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출신 직원들을 대거 발탁하기 위하여 영남 출신 직원들을 부당하게 도태시킨 보복적 지역 편중 인사(1심 판결문)
⊙ 국가 상대 4년3개월 동안의 법정 투쟁 통해 승소
⊙ 집단 해직 땐 영남 출신이 대다수였고, 그 후 집단 승진 땐 호남 출신이 절대다수
⊙ “집단 해고에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지시 있었다고 생각”
徐日聖
⊙ 1942년생.
⊙ 경희대 졸업. 고려대 경영대학원ㆍ건국대 박사.
⊙ 중앙정보부, 건국대 겸임 교수, 국사모 회장, 現 보탬플러스 회장.
⊙ 대통령표창, 홍조근정훈장 수훈.
⊙ 국가 상대 4년3개월 동안의 법정 투쟁 통해 승소
⊙ 집단 해직 땐 영남 출신이 대다수였고, 그 후 집단 승진 땐 호남 출신이 절대다수
⊙ “집단 해고에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의 지시 있었다고 생각”
徐日聖
⊙ 1942년생.
⊙ 경희대 졸업. 고려대 경영대학원ㆍ건국대 박사.
⊙ 중앙정보부, 건국대 겸임 교수, 국사모 회장, 現 보탬플러스 회장.
⊙ 대통령표창, 홍조근정훈장 수훈.
1969년 6월, 사법고시에 연거푸 낙방하며 대학 졸업을 앞둔 청년이 있었다. 청년은 신문광고에 난 별정직 공무원 공고를 보았다. 낙방의 아픔을 추스르며 청년은 시험에 응시했다. 외무공무원 채용시험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1차, 2차 시험 합격에 이어 그해 12월에는 3차 시험까지 합격했다.
3차 합격 후에야 청년은 자신이 외교부 공무원이 아닌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합격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생각지도 않던 분야의 공무원이었지만 중앙정보부 요원이라는 직업은 그에게 충분한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이듬해 3월 1일, 그는 중앙정보부 요원 교육기관에 입소했다. 중앙정보부 요원으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가 근무하는 동안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 등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정보부 요원으로서 그는 자신이 세운 세 가지 원칙을 바꾸지 않았다. 그 첫째는 원칙주의적인 사고방식이었고 둘째는 업무의 정확성ㆍ안정성, 마지막 세 번째는 의리를 중시하자였다.
그런 원칙하에 일하며 초급중간간부가 됐다. 중앙정보부의 명칭이 국가정보원으로 바뀐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그는 경기 북부 지역의 한 도시에서 출장소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직급은 2급이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1년이 막 지난 1999년 3월 중순, 그는 한 통의 통보문을 받았다. 그달 초부터 국정원 내부에서는 TK(대구ㆍ경북) 출신 국정원 직원들을 중심으로 한 ‘살생부’가 나돌고 있었지만, 그는 ‘내가 맡은 일만 성실히 수행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개의치 않고 있었다. 물론 그 살생부에는 그의 이름도 있었다. 하지만 국정원 직원으로서 단 한 번도 징계를 받은 일이 없고 오히려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던 그였기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으레 있어온 뜬소문이라 여기며 지나쳤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3월 중순 받은 통보문의 내용은 이랬다.
<-서일성 출장소장 귀하
귀하는 3월 31일자로 국정원 직원법 제21조 제3호(직제 또는 직원의 개폐나 예산의 감소 등에 의하여 폐직 또는 과원이 될 때) 규정에 의해 직권 면직 처분한다.>
살생부 소문이 사실로 돌아온 것이다. 30여 년 동안 청춘을 불살랐던 그에게 그가 속한 조직의 면직 처분은 너무나 간단했다. 30여 년을 근무하는 동안 단 한 번의 과오라도 있었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그에게 단 한 번의 소명 기회도 없이 일방적으로 해임을 통보한 것이다.
서일성. 만 스물여덟 나이에 들어와 만 쉰일곱이 된 사내는 책상 위에 놓인 면직 처분 통보문을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적은 월급에도 불평 없이 내조를 해 온 아내와 그때까지도 아버지의 직장이 정보기관이 아닌 다른 정부 부처로 알고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게다가 둘째는 당시 한참 예민한 시기인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어쩌랴. 그는 해임 통보를 받은 날짜의 하루 전인 3월 30일, 퇴임식은커녕 동료 후배들과 악수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책상서랍만 정리한 채 황망히 자리를 떴고, 결국 돌아가지 못했다.
해임 통보 21명 중 영남 출신이 17명
서일성씨가 통보를 받던 날 다른 국정원 고위 간부 20명도 면직통보를 받았다. 2급인 서일성씨를 포함한 이사관 2명, 부이사관(3급) 19명이었다. 출신지역별로는 서울 2명, 충남 1명, 강원 1명을 제외한 17명이 영남 출신이었다. 호남 출신은 없었다.
