 일이 없어진 충무로 영화 인재들이 에로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먹고살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떳떳하게 이름을 밝힐 수 없었기에, 배우도 감독도 예명(藝名)을 사용했다. 그러나 봉 감독은 “나는 원래부터 ‘봉만대’였다”고 밝혔다. 봉 감독도 그 시절에 에로 업계에 합류했다.
봉 감독이 ‘에로 거장’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천년〉 이후 한 우물을 팠기 때문이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2003년), 〈동상이몽〉(2005년), 〈TV방자전〉(2011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2012년), 〈아티스트 봉만대〉(2013년) 등 줄기차게 에로만을 추구해 왔다.
봉 감독은 성적 배설용으로 취급되었던 에로 비디오테이프 감독에서 시작해서, 극장 상영관에 걸리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올라선 유일한 사례이다. 에로 출신이라는 낙인을 극복한 것 자체가 입지전적이다. 또 비록 케이블이지만 안방극장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성인 콘텐츠를 만들어낸 것도 에로 전문 감독으로서 입지를 다지게 했다. 그러나 이런 업적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저 벗기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폄하하는 시선이 없지 않다. 나아가 포르노와 에로를 동일시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벗긴다는 점에서 다를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세간의 시선에 대해 봉 감독은 ‘왜 에로가 예술이고, 에로와 포르노는 다른 것인지’ 3시간 넘게 설명했다.
“포르노는 동기 없는 섹스”
—정말 기초적인 질문인데, 에로란 무엇인가요.
“포르노와 구분해서 설명해 볼게요. 행위적 만족을 위한 포르노와는 달라요. 에로는 동기가 있어야 해요. 사랑으로 가는데 이유가 있어야 해요. 포르노는 이유 없이 섹스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에로는 달라요. 보고 나면 무엇인가 남아야 해요. 예를 들면 ‘사랑 따윈 개나 줘라’라든지 생각할 거리가 있어야 하죠. 물론 에로는 재미를 떠나 야해야 돼요.”
—실력이 되지 않으니까 에로를 하는 것은 아닌가요. 실력이 된다면 충무로에서 멜로(melodrama)를 하면 되지 않을까요.
“모두가 A급일 수는 없어요. 누구나 A급이 되고 싶으니, B급이라고 하면 기분 나쁘죠. 저는 등급을 매기면 안 된다고 봐요. 비주류(非主流)라고 얘기하는 것이 낫죠. 주류에 들어가고 싶은 비주류라고 생각해요. 비주류가 추구하는 지점은 주류와는 달라요. 조금 모호(模糊)한데 저는 B급입니다. 그러나 저와 함께 일하는 스태프가 B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또 대중성을 잣대로 서열을 나누는 것은 아티스트에게는 큰 상처입니다. 대중은 에로에 대한 어떤 학습 된 태도(고정관념)를 가지고 있어요. 대중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저는 상관없어요. 다만 감독으로서 대중이 원하는 것을 만들려고는 합니다.”
—외환위기 이후, 그러니까 90년대 말을 에로 중흥기라고 하는데 이유는 뭔가요.
“외환위기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프로듀서, 감독, 조감독들이 먹고살아야 하니까 에로 시장으로 파이프 타고 들어왔어요. 당시 대학생들이 문화를 소비할 돈이 없었어요. 극장 갈 돈이 없었죠. 외환위기 이전에는 주로 불륜을 묘사한 에로가 대부분이었어요. 프로덕션 유호, 한시네가 만든 영화는 에로에 멋이 있었지만 리얼리티가 떨어졌어요. 바로 이런 시점에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에로가 시작되었죠. 프로덕션 클릭, 시네프로 등이 이런 분위기에 가세했죠. O양 몰카 비디오 사건 등으로 비디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어요.”
—결국 남들 다 어려웠다던 IMF가 오히려 에로에는 기회였군요.
“모두에게 좋았어요. 싸게 찍을 수 있어서 제작자도 좋고, 영화 인력은 할 일이 생겼죠. 그런데 (IMF가 정리되고) 경제적 환경이 좋아지니 고급인력이 다 빠져나갔어요. 에로 시장이 거의 소멸될 뻔했는데, 인터넷이 살려줬어요. 그때 나온 것이 성인방송입니다. 새로운 콘텐츠 시장이 출범했어요. 과거처럼 비디오테이프를 빌리려고 대여점을 기웃거리면서 찾을 필요가 없어졌죠. 그렇게 잠시 시장이 쭉 올라가다가 결국 완전히 없어졌어요.”
—영화 심의를 강화하고 노출을 제한해서 에로 업계가 타격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어요.
“빗장을 풀어줘도(성기 노출을 허용해도) 실제로 찍을 배우가 없어요. 그리고 보고 싶은 사람도 없어요. 최소한 저는 성기 노출한 영화는 보기 싫어요. 그건 영화가 아니라 불법이죠. 포르노를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대중의 합의는 있다고 봐요. 그걸 누가 영화로 보나요.”
