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독일 통일은 국제정치상 소련과 서방, 즉 소련과 미국 간의 구도가 근본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한국도 언젠가 이러한 역사적 순간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정치적으로 통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 한국의 대북정책 실패는 어떠한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북한 지도부 때문
⊙ 독일 통일의 가장 큰 원동력은 자유를 향한 동독 주민들의 용감한 저항
⊙ 독일 통일 후에도 東獨 독재 청산작업 계속하고 있어
만프레드 빌케
⊙ 71세. 독일 태생.
⊙ 베를린자유대학 사회학 박사, 교수자격 취득(1981). 베를린경제대학 교수(1985~2005).
⊙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독재 잔재청산 및 역사 바로 세우기 조사위원회 전문위원, 동독
국가보위부 문서관리를 위한 연방기관 자문위원,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독재체제 연구협회 대표 역임.
⊙ 한국의 대북정책 실패는 어떠한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북한 지도부 때문
⊙ 독일 통일의 가장 큰 원동력은 자유를 향한 동독 주민들의 용감한 저항
⊙ 독일 통일 후에도 東獨 독재 청산작업 계속하고 있어
만프레드 빌케
⊙ 71세. 독일 태생.
⊙ 베를린자유대학 사회학 박사, 교수자격 취득(1981). 베를린경제대학 교수(1985~2005).
⊙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 독재 잔재청산 및 역사 바로 세우기 조사위원회 전문위원, 동독
국가보위부 문서관리를 위한 연방기관 자문위원,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독재체제 연구협회 대표 역임.
지난 4월 통합진보당 사태를 계기로 국내 종북(從北)주의자들에 대한 경각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들 중 일부가 국회까지 진출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에 대한 논의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 일환으로 평화문제연구소(이사장 현경대)가 독일 한스자이델재단(서울대표 베른하르트 젤리거)과 함께 오는 9월 26일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독일의 민주주의 수호노력과 그 시사점’을 주제로 한독(韓獨) 워크숍을 개최한다. 이번 세미나에는 《슈타지 문서의 비밀》의 저자 후베르투스 크나베(Hubertus Knabe) 박사와 만프레드 빌케(Manfred Wilke) 전 베를린경제대학 교수가 참석한다.
《월간조선(月刊朝鮮)》은 평화문제연구소 측의 도움을 얻어 만프레드 빌케 교수와 서면 인터뷰를 가졌다. 빌케 교수는 독일 학계에서 동독(東獨) 사회주의통일당(SED)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동독 비밀첩보기관 슈타지(국가안전부·Ministerium fur Staatssicherheit)에 대해서도 정통하다. 빌케 교수는 2006년 개봉된 독일 영화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 제작 과정에서 학술적 자문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동독 비밀경찰 간부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동독의 비(非)인간적이고 억압적인 인권탄압에 대해 다뤘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에 대한 투쟁
―동독 독재정당이었던 사회주의통일당과 비밀첩보기관인 슈타지를 연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저는 서독에서 태어났는데 젊은 시절부터 독일이 동서독(東西獨)으로 분단된 배경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분단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사회주의통일당과 슈타지를 연구하도록 했지요. 분단 시절 동서독 간 국경이 폐쇄되었음에도 동서독인들은 인적 교류를 해왔습니다. 그런 와중에 1970년 무렵 동독 내(內) 반(反)체제 인사들을 알게 되었지요. 이들과 함께 동독의 변화를 이끌겠다는 연대의식을 갖고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을 상대로 투쟁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밀첩보기관 슈타지의 공작활동 목적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슈타지의 1차적 임무는 사회주의통일당과 동독 지도부에 관한 내부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슈타지의 업무는 정당 및 노조 내 인사정책에서부터 군사첩보 활동 및 탈(脫) 동독 망명자들에 대한 감시 등 그야말로 방대했습니다. 아울러 슈타지는 동독체제에 반대하는 서독 인사들에 대한 납치 행각도 저질렀습니다.”
