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도전한 토종 애니메이션으로 200만 관객 돌파,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상 처음
⊙ “그동안 토종 애니메이션이 흥행에 참패했던 건 스토리텔링이 약했기 때문”
⊙ 실사 영화만 29편 제작, <공동경비구역 JSA>,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히트작 다수
沈裁明
⊙ 48세. 동덕여대 국문과 졸업.
⊙ 명기획·MK픽쳐스 대표 역임.
⊙ 상훈 : 청룡영화상, 대종상 등 다수 수상.
⊙ “그동안 토종 애니메이션이 흥행에 참패했던 건 스토리텔링이 약했기 때문”
⊙ 실사 영화만 29편 제작, <공동경비구역 JSA>,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등 히트작 다수
沈裁明
⊙ 48세. 동덕여대 국문과 졸업.
⊙ 명기획·MK픽쳐스 대표 역임.
⊙ 상훈 : 청룡영화상, 대종상 등 다수 수상.
“사람이나 짐승이나 새끼 거두는 어미 마음은 다를 게 하나도 없네.”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을 본 70대 노파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한 말이다. 노파 옆에서는 딸인지 며느리인지 모를 40대 여자가 연방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엔딩 크레디트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아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애니메이션 상영관에서 이런 풍경은 이채롭다. 하지만 <마당을 나온 암탉>이 상영 중이던 지난여름의 극장가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광경이었다. 남녀노소 다양한 계층이 이 영화를 감상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 극장으로 끌어들인 것이 이 토종 애니메이션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분석된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아이들 방학에 맞춰 지난 7월 27일 개봉됐고, 상영 한 달이 채 안 돼 손익분기점(150만 관객)을 넘어섰다. 개봉 한 달여 만인 지난 9월 4일에는 200만 관객을 돌파해 한국 애니메이션의 신기원을 이뤘다. <돌아온 영웅 홍길동>(40만), <천년여우 여우비>(48만), <로보트 태권V>(72만) 등 지금껏 극장에서 상영된 한국 애니메이션 중 관객 동원 100만을 넘어선 것은 <마당을 나온 암탉>이 처음이다. 이 작품은 9월 30일 중국 3000개 극장에서 개봉돼 절찬리에 상영 중이다.
국회 문광위 소속의 김재윤 의원은 올해 국정감사에서 “<마당을 나온 암탉>의 매출 효과가 166억원 이상”이라고 발표했다. 극장 수입 145억여 원에 출판 수입 20억여 원, 해외 라이선싱 수입 3800만여 원, 문구·캐릭터·OST 수입 4200여만 원 등을 합해 추산한 것이라고 한다. 김 의원은 “중국 내 약 3000개 스크린 개봉으로 인해 매출액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 전망하며 “스토리텔링이 잘되어 있는 원천 콘텐츠를 바탕으로 제2, 제3의 <마당을 나온 암탉>과 같은 작품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100만 부 이상이 팔린 작가 황선미씨의 동명(同名) 동화가 원작이다. 알만 낳는 양계장 닭이 새끼를 품고자 마당으로 나오면서 펼쳐지는 모험담이 주요 줄거리다. 주인공 잎싹이 엄마 잃은 청둥오리 알을 대신 품어 헌신적으로 키우고, 멀리 떠나보내는 모성애를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등 성장기에 알아야 할 생(生)의 비의(悲意)를 동양적인 화풍에 잘 녹여 담았다는 평가다.
이 영화를 제작한 심재명(沈裁明) 명필름 대표를 서울 필운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1995년 남편 이은 감독과 함께 명필름을 설립한 그는 지금까지 총 30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 <해피엔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와이키키 브라더스>, <조용한 가족>, <질투는 나의 힘>, <바람난 가족>, <섬>, <시라노 연애 조작단> 등이 대표작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명필름의 30번째 영화이며, 첫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선입견과 싸우느라 힘들어
―첫 도전한 애니메이션 작품이 개봉 한 달여 만에 관객 200만명을 돌파했습니다. 당시 기분이 어땠나요.
“실사 영화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것처럼 기쁘고 뿌듯했습니다.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100만을 넘어 200만 관객까지 돌파한 것이라 주변 반응이 뜨거웠는데, 저로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이 그만큼 열악하다는 걸 느낀 계기가 돼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2005년 명필름과 애니메이션 전문 제작사 오돌또기가 손을 잡고 제작에 돌입한 지 6년여 만에 탄생한 작품이다. 제작비 30억원에 마케팅비 20억원을 투입했다. 그는 “웬만한 애니메이션 대작들의 경우 보통 제작비를 100억원 넘게 투입한다”며 “<마당을 나온 암탉>은 평균적으로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작품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실사 영화에 비해 제작 기간이 길어서 부담이겠습니다.
“저희 작품은 3D가 아니라 2D 애니메이션입니다.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그림을 일일이 그리다 보니 제작 공정이 길어졌죠. 이 영화에 들어간 컷이 12만 장이나 됩니다. 작업에 참여한 분만 150여 명 정도 되지요. 제작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정성을 쏟았는데, 흥행이 안 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을 했던 게 사실입니다.”
