沈載璡
⊙ 1955년생.
⊙ 홍익대 산업디자인과 졸업, 同 대학원 산업디자인 석사.
⊙ LG전자 유럽디자인센터 법인장,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 전략기획그룹장 역임.
⊙ 1955년생.
⊙ 홍익대 산업디자인과 졸업, 同 대학원 산업디자인 석사.
⊙ LG전자 유럽디자인센터 법인장,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 전략기획그룹장 역임.
“몇 년 전보다 서울이라는 도시가 훨씬 세련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건물의 외관이나, 사람들의 패션이나, 간판이나 버스·택시 등의 색깔까지도요. ‘디자인서울’은 단순히 도시를 보기 좋게 만드는 게 아니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수단입니다.”
서울 시청 인근 서울디자인재단 심재진(沈載璡) 대표이사의 사무실은 신기한 물건들로 빼곡히 차 있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마주앉은 테이블 위도 가죽으로 만든 장식용 접시, 특이한 형태의 머그잔, 신기한 형태의 돌멩이, 빈 요구르트 팩, 커피믹스를 담아 예쁘게 포장한 유리시험관 등으로 빈틈이 없을 정도였다. 심 대표는 “디자인이란 생활 속 사소한 데서 접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요즘 요구르트 팩이나 머그잔도 얼마나 예쁜지 한번 보세요. 디자인이 달라진다는 것은 삶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 대표는 홍익대와 동 대학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1978년 LG전자(舊 금성사 디자인연구소)에 입사해 2007년까지 30년간 LG전자에 근무했다. LG전자에서 전자제품 디자인실장과 유럽디자인센터 법인장, 디자인센터 전략기획그룹장, 디자인경영센터소장(상무)까지 디자인 관련 요직을 두루 거쳤다.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 부회장과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준비위원, 한국디자인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등 대외활동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또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람회 대통령상과 국무총리상, 대한민국 디자인경영대상 석탑산업훈장을 받은, 국내 산업디자인계의 핵심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LG전자 시절 대표작은 ‘수퍼슬림’ TV. 심 대표의 사무실에는 29인치 수퍼슬림TV가 있다. 브라운관 TV의 최대 약점인 두께를 혁신적으로 줄인 제품으로, 외관상 LCD TV와 유사하면서 가격은 LCD TV의 10분의 1 정도여서 큰 인기를 끌었었다. 이밖에도 컴퓨터와 TV 등 LG전자 핵심 상품들의 디자인은 그를 거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다. 심 대표는 2007년 퇴임 후 한 중소기업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다 2009년 3월 출범한 서울디자인재단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디자인 트렌드세터 DDP
오세훈 서울시장 취임과 함께 서울시가 ‘디자인서울’을 내세운 이후 비슷한 이름의 재단이나 센터가 많아 서울디자인재단은 어떤 조직이며, 역할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심 대표의 설명이다.
“서울시가 서울의 디자인 경쟁력을 국제적 수준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100% 출자해 출범한 산하재단입니다. 디자인에 대한 모든 일을 총괄적으로 하는데, 단 패션관련 업무, 간판 등의 건축관련 업무는 제외됩니다. 패션은 별도의 센터가, 건축관련은 서울시가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재단은 특히 2012년 하반기 준공되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중심으로 서울의 디자인산업을 진흥시키고 디자인 문화를 확산시키는 사업을 수행하게 되죠.”
DDP는 서울시가 옛 동대문야구장을 허물고 ‘디자인서울’을 진행하기 위해 4000억원의 예산을 들여 짓고 있는 센터다. 전시공간을 중심으로 디자인박물관, 디자인도서관, 디자인체험관, 디자인미래관, 컨벤션홀, 편의시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현재 DDP는 공사 중이지만 그 옆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2009년 개장해 디자인갤러리와 이벤트홀 등을 운영중이다.
