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년퇴임 앞둔 시민운동 1세대 李弼商 고려대 교수의 한국사회 비평 : 월간조선

‘시민운동 1세대’인 이필상(李弼商) 고려대 교수가 올해 강의를 끝으로 학교를 떠난다. 1982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로 부임해 정년을 꽉 채웠다. 그는 경영대학장, 기획처장 등 주요 보직을 두루 맡았고 2006년 12월에는 제16대 고려대 총장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비(非)고려대 출신으로는 두 번째였다.

학자로서 그가 남긴 족적(足跡)은 교정(校庭)을 넘어 한국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 그는 재벌개혁, 정경(政經)유착 근절, 경제선진화를 주장하며 지식인의 시민운동·사회활동의 모델을 만들었다. 김영삼(金泳三) 정부 시절 한국은행 독립을 위해 대학교수 1054명이 참여한 ‘한국은행 독립촉구 서명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필상 교수는 경제정의실천연합(이하 경실련), 함께하는 시민행동, 한국NGO학회, 민간금융위원회 위원장 등 한국사회를 대표하는 시민단체를 직접 만들고 이끌었다. ‘시민운동 1세대’라는 타이틀은 공치사(空致辭)가 아니다.

“기고하고 원고료 못 받은 경우 여러 번”

그는 자신의 경제·경영 철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언론을 적극 활용했다. 30여 년 동안 쓴 칼럼이 2000건을 넘는다. ‘어둠의 자식들’, ‘돈과 권력의 사회파괴’, ‘사람 중심의 자본주의’, ‘고용 없는 불임경제’, ‘경제의 5敵’, ‘거꾸로 가는 동반성장’….

칼럼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정부와 공기업, 대기업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다. 이 때문에 대학교수에게 그 흔한 자문위원, 평가위원, 사외이사 등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최근 고려대 경영관에서 만난 그는 학자·시민운동가로서 살아온 삶의 궤적과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해 견해를 밝혔다.

―30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면서 제대로 된 정부기관이나 민간기업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뭡니까.

“저의 양심을 걸고 국내 정치, 정부정책, 기업경영 등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많이 냈죠. 정치, 정책, 사회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그런 입장을 보였는데 우리 사회는 비판하는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등을 돌리는 문화인 거 같아요.”

―왜 그렇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왔습니까.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사회현상에 대해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생명력이 없는 거죠. 현실을 학자의 눈으로 읽다 보니 잘못된 점이 많이 보였어요.”

―정부나 정치권, 대기업 등에 직접 참여해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기관이나 조직에 들어가면 그 조직의 논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죠. 그래서 언론을 통해 널리 저의 생각을 알려왔습니다.”

―신문에 글을 쓰거나 방송에 출연한 것은 언제부터였습니까.

“고려대에 처음 왔을 때부터였습니다. 그동안 신문에 기고한 글이 2000건이 넘을 거예요.”

―칼럼을 써오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은데요.

“제가 쓴 글이 사전 통지 없이 실리지 않은 경우가 여러 건 있었지요.”

―정부나 기업에 비판적인 글이었습니까.

“물론이죠. 원고료도 못 받았어요.(웃음)”

‘무식이 용기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전격 단행된 금융실명제. 이필상 교수는 이보다 훨씬 전인 10년 전부터 금융실명제 실시를 주장해 왔다. 사진은 금융실명제 소식을 전한 1993년 8월 13일자 《조선일보》 1면.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강의를 하다가 전두환 정권 초기였던 1982년 국내에 들어와 대학교수가 됐는데 당시 사회분위기상 자유로운 연구활동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때 우리 사회는 상당히 경직된 사회였어요. 언론 통제도 심했고, 학자들의 활동도 제약이 많았죠. 지금 생각해 보면 ‘무식이 용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뭘 모르니까 제 맘대로 용기 내서 발언도 하고 글도 쓰고 그랬죠.”

―그런 ‘용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던 건가요.

“인기를 생각하고 행동한 건 아닙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사회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그러다 보니 제 강의를 들으려는 학생들이 많았죠.”

