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 때 피란 와 평생 독신으로 지내. 1982년 옷장사, 떡장사, 빵장사 하며 모은 전 재산을 쏟아
서울 양천고 설립
⊙ 해직교사가 집요하게 비리 의혹 제기해 여러 차례 검찰 內査와 서울시교육청 監査 받아
⊙ “못 배운 탓에 校費를 다른 경비로 쓴 것이지 착복한 일 없어. 교육청 감사결과 드러난 ‘전용 경비’는
모두 원상복구시켰거나 변제”
⊙ 시교육청의 임시이사 파견 앞두고 “학교를 위해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 달라”며 호소
서울 양천고 설립
⊙ 해직교사가 집요하게 비리 의혹 제기해 여러 차례 검찰 內査와 서울시교육청 監査 받아
⊙ “못 배운 탓에 校費를 다른 경비로 쓴 것이지 착복한 일 없어. 교육청 감사결과 드러난 ‘전용 경비’는
모두 원상복구시켰거나 변제”
⊙ 시교육청의 임시이사 파견 앞두고 “학교를 위해 여생을 보낼 수 있게 해 달라”며 호소
When I was just a little girl(나 어린 소녀 적에) / I ask my mother, what will I be(엄마에게 물었죠. 이담에 뭐가 될까요?) / Will I be pretty, will I be rich(예쁜이가 될까요? 부자가 될까요?) Here’s what she said to me(그러면, 엄만 말했었죠.) / Que sera, sera(케 세라, 세라) / Que sera, sera(케 세라, 세라)
- 〈Whatever Will be, Will be〉중에서
학교법인 상록학원의 설립자이자 서울 양천고 재단이사장인 정금순(鄭今順·78)씨는 이 노래를 들으며 가끔 생각한다.
‘어린 시절, 내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지금 일흔여덟이고, 누구 말처럼 폭삭 익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의 꿈은 하나였다.
‘오늘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것뿐이었다. 배가 고팠고 어머니는 종일 농사일에 매달렸으며 아버지는 그의 나이 열 살 무렵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 아리송하고 모호한 꿈을 꿀 새도 없이 6·25사변으로 가족과 헤어져야 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자신이 꿀 수 있는 꿈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부모와 형제를 뒤로하고 홀로 피란을 와 억척스레 돈을 모았다. 혼기(婚期)를 놓쳐 평생 독신(獨身)으로 지냈다. 전 재산을 털어 1982년 고등학교를 인수했다. 그처럼 배우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서였다. 그 학교가 지금의 양천고(서울 양천구 신정3동·교장 박장옥)다. 재단 이사장이지만 학교 사환(使喚)처럼 호미와 삽 하나 들고 교정(校庭)을 공원처럼 가꾸었다. 양천고는 그의 인생이자 자식, 가정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학교를 임시이사들에게 내놓아야 할 판이다. 양천고 해직교사가 집요하게 학교의 비리 의혹을 제기해 검찰의 내사(內査), 서울시교육청의 감사(監査)를 여러 차례 받았다. 결국 지난해 비리 사학으로 낙인이 찍혔다. 그는 곽노현(郭魯炫) 서울시 교육감에게 억울하다고 호소한다. “자식도 없이 홀로된 노인이 더는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게, 여생(餘生)을 학교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한다. 도대체 양천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왜 억울하다고 호소할까.
야학에서 배운 한글·산수로 평생을 써먹어
정금순 이사장은 1933년 함경남도 흥남시 작도리에서 빈농(貧農)의 8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감자, 수수, 조 같은 밭농사를 하며 억척스레 자식을 키웠다. 정 이사장은 농사일을 돕느라 학교 문턱을 밟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얘기다.
“놀 시간이 없었어요. 밭에 가려면 몇 시간씩 걸어가야 할 정도로 멀었습니다. 친구들이 학교에 가도 어머니는 여자라고 공부를 안 시켰어요. 속이 상해 많이 울곤 했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어 오빠가 보던 책을 가지고 야학에 찾아갔어요.”
1년6개월 동안 야학을 다녔다. 공부 결심이 절박해서인지 구구단을 며칠 만에 떼고 한글도 다 익혔다.
“선생님 말씀이 귀에 쏙 들어왔어요. 그때 한글과 산수를 배웠습니다. 남한에서 태어났다면 서울대, 하버드대도 갔을 거예요. (웃음) 기초만 겨우 배웠지만, 기초를 응용해 평생을 써먹었어요.”
그러나 호롱불이 아까워 계속 공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못 배운 것이 평생 한(恨)이 되었다고 한다.
17살 때 6·25사변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인민군이 우세했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戰勢)가 뒤집혔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北進)하자 피란을 가려고 짐을 꾸렸다. “미군 ‘깜둥이’가 여자들의 목을 잘라 장대에 매단다”는 소문이 흉흉했다. 친구들은 남쪽보다 중국으로 피란 가자고 권했다.
“깜둥이가 나타났다”
한번은 진짜로 ‘깜둥이’가 마을에 나타났다. 숨는다는 것이 이웃집 아궁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여자들을 죽인다고 하니 겁이 덜컥 났던 것이다. 한참이 지나 밖으로 나오니 ‘깜둥이’가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군들이 아무도 해치지 않고 속전속결로 북진해 버렸더군요. 아궁이 재를 뒤집어쓴 얼굴을 보고 이웃 아주머니가 ‘넌 어째 깜둥이가 됐느냐’며 깔깔 웃으셨어요. 저는 남쪽으로 피란 가기로 결심했어요.”
어머니는 자식보다 귀한 소를 판 돈 500원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흥남부두로 가니 남쪽으로 향하는 조그만 목선(木船)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입이 딱 벌어졌다. 구사일생으로 동네 사람이 탄 돛단배에 동승, 강원도 묵호항에 도착했다. 많은 배가 풍랑에 휩쓸려 가라앉았다.