―슈타지의 인원 등 조직 규모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슈타지는 소련 비밀경찰 및 정보기관을 모델로 창설됐지요. 동독에서는 주로 비밀경찰과 수사기관 역할을 했습니다.
슈타지의 정규직원이 1989년 10월 말 현재 9만1015명이었는데 당시 동독 인구가 1700여만 명임을 감안할 때 매우 많은 수치입니다. 동독 지도부가 자국민을 극도로 불신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정규직원의 지휘하에 활동했던 협조자(러시아에서는 ‘귀’, 독일에서는 ‘첩자’로 불렸음)의 숫자는 1989년 당시 18만9000여 명이었습니다. 이들 중 1만3400여 명의 협조자가 동독에서, 1550여 명의 협조자가 서독에서 활동했어요. 동서독 분단 기간 중 6000여 명의 서독인들이 슈타지를 위해 간첩활동을 했다고 추산됩니다.”
동방정책 뒤에서 암약한 슈타지
―슈타지의 대표적인 공작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서독사회에 혼란을 야기하고 경제·기술첩보 입수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슈타지의 간첩활동은 서독사회에서 종종 간과되었어요. 서독 내 슈타지 협조자들은 자신들이 슈타지에 정보를 제공하고 간첩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서독 사민당의 브란트, 슈미트 총리 집권기에 슈타지의 공작활동이 활발했는데 그 배경은 뭡니까.
“서독 정부는 동독의 변화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펴왔습니다. 빌리 브란트 총리가 등장하면서 정책적 노선 변화가 있었지요. 그가 추진한 동방정책의 목표는 동독의 국경과 장벽을 허무는 데 있었습니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과 대결이 아니라 협력을 지향하는 쪽으로 전개됐는데 여기서 역효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브란트 총리는 동독과의 기본조약을 통해 분단 상황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분단된 동서독 국민들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틈타 슈타지 요원들이 서독사회에 득세했던 겁니다.”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이 동독과 서독사회에 미친 영향은 어떠했습니까.
“사회주의통일당은 동독 주민을 강압적으로 통치한 독재정당입니다. 이 독재정당은 국가기구와 사회조직, 학교, 대학, 군대 그리고 비밀경찰까지 통제했어요. 사회주의통일당은 모든 기관의 인사를 결정했고, 언론을 통제했으며, 동독 주민을 대상으로 정당 이념 준수를 의무화함으로써 사상(思想)의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한편 동독 공산주의자들은 서독사회에서 공산주의가 수용되도록 유도했고 이를 통해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나토(NATO)의 안보정책에 반대하는 저항운동(Protest)과 같은 원외 활동에서 부분적으로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서독 내 공산주의자들이 의회에 진출하도록 하는 데는 실패했어요. 그 이유는 서독이 정치, 문화, 특히 경제 분야에서 동독과의 체제경쟁에서 우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슈타지 문서 공개
―통일 후 독일은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이 남긴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
“1989년 사회주의통일당과 슈타지의 과거를 청산하기 위한 조직이 동독 시민들에 의해 설립됐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동독 시민들은 동독 내 슈타지 본부와 지부(支部) 등을 점거해 슈타지의 문서 파기작업을 중단시켰습니다. 이들은 슈타지 문서를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슈타지의 모토는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는데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역으로 슈타지에 적용됐지요.
그런데 1990년 여름 동서독 양국 정부가 슈타지의 문서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하자 동독 내에서 또다시 저항이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서독 정부는 문서공개를 허용했습니다. 통일 직후인 1992년 슈타지문서관리청이 업무를 개시하면서 과거 슈타지의 희생자들은 자신들과 관련된 문서를 열람할 수 있었지요.