감독들이 에로 노하우 묻기도
—에로 감독을 하기 위해서는 여배우를 벗겨야 하는데 부담스럽지는 않나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성적 수치심이 있어요. 오래 에로를 하다 보니 다른 감독들이 노하우를 물어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소중하다고 배웠던 것을 (버리고) 약속된 범위 안에서 (노출을) 촬영해야 합니다. 거기서 오는 성적 모멸감, 수치심 이런 것을 커버해야 하는데, 감독이 여배우를 예뻐해 줄 수밖에 없어요. 한국에 에로 시장밖에 없다면, 에로를 꺼릴 이유는 없죠. 그러나 다른 장르도 많고 활동 영역도 넓으니까 한국 사람들의 (에로에 대한 부정적) 태도 때문에 밉보일 수도 있어서 배우들이 걱정해요. 그래서 저는 여배우들에게 오픈마인드로 접근해요. 만나서 ‘너의 취미가 뭐니’부터 시작해서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여요. 일단 여배우는 일을 하러 온 것이죠. 그러나 일로서만 다가가면 안 돼요. 그러면 노동자에 불과한 것이죠. 우리는 아티스트입니다. 아트 하는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줘야 해요.”
그렇다면 봉 감독이 생각하는 사랑과 섹스(sex)는 무엇인가. 에로 영화만 13년을 만들었으니 나름의 철학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는 사랑에 대해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섹스를 하나요, 아니면 섹스가 먼저인가요.
“사랑은 방부(防腐)처리가 필요해요. 유통기한이 있다면 그 순간까지 가는 것이 사랑이에요. 사랑은 방부처리를 해서 살아 있는 동안 유지해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섹스는 그렇지 않아요. 죽을 때까지 섹스할 수는 없는 것이죠. 섹스는 그냥 행위입니다. 시작과 더불어 화끈한 온도를 가진 열정입니다. 그러나 식어버리죠. 그렇게 반복됩니다. 그렇다고 사랑과 섹스를 갈라서 보아도 안 되죠. 사랑이 있어야 섹스가 가능하지만, 어느 날 원나잇(하룻밤 사랑)했지만 사랑으로 이어질 수가 있는 것이죠. 다만 남자는 섹스를 원하지만, 여자는 사랑을 원하죠.”
—여성도 성욕을 느끼는 것 아닌가요.
“여성이 지향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결국 여성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가게 되어 있어요. 여자는 사랑을 받으면, 그 남자를 더 만나고 싶고 가까이하고 싶어 하죠. 여자는 꼭 섹스가 필요한 동물이 아닙니다. 결혼을 해도 옆집 남자가 남편보다 잘해주면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섹스는 중요하지 않아요. 사랑하면서 손잡고 쓰다듬고 이런 첫 느낌이 근사한 것이죠. 중년이 넘으면 남자는 성호르몬(테스토스테론)이 줄어들고 여성은 남성화되죠. 남자는 가슴이 허해져요. 그 순간 섹스가 아닌 (사랑의) 대상을 찾게 되죠. 그래서 중년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이에요.”
“여성도 당당히 볼 수 있는 에로가 필요”
—여성 역시 에로 영화를 보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나요.
“한국의 에로를 보면, 섹스에서 희생당하는 대상은 모두 여자예요. 서로 사랑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배설적인 요소만 등장하고 있어요. 소위 콘텐츠(봉 감독은 인터뷰 내내 작품성 없이 그냥 소비되는 영화를 비하하는 표현으로 콘텐츠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로 전락해서, 여성을 위한, 여성 중심의 이야기는 없어요.”
—시중의 에로 영화를 여성들이 보면 불쾌감을 느낀다고 생각하나요.
“(남성과 여성은) 다가가는 태도가 달라요. 똑같은 스토리라도 시각적, 청각적 요소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죠. 남성이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있게 여성이 교태(嬌態)를 부리거나 성(性)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남성을) 자극시키는 것이 대부분이죠. 예를 들어 에로 비디오의 성교 장면 부분만 늘어져 있는 경우입니다. 남성들은 그 부분만 재미있으니까, 계속 돌려 보았던 것이죠.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은 생리적으로 늘 배설해야 하는 종족번식을 위한 유전자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죠. 문제는 (지나치게 남성 위주로 되어 있다 보니) 황폐(荒廢)해졌어요. 다른 비료를 뿌리거나 경작물을 심어야 된다고 봐요. 여성도 당당히 볼 수 있는 에로가 필요합니다.”
—여성을 위한 에로란 무엇인가요.
“여성은 소리와 캐릭터에 동화하면서 감정이입을 합니다. ‘저게 나였으면 좋겠다’는 판타지를 가지게 되죠. 여성들은 수많은 상상을 하면서, 즉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지점을 향해 나아갑니다. 암컷은 수컷들을 싸우게 한 다음에 최고의 유전자를 받아들이죠. 에로 역시 판타지, 액션, 스토리, 패션 등이 널려 있어야 감정이입이 가능하죠. 그러나 남자는 단순해요. 성적 욕구를 푸는 데 관심이 있어서 빨리 벗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이규영 꼭 만나고 싶다”
영화 〈이천년〉은 감각적 영상으로, 에로 영화지만 나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일부 비평가는 〈이천년〉을 당시 유행하던 왕가위 감독의 〈타락천사〉와 비교하기도 했다. 철저하게 주류 충무로 영화계에서 무시 받았던 에로 영화 업계에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제임스딘이 청춘의 아이콘(icon·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요절(夭折)했기 때문이다. 에로 영화 〈이천년〉이 아직까지 에로 팬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것 역시 비슷한 이유다. 뭇 남성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여배우 이규영의 마지막 작품이 〈이천년〉이다. ‘서구적 마스크를 가진 글래머러스(glamourous)한 이규영은 어디에 있는가’는 에로 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표적 미스터리이다. 봉 감독의 출세작 〈이천년〉에 대해 물었다.