이필상 교수가 담당했던 과목은 금융론, 기업경제론, 재무관리, 투자론 등 다양했다. 그의 강의실은 학생들로 넘쳐났고 학생들은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부임 초기 학생들에게 “한 나라의 경제가 올바르게 발전하려면 시장기능이 민주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정치권력에 경제가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며 정경유착 근절, 금융실명제 실시, 토지공개념 도입 등을 주장했다.

―19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기 10년 전부터 금융실명제를 강조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1982년에 터진 이철희·장영자 사건(거액의 어음사기 사건)을 보며 이대로 있다가는 안 되겠다 싶었지요. 그 사건 이후 정치권과 학계에서 금융실명제, 토지공개념 얘기가 많이 나왔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89년 경실련이 탄생했지요.”

―경실련 활동 초기 무슨 일을 했습니까.

“경실련 금융분과에서 주로 일했는데 그때 주안점을 둔 게 한국은행 독립이었어요. 자본주의에서 돈이라는 것은 사람의 혈액과 같아요. 피가 잘 돌아야 사람이 건강한 것처럼, 돈이 올바르게 공급되고 순환돼야 경제가 튼튼해집니다. 그게 자유시장경제의 기본질서죠. 그런데 당시 한국은행은 ‘경제기획원 남대문 출장소’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죠. 권력에 의해 통화정책이 좌우되곤 했어요. 정치가 경제를 지배하면 선진국이 되기 어렵죠. 한국은행의 중립성 확보가 시급하다고 생각해 바삐 움직였습니다.”

―줄기차게 주장해 온 금융실명제가 김영삼 정부 들어 전격 실시됐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금융실명제는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은 대단한 개혁조치였지요. 공정한 시장경제가 도입될 거라 기대를 많이 했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은행의 독립을 위해 사회 각층의 힘을 모으기 시작했지요. 천명이 넘는 전국 대학 경제학 교수들이 서명에 동참하는 등 당시 사회적 반향이 아주 컸어요. 그러자 실제로 한국은행이 독립되는 것처럼 보였어요. 하지만 정치권력이 돈줄을 쉽게 놓지 않는 것을 보고 좌절했죠. 그러다가 1997년 외환위기 직후 형식적이나마 한국은행이 독립하는 모양새를 갖췄어요.”

정경유착, 긍정적 틀에서 부정적 틀로 변질

1997년 《조선일보》가 후원한 ‘기업구조조정과 업종전환전략’ 토론회에 참석한 이필상 교수(왼쪽 첫 번째).

―한국식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폐단으로 정경유착을 오랫동안 거론해 왔는데 산업화, 근대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난 부산물(副産物)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1960년대, 경제개발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정부의 개발의지뿐이었죠. 정부는 ‘할 수 있다’는 정신을 국민들에게 불어넣었고 국민들도 적극 따랐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자본주의는 세계에서 아주 특별한 경제 모델이었다고 생각해요. 개발 초기 정경유착은 ‘필요조건’이었어요. 그런데 정부가 경제발전을 주도하다 보니 정부의 영향력이 커지고 결국 정경유착의 폐단이 나타났지요. 우리나라 자본주의는 정경유착의 긍정적 틀에서 시작해 부정적인 틀로 마무리된 셈입니다.”

―정경유착이 지금도 여전하다고 봅니까.

“현재 우리나라의 인허가 규제 항목은 다른 나라에 비해 많은 편입니다. 기업이 정부의 옹호를 받으면 허가를 쉽게 받고, 금융 및 조세 지원도 쉽게 받을 수 있죠. 이런 점에서 기업들이 아직도 정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요. 요즘 흔히 말하는 ‘정치테마주’라는 게 단적인 증거죠.”

―너무 커버린 대기업은 어떤 방향으로 개혁돼야 합니까.

“가장 큰 문제는 중소기업 영역을 침범하며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는 겁니다.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다시 부활시켜야 해요. 다만 재벌의 순기능을 억제하는 게 아니라 역기능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해요. 순환출자를 허용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지금 당장 금지하기는 어렵겠지만 단계적으로 줄여나가야 해요. 아울러 재벌의 계열사들을 독립기업으로 분리시켜 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대표적인 재벌기업인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과 큰형 이맹희씨 등이 재산상속 문제로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어떤 생각이 듭니까.

