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炫貞
⊙ 51세. 서울대 교육학과 졸업. 美 하버드대 사회학 석·박사. 교육개발원 선임연구원,
삼성화재해상보험 상무, 삼성생명보험 전무, 여성리더십연구원 대표 역임.
現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이사.
⊙ 51세. 서울대 교육학과 졸업. 美 하버드대 사회학 석·박사. 교육개발원 선임연구원,
삼성화재해상보험 상무, 삼성생명보험 전무, 여성리더십연구원 대표 역임.
現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이사.
“클래식이요? 잘 몰라요. 하지만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어떻게 키워나가야 하는지 조금 알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다음 질문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적어도 그가 ‘제가 실은 클래식을 좋아해서요’라고 답할 줄 알았다. 예상 밖의 답을 내놓은 이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하 서울시향)의 박현정(朴炫貞) 신임 대표다. 서울시향은 1948년, 고려교향악단과 서울관현악단을 모체로 음악인 40명이 발족한 서울교향악단의 후신이다. 지난 2005년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재단 법인으로 독립했다. 이팔성(李八成) 우리금융지주회장, 김주호(金周鎬) 롯데콘서트홀 대표가 시향 대표를 지냈고, 지난 2012년 2월 이후 공석이었다. 시향에 예산을 주는 박원순(朴元淳) 서울시장과 시향의 정명훈(鄭明勳) 예술감독의 인사 코드가 맞지 않아서다. 두 사람 모두 흔쾌히 동의한 이가 박현정 대표다. 박 대표의 이력은 언뜻 봐서는 시향 대표 자리와 매치가 되지 않는다. 하버드 박사 출신으로 국책연구소인 교육개발원에 근무했던 박 대표는 삼성화재 상무, 삼성생명 전무를 거치며 손해보험업계에서 유일한 여성 임원으로 이름을 알렸던 이다. 지난 2010년 삼성에서 퇴사해 뚜렷한 적을 두지 않던 그가 돌연 서울시향 대표로 돌아왔다.
클래식 모르는 악단 대표
“제가 시향 대표가 된다는 말에 문화계에서도 의외였을 것이고, 제 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향 대표 한다는 박현정이 너랑 동명이인이냐’는 얘기를 들었거든요(웃음). 제가 해왔던 일이 시향 발전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오게 됐습니다.”
—공연계와 인연은 전혀 없나요.
“네. 지인이 처음에 제안했을 때 얼토당토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일단 정명훈 감독을 만나보라기에 연예인 만나는 심정으로 약속 장소에 갔습니다. TV 화면에서나 뵙던 정 감독은 정말 예술가시더군요. 환갑의 나이인데 순수하고 열정적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은 시향 음악 한 번 들어본 적 없다’는 제 말에 열심히 시향의 발전을 설명하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정 감독의 ‘오디션은 칼같이 정확하게 하니 내부 시스템을 잘 만들어보라. 세계오케스트라를 4그룹으로 나눈다면, 시향이 3군에서 2군까지 왔으니 1군을 만들어 보라’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이런 분을 돕는 일이라면 한 번 해볼 만하다 싶었거든요.”
—말이 쉽지 전혀 모르는 일인데요.
“저는 어떤 일이든 기본 원리는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보험회사에 갔을 때 보험의 ‘ㅂ’자도 몰랐고, 금융을 알지 못한 채 금융연구소에 갔었습니다. 17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은 일의 원리가 같다는 겁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일이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 진행되는지를 안다면요. 이후에 사심 없이 일에 매진하면, 어떤 일이든 결국 배워진다는 것이 평소 생각이었습니다. 주위에 전문가들은 정말 많아요. 그분들 얘기를 듣고 상식선에서 결정하면 됩니다. 공연계를 몰라 배울 것이 많지만, 경영시스템 정비에 대한 생각은 섰습니다.”
취임 직후 문화계 관행에 메스 들어
서울시향의 올해 예산은 총 160억원이다. 서울시가 내주는 110억원과 협찬업체 후원금 28억원, 공연 티켓 판매로 얻은 수익 중 일부인 22억원 등이다. 박 대표는 취임 5일 만에 ‘경영 스태프의 글로벌 역량 강화’를 기치로 내걸었다. 거창한 의미의 글로벌이 아니다. 악단 경영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시스템을 정비하겠다는 뜻이었다.
