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세대의 증언] 83세 최고령 현역 대학CEO 金熺洙 건양대 총장 : 월간조선

그의 인생은 세상이라는 ‘지옥’에서 ‘희망’을 건져내는 삶이다. 눈 아픈 자에게 밝은 빛을 주고, 배움에 목마른 젊은이에게 삶의 지혜를 전한다. 김희수(金熺洙) 건양대 총장의 얘기다.

그는 1962년 서울 영등포에서 개원(開院)한 ‘김안과병원’을 동양 최대 안과 전문병원으로 만들었다. 그의 손을 거쳐간 환자 수는 수백만 명이 넘는다. 1991년부터 고향인 충남 논산에 건양대를 설립해 수만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2000년에는 대전에 건양대병원을 세워 대전ㆍ충청권의 최고 병원으로 키웠다.

2001년부터 만 10년째 총장으로 재직 중인 그는 대한민국 최고령 현역 대학총장이다. 83세 노구(老軀)지만 그 누구보다 힘이 넘친다. 의사 60년ㆍ교육자 20년의 삶을 들여다봤다.

“하루 1만5000보 걷는다”

건양대 총장실에서 만난 ‘할아버지’ 김 총장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넥타이가 눈에 띕니다.

그의 대답은 짧고 굵었다.

“젊어 보이지 않나요? 환자나 학생을 고객처럼 대한다는 뜻에서 이걸 맵니다.”

―대학교 직원이 입고 있는 녹색 유니폼도 눈에 띄는군요.

“녹색은 눈의 피로를 덜어주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을 좋게 만듭니다.”

건양대는 유니폼을 착용하는 국내 최초의 대학이다. 서울 김안과병원에 근무하는 일반 직원들도 녹색 유니폼을 입는다. 서비스 마인드를 높이기 위한 김 총장의 뜻이 담겨 있다.

―국내 대학총장 중에서 연세가 가장 많은데….

“나를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실감할 겁니다. 나, 아직 젊어요. MRI나 CT를 찍어보면 의사들이 깜짝 놀래요. 신체나이는 40대 후반입니다. 최근 알게 된 일본의 쇼지 사부로 박사는 104세인데도 활발하게 활동해요.”

―특별한 비결이 있나요.

“많이 걸어요. 하루에 1만5000보 이상을 걷지요. 밥 적게 먹고, 담배 안 피우고, 술 안 마시면 건강해져요. 내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과욕을 부리지 않고, 단순하게 사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겠지요.”

―열심히 사는 힘의 원천은 뭔가요.

“일에서 느끼는 즐거움이죠. 내가 아직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겐 큰 행복입니다.”

―건양대 총장이면서 서울 김안과병원 이사장으로 있습니다. 의사와 교육자 중에서 어느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까.

“어느 자리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어요. 둘 다 내겐 생명과 같습니다. 의료와 교육은 ‘광명(光明)’이라는 점에서 같아요. 앞을 보지 못하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학생들에게 인생 노하우를 가르치는 것은 빛을 전하는 일이지요.”

[김희수 총장의 건강비법]

소식ㆍ금연ㆍ절주ㆍ걷기의 생활화

김희수 총장의 건강비법은 소식(小食), 금연(禁煙), 절주(節酒), 1일 1만5000보 걷기, 긍정적인 사고, 규칙적인 생활로 요약된다. 그는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스트레칭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4시에는 집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건양대병원까지 걸어서 간다. 병원 곳곳을 둘러본 후 당직 의사와 간호사들을 격려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신문을 보고 차 한잔을 마신다. 30분가량 눈을 붙인 후 6시30분경 일어나 아침식사를 ‘조금만’ 먹는다. 7시30분 병원으로 출근해 병원 업무를 마친 뒤 오전 10시쯤 건양대로 이동한다. 업무는 오후 4~5시 이전에 끝낸다. 중요한 식사 약속은 조찬이나 오찬으로 한다. 저녁식사는 집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루 일과를 마무리한 후 밤 9시에 잠자리에 든다.

“시체 놓고 도시락 먹는 일 허다”

김희수 총장은 1928년 충남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에서 태어났다. 양촌면은 광산 김씨 10대조가 350년 전부터 살아온 곳이다. 김 총장의 선친(先親) 김영철(金永喆)씨는 가난한 농군이었지만 조선시대 때 5명의 정승과 8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의 자손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일제 치하에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큰형님이 의사였어요. 평양의대의 전신(前身)인 평양 의학강습소를 나왔지요. 형님은 고향에 내려와 공의(公醫)로 일했는데 평판이 아주 좋았어요. 초등학교 때 형님 댁에서 살면서 자연스럽게 의사의 길을 택하게 됐습니다. 큰형님은 한밤중에도 응급환자가 있으면 자전거를 타고 진료하러 가곤 했어요.”