“당시 살기 위해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해야 했어요. 사는 게 우선이었으니까요. 어머니는 제게 혼자서라도 피란 가라고 하셨지요. 흥남 부둣가에 가니, 포성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리는데 어디 배를 탈 수가 있어야지요.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다행히 동네 사람의 돛단배에 간신히 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4 후퇴 때 북한 주민들이 남쪽으로 가려고 자기 딸을 국군에게 마구 줬어요. 남남북녀(南男北女)라는 말이 있잖아요. 예쁜 북한 처녀를 보고 국군들이 환장했어요. 그렇게 국군을 사위로 삼아 피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지 않고선 누구도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3·8선을 넘었지만, ‘국군 사위’가 이미 남쪽에 처자식을 둔 가장(家長)이란 사실은 꿈에도 몰랐지요. 양쪽 가정이 파탄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휴지조각 된 소 판 돈 500원
풍랑을 넘어 동해 묵호항에 도착했지만 살길이 막막했다. 너무나 배가 고파, 소 판 돈 500원으로 떡을 사 먹으려니, 떡 하나에 200원을 달라고 했다. 기가 막혔지만 배가 고팠다. 500원을 건네자, 떡 장수가 “북한 돈은 안 받는다”고 했다. 북한 화폐는 남한에선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그는 살기 위해 이집 저집 식모살이를 하며 끼니를 이었다.
“먹여 주고 재워 주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어요. 헌병들은 찾아와 ‘이북에서 뭘 했느냐’고 추궁했고, 밤이면 잡혀 갈까봐 다락방에 숨어 지내야 했어요. 그렇게 스무 살까지 묵호에서 살다가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은 22살인 1954년 무렵이었다. 서울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 없는 빈집 마당에는 잡초가 허리까지 자랐고 건물마다 총탄 구멍이 가득했다.
“서울에는 주인 없는 집들로 가득했지만 무서워 혼자 못 살겠더라고요. 그러다가 ‘청계천에 가면 자릿세도 없고, (노점 터를)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라는 얘기를 듣게 됐어요.”
무작정 청계천을 찾아갔다. 휴전이 되고 남쪽으로 피란 갔던 사람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는 밑천이 안 드는 옷세탁 일부터 시작했다. 식모살이, 떡장사, 군밤장사, 헌옷장사, 빵장사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제가요, 남한테 잘 안 져요. 안 지려고 남보다 더 빨리 일어나 일터로 달려갔어요. 몸이 피곤하면 아무 데서나 잘 잤어요. 그렇게 몇 년 일하고 나니 돈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모은 돈은 절대 안 썼어요. 하루 한 끼만 먹을 때가 많았고 두 끼를 먹으면 부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독신녀로 살기 위해선 독해져야 합니다. 안 입고 안 먹고 일밖에 몰랐어요. 어느 정도 돈이 모일 때까지 구두를 신어 본 기억이 없습니다.”
행상을 하며 모은 돈으로 서울역 앞(현재 남대문경찰서 자리)에 ‘역미당’이란 빵가게를 열었다. 주변의 경기여상, 환일고, 용산고, 수도여고 학생들이 자주 왔었다고 한다. 그 시절, 서서 끼니를 때울 정도로 지독했다. 휴일과 주말에도 가게 문을 열었다. 빵 하나에 10원 할 때, 하루 1700원어치를 팔았다. “다리가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한다.
“빵을 대는 업자한테 돈 만 원을 빌려 진열장이랑 테이블·의자·제빵도구를 샀어요. 이전에는 빵 하나 팔아 10원을 벌었으면, 7원은 업자한테 주고 3원만 남았어요. 직접 빵을 만드니 원가(原價) 빼고 8원이 남더군요. 남들은 제가 장사를 못하는 줄 알아요. 하지만 고객의 마음을 헤아려 물건을 팔았어요.”
그는 ‘남대문 또순이’로 통했다. 가까운 친구가 와도 빵 하나 공짜로 내놓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장사꾼은 10원, 20원에 바르르 떱니다. 한 푼 벌려면 얼마나 땀을 흘려야 합니까. 그걸 생각하면 더욱 아껴 쓰게 됐어요. 남자들이 저와 데이트하려고 빵가게로 찾아와 종일 앉아 있곤 했어요. 가게 종업원이 ‘저 아저씨, 아줌마가 좋아서 온대요’ 그랬답니다. 저는 옆길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오븐이 없던 시절, 연탄불로 빵을 구웠다. 저녁에 밀가루를 반죽한 다음 철판 위에 올려놓고 빵이 부풀 때까지 기다리는데, 철판이 과열돼 불이 가게로 옮아 붙었다. 당시 3층 목조건물 중 1층은 빵집, 2층은 다방, 3층은 맹인(盲人)들이 살고 있었다. 가게 전소는 둘째치고 맹인들이 고스란히 타 죽을 판이었다. 남대문서(署) 경찰이 순찰 도중 불이 난 것을 발견해 신고했다.
“2층 다방의 화장실로 불이 옮아 붙기 직전이었습니다. 목조건물이니 얼마나 잘 타겠어요? 모락모락 연기가 나니까 맹인들이 보자기를 덮어쓰고 3층에서 뛰어내리려고 했어요. 바로 그때 소방차가 달려왔어요. 다행히 아무도 안 다쳤지요. 생각해 보면, 하느님이 저처럼 배우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라는 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대문의 ‘또순이’
한번은 동네 청년이 그를 찾아왔다. 빵가게 뒤편에 있는 아버지 명의의 집 두 채를 사 달라는 것이었다. 얼핏 330.5㎡(100평) 남짓 돼 보였다. 처음엔 안 산다고 했더니 매일같이 찾아와 매달렸다. 빵집을 그곳으로 옮기면 되겠다 싶어 250만원을 주고 샀다.