―처음이라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처음이라 시행착오를 많이 겪긴 했지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대신 제작비를 아끼려 허리띠를 졸라매느라 힘겨웠고, 토종 애니메이션은 국내 역사상 성공한 적이 없다는 선입견과 싸우느라 힘들었죠.”
국내 애니메이션(장편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1967년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이 시초다. 이후 <흥부와 놀부>, <손오공>, <황금철인>, <로보트 태권V>,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등의 작품이 1970년대 쏟아지며 애니메이션 중흥을 이뤘다.
그러나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1980년대 들어 한국 애니메이션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규모 자본을 끌어들여 제작한 <블루시걸>(1994년), <아마겟돈>(1996년), <엘리시움>(2003년), <원더풀데이즈>(2003년)가 흥행에 참패했다.
―국산 애니메이션이 시장에서 거듭 쓴맛을 본 이유는 뭔가요.
“대중이 좋아할 영화, 그러니까 상업영화로서 성공할 만한 이야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데 첫 번째 원인이 있는 것 같아요. 스토리를 제대로 만들어내는 힘이 부족했던 것이죠.”
―스토리텔링이 약했다는 건가요.
“그렇죠. 실사 영화든 애니메이션 영화든 결국 성패를 결정짓는 건 스토리예요. 그동안 선보인 한국 애니메이션은 스토리 부분이 약점으로 많이 지적되었죠.”
중국 3000개 극장에서 상영 중
―<마당을 나온 암탉>은 100만 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셀러로 이미 알려진 이야기 아닙니까.
“저희는 이 작품이 많이 알려진 이야기라는 것 때문에 하게 됐어요. 그동안 한국 애니메이션은 너무 오리지널리티가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다 보니까 인지도와 신뢰도를 쌓는 데 굉장히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사전에 알려진 이야기가 훨씬 더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할리우드 쪽도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던 것 같네요.
“네, 그렇습니다. 가령 디즈니 같은 경우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작동화를 선택해 성공을 거두곤 했죠. <마당을 나온 암탉>은 전 세계는 아니지만 적어도 국내에는 잘 알려진 이야기라는 점에서 자신감을 갖고 선택했습니다. 원작을 훼손하지 않고 잘 만들면 책을 읽고 감동한 독자들은 1차적으로 흡수할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 출발한 것이죠.”
<마당을 나온 암탉>은 그동안 학원가에서 논술 지도용 교재로 많이 사용해 왔다. 또한 올해부터 초등학교 5학년 읽기 교과서에도 실려 ‘국민 동화’가 됐다. 심 대표는 “한국 동화로서는 흔치 않은 수작”이라고 말했다.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은 현재 국내 상영을 마치고 중국 3000개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중국 외에 터키, 중동, 인도네시아 등과도 수출 계약을 맺은 상태다. 중국의 경우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부터 관심을 보인 ‘대지시대문화전파유한공사’와 2009년 배급 계약을 맺었다. 심 대표는 “중국 쪽에서는 완성된 작품을 보고 더욱 확신에 찼는지 개봉 스크린 수를 2000개에서 3000개로 늘렸다”고 말했다.
―개봉 스크린이 3000개면 우리(2000여 개)보다 많네요.
“단순한 수치로 보면 그렇지만, 중국은 스크린 수가 8000개가 넘는다고 하니까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에요. 중급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 시나리오만 보고 계약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 수입 회사 대표가 여성분이라 감상 포인트가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데다 과거 저희와 사업을 한 경험이 있어 계약이 빨리 성사된 것 같아요. 나중에 완성된 작품을 보고는 중국에서도 흥행할 가능성이 크다며 극장 수를 늘렸습니다.”
―중국 쪽이 확신한 흥행 포인트는 뭔가요.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암탉의 모성애에 크게 감동하더군요. 중국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줄 만큼 모성애가 강한 나라니까 그 부분에 기대를 건 것 아닌가 싶어요.”
영화 광고 카피라이터로 영화계 입문
심 대표는 중국 시장의 반응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중국이 아시아 지역은 물론 세계로 뻗어나가는 발판이 되리라는 판단에서다. 심 대표는 “미국의 픽사나 일본의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에 익숙해져 있는 세계 아이들에게 <마당을 나온 암탉>은 낯설고 생소한 느낌이 들 것”이라고 말했다.
동양적 정서가 짙게 배인 이 애니메이션은 지난 10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시체스국제영화제(sitgesfilmfestival)에 초청돼 유럽인들에게 선보였으며,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초청작으로 상영돼 세계 영화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각종 설문조사에서 ‘충무로 여성 파워 1위’ 자리를 지켜온 심 대표는 시종일관 목소리가 크지 않았고, 겸손했다. 수줍고 내성적인 소녀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제작자는 영화의 출발부터 완성까지 책임지고 총괄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여장부 스타일일 거라는 기자의 선입견이 산산이 깨졌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심재명 대표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화가를 꿈꾸었지만 집안 사정상 미대 진학을 포기했다. 대신 동덕여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영화는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어요. 우리가 TV <주말의 명화> 세대잖아요. 주말마다 빠뜨리지 않고 영화를 봤죠. 특히 모딜리아니의 삶을 다룬 영화 <몽파르나스의 연인> 같은 프랑스 영화에 깊이 매료돼 있었습니다.”