―광복 이듬해 세브란스 의대에 입학했는데 당시 대학생활은 어땠습니까.

“서울역 앞에 의과대학 캠퍼스가 있었어요. 광장에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집회가 벌어졌죠. 하루는 좌익단체가, 그 다음날은 우익단체가 나섰지요.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습니다. 나라에 대한 걱정이 많았지만 의학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었어요. 수업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의사가 될 수 없었죠. 광복 직후라 교육 환경도 아주 안 좋았어요. 교재도 많지 않았고, 실습실도 턱없이 부족했지요. 교실도 모자랐어요. 가건물로 된 2층을 2ㆍ3학년이 사용하고, 1학년은 서울역 앞 남대문교회를, 4학년은 임상강의실을 사용했습니다. 1학년 때는 해부학, 생리학 등 기초과목이 많았는데 포르말린에 보존했던 사체 5~6구를 내놓고 해부학 실습을 하다가 그 방에서 도시락을 먹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6ㆍ25전쟁은 어떻게 맞았습니까.

“1950년 6월 중순 졸업식을 마치고 고향에 잠시 내려와 있었죠. 7월 1일부터 용산 철도병원에서 근무할 예정이었거든요. 그사이에 전쟁이 터진 겁니다. 라디오를 켰더니 인민군이 38선을 넘어오고 있다고 해요. 그런데 얼마 후 서울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전쟁이 그렇게 오래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인민군은 어느새 대전까지 내려왔다. 우왕좌왕하는 사이 인민군은 김 총장 동네까지 들이닥쳤다. 양촌면에 인민위원회가 설치되고 곧바로 우익 인사들이 잡혀갔다. 그중에는 김 총장의 부친도 포함됐다. 평소 덕을 베풀었던 아버지는 동네 사람의 도움으로 풀려났다고 한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눈빛

김희수 총장은 의료 선진화와 교육계 발전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의대 졸업생 김희수는 1950년 10월 부상당한 군인과 피란민 치료를 위해 전주구호병원에 배치됐다. 그 무렵 서울에 있던 작은 형님 댁이 폭격을 당해 일가족이 몰사(沒死)하는 비보(悲報)를 듣게 된다.

“대학 시절 작은 형님 댁에서 공부했어요. 형수님이 차려주신 밥을 먹고 학교를 다녔는데 전쟁으로 작은 형님 가족 모두를 잃었으니….”

김희수는 전쟁이 난 지 1년 뒤 대전구호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환자 중에는 포로로 잡힌 인민군도 있었다고 한다.

“전쟁 초기 병원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어요. 내과, 외과 구분없이 수술했죠. 부상당한 다리, 썩어가는 손은 그냥 잘라버렸죠. 그 당시로는 그게 최선책이었어요.”

―치료받던 군인이 죽었을 때의 느낌은 어떻던가요.

“죽어가는 사람들의 눈빛, 그 사람들의 눈빛을 지금도 기억해요. 너무 무서워요. 국군이든 인민군이든 죽어가는 모습은 똑같았어요. 내가 안과(眼科)를 전공으로 택한 것도 그 사람들의 눈빛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눈을 살리는 의사가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전국에 있던 구호병원은 지역보건소가 됐다. 수백 개의 보건진료소도 추가로 설치됐다. 의사 김희수는 대전시보건소 초대 소장으로 취임한다. 보건소에서 미국식 예방의학을 처음 접한 그는 1956년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김 총장은 뉴욕 세인트 프랜시스 병원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했다. 변사체 부검부터 다시 공부했다. 밤을 꼬박 새는 일이 잦았지만 병원 측은 봐주는 일이 없었다. 수술실에서 졸다가 심한 질책을 받기도 했다.

유학생 김희수는 1년 후 시카고에 있는 안ㆍ이비인후과병원으로 옮겨 안과 공부에 전념했다. 발달된 의료기술에 푹 빠진 그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의료지식을 습득해 갔다.

