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李基澤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上) : 월간조선

1960년 4·19혁명 당시 나는 고려대 상과대 학생위원장이었다. 당시 고려대에는 총학생회장이 없었고, 5개 단과대 학생위원장단이 있었다. 이세기(李世基, 전 통일원 장관)가 정경대, 강우정(康宇淨, 서울성서대 총장)이 법대, 윤용섭(尹湧燮, 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검사역)이 문리대(文理大), 김낙준(金洛駿)이 농대 학생위원장이었다.

상대 학생위원장으로 선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대 선배인 이철승(李哲承) 의원으로부터 혜화동에 있는 자기 집으로 밥이나 먹으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이철승 선배와의 만남을 계기로 나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을 비롯한 재야(在野)인사들은 공명선거추진전국위원회를 만들었다. 김창숙, 장택상, 김성숙, 고희동, 김준연, 장리욱 등 명사들이 참여했다. 나는 공명선거추진전국위원회 학생특별위원회 대표를 맡았다.

그해 3월 1일 학생특위 소속 복진풍(卜鎭豊, 당시 건국대 4학년. 전 환경관리공단 이사장) 등이 3·1절 기념식장인 서울운동장에서 공명선거를 촉구하는 전단을 뿌렸다. 직접 이 일에 가담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도 수배령이 떨어졌다. 서울에서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한 나는 강경식(姜慶植, 제12대 국회의원), 문정수(文正秀, 전 부산시장) 등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다.

3월 중순 어느 날, 나는 동지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부산 광복동의 한 다방 앞에서 경찰에 붙잡혔다. 3·15부정선거와 마산시위 소식을 접한 것은 경찰서 안에서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경찰관들은 나를 마산시위의 배후 조종자로 몰고 가려 했다. 나는 마산시위와는 관련이 없다고 항변했다. 결국 경찰은 나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高大 학생위원장단과 擧事 모의

고려대학교 재학 시절 나(원 안)는 상대 학생위원장으로 있으면서 4·19 당시 고대생 시위를 주도했다.

지방에서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SNS도 없던, 아니 라디오조차 흔치 않던 그 시절에 어린 고등학생들이 무엇을 안다고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나섰을까? 아마 집 안에서 부모님들이 가난과 잘못되어 가는 세상에 대해 한숨을 내쉬는 것을 보면서 세상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것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4·19혁명의 씨앗은 가정에서 배태(胚胎)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울에서는 학생들의 시위가 없었다. 나는 친구들과 만나 “전국 방방곡곡에서 고등학생들이 궐기하고 있는 지금, ‘민족대학’을 자처하는 고대가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

4월 초, 나는 고려대 단과대 학생위원장들에게 모임을 제안했다. 농대 학생위원장 김낙준의 하숙집에서 모인 학생위원장들은 갑론을박(甲論乙駁)했다. 여러 날 논의 끝에 법대 학생위원장 강우정이 말했다. “이기택이가 이렇게 말하는데, 해보자. 그리고 한번 할 때가 안 되었나?”

“교문 나가면 제적이다”

거사일은 4월 16일로 잡았다(후에 4월 18일로 변경). 선언문은 《고대신보》 편집국장 박찬세(朴贊世, 전 대통령공보비서관) 선배가 써주기로 했다. 학생위원장단은 신입생환영회를 빙자해 시위준비에 들어갔다.

이미 마산에서는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 여러 명의 사상자(死傷者)가 나왔다. 서울에서도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거사 전날인 4월 17일 나는 하숙집에서 유서(遺書)를 쓰고 책갈피 사이에 끼워놓았다. 이 유서는 4·19 이후 청년운동을 한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이에 다른 짐들과 함께 분실하고 말았다.

4월 18일 아침 10시, 우리 학생위원장단은 학생처장이던 현승종(玄勝鍾, 전 국무총리) 교수님, 이항녕(李恒寧, 전 홍익대 총장) 교수님 등에게 이끌려 재단이사실로 불려갔다. “다친다”면서 설득하던 현승종 교수님은 나중에는 위협조로 이렇게 말했다.

“나라에 국법(國法)이 있듯이 학교에는 교칙(校則)이 있다. 학교 당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데모한다고 교문 밖으로 나가면 그 순간부터 너희는 고대 학생이 아니다. 제적(除籍)한다. 그래도 하겠느냐?”

그분들이 불의(不義)에 항거하려는 우리의 대의(大義)를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당시 고려대는 김성수 선생, 《동아일보》와의 관계 때문에 ‘야당(野黨) 대학’으로 찍혀 있었다. 교수님들 입장에서는 험한 정국(政局) 상황 속에서 학교와 학생들의 안위(安危)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창 피끓는 나이였던 우리는 그런 데 구애받지 않았다. 본관 뒤 화장실 앞에서 우리는 다시 결의를 다졌다.

시위대 앞에서 구호 先唱

1960년 4월 19일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玄勝鍾 고려대 학생처장이 학생들에게 해산을 종용하고 있다.