—여배우 이규영은 어떻게 지내나요.
“이규영을 한번 만나고 싶어요. 영화 이후 저도 만나본 적이 없어요. 기사에 꼭 ‘봉만대가 이규영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써주세요. 이규영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스토리는 저만 알고 있어요. 시장논리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어요. 케어해(보살펴) 주어야 할 게 있어요. 결혼 문제는 아니지만 혼자만의 아픔이 있어요. 그래서 꼭 한번 만나고 싶어요. 차후에 이규영 스토리를 영화로 풀어내고 싶어요.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니까 동의를 먼저 구한 후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천년〉이 흥행에 성공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준비를 많이 했어요. 원래 조산소(비디오테이프)가 아니라 산부인과(극장개봉)에서 태어나야 했어요. 원래 제목은 〈핑크펑크〉였어요.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려 했죠. IMF 속에서 방황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하지만 영화를 만들기가 (경제적 이유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에로 프로덕션 클릭으로 가서 만들었어요.”
—수많은 에로 감독이 있었지만, 왜 ‘봉만대’만 주목받나요.
“저는 처음에 담론을 내세우지 않았어요. ‘섹스는 놀이고 삶 자체다’고 보았죠. 그래서 좀 더 젊어 보이고 참신했어요. 당시 제 나이가 서른이었어요. 대중을 의식해서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어요. 불편하지 않고 자연스러워야 하고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사건과 맞물려 가야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보았죠.”
“나의 영역 구축하고 싶어”
2003년 봉 감독은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을 연출했다. 에로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극복하고, 상영관에 걸리는 영화를 연출한 것이다. 과거 일부 에로 감독이 상업 영화의 일부 성행위 장면을 연출하는 사례는 있었다. 하지만 대역 배우처럼 이름없이 연출했다. 에로 영화를 몰래 소비하듯, 에로 출신이라는 낙인은 끝까지 따라붙었다. 봉만대 감독이 극장판 영화를 연출한다는 소식에 에로 감독들은 봉 감독의 성공을 기원했다. 마치 프로야구 2군 출신이 1군으로 도약하는 것과 같았다. 아직까지는 봉 감독이 1군으로 도약한 유일한 2군 출신이다. 감독의 개인사가 궁금했다. 봉 감독은 결혼해 1남 1녀를 두고 있다.
—아내 혹은 자녀들이 에로 영화를 찍는 것을 이해하나요.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보지 못해요. 아내는 이해합니다. (에로 찍는) 일(직업)을 먼저 보고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만났거든요. 원래 영화 광고파트에서 일했는데 광고 촬영부서에 왔을 때 만났어요. 제가 촬영 막내로 있었을 때죠. 6년 연애하고 2년 동거한 다음에 결혼했어요.”
—비록 에로를 하지만, 영화를 보면 B급 의식이랄까 나름의 철학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로라는 장르가 생로병사가 있어요. 내 안의 에로 유전자를 분출해서 전 세계와 교류하려 해요. 이탈리아에서 세계적 에로 거장 틴토브라스(Tinto Brass)와 저녁을 먹었는데 이런 말을 했어요. ‘이탈리아에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반, 나머지 반은 싫어한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니까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도 한다는 틴토브라스의 말이 좋았어요. 그가 유럽의 중심에서 섹스를 아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처럼 나도 늙어 죽기 전까지 휩쓸리지 말고 나의 영역을 구축하고 싶어요. 미국에 잘만 킹(Zalman King), 이탈리아에 틴토브라스가 있듯이 유교문명의 끝자락에 위치한 한국에는 봉만대가…”
‘플레이보이’란 단어가 19금(禁)인 나라
8월 말 봉 감독은 자신이 연출하고 주연으로 출연한 〈아티스트 봉만대〉를 선보였다. 영화 홍보자료는 영화를 “에로 영화 현장의 모든 것을 공개해 주마! 대한민국 에로계의 독보적인 거장 봉만대 감독이 돌아왔다!”고 적었다. 영화는 다큐 형식의 픽션으로 ‘페이크다큐(fake docu)’라 불리는 방식이다. 에로 영화 현장의 모습을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처럼 보여준다. 영화는 인도네시아 발리 올 로케이션으로 제작됐다. 유사한 방식의 영화가 최근 유행이다. 이재용 감독의 〈뒷담화:감독이 미쳤어요〉, 노덕 감독의 〈연애의 온도〉가 올해, 2009년에는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이 상영관에 걸렸다.
—페이크다큐 방식의 영화는 트렌드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되게 낯선 장르잖아요. 이런 장르는 완벽한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모험을 해야 돼요. 수제(手製) 라면 같은 느낌이랄까요. 일상적으로 우리가 먹는 라면과는 다른 색다른 라면입니다. 한국 관객들은 아량이 넓지 않아요. 다른 게 들어오면 이질감을 느껴요. 이종교배(異種交配)적 느낌이랄까요.”