뜻밖에도, 몇 달 뒤 서울역 주변이 재개발로 헐리게 됐다. 그는 보상금으로 3500만원을 손에 쥐었다. 요즘 시세로 치면, 수억 원이 되는 큰돈이었다. 그 돈으로 을지로 2가에다 5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또 빵을 팔아 번 돈으로 약수동과 서초동에 빌딩을 지었고, 논현동과 신정동 주변 전답을 매입했다. 자고 나면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는 시절이라 금세 돈이 불어났다.
하지만 마음 한쪽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족도 자식도 없는 그였기에 뭔지 모를 상실감에 빠졌다.
“평생 못 배운 것이 한이었어요. 돈은 모았지만 재산 물려줄 자식도 없으니까요. 그러다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짓고 싶었습니다. 마침 제가 사 놓은 땅 주위에 명신여상이 있어 1982년 무렵, 이 학교를 인수하게 됐어요.”
명신여상이 바로 지금의 양천고다. 당시 명신여상은 약 1만6529㎡(5000평) 부지에 연건평 826㎡(250평) 정도의 작은 학교였다. 인수비용은 4억7000만원. 을지로에 있던 5층짜리 건물을 단박에 팔았다.
그러나 막상 학교를 운영하려 하니 돈이 제법 많이 들어갔다. 약수동 건물(대지 429㎡, 건물 1322㎡)을 판 3억원으로 운동장을 닦고, 학교 진입로 공사를 했다. 그가 살던 강남 한신2차 아파트(115.7㎡·35평)도 3500만원에 팔아 교사(校舍)를 신축했다. 그래도 학교가 제 모습을 갖추기에는 부족한 게 많았다. 그는 강남 논현동 땅 396.6㎡(120평)을 판 8500만원으로 학교 공사를 마무리지었다.
건물과 집, 토지 모두 팔아 학교 인수
“눈물과 한숨으로 모은 건물과 집, 토지를 모두 팔고 통장까지 탈탈 털어 학교 건물을 지었습니다. 손발이 꽁꽁 얼어붙던 겨울, 제가 직접 공사현장을 감독하면서 1984년 20개 교실을 증축했어요. 그 무렵, 여상에서 명신고교로 교명을 바꾸고 10학급 남학생 502명을 처음 입학시켰습니다. 학생 수가 늘어나자 1986년 20개 교실을 다시 증축했고 이듬해 학교 인근 토지 2644.6㎡(800평)를 사서 교사를 다시 지었지요.”
당시 고입(高入) 연합고사에서 낙방한 학생과 가정형편이 나빠 진학을 못한 학생이 주로 명신고에 진학했다. 학교가 제 모습을 갖추면서 많은 학생이 대학에 진학했다. 신바람이 났다. 그 덕에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인문계 고교로 정식 인가받아 1994년 지금의 양천고로 개명(改名)했다.
“돈 버는 데 쏟은 열정으로 학교를 만들었다고 자부해요. 사실 남자학교는 좀 우중충하잖아요. 새벽부터 나무 심고 꽃 가꾸며 손이 닳도록 교정을 가꾸었습니다. 돌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제 혼(魂)을 담았습니다. 그렇게 학교 머슴살이 30년째입니다.”
양천고는 명문학교로 점점 자리 잡았다. 2009학년도 서울시 204개 인문계 고교 중 4년제 대학 진학률이 26위, 강서·양천지역에서 2위를 차지했다. 개교 후 2010년 12월까지 서울대 110명, 연세대 186명, 고려대 210명, 포스텍 16명, 카이스트 8명 등 명문대학에만 550여 명이 진학했다. 올 들어서도 서울대 4명, 연세대 12명, 고려대 4명을 비롯해 279명이 4년제 대학에 들어갔다고 한다.
나랏돈 한 푼도 안 받아
지금의 양천고를 위해 정금순 이사장은 전 재산을 쏟았다. 건물과 집, 토지를 팔아 학교설립 자금으로 충당했다. 물론 정부로부터 어떤 예산지원도 받지 않았다. 지금까지 쏟아 부은 재산의 가치를 시가(時價)로 환산하면 10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양천고가 성장하면서 정작 정 이사장은 ‘범죄인’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정 이사장은 “양천고 해직교사 A씨가 사사건건 학교를 음해하고, 제가 심은 나무 한 그루 꽃 한 포기까지 돈을 떼먹기 위한 일이었다고 몰아세웠다”고 주장했다. A씨는 2009년 ‘내부문서 외부유출, 교원품위 손상, 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양천고에서 파면됐다가, 교육과학부 소청심사위를 통해 해임 처분을 받았다.
A씨와 전교조의 끈질긴 요구로 양천고는 서울시교육청 감사를 2008년 3차례나 받았고 2009년에는 2개월 동안 받았다. 또 지난해 10월에는 보름 동안 학교법인 상록학원과 양천고에 대해 특별감사가 이뤄졌다. 정 이사장은 “상식적으로 이해 안될 무지막지한 감사였다”고 했다. 게다가 해직교사 A씨는 ‘진보 교육감’이 무더기 당선됐던 지난해 6·2 지방선거에 출마해 양천·강서·영등포지역 교육의원이 됐다. A씨의 의혹 제기는 계속됐다.
결국 지난해 12월 17일 곽노현의 서울시교육청은 양천고 이사 8명을 전원 해임하고 임시이사를 파견키로 결정, 행정처분을 앞두고 있다. 양천고 측은 현재 이의신청과 함께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이다.
정 이사장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못 배운 탓에 교비(校費)를 전용해 다른 경비로 쓴 것이지 착복한 일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시교육청 감사결과 드러난 ‘전용 경비’는 모두 원상복구시켰거나 변제했다”고 주장한다.
“제가 나랏돈으로 학교를 지었나요? 10원 한 푼 안 받았습니다. 나랏돈 안 쓰면 애국(愛國)하는 것 아닌가요? 평생 모은 전 재산을 학교에 넣어 학생들을 길렀습니다. 가정도 자식도 없는 제게 이 학교는 자식이자 가정입니다.”