12시경부터 우리는 “본관 앞에 집합하라”는 격문을 뿌렸다. 독고중훈(獨孤重勳)이 스피커를 잡고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1시쯤 본관 앞에 5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세기가 본관 정면 계단에서 선언문을 낭독했다.

“친애하는 고대 학생 제군! 한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 청년 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약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이어 내가 나서서 구호를 선창(先唱)했다.

“기성세대는 각성하라!”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경찰의 학원 출입을 엄금하라!”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치 말라!”

이어 우리는 교문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학생식당을 보니 아직도 식사를 하고 있거나, 우리를 멀뚱멀뚱 바라만 보는 학생들이 꽤 있는 게 아닌가? 화가 치밀었다. 나는 길가에 깔아놓은 작은 자갈을 주워들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왜 동참하지 않는 거냐?”고 외치면서 자갈을 뿌려댔다. 어떤 학생들은 자갈세례를 피해 도망쳤고, 어떤 학생들은 시위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식당을 나섰다.

그러느라고 몇 분간 시간을 지체한 나는 시위대열 후미에 합류해 교문을 나섰다. 안암동 로터리에서 시위대는 경찰과 대치했다. 나를 발견한 경찰과 학생처 직원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우리는 스크럼을 짜고 버텼다. 경찰이 내 머리털을 붙잡았다. 난장판이 벌어졌다. 결국 나는 경찰과 학생처 직원들에게 이끌려 지프에 태워져 학교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까지 나는 학생처 사무실에 감금되어 있어야 했다.

시내로 진출했던 고대생들은 학교로 돌아오던 길에 청계천 천일백화점 앞에서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았다. 100여 명의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거짓말로 경찰 포위망 풀어

4월 19일. 전날의 피습(被襲) 소식에 격분한 고대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교문 앞은 이미 경찰이 포위하고 있었다. 뚫을 방법이 없었다.

나는 학교 지프를 빌려 타고 안암동파출소로 가서 경찰 책임자를 만났다. 내가 말했다.

“오늘 고대 학생들은 데모하지 않기로 학교 당국과 학생들이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깡패들에게 당한 것 때문에 분(憤)이 남아 있는데, 이렇게 경찰이 학교를 포위하고 있으면 학생들이 더욱 흥분하게 됩니다. 경찰병력을 철수시켜 주십시오.”

경찰을 철수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다. 경찰 간부는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책임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내 말을 믿고 경찰병력이 철수했다.

경찰이 철수한 후 고대생들은 본관 앞에서 학생총회를 하고 나서 교문 밖으로 나섰다. 나와 이세기가 대열의 선두를 이끌었다.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경무대(景武臺·현 청와대)로 가자는 의견과 태평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으로 가자는 의견이 맞섰다. 나는 국회의사당 앞으로 가자고 주장했다.

“경무대 앞은 통행을 제한하고 있어 사람들이 별로 없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국회의사당 앞으로 가는 게 낫다.”

내 주장이 받아들여져 시위대는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곳곳에서 총성이 나고 서울신문사, 반공회관 등에서는 불길이 치솟았다. 만일 고대생 시위대가 경무대 쪽으로 향했다면 더 많은 희생자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학교로 돌아왔더니, 고려대 선배인 정모 경무대경찰서 정보과장의 끄나풀로 알려진 친구가 말했다.

“너는 붙잡히면 총살이다. 도망가라.”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붙잡혀 가거나 죽는 것만 생각했지, ‘도망’이라는 것은 생각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학교 당국에 도피자금을 요청하기로 했다. 현승종·이항녕 교수님께 도피자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다. 두 분은 거절했다.

“너희는 지금 나가면 반드시 붙잡힌다.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 학교에서 도피자금을 빌렸다는 사실을 불지 않을 수 없을 거다. 그러면 학교는 문을 닫게 된다.”

대신 두 분은 학교 지프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나, 이세기, 독고중훈 등이 그 차를 타고 학교를 나왔다. 이후 나는 친구가 가정교사로 일하는 집, 친구의 형인 김수한(金守漢, 전 국회의장)의 집, 신촌 이화여대생의 자취집 등을 전전(轉轉)하며 도피생활을 했다.

李承晩下野

4·19 후 나(원 안)는 부산에서 대한민주청년회 부산·경남지부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청년운동을 했다.

그렇게 일주일여를 지내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려고 택시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학교 앞 200~300m쯤에서 내렸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면서 학교 쪽으로 가는데 누군가 나를 불렀다. 친구였다. “동정을 살피러 왔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야, 이승만 박사가 하야(下野)했어. 이제 학교에 가도 돼.”

