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김현장과 부산 美문화원 방화사건<부미방> 30년 : 월간조선

1982년 3월 18일 오후 2시쯤 부산 용두산공원 뒤편 대청동에 위치한 부산 미국문화원이 화염에 휩싸였다. 백주 대낮에 그것도 혈맹이요 맹방이라는 미국의 공관(公館)에서 벌어진 믿기지 않은 사건이었다. 방화범의 구호는 3가지였다.

“미국은 물러가라!”

“전두환은 살인마!”

“북침준비 완료!”

전두환(全斗煥) 정권은 입이 딱 벌어졌다. 이북의 평양방송을 제외하고 누구도 입에 담을 수 없는 반미(反美) 구호에다 방화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동원됐던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 이처럼 대담한 반미 투쟁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주범 김현장(金鉉奬·당시 32세·이하 존칭 생략)과 부산 고신대 4학년생이던 문부식(文富軾·당시 23세)엔 사형이 선고됐고, 김은숙(고신대) 최인순(부산대 약대) 이미옥(고신대 의대) 김지희(부산여대) 등에겐 중형이 내려졌다.

문부식과 김현장은 이후 민주화운동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30년의 세월 동안 ‘동지’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때는 일체감에 들뜨고, 한때는 가위 눌려 살아야 했으나 세월 앞에 장사가 없나 보다.

기자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하 부미방) 주범인 김현장을 만났다. 부미방 30년 만의 첫 공식 인터뷰였다.

어느덧 그는 예순의 나이를 넘어서고 있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불편하다고 했다. 구성진 전라도 방언을 듣기란 즐거운 일이었으나 그가 겪은 삶은 신산스러웠다. 만남 도중 몇 번이고 “없던 일로 하자”며 인터뷰를 마다했다. 마음을 돌려놓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호남에서 DJ를 거부하는 일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김현장의 이력을 간단히 정리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1951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나 조선대를 졸업한 그는 70년대 후반 르포 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기성언론이 ‘광신도 살인자’로 규정한 한 젊은이의 행적을 추적한 <무등산 타잔>이 그의 첫 기사였다.

1980년 5·18의 광주에서 <전두환 살육작전>이란 유인물을 배포, 5000만원이 걸린 현상수배범이 되었다. 강원도 원주로 숨어 그곳에서 학생들을 의식화시켰고, 1982년 부미방 사건을 교사한 혐의로 사형수가 되었다. 이후 무기(無期)로, 그리고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가 1988년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1989년 5월 이철규군 변사사건으로 6개월 만에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다시 수감됐다. 그가 세상에 다시 나온 것은 1992년 3월. 이후 5·18기념재단 이사, 5·18민중항쟁동지회 회장을 거쳤다.

‘5·18의 광주’와 ‘부미방의 반미’라는 전력(前歷)에도 그는 종북(從北)을 멀리했다. 또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반목하며 갈등했다. 호남에서 DJ를 거부하는 것은 ‘빨갱이’로 몰리는 것 이상의 가혹한 따돌림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괴짜”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지난 3월부터 그를 여섯 차례 만났다. 우리는 곧장 부미방의 ‘화염’ 속에 뛰어들지 않았다. 돌다리를 두드리듯, 나쁜 한기(寒氣)에 이불을 뒤집어쓰듯 조심조심 1980년대의 상흔을 더듬어 나갔다.

1982년 3월 18일 일어난 부산 미문화원(부산 대청동 소재) 방화사건 화재현장 모습. 건물 외벽이 검게 그을렸다.

‘무등산 타잔’으로 알려진 르포 작가

부미방으로 이름 석 자가 알려지기 전, 김현장은 잡지사에 르포 기사를 쓰는 자유기고가였다. 첫 기사는 1977년 《월간 대화》에 쓴 <무등산 타잔>이었다.

무등산 타잔이란 그해 4월 무등산 무허가 마을에 철거반원이 들이닥쳐 이를 저지하다가 철거반원 4명을 죽인 박흥숙(朴興塾·당시 21세)을 가리킨다. 흙과 돌로 엉성하게 지은 무등산 무당촌을 철거반원들이 무자비하게 불을 질렀다. 기왕에 뜯을 집이니 지붕 위에 쳐 놓은 천막이라도 건져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철거반원들은 막무가내였다. 박흥숙의 어머니가 천장에 숨겨 둔 돈 30만원조차 건지지 못했다. 박흥숙은 한 노인의 집을 철거하고 돌아오는 철거반원과 마주치자 그들을 흉기로 살해하고 도주했다. 그러나 서울에서 검거돼 1978년 5월 사형판결을 받았다.