“서울시향의 연주 수준은 글로벌 오케스트라가 되기에 부족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베를린필’ 같은 글로벌 오케스트라를 가지려면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이 필수입니다. 이 자리에 와서 처음 접한 문화계는 제 상상과 많이 달랐습니다. 정해진 룰에 따라 일하지 않고, 공사(公私) 구분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매사가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식이었습니다. 예술가가 예술을 위해서 공사 구분을 하지 않고, 사생활까지 희생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예술가를 보좌하는 스태프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스태프는 한 회 공연에 얼마의 비용이 들어가고, 얼마가 남는지를 알아야죠. 아무리 비영리 재단이라지만 매출과 원가는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의식이 없었습니다. 서울시로부터 받는 예산이 줄어들고 있고 협찬은 유동적입니다. 우리에게 협찬하는 기업이 힘들어지면 우리에게 돈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습니다. 결국 시향의 재무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안정적으로 만들지 않으면, 외부 상황 때문에 매년 사업을 늘렸다 줄였다를 반복해야 합니다. 또 들어오는 돈과 나가는 돈은 투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돈을 주는 사람 입장에서 그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또 비록 이익을 내진 못했지만 어떻게 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공연계의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 관행을 정비해야죠.”
박 대표는 취임하자마자 시향의 원가 구조부터 살폈다. 공연을 매출, 원가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낯설었던 직원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박 대표는 돈의 흐름부터 꼼꼼히 살폈다. 서울시향의 한 해 정기공연은 25~30건. 전체 매출 대비 횟수로 단순 계산을 해도 공연을 한 번 할 때마다 2000만원 적자가 나는 구조였다. 박 대표는 “예술가는 예술로 승부한다지만 예술가 지원 집단이 ‘동네 축구형’이면 곤란하다”고 직원들에게 못박았다.
공연계의 또 다른 관행인 ‘공짜표’도 그의 입장에서 꽤 거슬렸다. 서울시향의 공연 티켓 중 92%는 실제로 판매된다. 이 정도면 꽤 높은 수치다. 이와 함께 공짜 티켓인 ‘초대권’이란 것이 존재한다.
“공연계를 키울 때 가장 걸림돌 중의 하나가 무료 티켓입니다. 문화 강국, 고급 예술을 얘기하면서 ‘공짜 티켓’을 남발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공연을 보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시민의식이 갖춰지지 않으면 문화 강국이 되기 어렵죠. 단돈 1000원을 내더라도 말입니다. 외국인 지인에게 ‘음악회에 초대하겠다’고 하면 가장 먼저 돌아오는 답은 ‘티켓은 얼마냐’예요. 당연히 비용을 지불한다고 생각하고, 물론 본인이 부담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용이 지나치면 ‘내가 그 정도를 지불할 정도로 애호가는 아니어서’라고 거절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연 티켓은 당연히 공짜라고 생각합니다. 희한한 건 돈이 많을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공짜 티켓을 원하더군요. 시향 대표가 되고 나서 충분히 경제력 있고 사회 저명한 분들이 공짜 티켓을 요청할 때 당황스러웠습니다. 더구나 본인이 공연을 보러 오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공짜 티켓을 요청해서 놀랐습니다.”
소프트웨어 풍성한데 하드웨어 턱없이 부족해
취임한 지 갓 두 달 된 ‘비예술계’ 출신은 어느새 반쯤 예술계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경영 인프라와 의식 부재가 공연계의 첫 번째 문제라면, 두 번째는 콘서트홀입니다. 서울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수 있는 콘서트홀은 예술의전당 한 곳뿐입니다. 세종문화회관은 다목적 홀로 설계된 곳이라 음향이 다릅니다. 서울시향은 예술의전당을 대관해서 공연하는데 그 대관이 여러모로 발목을 잡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서울시향의 공연은 매년 11월이면 이듬해 1년치가 결정됩니다. 외국에서 유명한 협연자를 데려오려면 최소 2~3년 전에 선약해야 하는데, 우리는 전용 오케스트라 홀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술의전당은 1년 단위로 대관 계약을 맺거든요. 어렵사리 좋은 연주자와 줄이 닿아도 3년 뒤의 대관 약속을 할 수 없으니 포기하는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선진 사회란 예측할 수 있고 룰이 흔들리지 않는 사회인데, 현재 공연계의 시스템으로는 역부족입니다.”