그날이 4월 26일이었다. 꿈만 같았다. 사실 처음 학생시위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승만 대통령 하야는 생각지 못했다. 부정선거를 무효화하고 다시 선거를 하라는 게 우리의 요구였다. 그러던 것이 유혈(流血)사태를 겪으면서 “이승만 박사 물러가라”는 외침으로 발전했지만, 설마 그게 현실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4·19는 내 정치인생의 출발점이자, 내가 정치를 한 이유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4·19의 의미가 점점 퇴색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4·19의 의미를 인정하면 거북해지는 ‘군사정권’이 애써 그 의미를 망각하게 만든 것이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4·19의 의미를 잊어서는 안 된다. 세계사를 봐도 정치·경제적으로 발전도상(發展途上)에 있는 후진국가에서 학생이 들고 일어나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 4·19는 학생이 중심이 되어 시민들과 함께 이룩한 ‘국민혁명(國民革命)’이었다.

4·19의 주역인 학생들은 이후 새로운 사회기풍을 조성하는 일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만든 단체가 대한민주청년회(회장 崔薰, 제12·13대 국회의원)였다. 나는 이 단체의 부산·경남지부 위원장을 맡았다. 동아대의 박관용(朴寬用, 전 국회의장)과 서석재(徐錫宰, 전 총무처 장관), 수산대의 허재홍(許在弘, 제13·14대 국회의원), 부산대의 윤석순(尹碩淳, 제11대 국회의원) 등이 부위원장으로 함께 운동을 했다.

우리는 7·29총선을 앞두고 공명선거 캠페인을 했고, 이어 통일운동을 했다. 일부 대학생은 서울에서 통일문제에 대한 대학생토론회를 열고, 나중에는 판문점 남북학생회담 주장까지 해 기성세대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때 우리가 얼마나 알고 통일을 운운했는지는 의문이다. 단지 ‘멸공(滅共)통일은 전쟁하자는 것이니까 곤란하고, 평화통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태광산업 영업과장

1961년 4월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한 달여가 지났을까. 어느 날 새벽, 대한민주청년단 부산·경남지부 본부로 쓰고 있는 여관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발로 꽝꽝 걷어찼다.

“군인들이 나왔다!”

5·16군사쿠데타였다.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 동지들 가운데 일부는 나중에 반(反)혁명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붙잡혀 가서 고초를 겪었다. 반혁명이라야 끼리끼리 모여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야 되겠느냐?”하는 논의를 한 정도였지만….

나는 그 무렵 동지들과 연락이 닿지 않아 거기에 끼지 못했다. 수사당국에서는 김성조(金星祚, 전 부산MBC 사장)에게 “이기택이도 함께 모의하지 않았느냐”고 캐물었지만, 김성조는 끝까지 “이기택이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고 한다.

1963년에 들어서면서 군사정부는 정치활동금지를 해제했다. 박순천(朴順天) 여사, 조재천(曺在千)씨 등이 중심이 되어 민주당을 만들었다. 나는 박관용, 서석재 등 5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당에 입당(入黨)했다. 부산의 유력지 《국제신보》는 ‘민주당 고목(古木)에 새싹이 튼 격’이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입당을 크게 보도했다.

나는 민주당 부산지부 청년국장이 됐다. 불과 26세의 나이였지만, 부산 지역 정가(政街)에서는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공화당에서도 영입 제안이 들어왔다. “나는 4·19를 한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던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 민주당 부산시당 일각에서는 제6대 총선에 나를 내보내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나이가 너무 젊었던 탓도 있어서 성사되지는 않았다.

1963년 10월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군복을 벗은 박정희(朴正熙) 장군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1월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공화당이 다수(多數) 의석을 차지했다.

이제 나도 생활인으로서 역할을 해야 할 나이였다. 자형(姊兄·李壬龍)이 경영하던 태광산업에 입사(入社)했다. 한참 우리나라가 섬유수출 등으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할 때였다. 나는 영업과장으로 일하면서 아크릴사(絲), 스웨터 등을 북구(北歐)에 수출했다. 아마 이들 제품을 북구에 수출한 것은 내가 최초가 아닐까 싶다.

훗날 민주당 대표 시절 전경련(全經聯) 연수회에 연사로 초청받았을 때, 이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사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조금은 알고 있다”고 말했다. 재벌그룹 오너들은 ‘데모만 하는 야당 투사인 줄 알았는데, 우리랑 통하는 데가 있네’하는 표정을 지으며 좋아했다.

정치입문 후 누님회사와 사실상 緣 끊어

兪鎭午 신민당 당수(왼쪽)는 29세 청년이던 나를 전국구 의원으로 발탁했다.

1967년 어느 날 유진오(兪鎭午) 신민당 당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고려대 총장을 지낸 유 당수는 제7대 총선을 앞두고 참신한 인재 영입에 부심(腐心)하고 있었다. 신민당에서는 유진산 당수에게도 비례대표(전국구)를 한 명 추천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나중에 듣기로는 유 당수의 참모들 사이에서 이런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당수님이 고려대 총장에서 신민당에 영입이 됐는데, 참신하고 명분 있는 후보를 세워야 합니다. 지금 공화당 정치인들은 젊은데, 야당은 노화(老化)되어 있습니다. 이기택 같은 젊은 사람을 세워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당시 신민당에서는 당선 가능한 비례대표 의원을 15명 정도로 보고 있었다. 나는 13번을 받았다. 송원영(宋元英) 전 의원이 14번, 김수한 전 의원이 15번을 받았다. 내 나이 만 29세 때였다. 7대 국회 최연소(最年少) 의원이었다.