당시 언론이 박흥숙을 ‘광신도 살인자’로 몰아갈 때, 김현장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아 소형 녹음기를 구입한 뒤 무등산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산골짝에 물어물어 가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려요. 해는 어느덧 지고 산중에 희미한 불빛이 보여 문을 두드리니 산지기의 집이었습니다. 그 집에 박흥숙의 이모가 살고 있더군요. 공교롭게도 박흥숙의 여동생이 경찰서에 잡혀 갔다가 훈방되어 돌아온 날이었어요. 처음엔 주저주저하더니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요. 저는 녹음기를 꾹 눌렀죠.”

넌더리가 나는 아픈 사연을 밤새 기록할 수 있었다.

“아무런 대책 없이 이주(移住) 계고장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을 개취급 했고 집까지 부숴 버렸다는 겁니다. 당장 오갈 데 없는 이들의 집에까지 불을 질러 돈이며 봄에 뿌릴 씨앗까지 깡그리 타 버리고 말았어요. 저는 박흥숙이 왜 철거반원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살아 보려 몸부림친 젊은이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렸지요.”

당시 《월간 대화》(크리스찬아카데미 刊)는 강원룡(姜元龍) 목사가 발간하는 잡지였다. 현장 노동자들의 글이 간혹 실렸는데 ‘동아투위 사건’으로 해직된 송건호(宋建鎬) 선생이 편집일을 보고 있었다. 강은교 시인의 남편인 임정남이 편집장이었다.

“제가 잡지사로 찾아가 원고를 내놓으니 깜짝 놀라는 겁니다. 지방 공대생이 이런 글을 쓴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거예요. 송 선생이 제 손을 꼭 잡더니 ‘고생하셨다. 정신 바로 박힌 후배가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느낀다’고 했어요. 기자 선배들에게 귀여움을 많이 받았어요.”

기생관광 취재하려고 종로3가 포주집으로 이사

교도소 수감생활을 같이한 문익환 목사와 함께. 뒤에 아들 문성근씨 얼굴이 보인다.

《월간 대화》가 폐간되자 김현장은 《뿌리깊은 나무》에 글을 기고했다. 1973년 창간한 《뿌리깊은 나무》는 가로쓰기에다 최초의 순한글 잡지로 인기를 끌었다. 이 잡지에 기고한 <이윽고 관광기생이 되고야 만 이 처녀들>(79년 5월) <제주도 땅의 새 임자들>(79년 9월호) <농민이 안 믿는 농업협동조합>(80년 3월) 등이 대표작이다. 그 무렵, 대학을 졸업해 취직할 생각도 했지만 원고료만으로 생활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당시 《뿌리깊은 나무》 직원들보다 원고료 수입이 많았다고 한다.

“1970년대 당시 제주도 땅을 육지인들이 다 차지하던 시절이었어요. 하나하나 등기부를 떼기가 불가능한 시절이어서 밀짚모자에 고무신 신고 종일 발품 팔아 재벌들이 산 땅을 다 확인했어요. 땅을 안 파는 농가가 있으면 주위에 독초를 심거나 담을 쳐 버립니다. 소들이 독초를 먹고 죽어 나가니 땅을 안 팔 수 없는 겁니다. 악랄하게 땅을 뺏다시피 해도 바다 건너 ‘중앙’에서는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던 시절이었어요.”

그는 <이윽고 관광기생이 되고야 만 이 처녀들>을 쓰기 위해 6개월 동안 서울 종로3가 낙원동의 한 포주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 사는 관광기생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였다. 아쟁과 가야금을 배워 일본인 관광객 앞에서 연주한 일도 있다.

“당시 일본인 관광객 시중을 드는 기생이 서울 종로와 삼청각은 물론, 부산 완월동과 제주 등지에 수천 명이 있었어요. 기생들이 외화벌이를 한다고 해서 통행금지도 예외로 했어요. 일본인 관광객이 주말을 즐기러 목요일과 금요일에 한국에 오는데, 주말에는 종로 바닥이 일본인 천지였습니다. 걔네들이 그냥 관광하러 옵니까. 만지고 잠자려고 오지. 취재는 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 포주가 주인인 종로의 허름한 집으로 이사를 갔어요. 보통 아쟁과 가야금, 장구, 대금, 살풀이춤을 추는 이들이 한 팀을 이뤄 공연하는데, 저는 국악 하는 친구에게서 아쟁과 가야금을 배웠지요. 6개월 동안 기거하다 보니 먹이사슬 관계가 훤히 보여요. 그래서 글을 썼죠.

기사가 나가고 난리가 났습니다. 포주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고 여성계가 깜짝 놀랐어요. 윤보선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가 이끌던 어느 여성단체에서 제게 100만원을 주었습니다.”