심 대표는 “세계적인 도시에는 그 도시를 대표하는 디자인센터나 디자인박물관이 있는데, 서울에서는 이를 찾을 수 없어 외국의 디자인 관계자들이 의아해하곤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DDP를 파리 퐁피두센터나 뉴욕 현대미술관(MoMA), 도쿄 롯폰기힐스처럼 문화와 디자인 트렌드를 선도하며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창출하는 명소로 만들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롯폰기힐스는 일본 최고 번화가 10만㎡의 대지에 ‘문화도심’을 주제로 2003년 건설된 공간입니다. 초고층건물과 극장, 미술관, 레스토랑, 호텔, 방송국 등이 공존하고 9m 높이 거미모양의 대형 조각이 문화공간임을 상징하죠. 우리에게도 이런 공간이 필요합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하디드가 설계한 이 건물은 가장 높은 지점이 지상 4층에 불과해 주변의 동대문쇼핑몰 등 고층건물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건물의 모양은 한국의 강과 산의 부드러운 곡선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또 태양전지와 빗물정수장 등을 설치해 소요 에너지와 물의 10% 이상을 자체 공급하는 친환경 건물이면서, 고층건물로 꽉 막힌 동대문 일대에 바람이 흐르도록 설계된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 서울은 참 ‘못생긴’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어요. 하늘에서 보면 건물이 하나같이 모노톤(흑백)입니다. 저절로 사람이 우울해질 정도의 색채를 갖고 있습니다. 적색벽돌로 지어진 신라호텔이 눈에 띄는 이유는 이런 색을 가진 건물이 서울시내에 거의 없기 때문이죠. 특히 서울의 중심지 중 하나인 동대문 일대는 급하게 지은 대형 쇼핑몰 건물들로 보기 흉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를 완화해 온화하고 부드러운 서울의 원래 모습에 가깝게 다가가고자 한 것이 바로 DDP입니다.” 실제로 DDP는 일반적인 건물의 형태가 아니라 곡선을 강조한 특이한 형태를 갖고 있다.
2012년 DDP가 준공되면 이곳에서는 쉼없이 다양한 디자인 전시회와 체험전이 열리는 것은 물론, 디자인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재단의 계획이다. “DDP가 본격적으로 운영되면 우리나라의 디자인경쟁력은 현재 9위에서 2010년 5위 이내로 도약할 것”이라고 심 대표는 설명했다.
재단은 밤에 유동인구가 많은 동대문상권의 특성을 고려해 오후 9~10시까지 운영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는 DDP 완공 이후 동대문 일대에 변화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강남역이나 코엑스몰 등 강남지역의 수십만 유동인구를 강북으로 끌어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DDP 완공 이후 외국인 관광객이 25% 정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요즘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 강남 신사동의 가로수길입니다. 큰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형 점포가 있는 것도 아닌, 별다른 이유 없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상권이죠. 작은 규모의 패션관련 점포와 레스토랑 외에도 갤러리, 인테리어숍이 다양합니다. 갈 때마다 무언가 바뀌어 있어요. 세대 간 위화감도 없어 편안한 분위기이면서, 외국의 앞선 문화는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유럽에서 인기 높은 핀란드의 유명 인테리어 브랜드 ‘마리메꼬’가 처음으로 매장을 연 곳도 가로수길일 정도죠. DDP 건너편의 낙후된 상권도 ‘제2의 가로수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외국인들이 DDP를 많이 찾게 되면 주변에 외국인을 위한 숙박·관광·쇼핑 시설도 생겨나는 등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신진 디자이너 지원
DDP를 중심으로 한 서울 디자인산업 진흥 외에 재단의 두번째 역할은 신진 디자이너 양성이다. 심 대표의 설명이다.
“디자인을 전공한 젊은 친구들이 갈 곳이 없어요. 삼성전자니 현대자동차니 디자인을 중시한다는 대기업들도 몇만 명 직원 중 디자인 관련 인력은 몇백 명이 되지 않습니다. 또 기존의 디자이너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들어갈 여지도 없고요. 또 기업에 들어간 디자이너들은 창의적인 활동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디자이너로 성공한다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죠. 젊은 프리랜서 디자이너는 한 달 수입이 몇십만 원에 불과해요. 그런데 이들을 키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디자인 수준은 결코 높아질 수 없습니다. 이들을 지원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죠.”
서울디자인재단은 디자이너들이 DDP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하고, 작품과 디자이너 소개를 책자로 만들어 홍보에 나서는 한편 이들을 위한 인터넷쇼핑몰(www.designtag.co.kr)도 열어주고 있다. 현재 DDP 옆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열리고 있는 <디자인 45℃>는 재단이 발굴한 디자이너 45인의 전시회다. 재단은 단순히 지원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들의 작업공간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함께 아이디어 회의를 하기도 한다. 심 대표는 팔에 든 멍을 보여주며 “며칠 전 재단 직원들과 함께 디자이너 작업실을 새로 꾸미면서 나도 모르게 든 것”이라며 웃었다.