—영화 제목을 굳이 〈아티스트 봉만대〉라고 한 이유는 뭐죠.
“원래는 〈플레이보이 봉만대〉였어요. 하지만 심의 통과가 되지 않았어요. ‘플레이보이’라는 단어는 19금(禁)이에요. 우리가 이런 사회에 살고 있어요. ‘플레이보이’라는 단어를 쓰면 온라인에서 검색할 때 성인인증을 해야 돼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경우 ‘섹스’가 금기어예요. 그래서 영화제목이 잘 검색이 되지 않아요.”
—영화 제목에 ‘봉만대’를 넣었다는 것은 그만큼 유명하다는 자신감인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코미디예요. ‘어떻게 봉만대가 아티스트일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서 웃을 수 있는 것이죠. 봉만대를 모르는 사람은 봉 감독이 누군지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요. 사실 제목에 아티스트를 붙인 것은 제가 아니에요. 에로 거장이라고 홍보해 달라고 한 적도 없어요. 영화 홍보하는 측에서 무엇인가 봉만대 앞에 붙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냥 ‘영화감독 봉만대’라고 하면 밋밋하니까.”
—솔직히 영화를 보고 생각보다 야하지 않아서 실망했어요.
“아니에요. 중간에 웃어서 그래요. 에로는 다른 감성과 충돌하면 깨져요. 공포에 코미디가 중간에 들어오면 무엇인가 단절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느낌이 오지 않는 것이죠. 에로가 재미있는 것이 뭐냐면, 이야기를 하다가 에로가 나오면 앞의 것을 잊어버리게 돼요. 에로 현장에서 벌어지는 상황들, 이런 상황의 배우들에게 에로 상황을 넣어서 더 질펀한 느낌을 주려 했어요.”
—영화에서 감독이 하얀색을 좋아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첫사랑이 입었던 옷이 하얀색이에요. 개인적인 취향이긴 한데, 첫사랑이 빨간색 옷을 입었으면 빨강을 좋아했겠죠.”
B급의 최상위
봉 감독은 에로를 버무린 새로운 것을 찾는 듯했다.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에로틱 사극, 혹은 에로틱 공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티스트 봉만대〉 개봉에 즈음해서, 봉 감독은 수십 곳의 매체로부터 인터뷰를 요청받았다. 미디어 노출 빈도만으로 보면, 〈설국열차〉의 한국 대표 감독 봉준호와 비슷했다. 봉만대 감독은 언론의 엄청난 관심에 스스로도 놀란 듯했다. 생활인 영화감독의 비애(悲哀)도 인터뷰 도중 조금씩 드러냈다. 최소 3년을 준비해 영화를 내놓지만 몇 주 안에 승부가 갈리는 냉혹한 영화판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인터뷰 도중 종종 봉 감독의 ‘여성성’이 느껴져 크게 놀랐다. 분명 그에게는 에로 유전자가 있었지만, 마초적 성적 욕구는 아니었다. 그에게서 쉽게 상처받고 작은 손길과 분위기에 감정이 요동치는 여성적 에로 유전자가 느껴졌다. B급, 비주류로 살아왔기에 상처를 받아 왔고 아픈 만큼 감수성이 자란 것으로 보였다.
봉 감독에게는 자부심도 있었다. “B급의 최상위는 A급과 비슷하다.” 이젠 거의 주류 영화계를 따라잡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무(無)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봉 감독이 지금 가진 것은 모두 봉 감독 스스로 쟁취한 것이다. 그래서 내 손으로 이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봉만대’라는 이름이 주는 B급 이미지 때문에 자신과 함께한 배우들이 상처받는 것을 특히 경계했다. 봉 감독의 마지막 말은 이렇다. “나와 작품을 함께한 배우들이 주류로 간다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요.”⊙
영화계에서 에로 거장(巨匠)으로 통하는 사나이가 있다. 연극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지원한 대학에 모두 낙방(落榜)한 젊은이는 고졸학력으로 상경, 충무로 영화판으로 향했다. 집안은 어려웠고, 어머니는 “예술은 경제력이 받쳐줘야 한다”고 만류했다.
“어머니 말씀이 맞더라고요”
10여 년을 몸으로 때우며 영화를 배운 청년은 예술이 왜 배고픈지 깨달았다.
9월 초 서울 태평로 근처 식당에서 만난 봉만대(奉萬大·43) 감독은 배고파 보였다. 아트(art)에 굶주려 있었다. 봉 감독에게 아트는 ‘에로’다.