신민당 입당을 앞두고 자형, 누님(이선애 태광산업 상무)과 의논했다. 두 분 모두 “네가 정치를 할 생각이 있으면 하라”면서 흔쾌히 승낙해 주었다.

내가 야당 의원이 되면 회사에 얼마나 큰 어려움이 닥칠지 몰랐을 것이다.

이후 태광산업은 3선 개헌,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 1985년 2·12총선 등 정치적 고비가 있을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세무사찰을 받아야 했다. 1979년에는 1월 초에 국세청이 회사의 모든 장부를 압수해 가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장(國葬)이 끝난 11월 초에야 돌려준 적도 있었다.

혹자는 내가 그래도 정치활동을 하면서 태광그룹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았겠느냐고 하는데, 오히려 우리는 연(緣)을 끊다시피 했다. 지금도 나는 개인사무실이 없어서 서울 공덕동에 있는 범시민사회단체연합 상임고문실을 내 사무실처럼 사용하고 있다.

姊兄李壬龍 회장

姊兄인 李壬龍 태광그룹 창업주.

나 때문에 자형과 누님이 겪은 어려움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뿐이다. 자형은 검소하고 훌륭한 사업가였다. 언젠가 집안 일로 오래간만에 자형을 만났다. 자형이 물었다.

“혹시 좋은 사업 아이템이 없겠나? 그래도 네가 국회 재무위원이니, 뭐 좀 들은 얘기가 있지 않겠나?”

“호텔 같은 걸 지으면 어떻겠습니까? 정부에서 관광입국(觀光立國)을 내세우고 있고, 삼성에서도 호텔을 짓는다고 하던데요?”

순간 자형은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나라는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안 된다. 호텔 같은 거 지어서 우리 딸 같은 아이들이 일본놈들에게 몸 팔게 하자는 거냐? 그런 건 사업이 아니다!”

“그럼 부동산을 좀 사두시죠.”

“기업가가 해야 할 일은 공장을 지어서 못 먹고 못사는 실업자들을 구제하는 일이다. 땅을 사서 거기에 돈을 묻어두는 일은 사업가가 할 일이 아니다.”

자형은 부동산에 손을 대지 않았다. 흥국생명을 하면서 지방에 다소 건물을 마련한 것은 있지만, 비업무용 부동산이나 개발예정지의 부동산을 사서 시세차익을 노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짜장면만 먹으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지만, 그 돈은 사업을 확장하는 데만 썼다.

얼마 전 누님이 수천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 관리했다고 해서 물의를 빚었다. 법적인 잘못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겠지만, 그에 대한 원죄(原罪)는 내게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야당 의원을 하는 바람에 자형이나 누이는 보수적으로 회사를 경영했다. 정권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는 상황 속에서 누이가 자금을 관리하게 됐다. 자형은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지만, 회사를 더 키우지 못한 것이 내가 걸림돌이 됐기 때문인 것 같아 미안하기만 하다.

3選改憲 반대 투쟁

국회의원이 되면서 내게 다른 생각은 없었다. 4·19세대의 대표 정치인으로서 하루빨리 민주화를 이루는 것이 내 유일한 희망이고, 목표였다. 그때만 해도 군사정권이 그렇게 오래가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당시 공화당 의원들 가운데는 군(軍) 출신 의원들이 많았다. 그들은 목에 힘을 주고 다녔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아직도 군인 같았다. 하지만 공화당은 젊었다.

반면에 야당에는 박순천, 서범석, 정성태, 정헌주 선생 같은 원로들이 많았다. 야당정치는 곧 계보(系譜)정치이던 시절이었다. 회의 때면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두 번 다시 얼굴을 보지 않을 사이인 것처럼 치열하게 싸웠다. 나는 속으로 ‘우리 내부에서 이렇게 험하게 싸워서야 어떻게 단결해서 반독재민주화투쟁을 한단 말인가’ 싶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회의가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어울려 하나가 됐다.

7대 국회 때 가장 큰 이슈는 3선 개헌이었다. 나는 ‘4·19, 6·3 범(汎)민주청년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박정희 정권의 장기(長期)집권 음모에 맞섰다. 후일 내무부 장관을 지낸 최형우(崔炯佑) 동지가 사무총장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

공화당 내에서도 JP(김종필)계 의원들이 3선 개헌에 반발하는 바람에, 공화당은 개헌 의결정족수(재적 3분의 2)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신민당 의원들을 회유하려 했다. 내게도 회유의 손길이 뻗쳐왔다.