대학 재학 중 내내 그는 등록금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은행 등의 금융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영화 보는 걸 잊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눈이 중고교 시절에 비해 좀 더 구체화돼 당시 유일한 영화 잡지였던 《스크린》을 탐독하고, 프랑스 영화를 상영해 주던 프랑스 문화원을 들락거렸다. 그는 “잡지 《스크린》을 공짜로 받아보기 위해 대학생 기자로 활동했는데, 그때 대학생 기자 중에는 박찬욱 감독도 있었다”고 말했다.
대학 시절 그는 영화 잡지뿐만 아니라 영화 역사와 이론서들을 두루 섭렵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 영화제에서 상영한 비디오테이프를 입수해 교내에서 상영하곤 했다.
―주로 어떤 영화들이었나요.
“당시 일반 시중에서는 상영되지 않았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들이었죠. <지옥의 묵시록> 같은 영화들이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작은 출판사에 취직했다. 막연하게 영화계 진출을 꿈꾸었지만 감독이 되기에는 용기가 없었고, 제작자나 기획자의 경우 당시에는 그 개념조차 몰라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대학 시절부터 광고 분야에 관심이 있던 터라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영화 광고 카피를 한번 써보리라 생각하며 우선 출판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기자 초청 시사회 최초 시도
―두 번째 직장이 서울극장이었는데, 어떻게 들어간 건가요.
“출판사에 들어간 지 4개월쯤 지났을 때 한 일간지 신문에 서울극장 기획실에서 카피라이터를 뽑는다는 광고가 실렸어요. 꼬박꼬박 월급받으면서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하고 싶었던 일까지 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 망설임 없이 지원했습니다. 경쟁률이 100대 1이 넘었는데 운 좋게 합격했죠.”
―시험을 잘 봤나 봐요.
“당시 전형 방법이 서류 심사와 면접이었습니다. 제가 일류대 출신이 아니라 서류만으로는 경쟁력이 약했죠. 그런데 면접에서 당시 서울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영화의 카피를 하나씩 써오라고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저는 <청춘 스케치>에 대한 카피를 썼는데, 그게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아요.”
―지금도 카피 내용 기억하고 있나요.
“아, 좀 창피한데, 영화 주인공이 철수여서 ‘이제 나는 리처드 기어를 버리기로 했다. 철수가 좋아졌기 때문에’라고 썼어요. 여성 관객 입장에서 표현한 것인데, 그게 심사위원들에게 신선했던 모양입니다.”
이 카피는 훗날 이 영화 포스터에 그대로 반영됐다. 카피라이터로서 그의 재능은 홍보 마케팅 전문 회사인 ‘명기획’ 시절 빛을 발했다. 당시 그가 홍보 마케팅을 맡았던 작품이 김의석 감독의 <결혼 이야기>인데, 영화 못지않게 화제가 된 것이 ‘잘까 말까 끌까 할까’라는 광고 문구였다.
그가 차지한 서울극장 기획실 카피라이터 선임은 훗날 <왕의 남자>로 유명해진 이준익 감독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이준익 감독이 그만둔 자리에 채용된 것이다. 그는 모르는 것이 있을 때면 이준익 감독을 찾아가 “선배님, 선배님”하고 따르며 배웠다고 한다. 심 대표의 이야기다.
“그 무렵에는 저처럼 영화계에 막 입문한 분들이 많았어요. 종로 단성사 기획실에는 후에 영화 <친구>와 <말아톤>을 제작해 성공한 전 시네라인투 대표 석명홍 선배님이 근무하고 계셨고, 명보극장 기획실에는 <결혼 이야기>, <은행나무침대>, <엽기적인 그녀> 등을 제작한 신철(申哲) 선배님이 재직 중이셨죠. 그분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심 대표는 서울극장 기획실에서 2년을 근무한 후 군소 기획사인 극동스크린 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 일을 배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김호선(金鎬善) 감독이 메가폰을 쥔 영화 <사의 찬미> 기획 업무를 도우며 2년 정도 근무하다 사표를 냈다.
―독립하기 위해 그만둔 건가요.
“아니요, 저는 성격상 그렇게 도전적인 사람이 못 돼요. 그 회사에서 좀 더 많은 동기부여와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면 그냥 죽 다녔을 것 같아요. 당시만 해도 개인 회사 설립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사표 낸 후 얼마 안 있다 회사 차렸잖아요.
“‘명기획’은 계획적으로 설립한 회사가 아니에요. 저는 단계적으로 확실하게 계획을 세우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냥 회사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홍보 마케팅 일을 하다 홍보 기획사를 차려 궁극적으로 제작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다 자연스럽게 설립하게 된 것이죠.”
명필름의 전신인 명기획은 직원 4명으로 시작한 홍보 마케팅 전문 회사였다. 이 시절 그는 <결혼 이야기>(1992)를 비롯해 <그대 안의 블루>(1992), <세상 밖으로>(1994), <게임의 법칙>(1994), <닥터 봉>(1995) 등의 홍보와 마케팅을 맡았고, 이 작품들은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남편 이은 감독과 명필름 설립
―영화 홍보에 특별한 비법이 있었나요.