면직통보를 받은 후인 1999년 3월 20일, 21명의 국정원 ‘퇴출자’들은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한 음식점에 모였다. 헌법에 규정된 공무원의 신분보장을 무시하고 공무원법에 보장된 법적절차도 거치지 않고, 심지어 징계위원회조차도 열지 않은 것은 정치 보복, 정치 학살이라며 흥분했다. 우선 해임 취소 및 복직을 위한 소청과 행정소송을 제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모임을 만들었다. 명칭은 ‘국사모’였다. ‘국가 사랑 모임’과 ‘국가안전기획부를 사랑하는 모임’이란 뜻이 내포된 명칭이었다. 모임 명칭을 ‘강제퇴직 무효 투쟁위원회’라고 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반국가단체나 반체제 또는 시민운동단체 같은 곳에서 사용하는 ‘투쟁위원회’ 같은 명칭은 이들이 살아온 길과 걸맞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의견이 많았다. 모임의 회장으로는 서일성씨가 추대됐다.
지난한 행정적, 법적 투쟁이 시작됐다. 그해 4월 9일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에 직권면직 처분 취소 소청을 제기했다. 소청 제기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한 기자회견도 가졌다. 이후부터 국정원 측은 현직 직원들에게 국사모 회원 접촉 불가 지시를 내리는 등 국사모 무력화 공작에 나섰다. 국정원장 면담 요청도 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성사되지 않았다.
행정자치부의 소청 결정까지 기다릴 것 없이 행정소송으로 가자는 회원들의 요구가 거셌다. 30여 년간 다니던 직장을 상대로 소송을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소청심사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행정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1999년 6월 3일 서울행정법원에 ‘직권면직 처분 취소’ 소장을 제출했다. 피고는 국정원이었다. 국정원 창설 이래 집단행정소송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동료였던 국정원 전·현직 직원들은 서로 감시하고 방어하는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국사모 회원들에게는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
2·3급 승진 75명 중 호남 출신이 43명
어쩐 일인지 재판은 걸핏하면 연기됐다. 재판부는 골치 아픈 소송을 기피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국사모 회원들은 점점 지쳐갔다. 긴 재판 과정에서 한 회원은 간암 판정을 받았다. 울화를 이기지 못한 결과였다. 간암 판정 3개월 만에 그는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다른 회원은 전립선암 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으며 재판에 임해야 했다. 심지어 한 회원은 “한국이 싫어졌다”며 가족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버리기도 했다.
대다수 회원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다. 우울증, 당뇨병. 회원들이 모임을 가지면 종합병동을 방불케 했다. 특별한 수입이 없어 가정불화를 겪는 사람도 많았다. 집을 줄이고, 변두리로 이사를 가면서 버텨보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을 노린 듯 “국사모 회원 중 누구누구는 구제를 받는다더라” 하는 식의 ‘카더라’ 방송이 회원들을 괴롭혔다. 확인 결과 국사모 회원들의 분열을 노린 공작이었다. 서일성씨는 재판 와중에 세무조사를 받았다. 결과는 ‘세무조사를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였다. 게다가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서씨의 후배도 세무조사를 받았다. 그 후배가 받은 조사의 핵심은 세무조사가 아닌 서씨와의 관계였다고 한다.
국사모 회원들을 면직시키고 난 뒤 정기 인사에서 2, 3급 직위에 75명을 승진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가운데 43명이 호남 출신이었다. 왜 자신들을 해직시켰는지를 충분히 짐작게 하는 인사였다. 분노했다. 국사모 회원들은 다시 뭉쳤다.
재판이 길어지면서 국사모 회원들 간에는 패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지고 있었다. 2002년 헌법재판소에 ‘안기부 직원법 등에 관한 위헌법률 심판’을 청구했다. 거의 1년간의 심리 끝에 헌법재판소는 2003년 3월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국정원의 국사모 회원들에 대한 일방적인 면직이 잘못됐다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3월의 일이었다.
국사모 회원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만 행정소송 재판은 특별한 이유없이 연기되고 있었다. 그해 5월 28일, 국사모 회원들의 변론도 종결됐다. 서씨를 비롯한 회원 3명은 연령 정년이 지나 승소하더라도 국정원으로 복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8명은 계급 정년이 지난 상태였다.
행정법원의 판결과 눈물의 승소
2003년 8월 13일.
서울 행정법원 제11부는 국사모가 제기한 행정소송에 대해 이런 판결을 내렸다.
<피고가 1999년 3월 31일 원고들에 대하여 한 각 직권면직처분을 모두 취소한다.>
국사모 회원들의 승리였다. 재판 시작 4년3개월 만의 일이었다. 다소 장황할 수 있지만 53페이지에 달하는 판결문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재판부가 지적한 ‘내용면에서의 위법성’ 부문을 발췌한다.