“한국의 시장경제를 좌지우지하는 큰손인데 경제를 인질로 잡고 재산싸움을 하는 것 같아요. 이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 삼성이 기여한 공적은 많아요. 그런데 형제들끼리 상속 문제로 싸우면서 그동안 쌓은 공든탑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삼성의 미래가 걱정됩니다.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배신감도 들고 위화감도 커지고 있어요. (그분들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시민운동을 하면서 ‘좌파 경제학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경실련 정책위원장으로 2년간 활동할 때 재벌개혁, 부동산 투기 방지 등 경제정의(正義)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어요. 그때 ‘이필상은 좌파다, 뭐든지 부정적으로 본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죠. 심지어 ‘공산주의자’라는 얘기까지 들었어요. 저는 ‘시장경제란 권력이나 자본의 위협을 받지 않고 공정한 질서 속에서 공정한 경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논의를 펼쳤는데 결과적으로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학자로 매도됐습니다.”

“김대중 정부 들어 시민운동 기울어”

한국의 시민운동은 김대중 정부 이후 일부 시민단체가 재벌로부터 후원받고 일부 시민운동가들이 정치권에 합류하면서 순수성이 떨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2004년 7월 국회의원식당에서 열린 시민사회단체와 당시 집권당 간 간담회에서 이필상 교수가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들어 경실련 활동을 접은 배경은 뭡니까.

“1997년 12월 대선(大選)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자 권력지향적인 일부 시민운동가들이 그쪽(김대중 정부)에 합류하더군요. 시민단체는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 생명인데 단체를 이끌던 주요 인사들이 저마다 권력에 합류했어요. 그런 현실을 보며 ‘시민운동이 오염되고 있다.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에 경실련을 떠난 겁니다.”

―경실련에 애정이 많았을 텐데요.

“경실련이란 단체보다 시장경제에 대한 애정이 더 많았지요. 경실련이 정치성향을 보인다면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거라 생각했어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경실련 내부에 갈등이 심화됐죠. 저를 포함해 그때 경실련을 그만두고 나온 분들이 ‘함께하는 시민행동’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어요. 우리는 정부나 기업으로부터 재정적 도움을 받지 않고 회원들 회비만으로 단체를 운영한다는 각오를 갖고 활동했어요.”

―당시 친(親)김대중 성향의 시민단체들은 정부로부터 재정적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까.

“시민단체가 정부 주관 프로젝트 수행하면서 큰돈을 받기 시작했고 기업 후원금도 받았어요. 그러면서 시민운동이 변질됐죠. 김대중 정부 들어 시민운동이 사실상 기울었다고 봐요. 시민운동의 동력이 떨어지고 본질이 훼손된 거죠. 시민운동가들이 정치권에 참여하면서 시민운동의 가치가 흔들리고 목표가 상실됐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시민단체에 지급되던 예산이 많이 줄었어요. 시민운동도 많이 위축됐지요.”

―박원순 서울시장 잘 아시죠?

“시민운동 하면서 이래저래 만났지요. 아이디어를 많이 내며 시민운동을 주도해 왔고 시민운동사(史)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죠.”

―박원순 시장이 ‘아름다운가게’를 하면서 기업으로부터 후원을 적지 않게 받았는데요.

“출범 초기부터 후원을 받았죠.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라 걱정했습니다. 사실 시민운동이라는 게 자본, 다시 말해 돈이 있어야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해요. 그러나 호랑이는 배가 고파도 풀은 먹지 않는 법, 시민단체가 재벌의 도움을 받으면 시민운동의 순수성이 당연히 떨어지지요.”

―시민운동가 ‘박원순’이 나중에 정치를 할 것이라 예전부터 생각했었습니까.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것이라 할까, 시민운동을 하다 보면 한계를 느껴요. 잘못된 걸 바꾸기 위해 정치권에 뛰어드는 경우가 있죠. 박원순씨도 그런 생각을 했겠죠. 하지만 시민운동의 순수성은 역시 배고플 때 나와요. 아무래도 권력과 돈을 갖게 되면 순수성을 잃게 돼요.”