물론 우리의 공연 환경은 10년 전과 비교하자면 무척 나아졌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인 ‘베를린필’이 2년에 한 번,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는 매년 우리나라에 온다. 하지만 우리에게 ‘전용홀’이 있다면, 보다 많은 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 박현정 대표의 생각이다.
“전용 홀이 없다 보니 우리 연주자들이 연주할 때마다 매번 악기를 실어나릅니다. 만약 홀이 있다면 당장 추진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는 ‘베를린필’ 수준은 아니지만,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오케스트라가 많습니다. 그들이 우리 홀에서, 또 우리가 그들 홀에 나가서 교환 연주를 하는 겁니다. 서로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위해서라도 전용 홀이 필요합니다.”
—우리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많이 높아진 거죠.
“악기군별로 편차는 있지만 연주자들 수준은 높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독주가 가능한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에 국한돼 있다고 합니다. 독주가 힘든 관악기, 타악기는 여전히 외국인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와서 들은 얘기인데 좋은 오케스트라가 되려면 관악기 부문이 탄탄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동양인들이 관악기를 다루기에 신체적인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호흡법을 배우고 트레이닝을 받는다면 우리나라 출신의 좋은 관악 예술가가 탄생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서울시향 차원에서 어린 유망주를 키우는 프로그램을 생각 중입니다. 세계 경제 10위의 대국인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오케스트라 하나쯤은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오케스트라에 푹 빠졌군요.
“오케스트라는 사회 전체의 역량을 반영합니다. 개인 연주자는 천재성으로 태어나지만, 오케스트라는 100여 명의 뛰어난 연주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 정도의 풀이 형성되지 않으면 어떤 나라도 좋은 오케스트라를 가질 수 없습니다. 경제 수준에 맞는 오케스트라를 갖고, 또 이를 통해 클래식이 저변에 확대돼야죠. 팍팍한 일상에 위안을 주는 클래식의 순기능을 많은 이가 경험했으면 합니다.”
—일반인 입장에서 클래식 공연 브로슈어를 보면 모르는 곡목 투성이입니다. 대중이 아는 ‘비발디의 사계’ 같은 것은 대상조차 아니더군요.
“여태까지 클래식 애호가를 위한 공연이 많았죠. ‘그들만의 리그’ 성격이 짙었습니다. 클래식 난이도가 높은 것과 대중적인 것을 적절히 섞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정말 클래식 저변을 확대하려면 바꿀 것은 과감하게 바꿔야죠.”
서른 넘어서 인생 진로 고민
박현정 대표는 ‘그렇게 들었다’는 식의 표현을 자주 썼다. 아직 초보인 그가 직접 체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해 조심스러워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무작정 그가 ‘비예술인’이라고 하기에는 그는 꽤 내공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력이 그것을 대변한다. 박 대표는 재무부 차관, 동력자원부 장관을 지낸 고(故) 박봉환(朴鳳煥) 전(前) 대한손해보험협회장의 맏딸이다. 김종인(金鍾仁) 새누리당 국민행복특별위원회 위원장이 그의 외삼촌이다.