<피고(국정원장)가 1998년 4월 1일자로 무보직 발령한 2, 3급 직원 148명 중 대부분이 영남 출신이고 그중 호남 출신은 4명에 불과하며, 그나마 호남 출신 직원 4명 중 2명은 얼마 뒤 보직을 부여받아 구제되었고, 또한 1998년 4월 1일 신편 인사와 1998년 12월 말경 정기 인사를 통하여 2, 3급 직위에 승진된 직원 75명 중 호남 출신이 43명으로 전체의 약 57.3%에 이르는 점에 비추어 보면 1998년 4월 1일 신편 인사, 1998년 12월 말 정기 인사 및 이 사건 처분 모두 호남 출신 직원들을 대거 발탁하기 위하여 영남 출신 직원들을 부당하게 도태시킨 보복적 지역 편중 인사였다.
1998년 12월 말 정기 인사를 통하여 2, 3급 직위에 무려 75명의 직원을 승진시키고, 3급 이하 직위에 2명의 직원을 신규 채용한 점은 구조조정이 목적이었다면 인원 감축과 비용 절감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처분 무렵 국가정보원의 예산은 전혀 감축된 바 없다.
행자부에 소청 심사를 제기한 원고들과 OOO 등 직권면직된 22명의 본적지는,
부산, 경남 - 11명
대구, 경북 - 6명
서울 - 3명
기타 - 2명이고
이 사실은 피고가 자인하고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점에 비추어 보면, 이 사건 처분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과 근거에 따르지 아니한 채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재량권을 일탈 또는 남용한 것으로서 위법하다.>
노무현의 국정원, 항소 포기
서일성씨는 승소 판결을 받은 후인 2003년 9월 초 정년퇴직했다. 정년이 안 된 국사모 회원 4명은 복직이 됐지만 정보학교 교육을 받은 후 보직 없이 재택근무 발령을 받았다. 그해 연말 서씨는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재판 승소로 33년 이상 근속 중 징계 없음이 인정됐기 때문이었다. 노무현(盧武鉉)의 국정원은 항소를 포기했다.
서씨는 행정소송 승소 7년6개월여가 지난 최근 한 권의 책을 준비하고 있다. 1999년 3월 직권면직 처분 후 승소하기까지 4년3개월간 벌어진 국정원 직원 21명의 투쟁기가 중심이 된 책이다. 책을 펴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에 대해 서씨는 “그때의 아픔을 가슴에 삭이고 삭인 후 나름 객관적인 입장에서 기록에 남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고 말했다. 지난 1월 8일 늦은 오후 서울 광화문 부근 한 음식점에서 서씨를 만났다.
인터뷰 장소로 그를 끌어내기는 했지만 서씨는 한참을 망설였다. 법정 소송까지 벌이는 불상사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자신이 속했던 조직에 누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30여 년을 재직하던 직장에서 소명 기회도 못 갖고 해직을 당했는데 그 이야기를 다시 쓰면서 소회가 남다를 것 같네요.
“그런 게 좀 많았죠. 왜냐하면 제가 30년 동안 그 자리에 올라갈 때까지 한 번도 무슨 조사를 받았다거나 비리로 인해 감찰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제일 울화통이 터지는 부분이 바로 그거죠. 이게 표현이 잘못됐을지는 모르지만 정말 청춘을 불사르고 오직 한 곳밖에 모르고 명령에만 충성하다가 어느 날 아침에 ‘너 집에 가라’ 하니… 이건 참. 정말 그때 울분이 많았습니다.”
해직 통보를 받은 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서울 근교에 있는 산을 다니는 일이었다고 한다. 부인은 해임 사실을 알았지만 자녀들은 한동안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서씨의 해임 사실이 알려졌을 때 다행히 큰딸은 대학 졸업반이라 주변의 어려운 상황을 견뎌낼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들은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 같다.
“저는 저 나름 삭이면 되지만 애들은 그게 아니잖아요. 해임 보름 정도 지나서 고등학교 다니는 애가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된 거예요. 성적이 상위그룹에 있던 애가 하위권으로 떨어지는데 미치겠는 거예요. 원하던 대학에도 못 가고 재수를 했지만 결국 국내에서는 대학을 못 갔죠.”
―부인이 제일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아내는 저를 위로해 주는 입장이었죠. 편안하게 생활하라고 위로를 많이 해줬어요.”
―해직 통보를 받았을 때 누구한테 제일 먼저 전화를 걸었습니까.
“아무한테도 안 하고 있다가 아내에게 ‘집에 간다’고 했죠. 그때 아내는 눈치를 챘던 것 같습니다.”
누가 해직시켰나
―누가, 왜, 어떤 의도로 21명을 동시에 해직시켰다고 봅니까.
“당시 야당이 50년 만에 집권을 했기 때문에 자기 패거리들을 어딘가는 갖다 놔야 할 것 아닙니까. 제 기억으로 DJ정부 들어오고 난 뒤에 특채 형태로 많이 들어왔거든요. 그렇게 보시면 될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보나요.