슈타지 문서가 공개되면서 독일에서는 나치에 이어 두 번째로 독재정치에 대한 청산작업이 시작됐습니다. 이 무렵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문서도 공개됐어요. 독일 연방의회는 두 차례에 걸쳐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독재의 역사 및 결과 청산’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개최했습니다. 슈타지가 운영했던 감옥은 기념장소(Gedenkst쮙tte)로 바뀌었습니다.”
독일의 안정과 번영에 기여한 방어적 민주주의
―독일은 2차 대전 패전 이후 극우·극좌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체제 방어노력을 지속하며 선진화와 통일을 달성했습니다. 독일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독일은 기본법(헌법)을 통해 반민주적 기도(企圖)에 대항하는 여러 수단을 마련했습니다. 나치와 공산주의에 대한 철저한 배격이었던 것이지요. 이에 따라 ‘결사의 자유’라는 기본권도 방어적 민주주의 관점에서 일부 제한했습니다. ‘합헌적 질서나 국제적 이해와 합의에 반하는 결사체’는 불법으로 규정했어요. 정당 또한 정치적 의사결정에 함께 참여하는 단체로서 지위를 부여받았지만 연방 헌법재판소에 의해 제한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독일의 경우, 두 차례에 걸쳐 정당을 해산했는데 1952년 나치당의 후속정당인 사회주의국가당(SRP)과 1956년 독일공산당(KPD)이 그에 해당됩니다.”
―지금도 독일 국민들은 방어적 민주주의를 중요시합니까.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서독의 안정과 번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독재체제를 체험하지 않은 세대들이 늘면서 시대적 변화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체제 수호보다 사상의 자유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극좌정당인 좌파당이 세력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좌파당은 사회주의적 노선을 추구하는 정당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 동독에 속해 있던 일부 주(州)에서 좌파당은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로서 권력을 잡고 있기도 합니다.”
―빌케 교수께서는 1992년 ‘동독사회주의통일당 독재체제 연구협회’ 대표를 지냈는데 당시 어떤 일을 했습니까.
“베를린자유대학 총장이었던 요하네스 게어라흐(Johannes Gerlach) 교수를 중심으로 연구협회를 만들었는데 일반적인 학술기관과는 달랐어요. 저희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과 이들의 독재정치를 주요 테마로 삼았습니다.
저는 몇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모스크바에 있던 서독 사회주의통일당 수뇌부가 종전(終戰) 이전 소련 지도부의 지시하에 서독을 겨냥해 감행한 정치공작, 전후(戰後) 서독 사회주의통일당이 헝가리 연구원들과 협력해 추진한 중앙당 기구 건설 문제, 1953년 발생한 동독 내 민중봉기와 1956년 헝가리 혁명 간 비교, 1968년 프라하 개혁공산주의자에 대한 투쟁 문제, 1980~1981년 폴란드 개혁운동에 반대하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정책 등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폴란드 개혁운동과 관련해 당시 호네커 동독 서기장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동독 전차사단을 준비시키기도 했습니다.
저는 현재 연구협회를 떠났지만 관련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베를린) 장벽으로 가는 여정, 독일 분단사의 단계》라는 책을 냈습니다.”
―사회주의통일당 독재청산재단 회원으로도 활동했는데요.