“젊은 디자이너들을 자주 만나서 저의 경험을 들려주기도 하고, 대기업에 들어간들 본인의 이름을 건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기도 합니다. ‘당신을 디자인하라’고 충고하기도 하고요. 디자이너들 역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성공할 자신이 있다며 패기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들 때문에 우리 디자인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해요. ‘디자인서울’을 이끌어 나갈 인재들이죠.”
실제로 이들 디자이너는 지난해 디자인올림픽과 백화점 행사 등을 통해 수천만 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우리는 디자이너들이 스스로 할 수 없는 디자인R&D 역할과 교육을 담당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은 디자이너들의 몫이고요.”
닮고 싶은 모델은 싱가포르
서울은 지난 2007년 세계디자인총회에서 ‘제1회 세계디자인수도’로 지정된 데 이어 2010년 9월 유네스코 디자인 창의도시로 지정된 바 있다. 서울디자인재단은 이어 2010년 9~10월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21일간 ‘2010 디자인한마당’을 개최했다. 행사에는 300만여 명의 관람객이 참여했으며, 파생된 경제효과만 5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재단은 집계하고 있다. 이후 세계 각국에서 서울의 디자인 관련 경험을 공유해 달라는 요청이 줄을 잇기도 했다. 다음 디자인한마당은 2012년 가을 열릴 예정이다.
그가 모델로 삼는 도시는 싱가포르다. “도시디자인은 녹(綠)-청(靑)-역사-사람으로 완성됩니다. 녹과 청은 나무와 강 등 자연을 의미합니다. 그다음은 역사죠. 역사가 도시 안에 녹아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이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디자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패션수준이나 안목이 높아질 때 디자인도시는 완성된다고 봅니다. 싱가포르는 도시 안에 녹지와 강이 자리 잡고 있고, 동서양의 역사가 살아 있습니다. 사람들의 매너도 세계에서 가장 수준이 높다고 볼 수 있죠. 10여 개의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도 위화감이라고는 없습니다. 안전과 복지 면에서는 세계 최고죠. 이러니 정부가 나서서 카지노를 만들어도 다들 걱정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서울도 싱가포르 같은 세계일류도시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이제 ‘국산 같다’는 말은 칭찬
그는 한국의 디자인 수준이 단기간에 높아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사실 10여 년 전만 해도 ‘그거 국산 같은데’란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첫눈에 보기에도 디자인이 신통치 않다는 뜻이었죠. 그런데 이젠 같은 말이 디자인이 괜찮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물론 중국산이 밀려들면서 국산이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되기도 했지만, 국산의 절대적인 디자인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이대로 2015년쯤 되면 우리 디자인 수준이 일본이나 유럽 선진국과 비슷하거나 더 나은 걸로 받아들여질 것 같아요.”
디자인에 평생을 바쳐 온 그가 말하는 ‘좋은 디자인’은 ‘불만이 없는 디자인’이다. “LG전자 시절 ‘회의가 10분 안에 끝나면 좋은 디자인, 말이 많으면 나쁜 디자인’이라는 자세를 갖고 있었어요. ‘감’이 좋으면 결과물도 좋더라고요. 의견이 분분하면 좋은 디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청계천도 완공된 후 사람들의 불만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서울의 버스색과 간판도 바꾸고 나니 불평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사실 지금 서울의 버스는 칙칙한 도시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좋은 예라고 봅니다.”
그가 디자인을 높이 평가하는 브랜드는 일본 소니와 독일 브라운(Braun)이다. “디자인은 더하는 게 아니라 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소니와 브라운의 전자제품은 군더더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멋진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것도 그 ‘세련됨’이고요. 세련됨은 아름다움을 한 차원 넘어선 개념이죠.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은은한 세련됨이 더 수준 높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서울은 계속 발전을 하고 있어요. 청계천에서는 약간의 인공미가 느껴지는데, 그 후 개발된 탄천과 성내천은 원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울은 이런 ‘자연스러움’과 ‘세련됨’이 있는 도시가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디자인은 가치가 우선
한편 그는 최근 서울시가 무상급식 문제 등으로 ‘디자인서울’ 정책을 예전처럼 강력하게 추진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 우려를 나타냈다. 일부에서 홍보성·전시행정이라는 비난은 물론, 심지어 ‘낭비’라는 지적까지 받고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서울을 더 강화해야 하는데, 언젠가부터 자꾸 시정(市政)의 화두에서 빠지고 있어요. 그동안 1단계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면 2단계로 넘어가야 할 단계인데 요즘 계속 전시행정이니 홍보성에 불과하다느니 하는 얘기가 외부에서는 물론 내부에서도 나옵니다. 일본이나 싱가포르를 뛰어넘어야 하는데 뛰어넘기는커녕 전혀 발전이 없는 상태예요.”