“그건 제가 직접은 모르지만 추리는 얼마든지 가능한 거죠. 그렇게 봐야죠.”
―해임 통지서에 대통령이 사인하지는 않았는데요.
“5급 이상 해임에는 대통령의 사인이 있어야 하는 게 맞죠. 그런데 당시 국정원장이 전결처리해 버렸죠. 우리가 재판에서 이기게 된 이유 중의 하나죠. 그런 해임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국정원으로서는 최초의 집단소송이었는데 재판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어제까지 동지였던 현직에 있는 직원들이나 간부들과 적이 돼야 한다는 점이었죠.”
―1심 재판을 4년3개월이나 끌었는데요.
“제가 알기로 국가를 상대로 한 재판에서 1심을 4년 몇 개월 끈 건 없을 겁니다.”
―당시 재판 과정에서 세무조사를 받은 후배는 지금도 만납니까.
“가끔 전화하죠. 많이 미안하죠. 지금도 너무 미안한 마음 갖고 있습니다.”
―국정원이 항고를 안 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국정원 간부 출신들이 많이 말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보기관이 전직 직원들 하고 계속 재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었죠.”
―재판 과정 중 국사모 와해를 노린 회유도 많았을 텐데요.
“21명 전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요. 저는 사실 그런 제의를 몇 번 받았습니다. 제가 안 한다고 했어요.”
―10·26 직후에도 대량 해고가 있었습니다. 그때하고 1999년 대량 해고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제 기억으로 10·26 때는 김재규 일파를 다 색출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해임되는 사람도 있을 거고요. 그때는 주로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엄청난 부분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겠죠. 하지만 1999년의 대량 해임은 소위 호남인사를 기용하기 위해서 영남인사를 대거 해임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르죠.”
―정보 전문가들이 대거 해고당했는데요.
“그건 참 안타깝죠. 제일 안타까운 게 저는 정보만 했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수사 쪽이 안타깝습니다. 수사팀들 정말 고생 많이 하거든요. 밤잠 자지 않고 고생하면서 수사했던 친구들이 상당히 많이 옷을 벗었어요. 그 사람들은 진정한 전문가들입니다. 특히 대공(對共)수사는 일반수사와 또 다르거든요. 그런 부분이 안타까워요.”
對共수사 베테랑들이 사라진 게 안타까워
―대공수사관 축소는 국정원 본연의 핵심적 역량을 떨어뜨리는 것과 다름 없는 일 아닙니까.
“그렇게 봐야겠죠. 사실 대공수사는 참 힘들거든요. 도둑놈 보고도 ‘도둑질 했지’ 하면 ‘도둑질 안 했다’고 하는데 하물며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을 잡으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해직자 중에서 대공수사 파트 쪽에서 일하던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전체는 다 모르겠고요. 수사팀 간부 중 저하고 함께 재판한 친구들이 서너 사람 있어요. 베테랑들이었죠.”
―정보기관에 오래 근무했으니까 정권별로 정보기관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건 언론에 있는 분들이 더 잘 알지 않나요. 과거 제가 초년병 시절 때 보면 정보가 종합이 돼서 청와대에 올라가게 되면 대통령께서 판단을 해서 맞는 사실은 바로 부처로 지시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그게 잘 안 되는 경우를 상당히 느낄 수 있었죠.”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시절엔 어땠습니까.
“그때는 안기부하고 보안사하고 이원화 안됐습니까. 특수한 정치적 격변을 겪은 후였기 때문에 그때는 보안사의 영향력이 더 크게 느껴졌죠.”
―정보기관으로서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가 10ㆍ26 후 제 기능을 다시 찾은 시기는 언제쯤이라고 봅니까.
“제가 보기엔 장세동 부장 시절이지 싶네요. 전두환 대통령 집권 후반기라고 볼 수 있죠.”
―김대중 정부 들어와서 북풍 사건 등으로 대북 공작라인이 와해됐는데요.
“제가 정확히 말씀드리기가 뭐한데 예를 하나 들어드릴게요. 맞는지는 모르는데 당시 DJ 때는 거의 간첩 발표를 안 했습니다. 그렇게 비춰보면 알 수 있는 거죠. 자기가 화해 협력이니 뭐니 해놓고 노벨 평화상 받은 사람이 그 라인을 그대로 살려서 뭐가 좋겠습니까.”
“선진국들이라고 도·감청 안 하나”
―정보기관이 정보수집을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도·감청인데, 지금은 거의 그런 기능이 마비되다시피 했습니다. 물론 국정원이 악용해 온 사례들이 많아서이긴 합니다만.
“그건 당연한 거죠. 선진국들이라고 해서 도·감청을 안 합니까. 다 하잖아요. 우리보다 더 좋은 기술로 하잖아요. 국익과 관계되는 정보 수집을 위해서 도·감청을 안 하는 나라는 드물 겁니다.”