봉 감독은 서른 살 젊은 나이에 에로 시장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출세작 〈이천년〉을 들고 1999년 혜성처럼 나타났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입소문을 타고 삽시간에 ‘찐한 영화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인터넷이 서서히 태동하던 시절이었다. 〈이천년〉은 비디오 대여점을 중심으로 비디오테이프(VHS) 시장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는 극장용 에로영화의 전성시대였다. 〈애마부인〉(1982년), 〈무릎과 무릎 사이〉(1984년), 〈매춘〉(1988년) 등 한국 영화 시장은 빨간색이 휩쓸었다. 탁 트인 공간에서 남들과 함께 에로를 본다는 것은 불편하다. 그러던 즈음 1988년 올림픽 이후 가정용비디오플레이어(VTR)가 보급되면서 에로를 안방에서 즐기는 시절이 왔다. 이즈음 16밀리(mm)테이프가 보급됐다. 살결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표현하는 데 16밀리가 적당했다. 제작비는 편당 1000만원에 불과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90년대 〈야시장〉의 유호프로덕션, 〈정사수표〉의 한시네마타운 등 에로 메이저가 출범했다.
에로 출신 낙인을 극복한 입지전적 인물
1997년 외환위기(IMF) 사태가 에로 업계엔 오히려 기회였다. 경제 위기로 할 일이 없어진 충무로 영화 인재들이 에로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먹고살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떳떳하게 이름을 밝힐 수 없었기에, 배우도 감독도 예명(藝名)을 사용했다. 그러나 봉 감독은 “나는 원래부터 ‘봉만대’였다”고 밝혔다. 봉 감독도 그 시절에 에로 업계에 합류했다.
봉 감독이 ‘에로 거장’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천년〉 이후 한 우물을 팠기 때문이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2003년), 〈동상이몽〉(2005년), 〈TV방자전〉(2011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2012년), 〈아티스트 봉만대〉(2013년) 등 줄기차게 에로만을 추구해 왔다.
봉 감독은 성적 배설용으로 취급되었던 에로 비디오테이프 감독에서 시작해서, 극장 상영관에 걸리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올라선 유일한 사례이다. 에로 출신이라는 낙인을 극복한 것 자체가 입지전적이다. 또 비록 케이블이지만 안방극장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성인 콘텐츠를 만들어낸 것도 에로 전문 감독으로서 입지를 다지게 했다. 그러나 이런 업적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저 벗기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폄하하는 시선이 없지 않다. 나아가 포르노와 에로를 동일시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많다. 벗긴다는 점에서 다를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세간의 시선에 대해 봉 감독은 ‘왜 에로가 예술이고, 에로와 포르노는 다른 것인지’ 3시간 넘게 설명했다.
“포르노는 동기 없는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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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개봉한 <아티스트 봉만대> 포스터. |
“포르노와 구분해서 설명해 볼게요. 행위적 만족을 위한 포르노와는 달라요. 에로는 동기가 있어야 해요. 사랑으로 가는데 이유가 있어야 해요. 포르노는 이유 없이 섹스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에로는 달라요. 보고 나면 무엇인가 남아야 해요. 예를 들면 ‘사랑 따윈 개나 줘라’라든지 생각할 거리가 있어야 하죠. 물론 에로는 재미를 떠나 야해야 돼요.”
—실력이 되지 않으니까 에로를 하는 것은 아닌가요. 실력이 된다면 충무로에서 멜로(melodrama)를 하면 되지 않을까요.
“모두가 A급일 수는 없어요. 누구나 A급이 되고 싶으니, B급이라고 하면 기분 나쁘죠. 저는 등급을 매기면 안 된다고 봐요. 비주류(非主流)라고 얘기하는 것이 낫죠. 주류에 들어가고 싶은 비주류라고 생각해요. 비주류가 추구하는 지점은 주류와는 달라요. 조금 모호(模糊)한데 저는 B급입니다. 그러나 저와 함께 일하는 스태프가 B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또 대중성을 잣대로 서열을 나누는 것은 아티스트에게는 큰 상처입니다. 대중은 에로에 대한 어떤 학습 된 태도(고정관념)를 가지고 있어요. 대중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저는 상관없어요. 다만 감독으로서 대중이 원하는 것을 만들려고는 합니다.”
—외환위기 이후, 그러니까 90년대 말을 에로 중흥기라고 하는데 이유는 뭔가요.
“외환위기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프로듀서, 감독, 조감독들이 먹고살아야 하니까 에로 시장으로 파이프 타고 들어왔어요. 당시 대학생들이 문화를 소비할 돈이 없었어요. 극장 갈 돈이 없었죠. 외환위기 이전에는 주로 불륜을 묘사한 에로가 대부분이었어요. 프로덕션 유호, 한시네가 만든 영화는 에로에 멋이 있었지만 리얼리티가 떨어졌어요. 바로 이런 시점에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에로가 시작되었죠. 프로덕션 클릭, 시네프로 등이 이런 분위기에 가세했죠. O양 몰카 비디오 사건 등으로 비디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영향을 미쳤어요.”
—결국 남들 다 어려웠다던 IMF가 오히려 에로에는 기회였군요.
“모두에게 좋았어요. 싸게 찍을 수 있어서 제작자도 좋고, 영화 인력은 할 일이 생겼죠. 그런데 (IMF가 정리되고) 경제적 환경이 좋아지니 고급인력이 다 빠져나갔어요. 에로 시장이 거의 소멸될 뻔했는데, 인터넷이 살려줬어요. 그때 나온 것이 성인방송입니다. 새로운 콘텐츠 시장이 출범했어요. 과거처럼 비디오테이프를 빌리려고 대여점을 기웃거리면서 찾을 필요가 없어졌죠. 그렇게 잠시 시장이 쭉 올라가다가 결국 완전히 없어졌어요.”