金炯旭, 태광 借款 빌미로 회유

金炯旭 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이 “한번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다. “내가 왜 당신을 만나느냐. 일없다”고 거절했다. 국회에서 마주치는 공화당 의원들도 “이 의원, 김형욱 부장이 한번 보자는데 만나주기라도 하라”고 권했다. 거절했다. 나중에는 자형이 하소연했다.

“나한테까지 압력이 들어오고 있는데, 죽겠다. 김 부장 만나주는 거야 뭐 그리 어려운 일이냐? 한번 만나주라.”

결국 김형욱 부장을 만나기로 했다. 필동 입구에서 중앙정보부 직원을 만나 그의 안내로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다.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검은 양복을 입은 요원들이 10m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부장실로 가니 키가 작은 사내가 나를 맞이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김형욱 부장이었다. 김 부장이 다짜고짜 말했다.

“이 의원, 나하고는 긴 말 할 것 없소. 박 대통령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청와대로 갑시다.”

“내가 왜 청와대에 간다 말이오? 할 얘기가 있으면 여기서 하시오.”

김 부장은 몇 번 청와대로 가자고 권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 의원, 이건 박 대통령의 특명(特命)이오. 당신은 박 대통령이 모시려는 ‘1호’요. 이 의원 같은 4·19세대 정치인이 박 대통령이 추진하는 조국 근대화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소? 우리 함께 일합시다.”

어이가 없었다. 나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난 그렇게는 못 합니다.”

“왜 못 한다는 거요?”

“첫째, 나는 4·19세대의 대표로 신민당으로 영입된 사람이오. 당을 배신할 수는 없소. 둘째, 4·19세대의 대표라는 것은 대한민국 청년대표라는 뜻이오. 나는 대한민국 청년들을 배신할 수 없소. 셋째, 내가 당과 청년을 배신하면 나는 쓰레기가 되는 거요. 그런 쓰레기를 데려다가 당신들이 어디에 써먹을 수 있겠소? 오히려 괜찮은 사람 하나 당신들이 버려놓았다고 욕만 먹게 될 거요. 나를 데려가는 건 당신들에게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바보 같은 짓이오.”

내 말을 들은 김형욱 부장은 자기 책상 위를 가리켰다. 책상 위에는 보자기로 감싼 서류뭉치가 놓여 있었다. 김 부장이 말했다.

“이 의원, 저게 뭔지 아시오?”

“내가 어떻게 알겠소?”

“당신 자형이 하는 태광에서 낸 일본차관(借款) 신청 서류요.”

국내 자본이 빈약하던 당시, 기업들은 일본 등에서 들여오는 차관에 목을 맸다. 차관을 끌어와야 시설투자가 가능했다. 아니 국내 금리(金利)보다 낮은 차관을 들여오는 것만으로도 기업에는 큰 특혜가 됐다. 김 부장이 말을 이었다.

“이미 경제기획원에서는 오케이가 됐소. 하지만 우리의 적(敵)을 도울 수는 없는 일 아니겠소? 당신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저건 승인해 줄 수 없소. 어쩌겠소?”

“나는 이미 야당 의원이 되면서 자형이나 누이와 인연을 끊은 사람이오. 마음대로 하시오.”

김형욱 부장은 설득이 먹혀들지 않자 혼자서 부장실 옆에 있는 부속실로 나갔다. 그는 거기서 전화를 걸었다. 청와대와 통화하는 것 같았다.

“네. 네. 영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안 되겠습니다.”

다시 부장실로 돌아온 김형욱 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섭섭합니다. 꼭 같이 일하고 싶었는데….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는 나도 모르겠소.”

1969년 9월 14일, 공화당 의원들은 국회 제3별관에서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던 우리는 격분했다. 나는 김상현(金相賢) 의원과 함께 이효상(李孝祥) 국회의장실로 쳐들어갔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책장을 보니 헌법전을 비롯해 법전(法典), 법학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하는 나라에 이런 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 책들을 뽑아 창밖으로 집어던졌다.

全敬煥,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제 형님이 하는 얘기”

官製야당을 만들어달라는 全斗煥의 부탁을 전한 全敬煥.

먼 훗날의 얘기지만, 전두환(全斗煥) 정권에서도 회유의 손길을 뻗어온 적이 있었다. 1980년 6월 초였다. 그해 5월 30일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때 나는 부산에 내려가 있었다. 장례를 치르고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미국 LA에서 안경사업을 하는 신모였다.

“기택아, 중요한 일이 있다. 빨리 올라와라.”

“무슨 일인데?”

“아주 중요한 일이다. 당장 올라와야 한다.”

김해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약속장소인 청와대 인근 한정식집으로 가서 방문을 열었더니, 누가 보료에 비스듬히 앉아 있다가 얼른 일어났다. 전경환(全敬煥)이었다. 그와는 안면이 있었다.