그의 우려는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제가 몸담고 있던 기업이 경쟁기업에 뒤처지기 시작한 것도 경영진이 디자인을 ‘가치(value)’가 아닌 ‘비용(cost)’으로 인식하면서부터였어요. 한때 디자인을 강조한 전자제품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언젠가부터 경영진의 판단이 달라졌고, 그때부터 하락세를 보였다고 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많은 기업이 비슷한 일을 겪었어요. 저는 이런 일을 두 번 겪고 싶지 않습니다.”⊙
서울 시청 인근 서울디자인재단 심재진(沈載璡) 대표이사의 사무실은 신기한 물건들로 빼곡히 차 있었다. 인터뷰를 하기 위해 마주앉은 테이블 위도 가죽으로 만든 장식용 접시, 특이한 형태의 머그잔, 신기한 형태의 돌멩이, 빈 요구르트 팩, 커피믹스를 담아 예쁘게 포장한 유리시험관 등으로 빈틈이 없을 정도였다. 심 대표는 “디자인이란 생활 속 사소한 데서 접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요즘 요구르트 팩이나 머그잔도 얼마나 예쁜지 한번 보세요. 디자인이 달라진다는 것은 삶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 대표는 홍익대와 동 대학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1978년 LG전자(舊 금성사 디자인연구소)에 입사해 2007년까지 30년간 LG전자에 근무했다. LG전자에서 전자제품 디자인실장과 유럽디자인센터 법인장, 디자인센터 전략기획그룹장, 디자인경영센터소장(상무)까지 디자인 관련 요직을 두루 거쳤다.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 부회장과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준비위원, 한국디자인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등 대외활동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또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람회 대통령상과 국무총리상, 대한민국 디자인경영대상 석탑산업훈장을 받은, 국내 산업디자인계의 핵심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LG전자 시절 대표작은 ‘수퍼슬림’ TV. 심 대표의 사무실에는 29인치 수퍼슬림TV가 있다. 브라운관 TV의 최대 약점인 두께를 혁신적으로 줄인 제품으로, 외관상 LCD TV와 유사하면서 가격은 LCD TV의 10분의 1 정도여서 큰 인기를 끌었었다. 이밖에도 컴퓨터와 TV 등 LG전자 핵심 상품들의 디자인은 그를 거치지 않은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다. 심 대표는 2007년 퇴임 후 한 중소기업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다 2009년 3월 출범한 서울디자인재단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디자인 트렌드세터 D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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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2012년 준공되는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조감도. |
“서울시가 서울의 디자인 경쟁력을 국제적 수준으로 향상시키기 위해 100% 출자해 출범한 산하재단입니다. 디자인에 대한 모든 일을 총괄적으로 하는데, 단 패션관련 업무, 간판 등의 건축관련 업무는 제외됩니다. 패션은 별도의 센터가, 건축관련은 서울시가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재단은 특히 2012년 하반기 준공되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중심으로 서울의 디자인산업을 진흥시키고 디자인 문화를 확산시키는 사업을 수행하게 되죠.”
DDP는 서울시가 옛 동대문야구장을 허물고 ‘디자인서울’을 진행하기 위해 4000억원의 예산을 들여 짓고 있는 센터다. 전시공간을 중심으로 디자인박물관, 디자인도서관, 디자인체험관, 디자인미래관, 컨벤션홀, 편의시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현재 DDP는 공사 중이지만 그 옆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은 2009년 개장해 디자인갤러리와 이벤트홀 등을 운영중이다.
심 대표는 “세계적인 도시에는 그 도시를 대표하는 디자인센터나 디자인박물관이 있는데, 서울에서는 이를 찾을 수 없어 외국의 디자인 관계자들이 의아해하곤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DDP를 파리 퐁피두센터나 뉴욕 현대미술관(MoMA), 도쿄 롯폰기힐스처럼 문화와 디자인 트렌드를 선도하며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창출하는 명소로 만들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롯폰기힐스는 일본 최고 번화가 10만㎡의 대지에 ‘문화도심’을 주제로 2003년 건설된 공간입니다. 초고층건물과 극장, 미술관, 레스토랑, 호텔, 방송국 등이 공존하고 9m 높이 거미모양의 대형 조각이 문화공간임을 상징하죠. 우리에게도 이런 공간이 필요합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하디드가 설계한 이 건물은 가장 높은 지점이 지상 4층에 불과해 주변의 동대문쇼핑몰 등 고층건물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건물의 모양은 한국의 강과 산의 부드러운 곡선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다. 또 태양전지와 빗물정수장 등을 설치해 소요 에너지와 물의 10% 이상을 자체 공급하는 친환경 건물이면서, 고층건물로 꽉 막힌 동대문 일대에 바람이 흐르도록 설계된 것이기도 하다.