기자는 서울시교육청의 특별감사 자료를 구해 읽어 보았다. 의혹이 불거진 큰 골격은 학교 시설공사 관련 금품수수, 이사회 운영 부적정, 이사회 회의소집 방법 부적정 및 회의록 미공개, 학교 급식비 부당 징수, 학교회계 세출예산 목적 외 사용 등이었다. 그밖에도 자잘한 지적이 많았다.
“학교발전을 위해 밥 먹은 것까지 다 토해 내라고 하니…”
현재 이 사안들은 법적 다툼이 진행 중이다. 누구 손을 들어줄지는 법원과 서울시교육청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 다만 상식(常識) 선에서 몇몇 의혹들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학생들에게 받은 교비를 전용했다고 하던데요.
사립학교법 제29조 6항에 의하면, ‘교비회계에 속하는 수입은 다른 회계에 전출하거나 대여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따라서 학교가 학생에게 받은 수업료, 기타 납부금 등은 다른 항목으로 전용할 수 없다.
“재단 활동비나 재단 사무실 전화비 등은 교비회계가 아닌 법인회계에서 집행해야 하는데, 규정을 몰랐습니다. 그 액수가 지난 5년간 500만원이 조금 넘는데 한 달에 10만원이 채 안돼요. 결국 제가 다 물어냈습니다. 그런데 좀 억울해요. 재단 이사장은 월급 한 푼 없어요. 자기 주머니 털어 학교를 세우면 그뿐입니다. 학교에 손님이 오거나 학부모가 저를 찾아와 함께 식사를 하면 밥값까지 제 돈을 써야 합니다. 학교발전을 위해 밥 먹은 것까지 다 토해 내라고 하니…. 이제는 도둑놈 소리까지 듣게 됐어요.”
정 이사장은 학교 돈으로 옹벽공사를 하면서 건설업자로부터 3800만원, 또 학교방송시설 공사업체로부터 1340만원을 자신의 계좌로 받았다는 의혹을 샀다. 이와 함께 학교 소화(消火) 배관공사를 시행하면서 공사비 2000만원을 과다 지출한 의혹도 받고 있다. 정 이사장의 해명이다.
“그건 이래요. 학교 공사대금을 제 돈으로 먼저 지불했거든요. 보통 학교시설의 경우 교육청에서 예산지원을 받아 공사하는데 당시 예산을 요청했으나 ‘돈이 없으니 기다려 보라’는 답을 받았습니다. 학교 교문에서 교사로 올라가는 경사로가 너무 가팔라 학생들이 미끄러져 다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학교 예산에다 제 개인 돈을 더해 공사를 강행했어요. 많이 배우지 못했고 세부적인 회계절차에 밝지 못해, 일단 공사부터 한 뒤 나중에 업자에게 받은 공사대금 중 제가 부담한 부분을 제 개인계좌로 돌려받았지요.
“불법 이익 취한 적 없어”
공사대금과 관련, 불법적인 이익을 취한 사실이 전혀 없어요. 소화 배관공사도 교육청에서 공사비를 줄 테니 하라고 해서 한 겁니다. 그런데 시공업체가 설계대로 공사를 안 한 겁니다. 그래서 업자들이 다 물어냈어요.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사회 운영 부적정, 이사회 회의소집 방법 부적정, 회의록 미공개는 어떻게 된 건가요.
“이사회 운영에 잘못이 있으면 고치면 됩니다. 사실, 한해 살림살이를 보고하는 이사회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학교는 학생만 잘 가르치면 되잖아요. 나머지 회계보고는 부수적인 일이라 생각했어요. 학교 행정실장이 장기간 공석이었던 점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사회를 잘못 운영해 학교에 손해를 보이게 한 일은 없어요. 또 앞으로 이사회를 잘 운영하면 되잖아요. 그것 때문에 이사회 임원을 해임하고 임시이사를 파견하면 어떻게 합니까.”
―학교 급식실 위탁운영을 가장해 8억8000만원에 가까운 부당이익을 얻어 ‘사기 및 횡령’ 혐의로 기소됐다고 들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해명에 앞서 “다른 학교는 급식실을 운영하며 교육청으로부터 몇 억원씩 지원받았지만 저는 한 푼도 안 받았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처음에는 외부업체에다 급식을 위탁했더니 1끼에 3000원을 받아요. 그런데 급식 질이 떨어져 학생과 교직원의 불평이 적지 않았어요. 게다가 급식업자가 자금난에 빠져 저더러 식자재 구매자금을 대면 월급 사장으로 일하겠다고 제안하더군요.”
정 이사장은 고민 끝에 직접 급식업체를 운영키로 결심했다. 그것이 문제가 될지 당시엔 몰랐다고 한다.
“제가 직접 해 보니 1끼 2500원만 받아도 되더군요. 값싸고 질 좋은 식재료를 구해 원가를 줄였기 때문입니다. 학생 반응도 좋았고요. 그걸로 부당이득을 얻었다고 하니 억울합니다. 직접 급식을 관리하면서 이윤을 남기지 않고 급식 질을 높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입니다. 그러나 급식해서 남은 이윤으로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말썽이 되자, 양천고는 다른 급식업체에 위탁했고 현재 1끼에 3000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사재 털어 장학재단 만들어
정 이사장은 지난 2009년 장학금 7억7000만원을 내놓았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를 부정축재자로 몰고 있다.
“장학재단을 세웠더니 구청에서 이런 말을 해요. 우리나라 고교 중에 저처럼 현찰로 거액을 내놓은 재단은 없었다고요.”