전경환은 1970년대 후반 이병철(李秉喆) 삼성그룹 회장 경호비서를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낭인(浪人)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LA에서 불우하게 지냈는데, 이때 현지의 교포 사업가들과 자주 어울렸다. 전경환은 그들에게 “형이 육군소장(少將)으로 청와대 경호실 차장보”라고 자랑했다. 그들은 ‘그런 형을 둔 사람이 저렇게 사나’ 하면서도 전경환에게 몇 번 밥도 사고 술도 샀다. 내게 전화를 건 신모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12·12사태 이후 세상이 바뀌었다. 전두환(全斗煥) 장군이 실력자로 부상(浮上)하면서 전경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LA에서 전경환에게 잘해 주었던 교포 사업가들은 서울로 달려왔다. 신모 덕에 나도 그들이 어울리는 자리에 낀 적이 있었고, 그래서 전경환과 안면을 트게 됐다.

보료에서 일어난 전경환은 내게 보료에 앉으라고 권하고, 자기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제 얘기가 아니고, 제 형님(전두환)이 하는 얘기입니다. 제 얘기는 한마디도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래, 무슨 얘기요?”

“이제 민정(民政)으로 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정당이 필요합니다. 이 의원님께서 정당을 하나 만들어주십시오.”

나에게 전두환을 위한 정당을 만들어달라니…. 생각지도 않았던 얘기였다. 전경환에게 “3일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民韓黨 같은 官製야당 만들 뻔

방을 나왔더니 친구 신모가 있었다. 그에게 물었다.

“전경환이가 내게 할 말을 알고 있었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냐?”

“고민이다.”

“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통금(通禁)시간이 끝나는 대로 박관용을 불러줘. 박관용과 의논해야겠다.”

대한민주청년회 시절의 동지였고, 내 보좌관을 했던 박관용은 그때 국회 전문위원으로 있었다. 부지런하고 똑똑해서 고비마다 내 의논 상대가 되어주곤 했다.

다음 날 아침 박관용이 달려왔다. 그에게 전경환에게 들은 얘기를 전해주고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겠나?”

“그거야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의원께서 판단하실 일이지요.”

“내가 쿠데타 한 사람들하고 어떻게 같이 정당을 하겠나? 내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다만 말미를 달라고 한 것은, 그래도 저쪽에서 그렇게 제안을 해왔는데 즉석에서 걷어찰 수는 없어서 그런 거다. 거절하더라도 ‘당신들 얘기를 신중히 검토했지만, 여러 가지 상황상 응할 수 없다’고 작은 예의라도 차려야 하지 않겠나? 당신이 이런 내 생각을 잘 정리해서 서면으로 만들어달라.”

결국 나는 5공(共) 정권의 정치활동금지대상에 묶여 강제로 정치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때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나는 그때 전경환의 제안을 전두환 정권의 여당(與黨)을 만들어달라는 얘기였던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데 몇 년 전 지인(知人)들과 골프를 치면서 이야기를 했더니, 같이 있던 한 언론인이 이렇게 말했다.

“총재님, 그건 여당, 즉 민정당(民正黨)을 만들어달라는 얘기가 아니고, 민한당(民韓黨) 같은 관제(官製)야당을 만들어달라는 얘기였을 겁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그렇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柳珍山과 辛道煥

辛道煥 전 의원.

다시 옛날이야기로 돌아가자.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는 부산 동래(甲)에 출마해 당선됐다. 동래갑 지역구는 위원장이 3선 개헌 때 공화당으로 변절하는 바람에 무주공산(無主空山)이 된 곳이었다. 부산지역 정가에서 오래 활동해 온 야당의 맹장(猛將)들이 눈독을 들였다. 나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찌감치 체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진산 총재가 나를 부르더니 “동래갑에서 출마하라”고 했다. 유진산 총재의 정치노선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나는 그때 유진산 총재에게서 계보를 떠나 큰 정치를 하는 ‘대(大)정치가’의 면모를 봤다.

8대 국회에 신도환(辛道煥) 의원이 전국구로 들어왔다. 그는 이승만 정권 시절 반공청년단장으로 있으면서 자유당 정권의 전위대(前衛隊) 노릇을 했었다. 때문에 4·19와 5·16 이후 유죄(有罪)판결을 받고 오랫동안 정치활동을 금지당했었다. 이같은 이유로 자기와 대척점(對蹠點)에 섰던 민주당의 후예인 신민당 전국구 의원이 된 것이다.

신도환 의원은 자신의 전력(前歷)을 씻기 위해서는 4·19세대의 대표주자인 나와 가까이 지내야 한다 생각해서, 내게 무척 공을 들였다.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잘 지내시느냐?”, “식사는 하셨느냐?” 이런 얘기가 전부였다.

나보다 15세나 많은 선배 정치인이 이러는데 안 넘어갈 재주가 없었다. 신도환 의원에게는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다. 결국 나는 그와 가까운 사이가 됐다. 당내에서도 그를 좋아하는 그룹이 형성됐다. 그러자 신도환 의원은 ‘계보’를 만들겠다고 나섰다. 나는 말렸다.