―얻는 정보를 100이라고 가정할 때 도·감청을 통해서 얻는 것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건 제가 그쪽 파트에 근무를 안 해봐서 자신이 없는데 수치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직간접 경험상 상당히 많이 포함이 될 겁니다.”
―30년 정보맨으로서 국정원이 강화해야 할 부문은 어떤 부문이라고 봅니까.
“대공수사는 기본이고요. 프로페셔널한 대공 전문가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국가 전략 산업 등 산업 부문에도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기업기밀 유출 방지 등 산업과 관련된 분야에 국정원 자체 역량 강화는 물론이고 해외 경제 범죄 수사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유의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보맨으로 살아오면서 제일 자랑스러운 점은.
“대통령 표창받았을 때가 제일 자랑스럽죠. 내용을 밝히기는 곤란하지만 제가 국가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받은 표창이라 지금도 자랑스럽습니다.”
―이제는 국가를 위해서 한 좋은 일이 무엇인지 밝혀도 되는 것 아닙니까.
“….”
서일성씨는 끝내 그 일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3차 합격 후에야 청년은 자신이 외교부 공무원이 아닌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합격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생각지도 않던 분야의 공무원이었지만 중앙정보부 요원이라는 직업은 그에게 충분한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이듬해 3월 1일, 그는 중앙정보부 요원 교육기관에 입소했다. 중앙정보부 요원으로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가 근무하는 동안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 등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정보부 요원으로서 그는 자신이 세운 세 가지 원칙을 바꾸지 않았다. 그 첫째는 원칙주의적인 사고방식이었고 둘째는 업무의 정확성ㆍ안정성, 마지막 세 번째는 의리를 중시하자였다.
그런 원칙하에 일하며 초급중간간부가 됐다. 중앙정보부의 명칭이 국가정보원으로 바뀐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그는 경기 북부 지역의 한 도시에서 출장소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직급은 2급이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1년이 막 지난 1999년 3월 중순, 그는 한 통의 통보문을 받았다. 그달 초부터 국정원 내부에서는 TK(대구ㆍ경북) 출신 국정원 직원들을 중심으로 한 ‘살생부’가 나돌고 있었지만, 그는 ‘내가 맡은 일만 성실히 수행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개의치 않고 있었다. 물론 그 살생부에는 그의 이름도 있었다. 하지만 국정원 직원으로서 단 한 번도 징계를 받은 일이 없고 오히려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던 그였기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으레 있어온 뜬소문이라 여기며 지나쳤다.
하지만 그것은 그만의 순진한 생각이었다. 3월 중순 받은 통보문의 내용은 이랬다.
<-서일성 출장소장 귀하
귀하는 3월 31일자로 국정원 직원법 제21조 제3호(직제 또는 직원의 개폐나 예산의 감소 등에 의하여 폐직 또는 과원이 될 때) 규정에 의해 직권 면직 처분한다.>
살생부 소문이 사실로 돌아온 것이다. 30여 년 동안 청춘을 불살랐던 그에게 그가 속한 조직의 면직 처분은 너무나 간단했다. 30여 년을 근무하는 동안 단 한 번의 과오라도 있었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그에게 단 한 번의 소명 기회도 없이 일방적으로 해임을 통보한 것이다.
서일성. 만 스물여덟 나이에 들어와 만 쉰일곱이 된 사내는 책상 위에 놓인 면직 처분 통보문을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적은 월급에도 불평 없이 내조를 해 온 아내와 그때까지도 아버지의 직장이 정보기관이 아닌 다른 정부 부처로 알고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게다가 둘째는 당시 한참 예민한 시기인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어쩌랴. 그는 해임 통보를 받은 날짜의 하루 전인 3월 30일, 퇴임식은커녕 동료 후배들과 악수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책상서랍만 정리한 채 황망히 자리를 떴고, 결국 돌아가지 못했다.
해임 통보 21명 중 영남 출신이 1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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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 정권 시절 해직된 국가정보원 간부 출신자들의 모임인 ‘국가사랑모임’서일성 회장 등이 2000년 9월 24일 이운영씨 사건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면직통보를 받은 후인 1999년 3월 20일, 21명의 국정원 ‘퇴출자’들은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한 음식점에 모였다. 헌법에 규정된 공무원의 신분보장을 무시하고 공무원법에 보장된 법적절차도 거치지 않고, 심지어 징계위원회조차도 열지 않은 것은 정치 보복, 정치 학살이라며 흥분했다. 우선 해임 취소 및 복직을 위한 소청과 행정소송을 제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모임을 만들었다. 명칭은 ‘국사모’였다. ‘국가 사랑 모임’과 ‘국가안전기획부를 사랑하는 모임’이란 뜻이 내포된 명칭이었다. 모임 명칭을 ‘강제퇴직 무효 투쟁위원회’라고 하자는 주장도 있었지만, 반국가단체나 반체제 또는 시민운동단체 같은 곳에서 사용하는 ‘투쟁위원회’ 같은 명칭은 이들이 살아온 길과 걸맞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의견이 많았다. 모임의 회장으로는 서일성씨가 추대됐다.