“그동안 서울은 참 ‘못생긴’ 건물들로 가득 차 있었어요. 하늘에서 보면 건물이 하나같이 모노톤(흑백)입니다. 저절로 사람이 우울해질 정도의 색채를 갖고 있습니다. 적색벽돌로 지어진 신라호텔이 눈에 띄는 이유는 이런 색을 가진 건물이 서울시내에 거의 없기 때문이죠. 특히 서울의 중심지 중 하나인 동대문 일대는 급하게 지은 대형 쇼핑몰 건물들로 보기 흉한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를 완화해 온화하고 부드러운 서울의 원래 모습에 가깝게 다가가고자 한 것이 바로 DDP입니다.” 실제로 DDP는 일반적인 건물의 형태가 아니라 곡선을 강조한 특이한 형태를 갖고 있다.
2012년 DDP가 준공되면 이곳에서는 쉼없이 다양한 디자인 전시회와 체험전이 열리는 것은 물론, 디자인과 관련된 모든 것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재단의 계획이다. “DDP가 본격적으로 운영되면 우리나라의 디자인경쟁력은 현재 9위에서 2010년 5위 이내로 도약할 것”이라고 심 대표는 설명했다.
재단은 밤에 유동인구가 많은 동대문상권의 특성을 고려해 오후 9~10시까지 운영할 계획도 갖고 있다. 그는 DDP 완공 이후 동대문 일대에 변화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강남역이나 코엑스몰 등 강남지역의 수십만 유동인구를 강북으로 끌어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DDP 완공 이후 외국인 관광객이 25% 정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데요. 요즘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 강남 신사동의 가로수길입니다. 큰 회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형 점포가 있는 것도 아닌, 별다른 이유 없이 자연적으로 발생한 상권이죠. 작은 규모의 패션관련 점포와 레스토랑 외에도 갤러리, 인테리어숍이 다양합니다. 갈 때마다 무언가 바뀌어 있어요. 세대 간 위화감도 없어 편안한 분위기이면서, 외국의 앞선 문화는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유럽에서 인기 높은 핀란드의 유명 인테리어 브랜드 ‘마리메꼬’가 처음으로 매장을 연 곳도 가로수길일 정도죠. DDP 건너편의 낙후된 상권도 ‘제2의 가로수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외국인들이 DDP를 많이 찾게 되면 주변에 외국인을 위한 숙박·관광·쇼핑 시설도 생겨나는 등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신진 디자이너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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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9월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디자인한마당’. 300만여명의 관객이 행사장을 찾았다. |
“디자인을 전공한 젊은 친구들이 갈 곳이 없어요. 삼성전자니 현대자동차니 디자인을 중시한다는 대기업들도 몇만 명 직원 중 디자인 관련 인력은 몇백 명이 되지 않습니다. 또 기존의 디자이너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들어갈 여지도 없고요. 또 기업에 들어간 디자이너들은 창의적인 활동을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디자이너로 성공한다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죠. 젊은 프리랜서 디자이너는 한 달 수입이 몇십만 원에 불과해요. 그런데 이들을 키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디자인 수준은 결코 높아질 수 없습니다. 이들을 지원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죠.”
서울디자인재단은 디자이너들이 DDP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도록 하고, 작품과 디자이너 소개를 책자로 만들어 홍보에 나서는 한편 이들을 위한 인터넷쇼핑몰(www.designtag.co.kr)도 열어주고 있다. 현재 DDP 옆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열리고 있는 <디자인 45℃>는 재단이 발굴한 디자이너 45인의 전시회다. 재단은 단순히 지원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들의 작업공간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함께 아이디어 회의를 하기도 한다. 심 대표는 팔에 든 멍을 보여주며 “며칠 전 재단 직원들과 함께 디자이너 작업실을 새로 꾸미면서 나도 모르게 든 것”이라며 웃었다.