“과거 반공청년단장을 했던 선배님이 민주당 안에서 계보정치를 하겠다고 나서서야 되겠습니까? 그건 옳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지금처럼 두루두루 많은 사람과 사귀면서 기반을 넓혀놓고, 그걸 바탕으로 정치를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신도환 의원은 ‘신우회(新友會)’라는 것을 만들었다. 공식적으로 ‘계보’라고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신도환계(系)’나 다름없었다. 이후 나는 점차 신도환 의원과 멀어졌지만, 사람들은 나를 오랫동안 ‘신도환계’로 분류했다.

부산市黨 위원장 선거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金泳三) 의원이 대선(大選) 출마를 선언하고 나섰다. 유진산 총재 등 당의 원로들은 ‘구상유취(口尙乳臭)’라며 비웃었지만, 김대중(金大中)·이철승 의원 등이 잇달아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신민당의 늙고 활력 없는 ‘노인정치’에 식상해 있던 당원들과 국민들은 ‘40대(代) 기수론(旗手論)’에 열렬히 환호했다.

비록 그해 4월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패했지만, 신민당 내에서 ‘40대 기수론’의 파장은 계속됐다. 종래 당 원로들이 협의해서 중진급(重鎭級) 의원들 중에서 뽑던 부산시당(市黨) 위원장을 소장파(少壯派) 중에서 경선(競選)으로 뽑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제안을 한 것도 정해영(鄭海永) 국회부의장 등 원로들이었다.

부산시당 위원장 후보로 나, 김승목(金承穆, 제8·10·11대 국회의원), 김상진, 세 사람이 나섰다. 나는 무계보(無系譜)였고, 김승목은 DJ(김대중)계, 김상진은 진산계였다. 당시 YS(김영삼)는 진산계의 적자(嫡子)로 여겨지고 있었다. “YS의 텃밭인 부산에서 DJ계인 김승목이 되면 YS는 죽는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부산시당 위원장 선거는 중앙정치무대에서도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시당대회 일주일 전, 경선 때문에 시끄러우니 시당위원장을 종전처럼 원로들의 합의로 선출하기로 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서울로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했다. 그는 “사실과 다른 소문이다. 예정대로 경선을 치른다고 한다”는 소식을 갖고 왔다.

시당대회 전날, 대회를 치르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온 원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정해영 부의장이 입을 열었다.

“오래간만에 경선을 치러보려 했는데, 영 말이 많네. 그냥 여기서 위원장을 지명하고 내일 시당대회에서 그를 추대하는 게 어떻겠소?”

김승목, 김상진 두 사람을 포함해 참석자들이 모두 찬성했다. 반대자는 나 하나였다.

‘李基澤의 반란’

“원로들께서 경선으로 하자고 하더니, 경선 하루 전에 말을 뒤집는데,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정치 선배들이 이래도 되는 겁니까? 저는 내일 정 부의장님께서 출마하신다고 해도 사퇴 안 할 겁니다.”

모두들 승복하는데 나만 거부했으니, 그야말로 공적(公敵)이 됐다. 다음 날 아침, 숙소 방문을 누가 걷어찼다. 최형우였다. 그가 말했다.

“정해영 부의장과 YS가 김상진을 밀어주기로 했다. 지금이라도 포기해라.”

최형우는 김상진 후보를 밀어주기 위해 ‘암호투표’까지 하기로 했다고 알려주었다.

시당대회가 열렸다. 단상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국회의원들로 가득했다. YS가 “김상진을 위원장으로 밀겠다”면서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모르겠소”라고 쏘아붙였다. 나는 단상에 올라 신상발언을 했다.

“본의 아니게 후보를 사퇴하기로 했습니다. 혹시 나를 지지하려던 분이 있으면, 제가 평소 존경하던 김승목 동지에게 표를 주시기 바랍니다.”

단상에서 내려오자 기자들이 몰려왔다.

“사퇴 이유가 뭡니까?”

“‘암호투표’까지 하면서 특정 후보를 밀어주는 이런 치졸한 선거에 승복할 수 없습니다.”

결국 김승목 후보가 당선됐다. 《신아일보》는 ‘이기택의 반란’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했다.

이후 반년 가까이 원내총무인 YS와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와 가까운 서석재, 김덕룡 등이 “YS를 만나야 할 것 아니냐?”고 달랬다. 나는 “그런 정치지도자하고는 안 만난다”며 거부했다.

어느 날 유진산 총재가 불러 점심을 같이했다. 그는 나를 호되게 나무랐다.

“부산시당 위원장 선거 때 얘기는 내가 들어도 선배들이 잘못했더군. 하지만 그런 상황도 극복하고 적응하는 것이 정치야. 난 자네가 큰 정치인이 될 걸로 생각하고, 자네가 부탁해 오지도 않았는데 동래 지역구를 내줬어. 그런데 이러는 걸 보니 실망이야!”

유진산 총재가 그렇게 말하는데, 굴복하지 않을 수 없어서 YS와 화해했다.