박현정 대표는 어린 시절 선친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고 박 전 장관은 여자는 여리고 약한 존재라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혹 여자와 다투는 남자를 보면 어린 아이와 싸우는 어른 취급을 할 정도였다. 박 대표는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남녀 차별을 느끼지 못한 채, 사회에 대한 반감 없이 젊은 시절을 보냈다. 79학번인 그가 대학 시절,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평탄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환경 때문이었다. 그가 졸업하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고 했을 때도 선친은 반대를 하지 않았다. ‘여자가 유학 가려면 결혼해야 한다’는 통념이 으레 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박 대표는 하버드대 사회학과에서 석·박사를 받았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와 그는 교육개발원에 취직했다. 남들이 하듯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강의 경력을 쌓으면서 3년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가 들었단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데 제가 정말 약장수 같은 거예요. ‘내가 많은 사람 앞에 서거나 강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의하면서 느낀 거죠. 제가 익명성의 자유를 다른 사람보다 귀하게 느낀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겁니다. 30대 초반의 나이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진로를 고민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별로 없었다. 전공을 살려서 ‘갤럽’과 같은 여론조사 회사를 차려야 하나, 출판사를 차릴까 고민하던 어느 날 신문 광고를 보게 됐다. 삼성화재에서 박사 인력을 초빙한다는 것이었다. 박 대표는 “광고를 보는 순간 대기업에서 돈을 어떻게 버는지 한 번 배우고 내 회사를 차리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1993년 여름,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회장이 ‘신경영’을 내세우면서 석·박사, 여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시점이었다. 대학 강단에 섰던 그는 이렇게 사기업과 인연을 맺었다. 1994년 1월 첫 발령은 삼성화재 경영기획팀 과장이었다.
박 대표는 “보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제가 서울시향 대표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이때부터 단련된 ‘일은 다 똑같다’는 체험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삼성맨이 된 그는 이후 삼성금융연구소, 삼성인력개발원에 몸담았다. 의외로 그는 사기업과 체질이 맞았다. 당시로서는 턱없이 삼성이 ‘세계 1위’를 꿈꾸겠다고 비전을 내세운 것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삼성화재의 임원이 되면서, 그는 업계의 유일한 여성 임원이어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박 대표는 그 시절에 대해 “눈물로 쓴 편지다”며 웃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더라고요. 직급이 올라가고 주목받는 여성 임원이 되면서 고달팠습니다. 저에 대한 오해들도 많았고, 간혹 해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해만 낳더군요. 여전사 같은 이미지, 여성 임원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라는 시선들 같은 것이 부담스러웠죠. 퇴근해서 집에 가면 예능프로그램 보다가 TV 켜놓은 채 잠드는 평범한 사람이거든요(웃음).”
사회 전체의 수준을 반영하는 오케스트라
박 대표는 삼성에서의 17년에 대해 ‘재미있고 치열하게 살았던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냥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던, 돌아보면 재밌는 시간들이었어요. 일 많이 배우고 좋은 분들 만나고 물론 나쁜 사람도 있었지만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 아니겠어요? 남자도 사회생활이 고달프니까요.”
하지만 그는 지난 2010년 7월, 삼성생명 전무로 승진한 지 불과 7개월 만에 돌연 사표를 던졌다. 퇴사 당일 오후 3시까지 근무를 하고, 팀원들을 불러놓고 “그만둔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17년간 아무리 힘들어도 삼성을 그만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냥 모든 일이 복잡하게 엉켜버렸다”고만 했다.
회사를 그만둔 뒤 1년 동안은 일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놀았단다. 서울 인근의 산책로를 다니고, 난생처음 대낮에 용건 없이 백화점도 가봤다. 가정주부 친구들을 만나고, 이집트·터키 여행도 다녀왔다. 지인들이 “노는 것을 업(業)으로 삼기로 결정했느냐”고 놀려댔다. 그렇게 1년, 노는 일도 진력이 났다. 그는 광화문에 오피스텔을 얻어놓고 ‘여성리더십연구원’을 혼자 차렸다. 페미니스트적인 사고가 아니라, 체험에서 얻은 여성 인력의 활용에 대해 논리적으로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싶었단다. 비슷한 업종에서의 스카우트 제의도 제법 됐다. 박 대표는 “연봉이 정말 많거나, 아니면 정말 재밌는 일 중 하나를 하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 생소하기 그지없는 서울시향 대표 자리다.