《뿌리깊은 나무》 편집장을 맡았던 김형윤(金熒允)씨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느 날 김(현장)씨가 편집실로 찾아와 어떤 소재가 있는데 글을 써 보고 싶다고 했어요. 사물을 보는 독특한 시각, 불우한 환경에 사는 사람들, 소외층에 대한 그의 관심이 마음에 들어 글을 써 보라고 권했습니다.”

밑바닥 생활을 접하며 습득한, 모순된 사회에 대한 시각과 용기 있는 글쓰기가 김현장으로 하여금 ‘무시무시한’ 현실에 직접 뛰어들게 만들었다.

‘가장 악랄한’ 유인물을 작성한 혐의

서울대 치대 연극반 후배들이 그의 고향인 전남 강진군 칠량면을 찾아온 것은 광주 5·18이 일어나기 며칠 전의 일이다. 이틀 간 머무르며 마을사람들을 치료한 뒤 서울로 돌아갈 즈음, ‘광주에서 조선대 학생 1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시내로 진출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길로 고향 사립문을 나선 것이 부모와의 마지막이었다.

광주에서 5·18 참상을 목도한 김현장은 르포 작가의 필력으로 <전두환 살육작전>이란 제목의 유인물을 만들었다. 8절지 앞뒤로 빽빽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아, 하늘은 이리 무심하단 말인가’로 시작되는 글을 20분 만에 쓰고 3만부를 복사했어요. 1만부는 학생들을 동원해 전주에서 뿌리고, 나머지 2만부를 들고 후배와 함께 경남 함안으로 갔어요. 그곳에서 1만부씩을 들고 후배는 부산행, 저는 대구행 직행버스에 올랐지요. 그런데 부산행 앞차가 출발을 안 해요. 가만히 보니, 경찰의 불심검문에 후배가 잡힌 겁니다. 아이코 죽었구나, 생각하고 슬그머니 버스에서 내려 덕유산으로 도망을 쳤어요.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마을 스피커에서 ‘광주사태 간첩이 이쪽으로 도피했다고 하니 신고하라’는 겁니다. 그때가 모내기철이었는데 바지를 둥둥 걷고 삽을 어깨에 메고서 농사꾼 흉내를 냈어요. 동원된 예비군들이 큰길에서 우왕좌왕하며 난리가 났지요. 저는 서산, 정읍, 장성, 신흥을 거쳐 대전 후배 집에 숨어 들어갔어요. 몰래 이북방송을 들으니 제가 쓴 <전두환 살육작전>을 종일 낭독하더군요.”

김현장은 ‘가장 악랄한’ 유인물을 작성한 혐의로 경찰의 현상수배를 받았다. 추적을 피해 청주, 충주를 거쳐 강원도 원주 가톨릭교육원에 도착한 것은 6월 8일 무렵이었다. 원주교구 최기식(崔基植) 신부를 만났다.

“최 신부님은 전라도 촌놈의 딱한 사정을 듣고 잠시 숙고하더니 ‘정히 그토록 딱한 사정이라면 이곳에서 함께 살아 보자’고 허락을 하더군요. 신부님이 제게 도피한 이유를 묻더니 바로 ‘이 유인물이냐’고 하면서 <전두환 살육작전>을 꺼내는 겁니다. 이미 원주교구까지 살포됐던 겁니다.”

1970년대와 80년대 초까지 국내 가톨릭 교구 가운데 원주교구와 전주교구가 가장 진보적이었고 반정부 운동 세력에게도 호의적이었다.

“앞으로 투쟁목표는 미국의 콧대를 누르는 일”

그 무렵, 김현장의 대미(對美) 인식도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인에게 미국은 맹신의 대상이었다.

“광주 5·18항쟁 당시 구호는 ‘김대중 석방, 전두환 물러가라’였어요. 바라는 수준이 겨우 3선개헌 이전의 직접선거 요구였어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김현장은 5·18 직후 미 항공모함 코럴시호가 제주해역으로 이동했다는 이야기를 외신기자에게 들었다고 한다.

“광주시민들이 안도하며 ‘야! 이제 미국의 카터가 전두환을 몰아내려고 항공모함을 끌고 온다. 미군이 와서 공수부대를 혼내 줄 거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우리의 순박한 기대는 무너졌어요.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카터 형님의 구원병은 도착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도 미국을 원망하거나 의심할 만큼 영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요. ‘카터는 임기가 다 돼서 힘 쓸 여유가 없어서일 뿐, 레이건이 그 자리를 물려받으면 전두환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을 거야’라고 믿었지요. 그런데 레이건이 대통령 취임 후 전 대통령을 첫 귀빈으로 초청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저는 그동안의 반공 교육의 찌꺼기로 남아 있던 미국에 대한 한 조각의 환상마저 집어던지고 말았습니다.”

외신에서 주한미군 사령관인 위컴의 발언을 접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광주 5·18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미국 기자들의 질문에 위컴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 국민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대통령을 하든 상관없이 따라갈 것이다.”