“미국의 첨단 장비와 시설을 보고 놀라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당시 우리나라 안과 의사는 진료할 때 확대경(돋보기)을 이용했는데 미국 의사들은 생체현미경인 세극등(細隙燈) 현미경을 사용했어요. 백내장 수술에도 우리는 봉합기술이 없어 2주를 기다려 상처가 저절로 아물기를 기다렸으나 미국 의사들은 바늘과 봉합사로 두께 1mm의 각막을 봉합해 환부가 빨리 아물게 하는 치료법을 썼어요.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죠. 미국과 한국의 차이가 너무 커 하느님이 계신다면 정말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김희수 총장은 3년3개월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59년 귀국, 그해 11월 인천기독병원 안과 과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그곳에는 대학 동창이 많았고 미국에서 갓 귀국한 사람도 있어 나름 즐거운 의사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1961년 5ㆍ16이 일어났다. 얼마 있지 않아 예비역 군의관 소집령이 내려져 김희수는 부산 거제동에 위치한 제3육군병원 안과 과장으로 배치돼 두 번째 군생활을 했다.

[김안과병원은]

專門醫 44명 포진… 연간 외래환자 수 42만명

1962년 ‘김희수 안과의원’으로 출발한 김안과병원은 최첨단 장비와 선진 의료지식을 바탕으로 안과 전문병원으로 성장했다. 1986년 17개의 안과전문 수술실과 112 병상을 갖춘 동양 최대 안과 전문병원으로 거듭났다. 2003년에는 안과 기초의학을 연구하는 ‘명곡(明谷)안연구소’를 설립했다. 2008년에는 세계 최초로 망막병원을 개원했다.

현재 안과 전문의 38명을 포함해 마취과ㆍ진단방사선과ㆍ임상병리과 등 44명의 전문의가 진료에 참여하고 있다. 이 병원을 찾는 환자는 연간 42만명이 넘는다. 안과 수술 건수도 연간 2만3000건(백내장 수술 7000여 건 포함)에 달한다.

김안과병원은 안과 질환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치료하는 ‘전문센터’를 조기에 도입했다. 망막병원을 비롯해 사시센터, 안성형센터, 각막센터, 백내장센터, 라식센터 등을 갖추고 있다. 이 병원은 환자 중심 병원으로, ‘365일 연중무휴ㆍ24시간 진료’를 실시하고 있다. 매달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해피아이 눈건강강좌’와 노인대학 강좌, 초등학생 안과검진, 해외 의료봉사, 개발도상국의 안과의사 연수, 어려운 이웃들에 대한 무료 개안(開眼)수술 등을 해오고 있다.

하루 진료환자 수 3600명

대학 축제기간에 학생들과 함께하는 김희수 총장.

김희수 총장은 1962년 전역(轉役)과 동시에 서울 영등포에 ‘김희수 안과의원’을 열었다. 부산대 의대 교수 자리가 났지만 환자 치료에 관심이 많아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서울 종로에는 공안과를 비롯해 개업의(開業醫)들이 대부분 몰려 있었어요. 장소를 물색하던 중 영등포에 공장이 많다는 아는 분의 얘기를 듣고 그곳으로 결정했지요. 공장이 많아 중금속과 쇳가루에 노출된 근로자가 많았고 당연히 안과 환자도 많을 수밖에 없었죠.”

당시 영등포구는 행정구역상 지금의 서초구부터 강서구 일대를 포함했다. 서울 인구 100만명 중 약 30만명이 거주했다. 영등포 로터리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에 공장이 들어서 있었고, 목동을 비롯한 강서구 쪽은 온통 논밭이었다. 비만 오면 진흙탕이 돼 ‘진등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주거 환경이 열악했다.

김희수 총장은 영등포 로터리에 있는 2층짜리 건물을 빌렸다. 개업 첫날 15명의 환자를 진료했는데 처치 주사와 약을 조제해 주고 2~3원을 받았다고 한다. 미국 유학 때 가져온 진료 장비와 미국에서 배운 최신식 의료 기술은 최상의 홍보 수단이었다. 김안과는 개업한 지 8년 만에 전국 최대 규모의 안과 전문병원이 됐다. 월급제 의사와 직원이 20여 명으로 늘었고 이화여대 의대는 안과 레지던트를 보냈다.

1977년부터 실시된 의료보험ㆍ의료보호제도는 ‘김안과병원’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대부분의 의사가 의료보험제도를 반대했어요. 정부는 희망하는 병원만 의료보험 환자를 받도록 했지요. 나는 미국에서 의료보험제도를 경험해 봤기 때문에 거부감이 전혀 없었어요. 의료수가가 낮아 모든 병원이 기피하는 산업재해 지정병원도 자진해서 받아들였습니다.”