그는 지난해 12월 29일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제가 여든이 다 되었으니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 아직 남은 재산 모두를 양천고에 환원하고 죽은 뒤에는 학교를 사회에 환원하려 합니다. 그동안 부덕의 소치로 교육청에 누를 끼친 것 사죄드리며 잘못으로 지적된 사항들은 곧바로 시정조치하고 앞으로는 투명하게 학교를 운영하겠습니다.>
그는 학부모, 학생, 교사가 원치 않는 임시이사를 파견해 학교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학교가 부정·비리의 온상이었다면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먼저 양천고를 외면했을 것”이라고 했다.
“자식도 형제도 없는 저를 교육감이 보호해 주지 않으면 누가 보호하겠습니까. 제가 죽으면 이 학교도 사회에 되돌려줄 생각입니다. 더는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고 여생을 양천고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정 이사장에게 남겨진 미래는 알 수 없다. 불행하게도, 지금도 그는 어린 시절처럼 ‘오늘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속으로 되뇐다.
‘내 앞에 무엇이 있을까?’
정 이사장은 그러나 희망을 잃지 않는다. 삶이 끝나는 날까지 양천고에서 학생들을 길러내고 싶다. 그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까? 현재로선 알 수 없다.⊙
- 〈Whatever Will be, Will be〉중에서
학교법인 상록학원의 설립자이자 서울 양천고 재단이사장인 정금순(鄭今順·78)씨는 이 노래를 들으며 가끔 생각한다.
‘어린 시절, 내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지금 일흔여덟이고, 누구 말처럼 폭삭 익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그의 꿈은 하나였다.
‘오늘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것뿐이었다. 배가 고팠고 어머니는 종일 농사일에 매달렸으며 아버지는 그의 나이 열 살 무렵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 아리송하고 모호한 꿈을 꿀 새도 없이 6·25사변으로 가족과 헤어져야 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자신이 꿀 수 있는 꿈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다고 한다.
부모와 형제를 뒤로하고 홀로 피란을 와 억척스레 돈을 모았다. 혼기(婚期)를 놓쳐 평생 독신(獨身)으로 지냈다. 전 재산을 털어 1982년 고등학교를 인수했다. 그처럼 배우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서였다. 그 학교가 지금의 양천고(서울 양천구 신정3동·교장 박장옥)다. 재단 이사장이지만 학교 사환(使喚)처럼 호미와 삽 하나 들고 교정(校庭)을 공원처럼 가꾸었다. 양천고는 그의 인생이자 자식, 가정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학교를 임시이사들에게 내놓아야 할 판이다. 양천고 해직교사가 집요하게 학교의 비리 의혹을 제기해 검찰의 내사(內査), 서울시교육청의 감사(監査)를 여러 차례 받았다. 결국 지난해 비리 사학으로 낙인이 찍혔다. 그는 곽노현(郭魯炫) 서울시 교육감에게 억울하다고 호소한다. “자식도 없이 홀로된 노인이 더는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게, 여생(餘生)을 학교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말한다. 도대체 양천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왜 억울하다고 호소할까.
야학에서 배운 한글·산수로 평생을 써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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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대의 정금순 이사장(오른쪽). 6·25사변 당시 피란 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
“놀 시간이 없었어요. 밭에 가려면 몇 시간씩 걸어가야 할 정도로 멀었습니다. 친구들이 학교에 가도 어머니는 여자라고 공부를 안 시켰어요. 속이 상해 많이 울곤 했습니다. 공부를 하고 싶어 오빠가 보던 책을 가지고 야학에 찾아갔어요.”
1년6개월 동안 야학을 다녔다. 공부 결심이 절박해서인지 구구단을 며칠 만에 떼고 한글도 다 익혔다.
“선생님 말씀이 귀에 쏙 들어왔어요. 그때 한글과 산수를 배웠습니다. 남한에서 태어났다면 서울대, 하버드대도 갔을 거예요. (웃음) 기초만 겨우 배웠지만, 기초를 응용해 평생을 써먹었어요.”
그러나 호롱불이 아까워 계속 공부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못 배운 것이 평생 한(恨)이 되었다고 한다.
17살 때 6·25사변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인민군이 우세했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戰勢)가 뒤집혔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北進)하자 피란을 가려고 짐을 꾸렸다. “미군 ‘깜둥이’가 여자들의 목을 잘라 장대에 매단다”는 소문이 흉흉했다. 친구들은 남쪽보다 중국으로 피란 가자고 권했다.
“깜둥이가 나타났다”
한번은 진짜로 ‘깜둥이’가 마을에 나타났다. 숨는다는 것이 이웃집 아궁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여자들을 죽인다고 하니 겁이 덜컥 났던 것이다. 한참이 지나 밖으로 나오니 ‘깜둥이’가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군들이 아무도 해치지 않고 속전속결로 북진해 버렸더군요. 아궁이 재를 뒤집어쓴 얼굴을 보고 이웃 아주머니가 ‘넌 어째 깜둥이가 됐느냐’며 깔깔 웃으셨어요. 저는 남쪽으로 피란 가기로 결심했어요.”
어머니는 자식보다 귀한 소를 판 돈 500원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흥남부두로 가니 남쪽으로 향하는 조그만 목선(木船)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입이 딱 벌어졌다. 구사일생으로 동네 사람이 탄 돛단배에 동승, 강원도 묵호항에 도착했다. 많은 배가 풍랑에 휩쓸려 가라앉았다.