김현장의 머리에 불을 지르는 발언이었다.

“일개 군인의 망언이 아니라 주둔 사령관의 망언이었어요. 환멸을 느꼈지요. 우리가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린다 해도 미국은 제2, 제3의 전두환을 제조해 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어요. 앞으로 투쟁목표는 미국의 콧대를 꺾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광주항쟁의 의미를 경상도에 불어넣자’

부미방의 김현장과 문부식(오른쪽).

김현장은 미국을 공격할 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미의 금기’라는 성역을 깨기 위해선 의기투합할 동료와 의식화된 학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과정에서 문부식이라는 걸출한 후배를 만나게 됐다.

“부산역 앞 아리랑호텔에서 처음 만난 문부식은 묵직하고 사고가 깊고 남다른 데가 있었습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지요. 1981년 12월에는 문부식이 훗날 부미방에 관여하게 되는 박정미, 유승렬과 함께 원주로 오게 됐어요. 일종의 의식화 교육을 한 셈입니다.”

그리고 김현장과 문부식 두 사람은 ‘광주항쟁의 의미를 경상도에 불어넣자’는 생각에 부산 미문화원을 공격대상으로 택했다.

문부식을 앞세워 사전답사를 통해 부산 미문화원 경비원들의 출입자 통제 상태와 건물의 내부구조 등을 면밀히 조사한다. 김현장은 부미방 사건이 일어나기 꼭 한 달 전 문부식을 다시 만나 부미방 투쟁에 대한 마지막 결의를 확인한다. 다만 D-데이를 정하지 못한 채 그는 원주로 다시 돌아온다.

1982년 3월 18일 김현장도 모르게 사건이 터져 버렸다. 문부식의 단독 결행인 것이다. 부산 미문화원에서 불이 났는데 한 사람이 죽고 불을 지른 범인들은 도망가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보도가 뉴스시간마다 특보로 다뤄지고 있었다.

“뉴스를 전해 듣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감이란 게 참 묘해요. 저는 술을 몇 말을 먹어도 정신을 잃은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그 전날 술을 먹고 정신을 잃어 버렸습니다. 뭔가 예감이 불안했는데 글쎄, 그 사건이 일어났던 거지요.”

얼마 뒤 불을 지른 고신대 4학년 문부식과 김은숙이 부산에서 김현장이 있는 강원도 원주로 피신해 왔다. 부미방 거사 뒤 일상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문부식은 부미방을 터뜨리기 전 제게서의 연락을 기다렸으나 아무 소식이 없자 자의로 18일을 거사일로 잡아 불을 댕기게 됐어요. 사건이 터지고 난 후 신문에 대서특필되면, 그때라도 연락이 있겠지 기다리다가 직접 저를 찾아나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문부식의 전화 연락처를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문부식에게 ‘왜 내가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느냐’고 묻자 ‘학교를 휴학하자마자 징집영장이 떨어질 테고, 그래서 더는 기다릴 수 없어 그만 혼자의 판단으로 거사일을 잡아 터뜨리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문부식에게 전해 들은 부미방 수법은 대담하고도 기민했다. 불을 지르는 데는 김은숙(고신대) 최인순(부산대 약대) 이미옥(고신대 의대) 김지희(부산여대) 등 여학생 4명이 방화조로 동원되었다. 여기서 최인순과 김지희는 먼저 20분 전에 문화원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다.

20분 뒤 정확하게 김은숙과 이미옥이 플라스틱 물통에 가득 채운 휘발유를 양 손에 들고 문화원 정문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에 있던 최인순과 김지희는 정문 옆에서 서성이다가 휘발유통을 든 김은숙 이미옥의 모습을 발견하고서 문화원 출입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동시에 실내 바닥에 휘발유를 쏟아 붓고 뛰쳐나왔다.

“그 사이 최인순과 김지희는 나무젓가락 끝에다 알코올을 묻힌 솜을 감아 불을 붙여 던졌다고 합니다. 여학생들이 가스라이터를 평소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왼손으로 불 켜는 연습을 했다고 해요. 펑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가 치솟자 문부식은 문화원의 건너편에 있는 건물 창문에서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는 겁니다. 유승렬은 문부식과 함께 여학생들이 사용할 휘발유를 택시로 실어 날랐고 최충원과 박원식은 ‘북침준비 완료!’의 내용이 실린 유인물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사형을 선고받다!

그러나 문부식과 김은숙이 지레 겁을 먹고 원주에 온 것이 문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제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갑자기 없어지게 되면 수사기관이 의심을 하기 마련이다. 김현장은 3월 22일 문부식을 열차편으로 서울로 보내고, 김은숙은 수원에 있던 성균관대생인 남동생의 자취방에 들러 부산으로 내려가도록 했다.