김안과병원이 의료보험 적용 병원으로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환자가 몰려들었다. 구로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은 고향에 있는 부모님까지 모시고 와 치료를 받게 하곤 했다. 돈이 없어 진료를 받지 못했던 환자들이 의료보험ㆍ의료보호제도의 실시로 수술을 받게 되자 줄을 이어 병원을 찾아온 것이다.

김희수 총장은 늘어나는 환자를 감당할 수 없어 병원을 새로 짓기로 했다. 1986년 8월 김 총장은 영등포 청과물시장 초입에 지하 3층, 지상 8층, 연건평 1만3000㎡(3000평) 규모의 병원을 완공했다. 이때부터 김안과병원은 동양 최대 안과 전문병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환자 수는 계속 늘었다. 1987년 여름 하루 외래환자 수가 3600명을 넘고 있었다. 김 총장은 1994년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의 별관을 추가로 세웠다.

김희수 총장은 쉬는 날 없이 진료했다. 설날과 추석 때도 환자를 돌봤다. 병원은 나날이 번창했다. 그날 진료가 끝날 때면 은행 직원이 병원에 직접 와 현금을 가져갈 정도였다. 의사 김희수는 직종별 최고 납세자로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김안과병원을 운영하면서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환자가 몰리다 보니 다른 병원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일이 벌어졌어요. 심지어 거짓으로 환자를 보내 우리 병원의 진료 수준을 폄하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똑같이 대응하면 나도 같은 ‘놈’이 되기에 조용히 넘어갔지요. 나는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니라 환자를 치료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요.”

―기억나는 환자가 있습니까.

“1980년대 초반의 일입니다. 하루는 환자가 자기 할아버지를 모시고 왔는데 병원 밖에서 심하게 다투고 있는 거예요. 할아버지는 ‘수술 안 한다’고 하고, 손자는 ‘하시라’고 하는 겁니다. 가만히 보니까 돈 때문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손자가 공장에서 어렵게 일해 번 돈을 쓸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나섰지요. 할아버지에게 ‘무료로 해드릴 테니 수술을 받으시라’고 권했어요. 그랬더니 대뜸 할아버지가 ‘당신이 나와 무슨 관계인데 공짜로 해주느냐’며 거절하더군요. 할 수 없이 돈을 받되 무료에 가깝게 해드렸지요. 그 손자의 효성이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당시 구로공단에는 여성 근로자들도 많았는데요.

“시골에서 온 처자들이 참으로 많았지요. ‘여공(女工)’으로 불린 그분들은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주춧돌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들 중에는 사시(斜視) 환자가 많았어요. 한쪽 눈을 머리로 가리고 다니는 여성 대부분이 사시 환자였어요. 요즘은 어릴 때 조기치료를 해 환자가 거의 없지만, 그때는 어린 나이에 치료받을 형편이 못 됐지요.

건양대학교 전경.

“요즘 의사들요? 골프 선수죠”

그 무렵 나는 사시 환자들을 많이 수술했어요. 많은 여공이 ‘고맙다’며 인사하러 오곤 했습니다. 평소 한쪽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활짝 걷어올리고 화장을 말끔히 한 얼굴을 볼 때 의사로서 정말 뿌듯했죠.”

영등포라는 지역적 특색 탓에 김안과병원을 찾는 환자들은 공장 근로자와 영세상인, 서민들이 많았다. 김희수 총장은 “진료비로 시장에서 배추 팔고, 무 팔아 번 돈을 꼬깃꼬깃 내놓을 때 ‘이 돈을 꼭 받아야 하나’는 생각으로 괴로웠다”고 했다.

김안과병원이 유명해지면서 여의도 정치인들도 치료를 받으러 왔다고 한다.

“김대중(金大中) 전 대통령과 김종필(金鍾泌) 전 자민련 총재도 우리 병원을 찾았지요. 장관들도 더러 있었고요. 정치인이 드나들면서 내게 국회의원 출마를 권하기도 했어요. 정치를 하려면 거짓말을 잘해야 하는데 내가 그걸 못해요. 정치는 성격에 안 맞아 매번 거절했습니다.”

―안과학적으로 볼 때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까.

“한국인과 일본인, 중국인의 눈은 비슷합니다. 큰 차이가 없어요. 물론 동양인과 서양 사람은 색깔부터 다르죠.”