―박원순 시장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서울시장이 됐지만 시민운동 할 때의 초심을 잃지 말았으면 해요. 배고팠을 때 시민운동가로서 갖고 있던 그 초심 말입니다.”

―박원순 시장처럼 시민운동을 하며 정치권에 뛰어들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까.

“소설을 쓰는 사람과 소설을 평론하는 사람의 역할은 다릅니다. 평론 잘한다고 소설 잘 쓰는 게 아니죠. 학자들은 이론을 공부하고,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정부정책을 평가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게 중요하죠.”

“안철수의 행보, 국가와 국민에 바람직하지 않아”

―지난 총선에서 현직 교수 20여 명이 정당 공천을 받고 출마했습니다. 대학교수의 정치 참여를 어떻게 봅니까.

“정치를 하려면 대학교수는 그만둬야죠. 두 자리를 다 차지하겠다는 것은 기회주의라고 생각해요.”

―조국(曺國) 서울대 교수는 민주통합당 부산지역 선거대책위원장까지 맡았습니다.

“글쎄요. 바람직하지 않아 보입니다.”

―대학교수가 정치권이나 정부조직에 들어가는 걸 나쁘게만 볼 수 있을까요.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도 흔한 일 아닌가요.

“물론이죠. 하지만 문화가 달라요. 우리는 자리를 보고 갑니다. 미국 등 선진국은 역할을 보고 참여하죠. 우리의 경우 자리를 보고 참여하는 문화니까 임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에게 충성하는 사람(교수)을 뽑게 되고, 지명을 받고자 하는 학자는 당연히 눈치를 보고 정치권에 줄을 대는 거죠. 자기 본연의 일까지 팽개치면서 줄을 서고 충성을 맹세하는 그런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잘못된 문화죠.”

―평생 동안 학자와 시민운동가로서 양심과 소신을 지켜온 입장에서 볼 때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는 안철수(安哲秀) 서울대 교수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우리나라 정치의 특징 중 하나가 예측 불가능성입니다. 그분(안철수)이 자신의 입장을 빨리 밝혀야 해요. 그분으로 인해 우리나라 정치의 불확실성이 굉장히 커지고 있어요. ‘안철수 교수가 이런저런 행보를 할 거다’는 무성한 추측으로 정치판이 흔들리는 건 우리나라 정치발전에 도움이 안 돼요. 자기 자신 때문에 정치의 불확실성이 커졌고, 국민의 선택에 혼선이 빚어지고 있는데, 이게 과연 이 나라 정치를 위한 것이냐 이거죠. 정치를 하려면 ‘나는 이런 정치철학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다’라는 걸 확실히 밝히고 정치에 참여하든가 해야죠. 그렇지 않으면 ‘저는 학자로 남아서 사회 발전에 나름의 역할을 하겠습니다’라고 밝혀야 해요. 지금처럼 어정쩡하게 있는 걸 보면 너무 답답합니다.”

―안철수 교수의 현재 행보는 국가나 국민에게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겁니까.

“현재 상태에선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람 중심의 자본주의

―이필상 교수께서는 특정 정당, 특정 정권과 상관없이 항상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는데 이념적, 철학적으로 어느 쪽에 가깝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론자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는 자본주의는 돈 중심의 자본주의가 아니라 사람 중심의 자본주의입니다. 그동안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 자본주의는 돈 중심의 자본주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돈의 자본주의였죠. 돈이 목적이고 돈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는 체제였죠. 이 때문에 양극화가 심화되고 사회적 갈등이 생기고 사회 모순도 나타난 겁니다. 이제는 사람 중심의 자본주의가 돼야 해요.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자본주의 말입니다. 돈 위에 사람이 있는 자본주의 말입니다.”

―자본주의란 말 자체가 자본, 즉 돈이 근본이라는 얘기인데요.

“돈이 중요하지만 그 돈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자본주의의 폐단은 돈이 중심이 될 때 나타나요.”

―어떻게 해결하죠.