지난한 행정적, 법적 투쟁이 시작됐다. 그해 4월 9일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에 직권면직 처분 취소 소청을 제기했다. 소청 제기를 하게 된 배경에 대한 기자회견도 가졌다. 이후부터 국정원 측은 현직 직원들에게 국사모 회원 접촉 불가 지시를 내리는 등 국사모 무력화 공작에 나섰다. 국정원장 면담 요청도 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성사되지 않았다.
행정자치부의 소청 결정까지 기다릴 것 없이 행정소송으로 가자는 회원들의 요구가 거셌다. 30여 년간 다니던 직장을 상대로 소송을 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소청심사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적어 보였다. 행정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1999년 6월 3일 서울행정법원에 ‘직권면직 처분 취소’ 소장을 제출했다. 피고는 국정원이었다. 국정원 창설 이래 집단행정소송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동료였던 국정원 전·현직 직원들은 서로 감시하고 방어하는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국사모 회원들에게는 가장 괴로운 일이었다.
2·3급 승진 75명 중 호남 출신이 43명
어쩐 일인지 재판은 걸핏하면 연기됐다. 재판부는 골치 아픈 소송을 기피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국사모 회원들은 점점 지쳐갔다. 긴 재판 과정에서 한 회원은 간암 판정을 받았다. 울화를 이기지 못한 결과였다. 간암 판정 3개월 만에 그는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다른 회원은 전립선암 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를 받으며 재판에 임해야 했다. 심지어 한 회원은 “한국이 싫어졌다”며 가족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버리기도 했다.
대다수 회원의 건강이 나빠지고 있었다. 우울증, 당뇨병. 회원들이 모임을 가지면 종합병동을 방불케 했다. 특별한 수입이 없어 가정불화를 겪는 사람도 많았다. 집을 줄이고, 변두리로 이사를 가면서 버텨보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을 노린 듯 “국사모 회원 중 누구누구는 구제를 받는다더라” 하는 식의 ‘카더라’ 방송이 회원들을 괴롭혔다. 확인 결과 국사모 회원들의 분열을 노린 공작이었다. 서일성씨는 재판 와중에 세무조사를 받았다. 결과는 ‘세무조사를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였다. 게다가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서씨의 후배도 세무조사를 받았다. 그 후배가 받은 조사의 핵심은 세무조사가 아닌 서씨와의 관계였다고 한다.
국사모 회원들을 면직시키고 난 뒤 정기 인사에서 2, 3급 직위에 75명을 승진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가운데 43명이 호남 출신이었다. 왜 자신들을 해직시켰는지를 충분히 짐작게 하는 인사였다. 분노했다. 국사모 회원들은 다시 뭉쳤다.
재판이 길어지면서 국사모 회원들 간에는 패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해지고 있었다. 2002년 헌법재판소에 ‘안기부 직원법 등에 관한 위헌법률 심판’을 청구했다. 거의 1년간의 심리 끝에 헌법재판소는 2003년 3월 ‘헌법 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국정원의 국사모 회원들에 대한 일방적인 면직이 잘못됐다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3월의 일이었다.
국사모 회원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만 행정소송 재판은 특별한 이유없이 연기되고 있었다. 그해 5월 28일, 국사모 회원들의 변론도 종결됐다. 서씨를 비롯한 회원 3명은 연령 정년이 지나 승소하더라도 국정원으로 복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8명은 계급 정년이 지난 상태였다.
행정법원의 판결과 눈물의 승소
2003년 8월 13일.
서울 행정법원 제11부는 국사모가 제기한 행정소송에 대해 이런 판결을 내렸다.
<피고가 1999년 3월 31일 원고들에 대하여 한 각 직권면직처분을 모두 취소한다.>
국사모 회원들의 승리였다. 재판 시작 4년3개월 만의 일이었다. 다소 장황할 수 있지만 53페이지에 달하는 판결문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재판부가 지적한 ‘내용면에서의 위법성’ 부문을 발췌한다.
<피고(국정원장)가 1998년 4월 1일자로 무보직 발령한 2, 3급 직원 148명 중 대부분이 영남 출신이고 그중 호남 출신은 4명에 불과하며, 그나마 호남 출신 직원 4명 중 2명은 얼마 뒤 보직을 부여받아 구제되었고, 또한 1998년 4월 1일 신편 인사와 1998년 12월 말경 정기 인사를 통하여 2, 3급 직위에 승진된 직원 75명 중 호남 출신이 43명으로 전체의 약 57.3%에 이르는 점에 비추어 보면 1998년 4월 1일 신편 인사, 1998년 12월 말 정기 인사 및 이 사건 처분 모두 호남 출신 직원들을 대거 발탁하기 위하여 영남 출신 직원들을 부당하게 도태시킨 보복적 지역 편중 인사였다.