“제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던 헤드헌팅 업체들은 정말 황당했을 거예요. 그렇게 돈 타령을 하더니 난데없이 시향 대표라고 하니까요(웃음). 저는 악법도 법이라고 믿는 사람이거든요. 국가나 사회를 위한다고 거창하게 말하기는 쑥스럽고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사회적이고, 꼭 필요하고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마다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곳이 서울시향이었고요. 사회 전체의 수준을 반영하는 오케스트라를 제대로 운영해서 조금이나마 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박 대표의 임기는 오는 2016년 2월까지 그가 만들어낼 오케스트라가 막 출발했다.⊙
그의 말에 다음 질문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적어도 그가 ‘제가 실은 클래식을 좋아해서요’라고 답할 줄 알았다. 예상 밖의 답을 내놓은 이는 서울시립교향악단(이하 서울시향)의 박현정(朴炫貞) 신임 대표다. 서울시향은 1948년, 고려교향악단과 서울관현악단을 모체로 음악인 40명이 발족한 서울교향악단의 후신이다. 지난 2005년 서울시립교향악단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재단 법인으로 독립했다. 이팔성(李八成) 우리금융지주회장, 김주호(金周鎬) 롯데콘서트홀 대표가 시향 대표를 지냈고, 지난 2012년 2월 이후 공석이었다. 시향에 예산을 주는 박원순(朴元淳) 서울시장과 시향의 정명훈(鄭明勳) 예술감독의 인사 코드가 맞지 않아서다. 두 사람 모두 흔쾌히 동의한 이가 박현정 대표다. 박 대표의 이력은 언뜻 봐서는 시향 대표 자리와 매치가 되지 않는다. 하버드 박사 출신으로 국책연구소인 교육개발원에 근무했던 박 대표는 삼성화재 상무, 삼성생명 전무를 거치며 손해보험업계에서 유일한 여성 임원으로 이름을 알렸던 이다. 지난 2010년 삼성에서 퇴사해 뚜렷한 적을 두지 않던 그가 돌연 서울시향 대표로 돌아왔다.
클래식 모르는 악단 대표
“제가 시향 대표가 된다는 말에 문화계에서도 의외였을 것이고, 제 지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향 대표 한다는 박현정이 너랑 동명이인이냐’는 얘기를 들었거든요(웃음). 제가 해왔던 일이 시향 발전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오게 됐습니다.”
—공연계와 인연은 전혀 없나요.
“네. 지인이 처음에 제안했을 때 얼토당토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일단 정명훈 감독을 만나보라기에 연예인 만나는 심정으로 약속 장소에 갔습니다. TV 화면에서나 뵙던 정 감독은 정말 예술가시더군요. 환갑의 나이인데 순수하고 열정적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은 시향 음악 한 번 들어본 적 없다’는 제 말에 열심히 시향의 발전을 설명하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정 감독의 ‘오디션은 칼같이 정확하게 하니 내부 시스템을 잘 만들어보라. 세계오케스트라를 4그룹으로 나눈다면, 시향이 3군에서 2군까지 왔으니 1군을 만들어 보라’는 말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이런 분을 돕는 일이라면 한 번 해볼 만하다 싶었거든요.”
—말이 쉽지 전혀 모르는 일인데요.
“저는 어떤 일이든 기본 원리는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보험회사에 갔을 때 보험의 ‘ㅂ’자도 몰랐고, 금융을 알지 못한 채 금융연구소에 갔었습니다. 17년 정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은 일의 원리가 같다는 겁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일이 어떤 프로세스를 거쳐 진행되는지를 안다면요. 이후에 사심 없이 일에 매진하면, 어떤 일이든 결국 배워진다는 것이 평소 생각이었습니다. 주위에 전문가들은 정말 많아요. 그분들 얘기를 듣고 상식선에서 결정하면 됩니다. 공연계를 몰라 배울 것이 많지만, 경영시스템 정비에 대한 생각은 섰습니다.”
취임 직후 문화계 관행에 메스 들어
서울시향의 올해 예산은 총 160억원이다. 서울시가 내주는 110억원과 협찬업체 후원금 28억원, 공연 티켓 판매로 얻은 수익 중 일부인 22억원 등이다. 박 대표는 취임 5일 만에 ‘경영 스태프의 글로벌 역량 강화’를 기치로 내걸었다. 거창한 의미의 글로벌이 아니다. 악단 경영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시스템을 정비하겠다는 뜻이었다.