“광고 대행사에서 쓰는 마케팅 기법을 적용한 것이 주효하지 않았나 싶어요. 당시 국내 기획 영화의 효시인 <결혼 이야기> 기획에 오종완 영화사 봄 대표가 참여했는데, 그분이 광고대행사에서 쓰는 마케팅 기법을 차용해 홍보 전략을 세우는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그분은 이전 영화인들과 달리 영화라는 매체도 하나의 상품임으로 관람객(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하고 타깃을 분명히 해야 한다며 상당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전략을 세우고 마케팅을 했어요. 그걸 제가 옆에서 보며 배웠죠.”
영화를 광고 마인드로 홍보하고 마케팅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는 “언론사 기자들을 초청해 시사회를 가진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유능한 영화 마케터로 거듭나면서 그는 영화 제작에 대한 의지가 더욱 확고해졌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진 것이다.
그 무렵, 젊은 영화인 모임에서 만나 알고 지내온 지금의 남편 이은 감독과 결혼했다. 이은 감독은 중앙대 영화학과 출신으로 진보적인 독립영화 운동단체 ‘장산곶매’에서 활동했다. 광주 항쟁을 다룬 영화 <오! 꿈의 나라>와 노동문제를 다룬 <파업전야>가 이 감독의 대표작이다.
―같은 영화계지만 전혀 다른 색깔의 영화를 추구해 온 두 분인데, 통하는 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저는 상업영화 기획자로서, 어떻게 관객을 끌어들여 이윤을 추구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고, 이 감독은 영화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를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만드는 영화랑 다른 지점에서 영화 일을 하고, 영화를 만들어내는 그 사람의 모습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결혼 후 영화 제작사인 ‘명필름’을 세웠는데, 남편을 만나면서 영화 제작에 자신감이 붙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저는 매사 수세적인 반면에 저희 남편은 리더십이 있고, 조직을 끌고 가는 능력이 있어요. 사실 영화사를 만들자는 것도 남편이 먼저 제안한 겁니다.”
심 대표는 감정적이고 직관적인 성격인 반면 이은 감독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어서 부부로서나 사업 파트너로서 더할 나위 없이 궁합이 잘 맞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1995년 명필름을 설립했다.
명필름 창립 작품은 1996년에 제작한 정병각 감독의 <코르셋>이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다행히 두 번째 작품인 장윤현 감독의 <접속>이 그해 한국 영화 흥행 1위에 오를 정도로 크게 성공해 힘이 되었다. 이 영화는 한석규와 전도연이라는 두 보석 같은 배우를 발굴한 작품이기도 했다.
JSA로 50억 번 것이 가장 큰 수익
―30편의 영화를 만드는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겠네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공동경비구역 JSA>는 전우회와 충돌이 좀 있었고, <그때 그 사람들>은 유가족과 소송이 있었죠. 그런 과정들을 겪으면서 그냥 일반 직장생활하는 사람들보다 많은 경험을 하게 된 것 같아요.”
―흥행 면에서 크게 기대했는데 참패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작품도 있었죠.
“매번 틀리지 않았는데, 항상 잘 안 될 것으로 생각한 작품이 대박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안 될 것으로 지목한 작품의 대부분은 남들이 시도하지 않는 소재와 주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위험하긴 하나 그만큼 관객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갔던 게 아닌가 싶어요. 남북관계를 다룬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나 한국 영화의 비인기 소재인 스포츠를 담아낸 임순례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대표적이죠.”
<공동경비구역 JSA>는 신인이었던 박찬욱 감독을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시켰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스포츠 소재 영화도 잘 만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박찬욱 감독 외에 <섬>의 김기덕 감독, <조용한 가족>의 김지운 감독이 그와 함께 일하면서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 감독으로 떠올랐다.
―지금까지 몇 분의 감독과 작업한 건가요.
“스무 분도 넘을 것 같습니다. 초창기에는 신인감독들과 많이 작업을 했죠. <접속>의 장윤현 감독, <조용한 가족>의 김지운 감독,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 감독, <해피엔드>의 정지우 감독, <섬>의 김기덕 감독, <광식이 동생 광태>의 김현석 감독 등이 저와 작업할 때는 모두 신인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분들이 모두 한국 영화를 세계 속에 빛내는 스타 감독들이 되셨죠.”
―수익을 가장 많이 낸 영화는 어떤 작품인가요.
“<공동경비구역 JSA>죠. 당시 순수익이 50억원 정도였습니다. 영화 사업이란 게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키거나 주목받는 것에 비해 고수익을 내는 업종은 아니에요. 영화는 돈을 버는 것보다 정신적 문화적 가치 추구가 더 우선이죠.”
―손해를 많이 본 작품도 있죠.
“MK픽쳐스 시절에 제작한 <구미호>의 경우 수익이 마이너스 90%였어요. 총 50억원의 제작비를 넣었는데, 40억원의 적자를 냈죠.”
1세대 영화인들의 노력으로 한국 영화 시장은 몇 배로 커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CJ나 롯데 등의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뛰어들면서 충무로에 거대자본이 투입됐다. 하지만 심 대표는 “요즘 영화계는 과거에 비해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자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제작자들의 위상이나 영향력이 많이 위축됐기 때문이란다. 그는 자신이 중견 영화 제작자 대접을 받게 된 것을 두고 “한국 영화계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세대교체가 너무 빨라서 아쉽다”고 말했다.