“이 재단은 1998년 독일 연방의회의 결의로 설립됐습니다. 당시 연방의회가 독재청산재단의 자문위원으로 저를 위촉했지요. 이 재단의 임무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폐단과 동독 내 독재 저항세력의 역사를 일반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재단의 활동상이 한국에 알려져 한국의 정치인·학자들과 교류를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헌법보호청의 체제 수호 역할
―한국이 통일될 경우 북한 독재정당인 ‘조선노동당’ 또한 청산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한국은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한국 내부에서 제한적이지만 북한 독재 역사를 청산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해야 합니다. 독일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요. 독일은 통일 이후에도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독재 청산을 위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통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폴란드 사례를 봅시다. 1989년 폴란드는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에 봉착했어요. 상황이 어려워지자 집권 공산주의자들은 반대파에 접근해 이들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원탁회의를 구성했습니다. 독재정치 체제에서 의회 민주주의 체제로의 평화로운 이전 협상을 진행했던 겁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마침내 과도 정부를 통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평화로운 과도 체제가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해 종지부를 찍으면서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동독과 달리 공산주의 비밀경찰의 문서를 아직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브란트 총리 시절 동독 비밀첩보기관의 공작으로 서독 국민의 안보의식이 낮았던 것처럼 현재 한국사회도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인식 등에 대해 제가 잘 모릅니다. 다만 통일 전 서독에서는 동독 출신 망명자와 동독 관련 보도를 통해 동독 상황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1950년대 동서독의 첨예한 대립 시기에 서독은 자국 내 독일공산당을 해산시켰습니다. 1970년대 들어 서독의 동방정책이 시행되자 소련은 ‘서독 내 독일공산당을 허락하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서독은 끝까지 체제를 수호했습니다. 서독의 헌법보호청의 역할이 컸습니다.”
―한국은 정권을 잡은 대통령마다 대북(對北)정책이 달랐습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은 이른바 햇볕정책을, 현재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상호주의에 입각한 대북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견해는 무엇입니까.
“모든 정치적 시도는 경직된 남북 간 대치상태를 개선시키고, 분단된 상황을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실패한 것은 한국의 어떠한 대북정책도 수용하지 않으려는 북한 지도부의 태도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용감한 동독 주민들의 행동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의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동독 주민들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89년 동독 망명자들로부터 시작해 동독 주요 도시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난 국민들의 시위, 그것이 마침내 베를린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통일의 또 다른 한 축을 든다면 통일을 국제정치적으로 관철시킬 준비를 꾸준히 해왔던 헬무트 콜 총리의 서독 정부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이 한국적 정체성(공동의 언어와 문화)을 고수하는 한 통일의 문은 열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의 애국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자유민주주의적 통일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독일 통일의 경험이 가르쳐주는 것은 동서독 통일이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국제정치적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통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독일 통일은 국제정치상 소련과 서방, 즉 소련과 미국 간의 구도가 근본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독일 통일 당시 소련은 연방제국을 유지하는 비용과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 들어가는 비용을 더 이상 부담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미하엘 고르바초프가 개방과 개혁을 내걸었고 동독 시민들은 동독 독재정권에 대항해 혁명을 주도했습니다. 이때 헬무트 콜 총리가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국내외적으로 통일을 관철시켰지요. 독일과 러시아 간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었다면, 또 독일의 중요한 동맹국인 미국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독일은 통일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국도 언제 이러한 역사적 순간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정치적으로 통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월간조선(月刊朝鮮)》은 평화문제연구소 측의 도움을 얻어 만프레드 빌케 교수와 서면 인터뷰를 가졌다. 빌케 교수는 독일 학계에서 동독(東獨) 사회주의통일당(SED)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동독 비밀첩보기관 슈타지(국가안전부·Ministerium fur Staatssicherheit)에 대해서도 정통하다. 빌케 교수는 2006년 개봉된 독일 영화 <타인의 삶(Das Leben der Anderen)> 제작 과정에서 학술적 자문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동독 비밀경찰 간부의 시선을 통해 바라본 동독의 비(非)인간적이고 억압적인 인권탄압에 대해 다뤘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에 대한 투쟁
―동독 독재정당이었던 사회주의통일당과 비밀첩보기관인 슈타지를 연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습니까.
“저는 서독에서 태어났는데 젊은 시절부터 독일이 동서독(東西獨)으로 분단된 배경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분단을 극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사회주의통일당과 슈타지를 연구하도록 했지요. 분단 시절 동서독 간 국경이 폐쇄되었음에도 동서독인들은 인적 교류를 해왔습니다. 그런 와중에 1970년 무렵 동독 내(內) 반(反)체제 인사들을 알게 되었지요. 이들과 함께 동독의 변화를 이끌겠다는 연대의식을 갖고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을 상대로 투쟁하기 시작했습니다.”