“서울시향의 연주 수준은 글로벌 오케스트라가 되기에 부족하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우리가 ‘베를린필’ 같은 글로벌 오케스트라를 가지려면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이 필수입니다. 이 자리에 와서 처음 접한 문화계는 제 상상과 많이 달랐습니다. 정해진 룰에 따라 일하지 않고, 공사(公私) 구분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매사가 ‘그때그때 달라요’라는 식이었습니다. 예술가가 예술을 위해서 공사 구분을 하지 않고, 사생활까지 희생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예술가를 보좌하는 스태프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스태프는 한 회 공연에 얼마의 비용이 들어가고, 얼마가 남는지를 알아야죠. 아무리 비영리 재단이라지만 매출과 원가는 파악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의식이 없었습니다. 서울시로부터 받는 예산이 줄어들고 있고 협찬은 유동적입니다. 우리에게 협찬하는 기업이 힘들어지면 우리에게 돈을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습니다. 결국 시향의 재무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안정적으로 만들지 않으면, 외부 상황 때문에 매년 사업을 늘렸다 줄였다를 반복해야 합니다. 또 들어오는 돈과 나가는 돈은 투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돈을 주는 사람 입장에서 그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또 비록 이익을 내진 못했지만 어떻게 이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공연계의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 관행을 정비해야죠.”
박 대표는 취임하자마자 시향의 원가 구조부터 살폈다. 공연을 매출, 원가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 낯설었던 직원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박 대표는 돈의 흐름부터 꼼꼼히 살폈다. 서울시향의 한 해 정기공연은 25~30건. 전체 매출 대비 횟수로 단순 계산을 해도 공연을 한 번 할 때마다 2000만원 적자가 나는 구조였다. 박 대표는 “예술가는 예술로 승부한다지만 예술가 지원 집단이 ‘동네 축구형’이면 곤란하다”고 직원들에게 못박았다.
공연계의 또 다른 관행인 ‘공짜표’도 그의 입장에서 꽤 거슬렸다. 서울시향의 공연 티켓 중 92%는 실제로 판매된다. 이 정도면 꽤 높은 수치다. 이와 함께 공짜 티켓인 ‘초대권’이란 것이 존재한다.
“공연계를 키울 때 가장 걸림돌 중의 하나가 무료 티켓입니다. 문화 강국, 고급 예술을 얘기하면서 ‘공짜 티켓’을 남발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공연을 보려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시민의식이 갖춰지지 않으면 문화 강국이 되기 어렵죠. 단돈 1000원을 내더라도 말입니다. 외국인 지인에게 ‘음악회에 초대하겠다’고 하면 가장 먼저 돌아오는 답은 ‘티켓은 얼마냐’예요. 당연히 비용을 지불한다고 생각하고, 물론 본인이 부담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용이 지나치면 ‘내가 그 정도를 지불할 정도로 애호가는 아니어서’라고 거절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연 티켓은 당연히 공짜라고 생각합니다. 희한한 건 돈이 많을수록,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공짜 티켓을 원하더군요. 시향 대표가 되고 나서 충분히 경제력 있고 사회 저명한 분들이 공짜 티켓을 요청할 때 당황스러웠습니다. 더구나 본인이 공연을 보러 오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공짜 티켓을 요청해서 놀랐습니다.”
소프트웨어 풍성한데 하드웨어 턱없이 부족해
취임한 지 갓 두 달 된 ‘비예술계’ 출신은 어느새 반쯤 예술계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경영 인프라와 의식 부재가 공연계의 첫 번째 문제라면, 두 번째는 콘서트홀입니다. 서울에서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수 있는 콘서트홀은 예술의전당 한 곳뿐입니다. 세종문화회관은 다목적 홀로 설계된 곳이라 음향이 다릅니다. 서울시향은 예술의전당을 대관해서 공연하는데 그 대관이 여러모로 발목을 잡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서울시향의 공연은 매년 11월이면 이듬해 1년치가 결정됩니다. 외국에서 유명한 협연자를 데려오려면 최소 2~3년 전에 선약해야 하는데, 우리는 전용 오케스트라 홀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술의전당은 1년 단위로 대관 계약을 맺거든요. 어렵사리 좋은 연주자와 줄이 닿아도 3년 뒤의 대관 약속을 할 수 없으니 포기하는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선진 사회란 예측할 수 있고 룰이 흔들리지 않는 사회인데, 현재 공연계의 시스템으로는 역부족입니다.”