“지금의 자본주의는 고용 창출능력을 잃어버렸어요.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경제를 지배하면서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기계화, 자동화, 정보화를 실현해 왔지요. 그런데 엉뚱하게 사람이 내쫓기는 겁니다. 현재 유럽을 필두로 실업 문제가 보통이 아닙니다. 초기 한국식 자본주의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때 우리는 사람 중심의 자본주의를 보여줬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산은 사람이다’는 생각을 했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중심이 돼 경제를 일으킨 겁니다. 물론 경제력이 한쪽에 집중되고, 대기업이 나타나면서 미국식 자본주의를 따라가게 됐습니다만.”

―이명박 정부 들어 양극화가 더 심해졌다고 봅니까.

“더욱 심해졌다, 이렇게 판단하긴 어려워요. 양극화는 오랫동안 누적돼 온 거예요.”

―노무현(盧武鉉) 정부는 상대적으로 분배를 강조했는데 어떻게 평가합니까.

“노무현 정부는 부의 편중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요. 그래서 소득의 재분배 차원에서 조세제도를 비롯해 여러 정책을 폈어요. 그런데 분배라는 게 쉬운 게 아닙니다. 한쪽이 커진다고 그 부분을 잘라 다른 쪽에 갖다 붙이는 게 분배가 아니에요. 대기업이 돈을 번다고 대기업 돈을 빼앗아 중소기업에 줄 수는 없잖아요. 노무현 정부는 1차원적인 분배정책 때문에 실패한 겁니다. 정치 논리 차원에서 감정적, 단편적으로 대응했지요. 그러다 보니 국민들로부터 ‘분배 타령하다 경제를 망쳤다’는 비판을 받았죠. 그 반대 여론으로 이명박 정부가 탄생한 겁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기대를 많이 했습니까.

“기대와 동시에 우려를 했죠.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위해 내수를 살리고 중소기업을 육성할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노무현 정부의 분배 정책이 잘못됐다고 해서 (그 정책을) 폐기하고 감세정책 등 성장 위주로 가는 게 걱정됐어요.”

―이명박 정부도 정권 초중반 이후 녹색성장, 친(親)서민, 상생(相生) 등을 얘기했습니다.

“뿌리는 그대로였어요. 감세나 규제완화, 고환율, 성장 중심 기조를 그대로 둔 채 양극화가 심화된다, 서민들이 살기 어렵다 하니까 거기에 덧칠하는 식으로 친서민정책, 동반성장 등을 내놓은 거예요.”

―그렇다면 현 정부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중소기업, 벤처기업, 자영업자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라는 거죠. 맘대로 성장하고 투자하고 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지원해 줘야 한다는 거죠. 큰 나무 아래에 있는 풀은 제대로 자라지 못해요. 대기업이란 큰 그늘 속에서 중소기업들이 제대로 싹을 못 틔우는 거예요. 최소한 정부는 그늘진 곳에 햇볕이 들도록 해줘야 해요. 중소기업의 기술난, 자금난, 인력난 해소에 정부가 도와줘야 해요.”

한국경제, 세계 자본주의 모델 될 수 있어

2006년 12월 고려대 16대 총장으로 취임한 이필상 교수는 이듬해 2월 논문 표절 논란이 일자 학자로서의 양심을 걸고 총장직을 스스로 내놓았다.

―지난 3월 《조선일보》가 주최한 아시안 리더십 콘퍼런스에서 ‘자본주의 4.0’이 큰 주제였습니다. 따뜻한 자본주의를 내걸었는데 이 교수께서 주장하는 ‘사람 중심의 자본주의’와 사실상 같은 내용입니다.

“공정한 시장질서 속에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고소득층이든 저소득층이든 누구나 공평한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그런 자본주의가 필요한 때입니다. 저는 한국식 자본주의가 앞으로 세계적 모델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무슨 뜻인가요.

“과거 우리는 미국이나 유럽으로부터 경제와 자본주의를 배웠어요. 우리나라 사람 특유의 근성이 접목돼 고속성장을 했는데 그동안 모순도 많이 나타났지요. 우리의 모순을 우리 스스로 해결해 나간다면 한국식 자본주의는 세계 자본주의의 이상적(理想的)인 모델이 될 수 있어요. 양극화 해소, 성장동력 발굴, 일자리 창출을 위해 창의적 노력을 해야 할 때입니다. 과거(박정희 정권) 맨손으로 경제를 일으켰던 그 정신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올해는 세계 58개국에서 국가 지도자가 바뀝니다. 우리도 12월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어떤 국가 리더십이 필요합니까.