—영화 심의를 강화하고 노출을 제한해서 에로 업계가 타격을 받았다는 주장이 있어요.
“빗장을 풀어줘도(성기 노출을 허용해도) 실제로 찍을 배우가 없어요. 그리고 보고 싶은 사람도 없어요. 최소한 저는 성기 노출한 영화는 보기 싫어요. 그건 영화가 아니라 불법이죠. 포르노를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대중의 합의는 있다고 봐요. 그걸 누가 영화로 보나요.”
감독들이 에로 노하우 묻기도
—에로 감독을 하기 위해서는 여배우를 벗겨야 하는데 부담스럽지는 않나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성적 수치심이 있어요. 오래 에로를 하다 보니 다른 감독들이 노하우를 물어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소중하다고 배웠던 것을 (버리고) 약속된 범위 안에서 (노출을) 촬영해야 합니다. 거기서 오는 성적 모멸감, 수치심 이런 것을 커버해야 하는데, 감독이 여배우를 예뻐해 줄 수밖에 없어요. 한국에 에로 시장밖에 없다면, 에로를 꺼릴 이유는 없죠. 그러나 다른 장르도 많고 활동 영역도 넓으니까 한국 사람들의 (에로에 대한 부정적) 태도 때문에 밉보일 수도 있어서 배우들이 걱정해요. 그래서 저는 여배우들에게 오픈마인드로 접근해요. 만나서 ‘너의 취미가 뭐니’부터 시작해서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여요. 일단 여배우는 일을 하러 온 것이죠. 그러나 일로서만 다가가면 안 돼요. 그러면 노동자에 불과한 것이죠. 우리는 아티스트입니다. 아트 하는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 줘야 해요.”
그렇다면 봉 감독이 생각하는 사랑과 섹스(sex)는 무엇인가. 에로 영화만 13년을 만들었으니 나름의 철학이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는 사랑에 대해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에 섹스를 하나요, 아니면 섹스가 먼저인가요.
“사랑은 방부(防腐)처리가 필요해요. 유통기한이 있다면 그 순간까지 가는 것이 사랑이에요. 사랑은 방부처리를 해서 살아 있는 동안 유지해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섹스는 그렇지 않아요. 죽을 때까지 섹스할 수는 없는 것이죠. 섹스는 그냥 행위입니다. 시작과 더불어 화끈한 온도를 가진 열정입니다. 그러나 식어버리죠. 그렇게 반복됩니다. 그렇다고 사랑과 섹스를 갈라서 보아도 안 되죠. 사랑이 있어야 섹스가 가능하지만, 어느 날 원나잇(하룻밤 사랑)했지만 사랑으로 이어질 수가 있는 것이죠. 다만 남자는 섹스를 원하지만, 여자는 사랑을 원하죠.”
—여성도 성욕을 느끼는 것 아닌가요.
“여성이 지향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결국 여성은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 가게 되어 있어요. 여자는 사랑을 받으면, 그 남자를 더 만나고 싶고 가까이하고 싶어 하죠. 여자는 꼭 섹스가 필요한 동물이 아닙니다. 결혼을 해도 옆집 남자가 남편보다 잘해주면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섹스는 중요하지 않아요. 사랑하면서 손잡고 쓰다듬고 이런 첫 느낌이 근사한 것이죠. 중년이 넘으면 남자는 성호르몬(테스토스테론)이 줄어들고 여성은 남성화되죠. 남자는 가슴이 허해져요. 그 순간 섹스가 아닌 (사랑의) 대상을 찾게 되죠. 그래서 중년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이에요.”
“여성도 당당히 볼 수 있는 에로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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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만대 감독이 연출한 에로 영화들. <동상이몽>,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TV방자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이천년>. |
“한국의 에로를 보면, 섹스에서 희생당하는 대상은 모두 여자예요. 서로 사랑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배설적인 요소만 등장하고 있어요. 소위 콘텐츠(봉 감독은 인터뷰 내내 작품성 없이 그냥 소비되는 영화를 비하하는 표현으로 콘텐츠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로 전락해서, 여성을 위한, 여성 중심의 이야기는 없어요.”
—시중의 에로 영화를 여성들이 보면 불쾌감을 느낀다고 생각하나요.
“(남성과 여성은) 다가가는 태도가 달라요. 똑같은 스토리라도 시각적, 청각적 요소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죠. 남성이 (성적 쾌감을) 느낄 수 있게 여성이 교태(嬌態)를 부리거나 성(性)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남성을) 자극시키는 것이 대부분이죠. 예를 들어 에로 비디오의 성교 장면 부분만 늘어져 있는 경우입니다. 남성들은 그 부분만 재미있으니까, 계속 돌려 보았던 것이죠. 그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은 생리적으로 늘 배설해야 하는 종족번식을 위한 유전자가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죠. 문제는 (지나치게 남성 위주로 되어 있다 보니) 황폐(荒廢)해졌어요. 다른 비료를 뿌리거나 경작물을 심어야 된다고 봐요. 여성도 당당히 볼 수 있는 에로가 필요합니다.”