“당시 살기 위해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해야 했어요. 사는 게 우선이었으니까요. 어머니는 제게 혼자서라도 피란 가라고 하셨지요. 흥남 부둣가에 가니, 포성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리는데 어디 배를 탈 수가 있어야지요.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다행히 동네 사람의 돛단배에 간신히 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4 후퇴 때 북한 주민들이 남쪽으로 가려고 자기 딸을 국군에게 마구 줬어요. 남남북녀(南男北女)라는 말이 있잖아요. 예쁜 북한 처녀를 보고 국군들이 환장했어요. 그렇게 국군을 사위로 삼아 피란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지 않고선 누구도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3·8선을 넘었지만, ‘국군 사위’가 이미 남쪽에 처자식을 둔 가장(家長)이란 사실은 꿈에도 몰랐지요. 양쪽 가정이 파탄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휴지조각 된 소 판 돈 500원
풍랑을 넘어 동해 묵호항에 도착했지만 살길이 막막했다. 너무나 배가 고파, 소 판 돈 500원으로 떡을 사 먹으려니, 떡 하나에 200원을 달라고 했다. 기가 막혔지만 배가 고팠다. 500원을 건네자, 떡 장수가 “북한 돈은 안 받는다”고 했다. 북한 화폐는 남한에선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그는 살기 위해 이집 저집 식모살이를 하며 끼니를 이었다.
“먹여 주고 재워 주면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어요. 헌병들은 찾아와 ‘이북에서 뭘 했느냐’고 추궁했고, 밤이면 잡혀 갈까봐 다락방에 숨어 지내야 했어요. 그렇게 스무 살까지 묵호에서 살다가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것은 22살인 1954년 무렵이었다. 서울은 텅 비어 있었다. 사람 없는 빈집 마당에는 잡초가 허리까지 자랐고 건물마다 총탄 구멍이 가득했다.
“서울에는 주인 없는 집들로 가득했지만 무서워 혼자 못 살겠더라고요. 그러다가 ‘청계천에 가면 자릿세도 없고, (노점 터를)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라는 얘기를 듣게 됐어요.”
무작정 청계천을 찾아갔다. 휴전이 되고 남쪽으로 피란 갔던 사람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는 밑천이 안 드는 옷세탁 일부터 시작했다. 식모살이, 떡장사, 군밤장사, 헌옷장사, 빵장사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제가요, 남한테 잘 안 져요. 안 지려고 남보다 더 빨리 일어나 일터로 달려갔어요. 몸이 피곤하면 아무 데서나 잘 잤어요. 그렇게 몇 년 일하고 나니 돈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모은 돈은 절대 안 썼어요. 하루 한 끼만 먹을 때가 많았고 두 끼를 먹으면 부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독신녀로 살기 위해선 독해져야 합니다. 안 입고 안 먹고 일밖에 몰랐어요. 어느 정도 돈이 모일 때까지 구두를 신어 본 기억이 없습니다.”
행상을 하며 모은 돈으로 서울역 앞(현재 남대문경찰서 자리)에 ‘역미당’이란 빵가게를 열었다. 주변의 경기여상, 환일고, 용산고, 수도여고 학생들이 자주 왔었다고 한다. 그 시절, 서서 끼니를 때울 정도로 지독했다. 휴일과 주말에도 가게 문을 열었다. 빵 하나에 10원 할 때, 하루 1700원어치를 팔았다. “다리가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한다.
“빵을 대는 업자한테 돈 만 원을 빌려 진열장이랑 테이블·의자·제빵도구를 샀어요. 이전에는 빵 하나 팔아 10원을 벌었으면, 7원은 업자한테 주고 3원만 남았어요. 직접 빵을 만드니 원가(原價) 빼고 8원이 남더군요. 남들은 제가 장사를 못하는 줄 알아요. 하지만 고객의 마음을 헤아려 물건을 팔았어요.”
그는 ‘남대문 또순이’로 통했다. 가까운 친구가 와도 빵 하나 공짜로 내놓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장사꾼은 10원, 20원에 바르르 떱니다. 한 푼 벌려면 얼마나 땀을 흘려야 합니까. 그걸 생각하면 더욱 아껴 쓰게 됐어요. 남자들이 저와 데이트하려고 빵가게로 찾아와 종일 앉아 있곤 했어요. 가게 종업원이 ‘저 아저씨, 아줌마가 좋아서 온대요’ 그랬답니다. 저는 옆길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오븐이 없던 시절, 연탄불로 빵을 구웠다. 저녁에 밀가루를 반죽한 다음 철판 위에 올려놓고 빵이 부풀 때까지 기다리는데, 철판이 과열돼 불이 가게로 옮아 붙었다. 당시 3층 목조건물 중 1층은 빵집, 2층은 다방, 3층은 맹인(盲人)들이 살고 있었다. 가게 전소는 둘째치고 맹인들이 고스란히 타 죽을 판이었다. 남대문서(署) 경찰이 순찰 도중 불이 난 것을 발견해 신고했다.
“2층 다방의 화장실로 불이 옮아 붙기 직전이었습니다. 목조건물이니 얼마나 잘 타겠어요? 모락모락 연기가 나니까 맹인들이 보자기를 덮어쓰고 3층에서 뛰어내리려고 했어요. 바로 그때 소방차가 달려왔어요. 다행히 아무도 안 다쳤지요. 생각해 보면, 하느님이 저처럼 배우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라는 뜻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대문의 ‘또순이’
한번은 동네 청년이 그를 찾아왔다. 빵가게 뒤편에 있는 아버지 명의의 집 두 채를 사 달라는 것이었다. 얼핏 330.5㎡(100평) 남짓 돼 보였다. 처음엔 안 산다고 했더니 매일같이 찾아와 매달렸다. 빵집을 그곳으로 옮기면 되겠다 싶어 250만원을 주고 샀다.
뜻밖에도, 몇 달 뒤 서울역 주변이 재개발로 헐리게 됐다. 그는 보상금으로 3500만원을 손에 쥐었다. 요즘 시세로 치면, 수억 원이 되는 큰돈이었다. 그 돈으로 을지로 2가에다 5층짜리 건물을 지었다. 또 빵을 팔아 번 돈으로 약수동과 서초동에 빌딩을 지었고, 논현동과 신정동 주변 전답을 매입했다. 자고 나면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는 시절이라 금세 돈이 불어났다.
하지만 마음 한쪽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가족도 자식도 없는 그였기에 뭔지 모를 상실감에 빠졌다.