―현재 국내 안과 의료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임상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인 미국과 비슷해요. 기초 연구 분야에 대한 투자는 더 필요해요. 의술은 의학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전이 동반돼야 해요. 각막이나 수정체를 꿰맬 수 있는 실과 바늘, 정교한 주삿바늘도 더 개선돼야죠. 현미경 같은 첨단 진료장비도 발전돼야 해요.”

―김안과병원이 한국 의료계에 어떤 기여를 했다고 봅니까.

“안과 분야에 국한할 때 대단한 성과를 이뤘다고 봐요. 의료보험을 처음 도입한 것이나 환자 중심의 진료를 했다는 점 그리고 망막ㆍ사시ㆍ녹내장ㆍ안성형 등 안과 진료를 전문화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지요. 내가 대학병원보다 먼저 전문센터를 만들 때 대학교수들은 개인병원이 그런 것을 한다고 비웃었어요.”

김희수 총장은 “요즘 의사들이 공부를 안 한다”고 했다. 의사는 진료를 그만두는 순간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의사들요? 골프 선수죠. 나 같으면 그 시간에 공부할 겁니다. 필요 없는 수술을 하는 의사도 많아요. 의사는 환자의 병을 봐야지 돈을 보면 안 돼요. 환자를 차별해서도 안 돼요. 국회의원이니까 잘 봐주고 거지니까 대충 진료하면 나중에 큰일 나요. 병원 문턱을 들어서는 순간 모든 환자는 평등합니다.”

[건양대병원은]

국내 최초 4세대 로봇 나이프 도입… 중부권 대표 병원으로 성장

건양대는 1995년 의과대학을 신설해 2001년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학교 측의 집중 지원을 받는 의대생들은 매년 실시되는 의사고시에서 전원 합격한다. 2009년도에는 의사고시 차석 합격자, 2010년도에는 수석 합격자를 냈다. 의과대학 내에는 안경광학과, 작업치료학과, 치위생학과, 물리치료학과도 개설돼 있다.

2000년 개원한 건양대병원은 개원 초부터 중부권 최초로 임상병리 자동화시스템, 처방 전산화 프로그램 등을 도입해 환자들이 편리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환자에 대한 친절한 서비스로 최근 외래 환자 수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건양대병원은 2007년 4월 최첨단 방사선 암치료기인 ‘4세대 로봇 나이프(robot knife)’를 국내 최초로 도입했다. 현재까지 간암, 폐암, 췌장암 등 1000여 명의 암환자가 이 장비를 통해 시술을 받았다. 건양대는 심혈관센터를 비롯해 소화기센터, 뇌졸중센터, 당뇨ㆍ갑상선센터, 유방암센터 등 전문분야 치료를 위한 특성화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2011년 9월에는 최첨단 시설의 암센터가 완공된다.

심혈관센터장을 맡고 있는 배장호 교수는 건양대병원이 자랑하는 명의(名醫)다. 그는 심근경색 치료를 위한 관상동맥 조영술 1만8000회, 관상동맥 확장술 3500여 회의 시술 경험을 갖고 있다. 유방암센터의 윤대성 교수 역시 매달 40여 명이 넘는 유방암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수술 횟수도 연간 100회가 넘는다.

생활기록부 보면 사람 됨됨이 알 수 있어

서울 김안과병원은 2008년 국내 최초로 망막병원을 설립했다.

김희수 총장은 김안과병원이 급성장하면서 병원에서 얻은 수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을 고민했다. 1978년 때마침 고향 사람들이 “폐교 위기에 처해 있는 학교를 인수해 달라”는 부탁을 해와 고심 끝에 결단을 내렸다. 그는 1980년 학교법인 건양학원(建陽學園)을 출범하고 건양중ㆍ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건양(建陽)’이라는 이름은 김 총장의 공주중학교 은사인 동양철학자 민태식(閔泰植) 선생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건양’은 ‘맑고 밝은 빛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밝은 미래를 일으킬 인재를 많이 양성하라”는 것이 선생님의 당부였다는 것이다.

―건양대학교는 환갑이 넘은 1991년에 세웠는데 힘들지 않았습니까.

“중ㆍ고등학교를 운영하며 자신감을 얻었어요. 육영사업을 할 바에는 대학까지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내 생각을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했더니 ‘서울이나 수도권에 대학이 많은데 논산 시골에 대학을 세워서 뭐하겠느냐’며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어요. 대학생들이 데모도 많이 했지요. 그래도 나는 밀어붙였습니다.”