“부미방에 대한 외부의 시각이나 관심이 어느 수준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북한 방송을 들었어요. 북한 방언 특유의 앙칼진 목소리로 부미방을 언급하고 있었지만 저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들로만 선동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신변에 불안을 느낀 문부식과 김은숙은 다시 원주로 도망쳐 왔고, 결국 사건발생 14일 만인 1982년 4월 1일 문부식과 김은숙은 자수하고 만다. 그리고 다음날 김현장은 부미방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체포된다. 또 가톨릭 원주교육원 원장 최기식 신부도 국가보안법 위반 및 범인은닉 혐의로 곤욕을 치른다.

그해 8월 12일 부산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부미방 사건의 1심 재판 결심공판에서 김현장과 문부식은 사형, 김은숙 최인순 이미옥 김지희는 무기, 박정미는 7년, 최기식 신부는 5년형을 선고 받았다. 이듬해 3월 대법원 상고심에서도 문·김 두 사람은 국가보안법 등이 적용돼 사형을 선고 받았다.

1979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조차 반외세를 내부 강령으로 내걸고는 있지만 반미란 얘기는 감히 입밖에 못 내던 시절이었다. 남민전의 위상이 약했다거나 조직원들의 의식이 반미 구호를 외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김현장은 “반미 구호가 목사 지망생이던 문부식과 어린 여학생들에 의해 첫 함성이 울려 퍼진 배경에는 광주 5·18이 관련돼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결행한 부미방의 반미는 미국의 그릇된 대한(對韓) 외교정책을 반대한 것이지 미국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미국놈’을 반대한 것이지 ‘미국사람’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5·18에 침묵한 미국, 한국인을 ‘들쥐새끼’에 비유한 미국을 반대한 것입니다.

요즘 반미는 무조건 반미더군요. 그때 부르짖었던 반미에 책임감을 느낍니다. ‘미국놈’이라 욕하면 애국자가 되는 풍조가 돼 버렸어요. 뇌에 구멍이 숭숭 뚫린 소고기를 먹게 됐다며 국민을 혼란에 빠뜨린 이들 중에 책임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지금은 미국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미국의 대외정책에 변화가 있었겠지만 한국 역시 일방적인 요구를 그대로 수용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은 나라가 됐다고 봅니다. 주한 미군사령관이 한국에 부임하면, 어떻게 해서 이미지를 좋게 할까 ‘광대’처럼 행동하지요. 저는 한미관계가 수평적이고 상호보완적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부미방은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광주 5·18로 운동권 진영이 소멸되어 가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부미방으로 민주화의 불씨를 다시 일으켜세울 수 있었죠. 적어도 한국이라는 나라가 미국의 그늘 속에 존재하지 않는, 국격(國格)이 있고 자존심이 강한 나라라는 사실을 세계에 인식시켰다고 봅니다.

해외공관에 근무한 한 무관(武官)이 제게 이런 말을 했어요. ‘부미방으로 한국이 제3세계에서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았다’고요. 저를 취조하던 검사도 ‘신미양요(辛未洋擾) 이후 미국의 코를 납작하게 만든 유일무이한 사건’이라고 했어요.”

“난 CM PD 계열”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 회장 시절 김현장. 앞줄 왼쪽 두 번째부터 유준상, 정상용, 이상수 의원과 김현장(수첩을 들고 있다).

―반미와 종북이 서로 연결되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한국 좌익의 특징은, 다른 나라처럼 의식화 과정이 철학이나 사상에 바탕 둔 것이 아니라 6·25 때 남로당을 했던 좌익 후손들이 주로 가담했다는 점입니다. 혈연적 좌파라고 할까요? 또 종북 좌파들 대개가 서손(庶孫)이 많아요. 이념보다 출생에 대한 분노 때문에 종북에 빠져들었다고 봐요. 박헌영이 대표적인 케이스죠.

한국의 종북은 광주 5·18과 부미방을 거치며 운동의 양을 민주주의 구호만으로 채울 수 없어 반미, 김일성주의를 결합한 것이라고 봅니다. 어느덧 지금은 깨기 힘든 덩치가 돼 버렸어요. 부미방이 터지고 김일성이 최고 간부회의에서 제게 영웅칭호를 줬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그는 교도소 내에서 종북 좌파 학생들을 자주 만났다고 한다.

“언젠가부터 사상투쟁을 한답시고 PD니, NL이니 하는 학생들이 감옥에 들어와요. 저더러 ‘선배의 입장은 뭐냐’고 물어요. 그래서 그들이 하는 얘기와 이론을 흥미롭게 들여다봤는데, 저는 주사파 이론이 우리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체사상이라는 것도 1900년대 초 초근목피(草根木皮) 로 연명하던 우리 할아버지들이 북간도로 유랑하던 시절에나 맞는 빨치산 이론이라 생각합니다.