심재명 대표는 《월간조선(月刊朝鮮)》과 인터뷰한 지 얼마 안 되어 사단법인 여성문화네트워크(서은경 대표)가 선정하는 2011 올해의 여성문화인상을 수상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고 한다.⊙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을 본 70대 노파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한 말이다. 노파 옆에서는 딸인지 며느리인지 모를 40대 여자가 연방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이들은 엔딩 크레디트가 끝나고도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몰랐다.
아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애니메이션 상영관에서 이런 풍경은 이채롭다. 하지만 <마당을 나온 암탉>이 상영 중이던 지난여름의 극장가에서는 그리 낯설지 않은 광경이었다. 남녀노소 다양한 계층이 이 영화를 감상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 극장으로 끌어들인 것이 이 토종 애니메이션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분석된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아이들 방학에 맞춰 지난 7월 27일 개봉됐고, 상영 한 달이 채 안 돼 손익분기점(150만 관객)을 넘어섰다. 개봉 한 달여 만인 지난 9월 4일에는 200만 관객을 돌파해 한국 애니메이션의 신기원을 이뤘다. <돌아온 영웅 홍길동>(40만), <천년여우 여우비>(48만), <로보트 태권V>(72만) 등 지금껏 극장에서 상영된 한국 애니메이션 중 관객 동원 100만을 넘어선 것은 <마당을 나온 암탉>이 처음이다. 이 작품은 9월 30일 중국 3000개 극장에서 개봉돼 절찬리에 상영 중이다.
국회 문광위 소속의 김재윤 의원은 올해 국정감사에서 “<마당을 나온 암탉>의 매출 효과가 166억원 이상”이라고 발표했다. 극장 수입 145억여 원에 출판 수입 20억여 원, 해외 라이선싱 수입 3800만여 원, 문구·캐릭터·OST 수입 4200여만 원 등을 합해 추산한 것이라고 한다. 김 의원은 “중국 내 약 3000개 스크린 개봉으로 인해 매출액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 전망하며 “스토리텔링이 잘되어 있는 원천 콘텐츠를 바탕으로 제2, 제3의 <마당을 나온 암탉>과 같은 작품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100만 부 이상이 팔린 작가 황선미씨의 동명(同名) 동화가 원작이다. 알만 낳는 양계장 닭이 새끼를 품고자 마당으로 나오면서 펼쳐지는 모험담이 주요 줄거리다. 주인공 잎싹이 엄마 잃은 청둥오리 알을 대신 품어 헌신적으로 키우고, 멀리 떠나보내는 모성애를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등 성장기에 알아야 할 생(生)의 비의(悲意)를 동양적인 화풍에 잘 녹여 담았다는 평가다.
이 영화를 제작한 심재명(沈裁明) 명필름 대표를 서울 필운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1995년 남편 이은 감독과 함께 명필름을 설립한 그는 지금까지 총 30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접속>, <공동경비구역 JSA>, <해피엔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와이키키 브라더스>, <조용한 가족>, <질투는 나의 힘>, <바람난 가족>, <섬>, <시라노 연애 조작단> 등이 대표작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명필름의 30번째 영화이며, 첫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선입견과 싸우느라 힘들어
―첫 도전한 애니메이션 작품이 개봉 한 달여 만에 관객 200만명을 돌파했습니다. 당시 기분이 어땠나요.
“실사 영화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한 것처럼 기쁘고 뿌듯했습니다. 한국 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100만을 넘어 200만 관객까지 돌파한 것이라 주변 반응이 뜨거웠는데, 저로서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이 그만큼 열악하다는 걸 느낀 계기가 돼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2005년 명필름과 애니메이션 전문 제작사 오돌또기가 손을 잡고 제작에 돌입한 지 6년여 만에 탄생한 작품이다. 제작비 30억원에 마케팅비 20억원을 투입했다. 그는 “웬만한 애니메이션 대작들의 경우 보통 제작비를 100억원 넘게 투입한다”며 “<마당을 나온 암탉>은 평균적으로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작품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실사 영화에 비해 제작 기간이 길어서 부담이겠습니다.
“저희 작품은 3D가 아니라 2D 애니메이션입니다.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그림을 일일이 그리다 보니 제작 공정이 길어졌죠. 이 영화에 들어간 컷이 12만 장이나 됩니다. 작업에 참여한 분만 150여 명 정도 되지요. 제작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이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이 정성을 쏟았는데, 흥행이 안 되면 어떻게 하지’ 하는 걱정을 했던 게 사실입니다.”
―처음이라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처음이라 시행착오를 많이 겪긴 했지만 포기하고 싶은 순간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대신 제작비를 아끼려 허리띠를 졸라매느라 힘겨웠고, 토종 애니메이션은 국내 역사상 성공한 적이 없다는 선입견과 싸우느라 힘들었죠.”
국내 애니메이션(장편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다. 1967년 신동헌 감독의 <홍길동>이 시초다. 이후 <흥부와 놀부>, <손오공>, <황금철인>, <로보트 태권V>,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 등의 작품이 1970년대 쏟아지며 애니메이션 중흥을 이뤘다.