“자본주의의 모순을 이해하고, 고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사회 문제를 정직하게 진단하고 국민에게 알려 국민의 힘을 모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현재 거론되고 있는 대선후보로는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을 비롯해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김두관 경남지사, 손학규 상임고문 그리고 안철수 서울대 교수 등이 있습니다. 이들 중 박근혜 위원장과 안철수 교수가 가장 지지율이 높습니다.

“그분(박근혜)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해 나름 준비를 많이 한다고 해요. 선거가 다가오면 어떤 정책을 내놓을지 모르겠지만 기존 틀을 바꾸겠다는 의지가 강한 것 같아요. 눈여겨볼 대목은 그분이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신뢰 부문을 강조하고 있다는 거죠. 좋은 진단과 좋은 대안(代案)을 내놓고 신뢰라는 무기를 가진다면 적지 않은 기대가 됩니다.

안철수 교수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몰라요. 그분이 어떤 정치철학을 갖고 있고 국내 경제문제와 정책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마 그분 스스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와 새로운 틀이 필요한데, 그런 것을 제시한 적이 없지요. 그래서 평가하기 어려워요. 다만 우리 국민들이 큰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안철수 교수를 지지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요. 기존 정치인에 대한 실망이 너무 크니까요. 안 교수의 철학과 자본주의에 대한 생각, 정책을 보고 지지자들이 몰린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정치권 복지정책, 포퓰리즘 성격 강해

―지난 4·11 총선에서 여야(與野) 정치권은 너나 할 것 없이 무상복지(無償福祉) 공약을 내놓았습니다.

“소득재분배의 기능을 강화하자는 측면에서 일면 동의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성장잠재력이 커져 지금 당장은 후유증이 나타나더라도 궁극적으로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틀에서 복지정책을 펴야 해요. 총선 때 정치인들이 언급한 복지정책은 표를 의식한 포퓰리즘적 성격이 강해요. 무상보육, 무상급식, 무상교육을 주장하며 성장잠재력 재고 없이 그저 단순한 차원에서 무상시리즈를 내놓는 것은 상당히 위험해요.”

―무상복지를 요구하는 대중(大衆)에게 국가 재정상황을 설명하고 무조건적인 요구에 대해서는 ‘NO’라고 얘기할 수 있는 정치 지도자가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국민들도 ‘NO’라고 얘기하는 정치 지도자에게 박수를 쳐줄 수 있어야 해요. ‘나는 손해 보지만 그것(용기 있는 정치인이 주장하는 내용)이 맞다’며 박수칠 수 있는 국민이 부족해요. 그런 면에서 국민들도 반성해야 해요.”

―총선 때 한미(韓美)FTA 반대가 화두로 떠올랐지요.

“세계 경제가 모두 개방 체제인데 우리만 문을 닫고 살 수는 없죠. 물론 체결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 고유의 경쟁력과 체질을 강화해야 해요. 우리가 위축되면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를 공격할 수도 있어요. 우리는 지난 50년간 기적(奇跡) 같은 성장을 이뤄왔어요. 엄청난 괴력을 발휘하는 민족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저력이라면 어느 나라와 FTA를 체결해도 당당히 경쟁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시민운동이란 탈을 쓰고 정부정책이나 국책사업에 무조건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사회를 위해 정말 필요하다 싶으면 영혼을 불사르면서 반대할 수 있죠. 그러나 시민운동이 정치화, 권력화되면 그건 생명을 잃은 것과 같아요. 시민운동에는 냉철한 균형감각이 필요해요.”

―한미FTA는 반대하고, 한중(韓中)FTA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를 안 하는 정치권이나 시민단체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야당 정치인들이 흔히 보이는 행태는 반대를 위한 반대일 뿐입니다. 시민단체들도 그런 경우가 종종 보여요. 이 나라의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순수성이 떨어지지요.”