―비밀첩보기관 슈타지의 공작활동 목적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슈타지의 1차적 임무는 사회주의통일당과 동독 지도부에 관한 내부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슈타지의 업무는 정당 및 노조 내 인사정책에서부터 군사첩보 활동 및 탈(脫) 동독 망명자들에 대한 감시 등 그야말로 방대했습니다. 아울러 슈타지는 동독체제에 반대하는 서독 인사들에 대한 납치 행각도 저질렀습니다.”
―슈타지의 인원 등 조직 규모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슈타지는 소련 비밀경찰 및 정보기관을 모델로 창설됐지요. 동독에서는 주로 비밀경찰과 수사기관 역할을 했습니다.
슈타지의 정규직원이 1989년 10월 말 현재 9만1015명이었는데 당시 동독 인구가 1700여만 명임을 감안할 때 매우 많은 수치입니다. 동독 지도부가 자국민을 극도로 불신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요. 정규직원의 지휘하에 활동했던 협조자(러시아에서는 ‘귀’, 독일에서는 ‘첩자’로 불렸음)의 숫자는 1989년 당시 18만9000여 명이었습니다. 이들 중 1만3400여 명의 협조자가 동독에서, 1550여 명의 협조자가 서독에서 활동했어요. 동서독 분단 기간 중 6000여 명의 서독인들이 슈타지를 위해 간첩활동을 했다고 추산됩니다.”
동방정책 뒤에서 암약한 슈타지
―슈타지의 대표적인 공작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서독사회에 혼란을 야기하고 경제·기술첩보 입수를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슈타지의 간첩활동은 서독사회에서 종종 간과되었어요. 서독 내 슈타지 협조자들은 자신들이 슈타지에 정보를 제공하고 간첩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서독 사민당의 브란트, 슈미트 총리 집권기에 슈타지의 공작활동이 활발했는데 그 배경은 뭡니까.
“서독 정부는 동독의 변화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펴왔습니다. 빌리 브란트 총리가 등장하면서 정책적 노선 변화가 있었지요. 그가 추진한 동방정책의 목표는 동독의 국경과 장벽을 허무는 데 있었습니다.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과 대결이 아니라 협력을 지향하는 쪽으로 전개됐는데 여기서 역효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브란트 총리는 동독과의 기본조약을 통해 분단 상황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분단된 동서독 국민들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런 분위기를 틈타 슈타지 요원들이 서독사회에 득세했던 겁니다.”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이 동독과 서독사회에 미친 영향은 어떠했습니까.
“사회주의통일당은 동독 주민을 강압적으로 통치한 독재정당입니다. 이 독재정당은 국가기구와 사회조직, 학교, 대학, 군대 그리고 비밀경찰까지 통제했어요. 사회주의통일당은 모든 기관의 인사를 결정했고, 언론을 통제했으며, 동독 주민을 대상으로 정당 이념 준수를 의무화함으로써 사상(思想)의 자유를 제한했습니다. 한편 동독 공산주의자들은 서독사회에서 공산주의가 수용되도록 유도했고 이를 통해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나토(NATO)의 안보정책에 반대하는 저항운동(Protest)과 같은 원외 활동에서 부분적으로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서독 내 공산주의자들이 의회에 진출하도록 하는 데는 실패했어요. 그 이유는 서독이 정치, 문화, 특히 경제 분야에서 동독과의 체제경쟁에서 우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슈타지 문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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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초 동서독 당국은 슈타지 문서를 공개하지 않으려 했으나, 동독시민들의 항의로 통일 후 슈타지 희생자들의 문서열람을 허용했다. |
“1989년 사회주의통일당과 슈타지의 과거를 청산하기 위한 조직이 동독 시민들에 의해 설립됐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동독 시민들은 동독 내 슈타지 본부와 지부(支部) 등을 점거해 슈타지의 문서 파기작업을 중단시켰습니다. 이들은 슈타지 문서를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슈타지의 모토는 ‘누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것’이었는데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역으로 슈타지에 적용됐지요.