그러나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1980년대 들어 한국 애니메이션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규모 자본을 끌어들여 제작한 <블루시걸>(1994년), <아마겟돈>(1996년), <엘리시움>(2003년), <원더풀데이즈>(2003년)가 흥행에 참패했다.
―국산 애니메이션이 시장에서 거듭 쓴맛을 본 이유는 뭔가요.
“대중이 좋아할 영화, 그러니까 상업영화로서 성공할 만한 이야기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데 첫 번째 원인이 있는 것 같아요. 스토리를 제대로 만들어내는 힘이 부족했던 것이죠.”
―스토리텔링이 약했다는 건가요.
“그렇죠. 실사 영화든 애니메이션 영화든 결국 성패를 결정짓는 건 스토리예요. 그동안 선보인 한국 애니메이션은 스토리 부분이 약점으로 많이 지적되었죠.”
중국 3000개 극장에서 상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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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당을 나온 암탉>(2011). |
“저희는 이 작품이 많이 알려진 이야기라는 것 때문에 하게 됐어요. 그동안 한국 애니메이션은 너무 오리지널리티가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다 보니까 인지도와 신뢰도를 쌓는 데 굉장히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사전에 알려진 이야기가 훨씬 더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할리우드 쪽도 우리 모두가 아는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던 것 같네요.
“네, 그렇습니다. 가령 디즈니 같은 경우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작동화를 선택해 성공을 거두곤 했죠. <마당을 나온 암탉>은 전 세계는 아니지만 적어도 국내에는 잘 알려진 이야기라는 점에서 자신감을 갖고 선택했습니다. 원작을 훼손하지 않고 잘 만들면 책을 읽고 감동한 독자들은 1차적으로 흡수할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 출발한 것이죠.”
<마당을 나온 암탉>은 그동안 학원가에서 논술 지도용 교재로 많이 사용해 왔다. 또한 올해부터 초등학교 5학년 읽기 교과서에도 실려 ‘국민 동화’가 됐다. 심 대표는 “한국 동화로서는 흔치 않은 수작”이라고 말했다.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은 현재 국내 상영을 마치고 중국 3000개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중국 외에 터키, 중동, 인도네시아 등과도 수출 계약을 맺은 상태다. 중국의 경우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부터 관심을 보인 ‘대지시대문화전파유한공사’와 2009년 배급 계약을 맺었다. 심 대표는 “중국 쪽에서는 완성된 작품을 보고 더욱 확신에 찼는지 개봉 스크린 수를 2000개에서 3000개로 늘렸다”고 말했다.
―개봉 스크린이 3000개면 우리(2000여 개)보다 많네요.
“단순한 수치로 보면 그렇지만, 중국은 스크린 수가 8000개가 넘는다고 하니까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에요. 중급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 시나리오만 보고 계약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 수입 회사 대표가 여성분이라 감상 포인트가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데다 과거 저희와 사업을 한 경험이 있어 계약이 빨리 성사된 것 같아요. 나중에 완성된 작품을 보고는 중국에서도 흥행할 가능성이 크다며 극장 수를 늘렸습니다.”
―중국 쪽이 확신한 흥행 포인트는 뭔가요.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암탉의 모성애에 크게 감동하더군요. 중국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줄 만큼 모성애가 강한 나라니까 그 부분에 기대를 건 것 아닌가 싶어요.”
영화 광고 카피라이터로 영화계 입문
심 대표는 중국 시장의 반응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중국이 아시아 지역은 물론 세계로 뻗어나가는 발판이 되리라는 판단에서다. 심 대표는 “미국의 픽사나 일본의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에 익숙해져 있는 세계 아이들에게 <마당을 나온 암탉>은 낯설고 생소한 느낌이 들 것”이라고 말했다.
동양적 정서가 짙게 배인 이 애니메이션은 지난 10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시체스국제영화제(sitgesfilmfestival)에 초청돼 유럽인들에게 선보였으며,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초청작으로 상영돼 세계 영화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각종 설문조사에서 ‘충무로 여성 파워 1위’ 자리를 지켜온 심 대표는 시종일관 목소리가 크지 않았고, 겸손했다. 수줍고 내성적인 소녀를 대하는 느낌이었다. 제작자는 영화의 출발부터 완성까지 책임지고 총괄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여장부 스타일일 거라는 기자의 선입견이 산산이 깨졌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심재명 대표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그는 화가를 꿈꾸었지만 집안 사정상 미대 진학을 포기했다. 대신 동덕여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요.
“영화는 중학교 때부터 좋아했어요. 우리가 TV <주말의 명화> 세대잖아요. 주말마다 빠뜨리지 않고 영화를 봤죠. 특히 모딜리아니의 삶을 다룬 영화 <몽파르나스의 연인> 같은 프랑스 영화에 깊이 매료돼 있었습니다.”
대학 재학 중 내내 그는 등록금을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은행 등의 금융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영화 보는 걸 잊지 않았다. 영화를 보는 눈이 중고교 시절에 비해 좀 더 구체화돼 당시 유일한 영화 잡지였던 《스크린》을 탐독하고, 프랑스 영화를 상영해 주던 프랑스 문화원을 들락거렸다. 그는 “잡지 《스크린》을 공짜로 받아보기 위해 대학생 기자로 활동했는데, 그때 대학생 기자 중에는 박찬욱 감독도 있었다”고 말했다.