김희수 총장은 “당시 교수를 선발할 때 돈으로 교수 자리를 사려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교직원을 채용할 때 중ㆍ고교 생활기록부와 성적표를 반드시 본다고 한다. 사람의 됨됨이는 중ㆍ고등학교 때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김 총장은 면접을 보러 온 교수ㆍ교직원 지원자들에게 제주도 왕복 항공기 요금보다 더 많은 여비를 줘왔다. 건양대는 이런 관행을 지금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건양대는 신입생 충원율, 교수 확보율, 졸업생 취업률, 재단 회계내용 등을 학교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건양대가 ‘재단비리 없는 지방대학’으로 유명한 데는 나름 이유가 있는 것이다. 건양대는 정부가 지정한 ‘재단이 아주 튼튼한 대학’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건양대는 43개 학과ㆍ학부에 8000여 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다. 건양대는 지방대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2004년부터 지금까지 전국 최고의 취업률을 유지하고 있다. 전국 대학 가운데 최초로 독립건물 규모의 ‘취업매직센터’도 설치했다. 건양대는 2010년 교과부가 선정한 ‘전국 4년제 대학 중 가장 잘 가르치는 11개 대학’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4년 동안 매년 30억원씩 총 120억원을 지원받는다.

건양대는 교수 강의를 동영상으로 제작해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교수를 산업현장에 파견해 실무능력을 배양하도록 한다. 김 총장은 “교수가 유능해야 학생을 잘 가르칠 수 있다”고 했다.

건양대는 ‘방과 후 학습(KPPㆍ건양 파워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오후 5시부터 2시간30분 동안 수업이 진행되는데 200여 강좌가 개설돼 있다. 주로 어학, 자격증 관련 강의가 많다.

김희수 총장은 1학기에는 신입생 전원을, 2학기에는 졸업생 전원을 면담한다. 그는 지방대 학생들이 갖기 쉬운 열등의식을 없애기 위해 “하면 된다”는 말을 자주 한다.

―총장으로 꼬박 10년이 됐습니다.

“2011년 1월 31일이 임기 만료일인데 아직 할 일이 더 남은 것 같아요.”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뭡니까.

“불광불급(不狂不及)이라는 말처럼 ‘미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러줍니다. 요즘 학생들은 자신감이 없어 보여요. 어딘가에 의지하고, 어딘가에 기대려는 경향이 있지요. ‘안되면 다시 해보자’는 근성을 갖도록 합니다. 영어 단어 ‘impossible(불가능한)’에 점을 찍어보면 ‘I.m.possible’이 됩니다. 하면 됩니다. 불가능은 없습니다.”

대학 운영하면서 매일 후회해

―대학을 운영하면서 후회한 적은 없습니까.

“매일 후회하죠(웃음). 이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아요. 끝없이 투자해야 해요. 돈 없이 되는 건 하나도 없어요. 서울의 연세대나 고려대는 내가 볼 때 재벌대학입니다. 건양대의 수입은 학생 등록금과 재단에서 지원하는 돈이 전부입니다. 내가 이사장으로 있는 김안과병원에서 매년 40억~50억원을 가져와요. 그래도 턱없이 부족해요. 그래도 학생을 키우기 위해 멈출 수 없어요.”

―지방대가 살아남는 방법은.

“서울에 있는 대학과 지방대학을 똑같은 잣대로 평가해서는 안 돼요. 균형발전, 공정사회를 얘기하는데 지역에 맞는 잣대로 대학을 평가해야죠. 불평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잘 알아요. 일본 속담에 ‘억울하면 훌륭해져라’는 말이 있어요. 건양대가 잘되는 방법밖에 없지요.”

―건양대를 어떤 대학교로 만들 계획입니까.

“학생들 스스로가 자부심을 갖는 학교로 만들려고 해요. 한강 이남에서 가장 좋은 대학으로 만들어야죠. 내 자식을 가르치는 심정으로 학생들을 교육시킬 겁니다. ‘내 자식을 살피듯’ 학생들의 진로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고 있어요.”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습니까.

“명예, 돈, 시간, 사생활을 모두 버리고 열심히 산 ‘의사이자 교육자’라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총장님의 일생에는 일제강점기, 광복, 6ㆍ25전쟁 그리고 뒤이은 근대화, 산업화, 세계화의 대한민국 현대사가 녹아 있습니다. 평생을 살면서 ‘인생’은 무엇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살아보니 결국 인생은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이더군요. 사랑에는 미움도 들어 있어요. 미움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미움을 승화시켜야 진정한 사랑이죠. 나는 환자를 사랑하고 학생을 사랑하면서 오늘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