—여성을 위한 에로란 무엇인가요.
“여성은 소리와 캐릭터에 동화하면서 감정이입을 합니다. ‘저게 나였으면 좋겠다’는 판타지를 가지게 되죠. 여성들은 수많은 상상을 하면서, 즉 그림을 그리면서 어떤 지점을 향해 나아갑니다. 암컷은 수컷들을 싸우게 한 다음에 최고의 유전자를 받아들이죠. 에로 역시 판타지, 액션, 스토리, 패션 등이 널려 있어야 감정이입이 가능하죠. 그러나 남자는 단순해요. 성적 욕구를 푸는 데 관심이 있어서 빨리 벗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죠.”
“이규영 꼭 만나고 싶다”
영화 〈이천년〉은 감각적 영상으로, 에로 영화지만 나름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일부 비평가는 〈이천년〉을 당시 유행하던 왕가위 감독의 〈타락천사〉와 비교하기도 했다. 철저하게 주류 충무로 영화계에서 무시 받았던 에로 영화 업계에 유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제임스딘이 청춘의 아이콘(icon·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요절(夭折)했기 때문이다. 에로 영화 〈이천년〉이 아직까지 에로 팬들의 가슴에 남아 있는 것 역시 비슷한 이유다. 뭇 남성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여배우 이규영의 마지막 작품이 〈이천년〉이다. ‘서구적 마스크를 가진 글래머러스(glamourous)한 이규영은 어디에 있는가’는 에로 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표적 미스터리이다. 봉 감독의 출세작 〈이천년〉에 대해 물었다.
—여배우 이규영은 어떻게 지내나요.
“이규영을 한번 만나고 싶어요. 영화 이후 저도 만나본 적이 없어요. 기사에 꼭 ‘봉만대가 이규영을 만나고 싶어 한다’고 써주세요. 이규영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스토리는 저만 알고 있어요. 시장논리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어요. 케어해(보살펴) 주어야 할 게 있어요. 결혼 문제는 아니지만 혼자만의 아픔이 있어요. 그래서 꼭 한번 만나고 싶어요. 차후에 이규영 스토리를 영화로 풀어내고 싶어요.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니까 동의를 먼저 구한 후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천년〉이 흥행에 성공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준비를 많이 했어요. 원래 조산소(비디오테이프)가 아니라 산부인과(극장개봉)에서 태어나야 했어요. 원래 제목은 〈핑크펑크〉였어요.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리려 했죠. IMF 속에서 방황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어요. 하지만 영화를 만들기가 (경제적 이유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에로 프로덕션 클릭으로 가서 만들었어요.”
—수많은 에로 감독이 있었지만, 왜 ‘봉만대’만 주목받나요.
“저는 처음에 담론을 내세우지 않았어요. ‘섹스는 놀이고 삶 자체다’고 보았죠. 그래서 좀 더 젊어 보이고 참신했어요. 당시 제 나이가 서른이었어요. 대중을 의식해서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어요. 불편하지 않고 자연스러워야 하고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사건과 맞물려 가야 이야기가 펼쳐진다고 보았죠.”
“나의 영역 구축하고 싶어”
2003년 봉 감독은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을 연출했다. 에로 출신이라는 꼬리표를 극복하고, 상영관에 걸리는 영화를 연출한 것이다. 과거 일부 에로 감독이 상업 영화의 일부 성행위 장면을 연출하는 사례는 있었다. 하지만 대역 배우처럼 이름없이 연출했다. 에로 영화를 몰래 소비하듯, 에로 출신이라는 낙인은 끝까지 따라붙었다. 봉만대 감독이 극장판 영화를 연출한다는 소식에 에로 감독들은 봉 감독의 성공을 기원했다. 마치 프로야구 2군 출신이 1군으로 도약하는 것과 같았다. 아직까지는 봉 감독이 1군으로 도약한 유일한 2군 출신이다. 감독의 개인사가 궁금했다. 봉 감독은 결혼해 1남 1녀를 두고 있다.
—아내 혹은 자녀들이 에로 영화를 찍는 것을 이해하나요.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보지 못해요. 아내는 이해합니다. (에로 찍는) 일(직업)을 먼저 보고 사람을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일을 하는 것을 보고 만났거든요. 원래 영화 광고파트에서 일했는데 광고 촬영부서에 왔을 때 만났어요. 제가 촬영 막내로 있었을 때죠. 6년 연애하고 2년 동거한 다음에 결혼했어요.”