대학 시절 그는 영화 잡지뿐만 아니라 영화 역사와 이론서들을 두루 섭렵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대학 영화제에서 상영한 비디오테이프를 입수해 교내에서 상영하곤 했다.
―주로 어떤 영화들이었나요.
“당시 일반 시중에서는 상영되지 않았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들이었죠. <지옥의 묵시록> 같은 영화들이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작은 출판사에 취직했다. 막연하게 영화계 진출을 꿈꾸었지만 감독이 되기에는 용기가 없었고, 제작자나 기획자의 경우 당시에는 그 개념조차 몰라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대학 시절부터 광고 분야에 관심이 있던 터라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영화 광고 카피를 한번 써보리라 생각하며 우선 출판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기자 초청 시사회 최초 시도
―두 번째 직장이 서울극장이었는데, 어떻게 들어간 건가요.
“출판사에 들어간 지 4개월쯤 지났을 때 한 일간지 신문에 서울극장 기획실에서 카피라이터를 뽑는다는 광고가 실렸어요. 꼬박꼬박 월급받으면서 좋아하는 영화도 보고 하고 싶었던 일까지 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 망설임 없이 지원했습니다. 경쟁률이 100대 1이 넘었는데 운 좋게 합격했죠.”
―시험을 잘 봤나 봐요.
“당시 전형 방법이 서류 심사와 면접이었습니다. 제가 일류대 출신이 아니라 서류만으로는 경쟁력이 약했죠. 그런데 면접에서 당시 서울극장에서 상영 중이던 영화의 카피를 하나씩 써오라고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저는 <청춘 스케치>에 대한 카피를 썼는데, 그게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아요.”
―지금도 카피 내용 기억하고 있나요.
“아, 좀 창피한데, 영화 주인공이 철수여서 ‘이제 나는 리처드 기어를 버리기로 했다. 철수가 좋아졌기 때문에’라고 썼어요. 여성 관객 입장에서 표현한 것인데, 그게 심사위원들에게 신선했던 모양입니다.”
이 카피는 훗날 이 영화 포스터에 그대로 반영됐다. 카피라이터로서 그의 재능은 홍보 마케팅 전문 회사인 ‘명기획’ 시절 빛을 발했다. 당시 그가 홍보 마케팅을 맡았던 작품이 김의석 감독의 <결혼 이야기>인데, 영화 못지않게 화제가 된 것이 ‘잘까 말까 끌까 할까’라는 광고 문구였다.
그가 차지한 서울극장 기획실 카피라이터 선임은 훗날 <왕의 남자>로 유명해진 이준익 감독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이준익 감독이 그만둔 자리에 채용된 것이다. 그는 모르는 것이 있을 때면 이준익 감독을 찾아가 “선배님, 선배님”하고 따르며 배웠다고 한다. 심 대표의 이야기다.
“그 무렵에는 저처럼 영화계에 막 입문한 분들이 많았어요. 종로 단성사 기획실에는 후에 영화 <친구>와 <말아톤>을 제작해 성공한 전 시네라인투 대표 석명홍 선배님이 근무하고 계셨고, 명보극장 기획실에는 <결혼 이야기>, <은행나무침대>, <엽기적인 그녀> 등을 제작한 신철(申哲) 선배님이 재직 중이셨죠. 그분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심 대표는 서울극장 기획실에서 2년을 근무한 후 군소 기획사인 극동스크린 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 일을 배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김호선(金鎬善) 감독이 메가폰을 쥔 영화 <사의 찬미> 기획 업무를 도우며 2년 정도 근무하다 사표를 냈다.
―독립하기 위해 그만둔 건가요.
“아니요, 저는 성격상 그렇게 도전적인 사람이 못 돼요. 그 회사에서 좀 더 많은 동기부여와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면 그냥 죽 다녔을 것 같아요. 당시만 해도 개인 회사 설립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사표 낸 후 얼마 안 있다 회사 차렸잖아요.
“‘명기획’은 계획적으로 설립한 회사가 아니에요. 저는 단계적으로 확실하게 계획을 세우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그냥 회사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홍보 마케팅 일을 하다 홍보 기획사를 차려 궁극적으로 제작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다 자연스럽게 설립하게 된 것이죠.”
명필름의 전신인 명기획은 직원 4명으로 시작한 홍보 마케팅 전문 회사였다. 이 시절 그는 <결혼 이야기>(1992)를 비롯해 <그대 안의 블루>(1992), <세상 밖으로>(1994), <게임의 법칙>(1994), <닥터 봉>(1995) 등의 홍보와 마케팅을 맡았고, 이 작품들은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남편 이은 감독과 명필름 설립
―영화 홍보에 특별한 비법이 있었나요.
“광고 대행사에서 쓰는 마케팅 기법을 적용한 것이 주효하지 않았나 싶어요. 당시 국내 기획 영화의 효시인 <결혼 이야기> 기획에 오종완 영화사 봄 대표가 참여했는데, 그분이 광고대행사에서 쓰는 마케팅 기법을 차용해 홍보 전략을 세우는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그분은 이전 영화인들과 달리 영화라는 매체도 하나의 상품임으로 관람객(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하고 타깃을 분명히 해야 한다며 상당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전략을 세우고 마케팅을 했어요. 그걸 제가 옆에서 보며 배웠죠.”