그 뒤로 후배들이 제게 PD냐, NL이냐를 물으면 “CM(청주 미평동) PD라고 했어요. 미평동에 청주교도소가 있거든요. 하하하.”

교도소 내에서조차 노선이 다르면 학생끼리도 적대감이 심했다고 한다. 그런 주사파 학생들에게 김현장은 이렇게 말했다.

“‘반미는 외교적 수평상태만 요구하면 된다. 그러니까, ‘들쥐’라는 인식이 소멸되면 되는 거다. 너희들이 먼저 북한에 가 봐라. 너희가 살 수 없는 세상을 선전하거나 강요하지 말라’고요. 그랬더니 저를 굉장히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권위주의 시대 가장 잘못한 일이 가짜 빨갱이를 양산했던 것”이라는 말도 했다.

“진짜 공산주의를 신봉하고 평양 가 밀봉교육을 받고 온 이들은 감옥살이도 즐겁게 합니다. 신념에 따라 행동하니까요. 그런데 빨갱이도 아니면서 고문에 의해 진술한 이들은 정신적 고통과 억울함에 몸이 망가져요. 그 후유증으로 암이 발병해 죽어 간 이가 한둘이 아닙니다. 대공(對共) 조사관들의 공과(功過) 다툼이었는지도 모르죠. 결국 불쌍한 ‘관제 빨갱이’만 만들어 인생을 망치고 간첩에 대한 국민의 신뢰마저 잃게 만들었어요. 요즘은 누가 빨갱이 잡았다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 세상이 되었어요.”

뿔뿔이 흩어진 부미방의 동지들

부미방의 동지들은 현재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문부식은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문경삼씨는 육사 8기로 김종필 전 자민련총재와 동기다.

문부식은 1988년 12월 출소 후 7개월 만에 다시 구속돼 1년6개월 형을 선고받고 1991년 2월 만기출소했다. 그는 도서출판 삼인이 펴낸 《당대비평》 편집위원을 맡기도 했으며 시집 《꽃들》(1993)을 펴냈다. 그는 2002년 7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동의대 사건의 민주화운동 인정은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가 재야인사들의 분노를 샀다. 한동안 소식이 뜸하다 진보신당 비서실장 겸 대변인으로 정계에 데뷔했다는 소식이 들린 것은 지난해 12월. 그러나 지난 1월 술에 취해 택시기사를 때리고 경찰지구대에서 문짝을 부순 혐의로 진보신당 대변인 직에서 물러났다.

부미방을 결행한 고신대 동기생 김은숙은 문부식과 결혼했으나 문부식이 출소한 뒤 이혼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아내와 동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말을 한다. 김은숙은 지난해 가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현장은 “문병을 가니 피골이 상접해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어. 나에게 ‘위암선고 받고 수술대 올라갔을 때 가장 행복했다’는 말을 하더군.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어”라며 안타까워했다.

부산대 약대를 나온 최인순은 출소 후 복학했고, 나중에 약사가 됐다. 부산에서 약사회 회장을 할 정도로 여전히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고신대 의대를 나온 이미옥은 외과의사로 개업, 현재 김해에 살고 있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과 결혼했는데, 첫 월급을 영치금으로 김현장에게 넣어 주었다고 한다.

김지희는 교사와 결혼해 아들 둘을 낳고 대전에서 살고 있다. 문부식과 함께 원주에서 의식화 교육을 받았던 박정미는 극심한 고문으로 큰 병을 앓았다. 후유증 탓에 결혼생활도 평탄치 못했고 사기를 당해 재산까지 날렸다고 한다.

운동권 학생들의 타락상

김현장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후 무기로, 그리고 20년형으로 감형된 뒤 7년 만인 1988년 12월 20일 출소한다. 그러나 석방의 기쁨도 잠시, 6개월 뒤 발생한 이철규군 의문사 사건에 연루돼 다시 구속된다.

이 사건은 수배 중이던 조선대생 이철규가 무등산 기슭의 한 다리에서 검문을 받고 달아났다가 나중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불거졌다. 김현장은 ‘진상규명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아 노태우 정권과 맞섰다. 부미방 이후 그에게 또다시 가혹한 처벌이 내려졌다. 구속과 함께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2년 3월 출소했다.