―단순히 순수성이 부족하다기보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종북좌파(從北左派) 성향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종북 단체들이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념적으로 조종(操縱)을 받고 있다면 그건 시민운동이 아닙니다.”

고유문화, 역사의식, 정서 회복해야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세력 중에는 종북단체도 들어 있습니다.

“시민단체 입장에서 판단해 분명히 선을 그어야겠지요.”

―정상적인 시민단체가 좌파·종북단체로 변질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야 할 문제죠. 자신들의 주장이 나라와 사회를 위한 것인지 솔직히 판단해야 해요. 시민단체의 가장 큰 모순 중 하나가 자신들은 남을 열심히 비판하면서 자신들이 (남으로부터) 비판받는 것에 대해선 굉장히 인색해요. 종북단체 등 여러 비판을 받을 때는 ‘정말 내가 비판받을 일을 했나’며 겸허한 자기판단과 반성을 해야 합니다.”

―정치권이 나눠져 있다 보니 시민운동 세력도 좌우로 나눠져 있습니다.

“시민운동가의 가슴에는 ‘나’라는 게 없어야 해요. 오로지 ‘국가’와 ‘사회’만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이 나라 이 사회를 위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해요. 시민단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양심’이 있어야 해요. 스스로를 속이면 안 되죠. 자기의 정치적 욕심을 위해 시민단체를 이용한다거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은 시민운동을 모욕(侮辱)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나아가 국가와 사회를 오염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이 시민단체에 있다는 말씀이죠.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성숙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동안의 노력으로 물질적 풍요를 이뤄냈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네 사람들끼리 모여 살면서, 먹을 게 없어 굶어도 제삿날이면 어디서 꿔서라도 밥을 구해 제사를 지내고 젯밥을 나눠 먹었어요. 마음이 따듯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아파트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지요. 또 사람을 판단할 때는 그 사람이 어느 동네에서 어떤 아파트에 사는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직업은 뭔지 이런 것부터 봐요. 진정 중요한 게 뭔지를 잊어버리고 모든 걸 물질적인 잣대로만 보는 그런 문화 속에서 살고 있지요. 우리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면서 우리의 고유문화, 역사의식, 정서를 잃어버렸어요. 이제 우리의 것을 살려야 해요. 복원시키고 새롭게 탄생시켜야 해요. 그것이 우리의 미래 경쟁력이라고 확신합니다.”

스펙의 노예가 되지 마라

―이 교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학문을 수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요.

“상품을 수출하면 돈을 벌지만 학문을 수출하면 세계를 지배하죠. 창조적인 학문 발전을 통해 학문의 종주국이 되어야 합니다. 미국, 유럽 대학들이 연구하는 것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 세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학문적으로 만들어가야 해요. 세계의 우수한 학생들이 우리나라로 유학 오도록 해야 해요. 먼 꿈이 아닙니다. 대학이 정신을 차려 올바르게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면 됩니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뭔가요.

“오늘을 사는 젊은이는 스펙의 노예가 돼 있어요. 사교육 많이 받고, 자격증 많이 따고, 좋은 직장 갖고, 안락하게 살 수 있다면 최고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지금의 사회가 그걸 강요하기도 하죠. ‘자기 자신을 찾으라’고 말하고 싶어요. 과연 ‘나라는 사람이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하고, 어떤 일을 해 보람을 느낄 것인가, 앞으로 이 사회 주인은 나다, 이 사회를 이렇게 바꿔야 한다’는 주인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교수생활 30년을 정리한다면.

“고려대라는 울타리 안에서 마음껏 연구하고, 가르치고 싶은 대로 가르쳤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한은 없어요.”

―정부나 기업에서 활동할 기회가 온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저의 문은 오래전부터 열려 있었어요. 그동안 사람들이 안 와서 그렇죠. 정부 관료든 정치인·기업인이든 저의 지식이 필요해 오신다면 크게 환영하고 최선의 답도 드릴 겁니다. 정년 퇴임을 하더라도 강단에는 계속 서고 싶어요. 제가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게 ‘지식봉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