물론 우리의 공연 환경은 10년 전과 비교하자면 무척 나아졌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인 ‘베를린필’이 2년에 한 번,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는 매년 우리나라에 온다. 하지만 우리에게 ‘전용홀’이 있다면, 보다 많은 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 박현정 대표의 생각이다.
“전용 홀이 없다 보니 우리 연주자들이 연주할 때마다 매번 악기를 실어나릅니다. 만약 홀이 있다면 당장 추진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는 ‘베를린필’ 수준은 아니지만,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오케스트라가 많습니다. 그들이 우리 홀에서, 또 우리가 그들 홀에 나가서 교환 연주를 하는 겁니다. 서로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위해서라도 전용 홀이 필요합니다.”
—우리 오케스트라의 수준은 많이 높아진 거죠.
“악기군별로 편차는 있지만 연주자들 수준은 높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독주가 가능한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등에 국한돼 있다고 합니다. 독주가 힘든 관악기, 타악기는 여전히 외국인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와서 들은 얘기인데 좋은 오케스트라가 되려면 관악기 부문이 탄탄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동양인들이 관악기를 다루기에 신체적인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호흡법을 배우고 트레이닝을 받는다면 우리나라 출신의 좋은 관악 예술가가 탄생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서울시향 차원에서 어린 유망주를 키우는 프로그램을 생각 중입니다. 세계 경제 10위의 대국인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오케스트라 하나쯤은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오케스트라에 푹 빠졌군요.
“오케스트라는 사회 전체의 역량을 반영합니다. 개인 연주자는 천재성으로 태어나지만, 오케스트라는 100여 명의 뛰어난 연주자가 있어야 합니다. 이 정도의 풀이 형성되지 않으면 어떤 나라도 좋은 오케스트라를 가질 수 없습니다. 경제 수준에 맞는 오케스트라를 갖고, 또 이를 통해 클래식이 저변에 확대돼야죠. 팍팍한 일상에 위안을 주는 클래식의 순기능을 많은 이가 경험했으면 합니다.”
—일반인 입장에서 클래식 공연 브로슈어를 보면 모르는 곡목 투성이입니다. 대중이 아는 ‘비발디의 사계’ 같은 것은 대상조차 아니더군요.
“여태까지 클래식 애호가를 위한 공연이 많았죠. ‘그들만의 리그’ 성격이 짙었습니다. 클래식 난이도가 높은 것과 대중적인 것을 적절히 섞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정말 클래식 저변을 확대하려면 바꿀 것은 과감하게 바꿔야죠.”
서른 넘어서 인생 진로 고민
박현정 대표는 ‘그렇게 들었다’는 식의 표현을 자주 썼다. 아직 초보인 그가 직접 체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해 조심스러워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무작정 그가 ‘비예술인’이라고 하기에는 그는 꽤 내공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력이 그것을 대변한다. 박 대표는 재무부 차관, 동력자원부 장관을 지낸 고(故) 박봉환(朴鳳煥) 전(前) 대한손해보험협회장의 맏딸이다. 김종인(金鍾仁) 새누리당 국민행복특별위원회 위원장이 그의 외삼촌이다.
박현정 대표는 어린 시절 선친으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고 박 전 장관은 여자는 여리고 약한 존재라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혹 여자와 다투는 남자를 보면 어린 아이와 싸우는 어른 취급을 할 정도였다. 박 대표는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서 남녀 차별을 느끼지 못한 채, 사회에 대한 반감 없이 젊은 시절을 보냈다. 79학번인 그가 대학 시절,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평탄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환경 때문이었다. 그가 졸업하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고 했을 때도 선친은 반대를 하지 않았다. ‘여자가 유학 가려면 결혼해야 한다’는 통념이 으레 있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박 대표는 하버드대 사회학과에서 석·박사를 받았다.