維新선포

1972년 10월 17일 저녁. 나는 제주도 국정감사에서 돌아와 집에서 쉬고 있었다. TV를 시청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상계엄선포, 국회해산’ 자막이 떴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전혀 낌새도 채지 못한 일이었다. 태평로 국회의사당 근처 무교동에 있는 정치하는 친구들이 모이는 사무실로 달려갔다. 모두들 어떤 상황인지 몰라 당황해 하고 있었다.

나는 친구 집으로 피신했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신도환씨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가 물었다.

“어떻게 지내시오?”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한고비 넘긴 것 같으니 나와서 커피나 한잔 합시다.”

친구 집에서 나와 집으로 들어갔더니,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나와 있었다. 그들은 “절대 외출 못 한다”면서 날 연금(軟禁)했다. 별의별 소문이 다 들렸다. 김상현, 최형우 의원 등이 붙잡혀 갔다는 소식이 들리는가 하면, 조일제(趙一濟) 중앙정보부 2국장의 사무실 앞에는 그를 만나려는 야당 의원들이 줄을 섰다는 얘기도 들렸다. 며칠 후 조일제 국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평소 나를 경상도 고향 후배라며 호의를 표시하곤 했다. 조 국장이 말했다.

“다른 야당 의원들은 내게 전화도 하고 내 방으로 찾아오기도 하는데, 왜 당신은 아무 연락이 없소?”

“거기가 뭐 하는 데기에, 내가 가서 줄을 서야 한단 말이오?”

“한번 나오시오. 만나서 얘기합시다.”

“거긴 안 갑니다. 만나려면 다른 데서 봅시다.”

시내 호텔 커피숍에서 조일제 국장을 만났다. 조 국장이 물었다.

“이 의원, 유신(維新)이 뭔지 압니까?”

“아는 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유신은 새로운 정치를 하자는 거요. 앞으로 유신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은 정치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할 거요.”

“민주주의에 역행(逆行)하는 그런 시대가 되면, 정치를 안 하고 다른 길을 택할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지역구에 한 번만 다녀오시오. 당원들 앞에서 유신 지지 발언을 한 번만 해주시오.”

“부산에는 어차피 한 번 다녀올 생각이었소. 하지만 거기서 내가 무슨 소릴 하든 상관하지 마시오.”

부산으로 내려간 나는 지구당원 40여 명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에게 “유신을 지지하지 않으면 정치 못 하게 발을 묶는다고 한다. 앞으로 고난이 닥칠 거다”면서 “아무래도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당원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대부분 비분강개하면서 유신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그 안에도 세작(細作)이 있었는지, 서울로 올라오자 조일제 국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부산 다녀오셨더군요. 다 듣고 있습니다. 그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여튼 나는 유신을 지지할 수는 없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결국 나는 유신 지지를 거부했다. 하지만 김상현, 최형우 의원 등처럼 붙잡혀 가서 고초를 겪지도 않았고,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지도 않았다. 아마 조일제 국장이 나를 많이 봐준 게 아닌가 싶다.

姜昌成의 증언

姜昌成 전 의원.

1990년대 중반, 나는 유신 당시 육군보안사령관이었던 강창성(姜昌成)씨와 정치를 같이했다. 하나회 수사를 했다가 신군부에 밉보인 그는 삼청교육대까지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DJ는 그를 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영입했다. DJ가 새정치국민회의를 만들어 나간 후, 강창성 의원은 내 정치참모장 역할을 했다. 아현동에 집이 이웃하고 있어 우리는 무척 가까워졌다. 강창성 의원은 나이는 나보다 열 살이 위였지만, 군 출신이어서인지 윗사람에게 깍듯했다. 어느 날 그가 물었다.

“총재님, 유신 때 왜 끌려가지 않았는지 아십니까?”

“나도 그게 수수께끼입니다.”

“저 때문에 그렇게 된 거 모르시죠?”

“그게 무슨 얘깁니까?”

“보안사에서 만들어 박 대통령에게 올린 검거 대상자 명단에는 총재님 이름이 올라 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보고를 받더니, ‘혹시 강 장군이 봐줄 사람이 있소?’라고 하더군요. 마침 먼 사돈뻘 되는 기업인 이름이 명단에 올라 있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먼 사돈뻘 되는 사람인데, 그리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거기 이름이 올라 있어서 제 마음이 좀 그렇습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은 이름을 확인하고는 ‘빼줘!’ 그러더군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서 ‘각하, 한 명만 더 고려해 주십시오’라고 했죠. ‘누구냐’기에 총재님 얘길 했습니다. ‘이기택 의원과는 일면식도 없지만, 정의감이 있는 좋은 청년정치인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런 사람까지 붙잡아다가 난장(亂杖)을 치면 어떻게 하나 싶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박 대통령은 ‘우리 입장에서는 질이 안 좋은 사람인데…. 정말 강 장군하고는 일면식도 없소?’라더군요. ‘그렇다. 사람이 아까워서 그런다’고 했더니, ‘그래, 그럼 빼줘’ 그러더군요. 그래서 총재님이 살아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