영화를 광고 마인드로 홍보하고 마케팅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는 “언론사 기자들을 초청해 시사회를 가진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유능한 영화 마케터로 거듭나면서 그는 영화 제작에 대한 의지가 더욱 확고해졌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강해진 것이다.
그 무렵, 젊은 영화인 모임에서 만나 알고 지내온 지금의 남편 이은 감독과 결혼했다. 이은 감독은 중앙대 영화학과 출신으로 진보적인 독립영화 운동단체 ‘장산곶매’에서 활동했다. 광주 항쟁을 다룬 영화 <오! 꿈의 나라>와 노동문제를 다룬 <파업전야>가 이 감독의 대표작이다.
―같은 영화계지만 전혀 다른 색깔의 영화를 추구해 온 두 분인데, 통하는 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당시 저는 상업영화 기획자로서, 어떻게 관객을 끌어들여 이윤을 추구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고, 이 감독은 영화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를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만드는 영화랑 다른 지점에서 영화 일을 하고, 영화를 만들어내는 그 사람의 모습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어요.”
―결혼 후 영화 제작사인 ‘명필름’을 세웠는데, 남편을 만나면서 영화 제작에 자신감이 붙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저는 매사 수세적인 반면에 저희 남편은 리더십이 있고, 조직을 끌고 가는 능력이 있어요. 사실 영화사를 만들자는 것도 남편이 먼저 제안한 겁니다.”
심 대표는 감정적이고 직관적인 성격인 반면 이은 감독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이어서 부부로서나 사업 파트너로서 더할 나위 없이 궁합이 잘 맞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1995년 명필름을 설립했다.
명필름 창립 작품은 1996년에 제작한 정병각 감독의 <코르셋>이었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다행히 두 번째 작품인 장윤현 감독의 <접속>이 그해 한국 영화 흥행 1위에 오를 정도로 크게 성공해 힘이 되었다. 이 영화는 한석규와 전도연이라는 두 보석 같은 배우를 발굴한 작품이기도 했다.
JSA로 50억 번 것이 가장 큰 수익
―30편의 영화를 만드는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겠네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지요. <공동경비구역 JSA>는 전우회와 충돌이 좀 있었고, <그때 그 사람들>은 유가족과 소송이 있었죠. 그런 과정들을 겪으면서 그냥 일반 직장생활하는 사람들보다 많은 경험을 하게 된 것 같아요.”
―흥행 면에서 크게 기대했는데 참패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작품도 있었죠.
“매번 틀리지 않았는데, 항상 잘 안 될 것으로 생각한 작품이 대박이 나더라고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안 될 것으로 지목한 작품의 대부분은 남들이 시도하지 않는 소재와 주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위험하긴 하나 그만큼 관객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갔던 게 아닌가 싶어요. 남북관계를 다룬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나 한국 영화의 비인기 소재인 스포츠를 담아낸 임순례 감독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대표적이죠.”
<공동경비구역 JSA>는 신인이었던 박찬욱 감독을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시켰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스포츠 소재 영화도 잘 만들면 성공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었다. 박찬욱 감독 외에 <섬>의 김기덕 감독, <조용한 가족>의 김지운 감독이 그와 함께 일하면서 세계가 주목하는 스타 감독으로 떠올랐다.
―지금까지 몇 분의 감독과 작업한 건가요.
“스무 분도 넘을 것 같습니다. 초창기에는 신인감독들과 많이 작업을 했죠. <접속>의 장윤현 감독, <조용한 가족>의 김지운 감독,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 감독, <해피엔드>의 정지우 감독, <섬>의 김기덕 감독, <광식이 동생 광태>의 김현석 감독 등이 저와 작업할 때는 모두 신인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분들이 모두 한국 영화를 세계 속에 빛내는 스타 감독들이 되셨죠.”
―수익을 가장 많이 낸 영화는 어떤 작품인가요.
“<공동경비구역 JSA>죠. 당시 순수익이 50억원 정도였습니다. 영화 사업이란 게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키거나 주목받는 것에 비해 고수익을 내는 업종은 아니에요. 영화는 돈을 버는 것보다 정신적 문화적 가치 추구가 더 우선이죠.”
―손해를 많이 본 작품도 있죠.
“MK픽쳐스 시절에 제작한 <구미호>의 경우 수익이 마이너스 90%였어요. 총 50억원의 제작비를 넣었는데, 40억원의 적자를 냈죠.”
1세대 영화인들의 노력으로 한국 영화 시장은 몇 배로 커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CJ나 롯데 등의 대기업이 영화산업에 뛰어들면서 충무로에 거대자본이 투입됐다. 하지만 심 대표는 “요즘 영화계는 과거에 비해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자본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제작자들의 위상이나 영향력이 많이 위축됐기 때문이란다. 그는 자신이 중견 영화 제작자 대접을 받게 된 것을 두고 “한국 영화계는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세대교체가 너무 빨라서 아쉽다”고 말했다.
심재명 대표는 《월간조선(月刊朝鮮)》과 인터뷰한 지 얼마 안 되어 사단법인 여성문화네트워크(서은경 대표)가 선정하는 2011 올해의 여성문화인상을 수상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