그런데 1990년 여름 동서독 양국 정부가 슈타지의 문서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하자 동독 내에서 또다시 저항이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서독 정부는 문서공개를 허용했습니다. 통일 직후인 1992년 슈타지문서관리청이 업무를 개시하면서 과거 슈타지의 희생자들은 자신들과 관련된 문서를 열람할 수 있었지요.
슈타지 문서가 공개되면서 독일에서는 나치에 이어 두 번째로 독재정치에 대한 청산작업이 시작됐습니다. 이 무렵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문서도 공개됐어요. 독일 연방의회는 두 차례에 걸쳐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독재의 역사 및 결과 청산’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개최했습니다. 슈타지가 운영했던 감옥은 기념장소(Gedenkst쮙tte)로 바뀌었습니다.”
독일의 안정과 번영에 기여한 방어적 민주주의
―독일은 2차 대전 패전 이후 극우·극좌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체제 방어노력을 지속하며 선진화와 통일을 달성했습니다. 독일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독일은 기본법(헌법)을 통해 반민주적 기도(企圖)에 대항하는 여러 수단을 마련했습니다. 나치와 공산주의에 대한 철저한 배격이었던 것이지요. 이에 따라 ‘결사의 자유’라는 기본권도 방어적 민주주의 관점에서 일부 제한했습니다. ‘합헌적 질서나 국제적 이해와 합의에 반하는 결사체’는 불법으로 규정했어요. 정당 또한 정치적 의사결정에 함께 참여하는 단체로서 지위를 부여받았지만 연방 헌법재판소에 의해 제한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독일의 경우, 두 차례에 걸쳐 정당을 해산했는데 1952년 나치당의 후속정당인 사회주의국가당(SRP)과 1956년 독일공산당(KPD)이 그에 해당됩니다.”
―지금도 독일 국민들은 방어적 민주주의를 중요시합니까.
“방어적 민주주의 개념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서독의 안정과 번영에 결정적으로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전쟁과 독재체제를 체험하지 않은 세대들이 늘면서 시대적 변화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체제 수호보다 사상의 자유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극좌정당인 좌파당이 세력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좌파당은 사회주의적 노선을 추구하는 정당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과거 동독에 속해 있던 일부 주(州)에서 좌파당은 사민당의 연정 파트너로서 권력을 잡고 있기도 합니다.”
―빌케 교수께서는 1992년 ‘동독사회주의통일당 독재체제 연구협회’ 대표를 지냈는데 당시 어떤 일을 했습니까.
“베를린자유대학 총장이었던 요하네스 게어라흐(Johannes Gerlach) 교수를 중심으로 연구협회를 만들었는데 일반적인 학술기관과는 달랐어요. 저희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과 이들의 독재정치를 주요 테마로 삼았습니다.
저는 몇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모스크바에 있던 서독 사회주의통일당 수뇌부가 종전(終戰) 이전 소련 지도부의 지시하에 서독을 겨냥해 감행한 정치공작, 전후(戰後) 서독 사회주의통일당이 헝가리 연구원들과 협력해 추진한 중앙당 기구 건설 문제, 1953년 발생한 동독 내 민중봉기와 1956년 헝가리 혁명 간 비교, 1968년 프라하 개혁공산주의자에 대한 투쟁 문제, 1980~1981년 폴란드 개혁운동에 반대하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정책 등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폴란드 개혁운동과 관련해 당시 호네커 동독 서기장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동독 전차사단을 준비시키기도 했습니다.
저는 현재 연구협회를 떠났지만 관련 연구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베를린) 장벽으로 가는 여정, 독일 분단사의 단계》라는 책을 냈습니다.”