1998년 12월 말 정기 인사를 통하여 2, 3급 직위에 무려 75명의 직원을 승진시키고, 3급 이하 직위에 2명의 직원을 신규 채용한 점은 구조조정이 목적이었다면 인원 감축과 비용 절감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처분 무렵 국가정보원의 예산은 전혀 감축된 바 없다.
행자부에 소청 심사를 제기한 원고들과 OOO 등 직권면직된 22명의 본적지는,
부산, 경남 - 11명
대구, 경북 - 6명
서울 - 3명
기타 - 2명이고
이 사실은 피고가 자인하고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점에 비추어 보면, 이 사건 처분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과 근거에 따르지 아니한 채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재량권을 일탈 또는 남용한 것으로서 위법하다.>
노무현의 국정원, 항소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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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직 시절의 서일성씨.(왼쪽에서 두 번째) |
서씨는 행정소송 승소 7년6개월여가 지난 최근 한 권의 책을 준비하고 있다. 1999년 3월 직권면직 처분 후 승소하기까지 4년3개월간 벌어진 국정원 직원 21명의 투쟁기가 중심이 된 책이다. 책을 펴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에 대해 서씨는 “그때의 아픔을 가슴에 삭이고 삭인 후 나름 객관적인 입장에서 기록에 남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고 말했다. 지난 1월 8일 늦은 오후 서울 광화문 부근 한 음식점에서 서씨를 만났다.
인터뷰 장소로 그를 끌어내기는 했지만 서씨는 한참을 망설였다. 법정 소송까지 벌이는 불상사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자신이 속했던 조직에 누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그는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30여 년을 재직하던 직장에서 소명 기회도 못 갖고 해직을 당했는데 그 이야기를 다시 쓰면서 소회가 남다를 것 같네요.
“그런 게 좀 많았죠. 왜냐하면 제가 30년 동안 그 자리에 올라갈 때까지 한 번도 무슨 조사를 받았다거나 비리로 인해 감찰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제일 울화통이 터지는 부분이 바로 그거죠. 이게 표현이 잘못됐을지는 모르지만 정말 청춘을 불사르고 오직 한 곳밖에 모르고 명령에만 충성하다가 어느 날 아침에 ‘너 집에 가라’ 하니… 이건 참. 정말 그때 울분이 많았습니다.”
해직 통보를 받은 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서울 근교에 있는 산을 다니는 일이었다고 한다. 부인은 해임 사실을 알았지만 자녀들은 한동안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서씨의 해임 사실이 알려졌을 때 다행히 큰딸은 대학 졸업반이라 주변의 어려운 상황을 견뎌낼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아들은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 같다.
“저는 저 나름 삭이면 되지만 애들은 그게 아니잖아요. 해임 보름 정도 지나서 고등학교 다니는 애가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된 거예요. 성적이 상위그룹에 있던 애가 하위권으로 떨어지는데 미치겠는 거예요. 원하던 대학에도 못 가고 재수를 했지만 결국 국내에서는 대학을 못 갔죠.”
―부인이 제일 힘들지 않았겠습니까.
“물론이죠. 하지만 아내는 저를 위로해 주는 입장이었죠. 편안하게 생활하라고 위로를 많이 해줬어요.”
―해직 통보를 받았을 때 누구한테 제일 먼저 전화를 걸었습니까.
“아무한테도 안 하고 있다가 아내에게 ‘집에 간다’고 했죠. 그때 아내는 눈치를 챘던 것 같습니다.”
누가 해직시켰나
―누가, 왜, 어떤 의도로 21명을 동시에 해직시켰다고 봅니까.
“당시 야당이 50년 만에 집권을 했기 때문에 자기 패거리들을 어딘가는 갖다 놔야 할 것 아닙니까. 제 기억으로 DJ정부 들어오고 난 뒤에 특채 형태로 많이 들어왔거든요. 그렇게 보시면 될 겁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고 보나요.
“그건 제가 직접은 모르지만 추리는 얼마든지 가능한 거죠. 그렇게 봐야죠.”
―해임 통지서에 대통령이 사인하지는 않았는데요.
“5급 이상 해임에는 대통령의 사인이 있어야 하는 게 맞죠. 그런데 당시 국정원장이 전결처리해 버렸죠. 우리가 재판에서 이기게 된 이유 중의 하나죠. 그런 해임 절차에도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국정원으로서는 최초의 집단소송이었는데 재판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어제까지 동지였던 현직에 있는 직원들이나 간부들과 적이 돼야 한다는 점이었죠.”
―1심 재판을 4년3개월이나 끌었는데요.
“제가 알기로 국가를 상대로 한 재판에서 1심을 4년 몇 개월 끈 건 없을 겁니다.”
―당시 재판 과정에서 세무조사를 받은 후배는 지금도 만납니까.
“가끔 전화하죠. 많이 미안하죠. 지금도 너무 미안한 마음 갖고 있습니다.”