김현장은 이후 전남 광주로 내려갔다. 5·18 관련 일을 도우며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다고 한다. 만약 출소 후 서울에 눌러앉았다면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려간 광주에서 학생운동의 타락상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몇몇 학생이 야밤에 교수를 불러내 룸살롱 술값을 계산하게 하고 학생회가 업자에게 조경공사를 시키고 리베이트를 챙기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몇몇 학생회 간부는 후배를 지도한답시고 6학년, 7학년, 8학년이 돼도 졸업을 안 합니다. 동창회 간부가 몇 천만원을 해먹어도 단속하는 이가 아무도 없어요. 교수가 마음에 안 들면 학생들이 소지품을 뒤지는 일도 다반사였어요. 교수의 지갑을 뒤져 경찰 명함이라도 나오면 프락치로 몰아 쫓아낸 일도 있어요. 운동권 학생 몇이 그 짓을 하며 대학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교수들이 제자의 먹잇감인 셈이었다. 그러나 운동권 학생들이 무서워 지적을 못했다. 어느날 나타난 김현장이 쓴소리를 하면서 남총련(광주전남지역 총학생회연합) 학생들과 적대관계가 됐다.

“제가 테러 협박까지 받았어요. 너무 두려워 몸에 칼을 품고 다녔다면 믿으시겠어요? 한 번은 ‘5월항쟁 구속자동지회 회장’ 자격으로 어떤 행사에 갔어요. 기라성 같은 재야 어른들이 남총련 앞에서 아무런 힘을 못 써요. 기껏 그들이 원하는 시간, 자리에 찾아가 성명서를 읽는 수준입니다. 그때 남총련 의장이 호위대 10여 명 데리고 내빈석으로 오더군요. ‘자네는 누군가?’ 하고 물으니 옆에 있던 학생이 ‘이분은 강철의 대오, 조국의 해방을 위해 싸우기 위해 ○월 ○일자로 의장이 되신…’ 어쩌구 하는 겁니다. 제가 한마디 했죠. ‘목에 힘 좀 빼라’고요. 그랬더니 아무 말을 못해요.”

이런 일도 있었다.

“한번은 학생들이 야간에 우우 몰려다녀요. 김정일이 야간전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겁니다. 야간전투 한답시고 작대기 하나 들고 야밤에 몰려다니는 웃지 못할 코미디가 벌어진 일도 있지요.”

이 지역 언론사도 마찬가지였다.

“광주·전남 지역 언론도 심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시위구호 중 경상도 욕하는 말이 있으면 그것만 대서특필해 보도합니다. 제가 언론사 사주에게 ‘당신들이 더 나쁘다’고 했더니, 그분 말이 ‘조금만 반대되는 보도를 하면 윤전기에 모래를 뿌린다는 협박이 들어온다’는 거예요. 1990년대만 해도 남총련이 한총련을 좌지우지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갈등을 보다 못한 운동권 후배들이 김현장에게 남총련과 화해의 자리를 마련했다. “고무신 신고 찾아가니 강당에 남총련 학생 수백 명이 앉아 있더라”고 했다.

“저는 이렇게 말했어요. ‘너희들이 주장하는 게 옳아야 내가 굴복한다. 운동은 도제적 계승이 아니라 비판적 계승이다. 그래야 나보다 너희가 더 발전하지 않겠느냐’고요. 이 말을 듣고 후배들이 소름 끼친다고 하더군요.”

전두환·노태우 재판 방청권을 제사상에 올려

1990년대 중반 5·18 단체들이 난립했다고 한다.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공익재단을 띄워 보자 해서 만든 것이 5·18기념재단이었다. 기금 마련을 위한 고육책으로 러시아에서 좋은 작품을 가져와 전시회를 열고 판매수익금 1억원을 마련, 재단 운영의 종잣돈을 만들었다. 여기다 5·18 유족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보태 3억원으로 재단을 설립할 수 있었다고 한다.

“초대 이사장은 조비오 신부님이 맡았어요. 1994년 8월 창립식을 가졌지만 공익법인 설립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당시 내무장관이던 최형우씨를 무작정 찾아갔어요. 놀랍게도 3일 만에 허가가 나더군요.”

재단 이사와 감사 자리를 두고 다툼을 벌였으나 재단은 반대파까지 아우르며 1995년 1월 20일 현판식을 갖고 공식 출범한다.

“건물을 빌리고 첫 이사회를 갖는데, 사무실 집기가 하나도 없었어요. 두 달이 지나도록 준비가 안 되는 겁니다. 후배들이 ‘형님, 책상 의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요. 앉을 데도 없이 빈 사무실만 덩그렇게 있어요. 한라중공업 창업주인 정인영 명예회장을 찾아갔어요. 제가 징역을 오래 살았어도 발이 넓어요. 재단에 집기가 없으니 도와달라고 했어요. 그분이 2000만원권 수표를 건네주면서 회계처리에 필요하다며 영수증을 끊어 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놈의 영수증을 끊어 주면 되는데 재단에서 안 끊어 줘요. 그러니 민망해서 두 번 다시 그분을 못 뵙게 됐습니다.”