“젊은 디자이너들을 자주 만나서 저의 경험을 들려주기도 하고, 대기업에 들어간들 본인의 이름을 건 작품을 만들 수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기도 합니다. ‘당신을 디자인하라’고 충고하기도 하고요. 디자이너들 역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성공할 자신이 있다며 패기있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들 때문에 우리 디자인의 미래가 밝다고 생각해요. ‘디자인서울’을 이끌어 나갈 인재들이죠.”
실제로 이들 디자이너는 지난해 디자인올림픽과 백화점 행사 등을 통해 수천만 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우리는 디자이너들이 스스로 할 수 없는 디자인R&D 역할과 교육을 담당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은 디자이너들의 몫이고요.”
닮고 싶은 모델은 싱가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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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는 2010년 세계디자인수도(WDC)로 선정된 후 이를 홍보하기 위해 잠실종합경기장 잔디밭에 상징물을 설치했다. |
그가 모델로 삼는 도시는 싱가포르다. “도시디자인은 녹(綠)-청(靑)-역사-사람으로 완성됩니다. 녹과 청은 나무와 강 등 자연을 의미합니다. 그다음은 역사죠. 역사가 도시 안에 녹아 있어야 합니다. 그다음이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디자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패션수준이나 안목이 높아질 때 디자인도시는 완성된다고 봅니다. 싱가포르는 도시 안에 녹지와 강이 자리 잡고 있고, 동서양의 역사가 살아 있습니다. 사람들의 매너도 세계에서 가장 수준이 높다고 볼 수 있죠. 10여 개의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도 위화감이라고는 없습니다. 안전과 복지 면에서는 세계 최고죠. 이러니 정부가 나서서 카지노를 만들어도 다들 걱정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서울도 싱가포르 같은 세계일류도시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습니다.”
이제 ‘국산 같다’는 말은 칭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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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진 대표는 “네 가지 색 버스가 모노톤 도시였던 서울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
디자인에 평생을 바쳐 온 그가 말하는 ‘좋은 디자인’은 ‘불만이 없는 디자인’이다. “LG전자 시절 ‘회의가 10분 안에 끝나면 좋은 디자인, 말이 많으면 나쁜 디자인’이라는 자세를 갖고 있었어요. ‘감’이 좋으면 결과물도 좋더라고요. 의견이 분분하면 좋은 디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청계천도 완공된 후 사람들의 불만이 별로 없지 않습니까? 서울의 버스색과 간판도 바꾸고 나니 불평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사실 지금 서울의 버스는 칙칙한 도시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좋은 예라고 봅니다.”
그가 디자인을 높이 평가하는 브랜드는 일본 소니와 독일 브라운(Braun)이다. “디자인은 더하는 게 아니라 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소니와 브라운의 전자제품은 군더더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멋진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것도 그 ‘세련됨’이고요. 세련됨은 아름다움을 한 차원 넘어선 개념이죠.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은은한 세련됨이 더 수준 높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서울은 계속 발전을 하고 있어요. 청계천에서는 약간의 인공미가 느껴지는데, 그 후 개발된 탄천과 성내천은 원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앞으로 서울은 이런 ‘자연스러움’과 ‘세련됨’이 있는 도시가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디자인은 가치가 우선
한편 그는 최근 서울시가 무상급식 문제 등으로 ‘디자인서울’ 정책을 예전처럼 강력하게 추진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 우려를 나타냈다. 일부에서 홍보성·전시행정이라는 비난은 물론, 심지어 ‘낭비’라는 지적까지 받고 있기 때문이다.
“디자인서울을 더 강화해야 하는데, 언젠가부터 자꾸 시정(市政)의 화두에서 빠지고 있어요. 그동안 1단계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면 2단계로 넘어가야 할 단계인데 요즘 계속 전시행정이니 홍보성에 불과하다느니 하는 얘기가 외부에서는 물론 내부에서도 나옵니다. 일본이나 싱가포르를 뛰어넘어야 하는데 뛰어넘기는커녕 전혀 발전이 없는 상태예요.”
그의 우려는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제가 몸담고 있던 기업이 경쟁기업에 뒤처지기 시작한 것도 경영진이 디자인을 ‘가치(value)’가 아닌 ‘비용(cost)’으로 인식하면서부터였어요. 한때 디자인을 강조한 전자제품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지만 언젠가부터 경영진의 판단이 달라졌고, 그때부터 하락세를 보였다고 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많은 기업이 비슷한 일을 겪었어요. 저는 이런 일을 두 번 겪고 싶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