그렇게 서울로 돌아와 그는 교육개발원에 취직했다. 남들이 하듯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강의 경력을 쌓으면서 3년을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가 들었단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데 제가 정말 약장수 같은 거예요. ‘내가 많은 사람 앞에 서거나 강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의하면서 느낀 거죠. 제가 익명성의 자유를 다른 사람보다 귀하게 느낀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겁니다. 30대 초반의 나이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진로를 고민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별로 없었다. 전공을 살려서 ‘갤럽’과 같은 여론조사 회사를 차려야 하나, 출판사를 차릴까 고민하던 어느 날 신문 광고를 보게 됐다. 삼성화재에서 박사 인력을 초빙한다는 것이었다. 박 대표는 “광고를 보는 순간 대기업에서 돈을 어떻게 버는지 한 번 배우고 내 회사를 차리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1993년 여름, 이건희(李健熙) 삼성그룹 회장이 ‘신경영’을 내세우면서 석·박사, 여성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시점이었다. 대학 강단에 섰던 그는 이렇게 사기업과 인연을 맺었다. 1994년 1월 첫 발령은 삼성화재 경영기획팀 과장이었다.
박 대표는 “보험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제가 서울시향 대표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이때부터 단련된 ‘일은 다 똑같다’는 체험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삼성맨이 된 그는 이후 삼성금융연구소, 삼성인력개발원에 몸담았다. 의외로 그는 사기업과 체질이 맞았다. 당시로서는 턱없이 삼성이 ‘세계 1위’를 꿈꾸겠다고 비전을 내세운 것도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삼성화재의 임원이 되면서, 그는 업계의 유일한 여성 임원이어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박 대표는 그 시절에 대해 “눈물로 쓴 편지다”며 웃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더라고요. 직급이 올라가고 주목받는 여성 임원이 되면서 고달팠습니다. 저에 대한 오해들도 많았고, 간혹 해명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해만 낳더군요. 여전사 같은 이미지, 여성 임원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을 것이라는 시선들 같은 것이 부담스러웠죠. 퇴근해서 집에 가면 예능프로그램 보다가 TV 켜놓은 채 잠드는 평범한 사람이거든요(웃음).”
사회 전체의 수준을 반영하는 오케스트라
박 대표는 삼성에서의 17년에 대해 ‘재미있고 치열하게 살았던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냥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던, 돌아보면 재밌는 시간들이었어요. 일 많이 배우고 좋은 분들 만나고 물론 나쁜 사람도 있었지만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 아니겠어요? 남자도 사회생활이 고달프니까요.”
하지만 그는 지난 2010년 7월, 삼성생명 전무로 승진한 지 불과 7개월 만에 돌연 사표를 던졌다. 퇴사 당일 오후 3시까지 근무를 하고, 팀원들을 불러놓고 “그만둔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17년간 아무리 힘들어도 삼성을 그만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냥 모든 일이 복잡하게 엉켜버렸다”고만 했다.
회사를 그만둔 뒤 1년 동안은 일하는 것처럼 미친 듯이 놀았단다. 서울 인근의 산책로를 다니고, 난생처음 대낮에 용건 없이 백화점도 가봤다. 가정주부 친구들을 만나고, 이집트·터키 여행도 다녀왔다. 지인들이 “노는 것을 업(業)으로 삼기로 결정했느냐”고 놀려댔다. 그렇게 1년, 노는 일도 진력이 났다. 그는 광화문에 오피스텔을 얻어놓고 ‘여성리더십연구원’을 혼자 차렸다. 페미니스트적인 사고가 아니라, 체험에서 얻은 여성 인력의 활용에 대해 논리적으로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싶었단다. 비슷한 업종에서의 스카우트 제의도 제법 됐다. 박 대표는 “연봉이 정말 많거나, 아니면 정말 재밌는 일 중 하나를 하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 생소하기 그지없는 서울시향 대표 자리다.
“제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던 헤드헌팅 업체들은 정말 황당했을 거예요. 그렇게 돈 타령을 하더니 난데없이 시향 대표라고 하니까요(웃음). 저는 악법도 법이라고 믿는 사람이거든요. 국가나 사회를 위한다고 거창하게 말하기는 쑥스럽고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사회적이고, 꼭 필요하고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마다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곳이 서울시향이었고요. 사회 전체의 수준을 반영하는 오케스트라를 제대로 운영해서 조금이나마 사회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박 대표의 임기는 오는 2016년 2월까지 그가 만들어낼 오케스트라가 막 출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