―국정원이 항고를 안 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국정원 간부 출신들이 많이 말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보기관이 전직 직원들 하고 계속 재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었죠.”
―재판 과정 중 국사모 와해를 노린 회유도 많았을 텐데요.
“21명 전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요. 저는 사실 그런 제의를 몇 번 받았습니다. 제가 안 한다고 했어요.”
―10·26 직후에도 대량 해고가 있었습니다. 그때하고 1999년 대량 해고와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제 기억으로 10·26 때는 김재규 일파를 다 색출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해임되는 사람도 있을 거고요. 그때는 주로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엄청난 부분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겠죠. 하지만 1999년의 대량 해임은 소위 호남인사를 기용하기 위해서 영남인사를 대거 해임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르죠.”
―정보 전문가들이 대거 해고당했는데요.
“그건 참 안타깝죠. 제일 안타까운 게 저는 정보만 했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수사 쪽이 안타깝습니다. 수사팀들 정말 고생 많이 하거든요. 밤잠 자지 않고 고생하면서 수사했던 친구들이 상당히 많이 옷을 벗었어요. 그 사람들은 진정한 전문가들입니다. 특히 대공(對共)수사는 일반수사와 또 다르거든요. 그런 부분이 안타까워요.”
對共수사 베테랑들이 사라진 게 안타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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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사모를 아십니까》. |
“그렇게 봐야겠죠. 사실 대공수사는 참 힘들거든요. 도둑놈 보고도 ‘도둑질 했지’ 하면 ‘도둑질 안 했다’고 하는데 하물며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을 잡으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해직자 중에서 대공수사 파트 쪽에서 일하던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전체는 다 모르겠고요. 수사팀 간부 중 저하고 함께 재판한 친구들이 서너 사람 있어요. 베테랑들이었죠.”
―정보기관에 오래 근무했으니까 정권별로 정보기관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건 언론에 있는 분들이 더 잘 알지 않나요. 과거 제가 초년병 시절 때 보면 정보가 종합이 돼서 청와대에 올라가게 되면 대통령께서 판단을 해서 맞는 사실은 바로 부처로 지시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그게 잘 안 되는 경우를 상당히 느낄 수 있었죠.”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시절엔 어땠습니까.
“그때는 안기부하고 보안사하고 이원화 안됐습니까. 특수한 정치적 격변을 겪은 후였기 때문에 그때는 보안사의 영향력이 더 크게 느껴졌죠.”
―정보기관으로서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가 10ㆍ26 후 제 기능을 다시 찾은 시기는 언제쯤이라고 봅니까.
“제가 보기엔 장세동 부장 시절이지 싶네요. 전두환 대통령 집권 후반기라고 볼 수 있죠.”
―김대중 정부 들어와서 북풍 사건 등으로 대북 공작라인이 와해됐는데요.
“제가 정확히 말씀드리기가 뭐한데 예를 하나 들어드릴게요. 맞는지는 모르는데 당시 DJ 때는 거의 간첩 발표를 안 했습니다. 그렇게 비춰보면 알 수 있는 거죠. 자기가 화해 협력이니 뭐니 해놓고 노벨 평화상 받은 사람이 그 라인을 그대로 살려서 뭐가 좋겠습니까.”
“선진국들이라고 도·감청 안 하나”
―정보기관이 정보수집을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도·감청인데, 지금은 거의 그런 기능이 마비되다시피 했습니다. 물론 국정원이 악용해 온 사례들이 많아서이긴 합니다만.
“그건 당연한 거죠. 선진국들이라고 해서 도·감청을 안 합니까. 다 하잖아요. 우리보다 더 좋은 기술로 하잖아요. 국익과 관계되는 정보 수집을 위해서 도·감청을 안 하는 나라는 드물 겁니다.”
―얻는 정보를 100이라고 가정할 때 도·감청을 통해서 얻는 것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건 제가 그쪽 파트에 근무를 안 해봐서 자신이 없는데 수치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직간접 경험상 상당히 많이 포함이 될 겁니다.”
―30년 정보맨으로서 국정원이 강화해야 할 부문은 어떤 부문이라고 봅니까.
“대공수사는 기본이고요. 프로페셔널한 대공 전문가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국가 전략 산업 등 산업 부문에도 전문가가 필요합니다. 기업기밀 유출 방지 등 산업과 관련된 분야에 국정원 자체 역량 강화는 물론이고 해외 경제 범죄 수사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 유의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정보맨으로 살아오면서 제일 자랑스러운 점은.
“대통령 표창받았을 때가 제일 자랑스럽죠. 내용을 밝히기는 곤란하지만 제가 국가를 위해서 좋은 일을 하고 받은 표창이라 지금도 자랑스럽습니다.”
―이제는 국가를 위해서 한 좋은 일이 무엇인지 밝혀도 되는 것 아닙니까.
“….”
서일성씨는 끝내 그 일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