김현장은 1996년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 회장이 되어 5·18 관련 유사단체의 통합에 앞장섰다. “몇 명이 모여 5·18 간판을 내걸고 목소리를 높이는 겁니다. 외부에서 보면 자기네들끼리 싸움한다고 비쳐 단체에 대한 신뢰도가 낮았어요. 그래서 더 이상 주위에 민폐, 관폐 그만 끼치자고 했습니다. 유사단체를 정리하고 동지회 건물도 계약해 임대료를 내고, 월급 주는 여직원·간사까지 뽑았어요.”

1996년에는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12·12 및 5·18 사건과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이 법정을 달궜다. 김현장은 5·18 회원들과 버스를 대절해 상경, 공판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때 보니까 역시 전두환은 오야붕, 허화평은 이론가더군요. 다른 사람들은 멍멍이고, 정호용과 장세동이는 고집불통으로 보여요. 마지막 재판에서 전·노 두 분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제 됐다 싶었어요. 5·18 재단을 세웠고 망월동 묘역 조성예산도 마련했으니 여한이 없었어요. 마지막 재판 방청권을 상에 올리고 고사를 지냈습니다. 그렇게 재야활동에 종지부를 찍고 홀가분하게 물러났지요.”

박근혜 지지와 그 후폭풍

김현장은 나이 예순에 딸 지민양을 낳았다.

김현장은 2007년 8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에서 박근혜(朴槿惠) 후보 지지를 선언한다. 그후 그에게 비난 전화가 빗발쳤다. “두고 보자”고 으름장을 놓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부미방으로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1987년 8월 그는 김영삼·김대중 후보 간 단일화를 요구하며 24일 동안 옥중단식을 벌였다. 그의 단식은 양김씨가 독자출마를 선언하고 대선전에 돌입, 치열한 우위확보 경쟁을 벌일 시점이어서 미묘한 파장을 낳았다.

“DJ와는 질긴 인연이 있어요. 부미방에 미국 정부가 화들짝 놀라 신군부에게 DJ의 석방을 요구한 것이거든요. 사형선고가 내려졌던 DJ가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던 배경이 부미방이었죠. 그래서 이희호 여사가 제게 영치금도 주고 양말, 내복을 넣어 주셨지요. DJ는 미국에서 부미방 연루자들의 구명운동도 폈습니다. 하지만 DJ가 야권 단일화를 거부하고 평민당을 만든 것에 화가 났어요. 왜냐면 YS·DJ의 출마는 곧 노태우의 당선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죠.”

당시 그는 옥중서한을 통해 “DJ가 탈당하면 그에 대한 호남인의 기대와 5·18의 집단적 한풀이 굿판이 형성될 것이고, 관제언론은 본질을 은폐시킨 채 조작·허위 보도를 일삼게 돼 결국 반호남 감정을 동원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를 쥐고 있는 쪽이 호남지역 운동가다. 지역감정으로 표를 모으는 시대가 돼선 안 된다”는 말도 했다.

밖에서 난리가 났다. 김현장은 “전라도에서 나를 때려죽이려 했고 재야 운동권까지 나서 비난했다”고 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현장은 5·18이란 선험적 세계관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라도 주민 전체 대 김현장의 싸움, 재야 운동권 전체 대 김현장의 싸움이 됐습니다. 결국 DJ가 단일화를 못해 사과한다는 발표를 끌어냈지요. 그러나 광주에서 당했던 마타도어는 상상도 못할 겁니다. 어린 학생들이 어디서 배웠는지 그렇게 (마타도어에) 능하더라고요. 제가 감히 입에도 올리지 못할 비난이었어요. 너무 잔인했어요.”

그런 그가 이번에는 박근혜를 지지하겠다고 나서자 또다시 호남이 들썩였다.

“사람들은 박정희 딸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는데 그건 소름끼치는 연좌제지요. 부미방으로 구속됐을 때 전남 강진의 우리집은 예비군 훈련장이자 가상의 적지(敵地)였어요. 그것을 보시고 아버지가 화병으로 돌아가신 겁니다. 저는 박근혜가 돼야 지역감정이 해소된다고 말합니다.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된다고 봐요. 정치는 최악을 피하자는 것 아닙니까.”

김현장은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소통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저는 몇 번이고 민심 대장정을 권했어요. 시골 가서 동네 할머니 농사일 돕는다고 뼈가 오그라들겠어요? 사람들은 박근혜를 바람 마시고 구름 똥 싸는 별종으로 압니다. 지도자가 그래선 곤란하지요. 그래서 불만입니다.

또 박정희 대통령의 과오에 대해 아직도 한이 맺힌 사람이 있어요. 털고 가지 않으면 제2, 제3의 김대업이 나올지 모를 일이죠. 자신의 마음에 지닌 상처는 제쳐두고라도 국민의 상처부터 매만져야 합니다. 그래야 정권창출이 가능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