“평생 못 배운 것이 한이었어요. 돈은 모았지만 재산 물려줄 자식도 없으니까요. 그러다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짓고 싶었습니다. 마침 제가 사 놓은 땅 주위에 명신여상이 있어 1982년 무렵, 이 학교를 인수하게 됐어요.”
명신여상이 바로 지금의 양천고다. 당시 명신여상은 약 1만6529㎡(5000평) 부지에 연건평 826㎡(250평) 정도의 작은 학교였다. 인수비용은 4억7000만원. 을지로에 있던 5층짜리 건물을 단박에 팔았다.
그러나 막상 학교를 운영하려 하니 돈이 제법 많이 들어갔다. 약수동 건물(대지 429㎡, 건물 1322㎡)을 판 3억원으로 운동장을 닦고, 학교 진입로 공사를 했다. 그가 살던 강남 한신2차 아파트(115.7㎡·35평)도 3500만원에 팔아 교사(校舍)를 신축했다. 그래도 학교가 제 모습을 갖추기에는 부족한 게 많았다. 그는 강남 논현동 땅 396.6㎡(120평)을 판 8500만원으로 학교 공사를 마무리지었다.
건물과 집, 토지 모두 팔아 학교 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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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고 전경. 정금순 이사장은 학교 사환(使喚)처럼 호미와 삽 하나 들고 교정(校庭)을 공원처럼 가꾸었다. |
당시 고입(高入) 연합고사에서 낙방한 학생과 가정형편이 나빠 진학을 못한 학생이 주로 명신고에 진학했다. 학교가 제 모습을 갖추면서 많은 학생이 대학에 진학했다. 신바람이 났다. 그 덕에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인문계 고교로 정식 인가받아 1994년 지금의 양천고로 개명(改名)했다.
“돈 버는 데 쏟은 열정으로 학교를 만들었다고 자부해요. 사실 남자학교는 좀 우중충하잖아요. 새벽부터 나무 심고 꽃 가꾸며 손이 닳도록 교정을 가꾸었습니다. 돌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제 혼(魂)을 담았습니다. 그렇게 학교 머슴살이 30년째입니다.”
양천고는 명문학교로 점점 자리 잡았다. 2009학년도 서울시 204개 인문계 고교 중 4년제 대학 진학률이 26위, 강서·양천지역에서 2위를 차지했다. 개교 후 2010년 12월까지 서울대 110명, 연세대 186명, 고려대 210명, 포스텍 16명, 카이스트 8명 등 명문대학에만 550여 명이 진학했다. 올 들어서도 서울대 4명, 연세대 12명, 고려대 4명을 비롯해 279명이 4년제 대학에 들어갔다고 한다.
나랏돈 한 푼도 안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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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대의 정금순 이사장. 양천고 교정을 아름답게 가꾸려 머슴처럼 일했다고 한다. |
그런데 양천고가 성장하면서 정작 정 이사장은 ‘범죄인’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정 이사장은 “양천고 해직교사 A씨가 사사건건 학교를 음해하고, 제가 심은 나무 한 그루 꽃 한 포기까지 돈을 떼먹기 위한 일이었다고 몰아세웠다”고 주장했다. A씨는 2009년 ‘내부문서 외부유출, 교원품위 손상, 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양천고에서 파면됐다가, 교육과학부 소청심사위를 통해 해임 처분을 받았다.
A씨와 전교조의 끈질긴 요구로 양천고는 서울시교육청 감사를 2008년 3차례나 받았고 2009년에는 2개월 동안 받았다. 또 지난해 10월에는 보름 동안 학교법인 상록학원과 양천고에 대해 특별감사가 이뤄졌다. 정 이사장은 “상식적으로 이해 안될 무지막지한 감사였다”고 했다. 게다가 해직교사 A씨는 ‘진보 교육감’이 무더기 당선됐던 지난해 6·2 지방선거에 출마해 양천·강서·영등포지역 교육의원이 됐다. A씨의 의혹 제기는 계속됐다.
결국 지난해 12월 17일 곽노현의 서울시교육청은 양천고 이사 8명을 전원 해임하고 임시이사를 파견키로 결정, 행정처분을 앞두고 있다. 양천고 측은 현재 이의신청과 함께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이다.
정 이사장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못 배운 탓에 교비(校費)를 전용해 다른 경비로 쓴 것이지 착복한 일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시교육청 감사결과 드러난 ‘전용 경비’는 모두 원상복구시켰거나 변제했다”고 주장한다.
“제가 나랏돈으로 학교를 지었나요? 10원 한 푼 안 받았습니다. 나랏돈 안 쓰면 애국(愛國)하는 것 아닌가요? 평생 모은 전 재산을 학교에 넣어 학생들을 길렀습니다. 가정도 자식도 없는 제게 이 학교는 자식이자 가정입니다.”
기자는 서울시교육청의 특별감사 자료를 구해 읽어 보았다. 의혹이 불거진 큰 골격은 학교 시설공사 관련 금품수수, 이사회 운영 부적정, 이사회 회의소집 방법 부적정 및 회의록 미공개, 학교 급식비 부당 징수, 학교회계 세출예산 목적 외 사용 등이었다. 그밖에도 자잘한 지적이 많았다.
“학교발전을 위해 밥 먹은 것까지 다 토해 내라고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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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들과 함께한 정금순 이사장. “삶이 끝나는 날까지 양천고에서 학생들을 길러내고 싶다”고 말한다. |
―학생들에게 받은 교비를 전용했다고 하던데요.
사립학교법 제29조 6항에 의하면, ‘교비회계에 속하는 수입은 다른 회계에 전출하거나 대여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다. 따라서 학교가 학생에게 받은 수업료, 기타 납부금 등은 다른 항목으로 전용할 수 없다.