―사회주의통일당 독재청산재단 회원으로도 활동했는데요.
“이 재단은 1998년 독일 연방의회의 결의로 설립됐습니다. 당시 연방의회가 독재청산재단의 자문위원으로 저를 위촉했지요. 이 재단의 임무는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폐단과 동독 내 독재 저항세력의 역사를 일반 대중에게 지속적으로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재단의 활동상이 한국에 알려져 한국의 정치인·학자들과 교류를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헌법보호청의 체제 수호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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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쾰른에 있는 연방헌법보호청 본부. 헌법보호청은 좌우익 극단주의를 감시하면서 서독 자유민주체제 수호의 첨병 역할을 했다. |
“한국 내부에서 제한적이지만 북한 독재 역사를 청산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해야 합니다. 독일을 참고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지요. 독일은 통일 이후에도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독재 청산을 위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현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통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폴란드 사례를 봅시다. 1989년 폴란드는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에 봉착했어요. 상황이 어려워지자 집권 공산주의자들은 반대파에 접근해 이들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원탁회의를 구성했습니다. 독재정치 체제에서 의회 민주주의 체제로의 평화로운 이전 협상을 진행했던 겁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마침내 과도 정부를 통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평화로운 과도 체제가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해 종지부를 찍으면서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동독과 달리 공산주의 비밀경찰의 문서를 아직도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브란트 총리 시절 동독 비밀첩보기관의 공작으로 서독 국민의 안보의식이 낮았던 것처럼 현재 한국사회도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북한에 대한 인식 등에 대해 제가 잘 모릅니다. 다만 통일 전 서독에서는 동독 출신 망명자와 동독 관련 보도를 통해 동독 상황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1950년대 동서독의 첨예한 대립 시기에 서독은 자국 내 독일공산당을 해산시켰습니다. 1970년대 들어 서독의 동방정책이 시행되자 소련은 ‘서독 내 독일공산당을 허락하라’고 압력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서독은 끝까지 체제를 수호했습니다. 서독의 헌법보호청의 역할이 컸습니다.”
―한국은 정권을 잡은 대통령마다 대북(對北)정책이 달랐습니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은 이른바 햇볕정책을, 현재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상호주의에 입각한 대북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견해는 무엇입니까.
“모든 정치적 시도는 경직된 남북 간 대치상태를 개선시키고, 분단된 상황을 극복하려는 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가 실패한 것은 한국의 어떠한 대북정책도 수용하지 않으려는 북한 지도부의 태도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용감한 동독 주민들의 행동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의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의심할 여지 없이 동독 주민들의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89년 동독 망명자들로부터 시작해 동독 주요 도시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난 국민들의 시위, 그것이 마침내 베를린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통일의 또 다른 한 축을 든다면 통일을 국제정치적으로 관철시킬 준비를 꾸준히 해왔던 헬무트 콜 총리의 서독 정부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한국 사람과 북한 사람이 한국적 정체성(공동의 언어와 문화)을 고수하는 한 통일의 문은 열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의 애국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자유민주주의적 통일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독일 통일의 경험이 가르쳐주는 것은 동서독 통일이 당사자들만의 문제가 아닌 국제정치적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통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독일 통일은 국제정치상 소련과 서방, 즉 소련과 미국 간의 구도가 근본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독일 통일 당시 소련은 연방제국을 유지하는 비용과 미국과의 군비 경쟁에 들어가는 비용을 더 이상 부담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미하엘 고르바초프가 개방과 개혁을 내걸었고 동독 시민들은 동독 독재정권에 대항해 혁명을 주도했습니다. 이때 헬무트 콜 총리가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국내외적으로 통일을 관철시켰지요. 독일과 러시아 간에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었다면, 또 독일의 중요한 동맹국인 미국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독일은 통일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한국도 언제 이러한 역사적 순간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제정치적으로 통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