—비록 에로를 하지만, 영화를 보면 B급 의식이랄까 나름의 철학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로라는 장르가 생로병사가 있어요. 내 안의 에로 유전자를 분출해서 전 세계와 교류하려 해요. 이탈리아에서 세계적 에로 거장 틴토브라스(Tinto Brass)와 저녁을 먹었는데 이런 말을 했어요. ‘이탈리아에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반, 나머지 반은 싫어한다.’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니까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도 한다는 틴토브라스의 말이 좋았어요. 그가 유럽의 중심에서 섹스를 아주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처럼 나도 늙어 죽기 전까지 휩쓸리지 말고 나의 영역을 구축하고 싶어요. 미국에 잘만 킹(Zalman King), 이탈리아에 틴토브라스가 있듯이 유교문명의 끝자락에 위치한 한국에는 봉만대가…”
‘플레이보이’란 단어가 19금(禁)인 나라
8월 말 봉 감독은 자신이 연출하고 주연으로 출연한 〈아티스트 봉만대〉를 선보였다. 영화 홍보자료는 영화를 “에로 영화 현장의 모든 것을 공개해 주마! 대한민국 에로계의 독보적인 거장 봉만대 감독이 돌아왔다!”고 적었다. 영화는 다큐 형식의 픽션으로 ‘페이크다큐(fake docu)’라 불리는 방식이다. 에로 영화 현장의 모습을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처럼 보여준다. 영화는 인도네시아 발리 올 로케이션으로 제작됐다. 유사한 방식의 영화가 최근 유행이다. 이재용 감독의 〈뒷담화:감독이 미쳤어요〉, 노덕 감독의 〈연애의 온도〉가 올해, 2009년에는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이 상영관에 걸렸다.
—페이크다큐 방식의 영화는 트렌드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되게 낯선 장르잖아요. 이런 장르는 완벽한 궤도에 오르기 전까지 모험을 해야 돼요. 수제(手製) 라면 같은 느낌이랄까요. 일상적으로 우리가 먹는 라면과는 다른 색다른 라면입니다. 한국 관객들은 아량이 넓지 않아요. 다른 게 들어오면 이질감을 느껴요. 이종교배(異種交配)적 느낌이랄까요.”
—영화 제목을 굳이 〈아티스트 봉만대〉라고 한 이유는 뭐죠.
“원래는 〈플레이보이 봉만대〉였어요. 하지만 심의 통과가 되지 않았어요. ‘플레이보이’라는 단어는 19금(禁)이에요. 우리가 이런 사회에 살고 있어요. ‘플레이보이’라는 단어를 쓰면 온라인에서 검색할 때 성인인증을 해야 돼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경우 ‘섹스’가 금기어예요. 그래서 영화제목이 잘 검색이 되지 않아요.”
—영화 제목에 ‘봉만대’를 넣었다는 것은 그만큼 유명하다는 자신감인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코미디예요. ‘어떻게 봉만대가 아티스트일 수 있어’라고 생각하면서 웃을 수 있는 것이죠. 봉만대를 모르는 사람은 봉 감독이 누군지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요. 사실 제목에 아티스트를 붙인 것은 제가 아니에요. 에로 거장이라고 홍보해 달라고 한 적도 없어요. 영화 홍보하는 측에서 무엇인가 봉만대 앞에 붙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냥 ‘영화감독 봉만대’라고 하면 밋밋하니까.”
—솔직히 영화를 보고 생각보다 야하지 않아서 실망했어요.
“아니에요. 중간에 웃어서 그래요. 에로는 다른 감성과 충돌하면 깨져요. 공포에 코미디가 중간에 들어오면 무엇인가 단절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느낌이 오지 않는 것이죠. 에로가 재미있는 것이 뭐냐면, 이야기를 하다가 에로가 나오면 앞의 것을 잊어버리게 돼요. 에로 현장에서 벌어지는 상황들, 이런 상황의 배우들에게 에로 상황을 넣어서 더 질펀한 느낌을 주려 했어요.”
—영화에서 감독이 하얀색을 좋아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첫사랑이 입었던 옷이 하얀색이에요. 개인적인 취향이긴 한데, 첫사랑이 빨간색 옷을 입었으면 빨강을 좋아했겠죠.”
B급의 최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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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말 개봉한 <아티스트 봉만대> 시사회 현장.(영화 홍보사 제공) |
〈아티스트 봉만대〉 개봉에 즈음해서, 봉 감독은 수십 곳의 매체로부터 인터뷰를 요청받았다. 미디어 노출 빈도만으로 보면, 〈설국열차〉의 한국 대표 감독 봉준호와 비슷했다. 봉만대 감독은 언론의 엄청난 관심에 스스로도 놀란 듯했다. 생활인 영화감독의 비애(悲哀)도 인터뷰 도중 조금씩 드러냈다. 최소 3년을 준비해 영화를 내놓지만 몇 주 안에 승부가 갈리는 냉혹한 영화판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인터뷰 도중 종종 봉 감독의 ‘여성성’이 느껴져 크게 놀랐다. 분명 그에게는 에로 유전자가 있었지만, 마초적 성적 욕구는 아니었다. 그에게서 쉽게 상처받고 작은 손길과 분위기에 감정이 요동치는 여성적 에로 유전자가 느껴졌다. B급, 비주류로 살아왔기에 상처를 받아 왔고 아픈 만큼 감수성이 자란 것으로 보였다.
봉 감독에게는 자부심도 있었다. “B급의 최상위는 A급과 비슷하다.” 이젠 거의 주류 영화계를 따라잡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무(無)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봉 감독이 지금 가진 것은 모두 봉 감독 스스로 쟁취한 것이다. 그래서 내 손으로 이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봉만대’라는 이름이 주는 B급 이미지 때문에 자신과 함께한 배우들이 상처받는 것을 특히 경계했다. 봉 감독의 마지막 말은 이렇다. “나와 작품을 함께한 배우들이 주류로 간다면 정말 고마울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