“재단 활동비나 재단 사무실 전화비 등은 교비회계가 아닌 법인회계에서 집행해야 하는데, 규정을 몰랐습니다. 그 액수가 지난 5년간 500만원이 조금 넘는데 한 달에 10만원이 채 안돼요. 결국 제가 다 물어냈습니다. 그런데 좀 억울해요. 재단 이사장은 월급 한 푼 없어요. 자기 주머니 털어 학교를 세우면 그뿐입니다. 학교에 손님이 오거나 학부모가 저를 찾아와 함께 식사를 하면 밥값까지 제 돈을 써야 합니다. 학교발전을 위해 밥 먹은 것까지 다 토해 내라고 하니…. 이제는 도둑놈 소리까지 듣게 됐어요.”
정 이사장은 학교 돈으로 옹벽공사를 하면서 건설업자로부터 3800만원, 또 학교방송시설 공사업체로부터 1340만원을 자신의 계좌로 받았다는 의혹을 샀다. 이와 함께 학교 소화(消火) 배관공사를 시행하면서 공사비 2000만원을 과다 지출한 의혹도 받고 있다. 정 이사장의 해명이다.
“그건 이래요. 학교 공사대금을 제 돈으로 먼저 지불했거든요. 보통 학교시설의 경우 교육청에서 예산지원을 받아 공사하는데 당시 예산을 요청했으나 ‘돈이 없으니 기다려 보라’는 답을 받았습니다. 학교 교문에서 교사로 올라가는 경사로가 너무 가팔라 학생들이 미끄러져 다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학교 예산에다 제 개인 돈을 더해 공사를 강행했어요. 많이 배우지 못했고 세부적인 회계절차에 밝지 못해, 일단 공사부터 한 뒤 나중에 업자에게 받은 공사대금 중 제가 부담한 부분을 제 개인계좌로 돌려받았지요.
“불법 이익 취한 적 없어”
공사대금과 관련, 불법적인 이익을 취한 사실이 전혀 없어요. 소화 배관공사도 교육청에서 공사비를 줄 테니 하라고 해서 한 겁니다. 그런데 시공업체가 설계대로 공사를 안 한 겁니다. 그래서 업자들이 다 물어냈어요.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사회 운영 부적정, 이사회 회의소집 방법 부적정, 회의록 미공개는 어떻게 된 건가요.
“이사회 운영에 잘못이 있으면 고치면 됩니다. 사실, 한해 살림살이를 보고하는 이사회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학교는 학생만 잘 가르치면 되잖아요. 나머지 회계보고는 부수적인 일이라 생각했어요. 학교 행정실장이 장기간 공석이었던 점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사회를 잘못 운영해 학교에 손해를 보이게 한 일은 없어요. 또 앞으로 이사회를 잘 운영하면 되잖아요. 그것 때문에 이사회 임원을 해임하고 임시이사를 파견하면 어떻게 합니까.”
―학교 급식실 위탁운영을 가장해 8억8000만원에 가까운 부당이익을 얻어 ‘사기 및 횡령’ 혐의로 기소됐다고 들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해명에 앞서 “다른 학교는 급식실을 운영하며 교육청으로부터 몇 억원씩 지원받았지만 저는 한 푼도 안 받았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처음에는 외부업체에다 급식을 위탁했더니 1끼에 3000원을 받아요. 그런데 급식 질이 떨어져 학생과 교직원의 불평이 적지 않았어요. 게다가 급식업자가 자금난에 빠져 저더러 식자재 구매자금을 대면 월급 사장으로 일하겠다고 제안하더군요.”
정 이사장은 고민 끝에 직접 급식업체를 운영키로 결심했다. 그것이 문제가 될지 당시엔 몰랐다고 한다.
“제가 직접 해 보니 1끼 2500원만 받아도 되더군요. 값싸고 질 좋은 식재료를 구해 원가를 줄였기 때문입니다. 학생 반응도 좋았고요. 그걸로 부당이득을 얻었다고 하니 억울합니다. 직접 급식을 관리하면서 이윤을 남기지 않고 급식 질을 높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입니다. 그러나 급식해서 남은 이윤으로 개인적인 이익을 취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말썽이 되자, 양천고는 다른 급식업체에 위탁했고 현재 1끼에 3000원을 받고 있다고 한다.
사재 털어 장학재단 만들어
정 이사장은 지난 2009년 장학금 7억7000만원을 내놓았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를 부정축재자로 몰고 있다.
“장학재단을 세웠더니 구청에서 이런 말을 해요. 우리나라 고교 중에 저처럼 현찰로 거액을 내놓은 재단은 없었다고요.”
그는 지난해 12월 29일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제가 여든이 다 되었으니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 아직 남은 재산 모두를 양천고에 환원하고 죽은 뒤에는 학교를 사회에 환원하려 합니다. 그동안 부덕의 소치로 교육청에 누를 끼친 것 사죄드리며 잘못으로 지적된 사항들은 곧바로 시정조치하고 앞으로는 투명하게 학교를 운영하겠습니다.>
그는 학부모, 학생, 교사가 원치 않는 임시이사를 파견해 학교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학교가 부정·비리의 온상이었다면 학생, 학부모, 교사들이 먼저 양천고를 외면했을 것”이라고 했다.
“자식도 형제도 없는 저를 교육감이 보호해 주지 않으면 누가 보호하겠습니까. 제가 죽으면 이 학교도 사회에 되돌려줄 생각입니다. 더는 범죄자 취급을 받지 않고 여생을 양천고를 위해 헌신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정 이사장에게 남겨진 미래는 알 수 없다. 불행하게도, 지금도 그는 어린 시절처럼 ‘오늘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속으로 되뇐다.
‘내 앞에 무엇이 있을까?’
정 이사장은 그러나 희망을 잃지 않는다. 삶이 끝나는 날까지 양천고에서 학생들을 길러내고 싶다. 그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까? 현재로선 알 수 없다.⊙
Aeneas
(2019-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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